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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쟁의 불교학 (11) 사문(沙門)의 권위는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최정규
기획시리즈 - 논쟁의 불교학 11
[21호] 2004년 12월 10일 (금) 최정규 asanga@dreamwiz.com

1. 서언

불교는 인도문화를 배경으로 한다. 인도문화에 대한 설명은 다양한 측면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

인도문화의 다양성 가운데 논자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탈속적인 종교적 성향이다. 탈속(脫俗)이라는 말은 세속을 전제로 한다.

보통 일상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세상을 세속이라 하고 삶의 궁극적인 의미를 찾아 세속과는 다른 길을 가는 사람들의 세상을 탈속이라 한다. 불교도 이러한 인도의 문화적 토양에서 배태되고 성장하였다. 이러한 전통 속에서 출가와 재가의 구분이 생겨났다. 출가 승려는 재가자의 모범이었고 경배의 대상이었다. 인도는 탈속 우위의 문화라 할 수 있다.

중국의 경우는 사정이 달랐다. 중국문화는 천명(天命)에 기준을 둔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실현하는 것에 관심을 두었다. 춘추전국시대에는 수많은 사상이 대두되었다. 그 가운데 도가(道家)사상은 다른 사상들에 비하여 탈속적인 면모를 갖추고 있었지만 현실에 대한 관심을 버리고 떠난 것은 아니었다. 도가 이외의 사상들은 그 처음과 끝이 현실 문제에 쏠려있다. 이와 같이 중국의 문화와 사상은 대체적으로 현실적인 성향이 강하게 나타난다. 중국인들에게 인도와 같은 탈속의 문화는 없었다.

이질적인 문화가 만날 때, 거기에는 갈등의 소지가 있게 마련이다. 인도문화를 배경으로 성장한 불교가 중국에 유입되었을 때, 불교는 중국문화의 반발을 경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도문화와 중국문화의 만남은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주는 역사적인 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그 속에는 갈등을 통한 화해의 길이 있다. 이러한 길 가운데 하나가 혜원의 《사문불경왕자론(沙門不敬王者論)》 속에 담겨있다. '승려가 임금에게 절을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오늘날의 시각으로 본다면 별반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생각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천명의 담지자인 왕이라는 존재와 세속을 벗어나 깨달음을 추구하는 승려의 만남은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상당히 까다로운 문제를 야기하기에 충분했다.

중국문화에는 익숙하지 않은 탈속의 자리매김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의 관건이었다. 불교는 중국문화에 탈속이라는 화두를 던졌다. 일찍이 중국사상 내에서도 명교(名敎)와 자연(自然)의 관계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중국사상간의 쟁론이었으므로 이 경우와는 그 성격을 달리한다. 그러면 탈속이라는 문제가 중국문화 속에서 어떻게 풀어졌는가 하는 것을 살펴보자.

2. 쟁론의 발단과 경과

문제의 발단은 동진의 집정자인 유빙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양고승전》에 의하면 동진 영가 원년(307)에 축잠이 건업에서 왕공의 귀의를 받은 뒤 나막신을 신은 채로 대궐을 출입하곤 하였지만 제지를 받지 않았다고 한다. 그 후 귀의한 왕공들이 세상을 떠나자 축잠은 산으로 숨어 행적을 감추었다. 유빙은 이러한 축잠의 행적이 재연될 것을 우려하였다. 축잠의 행동이 불경스러웠다고 생각한 것이다. 비단 유빙만이 그러했던 것이 아니라 지배계급 일반이 유사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성제를 보좌하여 정치에 관여하고 있었던 유빙은 '사문진경(沙門盡敬, 사문은 왕에게 공경을 다하라)'의 조칙을 내렸다. 이것이 문제의 발단이었다.

유빙의 조칙이 내려지자 상서령 하충이 이에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하충의 기본적인 입장은 이 조칙이 관례에 어긋날 뿐 아니라 사문의 출세간적 위상에 반하는 것이라는 생각에 있었다. 그는 사문(沙門)의 불경왕자(不敬王者)를 옹호하였다. 유빙과 하충의 주장을 약술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유빙의 주장은 이러하다. 오랫동안 지속되어온 유교의 예법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국헌이 문란해진다. 왕과 종교를 하나로 하여 국헌이 문란해지는 것을 막아야 한다. 따라서 진나라 백성인 사문도 국헌에 따라 왕에게 예를 갖추어야 한다. 이것이 이른바 유빙의 왕교일본설 (王敎一本說)이다. 이에 대해 하충은 이렇게 주장한다.

불교의 계율은 사문이 지켜야 할 바이고, 계는 왕의 정사를 돕는 것이다. 따라서 사문이 왕에게 예를 올리지 않아도 그것이 왕의 정치를 훼손하지는 않는다. 또한 사문은 축원을 할 때에 국가의 융성을 기원한다. 이렇게 주장함으로써 하충은 유빙의 왕교일본설과는 다른 왕교이본설(王敎二本說)을 내세웠다.

유빙과 하충의 주장에는 유교의 예와 불교의 계가 병립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유교의 예는 현실 즉 세간의 사회질서를 대변하는 것이고, 불교의 계는 탈속 즉 출세간의 규범을 나타내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세간과 출세간의 문제가 '예'와 '계'라는 개념으로 압축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세간과 출세간의 관계가 예와 계의 의미설정에 의해서 정립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유빙의 입장은 유교의 예를 근거로 출세간이 세간에 귀속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하충은 출세간이 세간에 귀속되어야 하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대한 불교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개진한 것이 아니다. 하충은 출세간이 세간에 폐해를 끼치는 것이 아니므로 굳이 사문이 왕에게 공경의 예를 표하라고 강요할 필요는 없다는 소극적 변호를 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충은 유교의 예와 불교의 계가 서로 상충되는 것이 아니라 대의적인 측면에서 일치하는 측면이 있다. 따라서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사문은 왕에게 공경의 예를 표하라고 강요함으로써 문제를 야기하는 것은 평지풍파를 일으키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평함으로써 사문의 입장을 옹호했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잦아든 문제가 진나라 말기에 다시 대두된다. 재상으로서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던 환현이 사문은 왕에게 경배를 하라고 하였다. 이러한 일이 구체적으로 언제 일어났었는가 하는 것은 명확하지 않은데, 혜원은 《사문불경왕자론》서(序)에서 원흥 연간이라 적고 있다. 대략 정국이 어수선했던 원흥 원년(402)에서 진나라의 실권을 쥐고 있던 환현이 죽은 3년(403)사이에 있었던 일로 보인다.

환현은 환겸을 비롯한 몇 사람에게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적은 서신을 보냈다. '노자는 왕을 3대(三大 : 道, 天, 地)와 동일한 것으로 보아 여기에 왕을 더하여 4대(四大)라 하였다. 그것은 왕이 천지와 더불어 만물을 양육하고 세상을 다스리기 때문이다. 사문 또한 왕이 돌보아 줌으로써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다. 따라서 사문은 왕을 경배해야 한다.' 이에 대해 환겸은 '불교와 유교는 그 지향하는 바가 다르다'고 하는 의견을 개진했다. 그의 취지는 '출가와 재가의 길'이 다르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즉 출가 사문은 유교에서 비중을 두는 일상적인 충과 효에 따르지 않고 다른 길을 간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쟁논은 환현과 왕밀에게로 이어진다.

환현과 왕밀의 논쟁에서 핵심이 되는 것은 '도(道)'였다. 환현은 임금의 도는 스승의 도를 겸하지만 스승의 도는 임금의 도를 겸할 수 없다고 한다. 이에 대해 왕밀은 임금은 스승의 덕을 겸할 수 있지만 스승은 임금의 도를 겸하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왕밀은 유교의 이상적 군왕인 내성외왕(內聖外王)을 암시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즉 왕밀은 환현이 임금의 도를 언급할 정도의 자질을 갖추었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였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에 환현은 혜원에게 이 문제에 대한 자문을 구하였다. 이에 대한 혜원의 답변이 《사문불경왕자론》 5편이다.

3. 혜원의 결정과 영향

혜원은 재가와 출가의 의미를 밝힘으로써 양자를 명확하게 구별지었다. 혜원의 《사문불경왕자론》 5편은 재가(在家), 출가(出家), 구종불순화(求宗不順化), 체극불겸응(體極不兼應), 형진신불멸 (形盡神不滅)으로 되어 있다. 논의의 전개로 볼 때, 혜원의 궁극적인 취지는 불타의 열반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혜원의 입장은 세간에 대한 출세간의 우위로 전개되었다.

혜원은 재가와 출가를 명확하게 구분한다. 재가는 왕권의 영향력 아래에 있지만 출가는 왕권과는 무관하다는 것을 주장한다. 그 논의의 가운데에 '육신의 생존 문제'가 주요 제재로 등장한다. 혜원은 '생존 문제'가 재가자에게는 중요한 사안이지만 출가자에게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언급한다. 출가자에게는 생존이 윤회의 한 고리이므로 극복해야할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불교의 12연기설에 비추어본다면 온당한 지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충이 불교의 계와 유교의 예가 동일한 내용을 갖고 있으므로 사문이 왕에게 경배를 하지 않아도 문제가 될 것이 없다는 취지의 소극적 변호를 한 것에 비추어 본다면 혜원의 논의는 적극적인 논변임을 알 수 있다.

출가 사문은 생사의 고리를 끊고 해탈하고자 수행을 하는 사람이므로 현실적인 왕권과는 무관하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그렇다고 하여 혜원이 속세의 왕권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도 하충의 경우와 같이 왕권을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혜원의 다음과 같은 말이 이를 대변한다.

"속세에서는 윗사람을 받들고 부모님을 공경하라는 충효의 의리는 불교 경전에도 나온다."1) 處俗則奉上之禮, 尊親之敬, 忠孝之義, 表于經文.({弘明集}, [答桓太尉書])

불교 경전에서 충과 효를 언급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전무한 것은 아니지만 왕에게 경배하라는 내용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몇몇 경전에서는 왕이 출가 사문에게 경배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으며 이것이 일반적인 경향이라고 할 수 있다.

혜원은 속세의 규범을 인정하였다. 혜원의 일차적 선택은 세속의 왕권을 긍정하는 것이었다. 다만 그는 속세의 왕권이 미칠 수 있는 한계를 명확히 하고자 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혜원은 재가와 출가를 구분하였다. 그는 속세와의 관계를 끊은 사문에게 왕을 경배하라고 하는 것은 속세와의 연을 다시 이으라고 강요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이미 삭발을 하고 세속을 떠난 사문에게 '진경왕자(盡敬王者)'는 출가를 포기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즉 사문이 추구하는 것은 세속의 왕권이 아니라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되는 것이므로 그 지향하는 바가 같지 않다. 따라서 재가와 출가를 동일 지평에 놓으려고 하는 것은 온당한 처사가 아니라는 것이 혜원의 논지라 볼 수 있다.

이러한 혜원의 주장은 '구종불순화(求宗不順化)'에 의해 뒷받침된다. 혜원의 표현에 따르면 구종(求宗)의 종(宗)은 불교의 열반을 의미하고 순화(順化)는 왕의 통치에 따르는 것을 뜻한다. 헤원이 말하는 열반은 부처가 되는 것이다. 혜원은 출가 사문이 부처가 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주어 혜택을 베푸는 것은 국왕의 선정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혜원이 왕의 통치권을 넘어서는 곳에 출가 사문의 자리를 마련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혜원의 이러한 주장은 자칫 왕권과의 마찰을 불러올 소지가 적지 않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점이 '사문진경왕자(沙門盡敬王者)'와 '사문불경왕자(沙門不敬王者)'의 갈림길이었음을 상기한다면 쟁론은 이제 그 결론에 도달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혜원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형과 신의 문제로까지 논의를 확대하여 세속의 왕권이 미치는 범위가 보잘 것 없음을 넌지시 알려주고 있다. 마침내 환현은 이와 같은 혜원의 주장을 수용하였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의 쟁의가 있었지만 혜원의 주장이 기조를 이루었다.

'사문불경왕자'라는 문제를 둘러싼 논쟁의 전개과정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점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 왕과 사문의 관계 설정에 중국과 인도의 문화적 상이함이 작용하고 있지만 동시에 유사성도 개재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점은 이후 중국사상에서 유·불·도 삼교의 동일성을 추구하면서 상당한 진전을 이루게 된다.

우선 불교의 전륜성왕과 유교의 내성외왕이 그것이다. 전륜성왕은 부처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세속의 왕이다. 위대한 세속의 왕이 전륜성왕이라면 인류의 큰 스승이 부처이다. 유교의 내성외왕을 이와 유사한 것으로 지목할 수 있다. 유교는 성인의 덕을 갖춘 군왕을 가장 이상적인 통치자로 생각한다. 여기에 불교를 접목시킨다면 깨달음을 얻은 군왕이 내성외왕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출가 사문의 지향인 부처와 유교의 이상인 내성외왕이 접점을 이룰 수 있다. 실제로 혜원은 유교와 불교의 취지가 동일하다고 주장한다. 이런 맥락에서 왕이 곧 부처라는 논의로 전개될 수도 있다. 그러나 혜원의 취지는 왕이 아니라 부처에 있었다. 불교의 문화적 배경인 인도의 경우에는 왕보다는 승려가 상위 계급에 속한다. 따라서 혜원의 '사문불경왕자론'은 외성보다는 내왕이 비교 우위를 점할 수 있는 논거를 마련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다음으로는 유교의 선비 즉 유자와 불교의 사문이 갖는 위상의 유사성이다. 모든 백성은 왕에게 경배해야 한다는 '사문진경왕자론'의 입론의 근거는 유교의 예에 있었다. 그런데 예의 표준적 전거라고 할 수 있는 『예기』 [유행]편에 이런 말이 나온다.

"유자(儒者)는 위로는 천자의 신하가 되지 않고 아래로는 제후를 섬기지 않는다." 2) 儒有上不臣天子. 下不事諸侯.({禮記} [儒行]).

이에 대해서는 천자의 신하가 되지 않는다는 것과 왕에게 경배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 동일한 문제인가 하는 것을 검토해야 할 필요가 있겠지만 적어도 위의 글은 통치자에 대한 유자의 독립성을 천명하고 있다. 임금과 신하의 예를 중요시하는 유교에서도 유자의 독립성을 주장한다. 이에 비추어 볼 때 세속을 떠나 깨우침을 구하고자 하는 출가 사문의 경우 그 독자성을 설파하는 것이 무리는 아니었다고 볼 수 있다. 왕의 입장에서도 그러한 주장을 수용하는 것이 크게 주저되는 바는 아니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4. 사문의 자리

'사문불경왕자론'에 나타난 세속과 탈속의 쟁론 속에서 우리가 유념해야 할 점은 무엇일까? 그리고 그것의 현재적 의미는 어떤 것일까?

우리나라의 경우 이러한 쟁론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세속과 탈속의 자리매김이라는 문제를 유교와 불교의 대립으로 확대한다면 많은 예를 찾을 수 있다. 특히 성리학을 국가의 지도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시대에는 불교를 겨냥한 글들이 많았다. 그 가운데 정도전의 《불씨잡변》은 대표적인 경우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글들은 불교사상 자체에 대한 구체적인 논변이므로 '사문불경왕자론'과 동일시 하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조선시대에 출가 사문의 사회적 입지와 위상이 이와 같은 논변에 의해 결정되었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사문불경왕자론'의 논지에 따른다면 사문의 자리는 어디일까? 즉 세속의 왕에게 경배를 드리지 않아도 괜찮은 사문의 위상은 어디에 근거를 두는 것일까? 위에서 살펴본 바에 따르면 그것은 사문이 추구하는 것이 세속과 다르기 때문이며 세속의 왕권이 미치는 범위를 벗어나기 때문이다.

혜원의 표현에 따르자면 그것은 '구종'이다. 사문의 특수한 위상은 '구종' 즉 '열반을 구하는 것', '부처를 추구하는 것'에 의해서 보장된다.

'구종'의 문제는 곧 '수행의 문제'이다. 사문은 수행을 함으로써 세속의 길잡이가 될 수 있다. 세속은 이 점을 높이 평가하고 적극적으로 인정한다. 불교가 발생한 인도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세속의 왕보다 승려가 상위의 계급에 속하는 것이 이러한 사실을 잘 보여준다. 따라서 사문이 수행의 문제를 소홀히 했을 때 세속의 비난과 지탄을 받는 것은 물론이다. 이러한 예는 우리나라와 중국의 역사를 통해 다수 확인할 수 있다.

사문과 구종의 관계는 시대를 초월하는 문제이다. 현대에도 이 문제는 조금도 소홀히 할 수 없는 문제이다. 구종에서 사문의 바른 자리를 찾는 혜원의 주장은 그가 결성한 백련결사에 의해서 당당한 설득력을 갖는다. 이 점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혜원의 결사는 북방불교 역사상에 나타나는 최초의 결사이다. 혜원이 추진한 결사는 당시의 상황에서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었을 수도 있다. 백련결사는 성공적인 성과를 낳은 종교 공동체로 평가할 수 있다. 이후의 모든 결사는 여산의 동림사 백련 결사를 모범으로 삼았다. 혜원의 백련결사가 성공할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결사의 성공이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이것은 사문과 구종의 관계가 갖는 의미와 직결되는 문제이다. 혜원은 여산의 동림사에 머물기 시작한 이후 입적할 때까지 30여 년 동안 단 한차례도 산문을 나선 적이 없다고 한다. 이것이 결사의 원동력이었다. 수행을 하고자 하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여산의 동림사에 모여들었다.

이렇게 하여 구종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다. 구종의 과정 또한 엄격하고 진지했다. 혜원이 머물고 있던 여산의 동림사는 세속의 모범이 되고 존경을 받기에 충분한 곳이 되었다. 혜원이 주장한 '사문불경왕자론'이 현실적인 결실을 맺었던 것이다. 환현도 이에 굴복한 것이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지나친 평은 아닐 것이다. 《고승전》<혜원>조에 보이는 환현의 다음과 같은 말은 이러한 평가에 충분한 근거를 제공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사문은 경전의 가르침을 베풀고 그 뜻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혹은 계율을 닦아 바른 행동으로 큰 교화를 널리 펼 수 있어야 한다. 이것에 위배됨이 있는 사람은 모두 집으로 돌아가도록 하라. 오직 여산만은 도와 덕이 있는 곳이니 수색하지 않아도 좋다."3) 대정장, 제50권, 360쪽 b. 19~22

환현이 말하는 여산은 혜원이 머물고 있었던 동림사를 말한다. 혜원이 주석하고 있던 여산의 동림사의 사문들만은 사문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것이 환현의 판단이었던 것이다. 환현의 기준에 의하면 '경전에 통하고 계율을 지키는 것'이 출가 사문의 기본적인 면모라는 것이다. 이러한 판단은 오늘날에도 동일한 의미와 구속력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의 논의에 따른다면 출가 사문의 자리는 세속과는 다르다. 이것은 구종에 근거한다. 구종의 구체적인 모습은 수행이고, 수행의 1차적인 면모는 계율을 지키는 것과 독경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계율이나 독경과 같은 구체적인 세부사항에 대해서는 이의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이건 그것은 '구종을 위한 행위'라는 목적범위를 벗어나서는 아니 될 것이다. 목적범위를 벗어나는 것은 사문의 자리를 떠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환현의 말을 빌려 표현하자면 그것은 '집으로 돌아가는 것' 즉 환속을 의미한다.

혜원의 '사문불경왕자론'은 승려가 임금에게 경배를 해야 하는가 아니면 하지 말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단순한 주장이 아니었다. 그것은 사문의 바른 자리를 찾고자 하는 신중한 모색의 산물이다. 혜원의 시대에 요구되었던 사문의 바른 자리와 오늘날에 요구되는 그것이 다른 것일까? 환현이 감행한 불교사태 속에서도 혜원의 동림사는 무사했다. 이것은 혜원의 동림사가 사문의 바른 자리에 있었음을 말해준다.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걸쳐 사문의 자리에 대한 시비가 일었었다. 이것은 당시에 사문이 바른 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대변한다. 이러한 시비는 불교사상 자체에 대한 논의로까지 비화되었지만 그 시작은 출가 사문의 바른 자리에 대한 논의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는 간과할 수 없는 점이 담겨있다. 우리가 종종 과거의 쟁론을 들추어내서 반추해보는 까닭은 그 쟁론의 시비를 다시 가려보고자 하는 뜻도 있지만 다른 의도는 그 속에서 현재를 보고자 하는 것이다.

혜원의 '사문불경왕자론'과 '백련결사'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출가 사문이 세속의 왕에게 경배를 하지 않는 것은 열반과 해탈을 향한 진지한 실천에 의해서 담보된다는 것을 우리는 혜원의 경우에서 확인할 수 있다. 즉 사문의 구도행이 재가자에게 실질적인 교훈과 모범이 되는 것이라 하겠다. 또한 이 지점에서 출가 사문은 세속과의 진정한 만남을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닐런지!

최정규
고려대 철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철학박사. 현재 고려대 강사이며 증산도사상연구소 연구위원. 〈무착(無着) 유식철학의 연구〉 〈阿賴耶識의 의미구조〉 〈무아(無我)에 대한 일고찰〉 《논쟁으로 보는 불교철학》(공저) 등의 논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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