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식 대각사상연구원 연구부장

1. 서언

1954년 5월, 불교정화를 요망하는 이승만의 ‘담화’로부터 촉발된 이른바 불교정화운동은 당시 불교계의 큰 파장과 혼란을 가져왔다.

비구·대처승 계열로 나뉘어 각기 종단의 주체임을 강조하면서 종권을 장악하기 위한 치열한 갈등과 대립으로 전개되었던 정화운동은 1962년 4월 통합종단의 출범으로 일단락되었다.

정화운동은 한국불교 전통의 회복이라는 긍정적인 성과를 도출하기도 했지만 종단 내부의 수많은 문제점을 잉태시키기도 했다. 통합종단은 정화운동 8년간 잉태된 갖은 모순과 문제점으로 인하여 출발 당시부터 적지 않은 난제에 직면하였다. 통합종단이 맞은 첫번째 도전은 비구·대처승의 종회의원 비율의 불만에서 나온 대처측의 종단 탈퇴이었다. 대처측의 종단 탈퇴는 1962년 9~10월 종단 간부의 퇴임, 별개의 종단 총무원 설립으로 이어졌다.

두번째 도전은 1963년 11월 조계종 전국신도회의 ‘조계종단 혁신재건안(曹溪宗團 革新再建案)’으로 요약되었던 종헌(宗憲) 개정의 요구였다. 당시 전국신도회는 진정한 정화운동 정신의 구현 및 명실상부한 사부대중에 의한 종단 운영을 요구하였다.

전국신도회가 혁신재건안을 작성·제출한 배경에는 승려 중심의 종단 운영에 대한 강한 불신이 개재되어 있었다. 또한 그 이면에는 전국신도회에 소속된 재가 불자들이 정화운동에 적극 동참으로써 종단의 재건 및 불교의 발전을 고대하였던 기대가 무산되고 있다는 현실인식도 있었다. 조계종단 내부로부터의 이같은 문제 제기는 심각한 현상이 아닐 수 없었다. 요컨대 통합종단의 존립 및 정체성을 근본적으로 뒤흔든 사건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에 본고에서는 조계종 전국신도회가 작성하여 종회에 제출한 ‘조계종단 혁신재건안’에 관련된 제반 내용을 정리, 분석하고자 한다. 이로써 우리는 통합종단 출범 직후의 조계종단의 내적인 모순과 한계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조계종단은 수많은 갈등과 분규를 겪었다.

그런데 그 분규가 심각하거나 혹은 종단의 운영과 진로를 개혁적으로모색하였을 경우에는 종단의 개혁과 활성화 차원에서 재가 신도의 종정(宗政) 참여의 문제가 늘상 거론되었다. 바로 우리는 여기에서 재가 신도의 종정 참여 문제가 제기된 것이 40여 년이나 되었는데, 왜 어떤 연유로 현실에 반영되지 않았을까 하는 의구심에 사로잡히게 된다.

본고는 바로 이같은 궁금증을 해소하는 데 다소나마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며, 전국신도회의 종단 혁신재건안의 이해뿐만 아니라, 통합종단의 내적인 모순과 과제 그리고 나아가서는 1970~90년대 조계종단사를 이해하는 하나의 단서로도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2. 전국신도회와 혁신재건안의 제출 배경

조계종 전국신도회는 정화운동이 본격화되었던 1955년 6월 1일, 조계사내의 회관에 사무실을 설치함으로써 불교계에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러나 당시는 정화운동이 가열화되던 시기였기에 정상적인 창립으로 보기에는 문제점이 적지 않았다.1)

창립 총회가 그해 11월 29일에 개최되었음은2) 그 단적인 예증이다. 그 이후 전국신도회는 정화운동이 지속되면서 단체로서의 활동이 점차 정상화되었을 것이다.

전국신도회가 조계종단의 대표적인 신도단체로서 종헌·종법 차원으로 인정받고, 문교부에 단체 등록이 종료된 시점은 1963년 9월 30일이었다. 그 후 전국신도회는 중앙간부 취임식을 10월 20일 조계사 대웅전에서 갖고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이러한 경과를 정리하여 그 개요를3) 제시하겠다.

전국신도회가 종단 차원으로 공식 인정·관리받게 된 것은 1962년 10월 15일에 제정·공포된 교도단체보호령에서4) 비롯되었다. 이 교도단체보호령으로 인하여 조계종은 그 산하에 4개 신도단체 즉 대한불교조계종 전국신도회(황의돈)·대한불교 마야부인회(장봉옥)·대한불교청년회(김법린)·대한불교달마회(이창호)를 공식 인정하였거니와 때는 1962년 10월 말이었다.5) 보호령은 당시 총무원이 신도회 육성을 위하여 긴급 종령으로 시행한 것이었다.

그 후 이 보호령은 1962년 12월에 개최된 제2회 중앙종회에 종법으로 승격시키기 위한 안건으로 상정되었지만,6) 종회 내의 교화·법규분과위원회에서 심의를 거치도록 하여 차기 종회로 이전되었다.7)

그리하여 1963년 2월 28일에 개회된 제3회 임시중앙종회에서 ‘신도단체법’으로 통과되었던 것이다.8) 통과된 신도단체법은 기존 전국신도회의 역사를 인정하면서, 전국신도회가 명실상부한 조계종의 최상위 신도단체로 그 위상을 확립케 하였다. 그런데 신도단체 법은 “본 법 시행 후 3개월 이내에 중앙기구의 임원을 개선하여야 한다.”는 내용을 부칙의 경과조치에 명시하였다.

당시의 신도단체는 이같이 종단에서 제시한 방향을 유의하였을 것이다. 신도단체법이 제정된 바로 그날인 1963년 2월 28일 4개 신도단체 대표는 회합을 갖고 신도단체 통합을 협의하였다. 이 회합에서는 전국신도중앙대의원대회를 7월 28일에 개최할 것을 결정하였다.9) 이 대회에서는 비구측 중심의 정화운동을 지지하는 결의문이 채택되었으며10) 전국신도회 중앙본부의 회장 등 15인의 중앙집행위원이 선출되었다.

이날 선출된 집행위원은 8월 14일 당시 종정인 이효봉으로부터 취임 인준을 받고 취임 선언도 하였다. 전국신도회는 1963년 9월 30일자로 문교부장관으로부터 단체 등록증을 교부받아 정식 출범하였다. 이러한 제반 절차를 거친 중앙신도회는 1963년 10월 20일 조계사에서 중앙간부11) 취임식을 갖기에 이르렀다.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전국신도회는 조계종단 내 신도 및 신도단체를 대표하는 주요한 단체였다. 여기에서 우리가 유의할 내용은 전국신도회가 정식으로 출범한 지 불과 1개월 후에 ‘조계종단 혁신재건안’을 작성·제출한 배경인 것이다. 물론 1955년 6월부터 신도회가 활동한 역사와 전통을 고려할 수도 있지만 종단 4개 단체가 통합을 거친 직후의 행보로서는 납득하기 어려운 점이 많다.

이는 물론 다음 장에서 상술하겠지만 정화운동의 부정적인 측면에서 나온 파행과 모순의 극복이었을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정화운동 정신의 퇴색과 승려 중심의 종단운영이라는 문제였던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문제점을 구체적으로 인식한 계기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이는 추정하건대 1960년 4·19혁명 직후 위기감을 느낀 조계종 내부에서 제기된 종헌 개정의 결의로 볼 수 있다. 4·19혁명은 결과적으로 이승만의 퇴진과 일정한 이승만의 후원을 얻어 진행된 정화운동의 진로에 적지 않은 변화를 야기하였다. 이에 비구측은 정화운동의 지속을 강조하였지만12) 변화된 현실에 힘을 얻은 대처측의 반격 등으로 수세에 몰리고 있었다.

이같은 현실하에서 비구측은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냈거니와 그는 다름 아닌 종헌 개정 즉, 상원은 출가대중 하원은 재가대중으로 구성하는 상·하 양원제였다. 비구측의 조계종단은 1960년 5월 20~23일 제16회 임시중앙종회를 개최하여 이같은 종헌 개헌을 실시하겠다는 결의를 하였다.13)

그 직후 조계종단은 상하양원제에 대한 법적인 후속 조처를 단행하였다. 즉 6월 17일자로 ‘대한불교조계종 종회 하원 법규’를 종법으로 공포하였다. 종법의 공포와 동시에 하원을 7월 25일 이내로 구성하여 8월 초부터는 정식 출범시키겠다는 계획을 발표하였다.14)

비구측의 이같은 시도는 물론 대처승을 포섭하기 위한 시도이자 대의명분의 성격이 다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간단치 않은 것이었다. 그리하여 당초 출범시키기로 정한 8월 초에도 하원은 구성되지 못하였다. 이에 8월 16일 개최된 제1회 상의원회에서도 기존 방침을 확인하는 데 그쳤던 것이다.15)

그러나 하원 구성은 1960년말까지도 전혀 진척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국신도회는 1961년 3월 25~26일 조계사의 정화기념관에서 제4차 전국대의원대회를 개최하여 이 문제를 정식으로 토의하였다.16) 이 대회에서 토의된 주요 안건은 정화과업 촉성, 신도회 헌장 실천, 산하단체 등록, 신도재교육 등이었다. 특히 정화과업 촉성의 건은 지방 대표가 연서로 제안한 ‘정화과업 완수와 교단재건안’이었다.

이 안은 10인 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치열한 토의를 거쳐 가결되었으며, 조계종단의 총무원장, 3부장, 이청담 등이 입회하였다. 또한 그 안을 조속히 실시하자는 합의도 있었다.17) 이같은 배경에서 나온 재건안의 요지는 분쟁을 종결시키고 교단을 재건하려면 비구·대처간의 대결에 앞서 비구승단만이라도 진정한 불타의 근본 정신과 시대에 부응하는 합리적인 제도에 입각한 교단 운영을 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같은 전제하에 제시된 방안은 다음과 같다.18)

① 사부중은 각기 근본 사명을 철저히 자각하고 수행함으로써 정화과업이 완수되고 교단이 재건된다.
② 종권(宗權)은 영도권(領導權) 운영권(運營權) 2종으로 나누는바 영도권은 출가승단이 전담하고 운영권은 재가중이 분담한다.
③ 사찰재산관리법을 제정하되 사찰재산은 문화재 사유재(寺有財) 2종으로 나누어 각각 그 관리법을 제정하여 문화재는국가적으로 보호관리를 받게 하고 사유재는 특수한 관리법을 제정하여 그것을 어느 개사(個寺) 주지나 기타 누구나가 무의미 무가치하게 소비되는 일이 없고 오직 삼보외호 교육 포교 등 사업에 유효적절하게 운영되도록 공공단체법을 제정해야 한다. 따라서 교단이 재건되고 불교가 부흥되는 기초가 되게 하는 것이다.

이 방안의 핵심은 종권을 영도권과 운영권으로 구분하여 재가신도가 종정(宗政)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한 것이다. 또한 사찰재산관리법의 제정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사찰재산을 문화재와 사유재로 구분한 것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러한 전제하에서 우선은 이미 종단 차원으로 결정한 상·하 양원제를 조속히 실시하여 이를 구체화할 것을 강조하였다. 이같은 안은 당시 그 회에 참석한 총무원측도 찬동하였으나 그 실행은 적절한 순서를 밟도록 하였다. 그를 위해서는 우선 하원 의회를 4월중까지 소집할 것과 서울의 조계사, 대구의 대안사, 부산의 대각사의 사찰을 사부중의 분한과 임무를 정하여 시범적으로 실행할 도량으로 총무원측과 합의하였다.19)

이러한 방안이 신도회 차원에서 수립되고 그것을 종단 집행부인 총무원측에서 동의하였다는 것은 적지 않은 의의가 있는 것이다. 물론 대처승 포섭이라는 명분에서 출발한 것이었지만 그 이면에는 종단운영과 사찰재산 관리에 상당한 문제점이 있음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신도회와 총무원이 합의한 하원 의회를 약속한 4월 이내로 구성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약속은 이행되지 않았다. 이럴 즈음 1961년 5월에는 5·16 군부쿠데타가 발발하였다.

이 쿠데타 발발은 정화운동 및 본 고찰에서 살피고 있는 전국신도회의 교단재건안 이행에도 일정한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이와 관련된 사정을 살필 수 있는 것은 동년 6월 11일에 개최된 제18회 임시종회의 결의 내용이다. 5·16 직후 처음으로 개최된 그 종회의 토의 안건에는 ‘정화촉진을 위한 진정서 채택의 건’이 포함되었다.

현재 전하는 기록에는 그 진정서 제출의 주체와 진정서의 내용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 그 안건 처리를 알 수 있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전한다. 진정서는 원안(原案)을 담당 부에서 대폭 수정하여 행정부에 일임하기로 합의하였다.20)

이 내용을 당시 종단 내외의 전후사정과 관련지어 고려해보면, 전국신도회가 그 진정서 제출의 당사자로 추정된다. 현재로서는 그 원안의 내용과 개요도 파악할 수 없어 더 이상의 추론은 불가능하다. 다만 원안을 대폭 수정하였다는 것을 보면 신도회의 주장과 종회의 입장은 상당한 차이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신도회가 발의한 교단재건안에 관련된 내용은 사료에 전하지 않는다. 이는 신도회가 제기한 재건안의 요점이 종단 및 전체 승려층에서 수용하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또한 5·16 이후 급변하는 종단 정세 등으로 인하여 그 문제에 전념할 여건이 되지도 못하였을 것이다. 당시 군부는 정화운동을 ‘분규’로 인식하고, 그 해결을 위해 강력한 의지를 표명하였다.

이에 정화운동의 근원부터 재검토할 현실에 직면하였기에, 조계종단은 종권의 장악 및 유지, 그리고 정화운동의 당위성을 지속시키기 위한 노력을 경주할 수밖에 없었다. 군부의 정화운동에 관련한 정책과 그 성격은 별도로 고찰되어야 하겠지만, 비구측의 조계종단은 종단의 안정 및 종권 유지라는 긴박하고 절박한 현실하에서 신도회가 제기한 문제를 처리할 여유가 없었을 것으로 이해된다.

물론 4·19 이후 등장한 양원제가 대처승 포섭이라는 명분에서 나왔음을 고려하면, 그 이후 양원제로의 이행 구도는 순조롭지 못하였던 사정은 자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 이럴 즈음 신도회의 노선 및 정화운동의 논리를 제공한 것으로 이해되는 이종익은 통합종단이 출범하기 직전인 1962년 1월경 〈대한불교〉에 자신의 입장과 이전 신도회에서 제기된 논리를 개진하였다. 이종익은 신도회의 중앙지도위원이었기에 그의 입장은 은연중 신도회의 논리를 대변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21)

그 요지는 불교정화는 진정한 출가승단을 구현하되 사부중의 명분을 분명히 하면서, 출가자와 재가자의 본분과 임무를 나누고, 종권은 영도권과 운영권으로 나누며, 이를 위해서 상하 양원제를 운영하며, 사부중의 신행 계위(階位)와 그 자격 규정을 두자는 것 등이었다. 이 내용은 그 제목인 ‘불교재건론’에서 시사되듯이 이전 신도회에서 결의한 교단재건안의 지속이라고 볼 수 있다.

이종익이 그 내용을 기고한 것은 변화되고 있는 종단 현실을 직시하면서 교단재건안을 현실화시키려는 강한 의욕에서 나온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신도회의 입장과 논리의 수용은 간단치 않았다. 이는 통합종단의 종헌에서도 구체적으로 반영된 것은 거의 없었다는 것에서 짐작이 된다. 이는 통합종단을 주도하였던 국가재건최고회의와 문교부 즉 공권력의 입장에서는 비구·대처의 갈등과 분규를 해소시키는 것이 최우선이었기에 신도회가 제기한 내용은 검토할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22)

요컨대 신도회의 논리는 종단 내부에 토착화할 여건 자체가 없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같은 사정은 통합종단이 출범한 1962년 4월 이후에도 지속되었을 것이다. 더욱이 1962년 8월의 종회의원 숫자(비율)에 불만을 품은 대처측의 이탈은 종단을 더욱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해 10월경 조계종단 신도회가 종단 차원에서 강화될 현실이 도래하고, 1963년 9~10월 전국신도회가 종단 승인 및 문교부 등록을 계기로 더욱 확고한 위상을 가지면서 이전의 문제를 다시 제기할 가능성이 높아졌을 것이다.

또한 1963년에 접어들면서 조계종단을 주도하고 있었던 비구측은 점차 현실에 안주하는 구도로 접어들고 있었다. 바로 이같은 여건, 즉 전국신도회의 위상 변화와 조계종단의 안주가 1963년 11월에 가시화된 조계종단 혁신재건안 작성·제출의 배경으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3. 혁신재건안의 내용과 성격

전국신도회는 증대된 위상을 배경으로 하여 종단의 안주, 나아가서는 정화운동의 모순을 개선하기 위한 발걸음을 내디뎠으니 1963년 11월 17일의 중요도시 대표자 대회의 개최가 그 시발이었다.23)

당시 그 대회에는 전국의 7개 시도 대표 20여명이24) 참가하였다. 대회에서는 부산·대구·광주·청주의 각 대표가 종단의 건의안을 제출하였으며,25) 그 건의안을 검토·종합하여 전국신도회의 이름으로 종단에 건의하기로 결의하였다.

또한 각 시도의 신도 대표는 대한불교 조계종 혁신재건위원회를 구성하고26) 종단의 ‘일대혁신방안’을 의결함과 동시에 그 의지를 담은 결의문을 작성하였다. 현재 각 시도 대표가 제출한 건의안은 전하지 않아 그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다. 그러나 그 내용은 신도회가 각 건의안을 종합한 결의문 및 혁신방안에 포함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우선 결의문27) 전체를 제시하겠다.

① 우리는 대한불교 조계종도로서 본종의 획기적인 혁신재건을 기도코저 본회에 상정된 대한불교 조계종 혁신재건안을 채택하여 순차적으로 실현키로 한다. ② 전항의 목적을 수행하는 당면과제로서 현하(現下)의 구호상으로 사부중 종단이고 실질상으로는 출가중 독선주의로 운행되는 이부중 종단을 금후 명실공히 사부중의 총의로서 운행되는 합리한 종단으로 개편한다. ③ 전 1, 2항의 주장을 실현하기 위하여 현행 조계종헌을 개정하여 재가중의 종정 참여권을 삽입하고 종회원 및 행정·감찰기구에 참여한다. ④ 전국 각 사찰에는 적당수의 신도 총대(總代)를 두어 사원운영회에 참가하며 종단 일체 공유재산 및 사찰 교당 등 재산 처분은 중앙신도회의 합의하에 행하되 그 처분에는 반드시 공고 경쟁입찰제를 행한다. ⑤ 사찰 주지 및 포교당 포교사는 해(該) 사찰 및 포교당 신도회의 합의하에 종정이 차를 임면한다. ⑥ 이상을 실시키 위한 헌법 개정안을 채택한다. ⑦ 이상의 안건은 1963년 11월 18일 개최되는 중앙종회에 건의하여 채택 시행케 하되 만일 거부될 시는 우리 전국 신도는 총궐기하여 이 일이 관철될 때까지 계속 투쟁을 전개한다. 이상과 같은 결의문의 요지는 곧 사부중에 의한 종단 운영이라 하겠다.

이 대안은 우선 기존 종단의 운영이 출가 승려(二部衆: 비구·비구니) 중심이고 독선주의적이라는 비판에서 나온 것이다. 이에 그를 극복할 대안의 요체는 재가중(신도)의 종회 진출, 행정·감찰기구에 참여, 단위 사찰운영 및 재산처분에 참여, 포교사 임면의 동의 등으로 정하였다. 그리하여 이같은 내용을 종헌의 개정을 통하여 반영시키겠다는 것이었다.

이 내용은 신도회가 4·19 직후 제기한 교단재건안의 개요를 계승한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일부 내용은 더욱 보완되기도 하였다. 이는 역설적으로 교단의 모순이 더욱 심화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라 하겠다. 이제부터는 ‘혁신재건안’을 구체적으로 살펴 보겠다. 이 재건안의 전문은 현재 전하지 않는다. 다만 그 요지는 전하고 있는바,28) 다음과 같다.

  • 1600년간, 민족 도의생활과 정신문화의 원천이 되어 온 한국불교(조계종단)를 신재건함으로써, 오늘날 국가재건 민족재생의 역사적 과업에 이바지함을 그 근본 사명으로 한다.
  • 정화운동을 진정한 구국제세의 불교 재건운동으로 전환시켜
  • 불교재건운동으로서 우리는 먼저 앞으로 진정한 수도승단을 수립하고 밖으로 국가와 시대가 갈망하는 대중불교를 실현하며
  • 전항의 과업을 수행하기 위하여 우리는 불타교제(佛陀敎制)와 역사적 전통에 합치되고 또한 민주원칙과 시대적 요청에 적응하는 새로운 종단을 수립하여
  • 합리적인 종단을 수립하는 기본 원칙으로서 지난날의 구호에 그친 사부중 종단을 명실상부한 사부중의 종단으로 개편하며
  • 출가중은 전심(傳心)수도 전심도생의 근본 임무를 수행하는 것을 그 성직으로 하는 승단을 구성하고
  • 각산 대찰은 급속히 삼학(戒·定·慧) 전수도량을 확립시키고 적어도 10년 이상 전심수도하지 않은 출가중은 세속 변사(邊事)를 돈단(頓斷)하고 재입산 수도를 하여야 하며
  • 재가중을 재교육 재수련시키어 이리 행원(自利·利他)을 실천함으로써 국민도의 재건, 복지사회건설의 복국리민(福國利民)운동에 이바지한다.
  • 이런 역사적 과업을 완수하기 위하여 현재와 같이 극단의 보수적 소아 독선적인 출가중 독단의 반쪽 종단을 근본적으로 개혁하여 원융한 종단을 재건해야 한다.
  • 이를 위하여 신도 출신의 종회의원의 의석이 확보되어야 한다.

이상과 같은 혁신재건안의 요지는 위에서 살핀 결의문의 성격을 확대 보완한 것으로 이해된다. 이 내용과 성격을 대별하여 더욱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불교정화운동에 대한 비판적 계승의 성격이 있다. 정화운동이 일어난 10여 년 간의 변동을 비판하면서도 정화운동의 당위성은 수긍하였음을 말한다. 그러나 정화운동은 지속하되 단순히 대처승의 배척이나 비구승의 종권 장악 위주의 성격을 극복하고 불교 재건운동을 지향하려고 한 측면이 나타나고 있었다 하겠다.

둘째, 정화운동의 비판적 계승인 불교 재건운동의 노선을 진정한 수도승단의 수립과 시대가 갈망하는 대중불교의 실현에 두었다. 진정한 수도승단의 수립은 당시 비구측 중심의 종단 장악은 인정하되 그 종단의 성격을 수도·수행하는 승려가 중심이 되어야 함을 강조한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대중불교의 실현에 있었서는 기존 조계종단의 한계를 비판한 것인바, 이는 당시 이른바 대처측에서 그들의 입장과 논리를 표방한 것이었다.

셋째, 새롭고 합리적인 종단의 기본 원칙은 명실상부한 사부중 종단의 성립에 두었다. 이 점은 신도회가 이전 1960년 당시의 개혁안에서부터 강조한 것이었는바, 이 재건안에서도 그 성격은 지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넷째, 합리적인 종단을 운영하는 주체인 사부중 즉 승려와 신도의 재수도·재교육·재수련을 당연한 사항으로 전제하였다. 이는 종단 주체의 재교육의 필요성을 들고 나왔음을 말하는 것이다. 승려의 재수도는 정화 과정에서 정상적인 교육 없이 승려가 된 부류의 자질을 문제시한 것이었다. 신도의 재교육은 기복불교를 지양하면서 동시에 교육을 이수한 대상자만이 종단 운영에 참여해야 한다는 원칙을 제시한 것이다.

다섯째, 기존 종단 운영의 혁신과 합리적인 종단의 건설을 위해서는 결국 기존 종단을 근본적으로 개혁하며 동시에 원융한 종단을 재건해야 함을 역설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논리와 입장을 구현하기 위한 첫번째 단계를 신도 출신의 종회의원의 확보에 두었다. 지금껏 전국신도회가 제기한 조계종단 혁신재건안의 개요와 그 성격을 일별하여 보았다. 그 내용은 4·19 직후의 재건안보다 더욱 발전되고, 세련된 것으로 보여진다.

이는 신도회의 종단 혁신에 대한 고민·연구가 장기화함에 따라 그 대안이 더욱 정비되었음을 의미한다 하겠다. 그러나 문제는 이같은 혁신재건안이 기존 종단 즉 승단에서의 수용 여부에 달려 있는 것이다. 신도회가 최우선 과제로 설정한 신도의 종회의원 진출도 우선 그에 관련된 종헌이 개정되어야 가능한 것이다.

여타 대안도 그 점에 있어서는 마찬가지였음은 재론할 나위가 없는 것이다. 이에 신도회는 이같은 내용을 해결하기 위하여 1963년 11월 18일에 개최된 제5회 정기 중앙종회에 건의서를 제출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전국신도회가 주요도시 대표자대회의 일정을 11월 17일로 설정한 것도 사실은 이같은 측면을 인식한 것에서 나왔을 것이다. 당시 신도회의 주도자들은 이 점을 익히 파악하였을 것이다.

4. 혁신재건안의 종회 제출과 그 추이

전국신도회가 제출한 종단 혁신재건안을 심의·토의하였던 종회는 제5회 정기중앙종회였다. 종회는 1963년 11월 18일 조계사 내 총무원 회의실에서 개최되었다. 신도회는 11월 17일자로 종회에 〈건의에 관한 건〉과 〈결의문〉을 제출하였다.29)

〈건의에 관한 건〉의 전문을 보면 다음과 같다.30)

    본 건의의 건은 우리 대한불교 조계종도로서 대한불교 조계종단의 정화운동이 전개된 뒤 대한불교 조계종단의 정화 재건을 위하여 심성을 바쳐 오든바, 거년에 혁명정부의 주선으로 정화 과업이 성립되었다 하나 실질상으로 우리 종도와 국민대중이 요망하는 정화 재건된 것이 없으므로, 우리 우교 우종하는 재가 종도는 금월 17일 전국 중요도시 대표자 회의를 열고 별지와 같은 결의문을 채택하였기에 중앙종회에 건의하오니 이것이 실현되도록 선처하여 주실 것을 바랍고 자에 건의하나이다.

    1963년 11월 17일

    대한불교 조계종 전국신도회 회장 직무대행 수석 부회장 김한천
    대한불교 조계종 전국중요도시 신도대표자 대회 의장 이종익

제출된 결의문은 앞에서 제시한 바로 그 결의문이었다. 즉 17일에 개최된 신도회의 전국 중요도시 대표자 회의에서 채택된 그 결의문이었지만, 종회에는 그에 동의하는 종회의원 손경산·박벽안·김혜원의 명단이 첨부된 결의문이 제출되었다. 그러나 이같은 건의서가 17일 즉 종회가 개최되기 전날에 제출되었지만 18일에는 전국신도회의 건의 내용이 상정되지 않고, 19일 오후 회의가 시작된 직후 첫번째 안건으로 상정되었다.31)

오전 휴회가 종료된 후 오후에 속개된 종회에서 의장인 이청담은 속회 선언 직후 신도회 건의 사항에 대한 채택 여부를 의원들에게 질의하였다. 이에 윤기원은 긴급동의를 하면서, 회의 진행을 비밀회의로 할 것과 신도대표 2명을 참석시켜 건의안을 듣기로 제안하였다. 이 안은 문정영의 재청과 여타 의원의 무이(無異)로 채택되었다. 의장은 신도회 건의 내용을 듣기 위해 이법운과 김한천을 참석시켜 건의서 내용을 청취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하고, 의원 이외는 전부 퇴장케 하고 장내 정리를 위한 사찰(査察)을 지정하였다.

장내가 정리되자, 의장은 신도회 대표인 김한천과 이법운을 입장시켜 건의서 내용에 대한 설명을 듣겠다는 계획을 의원들에게 통보하였다. 이에 입장하였던32) 이법운(이종익)은 그 건의 사항에 대한 설명을 하였다. 이법운의 설명이 종료되자, 박기종은 수습위원을 선출해서 처리하자는 의견을 제출하였다.

이에 대하여 김서운은 신도회 건의 내용을 처리, 의결할 것을 동의하면서 다음과 같은 방안을 제시하였다. 그는 첫째, 건의문의 채택 둘째, 그 실천은 합법적 절차를 밟기 위하여 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셋째, 그 위원회 구성원은 14명으로 하되 종단에서 7명 신도회 7명으로 한다. 종단의 7명은 총무원 4부장, 감찰원장, 재경(在京)노덕 1인으로 하고 신도회는 해당 지방 신도회의 추천장을 소지한 자를 위원으로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김서운의 안에 대하여 문정영은 재청을 하였다. 이에 의장은 그 결정을 거수 표결하겠다는 의사표시를 하고, 표결에 부쳤다. 표결 결과 재석 29명 중 21명의 찬성으로 동의, 채택되었다. 그런데 신도회 대표로 활동하였던 이재열(이불화)은 종회가 종료되기33) 직전에 추가 발언 요청을 하였다. 이에 의장은 그 사항 즉 발언 허가 여부를 의원들에게 개진하고, 발언 청취하는 것을 찬성하였다. 이재열은 의견을 개진하였는바, 그는 신도회가 건의한 안건에 대한 방안으로 구성될 추진위원회의 명칭을 ‘개헌안 심의위원회’로 개칭할 것을 주장하였다.

또한 그 위원회의 활동 시한에 대하여 12월 15일까지 성안하고 중앙종회를 12월 20일까지 소집하여 처리한다는 명시를 재고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이에 대하여 종회의 대안을 제안한 김서운은 그 내용은 앞서 결정한 그 위원회 명칭에 포함되어 있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러나 문정영은 그 위원회 명칭을 ‘개헌심의위원회’라 하고, 12월 15일까지 성안하고, 12월 25일까지 중앙종회를 소집하여 개헌안을 상정할 것을 동의하였다.

의장은 이같은 문정영의 제안에 대해 참가 의원들에게 이의 없음을 확인하고 통과를 선언하였다. 한편 신도회 즉 전국 중요도시 대표자 대회에 참석한 신도회 대표는 종회가 개최되었던 11월 19일에 종회가 개최되었던 총무원 회의실 앞에서 종단의 각성을 촉구하는 연좌 시위를 하였다.

시위는 플래카드를 들고 종회가 종료되었던 오후 10시까지 지속되었다. 그리고 그 시위에 즈음하여 전국신도회는 종회에 조계종단 혁신재건안을 건의한 사정과 관련하여 성명서를 발표하기도 하였다.34) 그 전문을 보면 다음과 같다.

십년전 불교정화운동이 발기될 시에 정의파 불교도는 물론 전사회 대중이 비구승단측 주장을 적극 지지하였든 것은 올바른 한국불교가 혁신 재건되기를 염려(念慮)한 까닭이다. 그러나 그 뒤에 대처승측의 반발로 단순한 권리, 재산 쟁탈전으로 전개되어 오든바 1962년 3월 27일 합법적으로 통합종단이 성립된 뒤 종권, 사찰재산의 전취(戰取)에 승세(乘勢)한 비구승단은 그것으로 십년투쟁의 목표가 달성된 듯 일부 사이비 비구가 극단의 파락(破落)된 보수주의 소아(小我) 독선주의로 구호상으로는 사부대중, 실질상으로는 출가·재가 사이에는 철의 장벽을 막아 놓고 종권 재산을 농단하므로 직권남용 공재투매(公材投賣) 등 부정 부패의 일로로 다름질칠 뿐 시대와 국민이 갈망하는 구국제세의 역사적 과업은 몽외청산(夢外靑山)에 매몰됨을 바라볼 때 우리 애교애종(愛敎愛宗)하는 재가종도는 비분 통탄을 금할 수 없다. 그리하여 이에 전국신도회 중요도시 대표는 1963년 11월 17일 대한불교 조계종 혁신재건위원회를 구성하고 본종의 일대혁신재건방안을 의결함과 동시에 그것을 실현키 위하여 우선 좌와 같은 결의안을 채택하여 사부중의 총의를 묶은 합리한 종단으로 개편하므로 지난날과 같은 출재가의 철의 장막 속에 자행되어 오든 부정 부패상을 쇄신하고 참으로 복국리민(福國利民)할 수 있는 한국불교를 재건하기를 삼보전에 선서하는 바이다.

이 성명서는 신도회가 종회에 혁신재건안을 제출한 배경, 종단 모순에 대한 입장, 재건안의 실현 의지 등을 간결하게 요약하고 있다. 이제 문제는 종회에서 의결한 바와 같이 개헌심의위원회를 개최하여 신도회가 제기한 혁신재건안의 내용을 종헌에 반영하느냐 그 여부에 달려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위의 결의문에서 잠시 나왔지만 신도회의 종헌 개정안이 언제 성안되었을까? 그 결의문에서는 “이상을 실시키 위한 헌법 개정안을 채택한다.”고 하였는바, 이 내용이 11월 17일의 결의문 채택시에 이미 성안되었는지 아니면 종헌 개정안을 곧 마련하겠다는 것인지가 확실치 않다.

현재 전하는 그 종헌 개정안에도 ‘1963년 11월’로 기재되어 있기에 단언키는 어렵다.35) 그러면 여기에서 신도회의 종헌 개정안을 정리해 살펴보자. 종헌 개정안에 적시된 개정 필요 항목은 19항이었다.36) 이제부터는 그 내용을 순서대로 요약하겠다.

    ① 종헌선포문 : 보조 국사의 법맥 강조, 보조 국사를 종조로 인식, 보조 국사 당시 조계종 독립을 삽입, 기존 태고 국사 및 정화운동의 내용 제외
    ② 종명(제1조) : 기존의 가지산문과 태고보우 국사 내용 삭제, 신규로 사굴산문과 보조 국사의 법맥을 조계종의 기원으로 인식한 내용 추가
    ③ 종지(제2조) : 종조로 내세운 보조 국사의 법문의 요체를 추가
    ④ 소의경전(제3조) : 보조 국사와 유관한 경전을 추가 반영
    ⑤ 사법(제6조) : 기존의 도의 국사(종조)와 보우 국사(중흥조) 내용은 제외, 사굴산문을 개립한 품일(品日)을 원조(遠祖)로 인식, 보우 국사를 종조로 확립
    ⑥ 중앙종회 의원 수(34조) : 기존 50명에서 80명으로 늘리고 증가된 30명을 신도 중에서 선출
    ⑦ 중앙종회 의원 자격(35조) : 의원 자격(연령·승랍·법계 등)의 기준에서, 신도 출신의 의원은 예외로 처리
    ⑧ 총무원 구성(47조) : 종무위원(宗務委員)의 개념 도입, 무임소(無任所)부장 신설, 종무위원의 과반수는 승려(법계 4급 이상)가 담당
    ⑨ 총무원장·부장 임기(48조) : 4년 임기의 재선을 삭제, 신규로 중앙종회에서 재적의원 과반수로 불신임안의 가결과 신임안의 부결시는 임기 종료한다는 내용 추가
    ⑩ 감찰원 구성(53조) : 기존 감찰위원 10인을 15인으로, 그 과반수는 법계 4급이상으로
    ⑪ 본말사회(제12장) : 본말사회를 교구종회로
    ⑫ 본말사회 의원(67조) : 교구종회는 그 교구 본말사주지회에서 선출한 의원과 신도회에서 선출한 의원으로 구성, 신도출신 의원 수는 정원의 1/3의 초과는 불가
    ⑬ 본말사회 구성(68조)·본말사 감찰부 구성(80조) : 기존 본말사회를 교구종회로 수정
    ⑭ 사찰의 대상(82조) : 한국 내에 있는 사찰을 본종 소속의 사찰로 수정
    ⑮ 주지의 임무(87조) : 주지는 그 사찰의 대중회 및 신도총대회의 동의와 총무원장의 제청에 의하여 종정이 임명하는 내용을 반영37)

    ? 사찰 보직(89조) : 기존의 총무·교무·재무를 둔다에서, 단 지주승(止住僧)이 10명 이내의 사찰은 총무만을 둘 수 있는 내용 추가
    ? 사찰 산중총회(90조) : 기존 산중총회 삭제, 사찰에는 대중회(大衆會)와 신도총대회(信徒總代會)를 두는 것으로 전환. 단 지주승 5인 이내의 사찰에는 대중회를 두지 않을 수 있음, 대중회는 해당 사찰의 거주승 전원으로 구성, 신도총대회는 그 소속 사찰의 신도회에서 선출된 5인 이상의 총대로 구성
    ? 포교당(92조) : 포교사 임면의 사전에 신도총대회의 동의를 얻는 내용 추가
    ? 사찰 및 종단의 재산(97조) : 재산의 변동이 있는 행위를 하고자 할 때에는 미리 신도, 기타 이해관계인에 대하여 그 사유와 사후처리 방법의 요지를 공고하고 또 종정의 승인을 받아야 함을 추가. 그리고 그 세부사항도 다음과 같이 명기하였음.

    ● 사찰 및 종단기관에 속하는 재산을 대여·매각·출연·양도·담보에 제공하는 일
    ● 차입하거나(당해 회계연도 내의 수입으로 상환하는 일시적인 차입금을 제외) 또는 제삼자를 위하여 채무를 보증하는 일
    ● 주요한 경내 건물의 신축·개축·증축·제거 또는 구조를 현저하게 변경하는 일. 그리고 기본재산 중 부동산(立木 포함)을 매각할 때에 중앙종회가 수의계약에 동의하지 않는 한 공개입찰제로 해야 한다.

    기타 종무원법 중 개정안 : 종무원법 제5조의 별표 중 ‘승랍(僧臘)’을 ‘승랍 또는 계랍(戒臘)’으로, ‘선사’를 2급으로, 대덕을 3급으로, 중덕을 4급으로 각각 변경

이상과 같은 종헌 개정안의 요지에 나타난 특성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혁신재건안에서 제기한 내용이 반영되었다. 중앙종회 의원 수 및 자격, 산중총회의 개편, 교구종회에 신도 참가 등은 그 실례이다. 두번째는 사찰 및 종단의 재산 관리에 매우 유의한 측면을 찾을 수 있다. 이는 재산 관리에 신도들이 개입하려는 의지가 강하였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 사항은 역설적으로 정화운동 기간 중에 비정상적이며, 적법치 않은 목적과 방법에 의한 재산 손실이 적지 않았음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세번째는 보우 국사 계승의식에서 보조 국사 계승의식으로의 전환이 극명하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 계승의식은 종헌 선포문·종조·종지·법맥 계승·종풍 등에서 구체화되었다.

이 내용은 신도회의 간부이면서 신도회의 이론과 노선을 제공한 당사자가 이종익과 이불화였음을 유의하면 충분히 납득할 수 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이종익과 이불화는 정화운동 초창기에 비구측에 종조변동설 즉 기존 태고 국사에서 보조 국사로의 전환에 대한 논리를 제공하여 이른바 환부역조설(換父易祖說)이라는 논란을 일으킨 장본인이었다. 이제 문제는 이같은 신도회의 종헌 개정안을 갖고 종회에서 결의한 종헌심의위원회(14명)에서 구체적인 토의를 하는 것이었다.38)

그런데 그 종헌심의위원회는 가동되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종헌은 개정되지 않고 별도의 기획위원회의 설치로 전환되었다.39) 현재 전하는 자료상으로는 그 구체적인 정황에 관한 사정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 그 이행에 관한 단편적인 사정을 보면, 종회 이후 총무원 간부와 신도회의 간부가 동석한 회의가 5차에 걸쳐 개최되었다.

바로 그 회의에서 결정된 것이 ‘기획위원회령’이었다. 이 입법은 종헌 59조 즉 “본종에 법규위원회와 고시위원회 및 기타위원회를 둘 수 있다.”는 것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러면 종헌에 관한 토의는 전혀 성립되지 않았는가? 아니면 종헌 개정을 위한 토의를 하다가 중도에 전환된 것이었는지도 알 수 없다. 그 기획위원회령은 “종정의 권한에 속하는 제반 시책을 기획하여 종단 재건 사명의 완수를 목적”으로 설치한다고 설치의 당위성을 제시하였다.

위원의 정족수는 21인이었는데 11인은 승려로 10인은 신도로 구성하되, 위원은 종정이 임명하도록 하였다. 총무원장, 총무원 각 부장은 승려 출신의 당연직 위원이었으며, 여타 위원의 임기는 1년으로 정하였다. 그리고 신도에서 임명될 위원은 전국신도회 회장의 추천을 얻은 불교학, 교육학, 경제학, 법학을 전공한 학자로서 신심이 독실한 자를 선정하도록 하였다.

기획위원회에서 담당할 직무는 ▲ 종헌, 종법, 기타 법령의 제정·개폐에 관한 사항 ▲ 종단 3대 사업 ▲ 교육 기관의 설립 및 운영 ▲ 종전(宗典) 및 종사(宗史) 편찬 ▲ 사찰 문화재 관리 및 사찰 재산 처분 ▲ 종정(宗政) 기구의 개혁 및 종무 감찰 ▲ 사회복지 사업 ▲ 기타 중요사항 등으로 정하였다. 이같은 직무는 종단의 운영과 개혁에 관련된 폭넓은 권한을 부여한 것이었다. 여기에서 제시된 직무의 권한을 행사할 수 있고, 기획·결정된 제반 사무가 정상적으로 이행만 된다면 신도회에서 문제시하고 있는 사항은 실천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초 신도회에서 대안의 핵심으로 제기한 종단의 이상적인 사부대중 운영 및 종회에 신도 진출을 위한 종헌 개정과는 이질적인 행보였음을 알 수 있다. 종헌 개정이 신도회가 주장한 혁신재건안을 실천하기 위한 필요·최소한의 조건이었다면, 기획위원회의 직무는 이상적인 노선이라 하겠다. 문제는 기획위원회의 운영이 별 문제 없이 진행될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예컨대 기획위원회 운영 및 노선, 기획위원회에서의 결정과 종회와의 조화·대응 등은 바로 그 단적인 실례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나온 기획위원회의 위원 명단은 이청담·김법룡·박문성·손경산·김남현·이행원·이석호·이운허·강석주·김법린·김한천·현 오·이무애·황정연·김동섭·백호광·이종익·이불화·김종규·장기현 등이었다.40)

그런데 이같은 기획위원회의 성격과 직무를 밝힌 기획위원회령은 종회를 통과해야 그 효력이 발동되는 것이다. 신도회에서 제기된 종단 혁신재건안, 종헌 개정 추진은 일단 종단의 시책을 기획할 수 있는 기획위원회를 설치하는 기획위원회령으로 구체화되었다. 이에 그 기획위원회령은 1964년 1월 25~27일에 개최된 제6회 임시중앙종회에 상정되었다. 기획위원회령의 건은 1월 26일에 정식으로 상정·토의되었다. 종회에서 이 안건에 대하여 몇몇 의원이 질의를 하였는바, 그 요지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41)

윤기원은 기획위원회가 종회를 제어하는 기구로 구성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주장하였으며, 김서운은 이 법령이 행정부(총무원) 단독으로 구성을 추진해온 법률이기에 법규위원회의 심의를 정식으로 거쳐야 할 것이라는 의견을 개진하였다. 또한 박추담은 기획위원회는 행정부에 속한 기관으로 위상을 설정해야 함을 지적하면서 종회에 부수되는 기관일 수 없음을 강조하였다. 나아가서 박추담은 기획위원회의 기획 사항은 행정부의 종회 건의, 종회 의결을 거쳐 추진되는 원칙을 수립해야 함을 동의하였다. 이같은 의견에 대하여 이행원은 종단을 뒷받침하며 종회를 보좌하는 협조기구라고 설명하였다. 이같은 의견이 나오고, 당시 종회 사무국이 기획위원회령을 종법으로 승격·통과해 줄 것을 제의하였다.42)

이에 대하여 김서운은 이 안건을 법규분과위원회에 넘겨 심의토록 하고 그 결과를 27일의 회의에 회부해서 처리할 것을 동의하였다. 이 동의는 박동암의 재청과 여타 의원들의 찬성으로 통과되었다. 1월 27일, 종회가 속개된 직후 첫 안건으로 기획위원회령은 토의되었다. 의장인 이청담이 기획위원회령의 심의 결과를 발표할 것을 언급하자, 김서운은 종법으로 승격시키는 것이 타당하다는 의견을 개진하였다.

이 의견에 대하여 박기종의 동의, 박추담의 재청이 있었으며, 여타 의원들에게도 이의 없음을 확인한 이청담은 통과되었음을 선언하였다. 그 직후 종회 사무국에서는 중앙종회법 45조에 ‘기획위원’ 4자를 첨가해 줄 것을 제의하였다. 이는 기획위원도 종회에 나와서 발언할 수 있도록 하는 종법 개정이라는 이행원의 동의 요지, 이대의의 재청, 여타 의원들에게도 이의 없음을 확인하고 이청담은 통과를 선언하였다. 그런데 종법으로 승격 통과된 기획위원회법은 당초 총무원에서 종회로 제출한 기획위원회령이 온전히, 수정 없이 통과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어떤 내용이 수정, 보완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이렇게 전국신도회에서 제기한 종단 혁신재건안은 마침내 종법인 기획위원회법의43) 설치로 귀결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법으로 인하여 등장할 기획위원회가 그 법의 조문에서 규정한 내용과 같이 활동할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한편 당시 전국신도회가 이같이 전개된 흐름에 대하여 어떠한 입장을 표명하였는지는 전하지 않고 있다.

이러한 우려는 종회의원들의 발언을 유의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는 요컨대 종회의 권한을 무시하거나 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제 문제는 기획위원회의 운영을 통하여 신도회가 구상한 종단 개혁 즉 이상적인 사부대중의 운영체인 종단을 만들 수 있는가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신도회가 발의한 종단 개혁의 발의가 전개되어 온 과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더욱 본 고찰에서 살펴본 내용은 조계종단의 재건을 담보한 즉 통합종단의 초창기에 대두되었다는 점에서 기획위원회의 행보는 큰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이었다.

5. 결 어

이상으로 1963년 11월 조계종 전국신도회가 조계종단 혁신재건안을 작성하고, 그 내용을 실행하기 위하여 종회에 건의한 사정과 그 추이 등을 정리하였다. 이제부터는 그 내용을 요약하면서 그 의의를 정리하는 것으로 맺음말에 대신하고자 한다.

전국신도회는 정화운동이 가열화되었던 1955년 6월에 등장하였지만 종단 및 공권력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것은 1963년 10월이었다. 조계종 최상위 신도단체로서의 위상을 차지한 전국신도회는 1963년 11월에 개최된 제5회 정기 중앙종회에 조계종단 혁신재건안을 제출하였다.

신도회에서 종단을 혁신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밝힌 것은 불교정화에 대한 모순과 문제점이 적지 않았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정화정신의 퇴색, 승려 중심의 종단 운영, 사찰재산 망실 등이 그 단적인 예이다. 또한 거기에는 1960년 4·19 직후 조계종단에서 위기감 해소 차원에서 제기된 상·하양원제 이행에 대한 불만도 개재되어 있었다.

조계종은 1960년 6월 17일에 상하양원제의 시행을 위하여 대한불교 조계종 종회 하원 법규를 종법으로 공포하였지만, 실질적인 하원 구성은 통합종단 출범 이전까지도 진척되지 못하였다. 이에 전국신도회는 정화과업 완수를 외치며 교단재건안을 작성하기에 이르었다. 신도회의 이같은 노력은 5·16 이후 종회에 제출한 정화촉진을 위한 진정서로도 표출되었다. 신도회의 이러한 교단재건안 및 진정서의 요체는 물론 하원 의회의 구성과 동시에 종단 운영이 신도들이 참여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전국신도회의 노력은 통합종단 출범이라는 큰 구도에 함몰되었다. 더욱이 종회의원 배분에 불만을 가진 대처측의 이탈로 조계종단은 안으로부터의 도전에 직면하였으며 신도회의 주장에 큰 관심이 없었다. 당시 여건은 신도회의 주장이 수용될 정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같은 현실에 변화가 일기 시작한 것은 전국신도회가 종단 및 문교부로부터 공인을 받으면서부터다.

종단의 최상위 신도단체로 위상을 확보한 신도회는 신도회의 재조직을 기점으로 그 문제를 재론하고 나섰으니 그 단초는 1963년 11월 17일에 개최한 중요도시 대표자 대회였다. 이 대회에 참가한 각 시도 대표들은 종단 건의안을 제출하였고, 전국신도회는 이를 종합하여 전국신도회의 이름으로 종단에 제출하기로 결정하였다. 또한 그 대표들은 조계종 혁신재건위원회를 구성하고 그들의 의지를 담은 결의문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전국신도회는 전국신도들이 원하는 종단 혁신의 뜻을 정리하여 ‘혁신재건안’으로 귀결시켰던 것이다.

그리하여 전국신도회는 종단 혁신의 의지와 방향을 요약하여 11월 18일에 개회된 중앙종회에 제출하였다. 신도회가 요구한 종단 개신의 방향은 불교정화운동의 비판적 계승, 진정한 수도승단의 건립, 대중불교 실현, 명실상부한 사부중의 종단 성립, 승려와 신도의 재교육·재수도·재수련, 종회의 신도 참여 등이었다. 이에 일부 종회의원의 동의하에 신도회의 건의서 및 결의문이 종회에 전달되었다. 당시 신도회 대표는 종회가 열리는 총무원 회의실 앞에서 종단 개혁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성명서를 발표하면서 종회를 압박하기도 하였다.

또한 신도회는 종회 개최 이전에 이미 종헌개정안을 성안하였다. 이같은 건의서를 받은 종회는 신도회가 요구한 건의 안을 안건으로 채택, 찬반 투표에 붙였으며 21:9로써 통과되었다. 그 수용 방안은 종단 대표 7명과 신도대표 7명 즉 14인으로 개헌안심의위원회의를 구성하며, 12월 15일까지 성안, 12월 25일까지 중앙종회를 소집한다는 것이었다. 이제 문제는 종회에서 결의한 바와 같이 이행을 하면 되었다.

그런데 개헌안심의위원회는 5회나 진행되었지만, 종헌 개정 작업은 이루어지지 않고 기획위원회령의 대두로 전환되었다. 그 전환의 구체적인 사정은 전하고 있지 않다. 기획위원회령은 종헌 59조에 근거한 것으로 종단 재건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한 종단의 제반 시책을 기획하는 것을 목적으로 두었다. 승려 11인과 신도 10인 도합 21인으로 구성될 기획위원회는 종단의 운영과 개혁에 관한 제반 문제를 기획, 검토할 수 있는 직무를 설정하였다.

그러나 이같은 기획위원회의 설치는 당초 신도회가 구상한 방향과는 이질적인 측면이 적지 않았다. 개헌안 심의위원회에서 정한 기획위원회령은 1964년 1월에 개최된 제6회 임시중앙종회에 상정되었다. 그러나 그 상정안은 그 대강이 그대로 유지되었지만 일부의 수정을 거쳐, 법규위원회의 심의 후 종법으로 통과되었다. 문제는 종회에서 통과된 기획위원회의 활동과 노선이 기획위원회령에서 규정한 바와 같이 정상적으로 가동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정상적인 진행이 가능하다면 신도회가 의도한 종단 개신(改新)은 가능하겠지만, 만약 그 이행 자체가 불투명하고 왜곡된다면 신도회가 구상하고 있었던 종단 개신은 좌절될 것이다. 사정이야 어떻든 통합종단 출범 초창기에 신도회가 종단개혁안을 구상하고, 그 건의가 종회에서 수용되어 기획위원회가 설치되었다는 점 등은 그 자체에 역사적인 의의가 적지 않다.

종단을 개신하겠다는 의지가 승려와 신도 간에 무리 없이 수용, 논의, 결의된 것은 승려와 신도 사이에 교감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를 역설적으로 말하면 승려들이 신도들을 배제할 수 없을 정도로 전국신도회의 위상이 견고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승려 자신이 종단의 운영과 정화운동에 모순이 적지 않았음을 자인한 측면도 있다. <끝>

김광식
건국대 사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 문학박사. 현재 대각사상연구원 연구부장. 저서로 《한국근대불교사연구》 《한국근대불교의 현실인식》 《용성》 《우리가 살아온 한국불교 100년》 《근현대불교의 재조명》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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