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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정의 실천을 위해 불교가 해야할 일 / 손혁재
손혁재 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
[4호] 2000년 09월 10일 (일) 손혁재 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

1. 머리말

21세기에 접어든 지금 세계는 새로운 질서를 향한 거대한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있다. 이 소용돌이는 정치·경제·사회는 말할 것도 없고 문화와 나아가 인간의 행동 양식이나 의식 구조에 이르기까지 변화의 물결이 닿지 않는 분야가 없는 문명사적 전환기를 이루게 될 것이다.

인류의 역사가 일찍이 겪어보지 못한 대격변이 예측되는 21세기에는 기존의 가치와 제도 가운데 상당수가 퇴색하게 될 것이다. 사라지는 낡은 것을 대신한 새로운 가치와 제도의 정립은 인류의 발달에 중대한 전제 조건이 된다. 21세기에 주목해야 할 현상의 하나는 종교의 변화이다.

종교의 양상이나 기능이 바뀐다는 의미가 아니다. 대표적인 변화 양상은 유사 종교(또는 사이비 종교)의 범람과 유교 및 이슬람교의 유력화이다. 사람들이 종교를 갖게 되는 계기를 나카무라 유지로(中村雄二郞)는 인간의 생명력이 약해져서 에너지의 ‘역광을 쐴’ 때라고 말한다. 문명사적 전환기에서 사람들은 자아 실현은커녕 자신의 존재 유지조차도 확신할 수가 없게 된다. 자아 실현의 의욕과 용기를 상실해 버리면 삶에 무관심해지며 순간적인 단순한 쾌락의 추구에 빠져들게 된다.

대중 문화의 노예화로 자기를 성찰하고 개성을 추구할 기회를 잃어버리게 될 뿐만 아니라 자기상실감, 소외 의식에 휩싸여 사회적으로는 도덕적 무규범 상태(anomie)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정신적 공황 증후군’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윤리적 위기 현상이 심각한 수준에 이른다. 도덕 의식이 마비되어 찰나적 쾌락주의에 빠지기 쉽고 사회적 무관심이 사회에 널리 퍼진다.

이처럼 사람들이 현실로부터 도피하려 애쓸 때 전체주의 사회를 초래하거나 대안 없는 유토피아주의에 빠지기 쉽다. 대안 없는 유토피아주의의 대표적인 것이 우리 나라에서 몇 년 전 일어났던 ‘종말론’ 파동이나 다른 나라의 ‘인민사원’ ‘천국의 문’ ‘옴 진리교’ 사건 등이다. 이런 상황에서 민족종교로서의 불교가 사회 문제 해결에 어떻게 이바지할 수 있을까? 일반 비불자들이 불교에 대해서 갖고 있는 이미지 가운데 하나는 불교가 개인 차원의 기복 신앙이며, 세속의 일에 간여하지 않는 출세간의 종교라는 것이다.

불교의 사회적 활동이라 할 신행이 꾸준히 전개되어 왔지만 지금까지의 신행은 주로 자비심을 기초로 한 ‘불쌍한 이웃’ 보살피기 수준의 봉사에 지나지 않았다. ‘불쌍한 이웃’을 만들어내는 사회 구조를 바꾸지 않는다면 개개인의 자비심에 바탕을 두고 있는 신행 활동의 한계는 명확하다. 사람에게 더 이상 고통을 주지 않는 해방된 세상이라 할 수 있는 정토가 불교에서 꿈꾸는 이상향이라면 결국은 사회정의의 실천이 불교의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다.

2. 21세기 한국사회와 사회정의

사회정의의 실천을 위해서 불교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따져보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한국사회에 대한 올바른 이해이다. 한국사회를 움직여 나가는 기본 원리(메카니즘)에 대한 이해 없이 사회정의의 실천방법을 찾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한국사회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불교의 교리를 사회화시키는 과제가 현대 불교의 주요한 과제가 되는 셈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영원한 것이나 그 진리를 찾는 방법이 사회마다 같지 않아 부처님도 방편을 역설하지 않았던가.

1) 21세기 한국 사회

21세기 한국 사회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창출해야 한다는 시대적 과제를 안고 있다. 20세기를 이끌어온 패러다임은 물질 중심적 가치관을 바탕으로 한 성장제일주의였다. 21세기를 이끌어갈 새로운 패러다임은 인간의 삶을 중하게 여기는 생명 중심적 가치관을 바탕으로 하는 생태주의적 성격을 지녀야 한다.

예컨대 경제도 얼굴 없는 차가운 시장경제로부터 인간의 얼굴을 한 따뜻한 협동적 경제가 되어야 한다. 삶의 양보다는 삶의 질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개인의 자유 보호도 중요하지만 잃어버린 공동체 정신을 되살려 내야 한다. 소수 부유층의 욕구보다는 보편적인 사람의 필요가 우선되어야 한다. 물질주의적 패러다임에 기초해 박정희 정부 이래 지속돼 왔던 국가 운영 방식은 당시는 어느 정도 효율적이었을지 모르나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그 문제점을 드러냈다.

근본적이고도 총체적인 국가 혁신이 필요했지만 문민정부도 성장 제일주의 정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재벌 중심의 양적 성장을 꾀했다. 그러다 보니 일면적이고 오도된 세계화 정책과 결합되면서 금융의 세계화가 가져오는 동아시아의 경제 위기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이렇게 닥쳐온 위기가 바로 IMF 사태였던 것이다. IMF 위기가 다가오는 와중에서 정권교체가 이루어졌고 국민의 정부는 2년 반만에 IMF 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국 사회가 완전히 정상을 회복한 것은 아니다. IMF 극복 과정에서 일반 국민에게 고통이 집중되었고, 정작 IMF 위기에 책임이 있는 정치권과 재벌은 고통을 겪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갑자기 쓰러져 응급실로 실려 온 한국경제가 의사의 적절한 응급처리로 기사회생한 셈이다. 그러나 한국 경제가 퇴원할 단계는 아니다. 이제 되살아난 한국 경제는 다시 쓰러지지 않기 위해 응급실에서 중환자실로 옮겨져 근본적인 치료를 해야 하는 단계이다. 이른바 재벌의 구조조정으로 대표되는 경제개혁, 재벌개혁이 필요한 상황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모든 기업을 권력의 사슬로부터 그리고 권력의 비호로부터 완전히 해방시킬 것”이라고 정경유착 근절 의지를 밝히고 재벌개혁을 강도 높게 추진해 왔다. 그러나 발등의 불인 경제위기 극복에 치중하다 보니 근본적인 구조조정에 제대로 힘을 쏟을 수 없었다. 경제위기 극복은 단순히 IMF 경제신탁통치 체제를 벗어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새로운 개혁 이념과 발전방향은 IMF 사태가 닥치도록 만든 두 개의 국가발전 노선, 즉 관치 경제로 대변되는 신중상주의는 물론 시장만능주의를 전제로 하는 신자유주의까지 넘어서야 한다.

국가체제와 운영원리를 전면적으로 뜯어고쳐 새로운 발전을 모색하는 것이다. 이것을 김대중 대통령은 “민주주의와 경제가 함께 발전하는 시대”라고 설명했다. 경제 성장을 위해 민주주의를 희생시킬 수밖에 없다던 개발 독재의 성장 논리를 이제는 더 이상 허용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질 높은 민주주의의 실현과 시장 경제를 통한 경제 성장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다. 성장지상주의에서 벗어나 경제와 참여민주주의를 균형적으로 발전시키겠다는 개혁의 기조도 일관되게 유지되지 않았다. IMF 체제는 외환위기 때문에 생긴 일시적인 것이 아니다.

우리 사회의 근원적이고 총체적인 부실에서 온 것이므로 땜질식의 임시방편적 개혁이 아니라 사회 운영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개혁이 필요하다. 또한 국민이 개혁의 주체로 함께 할 수 있도록 참여를 제도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민주 정치의 기본적인 가치는 자치와 참여에 있기 때문이다. 개혁전략의 성패 여부는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고 깨끗한 사회를 만들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또 “다시는 이 땅에 정치 보복이나 지역 차별·계층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 “모든 차별을 일소하고 국가구성원의 권익을 공정하게 보장할 것”이라고 사회 운영의 기조를 밝혔다.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고 투명한 사회를 만들어 나가며, 차별이 없는 공정한 사회를 만들어 나가는 데 불교시민운동이 중요한 역할을 해 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한국사회는 민족통일과 지방화, 그리고 세계화(globalization)와 정보화라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해 있다. 분단 55년 만에 이루어진 극적인 남북정상의 만남과 6.15 남북공동선언, 그리고 이산가족의 상호방문 등으로 남북관계는 그 어느 때보다도 유연한 남북화해시대를 맞고 있다.

이른바 햇볕정책이라 불리는 대북포용정책의 꾸준한 수행으로 맞이한 남북화해의 분위기는 국제적으로 고립되어 있는 폐쇄사회인 북한을 국제사회로 끌어내 연착륙(soft-landing)시키게 될 것이다. 남북화해는 남북교류와 활발한 경협으로 이어지면서 동북아시아는 물론 세계 평화의 성립에 이바지할 것이다. IMF가 다가오기 전까지 우리는 성장 중심적 가치관을 소중하게 받들었다. 높은 경제성장률과 GNP의 상승에 눈이 멀어 우리의 삶의 터전이 무너져 내리고 우리의 삶이 썩어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세계화라는 속 빈 강정 같은 구호의 화려함에 속아 우리가 나라 밖으로만 눈을 돌리는 사이 우리 사회가 어둠의 늪으로 서서히 빠져들고 있었음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세계화는 좋든 싫든 거스를 수 없는 역사의 흐름이다. 그러나 지금처럼 해외진출이나 국제경쟁력 강화에 초점을 맞추는 세계화 전략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올바른 세계화는 우리 나라와 다른 나라가 서로 동등한 자격으로 가치 있는 것을 자유롭게 주고 받는 것이어야 한다.

아울러 환경·교통·교육·노동·주택·의료·기본적 인권의 보장 등 우리의 삶의 질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이 바로 올바른 세계화인 것이다. 정보화는 21세기를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논의되는 주제이다. 정보화사회는 정보의 사회적 가치가 놀랄 만큼 커진 사회, 국민생활과 경제활동 전반에 걸쳐서 정보의 생산 유통 및 이용이 결정적인 중요성을 가진 사회, 그럼으로써 인간의 생존양식과 체계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난 사회이다.

정보통신의 발달은 분산화와 분권화를 가져온다. 사회운영방식이 지금까지의 단방향적 의사소통에서 쌍방향적 의사소통(interactive communication)으로, 통제에서 분산으로, 중앙집중식에서 네트워크로 바뀌고 있다. 이에 따라 권력이 옛날처럼 수직적 통제력을 장악할 수가 없게 된다. 의사소통의 쌍방향성은 국민의 능동적 참여를 증대시키게 된다. 또 익명성도 참여 확대와 평등성 보장에 도움이 된다. 이로 인해 정보에 대한 시민의 통제력이 늘어나고 매스 미디어의 권위, 나아가 권력의 통제력은 줄어든다.

정보의 주도권이 미디어(정보 공급자)나 국가 권력으로부터 정보 수용자(시민)에게로 넘어가게 될 것이다. 또 전통적인 국가 개념도 바뀌게 되고 이에 따라 정부의 조직도 열린 체제를 근간으로 혁명적 변화를 겪게 될 것이다. 국방·행정·선거 등 국가의 기능이 초국가적 국제기구·지역공동체·지방정부·비영리 사회단체·민간기업·개인 등으로 재분배·재조정될 것이다. 정부는 사회 각 부분의 유기적 역할을 담당하는 네트워크 관리자로, 국가정보의 제공자로, 또 사회적 역할에 대한 비전 제시자로서의 기능만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나 정보화 그 자체가 사회적 이상이나 정의를 실현시켜 주지는 않는다. 정보화시대가 가져올 역기능과 폐해는 우리의 생각 이상으로 크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정보 독점 권력의 출현이다. ‘정보를 가진 사람들(information-rich, information haves)’과 ‘정보를 갖지 못한 사람들(information-poor, information have-nots)’ 사이에, 성능 좋은 컴퓨터 구입 능력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사이에 나타날 계층 갈등, 컴퓨터 문화에 익숙한 사람들(신세대)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기성세대) 사이에 나타날 세대간 갈등, 정보 생산자와 정보 소비자 사이에 정보 공급 문제를 둘러싼 갈등 등이 바로 그것이다.

정보화 사회의 속성은 여성에게 적합한 것이면서도 여성이 컴퓨터문화에 익숙하지 못한 현실에서 남녀의 성차별 문제가 드러날 수 있다. 또 정보에 대한 선택적 접근권이 거꾸로 국민들을 탈정치화시킬 수도 있다. 질 낮은 정보의 홍수로 의사 결정의 부담이 늘어나고 그릇된 정보로 의사 결정을 그르칠 우려도 있다.

정보의 조작 및 관리가 쉽게 되어 자유 평등 및 국민의 권리보장이 보다 악화될 우려도 크다. 조지 오웰이 경고했던 ‘1984년형 사회’가 정보 독점자에 의해 형성될 수도 있다. 따라서 정보화 시대에 시민사회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맡아야 한다. 시민사회는 정보화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가고 정보화의 부작용을 바로잡는 역할을 맡아야 한다. 또 정보화 과정 자체에도 참여해야 한다. 정보화의 핵심은 의사소통이다.

의사소통은 시민사회의 자발적인 활발한 참여 없이 활성화되기 어렵다. 국가가 시민을 침묵시킬 수는 있겠지만 국민을 대화의 광장으로 끌어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시민사회는 국가를 바른 방향으로 끌어가는 한편 기업을 견제해야 하는 것이다. 시민사회는 정보화에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참여할 수 있다. 하나는 정보화가 추진되는 과정에 시민의 발언권을 확대시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정보화를 수단으로 해서 사회개혁에 개입하는 것이다. 정보화와 관련한 각종 위원회나 정책결정 과정에 시민의 참여가 이루어져야 한다.

이는 정보민주화 운동의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정보화 추진에 대해 시민들이 의사를 제시하고, 정책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보장되어야 한다. 그러나 정부는 시민의 정책결정과정 참여를 달가워하지 않는다. 국민의 삶의 질을 향상시킨다는 명분을 내세워 정보화를 추진하지만 그 과정에서는 시민참여를 가능한 한 배제시키려 하는 것이다. 정보화는 생산성 향상, 사회발전, 국민생활수준 향상, 복지 증대에 긍정적으로 기여하는 방향으로 추진되어야 한다.

정보화 사회는 궁극적으로 인간을 각종 질곡으로부터 해방시키고 삶의 질을 높이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정보수단의 효율적인 활용과 정보의 역기능을 최소화하고 정보의 오용을 방지하여 균형적인 정보 혜택을 누릴 수 있는 현실적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 진정한 민주주의 사회라면 의사 결정에 필요한 다양한 정보로의 공평한 접근은 보장되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정보 민주주의가 확립되어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시민사회가 맡아야 할 몫이 되는 것이다.

2) 시민운동의 역할

민주사회에서 정부는 국민의 뜻을 기초로 하므로 국민의 뜻이 잘못 반영되면 국민에게 책임을 져야 한다. 이것은 정권을 교체할 수 있는 힘을 국민이 갖고 있을 때 가능하다. 참여 민주주의는 정치 권력이 민주적으로 통제되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될 때 비로소 가능하다. 우리 사회에서 추진되고 있는 개혁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정부가 ‘국민과 함께 하는 개혁’을 강도 높게 밀고 나가야 한다.

정부의 힘만으로는 절대로 개혁을 성공시킬 수 없다. 정부는 이해 집단과 대화하는 것뿐만 아니라 국민의 자결권을 보장한다는 뜻을 확실히 해야 한다. 바로 참여의 제도화이다. 시민운동의 역할이 그래서 중요한 것이다. 시민운동은 정부와 이중적인 관계를 맺어야 한다. 정부가 민주화와 개혁을 제대로 추진해 나가는 데 힘을 실어주는 한편, 올바른 길에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견제의 역할을 동시에 해야 한다.

시민운동은 개혁의 중요한 한 축이 될 수밖에 없다. 제도 정치권의 힘만으로는 개혁을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민주 대 반민주 구도의 실질적인 해체 과정에 따른 사회운동의 변화도 요구된다. 현 정부는 그 동안 우리 정치에서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성향을 보였던 중도자유주의적인 세력과 우익 보수 세력의 연합으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중도자유주의적인 세력이 추진하는 개혁이 우익 보수 세력에 의해 뒷걸음 칠 수도 있다.

개혁이 후퇴하는 것을 막고 개혁을 극대화시켜 나가는 것이 시민운동에 주어진 과제이다. 이를 위해선 시민운동의 이념적 지평을 확장시켜야 한다. 시민운동 내부의 진보 개혁적 파트너쉽에 기초한 공동 행동의 실험과 강화가 요구된다. 기득권 계층의 기반인 수구 보수적이고 극우적 세력의 힘을 약화시키고 관변단체를 없애는 것도 필요하다.

시민운동이 힘을 쏟아야 할 주요 개혁 운동 영역으로는 재벌 개혁, 사회보장 혁신, 반민주제도 개혁, 진보적 공약 실현에 대한 압력, 반부패의 제도화 및 입법, 남북관계 개선 및 탈냉전적인 내부 개혁, 인적 청산, 언론 개혁, 조세 개혁 등을 꼽을 수 있다. 이 가운데에서도 시민운동이 힘을 가장 많이 실어 주어야 할 핵심 과제는 재벌 개혁과 언론 개혁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시민운동은 독자적인 사회세력화를 이루기 위한 기반인 국민 대중을 많이 끌어들일 수 있는 일상적인 운동 방식을 개발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신자유주의라는 거대한 물결이 전 지구를 휘몰아가고 있다. 신자유주의의 물결은 21세기에도 그 힘이 약화되지 않고 있다. 신자유주의 물결이 휩쓸고 지나간 곳에는 많은 희생자들이 나타난다. 그 희생자는 주로 사회적 약자들이다. 신자유주의 물결을 막지 못한다면 21세기에는 인류 역사상 가장 극단적인 형태의 빈부격차가 나타날 수도 있다. 이런 빈부격차를 줄이고 사회적 약자들의 권익을 보호하고 나아가 확대시키는 사회정의의 문제에 21세기의 종교는 정면으로 맞부닥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사회의 불교도 예외는 아니다.

3. 사회정의 실천을 위한 불교시민운동

1) 불교시민운동

불교의 사회정의란 ‘정토를 이루기 위한 사회적 실천’을 말한다. 지금까지 한국불교는 사회적 실천에 소홀했다. 한국불교에 강하게 남아 있는 산중불교의 전통 때문이다. 산중불교는 수행을 중히 여기고 세상일에 무관심할 것을 요구해 왔다.

산중불교의 전통은 세속의 일에 대한 관심을 좋지 않게 보는 경향이 강하다. 이 때문에 불교는 사회 정치 현안에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고 따라서 불교가 제대로 대접을 받지도 못하였다. 이제는 불교가 계속 산중에만 머물면서 사회 정치 문제에 등을 돌리고 있어서는 안 된다. 불교의 기본 교리가 고통 속의 중생을 구원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중생이 앓으므로 나도 앓는다.”는 《유마경》의 말처럼 온 국민의 관심사에 불교도 관심을 갖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불교가 국가와 국민의 관심사에 무심해서는 불국정토의 완성이라고 하는 과제의 달성은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불교가 사회문제에 대해서 종단 차원에서 발언한 것은 개혁종단이 출범한 뒤 대한불교 조계종에서 전개했던 ‘깨달음의 사회화 운동’이다. 그 이전까지 종단은 민족종교로서의 맡은 바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함으로써 점차 국민들로부터 소외되고 있던 상황이었다. 개혁종단 후 들어선 종단 집행부의 송월주 총무원장이 경실련의 공동대표를 맡는 것을 위시하여 많은 불교 지도자들이 도덕성 회복·인권·환경·복지·통일 등 여러 분야의 시민운동 분야에서 활동해 왔다.

그러나 그 이전에 이미 불자들의 사회의식이 향상되고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7,80년대에 불교 교리를 사회적으로 실천하려는 목적의 불교 단체들이 나타나 활동하고 있었다. 이 활동은 주로 반독재 민주화 운동에 결합하는 형태였다. 초기에는 민중불교운동으로 표현되었던 불교계의 사회적 실천 운동은 불자들의 사회의식이 향상되면서 활동 영역을 점차 넓혀가 통일운동·환경운동·언론운동·소비자 운동 등 신사회 운동의 모든 영역에서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전개되던 불교의 사회정의 실천운동의 역량은 종단 개혁 문제로 초점이 모아졌다.

권력과 결탁한 일부 권승들의 행태가 불교의 사회적 지위를 격하시키고 불교의 활동 영역을 스스로 좁힌 데 대한 반발이었던 것이다. 1,600년 민족 종교로서의 자존심과 역할을 포기한 대가로 불교의 권력의 비호를 받으면서 개인적 부귀영화를 누리던 권승들에 대한 축출로 불교개혁이 이루어진 것은 이 같은 불교 사회화 운동을 통해 축적된 역량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종단개혁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면서 나타난 것이 바로 ‘깨달음의 사회화 운동’이다.

내부 개혁으로 생긴 자신감을 바탕으로 대승보살도의 실현을 시민운동의 차원에서 전개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같은 깨달음의 사회화 운동은 고통받고 있는 뭇 중생들을 구제하려는 불교 본래의 가르침에 충실하려는 노력이다. “여래가 세상에 온 것은 가난하고 소외되어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서”라고 《법구비유경》은 말하고 있다. 약사여래의 본원도 남에게 매여 자유롭지 못하거나 감옥에 갇혀 고통받는 이들을 해방시키고자 하는 뜻이다.

원래 승과 속은 둘이 아닌 하나(僧俗一如)이다. 그러나 산림불교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는 소승불교는 개인의 구제에 중심을 두고 있기 때문에 비정치적이고 비사회적인 측면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흔히 대승불교는 모든 중생의 구제를 목표로 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고 우리 불교의 기본적인 성격을 대승불교에서 찾는다. 그러나 산림불교적인 성격이 강한 한국 불교는 세속의 일에 관심을 갖는 것을 꺼리는 경향이 상당히 강했다.

특히 해방 이후 종단 정화 과정에서 권력이 강하게 개입했고, 이때 권력과 밀착한 권승 집단이 나타나면서 이런 경향은 더욱 심해졌다. 불교의 기본 목표 가운데 하나인 ‘상구보리하화중생(上求菩提下化衆生)의 실천’이라는 관점에서도 불교가 세상사에 관심을 갖는 일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상구보리’를 위해서는 세속적 사회를 떠나야 하지만 ‘하화중생’을 위해서는 세속의 사회로 다시 돌아와야 하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이런 말이 있다.

“보살이 보시바라밀을 닦고 있을 때 기아와 추위에 시달리고 의식에 궁핍한 중생을 보면 바로 다음과 같은 서원을 일으켜야 한다. ‘나는 그곳에 따르고 그때에 따르는 방법으로 보시바라밀을 닦아야겠다. 그래서 내가 이윽고 무상(無上)의 깨달음을 얻었을 때에는 내 불국의 중생에게는 절대로 이와 같은 궁핍이 있게 하지 않겠다.

의식이나 생활용품은 충족하여 모자람이 없고, 마치 천상계와 같이 만들어야겠다.’라고. 가정에 상류 중류 하류의 차이가 있는 것을 보면 나의 불국에는 이와 같은 우열이 없게 하겠다는 원을 일으켜야 한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불교가 사회에 관심을 갖는 일은 교리 실천의 한 방편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깨달음의 사회화 운동은 중요한 불교사적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깨달음의 사회화 운동은 종단 지도부가 교체된 뒤 슬그머니 중단되고 말았다.

2) 종단과 불교단체가 해야 할 일

불교가 세상일에 깊이 간여하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따라서 불교의 시민운동은 아직 걸음마 단계이며, 사회에서 갖는 영향력도 아직은 미미한 수준이다. 불자들의 참여가 아직은 소수이고, 활동 영역도 한정되어 있으며, 활동 양식이 세련되지 못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불교시민운동의 이념조차도 정립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교시민운동이 성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종단과 여러 불교 관련 단체들이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무엇보다도 종단 차원에서 불교시민운동에 대한 이해와 지원을 강화시켜야 할 것이다. 현재 적지 않은 불교 지도자들이 여러 시민단체에서 활동하고 있지만 대개는 이름을 걸어놓는 정도인 경우가 많다.

이같은 명망가 운동을 불교시민운동의 성과라고 만족해서는 안 된다. 깨달음의 사회화 운동이 그랬던 것처럼 종단 지도자나 스님이나 불자 개개인의 관심에 의해 전개되는 불교시민운동은 그 지도자가 임기를 마치거나 스님이나 불자들의 개인적인 관심이 약해지면 흐지부지되어 버리곤 했던 것이다. 불교시민운동의 활성화를 위해서는 불교시민운동을 지원하는 기구를 종단에 만들고, 이 활동의 물적 토대에 일정한 기여를 해야 한다.

종단 차원의 기구는 제 불교 단체들의 신행에 대해 재정적 지원을 해주어야 한다. 아직까지 많은 단체들은 재정적으로 자립구조를 정착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종단 차원에서 불교시민운동을 조직적으로 펼쳐 나가야 사회적 실천 운동에 불자들이 보다 많이 참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불교시민운동의 전문성을 확보하기 위한 연구 및 교육 훈련 노력도 종단이나 단체에서 관심을 많이 기울여야 할 부분이다.

불교에 대한 호의적인 인식을 끌어낼 수 있는 효율적인 불교시민운동의 프로그램 개발은 많은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다. 불교시민운동 지도자나 실무자, 나아가 자원봉사자를 대상으로 한 교육과 훈련은 불교의 사회적 실천을 좌우할 수도 있는 중요한 과제이다. 특히 일반인은 물론 상당수의 불자들도 잘 이해하지 못하는 불교의 교리와 시민운동의 관계에 대한 명쾌한 이론과 이념의 개발은 대단히 시급한 과제이다.

사족처럼 덧붙이자면 불교 용어를 일상적인 언어로 바꾸어 쓰는 것도 필요하다. 불교 용어들이 한문으로 되어 있어 일반인들은 불교가 어렵다는 인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연대 활동을 활발하게 벌여야 한다. 불교 관련 단체들 간의 연대는 말할 것도 없고 다른 일반 시민단체들과도 연대의 틀을 활발하게 만들어 나가야 한다. 연대활동은 시민운동에서 차지하는 영향력이 적은 불교의 사회적 실천운동에 커다란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현재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불교계 운동 인력이 부족한 상황을 다른 시민단체와의 연대를 통해 어느 정도 보완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각 시민단체에 불자들이 있으나 대부분의 경우 이들은 개인 자격으로 참여하고 있는 실정이다. 불교의 시민운동이 아직은 전문성이 떨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다른 시민단체에 참여하고 있는 불자들을 소중한 자산으로 활용해야 할 것이다.

불교시민운동은 다시 말하면 현대 사회에 걸맞는 새로운 형태의 신행을 개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자비심을 바탕으로 하는 불교는 사회복지에 커다란 기여를 해왔고, 지방화 시대이자 IMF 시대에 사회복지에 대한 더 큰 기여가 기대되고 있다. 물론 불교시민운동이 단순한 구호 차원의 복지활동이 주류는 아니지만 불교에 대해 무지하거나 우호적이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접근에서 유용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불교는 무엇일까? 불교는 평등사상을 바탕으로 모든 생명을 위한 자비의 삶을 추구하는 인간 중심의 종교이다. 또한 스스로 도덕적 책임을 지고 착하게 살아가는 삶의 지혜를 가르치는 종교이다. 그렇다면 도덕적 윤리적으로 타락한 현대 사회에서 불교의 가르침은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많은 문제를 해결하고 나아가 도덕적 선진국을 만드는 데 크게 이바지할 가능성을 안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를 바라보는 눈길이 호의적이기만 하지는 않다. 이것은 불교가 오늘날 어떤 구실을 할 수 있는가 하는 고민과 맞물려 있다.

불교의 가르침은 오늘날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의 해결에 중요한 구실을 할 수 있다. 현대 사회의 문제 가운데 하나는 인간 상실의 시대라는 점이다. 물질만능주의는 물질적 능력, 경제적 능력이 모든 것을 헤아리는 잣대가 됨으로써 인간을 물질로 평가하는 세상이다. 이같은 경향은 IMF 체제 이후 더욱 강해졌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없는 인간 상실의 시대에 인간 중심의 종교인 불교는 인간을 인간 본연의 자리로 되돌려보내 줄 것이다. 모든 인간은 누구나 다 부처가 될 소지를 안고 태어났으므로 소중한 존재이다. 귀하고 천하고 부유하고 가난하고를 따지지 않고 오로지 바르게 살려는 생각과 실천만이 불교에선 중요한 것이다. 또 우리 사회에는 크고 작은 갖가지 갈등들이 나타나고 있다. 남북이 갈라져 한 형제끼리 이데올로기의 갈등을 빚고 있다.

또 남쪽에서는 어느 곳에서 태어났느냐에 따라 이쪽 편과 저쪽 편이 갈라져 치열하게 맞서는 지역 갈등이 우리 국민의 정신을 황폐하게 만들고 있다. 여기에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갈등과 대립이 더해진다. 또 남자와 여자 사이에도 갈등이 있고, 나이와 세대에 따르는 갈등도 있고, 종교의 차이에 따르는 갈등도 만만치 않다. 불교의 가르침은 이같은 갈등과 대립을 통합과 화합으로 이끌 수 있다. 두루 원만하여 막힘이 없고, 갈등과 대립이 있을 때 한 단계 높은 곳에서 화합하는 원융회통의 정신이 우리 불교의 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불교가 우리에게 이렇게 많은 것을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불교가 우리 사회의 아픔을 어루만지고 고칠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 것이라고 생각한다. 불교가 내부적으로 안고 있는 문제 자체도 해결하지 못하면서 사회에서의 불교의 구실을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불교가 안고 있는 문제는 무엇인가? 우리 사회에서 불교의 위상이 낮아진 것은 고질적인 불교 집안의 다툼 때문이었다. 원래 우리 불교는 호국불교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호국불교라 하면 흔히 많은 사람들은 불교가 권력에 빌붙어 국가의 비호를 받으면서 번영을 누려왔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렇지 않다. 호국불교는 원래 이 땅이 불교와 깊은 인연이 있는 땅(불연국토설)이라는 생각에서 이 땅을 부처님의 나라로 만들겠다는 의지(정토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부처님의 나라로 만들기 위해서 이 땅을 다른 민족이나 다른 나라의 침략으로부터 지키려는 것이 바로 호국불교였던 것이다.

호국불교가 결코 왕권에의 굴복이 아님은 불교가 배척당했던 조선시대에 나타난 승병의 전통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일제 시대 이후 닭 벼슬보다도 못하다는 중 벼슬(종권)에 눈이 어두워진 일부 권승들이 권력과 결탁함으로써 호국불교의 전통을 타락시킨 것이다. ‘닭 벼슬보다 못한 것이 중 벼슬’이라는 것이 불가의 오랜 가르침이었다. 권승의 무리가 이 가르침을 잊어버리고 권력에 빌붙어 종권(宗權)을 제멋대로 휘둘러왔다.

종권을 둘러싼 종단 내부의 다툼이 정치 권력의 부도덕한 음모와 맞물려 불교를 타락시킨 것이다. 90년대 이후 진행중인 개혁 불사도 권불(權佛) 유착으로 타락한 불교를 되살리는 것이 그 핵심이다. 권승의 무리가 전체 불자의 항거에 쫓겨나면서 불교개혁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불교의 타락을 안타깝게 여긴 스님들과 재가불자들의 노력으로 권승의 무리를 몰아내고 새로운 불교의 개혁을 추진할 수 있었다.

절집을 깨끗하게 만들려는 노력들이 있었고, 떨어진 불교의 위상도 어느 정도 제자리를 찾았다. 그러나 개혁불사가 권승의 무리를 체탈도첩하여 쫓아내거나 권력과 일정한 거리를 두는 등 불교 내부의 불합리한 요소들을 고치는 데에만 그쳐서는 안 된다. 개혁불사를 통하여 시대의 변화와 요구를 과감하게 받아들임으로써 불교 중흥의 기틀을 다져나가야 할 것이다. 권승을 몰아내고 절집 살림이 깨끗해졌다고 불교개혁이 완수되는 것은 아니다.

불교의 개혁은 올바른 선 수행의 기풍이 불교 집안에 가득할 때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다. 조계종 총무원장 선출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얼마 전의 싸움은 올바른 선(禪)수행이 전 불교계에 뿌리내리지 못한 상황이기 때문에 일어난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동안 기울여 온 불교개혁의 노력과 성과를 한꺼번에 다 무너뜨리는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다. 이렇게 불교가 자신조차 추스리지 못하는 것으로 비쳐진다면 어떻게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의 해결에 불교가 이바지할 수 있을 것인가?

이런 때일수록 원융회통의 정신, 화쟁의 논리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지혜가 필요할 것이다. 불교는 포용력이 매우 강한 종교이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방편이라 말하거니와 절에 다녀본 사람들은 절의 가장 높은 곳에 산신각이나 칠성각 또는 독성각이라는 현판이 붙은 작은 건물을 보았을 것이다. 산신각은 산신령을 모시는 곳이고, 칠성각은 인간의 목숨을 관장한다는 칠성신을 모시는 곳이며, 독성각은 나반존자라는 현자를 모신 곳이다.

이 셋을 하나로 모아놓은 삼성각도 있다. 불교와는 관련이 없는 이런 건물들이 왜 절 안에 있는 것일까? 바로 방편이다. 불교가 이 땅에 들어올 때 당시 우리 선조들의 전통 민속 신앙과 맞서서 대립하고 갈등한 것이 아니라 그 전통민속 신앙을 끌어안음으로써 민중들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었던 것이다. 이제 원융회통의 정신과 방편의 묘를 살려 불교를 먼저 살려내는 것, 나아가 우리 사회를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공동체로 만들어 나가는 것. 이 시대 불교의 가장 커다란 과제이다.

4. 맺음말

우리 곁에 불교는 있는가? 불교 신자가 2천만이 넘는다는 통계도 있지만 불자가 아니더라도 불교를 만날 기회는 상당히 많다.

불교가 이 땅에 들어온 것은 1,600여 년 전, 그 뒤 불교는 우리 겨레의 정신과 삶에 보이게 또는 보이지 않게 많은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예컨대 우리 나라 문화재의 3분의 2는 불교 문화재이다.

따라서 불교를 몰라서는 우리의 문화, 우리의 역사, 우리의 전통에 대해 제대로 알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말이나 관습 중에도 불교로부터 나온 것이 적지 않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삶 속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불교에 대해 어떤 느낌을 갖는가. 많은 사람들이 말한다.

불교는 어렵다고. 또는 시대의 흐름에 뒤떨어진 낡은 종교라고. 불자가 아닌 사람은 물론이고 불심 깊은 불자들의 입에서도 이런 말을 듣는 것은 어렵지 않다. 왜 그런 말들이 쉽게 튀어나오는 것일까? 나이 많은 할머니들이 이승에서는 복 받아 잘 살고 저승에서는 극락세계에 태어나고 싶어서 열심히 시주하고 기도하는 기복신앙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에 대해 그렇지 않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불자들은 아마도 거의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 한국불교는 사회 참여나 사회 활동에 매우 소극적이었다. 불교계 일부에서는 불교가 세속의 일에 관심을 갖는 것을 좋지 않게 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불교가 사회 문제에 등을 돌리고만 있어서는 안 된다. 불교가 사회 문제에 무관심하다면 불자 개개인의 고통을 덜어주는 것도 제대로 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불국 정토 완성이라는 과제의 달성은 점점 더 어려워질 것이다.

불교시민운동은 결국 남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인식하고 고통·번뇌·괴로움을 다른 사람과 함께 나누어 갖자는 것이다. 다만 한 가지 유의해야 할 것은 불교시민운동을 펼쳐나가는 과정에서 교세 확장이나 불교의 사회적 위상 강화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부작용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불교가 종교적 이해 관계를 떠나 대중과 고통을 함께 하려 할 때 자연스럽게 불교에 대한 호의적 사회 분위기가 형성되는 것이다. 그리고 내부적으로는 한국 불교가 철저한 개혁을 요구받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자체 변혁을 이루지 못한다면 불교시민운동을 충실하게 펼쳐나가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특히 21세기를 맞이하여 국민의 삶의 질을 높이고 중생 구원을 위한 민주 정치를 이 땅에 꽃피우려는 적극적인 노력을 불교계는 아끼지 말아야 한다.<끝>

손혁재
성균관대 정치외교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정치학 박사. 현재 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 전불련 중앙위원, 재가연대 자문위원, 달라이라마 방한 준비위원회 대변인, 안양불교청년회 지도법사. 저서로 《새천년 한국시민사회의 비전》 《김대중 정부개혁 대해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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