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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불교미술이 나아갈 길
김창균 문화재전문위원
[3호] 2000년 06월 10일 (토) 김창균 문화재전문위원

1.불교미술과 신앙심

일반적으로 말하기를 미술은 자연의 표면에 드러나 있는 현상을 통하여 아름다움(美)이나 선(善)을 추구하는 순수예술이라고 한다.

이에 반하여 아름다움과 선의 추구는 물론 어떻게 하면 그것들을 통해 불교적인 이념까지도 함께 나타낼 수 있을까를 과제로 안고 있는 불교미술은, 불교사원에서 불교적인 소재를 가지고 만들어낸 모든 조형물(미술품)을 말한다. 이로 보아 불교미술은 순수예술에 대한 일종의 목적적 예술이라 할 수 있겠다.

즉, 순수예술인 일반미술은 어떤 표현되어진 대상(作品)을 매개로 관자들에게 자연의 아름다움과 오묘한 이치를 터득케 해 주지만, 이와 달리 불교미술은 사람들이(信徒) 작품을 대함으로써 종교적으로 깊은 감명을 받고 괴로움에서 벗어나 법열(法悅)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데 본래의 목적이 있는 것이다. 이렇듯 불교미술은 불교도들을 불교의 궁극목표인 깨우침의 경지에 도달케 함을 주목적으로 삼고 있는 성스러운 종교미술인 만큼, 단순히 손재주만을 앞세우고 신앙심이 깃들어 있지 않다면 그 어느 누구에게도 종교적 감흥을 줄 수 없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러한 만큼 불교미술은 신앙심이 바탕을 이루고 있을 때라야만 비로소 투영되어 있는 작가의 그 마음을 따라 마침내 부처의 세계로 들어간다고 볼 때 투철한 신앙심이야말로 불교미술 조성에 있어서 반드시 갖추어야 할 제1의 요건이라 하겠다. 신앙심이 밑바탕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작가 자신이 진정한 불교도로서 교리를 올바르게 이해함이 필수적이며, 다음으로는 교리에 입각하여 어긋남이 없도록 조성하고자 하는 세심한 배려와 끊임없이 연구·노력하는 자세가 요구된다.

왜냐하면 불교교리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작가에 의해 만들어진 불교미술품들은 오히려 불교도들에게 큰 혼란만을 야기시킬 뿐 결코 어떠한 감동도 줄 수가 없으며, 모든 경물들이 자연의 이치에 따라 존재할 때 가장 아름답듯이 종교적 질서, 즉 교리에 적합할 때라야만이 종교적 감흥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만일 거기에서 단순히 미술적 아름다움만 내비칠 뿐 아무런 종교적 희열을 맛볼 수 없고 어떠한 교훈도 얻어내기 어렵다면 그것은 이미 불교미술로서의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 하겠으며, 불교미술 본래의 목적 또한 상실해 버렸다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한 조형물이 훌륭한 불교미술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그것들을 통해 사람들에게 얼마만큼 종교적 감동을 주고 신앙심을 유발시켜 경배케 하며, 미혹의 세계로부터 얼마만큼 깨우침의 높은 경지에 다다를 수 있게 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결코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2. 현대 불교미술의 조성자세

일반미술이든 불교미술이든 간에 표면적으로는 다 같이 하나의 미술로서 무엇인가를 표현하기 위해 어떠한 형태를 이루고 있고(造型藝術), 자리한 그곳이 일반 주거공간이든, 전시장이든, 어떠한 시설이든 간에 나름대로 일정한 공간을 차지하며(空間藝術), 직접적으로 눈을 통해 의미를 전달하고자 하려는(視覺藝術) 데에는 큰 차이가 없다.

그러나 불교미술의 조형물들은 예배를 하거나, 장엄을 위한 특수한 목적 아래 생성된 까닭에 일반미술보다 덜 자유스럽고 이미 정해진 규범에 따라 제한된 형태를 이루어내며, 신앙심 유발 및 종교적 감동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지극히 한정적인 정해진 일정 공간을 차지할 수밖에 없다는 한계성을 지니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바로 여기에 일반미술과는 다른 불교미술의 특수성이 존재한다.

하지만 아무리 종교미술로서의 제한이 앞선다고 하더라도 오늘날 불교미술계의 실상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한심하게도 아무런 고민의 흔적이 없이 그 틀에 꽉 갇혀 마치 복제와 답습만이 가장 바른 길이고 올바른 전통인양 목소리를 높이고 이리저리 판을 치고 있어 한국 현대불교미술 발전의 저해 요인이 되고 있음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조금만 더 관심을 가지고 흐름을 살펴본다면 무엇이 전통이고 현대불교미술의 발전을 위한 길인지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전통은 무조건 고루하고 형식적인 것이니 무시하자는 말이 아니다. 다만 올바르게 전통을 알고 찾고 가꾸어 계승하는 가운데 새로운 것, 다시 말해 훌륭한 전통을 바탕으로 하여 현대감각에 걸맞는, 포근하게 현대인을 끌어안을 수 있는 그러한 현대 불교미술을 가꾸어 내는 데 노력을 경주하자는 것이다.

현대불교미술이란 단지 오늘날 조성된 불교미술만을 이름하지 않는다. 왜냐면 현대란 어느 한 시점에만 머무르지 않고 매 시기 시기마다 그 당시가 되기 때문이다. 즉, 삼국시대 때는 그 시대가 곧 현대요, 고려시대 역시 그 시대가 바로 고려시대의 현대가 된다. 그렇다면 결국 현대불교미술이란 그 시대의 종교적 상황과 그 시대인들의 취향에 맞고, 그 시대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쉽게 다가갈 수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의 불교미술들이 결국은 하나이면서 각기 서로 다른 특징과 개성을 지니고 있는 것은, 그때 그때마다의 시대적 상황에 부합되고 그들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조형감각과 색채감, 표현방법 등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과연 오늘을 숨쉬고 있는 우리 시대의 정서와 감각에 맞는 현대불교미술은 어떻게 조성되어야 하며, 어떠한 점들이 개선되어야 할지 지금부터라도 진지하게 논의되어져야 하리라 생각한다.

일반미술과 달리 불교미술은 전통성이 강한 종교미술로서 정통성이 존재하지 않는 한 바른 불교미술이라 말할 수는 없다. 사실 ‘전통’이란 우리가 어디에 있든 우리를 가장 우리답게 해주며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이어주는 연결고리로서, 바로 그러한 전통을 바탕으로 했을 때 비로소 새로운 것(현대적인 것)이 탄생되는 만큼 이어져오는 전통을 충분히 섭렵하고 활용하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그것만이 곧 현대불교미술을 이끌어가고 발전시켜 나아가는 우리들의 바른 자세라 하겠다. 그러나 전통이 비록 현대불교미술 작가들로서 반드시 익혀야만 하는 창작의 기초이기는 할지라도, 단순히 옛것을 그대로 따라 모방하는 맹목적 전통주의에만 머무른다면 전통을 지키는 것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퇴보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예술이란 생각(思考)과 재능(技術)이 합쳐져서 승화되는 것이라고 볼 때, 불교미술 역시 개개의 결과는 비록 ‘불교’라는 하나의 큰 틀 아래 놓여 있어 유사해 보이기는 할지라도 어느 것 하나 동일할 수 없는 것이다.

현대불교미술 작가들 또한 예술가이자 불교 전파를 담당하는 포교사인 만큼 단순한 손기술에만 매달리지 않고 몸과 마음(心身)을 가다듬어 올바른 마음가짐으로 기량을 연마해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작품을 제작함에 있어서도 한낱 이익을 가져다주는 상품으로서가 아니라, 존숭의 대상인 성보(聖寶)를 조성한다는 마음자세를 견지하고 불교미술을 이루어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많이 배우고, 많이 생각하고 탐구하며, 많이 보고 관찰하며, 많이 연구하고 수련해야만 한다고 제시한 ‘4다론(四多論)’에 입각하여 제작활동에 임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신앙심을 바탕으로 불교교리를 철저하게 이해·숙지하고 기법을 수련해야 한다는 것과도 일맥상통할 뿐만 아니라, 마음 없이 손만 따라간다면 이 또한 눈을 떴으되 볼 수 없는 것과도 같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수련의 자세와 더불어 작가가 염두에 두어야 할 또 하나의 중요한 자세는 재료를 어떻게 바르게 선택하고 적절하게 사용하느냐이다. 미술품의 재료는 표현기술 못지 않게 보는 자로 하여금 얼마나 감동을 더해 주며 어느 정도의 다른 느낌을 제공해 주느냐를 결정짓는 주요 요소이다.

그렇기 때문에 재료를 선택하고 취함에 있어서는 만들고자 하는 조형물의 쓰임새와 내용에 얼마나 적절한지를 신중히 고려해야 하며, 자칫 세속적인 이익과 상업성을 이유로, 그리고 수요자의 선호도와 인기도에 지나치게 매달린 나머지 전통성에 어긋나는 부적절한 재료를 선택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고려시대 불화와 조선시대 불화를 비교해 보자. 많은 정성을 들여 조성했음을 한눈에 알 수 있을 정도로 고급스러운 비단 바탕재료에 고급 채색안료를 사용한 고려시대 불화와, 거친 베바탕에 두텁고 탁하며 원색적인 채색사용을 통해 드러나는 조선시대 불화를 보면 그 차이를 단박에 알 수 있다.

물론 불교를 국교로 삼았던 고려는 고려시대대로, 억불정책으로 일관했던 조선은 조선시대대로 당시의 사회적·현실적인 여건이 크게 작용했겠지만 무엇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재료의 선택에 대한 작가의 마음자세가 아닐까 한다. 만일 석굴암 본존불과 같은 큰 상을 만드는 데 돌 대신 흙이나 나무를 재료로 했던들 과연 그와같은 위엄성을 담아낼 수 있을까? 그리고 작고 예쁘장한 동자상을 조성함에 있어 돌(화강암)이나 금속을 사용하는 것이 과연 적당할까?

목불은 목불로서의 친근감을 주고, 철제·동제 등 금속제 불상은 그들 나름대로의 재료적 특성을 드러내준다. 결국 재료에 따라 표현되어진 작품의 느낌이 크게 달라진다는 것이다. 이렇듯 재료라는 것도 한 작품의 성패를 좌우하는 것으로서, 그만큼 재료의 선택은 중요하다. 그리고 선택된 재료를 어떠한 방법으로 사용하여 효과를 배가시키느냐는 것 또한 중요하다. 그저 단순히 옛 방법을 좇아만 간다면 훨씬 수월하고 그럴듯해 보이며 짧은 시간에 많은 것들을 만들어낼 수는 있을 것이나, 그것은 더 이상의 발전을 포기하는 것과도 같다 하겠다.

또한 종교적인 감흥의 폭을 최소한으로 줄여버림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와 반대로 재료를 올바르게 선택하여 사용한다 함은 경제적·사회적 여건 등 여러 가지 어려움이 뒤따르기는 하지만 발전을 뜻하며, 이를 매개로 불교도들에게 신앙적 감동을 전달하고자 하는 작가의 최선의 마음비침이라 하겠다. 이와 더불어 불교미술의 표현방법 역시 현대불교미술 작가들이 절대로 간과해서는 안 될 것 중의 하나이다.

즉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알맞고, 어울리고, 좋아할 수 있는 구성(구도)과 형태(조형), 선과 색채는 과연 무엇이겠는가에 대해 쉼없이 고민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보통 우리는 일반미술품이나 불교미술을 대할 때 표면에 드러나 있는 형태와 색채 등의 피상적인 것에 가려 잘 알아낼 수 없고 지나치기 쉬운 것이 있는데, 그것은 미술의 가장 근본을 이루는 ‘구성’이다. 구성이란 보이고 싶은 대상을 어떻게 하면 가장 효과적으로 짜맞추어 나타내는가 하는 단계로서 구도의 설계를 말한다.

다시 말해서 표현하려고 하는 대상에 따라 구도를 설정하는 과정인 것이다. 한 가지 예로 아미타불화에서는 본존인 아미타 부처님이 가장 주가 되고, 지장시왕도에서는 지장보살이 주존으로 중요시 되듯이 그들이 주재하는 세계 역시 다르며, 주존에 따라 신도들에게 주는 느낌까지도 서로 다르다. 그래서 불화의 구도를 설정함에 있어서도 당연히 하늘의 세계(극락세계)를 나타낼 것이냐, 명부의 세계(지옥의 세계)를 표현할 것이냐에 따라 극락을 향한 수직상승 효과의 구성으로 할 것인지, 아니면 수평으로 펼쳐지는 하향식 구도법을 택할 것인지 서로 다른 구성을 시도해야 한다.

그렇지만 오늘날의 기성작가(장인계층)들에 의해 조성된 작품들을 보게 되면 제법 높은 수준으로 간주될 만한 작품들까지도 구성 설계가 전혀 고려되지 않은 채, 전승되어 오는 본(本 : 밑그림)에 의한 구성만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획일화된 구도를 보이고 있어 다른 내용의 그림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느낌이나 감흥의 차이가 없음을 지적하게 된다. 물론 전통성이 강한 불교미술은 어떠한 틀을 벗어나서는 안 되는 보수적인 면도 있기는 하다. 그렇지만 적어도 작품의 내용에 따른 적합한 재구성의 시도나 탐구 자세는 반드시 필요하며, 꼭 가져야 할 현대불교미술 작가들의 몫이라 하겠다.

미술에 있어서의 ‘형태’란 조형성과도 같은 것으로 ‘구성’과 함께 한 작품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주느냐 마느냐, 즉 나타내고자 한 대상을 얼마나 실감나고 걸맞게 묘사하였는가를 판가름하는 주요 요소이다. 그러한 만큼 성격이 각기 다른 대상에 따라 그에 알맞는 비례와 형상을 이루어 내어 감동을 배가시켜 나아가야 한다고 본다. 그러나 불교미술은 종교 미술인 관계로 가끔 어느 주된 한 상을 중심으로 무리지어질 때에는 통념을 벗어나는 경우도 있음을 고려해야 한다.

즉, 고려·조선시대의 아미타 그림이나 존상화(尊像畵)의 경우 본존불을 다른 상들에 비해 유난히 크게 그린다거나, 또는 기타 보살상들의 순진무구함을 강조하기 위해 어린애의 모습과 같이 묘사하고 있음은 주된 상에 따른 표현대상의 변화로 이해되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전체적인 형태와 함께 손·발·옷주름 등의 보다 과학적인 세부 묘사 역시 작품의 생명력을 증진시켜 주는 중요한 요인으로, 정확한 데생에 의한 사실적 묘사가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석굴암을 위시한 통일신라기의 조각들과 고려시대의 불화가 오늘에 이르기까지도 우리에게 살아 숨쉬는 듯 진한 감동을 주는 것은 바로 놀라울 정도로 정확한 신체 표현과 그에 따라 사실성이 부여되어 있기 때문이라 하겠다. 현대에 살며 현대교육(과학적 교육)을 받은 작가들마저도 이러한 점들을 외면한 채 쉬운 길만 찾아가고, 비판과 검토 없이 언제까지나 전해내려오는 본만을 교과서 삼아 기계적으로 조성해낸다면, 그것은 더 이상 창조도 아니요, 생명력을 통째 잃어버린 것과도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작품의 생명력 유지에는 이외에도 어떠한 선을 사용하고 어떤 색채감(분위기)을 부여해야 할 것인지도 비중 있게 검토되어야 한다. 조각의 경우 석굴암의 조각처럼 건장하고 장대한 긴장미 넘치는 상을 조성함에 있어서는 둔탁하고 맥빠진 선보다는 박력이 있으면서도 유려함이 돋보일 때 비로소 성공적이라 할 수 있으며, 고려시대의 단아양식 불상에서 처럼 우아한 자태의 상에는 탄력적인 곡선을 구사함으로써 활기를 불어넣어 주고 효과를 증대시킬 수 있을 것이다.

평면적인 그림의 경우는 화면 위에 대상을 입체적으로 나타내야 하므로 단조롭고 일률적인 선보다는 각 요소에 따라 강·약과 완·급이 있고, 비·수의 변화 있는 선을 적절하게 사용하는 것만이 훌륭한 결과를 낳을 것이다. 직선과 곡선의 조화를 가장 잘 보여주는 건축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특히 기둥과 지붕의 선 처리를 어떻게 하느냐는 건축의 생명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각 시대마다 지붕과 추녀의 곡선을 달리하고 있음은 선의 선택 또한 당시의 사회상과 미적감각과도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좋은 실례라 하겠다.

따라서 옛것을 그대로 복원한다는 차원과는 달리 새로이 지어지는 건축물일 때는 어디에(주변환경) 세울 것인지와, 어떤 목적으로(용도) 짓는지, 그리고 규모는 얼마나 되는지, 쓰이는 재료는 무엇인지를 충분히 고려하여 어떠한 선의 만남을 연출해내는 것이야말로 오늘날 작가들이 가장 고민해야 할 부분이다. 다 아다시피 눈으로 볼 수 있는 객관 세계의 모든 사물은 각기 그들만이 지니는 특유의 형체와 함께 고유한 색깔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각각의 형상과 고유 색채가 있어야 입체감은 물론 분위기를 더해주고 감동을 제공한다.

그리하여 예로부터 사물을 표현함에 있어서는 각각의 대상에 의거하여 형상을 묘사하고 색채를 나타내야 함을(應物相形, 隨類賦彩) 강조하였으며, 미술가(작가)의 가장 기본적인 기교로 여겨왔다. 오늘날에 있어서도 표현 주제의 색깔을 분위기 고양은 물론 자연과의 조화를 유도하는 주요 요인으로 여겨 손꼽고 있는데, 그만큼 각기 대상물의 색채가 갖는 의미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각기 대상물이 지니고 있는 고유 색깔은 신앙적으로도 종교적 분위기를 돋구어 주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한 의미로 볼 때 각 주제에 따른 색채의 올바른 선택과 색채의 사용 방법 숙지는 작가들이 갖추어야 할 필요불가결한 요건이라 하겠다. 특히 자연의 사실적 표현 대신 불교이념을 구현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는 불교미술은, 종교적 분위기 창출을 최우선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색채를 사용함에 있어서도 각기 색들이 갖는 성질이라든가 의미, 그리고 효과까지도 충분히 고려한 뒤에 임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고려시대 불화들 가운데 가장 뛰어나다고 할 수 있는 ‘수월관음도’를 보면 피부빛깔이 마치 투명할 정도로 밝고 곱게 처리되어 있음을 볼 수 있는데, 피부색을 찾아내는 데 있어서 표면채색이 아닌 뒤쪽에 호분이나 색을 칠하여 바깥으로 은은하게 색감이 베어나오게 하는 새로운 기법의 배채법(背彩法)을 사용함으로써 깊이감 있고도 신비한 느낌을 자아내도록 하였다. 아마도 중생을 구제하는 대표적인 자비의 화신으로서의 모습을 보다 부각시키고자 한 계획성 있는 채색 방법으로 보아도 좋을 듯 싶다.

이는 어찌 보면 고려시대 당시의 현대불화인 셈이며, 새로움은 모름지기 전통을 근본으로 하여 탄생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좋은 본보기라 하겠다. 그러한 의미에서 오늘날의 현대불교미술 역시 올바른 전통을 바탕으로 하되 새로워야 하며, 개성을 발휘하여 만인들의 공감대를 형성해야 한다고 본다.

그러기 위해 현대불교미술 작가들은 깊은 신앙심과 교리의 올바른 이해를 바탕으로 우수한 옛것의 도상 해석과 구성, 선묘법, 채색법, 표현 방법 등을 부단히 익히고 선조들의 뛰어난 예술성을 찾아내어 현대인들의 심성에 적합하도록 계승·응용해내는 능력 배양에 총력을 기울여야 하리라 생각한다.

3. 한국 불교미술의 오늘과 내일

한국의 불교미술은 1970년대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양적으로 수많은 불사(佛事), 특히 대량의 대형불사가 전국 곳곳에서 앞다투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볼 때 외형적으로는 적어도 조선시대 영·정조(英·正祖, 1725∼1800)대 이후 최대의 황금기를 구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 같다.

하지만 그 안쪽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어떻게 생각하면 지금까지 우리 나라의 거의 모든 불사를 담당했던 제작자는 도제식 훈련과정을 거친 전통적인 장인(匠人)계층이 주도해왔다고 볼 수 있으며, 이들의 뛰어난 제작 기술만이 우리의 불교미술을 대표한다고 여겨왔음 또한 부인할 수 없다. 물론 오랫동안의 기술연마로 일부는 고도의 기량과 수준을 겸비하여 걸작을 만들어내기도 했지만, 대다수는 배껴내기(模作)와 답습만으로 일관하고 있어 과연 이러한 결과물들까지도 한국의 현대불교미술로 간주될 수 있을까 스스로 묻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러한 점들이 바로 찬란한 외면에 대한 꼭 그렇지만도 않은 초라하기 그지없는 내면인 것이다. 이러한 데는 그동안 현대불교미술이 나아갈 방향에 대해 전혀 관심을 두지 못하고 당장의 현실에만 얽매였던 모두에게 그 책임이 있다 하겠다. 이제부터라도 현대에 걸맞는 불교미술을 조성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몇 가지 방안에 대하여 기왕의 발표된 논고(문명대, 〈한국 현대불교미술의 과제와 진로〉, 〈불교미술의 보편성과 현대화의 과제〉)를 중심으로 논의해볼까 한다. 먼저 교리에 입각한 불교미술 조성의 기본방향(원칙) 제시를 들 수 있다.

불교미술은 일반미술과 마찬가지로 조형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순수예술의 성격을 지님과 동시에, 불교 이념도 상징적으로 반영시켜 교리 전파를 해야 하는 특수 목적의 종교미술이다. 물론 작가의 개성도 중요하지만 이처럼 교리에 따라 대중을 교화해야 하는 불교미술은 외형적인 아름다움도 아름다움이지만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다시말해서 작품을 조성해내는 작가의 기량도 높아야 하고 작품을 접하는 대중들이 어려운 불교교리의 터득은 물론 불교에 귀의할 마음을 갖게 해야 한다.

특히 우리 불교는 의식이나 신앙행위를 통해서 해탈의 길에 이르는 대승불교로서 예배나 관상을 위한 불교미술이 반드시 필요하게 되니, 그것들을 통해 신앙과 의식행위를 할 수 있고, 교리를 쉽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하며, 자비로운 행위를 할 수 있도록 교리와 불교도상에 입각하여 조성되어야 함은 기본원칙이라 하겠다. 만일 교리와 불교도상을 외면한 채 창작이란 미명 아래 작가의 개성만을 중시한 채 마음대로 제작한다면 종교미술도 아니고 일반미술도 아닌 이상한 것이 태어날 뿐이다.

우리의 불교미술은 우리 나라에 불교가 전래된 이후 일천육백여 년 동안 시대 상황과 지역에 따라 지속적으로 발전을 거듭해 다양한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차이가 없고 하나의 보편적 원리에서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를테면 불상이나 불화의 경우 어느 시대 어느 지역을 막론하고 대부분 유사성과 통일성을 보이고 있으나 그렇다고 천편일률적인 것만을 조성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하나라는 원리는 지속되면서도 사실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변화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쉬운 예로 석가모니상을 들어보겠다.

통일신라 때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동안 많은 석가모니상이 만들어지고 그려져 왔다. 그러나 오른쪽 어깨가 드러난 우견편단에 항마촉지인을 짓고 있는 것은 어느 시기를 막론하고 같지만, 각 시대에 따라 얼굴의 모습이 다르고 신체의 특징이 차이가 남은 바로 불상이라는 하나의 대원리 아래 변화를 보여 주는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변화야말로 전통성을 지닌 불교미술에 늘 신선한 영감과 종교적 감흥이 일어나도록 하는 요체가 되었다 할 것이며, 전통을 바탕으로 한 현대적 감각의 반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건축의 경우에 있어서나 기타 미술에 있어서 자연과의 조화를 이루도록 하는 것은 고뇌에 지쳐 있는 불도들을 위한 안식처로서의 장을 마련한다는 데 의미를 둘 수 있다. 도심 속의 사찰은 단층 위주의 목조건물 보다는 현대식 건축을 통해 장을 마련함이 좋을 것이고, 산 속의 절 모습은 콘크리트·돌 집보다는 곡선이 완만하게 흐르는 목조건축이 휠씬 어울릴 것이다. 그리고 도심 속이라 하더라도 현대식 건축에 전통 양식을 가미하는 것 또한 의미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산세와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건물이나, 터무니없이 장대하게만 조성한 조각, 그리고 건물(법당)의 크기와 어울리지 않는 불균형스러운 모습의 여러 상들과 전혀 엉뚱한 내용에 거부감을 주는 원색적인 그림들은 결코 주위 환경과 함께 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찾는 이들의 심신을 편안하게 해주지도 못하여 안타까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지금처럼 무작위적으로 펼쳐지는 이러한 불사에 대해 사찰측이나 제작자 모두 더 이상 방관하지 말고, 전통의 미를 살리면서도 세련미 넘치는 현대 감각의 불교미술을 창조해내는 데 함께 머리를 맞대고 심사숙고하여야 할 것이다. 다음은 불교미술 작가의 양성과 관리 방안에 대한 논의로서, 전통적인 도제식 작가양성에 대한 장·단점과 현대식 교육에 대한 장·단점을 비교 검토해야 하리라 생각한다.

도제식 과정을 통해 배출된 기성 작가들은 여건상 기량면에서는 뛰어나다고 할 수 있겠으나, 교리적 측면이나 미술 이론에는 약세를 보일 수밖에 없다. 반면 대학교육을 받은 소위 현대불교미술 작가들은 기량면에서는 도제식에 비해 다소 뒤지지만, 과학적 교육(데생과 색채학, 구성 등)과 불교 이론이 바탕을 이루고 있음이 장점이다.

이 두 가지의 작가 배출경로 모두 어느 쪽이 더 바르고 어느 쪽이 옳지 않다고 하기에는 곤란한 점이 많이 있다. 가능하다면 이 두 가지 과정을 합쳐 놓은 새로운 교육제도가 바람직할 것이다. 즉, 이론과 실기를 동시에 교육하여 본격적인 현대불교미술 제작을 담당케 하는 불교미술 전문대학 설립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 기관을 통하여 기성작가들의 보수교육을 정착화함으로써 이론의 보충과 흐름 파악, 새로운 기술(표현기법)의 습득 등을 지속토록 하여 배출(양성)과 관리의 효율성 증대에 역점을 두어야 하리라 생각한다. 사실 새로운 것의 창출이란 끊임없는 이론적 연구와 표현기술의 연마에 달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세번째의 논의는 불교미술의 현대화와 대중화 방안에 대한 것으로 여간 까다로운 문제가 아닐 뿐 아니라, 앞으로도 두고두고 풀어야 할 과제인 것이다. 현대화와 대중화는 현대인들이 주가되는 만큼 아무래도 불교미술에 대한 올바른 비평과 이론의 개발, 표현 방법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이루어질 수 있는 작가와 이론가(학자) 간의 토론의 장 상설화가 급선무일 것 같다.

앞에서 이미 논의했듯이 우리의 불교미술 시장은 지금까지도 거의 장인 계층 의해 좌지우지되고 있는 실정으로, 비평에 대한 거부감은 매우 큰 편인 반면, 표현방법의 연구나 신기술의 연마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음 또한 다 아는 사실이다. 심지어는 그들의 작업만이 옳고 훌륭하다고 생각한 나머지, 대학교육을 통해 배출된 작가들과의 시시비비가 적잖이 일어나고 있음도 볼 수 있다.

이러한 일들은 결단코 한국 불교미술의 발전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을 것이며, 퇴보를 자초할 것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틈을 좁히고 모자란 점들은 서로 보완할 수 있는 만남의 시간이야말로 반드시 해결되어야 할 필수과제임은 두말 할 필요조차 없다. 이를 기초로 했을 때라야만이 한국 불교미술의 현대화는 이루어질 것이고 대중화 또한 저절로 이룩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리고 불교미술을 필요로 하는 수요자(사찰측)와 공급자(작가)의 현대불교미술에 대한 인식 제고 역시 매우 중요한 문제일 것이다.

왜냐하면 공급자는 수요자의 요구에 응해야만 하는 현실적인 면이 뒤따르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수요자를 설득시켜 원리에 입각하여 조성해야 하는 사명감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오늘날 사찰에 가보게 되면 전혀 교리에 맞지 않는 작품들이 사찰측의 요구에 따라 억지 조성·봉안되고 있는 예를 심심찮게 발견하게 된다. 가령 대웅전의 주존불을 모시는데 전혀 엉뚱한 부처님 상을 조성한다거나, 후불탱화로 영산회상도를 봉안해야함에도 불구하고 전혀 다른 내용의 불화가 걸리는 경우가 그것이다.

그것은 옛것을 따르자니 배껴내기로 말이 아니고 해서 나름대로 새롭게 하는 것일지도 모르나 사실은 이론적인 교리, 즉 교리에 따른 상의 배치를 모르고 있음이다. 더욱이 위험천만한 일은 수요자와 작가 모두 그것이 잘못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절대로 그러한 것들은 현대불교미술도 전통의 답습도 아님을 우리 모두가 지적해 낼 수 있을 때 우리의 현대불교미술은 발전될 수 있는 것이다.

불교미술의 여러 가지 운동 중에서도 현대화와 대중화는 보통 전통불교미술에 대한 개혁적인(서양적인) 현대불교미술로 간주해 버리는 경향이 짙다. 그러나 이러한 분류는 자칫 전통불교미술은 케케묵고 저급하고 시대가 뒤떨어진 것인 반면, 현대불교미술은 동양화이건 서양화이건 불교적 소재를 사용한 현대적인 미술로 치부해버릴 소지를 다분히 안고 있다.

따라서 불교미술(대승불교미술)은 조성규범이 엄격하고 봉안 절차와 대하는 법도가 까다로운 것인 만큼, 오히려 전통성이 강조되는 의식과 신앙용·장엄과 장식용, 그리고 순수한 포교와 감상용 세 가지로 구분함이 타당하리라고 여겨진다. 이 가운데 포교와 감상용 불교미술은 예배나 관상의 대상이 되는 의식과 신앙용·장엄과 장식용 미술에 비해 대중화 운동에 가장 적합하다 하겠다.

그도 그럴 것이 신앙용과 장식용은 지나치게 규범화되어 있어 교리를 이해 못하고 불교상식을 알지 못하는 한 접근이 용이하지 않지만, 감상용은 대체적인 내용만 알아도, 그리고 꼭 교리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쉽게 표현된 만큼 가깝게 다가가고 흥미를 느끼리라 여겨진다.

그러한 의미로 볼 때 1980년대부터 시작된 “한국불교미술협회” 주관의 ‘한 집 한 부처님 모시기 운동’은 포교와 감상용 불교미술의 대중화의 첫걸음이 아닌가 한다. 신앙·장식용 불교미술이 종교미술로서의 전통적인 규범과 틀을 중요시하는 반면, 감상용 불교미술은 직접적인 신앙의 대상보다는 상징적이고 해설적인 것, 또는 불교 정신을 재구성하거나 반영한 미술을 말한다.

그러하기 때문에 현대미술에 젖어 있는 일반 사람들에게는 어쩌면 감상용 불교미술이 더욱 접근하기에 용이하고, 거부감 없이 다가갈 수 있어 포교에 한층 더 효과적임에는 틀림이 없다. 불교의 대중화 운동과 함께 시대 상황에 부응한 도시 사원(포교당)의 폭발적 증가로 감상용 불교미술은 발전은 물론, 대중과 함께 함으로써 보다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갈 것임에 틀림없으리라 생각한다.

지금까지 한국의 현대불교미술이 안고 있는 현상과 풀어 나아가야 할 과제, 그리고 불교미술의 현대화와 대중화에 대하여 개략적으로나마 살펴보았다. 지금까지는 이러한 것들에 대한 본격적인 관심이나 대응책 마련이 되지 않았었지만, 앞으로의 지속적인 연구와 정책수립으로 해결될 가능성은 충분하다 하겠다.

또한 전통을 바탕삼고 신앙심을 앞세워 현대감각에 맞는 작품 창조를 위해 치밀하게 연구하고 진지하게 노력한다면, 불교미술의 현대화는 반드시 이루어질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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