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희승 조계종 총무원 기획과장

1. 시작하는 말

얼마 전 한 교계 신문은 ‘불교정화운동’을 20세기 한국불교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선정하였다.

그만큼 근현대불교사에서 정화가 차지하는 비중은 지대하다. 그러나 정화에 대한 역사적 평가1)는 찾아보기 어렵고, 정화에 대한 불자들의 인식 또한 정리되어 있지 않다. 더욱이 지식층 불자들은 특히 정화에 대하여 부정적인 이해가 많으며, 이것은 곧 교단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져 바른 교단관 정립에 장애가 되고 있다.

왜곡된 교단관은 곧 뒤틀린 신행관을 낳고 이것은 다시 불제자로서의 정체성 형성에 장애가 되고 있다. 이로 인하여 한국불교계, 특히 조계종단의 불자대중은 혼란스러워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제 교계에는 바른 교단관 정립과 불제자들의 정체성 형성에 장애가 되어온 ‘승단 정화운동’에 대하여 진지한 검토가 필요한 때이다. 교계에 만연한 사상적 혼돈을 정리하기 위해서도 정화를 비롯한 근현대불교사에 대한 연구와 평가는 빠를수록 좋다.

불교사 연구자뿐만 아니라 불자 대중과의 활발한 논의를 통해 정화의 원인과 결과를 진단하여 불교계의 발전에 고무적인 결과물을 도출할 때가 되었다. 이 글은 정화의 일반적 인식을 검토하여 정화에 대한 바른 이해에 도움이 되고자 쟁점을 중심으로 정리해 본 것이다. 정화에 대한 인식 편차만큼이나 논란이 예상되지만, 본격적인 논의를 위한 문제 제기로 보아주기 바란다.

2. ‘정화’에 대한 개념

교계에 승단 정화에 대한 개념적 합의는 없다. ‘정화’ 또는 ‘정화운동’이라는 표현이 가장 일반화되어 있으나 부분적으로 ‘법난(法難)’ 또는 ‘불교 분규’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먼저 법난과 분규라는 개념은 대체로 일맥상통하는데, ‘불교 자체의 내재적인 원인에서보다는 외부로부터의 충격에서 기인하는 것’2) 또는 ‘이승만 대통령이 정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저지른 법난’3)이라는 주장을 말한다.

한편, ‘정화’라는 개념을 일반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조계종단에서는 명확한 개념 정의를 찾기 힘든데, 다만 선우도량 한국불교 근현대사연구회는 이런 정의를 하고 있다. ‘淨化’란 비구승들이 내세웠던 구호로서, 대처승을 대상으로 한 불교교단의 정화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정화라는 용어가 일반화된 것은 비구, 대처의 분쟁에서 실질적으로 비구측이 승리하게 됨으로 역사상 勝者의 구호와 명분이 정당화되고 일반화되는 예를 따르고 있다고 볼 수 있다.4) 이 글은 정화 개념의 정착과정을 잘 표현하고 있다.

당시 정화운동 주체들은 ‘정화’라는 개념을 일관되게 사용하였으며, 그 배경은 ‘혼탁했던 승단의 왜색(倭色)을 말끔히 걷어내고 승단의 위계질서를 세운다’5)는 뜻이었다. 정화운동 당시 비구승단의 일지를 묶어 간행한 《한국불교승단정화사》6)에서는 ‘승단정화’라는 개념을 사용하였는데, 이것의 문제의식은 역시 위와 같은 것이었다.

종합하여 볼 때 승단정화를 ‘법난’이라 규정하는 것은 당시 교계에 정통성을 자부하고 있던 비구승들의 역할을 완전 부정하는 문제가 있을 뿐 아니라 현실적으로 정화로 환골탈태한 조계종의 실체를 규명하기 어려운 문제가 있다.

또한 ‘불교 분규’라는 개념도 불교는 곧 부처님의 법인바 법에 어떻게 분규가 있겠는가? 단지 법을 따르는 제자들의 분규일 뿐이다. 이렇게 볼 때 ‘불교 분규’란 정확한 개념으로 볼 수 없고 오히려 ‘승단 분규’ 또는 ‘종단 분규’가 타당하나 이것 역시 몰가치한 관점으로 정화라는 역사적 운동을 불교정신으로 분석하는 개념이라 보기에는 한계가 있다. 아무튼 이 글에서는 20세기 한국불교계의 정화운동에 대하여 ‘승단 정화’라는 개념이 가장 타당한 개념이라는 점에 동의하며 그 역사적 배경과 원인을 살펴보도록 하자.

3. 정화의 역사적 배경과 원인은 무엇인가

1) 이승만 대통령의 야욕과 일부 승려의 종권 찬탈음모설

정화라는 개념을 부정하고 법난 또는 분규로 이해하려는 입장의 가장 중요한 근거가 ‘정화는 이승만의 유시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불교정화’로 왜곡되어 온 한국불교 분규의 발단은 주지하시는 바와 같이 한 정치인의 정권유지를 위한 욕망과 그에 부화뇌동한 일부 승려들에 의해서 시작되었던 것입니다.(우백암 : 10)

불교분쟁은 불교의 역사적 흐름을 인식하지 못한 일부의 수행승이 정화라는 미명하에, 편집스런 이승만 대통령의 유시를 계기로, 이에 부화하여 감행한 교권 쟁탈극(정태혁 : 39) 이러한 입장은 승단정화가 당시 기독교 신자였던 이대통령이 자신의 정권 유지를 위하여 해방 이후 불어닥친 서구의 문화적, 종교적 침략에 편승, 한국 최대의 종교인 동시에 반대세력인 불교조직을 약화시키고자 의도적으로 저지른 법난(우백암 : 14)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 주장은 교계 불자들에게 상당히 광범하게 수용되고 있다. 특히 이승만이 독실한 감리교 신자였고 친일파 비호에다 독재자였기에 그가 불교계를 탄압하였다는 주장은 매우 설득력 있는 것이 사실이다.7) 그러나 이 주장은 보다 객관적인 논증이 필요하다. 즉 이승만의 정화에 대한 개입 수준, 그 방법과 결과 등이 정밀하게 설명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일제시대부터 현재의 김대중 정권에 이르기까지 역대 정권과 불교 관계를 비교해 볼 때 이승만이 박정희, 전두환, 김영삼에 비하여 더 직접적이고 강도 높게 불교계를 탄압을 했다고 할 수 있을까? 예를 들어 전두환 정권의 ‘10·27법난’과 김영삼 정권의 ‘3·29법난’보다 이승만 정권이 더 극렬한 탄압을 하였다는 직접적인 근거는 없다.

문제는 이승만 대통령의 4∼5차례의 정화 지지 유시8)인데, 독재정권에서 대통령의 유시가 가진 영향력은 지대한 것이지만, 문교부와 내무부 등 관계당국은 상대적으로 비구-대처 양쪽의 입장을 고려하는 정책을 구사한 것으로 보이기에 ‘법난’이라 규정할 정도로 정권에 의한 불법과 사찰의 훼불 행위가 있었다는 증거는 찾기 어렵다.

특히 이승만의 탄압이 정화의 원인이었다는 주장의 문제점은 당시 ‘비구-대처’라는 불교계의 본질적 모순을 설명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 그러므로 이승만 정권의 개입은 외적 변수는 될지언정 근본원인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승단정화운동의 원인은 과연 무엇인가.

2) 교단에 일제 잔재를 청산하고 정법을 구현하려는 운동

승단 정화는 승단을 맑게 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승단을 흐리게 한 것은 무엇인가. 승단의 혼탁은 바로 부처님의 율장을 위배한 대처승이 교단의 주류가 된 것을 말하며 그 시발은 일제 식민정책의 산물이었다.

일제는 식민정책 차원에서 한국불교의 전통을 보존하고 있던 승려들에게 파계를 조장하여 일본불교식 대처승 제도를 이식하였던 것이다.

일제 강점기 이전 1천5백여 년의 한국불교사에서는 대처승이라는 개념조차 없었으며, 그것은 계율 파계죄로 승단에서 추방당하는 금기사항이었다. 이것은 불교의 전통을 간직하고 있는 모든 나라의 역사에서 그러하다. 그러나 일본불교는 메이지 정권의 대처육식 허용조치9)를 계기로 승려들의 세속화가 확산되었는데, 일제는 식민지 조선에 이 제도를 이식하였던 것이다. 물론 한국불교계에 대처 주장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한일합방 전후 만해 한용운은 1910년 3월과 9월에 중추원과 통감부에 ‘승니결혼허용’ 건의서를 제출하였고, 《조선불교유신론》에서도 이 주장을 반복하였다. 이 무렵 송광사와 같은 전통 사찰에서 대처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10) 그러나 이것은 부처님의 계율과 한국불교의 전통에 비추어 볼 때 파계행이었다.

그래서 당시 교계에 한국불교의 전통 즉 청정비구의 지계(持戒)정신을 지키려는 운동이 전개되었는데 그것이 백용성 선사 외 127명의 승려들이 5월과 9월에 총독부에 대처 허용을 반대하는 건백서11)를 제출한 일이다. 이 사실은 〈동아일보〉(1926. 5. 19)에 보도되었는데 “취처육식은 …… 불교 교지에 버스러진 일로 조선불교를 망케할 장본이라 …… 불교의 장래를 위하야 취처육식 등의 생활을 금하야 달라는 뜻의 장문 진정서를 제출하였다.”고 적고 있다. 또한 같은 시기인 1926년에 중앙불전 교장 박한영 스님은 《계학약전(戒學約詮)》이란 계율학 교재를 편저하여 학인들의 지계정신을 고취하고자 노력하였다.12)

이 배경은 당시 본말사 운영의 기준이 된 ‘본말사법(本末寺法)’ 중 주지를 ‘비구계 수지자’로 한정하였던 것을 일제가 대처승도 할 수 있게 개정하려 하자 이를 막으려는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이런 운동에도 불구하고 일제 총독부는 1926년 10월에 비구계 자격을 삭제하도록 종용하여 1929년까지 대부분의 본사가 이를 수용하게 된다.13) 이처럼 처자식을 가진 승려도 본말사의 주지가 될 수 있게 되자 사찰은 급속히 세속화되었다.

전통적으로 청정도량이었던 사찰이 대처승들의 가정생활처로 전락하자 많은 문제가 발생하였다. 먼저, 사찰이 대처승의 생활터전으로 타락하여 갔다. 1935년 경기도에서 ‘28개 사암을 조사한바 개운사, 신흥사 등 10개사에서 30호가 음식점을 경영하여 250여 명의 승려들이 생활하고 있었다.’고 한다.14)

대처승들은 처자식을 부양하기 위해 사찰에서 음식점 운영하면서 밥 이외에도 술과 고기를 팔았으며, 심지어 기녀들까지 출입하여 청정한 수행도량은 유흥지로 변해 갔다. 총독부도 풍기단속 차원에서 각 도지사에게 사찰정화 대책을 지시할 정도였다. 이에 각 도는 본산주지회의를 소집하여 ‘승려의 부녀 기타 가족을 사찰 내에 상주시키며 속인적 생활을 함은 조선사찰의 승규에 적당치 않은바 금지할 것’ 등 10여 개 주의사항을 시달하였다.15)

총독부의 이러한 방침은 전국 사찰에 대대적으로 추진되었다. 1936년 동대문서가 관내 사찰의 상황 보고에 의하면――사찰에서 음식점 영업하는 것을 폐업케 한 것이 10호, 자발적으로 전업한 것이 25호, 동대문 관외로 이전한 것이 16호로 보고――하였는데,16) 동대문서에 국한된 사례이긴 하나 일제시대에 만연한 사찰의 타락상을 극명하게 보여 주고 있다. 해방 이후에도 사찰의 혼탁함은 개선되지 않았다. 더욱이 일제시대에 확산되었던 대처승들의 양복 착용과 유발 풍조는 점점 더 확산되어 공식적인 회의에서도 일부 대처승들은 머리를 기르고 양복을 입은 채 참석할 정도로 승풍은 쇠퇴하였다.17)

사찰 운영도 마찬가지였다. 급기야 1947, 1949년 경찰에서 강력한 사찰 정화대책을 수립해야 할 정도의 상황에 이르렀다.18) 청정한 수행도량들이 대처승의 가정생활과 호구지책으로 음주가무가 난무하는 유흥지로 타락해 가는 것에 대하여 일반 시민들의 비난 여론은 점증하였고 승려의 위상은 땅에 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한편, 전통적인 지계정신을 지켜가던 비구승들은 주로 선원(禪院)을 중심으로 수행, 종풍을 유지하고 있었다.

1899년 해인사에서 경허 선사를 중심으로 제창된 수선결사와 선원 재건운동은 영호남의 사찰을 중심으로 적지 않은 수좌들이 육성되었는데 이들은 일제에 굴하지 않고 한국불교의 전통을 지키고자 하였다. 1921년 선학원 건립이 첫 사업이었다. 일제의 사찰령 구속에서 벗어나 자주적인 도량을 만들기 위해 ‘사(寺)’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고 ‘원(院)’이라 하였고, 이후 선우공제회, 조선불교수좌대회, 조선불교선종 종무원 창설 등을 통하여 해방 때까지 한국불교의 전통을 지켜 나갔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대처승과 갈등을 빚게 되었다.

즉 일부 몰지각한 대처승들은 사찰에서 선원을 운영하는 데 소요되는 식량과 일용비를 부담스럽게 생각하여 선원을 폐쇄하거나 수좌들의 방부를 제한하였던 것이다. 일제하 대표적인 사례로 1928년 금강산 마하연선원 사건이 있다. 유명한 선원이었던 마하연은 1926년 수해를 입어 전국 불자들의 권선으로 재건되었는데 그 규모가 53칸이나 되어 당대 제일 선원이 되었다. 그런데 마하연을 관리한 표훈사의 대처승들이 선원을 염불당으로 바꾸어 버렸다.

이에 격분한 만해를 비롯한 수좌들이 들고 일어나 결국 재판도 하고 해서 대처승을 축출하고 선원을 만들었다.19) 이것은 일제하에서 매우 상징적 사건으로 아마 사찰정화의 첫 사례로 볼 수 있다. 즉 전국 제일 선원을 놓고 비구 수좌들과 대처승들이 대립하다가 결국 다시 선원으로 만든 것이다. 이로 인해 수좌들은 더욱 결집하여 나가게 된 것이다.

또한 도봉산 망월사에서 용성 선사를 비롯한 70여 명의 수좌들이 참선만일결사회를 조직하여 정진에 들어갔는데, 운영비와 연료 조달이 어려워 양산 내원암으로 이전하였으나 역시 유지에 허덕여야 했다. 이렇듯 일제하 대처승들이 주지를 맡아 사찰 운영의 전권을 행사하게 되자 한국불교의 전통 산중공의제는 파괴되고 청정 수행도량의 면모는 심각하게 위협받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대처승의 홀대와 경제적 곤궁 속에서도 선원과 수좌 대중의 수는 일제하에서도 꾸준히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제 초기인 1913년 전국 본말사의 선원은 모두 72개20)였는데, 1941년에는 58개 선원에 하안거 540, 동안거 482명이 정진하고 있었다.21) 일제 말기인 1940년대에 선원 수가 50여 개를 넘고 수좌 대중이 5백여 명이 넘는다는 것은 상당한 의미가 있다. 즉 선원에서 안거하는 수좌라면 대부분 비구·비구니일 것이기 때문에 당시 전국 비구승니의 수를 가늠해 볼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일제 말기 한국불교계에 비구승니 수는 최소 540명 이상이었던 것은 확실하다 하겠다.

이렇듯 50여 개의 선원에서 500여 명 이상의 비구 수좌승들은 한국불교의 전통적인 수행종풍을 진작해 나가고 있었고 이들의 입장에선 승려의 대처화, 사찰의 세속화, 유흥지화는 일본불교의 잔재라는 인식 아래 정화해야 할 과제로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4. 정화운동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

불교분규의 발생은 54년 5월 21일 이승만 대통령이 불교문제에 대한 담화를 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22) 이 주장은 불자대중이 가장 많이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과연 이것은 사실인가? 만약 이승만정권 이전에 승단정화운동에 대한 뚜렷한 징후를 확인할 수 있다면 이 주장은 설득력을 잃게 될 것이다.

이를 검토해 보자. 일제의 잔재인 대처승과 한국불교의 정통 비구승의 갈등은 이미 1928년 조선 제일선원이었던 금강산 마하연선원의 운영 문제에서 표출되었다. 1931년 선학원에서 열린 전국수좌대회에서 중앙선원 설치 건의서23)를 종회에 제출하였을 뿐만 아니라 1935년 수좌대회에서는 선종(禪宗)의 자립과 전국 선원의 통일기관을 위해 선종 종무원 설치를 결의하여 선원의 확장을 추진해 나갔다.24)

이를 통해 확인하건대 선원을 중심으로 자주적인 수행도량을 확보한 비구 수좌들은 한국불교의 정통성을 자부하면서 수행 종풍의 진작과 선원의 확장을 도모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제로부터의 해방은 교계에 식민지 잔재를 청산할 전기가 되었으나 1945년 10월 전국승려대회를 통해 종권을 인수한 총무원 집행부는 대부분 대처승들이었기에 한계를 내포하고 있었다. 이들은 교단 소임을 매개로 적산(敵産) 사찰과 정당정치 등 세속적인 이해관계에 깊이 개입하여 사실상 교단의 본질적인 문제는 등한시하였다.

까닭에 선학원의 수좌대표들과 불교청년당, 불교혁신회 등 청년 불자들이 연대하여 교단혁신 즉 사실상의 교단 정화운동을 추진하였다. 이 운동의 제일 명제는 교도제(敎徒制) 실시였다. 교도제란 ‘일제의 잔재인 대처승을 일반신도와 같이 교도로 하고 청정비구승만 승적(僧籍)을 부여하자.’는 것이다.

당시 종권을 잡고 있던 대처승 입장에서는 생계가 걸린 문제라 이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이에 혁신단체들은 1946년 불교혁신총연맹, 1947년에는 전국불교도대회를 열고 불교총본원과 전국불교도총연맹을 조직하여 총무원측에 종권 인계를 요구, 교단은 사실상 분규 상황을 초래하게 되었다. 이에 대하여 총무원측은 선학원과 혁신단체들을 빨갱이로 몰아 탄압하였다. 이 무렵 혁신단체 지도자들은 이북에서 열린 남북통일협상에 참가하였다가 그곳에 잔류하여 해방 직후 정화운동은 흐지부지되어 갔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대처승 정화를 한국불교의 역사적 과제로 받아들이는 강력한 흐름이 형성되고 있었으니 하나는 백양사의 만암 스님을 중심으로 조직된 고불회(古佛會)였다. 불교 전통의 계율과 법식을 되찾아 변질을 막아야 한다는 취지의 고불회는 중앙으로 진출하여 조계사에서 대회를 열고 한국불교의 정통성 회복을 주창하였다. 또 다른 한 흐름은 1947년 희양산 봉암사에서 결사를 시작한 비구 수좌 20여 명이었다.25)

이 결사비구들은 봉암사의 대처승으로부터 사찰을 인계받아 결사도량으로 정하고 ‘부처님 법대로 살자’는 취지 아래 공주규약을 정하고 정진을 시작하였다. 이 결사에서 괴색 가사와 보조 장삼을 새로 만들었으며, 포살(布薩)도 처음으로 시행하였다. 또한 신도가 스님에게 절을 세 번 하게 하여 출, 재가의 위상을 재정립하고 있었다. 이 결사는 빨치산 활동으로 1949년 겨울에 중단되었으나 여기에서 시행한 의제는 당시 비구승 의제로 통용되었고, 계율정신 회복을 위해 포살을 처음 실시했다는 점도 의의를 갖는 것이었다.

1951년 백양사 고불총림에서 자율적으로 정화를 시행하고 있던 만암 스님이 교정(敎正)에 추대되어 총무원 집행부에 교단 정화대책 수립을 지시하였다.26) 그리하여 1952∼53년 사이에 통도사와 불국사에서 회의를 열고 정화대책 논의가 진행되었는데 이 자리에는 효봉, 관응, 석주 스님 등 비구 수좌들도 참석하여 의견을 개진하였다.

특히 불국사 회의에서는 동화사, 직지사 등 18개 사찰을 청정수행도량으로 양도하기로 결의하였으나 해당 사찰 주지들이 반발하여 실행되지 못하고 있었다. 한편, 비구 수좌들은 승단정화에 뜻을 모으고 1953년 가을에 선학원에서 제1차 수좌대회를 열었으나 뚜렷한 방침을 정하지 못하고 동안거에 들어갔다.27)

그러므로 1954년 이승만대통령 정화유시 이전에 이미 일제하에 한국불교의 전통에서 일탈한 왜색대처승으로 인해 교계에 모순이 파생되었으며, 해방 직후 비구 수좌와 청년불교도들에 의해 교단정화운동이 시작되었고, 좌우혼란과 전쟁으로 잠복했다가 1951년 만암 교정의 정화 교시로 다시 교단 차원에서 정화 문제가 공론화되고 있었던 것이다. 까닭에 정화가 1954년 이승만대통령의 유시로 시작되었다는 주장은 사실과 다른 것이다.

5. 정화의 방법과 사회여론의 반응:목적은 옳으나 방법은 잘못되었나

승단정화에서 또하나 문제가 되는 것이 목적은 좋으나 방법은 잘못되었다는 지적이다. 주요 내용은 정권의 개입, 폭력 사용, 법정 송사로 인한 정재의 탕진 등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해방 이후 한국불교 교단은 일제 식민통치의 잔재인 대처승과 사찰의 정화 문제가 근본적인 문제로 표출되었다.

비구 수좌들은 대처승을 승려로 보지 않고 왜정(倭政)의 잔재로 보았다. 그러므로 한국불교의 정통성 회복을 위해선 반드시 해결해야 할 과업으로 인식하였던 것이다. 비구 수좌들은 왜색 승려의 정화와 한국불교의 정통성 회복이라는 대의명분 아래 그 방법으로 1954년 8월 승려대회와 같은 전통적인 산중공의제를 중심으로 승가대중의 공의를 집약하였으며, 대중적인 의사 표현 방법은 성명서와 단식 기도, 청원서, 거리 시위 등이었다.

이 중 가장 기본이 된 것은 승려대회와 단식 기도로 1955년 8월 전국승려대회에서 종권을 인수할 때까지 핵심적인 방법이었다. 특히 단식 정진은 매우 지대한 영향을 끼쳤는데 효봉, 동산 등 조실 스님들이 순교의 결의로 선도하였으며, 한 번 단식을 결의하면 조계사의 솥을 다 뽑아 엎어놓고 했을 정도로 비장한 의지28)로 하여 여론의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처럼 승려대회와 단식 정진을 통한 대중 동원과 여론 호소는 결국 성공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대처측에서는 이러한 대중집회와 단식 정진의 사례를 찾기 힘들다. 대처측은 대처승이 불교 계율과 전통에서도 합당하다는 이론 제시도 하질 못했고, 종권을 대처승이 가져야 한다는 당위성도 없었다. 대처측은 기득권 유지 이외에는 명분이 없었기에 스스로 ‘집단이혼’ ‘독신승에게 종권 인계조치’와 같이 겉으로는 정화의 대의에 동참하는 형식을 취하면서도 실제로는 기득권에 집착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불교의 계율과 한국불교의 전통 회복이라는 대의명분과 승려대회와 단식 정진과 같은 비장한 방법을 통해 진행된 승단정화운동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역시 정치권력의 개입이었다. 비구 수좌들은 대통령의 유시에 힘을 얻었고, 경무대와 관계 당국에 지속적으로 왜색승 정화를 요청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냉철한 평가가 필요한 부분이다. 교단의 문제는 교단 안에서 자율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마땅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세속 권력에 지속적인 개입을 요청하였던 것이다. 명분은 있으나 세력에서 열세였던 비구승의 입장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나, 그렇게까지 했어야 했는가는 여전히 의문이 아닐 수 없다.29)

실제, 비구승 중심의 승단 재편까지 관계당국은 사찰정화대책위원회 구성을 통해 ‘승려의 기준’ 마련과 같은 교단적 문제에 개입하고 있었다. 물론 이것은 비구-대처 쌍방이 자율적으로 해결하지 못했다는 데 보다 근원적인 책임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정권이 비구-대처 양쪽 가운데 비구승 편을 일방적으로 지원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1955년 8월 비구측이 일종의 승부수로 개최한 승려대회를 관계당국은 불법이라 탄압하였고, 재판부도 일방적인 판결을 내린 것도 아니다. 승단정화운동과 정치권력의 상관관계 문제는 좀더 종합적이고도 심층적인 연구가 필요한 과제이다. 또한 정화과정에서 파생된 폭력적 방법도 정화운동의 정당성을 부정하는 주요 근거가 되고 있다.

그러나 1955년 8월 전국승려대회를 통해 중앙 종권을 합법적으로 접수한 이후 11월까지 각도의 종무원과 해인, 통도, 범어사 등 삼보 사찰을 비롯한 주요 사찰 324곳을 인수하였는데 대부분 평화적 접수였다고 한다.30)

그러므로 비구승이 중앙과 각 교구 종권을 실질적으로 접수할 때까지는 대체로 평화적 인수인계가 이루어 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정화 당시 폭력 문제는 적어도 당시 언론 보도에 의하면 대처측에게 책임이 큰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정화 과정에서 소수인 비구측이 수를 늘리기 위해 무자격 승려를 양산하였다는 인식도 상당히 광범하게 회자되는 이야기이나 이것도 역사적 흐름을 통찰해 볼 때 전혀 다른 이유가 작용하고 있었다.

즉 조선조 억불정책 이후 구족계(具足戒) 수지(受持)라는 승려의 득도절차는 거의 와해되어 정화 당시에도 비구승의 득도체계는 정비되어 있지 못했던 것이다. 조계종단의 경우 수계득도 체계는 1981년에야 통일되었다.31) 그러므로 정화 당시 무자격 승려가 급조되었다는 주장은 치열한 갈등의 부산물이었고 큰 흐름에서 볼 때 부분적으로 그런 무자격 승려가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이 정화의 정당성을 부정할 만한 근거가 되기는 어려운 것이다.

더구나 1955년 4월에 정부당국이 비구-대처승 수를 조사한 중간 발표에 의하면, 비구승 660명, 비구니 529명으로 비구승니는 1,189명이었다.32) 그러므로 정화 이후 일반적으로 회자된 ‘3∼4백 명설’은 정확한 이해가 아니었다. 다음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법정 소송으로 수많은 삼보정재가 탕진되었다는 것이다. 실제 정화과정에서 적지 않은 소송이 벌어졌고 상당한 소송비가 필요했다. 그런데 이 소송의 책임은 어느 편에 있는가?

당시 〈동아일보〉(1959. 7. 12)에 이를 추정해 볼 수 있는 기사가 있다. ‘대처승측이 제기한 소송 건수는 69건에 달하고 비구승측이 패소하여 항고한 건수가 10여건이다’고 보도하고 있다. 이로 보아 소송은 대처측에서 주로 제기하였고 비구측은 수동적으로 대응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정화운동의 방법 문제에서 마지막으로 검토되어야 할 것이 ‘좀더 합리적인 방법은 없었는가?’일 것이다. 가령 교단은 비구승 중심으로 개편하고 대처승은 당대에 한해 승적을 주되 제자를 받지 못하게 하는 방안이 제시되었으나 합의를 보지 못했다.

대처승이 일제 식민정책에서 파생된 것임에는 분명하나 이미 교단과 사찰의 기득권을 점하고 있었고 대처승 중에서도 신심 있고 교단 발전에 헌신한 이들이 적지 않았기에 이를 혁명적으로 해결하는 것은 무리가 따르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역사에 대한 보다 냉철한 반성을 토대로 합리적인 해결 방안이 모색되어야 했으나 그렇지 못했다.

어쨌든 방법은 혁명적으로 결론이 났다. 이것이 최선의 방법이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그렇다고 잘못된 결과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현실이 그렇게 만들었던 것이다. 지금에 와서 보다 합리적 방법에 대한 검토는 가능할지라도 역사를 되돌려 놓을 수는 없다. 그렇다면 당시 사회여론은 승단정화에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 먼저 언론은 대체로 한국불교의 전통 회복을 위한 왜색 대처승 정화에 대하여 지지하는 입장을 보이고 있었다.

〈동아〉 〈조선〉 양대 일간지는 공히 사실 보도를 위주로 하면서 양비론적 태도도 없지 않았으나 큰 흐름에서 볼 때 한국불교의 전통 회복이라는 점에서 비구측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었다. 이러한 흐름은 1955년 6월 10일 새벽 대처측이 조계사 대웅전에 단식정진 중인 비구승니를 기습하여 폭력을 행사한 후에는 더욱 강하게 나타났다.

한편, 관계당국도 처음에는 신중한 입장이었으나 양쪽이 자율적인 조정이 불가능하여 사회문제화 되자 수습 차원에서 개입할 수밖에 없었다. 관의 관여에 대하여 양쪽 모두 완전히 거부하지는 않았다. 대처측은 관의 개입에 거부감을 갖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관이 획정한 ‘승려 자격 8대 지침’과 같은 방안이 잘못되었다고 반발하였던 것이다.

정권이 승단정화 문제에 개입한 것을 법난이라 규정한다면 그들이 주선한 협상 회의에 대처측이 참여하여 논의를 같이 하였던 것은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불교신도들은 비구측을 적극 지지하는 입장이었으며, 대처승 가운데 전진한과 같은 유명 인사는 비구측을 공개적으로 지지하였다.33)

그러나 무엇보다 대통령이 ‘왜색승은 사찰에서 물러나라’고 여러 차례에 걸쳐 담화문을 발표하여 여론을 이끌고 있었다. 까닭에 일반 여론은 비구승측으로 기울어 갔다. 당시 유명한 작가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었다. 불교계의 내분은 엉뚱하게도 계속 정치문제화되는 경향을 나타내고 있었다. 확실히 세인의 여론도 소수파의 비애를 되씹는 비구승측을 동정하는 방향으로 기울고 있었다.34)

6. 정화의 결과는 잘못되었는가

적지 않은 불자들이 정화는 ‘한국불교 침체와 쇠퇴의 치명적인 원인’이 된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과연 그러한가.

비구승측은 해방 이후 10년 만인 1955년 8월 전국승려대회를 개최하여 800여 명의 비구승니들이 참여한 가운데 승단 정화를 결의하고 종권을 공식 인수하였다.

이것은 근대 한국불교가 피할 수 없는 필연적 결과였다. 단순히 대통령의 유시가 낳은 결과가 아니라 근대 한국불교가 일제 식민시대를 거치면서 잉태한 근본 모순이 해결되는 과정이었다. 승단 정화는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고는 이루어질 수 없었다.

그것은 정화의 대원력을 세운 비구승뿐만 아니라 한국불교의 전통 회복을 원한 재가신도와 정치권력, 언론과 국민대중의 소박한 바람이 인연이 되어 이루어진 것이다. 그 결과 한국불교의 대표 종단인 조계종은 비구승 중심의 체제로 개편되었고, 대처측은 태고종(太古宗)을 창종35)하여 나갔다.

그렇다면 근대 한국불교에서 승단 정화는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인가. 첫째, 가장 중요한 것은 조계종단이 정화를 통해 일제 식민통치의 인적 잔재를 완전 청산하고 한국불교의 전통을 회복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한국사회 일반이 친일인사 숙청에 실패하여 민족정기 회복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종은 승단정화를 통해 민족정통성을 회복하였고 민족의 정신문화 창달을 선도할 초석을 놓게 된 것이다. 둘째, 정화는 조계종과 승려의 위상을 높여 주었다. 한국사회에서 전통적인 승려상은 청정비구였다. 처자식을 거느리고 세속적 이해관계에 허덕이는 다수 대처승보다 오로지 수행에만 정진하는 소수의 비구승들이 전통 승려상에 부합하였는데, 왜색의 정화는 조계종의 위상을 높여 주어 정통 대표 종단이라는 이미지를 각인시켰던 것이다.

셋째, 이러한 승가와 조계종의 위상 제고는 한국불교의 신자수를 비약적으로 증가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한일합방 무렵인 1910년 한국불교의 신도수가 2만여 명으로 총인구 대비 1%미만이었고, 1942년 24만여 명으로 총인구 2천4백만의 1%에 불과36)하였지만, 1985년 인구센서스 결과 8백만여 명, 1995년 1천만여 명37)으로 총인구의 23%에 달할 만큼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던 것이다. 일제시대에 1%에 불과하던 불교신자가 40여 년 만에 전 국민의 23%를 넘게 된 요인에는 조계종단의 정화로 인한 전통 승려의 위상 회복에 기인한 것으로 분석된다.

국민대중은 조선조 억불정책과 일제의 식민정책으로 불교와 유리되어 있다가 승단 정화를 통해 한국불교의 전통을 회복하자 심정적인 공감을 갖게 된 것이다. 흔히 교계 일각에서 정화가 한국불교의 침체를 가져왔다고 주장하지만, 적어도 신자수에서는 그 반대임을 증명하고 있다. 오히려 승단정화는 한국불교 중흥의 일대 계기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한국불교의 전통 회복의 기초를 다진 승단정화운동이 적지 않은 문제를 파생시킨 것도 사실이다.

첫째, 정화과정에서 교단 내부의 자율적인 해결을 보지 못하여 세속 권력의 개입을 자초하였다. 그 결과 정화 후에도 조계종단은 자정 역량을 축성하지 못한 채 세속 정치권력과 재판부의 간섭을 받게 되었고, 일부의 경우 종단 문제의 해결에 세속 권력을 끌어들이는 것을 당연시하는 풍조를 가져왔다. 비구승 주도의 조계종단에 조성된 이러한 잘못된 풍토는 ‘9·7 해인사 승려대회’와 ‘4·10 조계사 승려대회’ 그리고 ‘10·12 사부대중 궐기대회’를 거치며 점진적으로 해소시켜 나가고 있으나 아직도 완전히 자정 역량을 복원하여 교단의 자주성을 회복하였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둘째, 조계종단에서 비구승단의 주도권 회복은 한국불교의 다종파시대를 열었다. 통불교적 흐름의 조계종단이 비구수좌 중심으로 개편되면서 다양한 경향성의 대처승들은 종단을 이탈하여 제각기 종파를 창설하였다. 이것은 뚜렷한 종지(宗旨)에 근거하기보다는 인연과 사찰 재산 소유권에 기인한 바가 크다. 아무튼 한국불교계의 제종파는 이런 문제를 넘어서 종지종풍을 정립하여 자율적인 종단 운영제도를 정착시키면서 통일된 틀의 한국불교 교단으로 재결집해야 할 것이다.

셋째, 조계종단이 비구승 중심의 종단 운영 질서를 회복하는 과정에서 광의의 교단 구성원인 재가신도의 참여를 이끌어 내는 데는 실패하였다. 비구승들이 승단의 대처승을 정화하기 위해 견지했던 출가-재가라는 분별심은 정화 이후에도 낡은 습으로 남아 사부대중의 원융(圓融) 종단 실현의 장애로 작용하고 있다.

조계종단의 이 문제는 바로 교계에 재가 위주의 신흥 종단이나, 다른 형태의 새로운 불교가 성장할 수 있는 토양이 되고 있다. 조계종단은 정통 비구승단이라는 자족감에 안주할 것이 아니라 재가신도의 지혜와 원력을 종단 발전의 동력으로 결집할 수 있는 제도적 대안을 마련해 나가야 한다.

이것이 실현되지 않는다면 한국불교계를 대표하고 정통성을 자부하는 조계종의 위상은 재가종단의 강력한 도전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지금 조계종단이 직면하고 있는 여러 현실적 문제들은 승단정화운동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 아니라 정화운동의 대의가 아직도 종단에 완전히 구현되지 못한 데서 나온 것이 아닐까. 조계종은 일제 잔재를 해소하여 한국불교의 전통을 복원하였다는 성과에 머물지 말고 한 단계 더 나아가 명실상부한 사부대중의 원융 종단을 실현하여 한국불교를 선도하고 민족문화의 창달에 기여해 나갈 때 마침내 정화운동의 대의가 완수되는 것이리라. 그 길만이 승단 정화과정에서 암묵적으로 성원하였던 국민 대중의 기대와 관심에도 보답하는 길이 아닐까 생각한다.<끝>

박희승
동국대 사회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 현재 조계종 총무원 기획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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