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미나 중계 서재영

1. ‘부처님 법대로’의 결사정신과 공주규약

역사적으로 결사는 불교가 쇠퇴하고, 정법이 쇠락해갈 때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운동으로 나타났다. 그래서 결사는 언제나 당대 불교가 처한 현실에 대한 자기반성을 바탕으로 고원한 승가정신을 회복하려는 목적을 내포하고 있다.

고려시대 지눌(知訥)에 의한 정혜결사(定慧結社)나 한말의 경허(鏡虛)에 의한 수선결사(修禪結社)가 모두 위기에 처한 교단을 바로 세우고 승가 본연의 모습을 되찾고자 하는 운동이었다. 봉암사 결사 역시 이 같은 맥락과 맞닿아 있다. 해방 이후 나타난 사회적 혼란과 왜색불교의 잔재 속에서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수행자 본연의 모습을 되찾고자 하는 성찰이 봉암사 결사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해방 이후 한국불교는 긴박한 사회적 변화와 맞물려 갈등과 대립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더군다나 승단은 대처식육이라는 타락상을 보이고 있었고 대중들의 신앙은 기복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선방에서도 갖가지 사견(私見)이 범람하면서 수행가풍은 쇠락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성철스님은 ‘전체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임시적인 이익관계를 떠나서 오직 부처님 법대로만 한번 살아보자’라는 것을 봉암사 결사의 목표로 내세웠다. 여기에는 불교가 쇠락한 것은 복잡한 세태에 휘둘리면서 근본정신과 생활양식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 따라서 불교발전을 위해서는 부처님 당시의 생활방식대로 살아야 한다는 수행원칙을 내세우게 된다.

왜색불교로 인해 한국불교의 정신이 탈색되고, 미신과 세속주의로 인해 불교의 근본이 무너졌다면 불교를 다시 세우는 것은 부처님의 근본정신을 되찾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와 같은 정신을 압축적으로 담아내는 것이 바로 ‘부처님 법대로’라는 슬로건이다.

봉암사 결사의 핵심은 부처님 법대로 사는 것이었으며, 부처님 법대로 살아보자는 뜻에서 모였기 때문에 부처님 법대로 사는 것, 그 자체가 최대의 관건이었다.1) 부처님 법대로의 정신은 근본불교의 정신과 삶을 수행의 근간으로 삼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시 불교계에서도 근본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1940년대 중반에 이르러 중앙에서는 혁신적 인사들을 중심으로 근본불교로의 회귀를 천명했고, 지역에서는 만암스님을 중심으로 고불총림(古佛叢林)이 결성되면서 근본불교로 돌아가기 위한 운동이 나타났다. 따라서 봉암사 결사에서 내세운 ‘부처님 법대로’라는 이념적 목표는 당시 불교계의 시대정신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성철스님은 이 같은 시대적 요구를 읽고, 봉암사 결사를 통해 수행의 근간으로 담아 내고 있다.

‘부처님 법대로’라는 결사정신은 생활 속에서 구체적인 실천으로 나타날 때 비로소 완성될 수 있다. 그것은 구호가 아니라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살겠다는 수행자의 다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행전통이 와해된 상황에서 부처님 법대로 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음으로 결사정신을 담아낼 수 있는 규율이 필요했다. 성철스님은 공주규약(共住規約)이라는 엄격한 수행규칙을 통해 사라진 불조 교법을 복구시키고자 했다.2)
공주규약은 중국 총림의 청규(淸規) 정신에 근거하되 우리 실정에 맞게 수정하여 결사의 정신을 담아내고 있다.

모두 18개 조항으로 정리된 공주규약에는 계율엄수, 사견(私見) 배제, 노동의 의무, 자급자족의 생활, 승가위의와 의례에 대한 규정 등 부처님 법대로 살기 위한 구체적인 수행지침들이 담겨 있다. 결사는 성불이라는 목적을 공유하며 함께 살아가는 승가(僧伽)를 조직하는 것이다. 봉암사 결사 역시 출가자들을 규합하여 부처님 법답게 함께 사는 것을 핵심으로 설정했다. 그런 점에서 공주규약은 함께 살아가는 데 필요한 규율과 위의를 결사의 핵심으로 설정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봉암사 결사에서 공주규약은 나태해지고 해이해진 수행풍토를 바로 잡고 수행자들을 부처로 담금질하는 근거가 되었다. 따라서 결사에 참여하는 것은 곧 공주규약을 지키는 것과 직결되었다. 성철스님은 공주규약에 동의하는 스님들에 한해 입방을 허락함으로써 결사의 정신을 참여 대중들과 공유했다. 대중들은 서약을 받고 입방했으므로 규약을 지키지 않으면 성철스님은 상대를 가리지 않고 몽둥이를 휘두르며 기강을 세워 나갔다.3)

공주규약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계율엄수로 볼 수 있다. 18개 조항의 규약만으로 모든 규칙을 담아낼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성철스님은 계율엄수를 강조함으로써 전체 계율을 공주규약 속으로 담아내고 있다. “엄중한 부처님의 계율과 숭고한 조사들의 가르침을 온힘을 다하여 수행하여 우리가 바라는 궁극의 목적을 빨리 이룰 수 있기 바란다.”는 내용을 첫 번째 조항으로 명시한 것이 이를 말해 준다. 부처님 당시와 같이 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계율을 철저히 지키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성철스님은 계율을 철저히 지키고 훼범하지 말라는 부처님의 유촉을 불교의 생명으로 이해하고, 불교의 성쇠는 지계 여하에 달려 있다고 보았다. 성철스님은 계율을 파괴하는 것은 불교 자체를 파괴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이런 이유로 봉암사 대중들은 “차라리 부처님 계율을 지키며 하루를 살다 죽을지언정 계율을 어기고 백 년 동안 살기를 원치 않는다(吾寧一日持戒而死 不願百年 破戒而生).”는 자장율사의 시를 합송하기도 했다.4)

2. 의례개혁과 승가상의 확립

‘부처님 법대로’의 기치 아래 진행된 봉암사 결사는 일상생활의 개혁뿐만 아니라 의례와 출가자의 종교적 역할에 대한 개혁을 동반했다. 당시 승려들은 사찰에서 일상적으로 행해지는 관행적 의례를 출가생활의 본무로 삼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출가의 궁극적 목적이 아니므로 출가정신을 약화시키는 결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이에 성철스님은 신도들로부터 물질적 대가를 받는 기복적 의례행위를 모두 폐지했다.
나아가 봉암사 대중들은 대중공사를 통해 당시까지 관행적으로 모셔왔던 칠성탱화, 산신탱화, 신장탱화를 모두 없애버리고 부처님과 부처님의 제자들만 모셨다. 불교 간판을 붙여 놓고 칠성이나 산신을 섬긴다면 그것은 순수불교가 아니라는 것이 성철스님의 지론이었기 때문이다.5)

물론 부처님전이라고 해서 기복적 의례가 허용되는 것은 아니었다. 시주를 대가로 기도한다면 설사 석가모니 부처님전이라도 불교의 근본정신에 어긋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출가자들에 대한 이 같은 의례금지가 신도들의 신앙생활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기도는 어디까지나 스스로 하는 것인 만큼 신도들 스스로 마지 짓고 삼천배하는 것을 기도로 삼도록 했다.6)

성철스님은 출가자가 시주물을 받고 의례를 행하는 것은 ‘삯꾼 노릇’이라고 비판했다. 출가자는 생사해탈이라는 일대사(一大事)를 해결하기 위해 출가한 것이지 제사장 노릇을 하기 위해 출가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당대의 불교는 남의 복을 빌어주는 ‘삯꾼 노릇’을 출가의 본무로 삼고 있었다. 종교적 의례에 경제적 대가가 개입하면 시주금은 세속적 가치를 승가사회에 전이시키는 촉매로 작용한다.

 뿐만 아니라 시주물을 매개로 출가자와 신도의 관계가 설정될 때 시주자는 출가자 위에 군림하게 된다. 성철스님은 이 같은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당시까지 사찰경제를 떠받치고 있던 불공과 천도재를 과감히 폐지했다.7) 그리고 불공금지에 대한 조치는 공주규약을 통해 결사의 규율로 채택되었다. 의례개혁은 불공에만 한정되지 않고 영가천도에도 적용되었다. 49재를 지낼 때에도 영단을 향해 경전만 봉독할 뿐 북 치고 바라춤 추는 의례는 행하지 않았다. 부처님 말씀에 “사십구일재를 지내는 데 경전 읽어 주라고 했지, 북 두드리고 바라춤 추라는 말은 없다.”8)는 것이 이유였다.

칠성탱화를 없애고 불공과 축원을 금지하고, 49재 같은 의식을 모두 폐지하자 신도들이 끊어지고 불공과 재에 의지하던 사찰경제가 피폐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봉암사 대중들은 탁발이라는 승가 본연의 전통적 방식을 통해 생계를 이어갔다. 부처님 법대로 사는 길은 청빈한 삶이며, 가난이야말로 수행자에게 가장 필요한 수행환경이다. 그래서 성철스님은 가난 속에 정진할 때는 깨달았다고 자부하는 수좌들이 많았지만 삶이 풍요로워지자 수행이 후퇴하더라는 만공스님의 일화를 강조하곤 했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달마는 구함이 없음이 참다운 도의 실천이므로 무소구행(無所求行)9)의 실천을 강조했고, 혜능은 욕심을 줄이고 만족을 아는 것이 곧 부처님을 받드는 것이라는 소욕지족(小欲知足)10)을 가르쳤다. 이처럼 선종에서 청빈은 곧 도의 실천이므로 봉암사 대중들은 가난한 생활을 통해 조사들이 갔던 그 길로 가고자 했다.

그러나 의례개혁은 단지 사찰의 경제적 수입원의 변화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의례폐지의 본질적 의미는 출가자의 종교적 역할에 대한 근본적인 변화를 의미했다. 출가자가 의식집전을 본무로 삼는 순간 생사해탈이라는 본분사는 사라지고 종교적 기능인으로 전락한다. 제사장의 역할에는 제불조사와 어깨를 나란히 하겠다는 당당한 대장부의 기상이 숨 쉴 수 없다.

결국 시주금을 목적으로 한 불공과 재의 금지에는 의례승의 역할에 안주해 있던 승가를 본분납자의 모습으로 회복시키고자 하는 성철스님의 의도가 담겨 있다.

경제적 가치로부터 자유로울 때 승가는 세속적 가치관과 담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고, 그로부터 진정한 자유가 시작된다. 성철스님은 기복적 의례폐지를 통해 물질적 가치에 종속된 승단을 해방시키고, 이를 통해 세속적 가치에 매몰된 출가정신을 되찾고자 했다. 깨달음이라는 고원한 이상을 향해 일생을 불태울 수 있는 삶은 이로부터 가능하기 때문이다.

불공과 천도재의 폐지는 의례집전을 폐지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의례에 대한 종교적 정의를 달리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기도에 대한 성철스님의 지론은 자신만을 위한 배타적 이익을 위한 행위가 아니라 남을 위해 기도하는 이타행(利他行)이라고 보았다.

만약 기도가 부처님을 향해 복을 비는 행위가 아니라면 불공이 사찰이라는 장소에 국한될 필요도 없다. 성철스님은 사찰은 불공 올리는 장소가 아니라 어떻게 불공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는 곳이라고 정의했다.11) 그리고 불공해야할 대상은 법당에 모셔진 부처님이 아니라 절 밖에 있는 중생들이므로 ‘중생을 이롭게 하고 도와주는 것이 참다운 불공’인, ‘몸과 정신으로 또 물질로 남을 돕는 것이 불공’이는 것이다.

이것은 나와 남이라는 분별심(分別心)을 벗어난 중도적(中道的) 인식과 실천이야말로 진정한 불공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남을 돕는 것은 나를 돕는 것’12)이라는 자타불이(自他不二)의 자각을 바탕으로 한 연기적(緣起的) 실천이야말로 진정한 불공이며 기도라는 것이 성철스님의 지론이다.

이처럼 불공에 대한 개념의 변화는 종교의례에서 수동적이고 타자화 되었던 신도들을 신행의 중심에 서게 만들었다. 신도들은 스스로 공양물을 준비하고, 삼천배를 하면서 기도가 아닌 수행을 하게 되고, 이를 통해 의례와 기도의 주체로 서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재의식에 있어서도 복잡한 의례를 폐지하고 《금강경》을 독송하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신도들은 새로운 신행문화에 빠르게 적응해 갔다. 《금강경》 독송에서 《반야심경》 3편 독송으로 재의식이 단출해져도 신도들은 오히려 봉암사의 규칙을 환영했다.

이는 영가를 천도할 수 있는 능력은 수행에서 나온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따라서 의례폐지는 관습화된 의례에 속박된 불교, 정형화된 틀 속에 갇혀 있던 출가자와 재가자의 역할을 해체하는 것을 의미했다. 불교가 기복적인 것은 신도의 근기가 낮고 기복을 원하기 때문이라고 항변하기도 한다. 하지만 종교적 의례와 신행은 성직자들의 가치관과 태도에 의해 좌우된다. 봉암사 결사는 출가자가 깨어 있을 때 신도들은 언제라도 새로운 변화에 동참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여실하게 보여 주고 있다.

3. 탈속적 수행자상과 간화선풍의 확립

성철스님은 봉암사 결사를 통해 대처승과 구별되는 비구승의 이미지를 확립하는 데 주력했다. 당시 비구와 대처할 것 없이 붉은 비단가사를 입고 있었기 때문에 비구승과 대처승의 외형적 구분이 없었다. 성철스님은 비단 대신 소재를 마(麻)나 면(綿)으로 바꾸고, 율장의 규정대로 3종 괴색으로 염색했다. 작업이나 행각할 때는 가사장삼 대신 측천무후가 선종 승려들에게 입게 했다는 오조쾌락을 입도록 했다.13)

 뿐만 아니라 외출할 때에는 육환장을 짚고 삿갓을 씀으로써 기존의 승려들과는 외형적 차별화를 시도했다. 생활에 있어서도 율장에 나와 있는 대로 철발우를 사용했다.14) 공양도 속인과 다름없던 세 끼 식사를 지양하고 아침에는 죽을 먹고, 점심은 사시(巳時)에, 저녁은 허기를 채울 정도의 약석(藥石)으로 대체했다.15)
이처럼 봉암사 대중들은 복장과 생활양식을 바꿈으로써 기존 승려들과의 차별성을 분명히 했다.

이는 대외적으로 자신들의 개혁성을 각인시키고, 부처님 법대로라는 결사의 정신적 지향을 천명하는 수단이 되기도 했다. 묘엄스님의 회고에 따르면 성철스님과 청담스님은 “부처님 당시처럼 짚신 신고 무명옷 입고 최대한 검소한 생활을 하도록 노력할 것, 그렇게 함으로써 풍기는 것을 남한테 보여줄 수 있는, 말없는 가운데 풍길 수 있는 이런 중노릇하자.”16)는 내용을 밤새 논의했다고 한다.

실제로 외형적 모습과 수행생활의 변화는 승가의 새로운 이미지화로 이어졌다. 기존 승려들과의 차별성을 강조함으로써 종교적 위엄이 나타났고, 이것은 수행자들의 참여로 이어졌다. 법전스님은 결사에 동참하게 된 계기에 대해 봉암사 스님들의 생활모습이 여법하고 올발랐기 때문이라고 회고한다.17) 봉암사로 출가했던 혜명스님도 “스님네들은 푸르둥둥한 누더기 옷을 입고 언행이 단정하고 때가 하나도 안 묻어 보였고 일견 거룩해 보였다.”18)라고 회고하고 있다.

 기존의 승려들과 차별되는 결사대중의 외형적 모습은 젊은 수행자들을 봉암사로 불러들이는 매개가 되었음을 엿볼 수 있다. 생활과 의식의 개혁은 결국 결사대중의 정신적 지향을 대외적으로 공표하는 방법이 되었던 것이다.

물론 새로운 승가상의 정립은 가사와 장삼, 육환장과 같이 외형적 쇄신에만 머물지 않았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은 내면적 가치를 표현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성철스님은 오히려 내면적 수행자상 확립에 더욱 고심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세속적 가치와 질서로부터 승가를 분리하고, 출가자만의 정신세계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 출가자는 세속적 가치와 질서 속에 머물고자 하는 미련을 가차 없이 버려야 한다. 성철스님은 평소 수좌들을 향해 “중노릇은 사람 노릇이 아니다. 중노릇하고 사람 노릇하고는 다르다. 사람 노릇 하려면 옳은 중노릇 못한다.”19)고 강조했다. 이것을 미뤄 보면 성철스님은 철저한 탈속적 정신세계를 지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은둔과 탈속 그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세속적 가치에 의해 굴절되고 와해된 승가의 정신세계를 복원하기 위해서였다.

출가자는 생사해탈이라는 고원한 목표를 위해 세속적 가치를 초개처럼 버릴 줄 알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속적 욕망은 장겁(長劫)에 걸쳐 윤회하는 삶으로 이어진다는 믿음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리고 출가의 삶이야말로 진정한 대장부의 길이며, 대자유인의 길이라는 절대적인 자부심이 필요하다. 그래서 성철스님은 최잔고목론(?殘枯木論)을 통해 세속적 가치를 철저하게 경계하고 수행자가 지녀야 할 탈속적 가치관을 강조했다.

즉, 출가자란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썩은 나무토막 같은 존재가 되어야 비로소 속세의 미련을 떨쳐버리고 수행에 목숨 걸 수 있다는 것이다.20) 여기서 ‘최잔고목’이라는 메시지는 수행자는 수행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쓸모없는 존재가 되어야 함을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수행자는 세속의 가치와 질서를 썩은 나무토막처럼 볼 줄 아는 가치관을 지녀야 함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사유는 선가의 전통적인 인식이기도 하다.

최잔고목이라는 개념 역시 대매법상(大梅法常) 선사의 게송에서 따온 표현이기 때문이다.21) 초기선종사를 담고 있는 《능가사자기》에서도 “산 속에서 속진(俗塵)을 여의고 본성을 밝혀 눈앞에 한 물건도 없을 때 마음이 평안해지며, 여기서 도(道)의 나무가 꽃을 피우고 선림(禪林)이 결실을 맺게 된다.”22)고 했다.
최잔고목론은 철저히 세속적 미련과 애착을 버리고 탈속적 가치관을 통해 수행에 전념하도록 하기 위한 가르침이다.

성철스님은 이를 통해 와해된 승가의 세계관을 복원하고 고원한 출가자의 정신세계를 구축하고자 했다. ‘대낙오자가 되는 것’, 홍인(弘忍)의 가르침처럼 ‘세상을 아주 등진 사람이 되는 것’은 염세주의자가 되라는 것이 아니라 오직 출가의 삶 속에서 신명을 바치라는 당부가 담겨 있다. 달마는 “밖으로 모든 인연을 쉬고, 안으로 마음에 헐떡거림이 없어 마음이 마치 장벽과 같아야 비로소 도에 들어갈 수 있다.”23)고 했다. 다시 말해 세속적 가치와 욕망이 철저히 단절되어야 진정한 출가자의 길, 지혜의 길로 갈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크게 죽어야 크게 되살아나는 사중득활(死中得活)의 이치이기도 하다.24)

탈속의 가치는 일체법에 대해 싫어하고 떠나서〔厭離〕 탐욕에서 벗어나 해탈하라는 근본불교의 가르침과도 일치한다.25) 그런 점에서 성철스님은 세속으로 들어가는 불교가 아니라 부처님 법대로라는 근본불교를 지향했다. 불교가 세속적 논리에 굴복할 때 깨달음과 자비라는 불교적 정신세계는 무력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봉암사 결사에서 간과할 수 없는 성철스님의 또 다른 역할은 수행가풍을 조성하고, 수좌들을 철저한 화두참구로 인도한 것이었다. 성철스님은 “하루에 4시간 이상 자지 말라. 한 생각만 일으켜도 화두가 간단이 생기는데 하물며 이야기할까 보냐. 오직 최후까지 화두를 위해서 노력하라.”26)며 수좌들을 독려했다.
법전스님은 “성철스님은 지나가다가 다른 스님이 앉아서 조는 모습을 보면 버럭 고함을 지르기도 하고, 자꾸만 졸면 아예 몽둥이로 내려치기도 했지요.… 화두일념(話頭一念)하지 않으면 배길 수가 없었어요.”27)라고 회고한다. 수행하기 위해 모인 결사인 만큼 화두일념하지 않는다면 설사 고단한 노동으로 일과를 보낸다 할지라도 의미가 없다.

그래서 성철스님은 수좌들을 화두일념의 길로 인도하는 데 게을리 하지 않았다. 수행자를 독려하기 위해 성철스님은 수좌들의 마음속 밑바닥에 있는 티끌만한 자존심까지 자극하며 납자들을 점검하는 노고를 아끼지 않았다. 심지어 정진하는 수좌들에게 질문을 던져 제대로 답하지 못하면 벽력같이 소리를 지르며 멱살을 잡고 방망이로 사정없이 두들겨 패기도 했다.28)

성철스님은 각자에게 주어진 화두를 들게 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화두를 성성히 들고 있는지에 대한 점검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수행이 올곧게 되지 않을 경우 임제(臨濟)의 할(喝)과 같이 버럭 소리를 지르기도 하며, 덕산(德山)의 방(棒)과 같이 방망이질도 마다하지 않았다. 성철스님은 납자들을 담금질하여 부처로 단련하는 대장장이의 역할에 최선을 다했고, 봉암사를 선불장(選佛場)으로 만들어 갔다.

4. 자급자족과 선농일치(禪農一致)의 가풍

봉암사 결사에서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경제적 자급자족을 지향한 것이다. 당시 사찰의 수입원은 사찰 소유의 토지에서 발생하는 소작료와 의례에서 발생하는 수입이었다. 봉암사 결사에서는 소작료를 받지 않는 것은 물론 불공과 천도재마저 폐지하고 완전한 자급자족을 선언했다.

공주규약에는 소작료와 신도들의 시주에 의지한 생계는 단호히 청산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는 당시 사찰의 주 소득원에 대한 전면적 거부였으므로 사찰경제의 피폐화를 가져 왔다. 그러나 결사대중들은 부처님 법대로 탁발과 청빈한 삶을 통해 승가 본래의 삶을 복구해 나갔다. 선종은 산중에 수행처를 삼았던 관계로 경작을 통한 자급자족을 추구할 수밖에 없었다. 봉암사 역시 탁발만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없어 수행과 경작을 병행하는 선농일치(禪農一致)의 가풍을 이어갔다.

그러나 소작료 폐지에 관한 공주규약의 내용은 당시 불교계의 흐름과도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해방 이후 불교개혁과 왜색불교 척결을 주장하는 불교혁신단체들이 조직되면서 활발한 활동이 시작되었다. 그 중 1945년 9월에 출범한 불교청년당은 사찰의 토지 소유 반대를 주장했으며, 혁명불교도동맹 역시 사찰토지의 국가 제공, 사찰 운영의 개방, 의식의 간소화 등을 주장했다.29) 공주규약에서 정의하고 있는 소작료 폐지는 당시 불교계에서 일고 있던 이 같은 개혁 바람을 일정 정도 반영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1946년 11월에 결성된 조선불교혁신총동맹에서도 토지개혁을 시대적 조류로 보고 불교계에서도 이에 상응하는 조치를 이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교단은 사찰경제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토지를 국가와 농민에게 분배해야 한다는 것에 쉽게 동의할 수 없었다.30) 교단 집행부인 총무원 측은 유상몰수 유상분배를 주장했고, 혁신파인 총본원은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주장하는 등 첨예한 문제로 대두되었다.31)

성철스님은 토지 자체를 무상으로 배분하지는 않았지만 대신 소작료를 받지 않는 중도적 방법을 선택했다. 따라서 소작료 폐지는 당시 불교계 안팎에서 제기되던 토지문제를 소작료 폐지라는 대안을 제시하는 한편, 탁발을 통한 생활을 복원함으로써 부처님 법대로의 정신을 실천하고자 했다.

그리고 봉암사 생활에서 빼놓은 수 없는 것은 병자가 아닌 이상 다 같이 울력에 동참해야 하는 보청의 법이다.32) 소작료와 불공 폐지에 따른 경제적 문제를 탁발과 노동으로 해결해야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봉암사 결사대중에게서 수행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노동을 통한 경제적 독립이었다. 자신의 생계를 책임지는 것은 세속에서뿐만 아니라 수행자에게도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스스로 자립하지 못한다면 수행의 순결성을 지켜낼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수행자 역시 근면한 생활과 노동이 요구된다.

흔히 참선하면 손끝 하나 까닥하지 않고 조용히 앉아 화두에만 몰두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성철스님은 그런 생각으로는 결코 대도를 성취할 수 없다고 한다. 수행자는 땀 흘리면서 스스로 먹고 살아야 하며,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 것을 철칙으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남이 주는 밥 먹고 자기 공부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봉암사 대중들은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는 백장청규의 정신 아래 노소를 막론하고 하루 나무 두 짐씩은 꼭 해야만 했다.33) 결사에 참여했던 혜암스님은 “모든 대중이 울력을 했지요. 나무도 일꾼 쓰지 않고 산에 가서 직접 했습니다. 날마다 시간 정해 놓고 나무를 하니까…”34)라고 회고했다.

이처럼 봉암사 결사는 부지런히 노동하는 보청법의 실천으로 경제적 자립을 이뤘으며, 가만히 앉아서 밥 얻어먹는 것을 수행으로 여기지 않았다. 법전스님도 “내가 봉암사 있을 때만 해도 하루에 세 시간을 자 본 일이 없어요. 그런데 요새는 어떻게 하면 더 편하고 잘 먹는가 하고 궁리만 하나 봐요. 그러면 도하고도 거리가 멀어지고, 부처님하고도 멀어집니다…”35)라고 경책하고 있다. 이것은 오늘날 한국불교가 봉암사 결사를 통해 무엇을 배워야할 것인지에 대해 많은 것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5. 맺음말

현대 한국불교의 서막을 열었던 봉암사 결사는 4명의 종정과 7명의 총무원장을 비롯해 여러 명의 고승들을 배출했다.36) 이는 봉암사 결사에 참여했던 인물들이 오늘날 조계종의 근간을 이루어 왔음을 의미한다. 봉암사 결사의 정신과 수행 전통은 이들에 의해 조계종의 정신과 가풍으로 고스란히 녹아들면서 한국불교의 보편적 전통으로 확산되었다.

그래서 도우스님은 조계종의 기틀이 봉암사 결사 때 다 잡혔다고 평가했다.37) 원택스님 역시 봉암사 결사의 정신을 담고 있는 18개 항의 공주규약이야말로 한국불교의 현재 모습을 결정지은 원칙이라고 평가한 바 있다.38)

그러나 봉암사 결사 이후 60년이라는 세월이 경과하면서 한국불교는 또 다른 결사를 요구받고 있다. 유교권력의 탄압이나 일제의 억압과 같은 위협은 사라졌지만 승가의 핵심이 되는 출가정신은 날이 갈수록 퇴색해 가고 있으며, 끝없는 욕망의 추구와 소비 중심의 사회풍토는 출가정신의 퇴색을 부채질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늘날 한국 승가 역시 봉암사 결사대중들이 그랬던 것처럼 불법의 근본을 확인하고 출가정신을 새롭게 가다듬어야 할 때가 도래했다.

봉암사 결사는 부처님 법대로의 정신을 모토로 제국주의 세력에 의해 조형된 식민불교를 종식시키고 현대불교의 새장을 연 일대 사건이었다. 봉암사 결사 이후 지난 반세기 동안 현대 한국불교는 급격한 신장을 거듭해 왔다. 하지만 이제 한국불교는 지난 반세기 동안 지향해 왔던 외형적 성장주의를 지양하고 내실 있는 종교성을 점검해야 할 때가 왔다. 본고는 봉암사 결사의 핵심을 되짚어보고 그것이 현재 한국불교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고민해 보는 것으로써 맺음말을 대신하고자 한다.

첫째, 봉암사 결사의 특징은 ‘부처님 법대로’라는 사상적 원칙을 분명히 설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한국불교는 불교정신에 충실한가를 반문해 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다. 비록 외형적 교세는 신장되었지만 세속적 질서와 메커니즘에 의해 종단이 운영되고, 불교적 원칙이 세속적 가치의식에 종속된 지 오래다. 성철스님이 부처님 법대로라는 사상적 원칙을 통해 꺼져 가던 정법의 불씨를 되살렸듯이 오늘날 한국불교 역시 출가자의 근본목표가 무엇인지 진지하게 성찰해야 할 때가 되었다.

둘째, 봉암사 결사는 본분납자라는 올곧은 수행자상을 정립했다. 성철스님은 갖가지 의례를 집전하며 제사장의 역할에 매몰된 왜곡된 승가의 모습을 혁파하고 본분납자라는 대장부의 삶을 되찾아 주었다. 결사 60주년을 맞이하는 오늘날 한국 승가는 출격장부의 삶을 살고 있는가?

1940년대보다 승가의 사회적 위상이 신장된 것은 사실이지만 제사장적 기능은 더욱 강화되고 있다. 의례는 갈수록 한국불교의 핵심적 부분으로 자리 잡아 가고 있으며, 기도시간을 늘리는 것이 유일한 경쟁력인 양 인식되고 있다. 자성자도(自性自度)라는 조계(曹溪)의 정신을 물려받은 조계종도라면 과연 이것이 출가의 본래목표인지 점검해 보아야 할 것이다.

셋째, 세속적 가치와 질서로부터 초연한 탈속적 승가상의 확립이다. 출가자라면 누구나 생사윤회로부터 해탈하겠다는 원대한 꿈을 가져야 하며, 세속적 가치와 질서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그러나 현재의 승가는 세속적 가치와 성공에 목매달고 있고, 승가가 누리는 풍요는 속인들의 잣대로 보아도 도를 넘는 사례도 없지 않다. 뿐만 아니라 종단의 크고 작은 일은 물론이며, 단위 사찰에서 벌어지는 대소사마저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세속법에 의존해야 할 만큼 계율의 권위와 구속력은 무기력해졌다. 종단을 운영하는 갖가지 제도는 세속의 체제를 이식한 것일 뿐 불교적 가치와 정신은 약화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어쩌면 오늘의 승가는 겉모습은 비구승이지만 그 정신세계는 봉암사 결사를 통해 척결하고자 했던 구태를 고집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넷째, 봉암사 결사대중은 노동과 수행을 겸수하는 선농일치(禪農一致)의 가풍으로 수행만을 유일한 가치로 생각하는 선정지상주의를 극복했다. 봉암사 대중들은 의례를 통한 시주물과 소작료를 거부하고 탁발과 노동을 통해 자급자족하는 수행가풍을 일구어 냈다. 이는 신도들의 시주금과 소작료가 없어도 스스로 수행할 수 있는 경쟁력 있는 수행공동체를 구축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불교는 시주물에 의존하는 차원을 넘어 관람료가 주 수입원이 되면서 노동과 수행은 천지현격(天地懸隔)의 관계가 되고 말았다. 선방 역시 좌선만을 위한 수행풍토를 고수함으로써 자신의 생계를 책임지지 못하는 취약한 구조가 되었다. 이런 구조라면 수행은 외부의 도움 없이는 한 철도 날 수 없는 사치스러운 과정이 될 위험이 높다.

성철스님은 ‘남의 밥 먹고 내 일 하려는 썩은 정신으로는 만사불성’이라고 했다. 봉암사 결사 60주년을 회고하면서 우리들은 선농일치의 전통 회복과 선정지상주의를 극복할 대안을 고민해야 한다. 자신의 생계를 해결할 수 없는 허약한 수행문화로는 선방 역시 대중들의 간교한 요구에 취약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대중들이 위빠사나를 노래하면 위빠사나를 들고 나가야 하며, 대중이 명상에 목매달면 덩달아 명상을 해야 하는 광대가 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진정으로 경쟁력 있는 수행이 되기 위해서는 스스로 자급자족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물론 경쟁력 있는 수행풍토를 조성하자는 것은 생산 활동에 종사하고 경제적 능력을 키우자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청빈한 삶과 자급자족할 수 있는 최소한의 수행문화를 만들자는 것을 의미한다.

올해로 봉암사 결사는 회갑(回甲)을 맞이했다. 회갑이란 지나온 역사를 되짚어보며 축하하는 것이지만 어떤 의미에서 회갑은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감을 의미한다. 한국불교 역시 60년 전 봉암사 대중들이 그랬던 것처럼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 새로운 결사를 조직해야 할 때가 왔다.

세상은 정보화 사회로 진입하면서 낡은 권위가 해체되고 열린사회로 변모했다. 하지만 승가는 오히려 종교적 권위가 공고해지면 세상의 변화와 거꾸로 가고 있다. 그러나 세상을 모방해서는 세상을 따라잡을 수 없다. 불교가 세속의 변화를 따라잡는 길은 세속의 가치와 질서를 초월하여 불교만의 세계를 올곧게 지켜 가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봉암사 결사가 우리에게 보여준 해답이다.

성철스님은 급변하는 시대상황 속에서 세상의 변화를 모방하지 않고 오히려 불교의 고유한 가치를 확립하는 데 주력했다. 세속을 완전히 초월함으로써 세속의 속도를 넘어서고자 했던 것이 봉암사 결사의 정신이다.

봉암사 결사 60주년을 맞이하면서 이제 조계종은 봉암사 대중들이 그랬던 것처럼 세속적 가치를 초극해야 한다. 그것만이 불교를 살리는 길이며, 출가정신을 회복하는 첩경이기 때문이다. ■


서재영 
조계종 불학연구소 상임연구원. 동국대 선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禪의 생태철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불교텔레비전 PD, 불교신문 논설위원, 한국선학회 운영위원장 등을 지냈다. 이후 ‘서재영의 불교기초교리 강좌(www.buruna.org)’로 조계종 포교대상(인터넷 부문)을 수상했다. 논저서로 《선의 생태철학》 <선불교유신론의 소회 폐지론과 선종의 정체성> <선(禪)의 불성관과 생명의 내재적 가치> <퇴옹성철의 백일법문에 대한 고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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