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도 한국교원대학교 교수

서양 철학에서는 인간의 존재와 행위양식을 생각하는 사람(Homo Sapiens, Man the thinker), 만드는 사람(Homo Faber, Man the maker),놀이하는 사람(Homo Ludens, Man the player)등으로 정의한다. 인간이 무엇인가라는 정의는 시대, 지역, 환경, 종교, 사상 등 그 문화 속에 잉태된 상대적인 사유의 산물들로 매우 다양하다. 그 모든 것을 퍼즐 맞추듯 종합해보면 그럴싸한 개념으로 정리되겠지만 모두가 수긍하는 온전한 모습은 아닐 것이다. 그 중 놀이하는 인간은 예술적 인간이나 심미적 인간과 많이 닮아있다.

놀이할 때 인간은 보다 인간다워 보이면서 이는 일체의 규범과 제약에서 일탈한 자유로움의 표상으로 예술적 인간의 전형이라 하겠다. 예술은 일체의 구속에서 벗어나 가장 자유로운 심경에서 이루어지는 유희삼매(遊戱三昧)에서 보다 본질적인 가치가 발휘되는 것이다. 여기에 서양적인 논리나 인간의 문제와 연관시키기보다 동아시아의 문화를 비추어 보면 ‘놀이’와 ‘장엄’은 매우 상반된 이미지와 함께 또 다른 동질성을 갖는다.

놀이가 유희본능으로 자유롭게 노는 것을 의미한다면 장엄은 무엇인가 화려하게 장식한 시각적 대상으로 장중하고 엄숙함이 떠오른다. 놀이가 자신을 중심으로 걸림 없이 노는 자유로움을 상징한다면, 장엄은 어딘가 절대적인 진리나 권위에 복종하면서 장중하고 엄숙하고 화려하게 꾸미는 예술적 아름다움과 연계된다. 놀이가 일체의 구속이나 목적 없이 자유롭게 노는 것으로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이라면, 장엄은 절대존재나 진리를 향해 물질적으로 아름답게 장식하는 종교적인 모습이나 신성의 이미지를 지닌다.

장엄이 화려하고 장중하게 꾸미는 종교적 헌신자나 예술가가 절제와 규율 속에 절대를 향해 시각적 형상을 중심으로 표현하는 것이라면, 놀이는 천진스럽게 노는 어린이나 유유자적하는 도가적 진인(眞人)의 모습과 자유로운 분위기속에 작업에 몰입하는 예술가의 표현행위가 연상 된다. 장엄은 일정한 규범이나 권위에 따라 자기절제와 헌신 속에 다양한 물질로 아름답게 꾸미는 것으로 종교 예술에서 그 구체성을 찾아 볼 수 있다. 놀이의 이상화된 모습은 허정지심(虛靜之心)에서 표출된 무위와 유희삼매로 특히 장자에서 자유롭게 노는 다양한 인간의 모습과 선가(禪家)에서 깨달은 이가 구가하는 무애행(無碍行)이 연상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놀이, 혹은 논다고 할 때는 감각을 매개로 하여 어떤 대상을 갖고 노는 것을 말한다. 놀이라는 것은 사람과 사람이 모여 놀이하며 노는 것에서 출발하여 한 마을이나 집단이 노동과 놀이가 하나 된 모습 그리고 인간과 자연이 함께 어우러져 유천희해(遊天戱海)하는 등 여러 모습을 지닌다. 그 승화된 예를 장자의 ‘소요유(逍遙遊)’에서 찾을 수 있다.

소요유는 대자유인으로 그냥 노는 것으로 어떤 행위의 목적이나 의미를 배제하고 자연과 합일되어 소요하는 동양철학의 한 정점으로 이해할 수 있다. 여기에는 나라든지 타인이라든지 등의 대립하는 일체의 관념이 사라진 경계에서 우주, 자연과 하나 되어 노니는 것이다. 즉 우주와 자연 그리고 내가 하나 되어 우주생명의 율동 그대로 노는 것이다. 이렇게 노는 것은 정신의 자유로운 해방에 도달하면서 일체 걸림이 없는 것으로 놀이가 곧 도를 체험하는 것(體道)이며 하늘이나 우주와 하나 되는 경험까지 이른다.

소요유는 최고의 놀이로 높은 예술적 경험이며, 미적 체험의 또 다른 한 모습이라 하겠다. 놀이가 감각적 즐거움의 경계를 넘어 우주 생명과 하나 되면서 존재의 궁극을 체험하고 또 다르게는 예술적 표현으로 이어지면서 미적 체험의 극한에 이른다. 이때 놀이(遊戱三昧) 속에 무아를 경험하고 그리고 순수 존재의 본질과 만나면서 창작의 즐거움 까지 누리게 되며 이를 일러 진, 선, 미가 합일되는 것이라 하겠다.

장엄은 부처님이 머무는 적멸의 세계(寂滅寶宮)를 온갖 보배와 아름다움으로 장식한 모습에서 볼 수 있다. 사찰의 주불전의 불단이나 불전 자체를 화려한 단청이나 여러 장식물로 장중하게 꾸민 모습이나 봉안된 불상이나 후불탱화에서 불보살이 아름다운 배경에 갖가지 장식구와 색책으로 화려하게 꾸민 모습 등에서 불교적 장엄의 일단을 볼 수 있다. 특히 불교의 경전 중 엄(嚴)자가 들어가는 경전은 모두 난해한 편인데, 그 중《능엄경》과《화엄경》은 대승불교권에서 매우 중요한 경전으로 여겨지고 있다.

《능엄경》이 인간의 마음 구조를 잘 설명하고 있다면,《화엄경》은 불교적 장엄의 모습을 잘 드러내고 있다.《화엄경》은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은 직후에 삼칠일동안 깨달음의 법열에 도취하면서 깨달음의 세계를 극명하게 드러낸 것으로, 법을 듣는 청중의 수준을 고려하는 일체의 방편 없이 깨달은 사람의 눈에 비친 모든 것을 여과 없이 드러낸 깨달음 그 자체이다. 즉 이 세계는 관계로 이루어져 있고 그 관계의 삶을 어떻게 운용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지 온갖 비유와 이야기로 서술하고 있다.

이것은 석가모니가 깨달은 크고 방정하고 한없이 넓고 높은 진리를 언어화한 것으로 온갖 꽃들이 모여 있는 끝없는 장엄한 꽃밭 같은 모습을 비유하고 있다. 온갖 꽃으로 장엄한 꽃밭은 하나하나 개개 꽃들의 아름다움이 온전히 드러나면서도, 전체의 조화를 깨뜨리지 않는 것으로 여기에는 부분과 전체가 상호 모순 없이 완전한 아름다움과 장중함이 유감없이 드러난다. 거대한 화원에 각양각색의 꽃이 피면서 또 다시 각양각색의 다양한 열매가 맺히는 것으로 이를 일러 이름그대로 꽃으로 장엄한 화엄(華嚴)이라 한다.

또 다르게 화엄은 연기의 정법으로 상대적 관계에 의해 유지되는 이 세상의 모습을 바로 보고 거기서 하나와 전체, 일념과 무량한 시간, 진리와 현상의 운용을 중도(中道)의 혜안으로 꿰뚫어 본 것이다. 화엄은 불교적 깨달음의 핵심으로 연기법, 삼법인, 중도설, 사성제등의 여러 이론을 중심으로 부연 설명되어져야 하겠지만, 미학적 입장에서 이해한다면 석가모니의 깨달음은 미적 체험(aesthetic experience)으로 이 세계는 지극히 아름답다는 사실이다. 즉 이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존재들은 지극히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존귀하며 자유로운 존재들이다.

그리고 모든 존재들은 개별의 존재로서 각각 고유하고 그 특별한 아름다움과 존귀함을 가지면서도 전체의 총체성을 간직하고 있다. 이것은 2,500년 전 인도 땅에서 깨달음을 얻은 석가모니만이 그러한 존재가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존재가 그러하다. 그러기에 모든 존재들은 지극히 아름답고 장중한 존재로서 무엇으로도 그
본질을 형상화하기는 어렵다.

《화엄경》에서는 모든 존재의 존귀한 모습을 땅의 장엄, 보리수의 장엄, 궁전의 장엄 등으로 표현하고 있다. 석가모니가 정각을 이루고 그 때 앉아 있는 보리도장의 땅과 보리수 그리고 궁전 등 석가모니 주변의 모든 것이 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다이아몬드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사실 보통 사람의 눈으로 당시 석가모니를 본다면 그는 피골이 상접한 수행자의 모습으로 붓다가야의 어느 보리수 아래서 메마른 땅을 응시하고 있지만, 깨달은 사람의 눈(佛眼)으로 볼 때, 석가모니가 바라보는 붓다가야의 모습은 가장 고귀한 보배들로 이루어지면서 그 아름다움의 빛을 발하고 있다고 한다. 한 마디로 《화엄경》에서는 이 세계와 모든 존재는 장엄 그 자체로 온갖 고귀한 보배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석가모니가 앉아 있는 붓다가야의 모습뿐만 아니라 그것이 이 세상의 실상으로 모든 존재가 그러한 아름다움으로 장엄되어 있다.

그 중 사람은 모든 존재와 더불어 그러한 장중함을 온전하게 갖추고 있어 존귀할 뿐만 아니라 이러한 사실을 깨닫고 있기에 더욱 존귀한 존재이다. 그러한 장중한 존재와의 해후는 마음을 허공처럼 하여 비추어 볼 때(虛明自照) 보다 가까이 다가오는 미적 체험이며 바라보는 기쁨이다. 바라보는 대상은 어떤 생각이나 의식의 왜곡 없이 있는 그대로 순수하게 바라볼 때 다가오는 존재의 새로운 발견이며 미묘한 지혜의 일깨움이다. 예술의 작업에서도 외형적 형태만을 끊임없이 추구하기보다 허정한 마음으로 스스로와 세계를 바라볼 때 보다 승화된 미적 체험을 하게 되면서 새로운 형상을 발견하고 표현하는 기쁨을 갖게 되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장엄이란 이미지는 절대의 세계나 완전한 진리에 헌신하여 그 세계를 시각화, 형상화하는 가운데 장중하고 위엄이 가득하게 아름답게 꾸민 것으로 말했지만, 깨달음의 세계에서 본다면 모든 존재는 스스로 그렇게 장중한 존재로서 절대적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우리가 무엇을 장엄할 때 다양한 구성이나 화려한 색채로 시각적 아름다움을 극대화 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경탄케 하지만, 모든 존재가 본래적으로 가지는 장중함은 그 어떠한 물질적 수식으로 화려하게 꾸민 조형적 장엄의 세계와 비교하여도 더 완벽한 아름다움이 깃들어져 있다.

그것은 모든 존재 자체가 청정하고 투명하게 빛나 다이아몬드, 산호, 마노, 유리 등 온갖 보배 그물, 미묘한 소리와 향기 나는 꽃다발로 드리워지게 장식한 것보다 더 빛나는 보배들로 이루어져 있다 하겠다. 이러한 장엄은 누군가 인위적인 노력으로 꾸며진 외형적 장엄의 세계가 아닌 모든 존재가 스스로 갖추어진 본래적 장중함이라고 말할 때 자칫 심리적이고 관념적인 세계로 인식하게 될 염려가 있다. 더욱이 선가에서는 심외무법(心外無法)을 강조하면서 마음 밖에서 무엇인가 구하는 것은 도깨비놀음으로 일축해 버린다. 물질로 치장하고 장엄하는 것이야 말할 나위가 없고 존재 그 자체가 무상한 것으로 한 순간도 머뭄이 없는 허망한 존재로 인식한다. 모든 존재 그 자체는 개별적 자아가 존재하지 않고 또한 그 모두를 고(苦)로 인식한다. 즉 모든 존재를 가장 고귀한 존재로 인식하면서 외형적으로 인위적인 장식으로 장중하게 꾸미는 것은 부질없는 모습놀이로 간주한다.

또 하나 놀이가 자칫 감각적 놀이가 되어 엄정한 계율중심의 수행풍토에서 안일과 방일로 일탈하면서 수행자의 청정함이 깨어질 우려가 있다. 수행자는 언제나 고요 속에 깨어있으면서 정진하는 것을 생명으로 삼는데, 자칫 놀이는 방일하고 나태로 이어지면서 수행에 커다란 균열이 생길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수행이 인간존재의 본질을 깨닫고 자유스러운 존재로 거듭나면서 걸림 없는 삶을 구가하는 것이라면, 놀이와 깨달음이 거리가 먼 것이 아니다. 때로는 깨달음이 놀이로 표현되고 놀이가 깨달음의 또 다른 모습이 되기도 한다. 이때 놀이는 단지 감각의 즐거움만 일깨우는 일상의 오락 같은 놀이가 아니라 앞서 언급한 것처럼 허정지심(虛靜之心)으로 우주, 자연과 하나 되어 경험되어지는 무위의 놀이다.

인간이 자유스러운 존재라면 놀이는 자유스러움 속에 함께하고 장엄 또한 인간이 진리와 절대적 세계를 찬탄하는데 따르는 물질적 헌사이다. 놀이와 장엄은 예술의 세계를 말하는데 핵심적인 키워드로 매우 중요한 의미와 내용을 간직하고 있다. 놀이가 일차적 감각에 의지하여 이루어지지만 궁극에는 높은 예술적 경험으로 승화하여 표현하는 수단과 방편이 된다는 면에서 놀이가 가지는 또 다른 일면을 보게 된다. 이것은 진, 선, 미를 다르게 추구할지라도 궁극에서 만나 융화하면서 하나로 돌아가는 모습이다. 마치 백 천강이 모여 한맛과 푸르름을 간직한 바다가 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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