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범모 경원대 교수

1. 왜 ‘현대’이고 ‘불교미술’인가

‘현대’와 ‘불교미술’이라는 용어,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이들 사이의 관계는 과연 필연적인 것일까. 지금, 여기, 바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장 속에서 이루어지는 미술활동이 일견 현대미술일지 모른다. 그렇다면 불교사상을 기초로 한 오늘의 미술은 곧 현대불교미술이 될 것이다. 그러나 사찰의 경우, 이와 같은 전제사항은 불행하게도 성립하지 않는다. 오늘의 불교적 미술활동을 두고 무조건 현대불교미술이라고 부를 수 없기 때문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무엇보다 시대정신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21세기면, 21세기에 걸 맞는 시대정신이 작품에 반영되어야 한다. 마찬가지의 논리로 8세기의 신라정신만 범본으로 삼아 단순 재현에만 의의를 부여했다면, 오늘의 작품이라 하더라도 현대미술로 간주할 수 없다. 오늘의 불교미술 산물들을 일별할 때 가장 아쉽게 하는 부분은 곧 시대정신과 함께 창의성의 결여라는 점이다. 시대정신과 창의성이 결여된 산물을 일컬어 현대미술작품, 아니 미술작품으로 볼 수 있는가.

한국불교에 있어 20세기의 후반부는 불사(佛事)의 시대라고 말할 수 있다. 또는 ‘불사 시장(市場)’이라는 표현도 가능하리라 본다. 혹자는 한국 불사의 시장이 연간 수천억 원대에 이른다고 한다. 이 같은 대규모 사업에 의한 외형적 성장은 일견 불교미술의 발달에 획기적인 기여를 했으리라고 믿게 한다. 하지만 불사와 불교미술과의 관계는 행복한 사이가 아니었다. 한마디로 불사의 활황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불교미술에 대한 기여도는 미미하다. 불사의 내용 대다수는 건축, 조소, 공예, 회화와 같은 전통적 미술 장르에 속한다. 어찌하여 전국 도처의 사찰에서 불사가 활발한 신장세를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불교미술은 그와 비례하여 발전하지 않았는가. 본고의 문제제기는 여기에서부터 출발하려 한다. 수십억 원, 수백 원대의 불사가 도처에서 이루어지면서도 어찌하여 불교미술의 발전과 이것이 비례하지 않았을까.

불사란 무엇인가. 사실 상당수의 가람은 6·25전쟁을 거치면서 커다란 상처를 입었다. 그 폐허 위에서 가람은 서서히 재건되기 시작했다. 경제력이 향상되는 1970-80년대에 이르러 불사는 가속력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 때 상당수의 사찰은 마치 물량경진대회에 출전한 선수들처럼 규모 확대에 최선의 가치를 부여했다. 그래서 한국 최고, 동양 최대, 세계 제일 운운의 수식어가 불사라는 이름으로 동원되었다. 물량제일주의는 세속의 외화내빈 풍조와 비교되어 여러 가지 문제점을 자아내기도 했다. 양적 팽창주의는 결과적으로 조형 활동의 내실화에 반작용으로 모아졌다. 그러니까 전국 사찰에서 대규모의 불사가 이루어지면질수록 참다운 조형의식은 왜소화되었다. 시대정신과 창의성이 결여된 대규모의 불사가 안겨준 결과로서 진정한 의미의 ‘미술’의 입지는 점차 좁아진 것이다. 여기에서 관건은 작가의식이요, 이것은 곧 창의성의 문제와 직결된다.

불교미술을 예배용과 감상용으로 대별할 수 있다. 전자는 주로 전통성을 바탕으로 한 불교미술작가 혹은 장인들에 의한 재현 중심의 활동이고, 후자는 주로 일반 미술가들에 의한 현대성 중심의 불교적 작품 활동을 일컫는다. 하지만 이들 양자 사이의 거리는 하늘과 땅처럼 멀기만 하다. 바람직한 관계는 이들 양자가 협력을 이루어 제3의 창작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의 현실은 양자가 철저하리만치 단절되어 있어 상호보완은커녕 각자의 장점조차도 외면당하고 있다. 현대미술계에서는 전통불교미술이 활용되지 않고 있으며, 불사 등 전통적 불교미술의 현장에서 현대미술의 다양한 방법론과 작가는 활용되지 않고 있다. 문제는 불사라는 명분 아래 기형적인 조형 활동이 전국 사찰에서 속출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어느 시대, 어느 지역에서건 올바른 불교미술은 창의성을 기본으로 하여 새로운 작품을 제작해왔다. 불교미술의 범주를 어떻게 구분하든 창의성은 핵심적 개념 중 하나이다.

창의성의 문제는 작가의식과 시대정신을 더불어 검토하게 한다. 이는 원론적인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에 재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다만 시대미감이라는 부분은 매우 중요하여, 이 점을 소홀히 할 수 없다. 예배용 작품은 불교도상학과 무관할 수 없기 때문에 이 부분에 대해서도 살펴보아야 한다. 도상학을 무시하고 제작한 불교미술품은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도상학을 무시한 종교미술은 존재하기 어렵다.

특히 불교미술은 깨달음과 아름다움이라는 절묘한 조화를 담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하여 성범일여(聖凡一如)의 사상은 소중하다. 더불어 이상미(理想美)와 현실미(現實美)의 차별상도 헤아리게 한다. 이와 같은 영역과 개념을 아우르면서도, 순수하게 미술의 입장에서 접근할 때, 중요 키워드는 역시 창의성이다. 특히 창의성 문제는 오늘의 불교미술계에서 가장 소홀히 취급하고 있는 부분이라는 점에서도 재삼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2. 시대정신과 창의성의 문제

예술에 있어 창의성의 문제는 가장 커다란 비중을 차지한다. 한국의 전통 불교미술도 창의성이라는 바탕 위에서 빛나는 역사를 이룩했다. 백제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중앙에 조그마한 봉지지주보살과 그 좌우에 대형 여래불의 삼존불 형식인 태안 마애불, 반가사유상을 협시로 둔 서산 마애삼존불상 같은 것들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같은 마애불상은 세계에 유례가 없는 백제미술의 독창성과 연결된다. 시대미감과 어우러지면서, 독창성까지 갖추기란 매우 어려운 것이다. 따지고 보면 한국 미술사를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는 명품들도 실은 시대정신과 함께 독창성을 결합시킨 창작품이다. 불교미술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의 논리를 필요로 한다. 삼국시대의 국보 금동반가사유상이나 토함산 석굴암 등 우리 민족의 빼어난 예술품의 공통점을 재인식할 필요가 있다. 창의성이 결여된 오늘의 불교미술을 보면서 이 창의성이야 말로 무엇보다 강조하고 싶은 부분이 아닐 수 없다. 또 이 대목에서는 불교미술을 굳이 예배용이니 감상용이니 하여 구별하고 싶지도 않다.

필자는 신라미술의 극치요, 우리 불교미술의 최정점의 하나로 토함산 석굴암을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석굴암은 조형성, 사상성, 과학성 등 다양한 측면에서 볼 때에도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빼어난 미술품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우리가 석굴암에서 찾아야할 덕목은 바로 창의성, 즉 신라인의 창조정신이다. 하지만 오늘의 미술사학계는 이 부분에 대하여 소홀한 편이다.

그것은 아마도 신라미술 그것도 귀족미술 일등주의의 시각 때문일 것이다. 귀족미술 지상주의의 시각만으로는 다양한 미술활동의 실상을 온전하게 평가할 수 없다고 본다. 필자는 귀족미술에의 관심과 함께 지역미술 혹은 민중미술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믿는다. 그런 의미에서 석굴암의 우수성을 선호하는 만큼 그와 대척지점에 있는 불교미술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석굴암의 대척점의 하나로 파주 용미리 마애불상의 경우를 살펴보자.

① 파주 용미리 마애불상을 위한 변명

필자는 석굴암과 파주 용미리 마애불상(보물 제93호)을 한자리에 올려놓고 비교하기를 즐긴다. 전자는 국제 감각을 염두에 둔 중앙미술이요 또한 귀족미술의 극치이다. 반면에 후자는 지역미술이자 서민적 풍모가 다분한 민예적 조형품이다. 파주 불상은 거대한 천연 바위의 위에 별도로 두상을 마련하여 올려놓은 특이한 형식의 작품이다. 그것도 쌍불로서 그렇게 흔한 양식은 아니다. 천연바위를 이용한 불신(佛身)의 옷 주름은 간략한 선각(線刻)에 의해 투박하게 처리되어 있다. 두상은 원만형이기 보다 거의 사각형에 가까우며 이목구비를 강하게 강조하여 세속화시켰다. 실제의 인물을 모델로 한 것처럼 친근감을 이끄는 인상과 더불어 여타의 불상처럼 권위주의 분위기를 제거시켰다. 그만큼 인간적 면모의 불상에 가깝다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불두 위의 보개(寶蓋)는 각기 사각형과 원형으로 대비를 이루면서 쌍불로서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 파주 마애불은 특이한 불교미술 작품의 하나임은 틀림없다. 그러니까 석굴암이 치밀한 계획과 시공으로 인한 고액 예산의 산물이라면 파주 마애불은 대범한 접근방식과 소략한 시공으로 인한 낮은 예산의 산물이다. 파주 마애불은 현대 조소작품의 감각과도 상통할 만큼 나름대로 뛰어난 조형감각을 보이고 있다. 브랑쿠지 이상의 감각과도 연결될 만큼 우수성을 담보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미술사학계에서는 이 불상에 대하여 호의적인 평가를 보내지 않았다.

<그림1. 파주 용미리 마애불상, 조선초기, 보물 93호>

“파주 용미리 마애불은 자연석을 살려서 조각한 작품으로서 머리는 별석(別石)에 새겨 올려놓은 것으로 거상 조성의 편법을 쓴 창조성을 잃은 말기 타락양식이라고 하겠으나 공식화된 얼굴의 굳게 닫힌 입에 남아 있는 고려적 힘은 초기양식의 잔재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위의 글은 파주 용미리 마애불상에 대하여 창조성을 잃은 말기의 타락양식이라고 폄하하는 시각을 보였다. 하지만 자연석을 활용하여 조성한 파주 마애불은 ‘편법’이고 또 창조성을 잃었다기 보다 오히려 창조성을 획득했다고 평가할 수 없을까. 한마디로 필자는 파주 마애불은 창의성에 입각한 조형적 산물로 파악하려 한다. 게다가 중앙 집중의 형식에서 지역화 혹은 민중화의 양식으로 발전된 단계의 산물로 의미를 부여하려 한다. 파주 마애불은 결코 창의성의 결여에 해당하는 타락양식이라고 간주하기에 고려해야할 점이 많다고 믿고 싶다. 무엇보다 이 불상에 대한 자세한 내용조차 파악하기 이전에 타락양식이라고 속단했기 때문이다.

최근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파주 불상은 기왕의 학설처럼 고려 초의 작품이 아니고 오히려 조선시대 초기인 1400년대의 작품으로 제작 연대를 새롭게 보고 있다.

이와 같은 추정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 우선 원형 보개의 경우 원정모(圓頂帽)를 쓰고 있는데, 이는 원나라의 귀족들이 썼던 관모로서 여말선초라는 시대 배경과 유사하다는 점, 더불어 명문에 성화칠년(成化七年)이라는 절대년도가 마애불의 하단부에 새겨져 있어 1471년(성종 2년)에 해당한다는 점, 그리고 고려 원신공주의 전설은 오히려 조선 초 세조의 정권 찬탈 사건의 우회적 표현이라는 점 등이다. 제작년대 추정과 더불어 특기할 사항은 바로 불상 조성의 발원자에 대한 사항이다.

역시 명문에 의거, 파주 마애불의 시주자들은 곧 태종의 장남으로 폐세자가 된 양녕대군의 둘째 아들인 함양군과 그의 처 태인군부인 이씨 등 왕실 및 지배계층의 인물과 승려이다. 이로서 보면 지방의 민간에 의해 조성되었음직한 파주 마애불의 스폰서가 오히려 왕실 관련 지배계층이라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왕실 발원임에도 불구하고 지방적 양식의 불상으로 조성되었다는 점은 무슨 의미일까. 이는 억불숭유의 불교핍박시대를 반영하는가. 아니면 글자 그대로 지역적 토착화를 반영하는가. 한마디로 파주 마애불은 왕실 인물의 발원에 의해 조성되었다 하더라도 형식만큼은 지역화 혹은 인간화된 새로운 시대의 불교적 산물이라는 점이다.

“용미리 불상은 만인이 오가는 서울-개경간의 대로변에 위치하여 표지석이 되는 공공의 기능을 갖고 있다. 그런데 바위를 불신으로 삼고 별석으로 두상을 쌓아 올린 독특한 형태로 되어 미적인 완성도를 높이기보다는 하나의 거대한 상징을 세우고자 하였던 의도를 짐작케 한다. 전체적인 단순미에 비해 고위신분의 관모인 원정모만은 사실적으로 표현한 점에서도 그 상징은 극명하게 보인다.

명문을 통하여 본 용미리 불상은 사후 아미타의 극락으로 왕생한 뒤 다시 먼 미래 미륵의 하생 시에 인간으로 재생하여 설법의 초회에 높은 정법을 성취할 것을 희원하면서 조성한 미륵과 아미타 이불(二佛)이었다. 그런데 원정모를 쓴 불상에 미륵이 곧 세조로 되어 있어 세조에 대한 숭앙과 그를 다시 만나고자 하는 추도의 의미가 담겨있음을 알 수 있었다.

조성배경으로 1471년 파주 용미리에 미륵과 아미타 두 상을 만들었던 내면에 당대 권력의 핵심 정희왕후와 세조 공신 한명희 그리고 함양군이 세조를 중심으로 형성하였던 깊은 이해관계가 드러나 있음을 보았다. 이렇듯 용미리 불상은 조선전기에 왕실이 발원하여 왕실 일족의 불의의 단명과 이로 인한 위기를 일소하며 그들의 권위를 세우고 정당화하고자 한 당대의 역사를 반추하게 하는 하나의 상징조각으로서, 조선전기 불교조각의 새로운 자료로 그 의미가 클 것으로 생각한다.”

파주 마애불에서 창의성을 확인한다. 권위의식을 배제하고 인간적 측면으로 접근한 불상의 조성은 곧 지역 주민으로 하여금 친근감과 더불어 ‘우리의 불상’이라는 의식을 자아내게 했을 것이다. 역시 발상의 전환을 요구하는 사례가 아닌가 한다. 필자는 석굴암과 같은 창작품이 있는 한편에 파주 마애불과 같은 또 다른 창작품을 생산해낸 우리 미술사의 풍요로움에 감동을 하고 있는 입장이다. 조형성이나 창의성의 입장에서 파주 마애불은 결코 폄하의 대상으로만 볼 수 없기 때문이다.

②김복진의 불상 작품

시대정신과 창의성의 문제로 볼 때, 우리는 일제 강점 하에 활동한 김복진의 경우를 생각할 수 있다. 김복진은 일제하 최초의 근대적 조소예술가이다. 그는 조소 분야 이외 문예운동가로 혹은 미술비평가로 빛나는 업적을 남긴 선구자였다. 그는 <소년>(1940)과 같은 일반 작품, <최송설당여사동상>(1935)과 같은 동상작품 그리고 10점 가량의 불상작품을 제작했다. 그의 불상작품은 사상운동의 결과로 5년여의 감옥생활을 하고 난 이후 1930년대에 집중적으로 제작되었다.

대표작은 <김제 금산사 미륵전 본존상>(1936)과 그것의 마케트인 <계룡산 소림원 미륵입상>(1935), <예산 정혜사 관음보살상>(1939), <속리산 법주사 미륵대불>(1940, 제작중 사망) 등이다. 이들 불상작품의 특징은 무엇보다 전통성을 기본으로 하여 시대미감을 가미했다는 점이다. 시대미감의 현장으로 금산사 미륵전의 경우를 예로 들 수 있다. 미륵전 삼존불은 화재에 의해 본존상만 파괴되었다.

이를 김복진이 제작한 바, 좌우의 17세기 보처상과 대비되어 흥미롭다. 보처상의 둔중한 선과 볼륨에 비해 본존불은 경쾌한 리듬 감각을 느끼게 하여 차별상을 보인다.5) 각주5) 김복진의 경우, 내용면에서도 특징을 헤아리게 하지만 무엇보다 불상의 재료면에서도 주목할 만 하다. 왜냐하면 그는 흙(금산사), 석고(소림원), 시멘트(법주사) 등 다양한 재료를 활용하면서 불상 제작에 신기원을 이룩했기 때문이다. 김복진의 재료실험 및 성과의 하나로 법주사 미륵대불을 들 수 있다.

이 근대기의 걸작은 법주사측의 ‘도괴 위험’ 이유로 지난 1987년 철거되고 그 자리에 청동불상으로 대체되었다. 김복진의 미륵대불은 일제하 새로운 재료와 독일식 공법을 활용한 시멘트 불상이었다. 불상 내부의 철근에 문제가 있어 철거를 했다지만 사실은 조그만 못 하나 사용하지 않고 건립한 시멘트 불상이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국보적 존재인 법주사의 시멘트 불상을 잃은 셈이다. 보수를 하더라도 원재료는 살리면서, 그러니까 작가의 원안은 살리면서, 부분적으로 시행되었어야 옳았다. 법주사의 경우, 불사 만능주의의 또 다른 피해 가운데 한 사례가 아닌가 한다.

김복진의 도쿄미술학교 시절의 은사인 다카무라 고운(高村光雲)은 목조 불상의 대가였다. 그는 구시대의 ‘불사(佛師)’에서 신시대의 ‘조각가’로 조소예술의 진전을 보인 장본인이었다. 김복진은 재학시절부터 전통성과 창의성 그리고 외래양식과 민족양식 등을 고민하면서 작가로서의 토대를 닦았다. 하지만 김복진의 경우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는 전통미술에의 열의, 불교 신자로서의 신심, 진보적 예술관, 부단한 실험정신 그리고 작가정신과 창의성의 결합이라 할 수 있다. 이 같은 결과로서 근대기 최고의 불상작품을 창출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 점을 후학들은 주목해야 할 것이다.

<그림2.(좌) 김복진, 김제 금산사 미륵전 본존상, 1936년, 소조에 도금, 높이 11.82cm>
<그림3.(우) 김복진, 예산 정혜사 관음보살좌상, 1939년, 석고, 높이 106cm>

합천 해인사의 경우, 필자의 눈길을 끄는 두 가지의 조형품이 있다. 하나는 고려시대의 목조 희랑(希朗)조사상이고, 또 다른 하나는 최재은의 성철스님 사리탑이다. 현재 해인사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는 희랑상은 핍진한 초상조각이라는 점에서, 사실주의의 압권이라는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 희랑상은 흔치 않은 실존인물의 초상조각이는 점에서도 소중한 작품이다. 특히 창의성의 측면에서도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작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미술사학계에서의 ‘외면’은 안타까울 정도이다. 희랑상이 자아내는 창의성을 주목해야 마땅하다고 믿는다.

더불어 성철스님 사리탑은 재일작가 최재은에 의해 조성된 작품이다. 이 사리탑은 불교적 분위기를 담보하면서 현대적 세련미를 자아냈다 하여 주목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작품과 작가의 선정 그리고 이 같은 새로운 시도를 수용한 해인사 스님들의 감각까지 돋보이는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이제 도시사찰의 건축부터 서서히 새로운 시도가 이루어지기 시작하고 있다. 고무적인 일이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만족할 단계는 아니지만 새로운 시도 즉, 창의성의 개진에 기대를 거는 마음 적지 않다.

3. 도상학과 조형성의 문제

① 정종여와 오지호 불화의 문제

종교미술은 도상학과 밀접한 관계에서 생성되는 숙명적인 부분이 있다. 교리와 위배되면서 형상을 조성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불교미술의 경우, 일반 작가에 의한 이른바 감상용과 장인에 의한 사찰 봉안의 예배용으로 대별할 수 있다. 물론 일반 작가의 경우는 불교교리나 도상학에 대하여 약한 고리를 지닐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 작가의 작품으로 사찰 봉안용 작품이 있어 관심을 끈다. 우선 정종여와 오지호의 경우를 예를 들어 보자.

정종여는 1938년 진주 의곡사 괘불을 제작했다. 이 작품은 석가여래독존상(높이 6.5m)으로 기왕의 진채색에 의한 전통적 괘불과 달리 파격적인 화면 구성과 필치 등과 함께 배경을 여백으로 처리하면서 작가적 독창성을 부여한 것이다. 일제하 주목받은 화가의 괘불이라는 점에서 소중한 사례이기도 하다. 하지만 도상학적으로 볼 때 의곡사 괘불의 수인은 검토의 대상이 된다. 일반적으로 석가여래의 수인은 항마촉지인이나 시무외여원인의 수인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의곡사 괘불은 화기(畵記)에 석가여래상이라고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수인은 오히려 아미타 구품인에 가깝다. 그것도 일본이나 중국에서 유행을 했던 수인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참으로 안타깝게 하는 부분이다.

<그림4. (좌) 정종여, 진주 의곡사 괘불, 1938년, 면에 채색, 높이 6.5m>
<그림5. (우) 오지호, 광주 원효사 대웅전 후불탱화, 1954년, 인조견에 채색, 143.8 x 191.8cm>

오지호는 근대기의 인기작가로 명성이 자자한 유화가다. 그는 6·25전쟁 시 지리산 빨치산의 경험을 갖고 1954년 전통 방식에 의한 불화를 제작했다. 광주 <원효사 대웅전 후불탱화>(143.8x191.8cm)가 그것이다. 유화가의 진채 불화라는 점에서 주목의 대상이 된다. 이 불화는 중앙의 여래좌상과 좌우에 6대보살 등 권속이 시립해 있는 구성을 보이고 있다. 전열의 보살은 교토 법륭사의 보살상을 연상시키고, 후열의 제자상(?)은 조선시대의 불화를 연상시킨다. 그런데 이 불화의 도상학 문제 역시 검토의 대상이 된다. 소장처인 원효사는 아미타후불탱화라면서 대웅전에 봉안하고 있고, 또 불화의 주존상 수인이 아미타불이 아닌 석가불에 가깝다는 점이다. 이렇듯 정종여와 오지호의 경우, 일반 유명화가의 불화 제작이라는 소중한 전례를 보였다는 점에서 주목을 요하나 구체적으로 작품을 살필 때, 도상학의 문제 등에서 검토를 요하는 한계가 있다.

② 진천 보탑사 비로자나불상의 문제

진천읍 보탑사는 신영훈 문화재 전문위원의 감독 아래 1996년 완공된 신축 가람이다. 42m가 넘는 3층목탑을 쇠못 한 개 사용하지 않고 건립한 순수 목탑이라고 자랑했던 곳이다.

대표적 건축물인 목조 보탑은 1층에 사방불을, 2층에 팔만대장경을 모신 윤장대를, 3층에 미륵삼존불을 봉안하고 있다. 1층의 사방불은 동방 약사유리광불, 서방 아미타여래, 남방 석가모니불, 북방 비로자나불을 배치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비로자나불상이 도상학적으로 볼 때 의문을 자아낸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이 비로자나불은 지권인(智拳印) 수인을 보이면서 좌우의 손 위치를 거꾸로 삼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지권인은 금강권을 만들고 왼손의 집게손가락을 펴서 바른손 주먹 속에 넣고, 바른손의 엄지손가락과 왼손의 집게손가락을 마주하는 것이다. 당나라 시대 불공삼장이 번역한 《금강정경일자정륜왕유가일체시처염송성불의궤(金剛頂經一字頂輪王瑜伽一切時處念誦成佛儀軌)》; 약칭 《金輪時處軌》)에 지권인의 결인 방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지권인이란 중지와 무명지와 약지로 엄지를 잡고 검지로 엄지 뒤를 떠받쳐 금강권을 이루어 오른손으로 왼쪽 검지 한마디를 쥐고 면(面)을 가슴에 대는 것이니, 이를 지권인이라 한다.”

<그림6. (좌) 진천 보탑사 비로자나불좌상, 1996년>
<그림7. (우) 철원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865년, 높이 91cm, 국보 63호>

지권인은 오른손이 위에서 왼손의 검지손가락을 감싸는 모습이다. 이는 당 나라의 반야(般若)가 번역한《제불경계섭진실경(諸佛境界攝眞實經)》에도 마찬가지의 내용이다. 신라의 경우, 석남암사의 예처럼 8세기에 비로자나불상이 조성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비로자나불상은 석가불상, 아미타불상과 함께 통일신라 3대 불상 가운데 하나이다. 지권인을 짓고 있는 불형(佛形) 비로자나불상을 가장 오래 전에, 가장 많이 조성한 나라가 신라이기 때문에 신라의 지권인 비로자나불상은 세계 미술사에서 커다란 의의를 지니고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 지권인인 비로자나불상의 경우, 각연사 석조비로자나불상(보물 433호), 불곡사 석조비로자나불상(보물 436호), 도피안사 금동비로자나불상(국보 63호)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불상은 오른손으로 하여금 왼손의 검지를 감싸고 있는 수인을 보이고 있다.

③ 불국사 비로자나불상의 경우

반면에 왼손이 오른손보다 위에 올라간 도상학적 오류의 수인을 보인 지권인 비로자나불상이 있어 눈길을 끈다. 비로자나불상의 시대라는 통일신라시대 그것도 불국사의 금동비로자나불상(국보 26호)의 경우를 대표적 예로 들 수 있다. 우선 불국사 비로자나불상에 대한 설명부터 인용해 본다.

“윗몸(상체)도 꽤 긴 편인데 떡 벌어진 어깨에 오른쪽(向左) 젖무덤 -젖꼭지가 뚜렷하게 표현되었다-을 큼직하게 묘사하고 있으며 배도 불룩하게 표현하고 있어서 건장하고 장대한 인상을 풍긴다. 그러나 석굴암 본존불좌상처럼 탄력 있는 표현은 아니며 축 처진 듯한 묘사를 하고 있다. 두 팔은 가슴께로 모아 두 손을 아래위로 포개었는데 왼손(向右)이 위에 놓였고 오른손이 아래에 놓여 오른손 둘째손가락(頭指)을 왼손이 감싸고 있다. 말하자면 지권인(Bodha-sri-mudra)을 짓고 있는 셈인데 이때의 지권인은 손의 놓임이 왼손이 아래, 오른손이 위에 놓이는 일반적인 예나 경전([攝眞實經])의 설명과는 다르다. 이러한 예는 영탑사 금동삼존불 등 약간의 예에서 보이는 손 모양인데 이 경우는 아마도 젖꼭지를 가리지 않으려는 의도 때문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그림8. 경주 불국사 금동비로자나불좌상, 통일신라(?), 높이 177cm, 국보 26호>

불국사 비로자나불상 지권인의 손 모양이 불경과 다르게 거꾸로 된 것은 젖꼭지를 보이려는 의도 때문이란 설명이다. 비로자나불상의 젖꼭지라, 대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불국사 비로자나불상의 젖꼭지에 그렇게 엄청난 상징성이라도 있는가. 수인까지 뒤집어엎을 정도로.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설명이다. 도상학은 교리에 충실한 것이 원칙이다. 그렇다면 불국사의 경우는 오류일 따름이다. 그렇다면 왜 이 같은 오류가 발생했을까. 불국사는 석굴암과 함께 통일신라 전성기의 산물이다.

다보탑이나 석가탑 특히 토함산 석굴암을 조성하던 기량을 과시하던 신라미술의 한 요람이기도 했다. 이같이 중요 사찰에서 기초적 도상학조차 무시한 불상을 조성했다는 사실 자체부터 이해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이른바 불국사 비로자나불상의 경우, 다른 곳에서 이관해 왔을 가능성과 함께 통일신라시대 이후의 작품으로 해석하는 방법도 검토하게 한다.

혹시 불국사 금동비로자나불상은 통일신라 이후의 불상은 아닌가. 지권인의 수인 문제도 그렇지만 상호나 몸의 표현에서 석굴암 본존불 계통의 세련된 선이라기 보다 둔중하기 그지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통일신라 전성기의 불상 분위기에 비해 이질감이 있지 않은가. 특히 중요한 점은 통일신라시대 여타의 비로자나불상과 비교했을 때, 불국사상은 덩치만 컸지 조형감각의 측면에서 결코 탁월하다고 볼 수 없다는 점이다.

고대 인도에서 오른손과 왼손의 관계는 매우 엄격했다. 오른손이 불보살을 의미한다면, 왼손은 중생계를 의미한다. 따라서 좌우의 손 위치를 바꾼다는 것은 불보살과 중생의 위치를 바꾼다는 것과 같다. 도상학을 알고 있는 경우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한마디로 왼손이 오른손의 검지를 쥔 형식은 지권인의 참된 의미를 구현하지 못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불국사 비로자나불상의 위상에 대한 재검토가 요구된다. 도상학을 무시한 봉안용 불상의 제작은 창의성과 무관한 경우이다.

마찬가지의 맥락으로 근작 진천 보탑사의 비로자나불상의 경우도 오류의 가능성을 지적하게 한다. 교리에 대한 무지 혹은 한국인 특유의 철저하지 않음을 반영한 결과인가. 도상학과 다른 고대의 불상은 하나의 참고자료로 어떻게 할 수 없지만, 작가와 시주자가 생존해 있는 오류의 불상들은 마땅히 시정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사찰에 봉안되어 향화를 받는 예배상이라면 더욱 철저해야 할 것이다. 불교미술 분야 ‘전문가들’의 책임감 있는 자세를 기대해 본다.

4. 창의성과 불교적 조형

① 최종태의 길상사 관음상

서울 성북동 소재 길상사 마당에 특이한 석조 관음보살입상이 있다. 관음상 좌대에 다음과 같은 명문이 새겨져 있다. “이 관세음보살상은 길상사의 뜻과 만든 이의 예술혼이 시절인연을 만나 이 도량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 모습을 보는 이 마다 대자대비한 관세음보살의 원력으로 이 세상 온갖 고통과 재난에서 벗어나지이다. 나무관세음보살./증명 회주 법정스님 외 대중일동/ 시주 한환희행 외 동참불자/ 돌새김 이재순, 조각 최종태/ 불기 2544년(2000년) 4월 28일 세우다.” 이 관음상은 평소 볼 수 있는 보살상과 사뭇 다른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 이는 작가가 바로 최종태라는 미술계의 원로작가이기 때문이다.

그는 가톨릭미술협회 회장을 역임했듯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최종태 교회건축》이라는 대형 도록을 출판할 정도로 교회조각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작가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작가가 법정스님과의 인연으로 ‘맑고 향기롭게’의 근본도량인 길상사에 관음상을 조성하게 된 것이다. 가톨릭 신자의 불교 관음상 제작,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그림 9. 최종태, 서울 길상사 석조관음보살입상, 2001년>

최종태의 관음상은 일견 가냘픈 몸매에 청순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하체는 단순 처리하여 장신형의 늘씬한 신체구조를 지니고 있다. 연화 보관을 쓴 고개는 약간 앞으로 숙였으며 얼굴은 신체에 비하여 작은 편이다. 약간 슬픈 표정처럼 보일 정도로 자비상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오른 손은 들어 손바닥을 보이고 왼손은 원형의 커다란 정병을 가슴에 부착하여 안고 있다. 기왕의 고려 매병 형식의 정병과는 상이한 둥그런 모습이다.
관음상의 분위기가 성모상과의 친연성을 배제할 수 없게 한다. 어떤 언론계에 있는 불자는 길상사 관음상은 마리아상과 같아 절대로 예배의 대상으로 삼고 있지 않다고 필자에게 말한 바 있다. 이는 사찰의 종교적 봉안물과는 너무 거리가 멀기 때문이란다. 따지고 보면 최종태의 교회 조각에 대한 기독교 신자들 사이에서도 이질감 문제로 논란의 대상이 되었던 모양이다.

그만큼 창의성을 바탕에 깔고 새롭게 작업했다는 반증일 것이다. “그의 성상조각들은 교회가 예술을 수용하지 못하고 교훈적, 사도적인 목적에 의해서 만들어진 성물들에 길들여져 있는 사람들을 당혹스럽게 한다. 한복을 갈아입은 동정녀 마리아, 반가사유상을 연상시키는 예수의 얼굴들. 그러나 천 수백 년간 많은 예술가들은 모두가 자기의 예수를 형상화했다. 미켈란젤로는 미켈란젤로의 예수를, 루오는 루오의 예수를 만들고 그렸다. 조각가는 그가 부를 수 있는 자유롭고 힘찬 노래를 그의 목소리에 맡기고 있다. 조각가(*최종태)는 작품을 할 때 살아 있는 모델을 쓰지 않는다. 조각가는 분명히 얼굴의 비례가 몸의 8분의 1은 되어야 하고, 손을 벌린 양팔의 길이가 전신의 길이가 되어야 한다는, 인체의 이상적인 비례도 알고 있을 테고, 또한 인체의 해부학적 구조도 알고 있으련만 그는 모델을 쓰지 않는다. 작품이란 수치나 해부학이 아니기 때문이다.”

새로운 변화에 대하여 대중은 일단 거부의 몸짓을 보이기 마련이다.
필자는 길상사 관음상과 마리아상과의 유사성에 대하여 작가에게 문의한 바 있다. 작가는 관음상 제작을 의뢰 받고 평소 반가사유상에 대한 관심의 연장선에서 작업에 임해 단시일 내에 완성한 작품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니까 성모상과 무관하게 한국 반가상의 전통을 응용하여 자비의 관음보살상을 조성한 것이라 한다. 다만 제작과정은, 명문에도 밝혔듯이, 흙으로 원형을 빚고 석공에게 돌 작업을 맡긴 다음 본인이 마무리를 한 작품이라고 했다.
과연 최종태의 길상사 관음상은 그의 교회 조소작품과 무관한 것일까. 무엇보다 그의 교회작품 즉 서울 대치2동 성당의 <성모상>(1992)을 비롯 소래 성 바오로 피정의 집 <성 모자상>(1990), <성가족상>(1992), 서울 목5동 성당의 <성 모자상>(1994), 서울 혜화동 성당의 <성모상>(1997)과 친연성이 강하기 때문이다.

이들 화강석 작품들은 우선 입상으로 늘씬한 몸매를 자랑하면서 하체를 단순하게 처리했다. 얼굴과 손의 표정으로 주인공의 성격을 강조하면서 제작의도를 자아냈다. 한마디로 성당의 여러 기독교적 작품과 길상사의 관음상과 전체적인 분위기는 매우 흡사하다는 점이다. 최종태의 관음상은 교회조각의 연장선상에서 이룩된 종교간 화합의 산물로 파악하게 한다. 종교성을 차치한다면 시대미감이라든가 창의성의 차원에서 우리 시대의 주요 불교미술작품의 하나로 선정될 만 하다. 문제는 일반 미술가 가운데 가톨릭 신자가 아닌, 불자로서 신심과 창의성으로 이루어진 우리 시대의 불교작품을 탄생시키는 것이리라. 최종태의 길상사 관음상은 과도기의 한 징검다리로 생각하고자 한다. 이 징검다리를 넘어 본격적인 우리 시대의 불교미술이 새롭게 창출되기를 비는 마음 간절하다.

② 정릉 신흥사 감로탱화

근대기 불교미술 작품 가운데 창의성의 측면에서 주목을 끄는 작품으로 서울 <정릉 흥천사 감로탱화>(1939)를 들 수 있다. 이 작품은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당대의 사회상을 반영했다는 점에서 각별하다. 사찰 봉안의 불화에서 당대 사회상을 이미지로 부각시켰다는 점은 획기적인 일이다. 물론 18세기 이래 감로탱화의 독자적 위상정립은 재평가의 대상으로 훌륭한 전통을 보유하고 있는 분야이다.

신흥사 감로탱화의 경우, 전통을 존중하면서 시대상황을 화면에 반영했다는 작가정신과 창의성의 측면에서 획기적인 불화의 한 예가 아닌가 여겨진다. 이 불화의 하단부에 소개된 당대 사회상은 스케이트 타기, 전화 걸기, 전당포, 전공, 싸우는 학생들, 재판정, 사방공사, 서커스, 도시 풍경, 모내기 등등이다. 양장차림의 젊은 도시 여성과 양복차림의 신사 등이 등장하는 이 그림의 하단부는 꼭 1930년대의 일반 회화작품과 맥락을 함께 한다. 당대 사회의 반영, 이는 예술가의 창의성과 연결된다. 대중은 이러한 요소를 보면서 작품 감상의 즐거움을 얻는다.

불자는 이와 같은 자신들의 일상적 이야기를 보고 환희심을 얻는다. 필자는 흥천사 감로탱화의 시대정신과 창의성을 높게 평가하고 싶다. 그동안 감로탱의 하단부분을 욕계라고 표현했으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견해가 있다. 욕계라기 보다 육도윤회상이라고 해석하여 육도상이 맞는 표현이라는 것이다. 욕계(欲界)는 천인(天人)의 세계요, 색계(色界)는 인간의 세계이다. 삼계(三界)는 고통의 세계이기 때문에 벗어나야 할 곳이다. 삼계는 윤회하는 존재이지 불국토가 아니다.

감로탱화 하단부분을 욕계라고 표현한 부분에 대한 수정은 불교미술사학자 이기선 님의 지적에 의한다.11) 각주11) 졸고 <한국불화의 한국성 문제>(2000)를 집필하면서 필자는 강우방과 김승희의 공저 [감로탱](예경, 1995)을 주요 참고도서로 활용했다. 그러다 보니 본문에서의 지적처럼 육도상 대신에 강우방의 논리처럼 욕계라는 표현을 사용하게 되었다. 이 문제에 대한 본격적인 재검토가 요구된다.

<그림10. 서울 정릉 흥천사 감로탱화, 1939년, 비단에 채색, 192 x 292cm>

5. 불교미술의 미래를 위하여

불교미술은 교화, 장엄 등의 목적으로 오랜 세월동안 변모하면서 발전해 왔다. 문제는 감동이다. 예술의 생명력은 다중에게 선사하는 감동에서 그 가치가 제대로 발휘된다. 감동은 단순히 예술적 흥취 이외의 독특한 부분이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깨달음의 세계이다. 불교미술은 독특한 위상으로 깨달음의 세계로 인도하는 특징이 있다. 그래서 불교미술은 하나의 방편이기 십상이다. 진짜 깨달음의 세계에서는 교화나 장엄을 목적으로 하는 미술이 불필요하기 때문이다. 법열의 순간에 이르기까지의 안내자 역할을 하는 미술, 곧 깨달음은 아름다움의 또 다른 표현과 같다.

사찰은 깨달음의 세계에 이르게 하는 특수 목적의 공간이다. 깨달음은 각자의 근기에 따라 들어 나는 모습이 다양하다. 더불어 예술 활동이라는 것도 작가에 따라 다양한 양상으로 작품에 반영된다. 민족, 시대, 지역, 계층 등등 입장과 처지에 따라 반응하는 미술의 형태는 각기 다른 모습을 취하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중심을 지키는 원리 같은 것이 있다. 아름다움의 세계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다음과 같은 구비요건이 필요로 한다. 즉 시대정신이다. 시대정신은 곧 시대미감과 직결된다. 시대미감도 창의성과 결합할 때, 하나의 미술작품으로 생명력을 담보한다. 아무리 훌륭한 교리라 하더라도 상투적인 표현으로만 시종한다면 대중은 곧 싫증을 내게 마련이다. 즉 대중으로 하여금 열반의 세계로 인도하기는커녕 오히려 불법의 세계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조형언어의 역할은 이렇듯 과중한 것이다. 불교미술가를 두고 불모(佛母)라고 일컫는 진정한 의미를 숙고해야 할 것이다. 과거의 미술품을 단순 복제 혹은 재현하는 일로 작가연하는 태도는 정당하다고 볼 수 없다.

현대불교미술이 가야할 길, 거기에는 도상학을 위한 교리에 대한 이해도, 현대적 감성에 의한 미의식, 민족미 그리고 창의성이 요구된다. 한마디로 현대불교미술의 기본 요건은 바로 도상학과 창의성의 절묘한 결합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바로 거기에서 법열(法悅)이 출발한다. 앞으로 여기에 대해 일반 미술계에서의 불교적 활동의 활성화를 기대해 본다. 필자는 지난 2002년 불교문화산업기획단 주최로 근현대 불교미술전인 <아름다움과 깨달음> 전시를 기획하여 전국 순회전시를 치른 바 있다. 이 같은 전시는 초유의 일이어서 대중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12) 각주12) 근래 모란미술관 주최 불교적 성격의 현대미술전은 주목할 만하다. 조은정 기획의 <니르바나, 생과 사의 경계에서>(2004, 6)와 <놀이와 장엄 첫 번째>(2005, 5)가 그것이다. 물론 이와 같은 전시는 다다익선이다. 해외에서 불교적 성격의 현대미술전으로 다음과 같은 예를 소개할 수 있다. , co-organized by Jacquelynn Bass and Mary Jane Jacob, 2001-2003, [Buddha Mind in Contemporary Art],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04.
당시 느꼈던 소감은, 근현대 미술을 포함한 불교미술 전시의 정례화 그리고 불교미술관의 설립이 절실하다는 점이었다.

불교미술의 전통은 참으로 찬란했다. 하지만 오늘의 불교미술, 문제점투성이다.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불사라는 이름 아래 전국의 도처에서 엄청난 물량의 ‘공사’가 이루어져 왔음에도 불구하고 불교미술의 발전에 기여도는 무엇 때문에 낮은가. 이제부터라도 사심을 버리고 미래를 위한 대안 마련에 심기일전할 때이다. 이를 위해서 무엇보다 절실한 것은 현대 불사의 현황파악이다. 따라서 일정 규모 이상의 불사 목록을 작성할 필요가 있다. 이를 기초로 하여 평가 작업이 이어져야 한다. 필자의 개인적 입장 같아서는 20세기 후반 한국 불사 가운데 베스트 10과 워스트 10의 리스트를 선정하여 공과(功過)를 분명히 하고 싶은 심정이다. 이를 위한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 문제는 최악의 불사에 해당하는 경우이다. 이들을 후손에게 무작정 물려 줄 수 없다. 우리 시대, 우리 세대에서 처리해야 한다. 오류는 오류이다. 저질은 저질일 따름이다. 문제의 해당 불사는 과감하게 우리의 손으로 처리하고 새로 조성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역시 문제는 불사이다. 불사라는 이름 아래 펼쳐지는 갖가지의 미술활동은 엄청난 자금력과 함께 우리 시대의 불교미술을 좌우하기 때문이다. 여태껏 관행처럼 되어있는 폐쇄적 운영 방식은 불교미술 발전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나의 불사를 집행할 때, 그 흔한 공개적 입찰방식조차 외면하고 있으니 훌륭한 아이디어나 작가의 참여를 원천적으로 봉쇄한 꼴이 된다. 언제 능력 있고 자질 좋은 작가 양성에 불사가 기여를 할 수 있겠는가. 불사 방식의 개방적이고도 미래지향적인 시각을 촉구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는 개방적이고도 진취적인 자세가 중요하다. 결국 발주처인 사찰 스님들의 안목과 자세로 연결된다. 진취적이고도 국제 감각이 있는 전문가를 활용한 자문제도도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투명한 예산 집행 등 ‘난제’가 하나 둘이 아닐 불사의 현장, 이를 어떻게 돌파할 것인가.

조계종이나 정부의 불교미술 관련 업무에서 보다 적극적이고도 혁신적인 방안의 모색을 기대하고 싶다. 불교문화재의 보존이라는 명분 아래 ‘과거 고수(固守)’의 차원과 다른 미래지향적인 정책이 절실하다. 조계종 주최의 불교미전도 대담한 발상의 전환을 보여 진정한 의미의 우리 시대 불교미술로 거듭 태어나는 산실이 되기를 바랄 따름이다. 이제 우리도 광주비엔날레 같은 국제적 규모의, 그리고 현대미술과 전통미술을 아우르는 국제불교미술 전시를 추진할 때이다. 요즘은 전국의 조그만 지역까지도 특화된 향토사업을 추진하느라고 분주하다. 무엇 때문에 국제적 규모의 불교비엔날레를 추진하지 않는가. 이처럼 불교문화를 선양하고, (현대)불교미술을 진흥시키고, 또 포교의 마당으로 활용하고, 한국 불교의 위상을 세계에 내보일 훌륭한 방법을 외면하고 있는가. 조계종 총무원 같은 기구에 문화정책 담당 브레인과 실천력을 아쉬워 할 따름이다. 단순히 불교미전의 현대작가 참여 여부만이 문제는 아니다. 보다 적극적이고도 거시적인 안목에서 불교미술의 활성화 방안을 기대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문제는 작가이다. 또한 결과물로 남는 것은 작품이다. 투철한 작가의식으로 뭉쳐진, 그리고 거기에 창의성까지 겸비한 작가, 이들의 작품이야말로 불국토 건설에 일조를 하게 될 것이다. 자원낭비 혹은 환경 공해에 기여하는 이름만 좋은 미술작품, 이제는 퇴치해야 한다. 상품으로서의 성상(聖像), 언제까지 봉안 아니, 방치할 것인가. 능력 있고 창의성 있는 불교작가의 출현을 학수고대 한다. 왜냐하면 이들의 어깨에 내일의 한국 불교미술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문제는 창의성이다. 빼어난 불교작품은 시대정신과 창의성을 기초로 한 ‘오늘의 미술’일 때 가능하다. 지금이야말로 이를 위해 우리 모두 참회하면서 획기적인 발상의 전환을 꾀해야할 때가 아닌가 한다. 필자는 그동안 불교미술의 진로 문제를 고민하면서 다음과 같은 글을 발표한 바 있다.

  • <한국불교미술의 진로문제>, [어울림과 나눔의 세상], 한국교수불자연합회, 2002.
  • <한국 근현대 미술과 불교 -아름다움과 깨달음 전시의 의의>, [아름다움과 깨달음], 여시아문, 2002.
  • <오늘의 불교미술, 제대로 가고 있는가>, [문화예술], 한국문예진흥원, 2002.
  • <불교미전 유감>, [현대불교신문], 2004, 5

윤범모
동국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뉴욕대 대학원 예술행정학과 수학. 호암갤러리, 예술의 전당 미술관 등 개관 팀장. 한국근대미술사학회 회장, 사우스 플로리다대학교 연구교수. 현재 경원대학교 미술대 교수, 인물미술사학회 회장, (사)불교문화산업기획단 이사. 저서로《미술과 함께, 사회와 함께》《평양미술기행》《한국근대미술-시대정신과 정체성의 탐구》《미술본색》《오대산통신 -아하, 절에 불상이 없네!》등 다수가 있다.

저작권자 © 불교평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