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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 없이 불교 미래 없다
박광서 서강대 교수
[23호] 2005년 06월 10일 (금) 박광서 서강대 교수

흔들리는 한국 불교

“부처님이 오늘 한국에 오신다면 무슨 생각과 말씀을 하실까? 당연히 그 대답은 삼독심(三毒心)에 불타는, 무명의 수렁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한국 승가에 대한 개탄과 꾸중일 것이다.” 최근 어느 스님의 글에서 인용한 것이지만, 대부분의 불자들이 공감하지 않을까 싶다.

지난 몇 달 사이 불교 교단에서 일어난 각종 사건 사고들이 연이어 언론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있어 불자들과 국민들을 당혹스럽게 하고 있다. 모처럼 불교에 대한 사회 인식이 달라지고 교세도 날로 커지고 있는 시점에 일부 승려들의 부정과 비리는 그야말로 날벼락이요, 찬물 끼얹기가 아닐 수 없다. 특히 관련 인사들이 조계종단 내 주요 직책을 맡고 있는 지도급 승려라는 사실은 한국 불교계가 심각한 중병을 앓고 있다는 신호임에 다름 아니다. 무소유 정신의 실천과 중생 교화를 위해 출가를 했다고는 믿어지지 않는 승가 일부의 도덕적 해이와 이에 대한 교단 내 자정 역학의 부재가 안타깝고 실망스럽다.

그동안 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니는 스님들이 꾸준히 늘고 있고 심지어는 일부 요직의 스님들이 해외 원정 골프와 도박까지 즐기며 삼보정재를 빼돌려 사유화한다는 소문이 들리기는 했지만, 설마 그러랴 싶기도 하고, 또 만일 그 정도라면 교단 내에서 문제 삼아 바로잡지 않을까 하고 기대해 왔던 것이 일반 불자들의 소박한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감투 쓰기를 좋아하는 관자병(冠子病), 고급 대형차만 타는 대승병(大乘病), 일 년에 한두 차례는 꼭 외국 구경을 나가는 외유병(外遊病), 자치기 즉 골프를 좋아하는 기궐병(耆厥病), 화투나 카드놀이에 흠뻑 빠지는 월광병(月光病), 카지노 원판 돌리기를 사랑하는 윤반병(輪盤病), 아내와 자식을 숨겨놓고 부양하는 은족병(隱族病), 돈과 관련된 일은 속가의 형제와 일가친척들에게 맡기는 외척병(外戚病)’ 등 항간에 잡다한 얘기들이 나돌아도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지어낸 악성 음해일 것이라고 애써 자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불자들의 순진한 바람과는 달리 여기저기서 낯 들기 부끄러운 부정부패 사건이 계속 터지고 있다. 얼마 전 모 큰스님의 비자금을 관리한다는 소문 때문에 전직 승려와 폭력배들에게 털렸다는 종로구 모 사찰에서는 5천만원 상당의 다이아몬드 시계와 3억 5천만원짜리 골프 회원권, 전국 각지의 땅 문서 등 모두 29억원 상당의 금품이 나와 세인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게다가 전 화엄사 주지스님은 문화재 보수비 용도로 22억 7천여 만원의 각종 국가 보조금을 받아 그 중 14억여 원을 횡령한 혐의를 받고 조계종 총무원에 사표를 제출한 채 검찰의 검거를 피해 잠적한 상태이고, 최근에는 전 관촉사 주지스님(현재는 제적된 상태임)이 16억 공금 횡령에 1억 5천 사기죄로 구속되었다고 하니, 어려운 삶을 살아가는 국민의 의지처가 되고 존경의 대상이 되어야 할 승려와 교단의 위상이 도대체 말이 아니게 되었다.

한 언론사에서는 2001년 부산 범어사 국고 보조금 23억 유용, 1999년 조계사 불사금 200억원대 횡령, 불국사 재무스님의 13억원대 횡령 사건 등 과거 사건들도 다시 소개하면서, “불교 관련 기관들에 얽힌 각종 비리설이 떠돌고 있으며, 이들 내용 중 일부는 상당 부분 사실로 드러나고 있는 상태”라고 보도함으로써 불자들의 가슴에 묻혔던 상처를 건드리기도 했다. 더구나 이런 승가 사회의 비리들이 여기서 그치지 않고 또 무슨 일이 어디서 어떻게 터질까 조마조마하기만 하다.

그런 판에 이번에는 조계종 핵심부에서 ‘불교중앙박물관 시설 관련 의혹’ 및 ‘동국대학교 일부 이사진의 부정 의혹’들이 불거져 검찰에 고발되었다고 한다. 진실은 명명백백하게 밝혀져야 하겠지만, 사실 여부를 떠나 이런 식의 문제 제기들이 불자들을 피곤하게 할 뿐만 아니라 또다시 힘겨루기가 시작되는 건 아닌가 하는 우려마저 감출 수 없다.

우리는 이런 자그마한 이해관계의 노출이 크게 확대되어 소위 조계종 사태라는 큰 홍역을 두 차례나 치른 적이 있기 때문이다. 설상가상으로 최근 불국사가 청정 수행도량이어야 할 사찰 경내에 골프연습장을 불법적으로 설치하여 여론의 뭇매를 맞고, 주지스님은 한 시민단체에 의해 해외원정 도박과 외환관리법 위반 여부로 내사를 받고 있다는 의혹까지 제기 받음으로써 큰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불자들은 아직 확인되지 않은 설왕설래가 근거 없는 소문에 불과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또한 일부 문제의 경우 불교계 내의 계파간 정쟁으로 인해 사실보다 더 크게 부풀려졌을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러 가지 정황상 그간 제기되어 온 의혹들이 사실에 가까울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점 때문에 불자들의 마음은 크게 흔들리고 있다. 무엇이 문제인가? 출가 승단은 과연 국민의 정신적 귀의처로서 역할을 하고 있는가? 왜 두 차례의 조계종 사태를 겪고도 아직 정신을 못 차리는가?

출가 정신 되살려야

우선 승려 개개인의 수행자 또는 지도자로서의 자질 문제를 들지 않을 수 없다. 교단 운영에서 재가자들이 완벽하게 소외되어 있고 모든 권한과 의무가 출가승, 그 중 비구승에 집중되어 있는 점을 고려할 때, 교단 구성원인 사부대중(四部大衆)에서 우리가 논의해야 할 초점이 출가 비구승에 모아지는 것은 불가피하다. 또 20% 남짓한 전문 수행 승려인 이판승의 수행 목적, 방법, 회향 등도 함께 논할 수도 있겠지만, 불자들과 직접 대면하고 행정을 관장하며 사회와 직접 관계를 맺지 않을 수 없는 소위 사판승을 중심으로 생각해 보는 것이 현실적일 것이다.

한마디로 사판승 중의 일부는 출가의 동기도 불확실하며 수행도 하지 않고 전문성도 부족하면서 너무 많은 권한을 독점하고 있다. 자질과 의식이 부족하다 보니 출가 정신은 실종되고 도덕적 해이로 인해 현실과 부딪치는 접점에서 여러 가지 문제들을 일으키게 되는 것은 불문가지(不問可知)이다. 사회 변화를 못 쫓아가면 도태하게 마련이다. 출가승들의 사회의식 수준이 국민을 이끌어가지는 못할망정 적어도 평균수준은 되어야 중생교화를 할 수 있는 기본이 되는 게 아니겠는가.

불국사 불법 골프연습장만 해도 그렇다. 일부 사판승들이 경내에 연습장까지 만들어 놓고 골프를 즐기고 나아가 해외원정까지 다닌다는 사실을 국민들이 어떻게 볼 것으로 생각하는가. 평지가 많은 지형을 가진 외국의 경우와 달리 한국처럼 산지가 많은 지형에서는 산을 깎아 골프장을 건설해야 하기 때문에 생태계 파괴가 심각하고, 골프장에 깔리는 잔디는 수입 잔디로 우리나라 기후와는 맞지 않아 지렁이, 두더지 등을 구제(驅除)하고 잔디를 푸르게 유지하기 위해 엄청난 양의 농약을 뿌려야 하는데 이 농약이 땅 속으로 들어가 주변 농경지에도 피해를 줘 농산물마저 오염시킬 수 있다. 게다가 골프는 비싼 경비와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하기 때문에 일부 계층만이 즐길 수 있어서 아직 대중적인 스포츠라고 할 수 없다.

시설의 규모나 면적에 비해 이용할 수 있는 사람도 적을 뿐만 아니라, 지역에서 열심히 농사짓고 사는 사람들은 주말마다 좋은 차 타고 골프 치러 오는 사람들을 보면 상대적인 박탈감에 힘들어 할 수도 있다. 그렇게 호화스럽고 위화감을 조성할 만한 스포츠를 “승려도 운동이 필요하다. 골프 좀 즐기기로서니 무엇이 문제냐.”고 항변해도 되는 것일까? 더구나 2001년 초 대법원 판결로 가야산국립공원 해인골프장 건설 반대 운동이 10여년 만에 최종 결실을 맺으면서, ‘91년부터 시작해 우리나라 환경운동 사상 최초로 백만인 서명을 달성한 해인골프장 반대운동이 가시적인 성과. 불교계와 환경단체, 지역 주민이 똘똘 뭉쳐 이뤄낸 환경운동의 백미.’라고 자랑하던 불교계에서 골프연습장, 그것도 불법이라니, 왠지 어울리지 않는 엇박자요 국민의 정서와 거리감이 있다. 사회의식이 부족하다는 방증이다.

어떤 경우는 인천(人天)의 스승은커녕 범부만도 못한 일을 저지르고도 양심의 가책이나 상식적 처신조차 하지 않아 승가 대중 사이에 도덕 불감증이 만연해 있지 않나 하는 의구심마저 든다. 최근의 사건들을 생각해 보자. 국민 세금인 국가 보조금과 불자 보시금인 삼보정재를 개인적으로 횡령, 축재, 유용하고도 죄의식 하나 없이 오히려 ‘애시당초 그럴 작정으로 머리를 깎은 것’처럼 당당하게 처신하는 것을 보면 대단한 심장을 가진 사람임에 틀림없다. 또 “나만 그러냐, 음해다.” 등등으로 구차하게 변명하고 물귀신 작전을 펴는 것은 본인은 물론 불교계를 위해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일조차 외면하는 훼불 행위가 될 것이다. 심지어 “위장신도와 위장단체들이 그간 돈을 뜯어 쓰다 아예 승려들로부터 재정권을 빼앗아 가려 한다.”는 어느 스님의 어이없는 성명서를 접하는 심정은 심히 슬프고 참담해 할 말을 잃는다.

불교계 전체를 멍들게 해 놓고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면 출가승이라 할 수 없다. 이미 사법처리 대상인 경우는 말할 것도 없지만, 단지 의혹만 받았다 하더라도 당사자는 신속 정확하게 해명을 하여 교단을 우선적으로 보호해야 한다. 혹 그렇게 할 수 없는 사정이 있다면 불교의 명예를 손상시킨 데 대해 크게 참회하고 즉각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는 것이 승려로서의 최소한의 도리다. 그러나 만일 출가승려로서의 위의를 지키면서 부처님과 동료 승려, 그리고 교단에 누가 되지 않게 살 자신이 없으면 아예 승복을 벗고 일반인들 모습으로 살 용기라도 있어야 한다.

그마저 외면하고 대중을 속이면서 승려 신분으로 계속 물의를 일으켜 교단을 어지럽힐 경우 불자들은 단호하게 승보로서 공경을 거부하게 될지도 모른다. 승려 보호가 교단 외호와 결코 동일할 수 없고, 수행자답게 잘 살고 계시는 많은 스님들과 교단의 권위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거짓 권위의식은 과감히 타파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승가공동체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의 출가정신이 되살려지지 않는 한 한국 불교의 미래는 없다는 점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요즘 같아선 “출가하여 수행자가 되는 것이 어찌 작은 일이랴 / 편하고 한가함을 구해서가 아니며, 따뜻이 입고 배불리 먹으려고 하는 것도 아니며, 명예나 재산을 구해서도 아니다 / 오로지 생사의 괴로움을 벗어나는 것이며, 번뇌의 속박을 끊으려는 것이고, 부처님의 지혜를 이으려는 것이며, 끝없는 중생을 건지려고 해서다.”고 하신 서산(西山)대사의 애절한 서원이 딴 세상 소리인 듯 들리는 것은 필자만의 과민일까.

종단 개혁 지속되어야

교단적 차원의 승풍 진작과 개혁 의지의 상실 또한 중병을 방치하게 된 큰 요인 중의 하나이다. 조계종은 94년 개혁과 98년 사태 이후 승려 교육, 종단 안정, 사회 참여, 신도회 정비 등 여러 측면에서 나아진 점이 분명히 있다. 그러나 오히려 그 조그만 성과에 자족하며 안주해 온 업을 이제 받고 있는 셈이다. 오늘의 일련의 사건들이 ‘우발적’으로 발생했거나 ‘예상치 못했던’ 것들이 결코 아니라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하겠다. 그것은 승려 개인의 자질 문제 못지않게 교단 역학의 구조적인 모순에서 비롯된 결과라는 것이다.

두 번에 걸친 조계종 사태 당시의 화두는 분명 ‘폭력’이었다.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서 쉬 지워지지 않을 것 같은 폭력 장면을 떠올리면서 “그러나 이렇게 그냥 주저앉을 수는 없다. 불교는 이것을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 폐허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불교의 본래 모습이 회복되지 않고서는 불교의 미래는 없다.”고 스스로 추스르지 않았던가. 재가자들도 지켜야 한다는 오계 중 불살생(不殺生-비폭력)조차도 승가는 외면하고 있었으니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한가. 98년 조계종 사태 당시 지식인들의 선언에서도 “폭력은 반불교적 행위이다.

폭력을 묵인, 방조, 비호, 이용하는 그 누구도 불교를 와해시키는 세력으로 규정할 것이며, 따라서 우리 재가불자들은 폭력과 관련된 파계승에 대해 승보로서 공경하기를 단호히 거부한다.”고 함으로써 폭력 문화에 대해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폭력이 대표적인 반불교적 행위라는 데 공감하고 자숙한 결과 지금은 상당 부분 수그러들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지난 반세기 동안의 정화 운동 과정에서 생긴 불교계 내의 ‘폭력문화’가 완전히 근절되었다고 안심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깊이 의식하지 않으면서 관행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크고 작은 폭력이 아직도 교계 내부 곳곳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민들뿐만 아니라 세계인을 놀라게 한 폭력 사태 때문에 그 뒤에 숨겨진 더 근본적인 이유, 즉 재정 투명성 문제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지 않은 것은 더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불투도(不偸盜-재정투명) 역시 오계의 두 번째가 아니던가. 삼륜청정(三輪淸淨), 즉 주는 사람, 받는 사람, 주고받는 물건 모두가 청정해야 하며, 더구나 출가자는 모든 재물을 공동으로 관리, 사용하게 되어 있지 사유화해서는 안 되는 것이 출가 승단의 계율이자 전통이 아닌가. 98년의 지식인 선언도 “재정이 불투명하고 비합리적으로 운영됨으로써 승가 자체의 자정 능력에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다고 판단될 때에는, 우리 재가불자들은 정법을 받들어 불교를 바로세우는 데 구체적인 행동에 나설 것을 천명한다.”고 압박성 주장을 하고 있다.

하지만 불교계 내부 어느 집단도 재정 투명성 문제에 대해 집요하게 천착하지 않았고, 불행하게도 당시 개혁의 중심세력이 권력 조율 및 재정 관리에 관한 제도적 장치를 세밀하게 검토하고 마련함으로써 개혁을 철저하게 마무리하지 않고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고 흩어져 버림으로써 이제 그 후유증을 앓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교단 자정 문제에 앞장서 왔던 재가연대도 98년 조계종 사태 이후 부정부패와 폭력 행위 등이 확인된 인사가 종단 주요 소임을 맡는 경우 강력하게 저항하는 등 일정 부분 역할을 해오기는 했지만, 종단 운영의 국외자로서 정보의 한계 및 역량 부족으로 기대만큼 효과적으로 부정과 부패의 방지 기능을 다하지 못했다. 출가승려들 또한 재가신도들이 요구한 사찰의 재정 투명화와 사부대중 운영체제 확립에 거부감을 갖거나 짐짓 모른 체 넘어가더니 이제 스스로도 어찌할 수 없는 관리 불능 상태에 이르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물론 불교계가 이렇게 힘들어 하는 데는 굴절된 한국 불교의 역사를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한국 불교가 고려 말부터 본래의 모습을 잃어가면서 조선의 억불정책을 자초한 데다, 오백 년이란 긴 세월 동안 사회로부터 격리되어 사회성이 탈각된 채 근세 개화 과정의 혼란기를 거치게 되었기에 필연적으로 안고 갈 수밖에 없는 부담인지도 모른다. 특히 불교가 스스로의 모습을 추스르기도 전에 도도히 몰려온 서구의 물질문명과 종교문화 세력, 그리고 그 진통의 과정에서 무리하게 이루어진 정화불사의 후유증 - 폭력 유입, 교육 부재, 권력화, 부의 축적 등 - 은 또 다른 짐으로 얹혀져 한국 불교의 앞길에 장애가 되고 있는 것 또한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언제까지 서구문명의 세력이나 불교역사의 배경 따위로 변명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이제는 과거는 잊고 미래를 그리면서 현재에 몰두해야 한다.

또 일부 사람들은 말한다. 전체 승려들 중 문제가 있는 승려들의 숫자는 소수에 불과하다고. 그러나 교육계와 종교계에서는 정치권이나 일반 사회에서보다 도덕적 기대치가 훨씬 높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기에 교육계와 종교계에서 의혹 사건 한 건이라도 터지면 국민들이 크게 실망하는 것은 당연하며, 또한 발생했다 해도 다른 분야에서보다 더 신속히 규명하고 철저히 반성하면서 재발 방지를 위해 구체적인 제도 보완을 기대하는 것 아니겠는가. 하물며 몇몇 개인들의 문제가 아니라 조계종 고위 공직 승려들 중 결코 적지 않은 숫자가 이런 저질 문화와 부패의 고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개탄의 소리마저 들리니 과연 일부 소수의 문제로만 돌릴 수 있을지 의문이다. 소수라고 자위하는 것은 자기기만이거나 집단 불감증의 징표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다수의 출가자들은 오히려 “어디서 어떻게 손을 대야 할지 막막하다. 그 몇 사람 처리한다고 나아질까.”라면서 부지불식간에 승가 전체가 스스로 물들어왔다는 자조적인 시각마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고 “언제 불교가 사회적으로 제대로 기를 펴본 적이 있었던가. 도대체 한국 불교가 회생할 수나 있을까?”라는 식의 지나친 자기비하나 자포자기도 바람직하지 않다. 이러한 ‘무기력증’과 ‘패배주의’가 불교계 발전의 암적 존재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실상을 직시하되 피하지 않고 내 문제로 받아들여, 보현행원품에 이르듯이 ‘지치거나 싫증냄 없이’ 꾸준히 바로잡아 가면 되는 것이다.

어느 교수가 “도덕적 해이는 ‘사기(詐欺)’의 다른 표현이다.”라고 말한 것이 기억난다. 그 자리에 있지 말아야 할 사람이 탈을 쓰고 있는 것은 사기라는 것이다. 승가의 도덕적 해이와 일탈에 대해서는 가능하면 단순하고 강력하게 경고하고, 필요한 경우 외부로 불거지기 전에 정확한 자체 조사를 통해 정리하는 것이 최선이다. 그것이 살아있는 조직의 유일한 자구책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자정 기구가 제대로 동작하지 못하고 밖으로 불거져 망신을 당하는가? 그것은 문제의식 또는 책임 의식이 부족하든지, 유사한 정도로 함께 썩어 있든지, 아니면 사형사제(師兄師弟) 등 복잡하게 얽힌 인연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든지 등등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문중(門中) 중심으로 나눠 먹기식 체제가 굳혀져 있는 현 상황에서는 호법부나 호계원에 엄중한 처리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점도 청정승가 구현에 큰 걸림돌이다.

어느 쪽이든 기능하고 있지 못하다면 하루빨리 대안을 찾아야 한다. 어느 누가 와도 기능할 수 있도록 기준과 절차 등 제도적 보완을 서둘러야 한다. 만일 승가의 얽히고설킨 인연들 때문에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처리가 어렵다면 재가신도 대표나 전문가들을 ‘특별위원회’ 등에 포함시키는 사고의 전환도 필요할지 모른다. “출가승려 문제를 재가자들이…?” 하며 손사래를 칠지 모르나 공멸의 위기 앞에 조그만 체면 따위를 차릴 계제가 아니다. 조계종총무원에서 ‘사외감사제’를 실시한다고 하고, 금번 불교중앙박물관 관련 ‘조사대책위원회’에 중앙신도회 등 불교단체에서 추천하는 전문가가 대책위원 자격으로 참여했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조계종 집행부의 고육지책이기도 하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정면 돌파하겠다는 의지로도 해석할 수 있는 전례 없는 긍정적인 변화이기도 하다.

불교계 내부적으로 처리하지 못해 기왕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게 된 사건들에 대해서는 더욱 엄정하게 다루어야 한다. 음해성 소문이라면 근원지를 찾아서 국민들에게 당당히 해명하고 엄중한 책임을 묻는 동시에 불필요한 오해나 음해의 소지를 없애고 재발 방지를 위해 제도를 보완해야 한다. 그러나 만에 하나 사실일 경우 불교의 뿌리가 흔들릴 수 있다는 심각성을 깨달아 신속하게 대처해야 할 것이다. 부정비리로 불교계 재산을 축냈으면 당연히 환수 조치하고, 감추고 거짓말하거나 폭력 등 위압적으로 진실을 덮음으로써 불교계에 더 큰 상처를 준 사람에 대해서는 가중 처벌까지 할 수 있도록 법적 장치가 마련되어야 한다.

혹자는 승단에 일부 비리가 있더라도 재가신도들이 감싸주어야지 사회에 드러내는 것은 누워서 침 뱉기 아니냐고 불쾌해 한다. 원칙적으로는 맞는 얘기다. 재가불자인들 그러고 싶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러나 기다리기도 지친 재가불자들과 국민의 입장을 생각이나 해보고 하는 말인지 의심스럽다. 도대체 언제까지 무조건 감싸기를 원하는가. 기다리기만 하면 과연 나아질 것인가. 아니면 더 썩어 들어가 희망이 없어질 것인가. 지난 수십 년 동안 불거진 문제들은 승단 내에서 서로 싸우다 터져 나온 추문들이었지 언제 신도나 국민이 먼저 나서서 문제를 삼은 적이 있는가. 수치스러운 집안일이라고 덮어두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내부적으로 자정역학이 가동되지 않는 조직에서는 덮고 감싸는 것이 더 크게 썩고 곪아 터지게 만들기 때문에 오히려 더 위험할 수도 있다. 따라서 “밖으로 드러내서 무슨 이득이 있겠는가?”라면서 무조건 감추기로만 일관하는 집단은 발전은커녕 살아남기조차 힘들다. 그나마 재가불자들이 나서는 것은 우리 승가에 대해 아직은 조그마한 희망의 불씨라도 붙잡고 싶은 애종심(愛宗心)의 발로라고 보는 것이 옳다. 타락하고 무능한 승단이기에 아무런 기대가 없다면 일찌감치 포기하고 개인 수행에만 몰두할망정 누가 심적 부담감을 안으면서까지 자청하며 나서겠는가?

불교계를 죽이는 ‘사자충’은 경계하고 도려내지 않으면 모두 함께 죽을 수밖에 없다. 종단 집행부의 미온적 태도와 감추기 관행은 경우에 따라 일을 더 그르칠 수도 있으며 그 여파는 교단의 혼란과 위축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어쩌면 배신감에 실망한 재가불자들이 먼저 일어나 일부 승복 입을 자격이 없는 인사들을 교단에서 정리하라고 요구하는 사태마저 올 수도 있다. 2000년 총선 당시 낙선 낙천 운동이 실정법으로는 불법이었지만 많은 국민들 사이에 유일한 돌파구로 여겨졌던 것처럼, 불교계에서도 교단 스스로 자정 능력이 없다고 판단되는 순간, 불성실하고 부도덕하며 어느 기준 이상의 부정부패에 연루된 승려들에 대해서는 재가불자들이 나서서 ‘공직 부적격자’로 낙인찍거나 ‘예경보시 거부 운동’도 시작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

부패 비리와 관련하여 교단 내 권력의 독과점도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점 중의 하나다. 과거 교단은 94년 종단 개혁을 통해 총무원장 1인 중심의 독재, 독점적 교단 운영을 혁파하고 입법·사법·행정의 민주적인 삼권 분립제도를 확립한 바 있으며, 그 제도 개혁의 핵심에는 선거제도의 도입이 있었다.

그러나 서너 차례의 선거를 치르는 동안 계파별 문중주의와 금권이 횡행하면서 민주적 선거제도 자체가 유명무실화되었고, 삼권을 종횡으로 과점한 소수의 특수계층이 생겨나 견제 기능 자체를 마비시킴으로써 교단 운영의 민주화와 투명화를 심각히 저해하게 되었다. 특히 종회 즉 입법부가 필요 이상의 권한을 독점하면서 정쟁과 집단이기주의의 온상이 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종회의원이 되기 위해 적지 않은 돈까지 쓰게 되는 혼탁한 불교계의 선거 풍토는 깨끗한 선거문화를 만들어가고 있는 사회 변화에 비추어 너무나 부끄러운 모습이 아닐 수 없다.

특권의 예를 들어보자. 종회의원은 재적의원 2/3 이상의 동의를 얻어야 징계가 가능하도록 규정하고 있어 종단 내 여러 문중과 파벌이 갈려 있는 상황에서 현실적으로 종회의원을 징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러한 불징계 특권을 갖고 있는 데다 각종 기구의 위원, 심지어는 사법부에 해당하는 호계원의 구성원까지 뽑을 수 있다니 누가 종회의원을 견제할 수 있겠는가.

가히 무소불위(無所不爲)라고 할 수 있다. 웬만한 사찰의 주지보다 종회의원을 더 선호하는 것은 이를 증명하고 있는 셈이다. 전 관촉사 주지의 경우도 횡령과 사기죄로 사회법에 의해 구속되어 아예 제적시키기 전까지는 그렇게 말이 많았었는데도 종회의원이라는 사실 하나 때문에 종단 내에서 손도 못 대지 않았던가. 권력의 집중과 그에 따른 특권의 향유와 부패로 이어지는 일반적 현상이 종회 내에 벌어지고 있는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현상일지도 모른다.

액튼 경(Lord Acton; 1834~1902)이 설파했듯이 적절하게 통제되지 못하는 ‘절대 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 권력의 부적절한 배분과 잘못된 활용은 부패를 부를 수밖에 없다는 것은 동서고금을 불문하고 일반적인 현상이다. 우리 사회에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또 이것이 제대로 치료되지 못하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원인은, 바로 이러한 권력의 구조가 비정상적으로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종교계에 무슨 권력이 있으며, 선거나 삼권분립이 합당한가?”라는 질문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불교계 내에 엄연히 ‘종권’과 관련한 긴장과 갈등이 존재하고 그에 따른 ‘금권’ 선거 등이 논란이 되고 있는 마당에 애써 순진한 척할 필요가 없다.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권력(그것이 종권이든 금권이든)을 획득하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하여 또 다시 부당한 방법으로 권력을 행사하는 악순환이 반복되면서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부패는 더욱 더 뿌리 깊게 고착되어 필경에는 권력구조 이상으로 강한 ‘부패구조’를 형성하게 된다는 논리는 불교계라고 피해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조계종단 내 일부 세력의 권력 과점과 중앙종회의 권력화는 우려할 만한 문제로서 시급히 시정되지 않으면 안 될 중대 사안이다. 균형 감각을 갖고 권력 기구마다 권한과 책임을 분명히 하여 제도적으로 뿌리내림으로써 대중의 신뢰를 회복해야 할 것이다.

종단의 운영과 관련하여 또 한 가지 늘 논의되는 것 중의 하나가 재가불자 참여 문제이다. 재가불자들의 종단 운영 참여가 과연 가능할 것인가, 만일 가능하다면 그 방법과 한계는 무엇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재가불자들의 종단 운영 참여는 어떤 형태로든 이루어져야 하며 그 논의는 구체적이고 빠를수록 좋다. 출가승려든 재가불자든 불자의 사명은 ‘수행(修行)과 교화(敎化)’라고 할 수 있다. 교단도 크게 보면 이 두 가지 사명을 다하기 위해 만들어진 조직체일 뿐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출가자와 재가자의 삶의 방식이 크게 다르므로 역할도 다를 수밖에 없다. 수행과 교화에 관한 한 출가자가 전문가라면 재가자는 그 보조자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불씨와 땔감, 씨앗과 땅’과 같이 서로 역할은 달라도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혹자는 교단을 출가승려들의 집단으로 좁게 해석하여 재가불자의 교단 운영 참여가 승려들의 문제에 재가신도들이 관여하는 것으로 우려하기도 한다. 그러나 교단은 분명히 사부대중으로 이루어졌고 재가불자들도 종단의 안정과 발전에 공동 책임이 있고 일정 부분 역할을 해야 한다. 조계종 종헌 제 8조에서도 ‘본종은 승려(비구 비구니)와 신도(우바새 우바이)로서 구성한다.’고 명확하게 사부대중으로 이루어진 교단을 규정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모든 권한과 의무가 출가 승단에 집중되어 있다 보니, 과도한 업무와 비전문성에 의한 운영의 부실화와 재물을 다루는 데서 오는 출가승의 세속화와 타락이 필연적으로 따르게 마련이다. 대부분의 승려들이 본업인 ‘수행과 교화’는 휴업 또는 태만인 채 재정·인사·행정·건물·산림·문화재 등의 관리, 그리고 각종 의식 및 재(齋)를 주관하는 일로 많은 출가 인력이 소모되고 있는 상황이다. 한마디로 ‘재산 관리자’ 또는 ‘영혼 관리자’로 전락하지 않았는지 되돌아 볼 일이다. 특히 개발 경제 때 학습된 세속의 속도와 물량 위주의 사고방식에 물들어 정부 예산 타내서 절 크게 짓는 게 주지의 능력으로 간주되는 풍토가 되면서 수행과 포교는 아예 포기한 채 살아가지 않나 걱정스럽다. 결과적으로 작은 것을 챙기고 큰 것을 잃는 우를 범하는 일이 아니겠는가.

출가자의 역할은 당연히 출가승려의 교육, 승가의 조직 및 관리, 기타 수행 및 교화와 직접 관련된 사안들에 국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리고 재정 문제를 포함한 교단의 건강한 유지·관리에 필요한 모든 잡사는 재가 전문가들이 처리해 주는 시스템으로의 전환이 시급하다. 부처님께서도 당신의 사후 처리조차 재가불자들에게 맡기라고 할 정도로 출가 수행자의 본분을 철저히 지킬 것을 당부하지 않았던가. 다시 말하면 출가자는 수행과 전법에 전념하고 전문 재가자가 사찰 운영을 맡되 승려는 감독, 결재만 하는 사부대중 공동체로 종단이 거듭나야 한다.

문제는 승가에서 재가와 어떤 사안을 어떤 정도까지 함께 다룰 수 있겠느냐가 핵심이 될 것이다. 출가승려들이 전통적으로 누려온 독점적 지위가 무너지게 되면 그 뒤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미묘한 긴장감마저 있는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재가불자 대표가 바로 종회의원으로 진출하는 문제에 대해 아직은 승가가 거북스러워하는 게 틀림없고 오히려 불필요한 의심을 살 수도 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재가불자들을 교단의 국외자로 소외시킬 것이 아니라 어떻게 결합할 수 있을 것인가를 깊이 있게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한꺼번에 모든 것을 이루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한 단계 한 단계 풀어가면서 상호신뢰가 쌓이는 만큼 참여의 폭을 조율하면 될 것이다. 예를 들면, 사회적으로 ‘국가인권위원회’, ‘부패방지위원회’ 같은, 총무원장 직속 혹은 독립의 각종 위원회를 설치하여 실질적 권한과 책임을 부여하고 여기에 스님들과 함께 재가불자들을 참여시켜 행정의 객관성과 대표성을 강화함과 동시에, 사회적 시각을 가진 재가불자들이 자연스럽게 종단 운영에 참여하여 변화에 힘을 실어 줄 수 있게 하는 것이 가장 현실적이고 효율적인 대안이 아닐까 싶다.

한편 재가불자의 종단운영 참여문제를 논하면서 한 가지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재가불자, 특히 재가지도자들 스스로의 주인의식과 자질 문제이다. 교단이 어지럽고 흔들려도 전문성을 갖고 올곧은 말을 하며 교단의 일을 자신의 일처럼 책임감을 동시에 느끼는 재가지도자들이 많다면 우리 불교계의 앞날은 희망적일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렇지 못한 것이 불교계의 현실이다. 불교가 새로 태어나야 하는 이 힘겨운 시기에 재가지도자들의 의식 없음이 출가승들에 대한 ‘묻지마’ 신심으로 미화되거나 방관적 태도가 중도적 아량으로 합리화되어서는 결코 안 될 것이다. 출가승려들의 일이니 간여하지 말고 ‘재가자들만 잘하면 된다’면서 회피하거나 ‘누군가 대신 해주겠지’ 하고 뒷짐 지고 있는 재가지도자도 적지 않다.

그러나 한 개인의 행복은 그 사람이 몸담고 있는 그 사회에 구조적 모순과 병폐가 남아 있는 한 지켜지지 않는 법이다. 자기 자신만을 위한 구복(求福) 행위나 수행만으로는 끝까지 그 개인의 행복이나 평안을 보장받을 수 없다는 얘기다. 자기 자신과는 무관할 것 같은 교단 또는 사회의 문제들이 결국 그 개인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쉽게 잊고 산다. 모든 문제들은 근본적으로 같은 시대에 살고 있는 사회구성원 모두의 책임이라는 자각이 바로 불교의 연기세계에의 눈뜸이요 대승보살행의 밑거름 아닌가.

교단 내에 재가불자들에 대한 교육과정이나 참여제도가 미비하여 체계적인 교리공부가 모자라거나 전문적인 훈련경험이 부족하다고 핑계를 댈지도 모른다. 그러나 승려교육제도가 정착된 것이 이제 겨우 10여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고 승려들 사이에도 종단운영에의 참여가 폭넓게 열려 있다고 보기 어려운 현 상황 아래에서 재가불자들을 위한 교육 및 참여 여건 불비(不備)는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재가불자들이 교계의 현실만을 탓하고 있을 만큼 한국불교는 여유가 없다. 어쩌면 ‘이 지구상에 승려나 사찰이 아예 없다면 재가불자들은 과연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을 것인가, 부처님 가르침을 만난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충분한 것 아닌가’ 하는 정도의 결연한 각오로 새로운 신행운동과 불교운동을 일으켜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런 신심과 사명감으로 무장된 불자라야 재가지도자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또한 불교계 문제들을 걱정하면서도 ‘안타깝기는 하지만 어쩌겠는가. 모든 것이 업이 아니겠는가’라며 한숨을 지으면서 구체적 행위는 하지 않는 소극적인 지도급 인사도 있다. 뜻있는 사람은 시대의 대세를 만들어 갈 뿐이다. 때가 오기를 기다리기만 하는 자에게는 결코 그 때가 오지 않는다. 불교의 개혁은 이 시대 이 사회와 함께 호흡하려는 깨어 있는 불자, 흔들림 없는 불자들만이 이루어 내고 누릴 수 있는 열매인 것이다. 마치 국자가 국 맛을 모르고, 살아 있는 혀만이 국 맛을 알 수 있듯이.

한국 불교 이대로는 안 된다.

한국 불교는 현대 사회에서 제 기능을 충분히 하고 있는 것일까. 이 질문에 “그렇다”라고 자신 있게 답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민주화, 투명화 사회로 개혁되어가는 우리 사회의 흐름조차도 못 따라가는 무기력하고 부도덕한 집단으로 비쳐지지나 않을까 걱정해야 할 정도라면 지나칠까.

특히 사자의 몸을 파먹어 들어가는 사자충같이, 또 그 병든 사자를 향해 달려드는 하이에나 같이 우리 불교를 허물어 가는 세력이 다름 아닌 종단의 지도급 승려들이라는 현실을 우리 불자들은 과연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탐진치(貪瞋癡)를 벗어버리라고 가르치던 바로 그 출가승들이 어찌하여 자신들은 권력과 돈을 탐하며 그것이 불자들과 국민들로부터 외면당하는 첫걸음임을 어리석게도 모른단 말인가.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 즉 개인적으로는 ‘무소유’요 사회와 중생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 할 출가 수행자가, 비록 일부라고는 하지만 ‘소유’의 화신이요 ‘무책임’의 대명사로 전락하게 된 현실이 슬프고 가슴 아프다.

한국 불교 이대로는 안 된다. 사회를 앞장서 이끌어가기 전에 불법(不法)을 불법(佛法)으로 바꿈으로써 승가 내부의 정신 개혁과 교단 개혁을 먼저 이루어야 한다. 불교 개혁의 과제와 대안을 다음 다섯 가지로 요약 정리해 보면서 모든 불자들의 지혜와 원력으로 이 난국을 함께 헤쳐 나갈 것을 호소한다.

첫째, 출가승들은 출가 정신을 회복하여 불교의 가치를 실현하는 데 솔선수범해야 한다.

불자들의 원력은 불국토 만들기이며 사명은 수행과 전법이다. 따라서 불교적 가치를 실천하기는커녕 반불교적 언행으로 부처님 교단을 어지럽히는 사람은 이미 불자라고 할 수 없다. 특히 출가승들은 출가 정신을 되살리지 못하면 모두 공멸한다는 각오로 승풍 진작과 청정교단 수호에 앞장서야 한다. 평균적인 상식을 가졌다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들이 승가 일부에서 계속 일어나고 있는 것을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 된다. 의식주, 대인관계, 사회활동, 취미활동, 운동, 재물 소유 및 취급 등의 문제에서 현대 사회의 출가승들이 지켜야 하는 실천 윤리 기준을 구체적으로 마련하여 철저히 교육시켜야 한다. 만일 그에 적응하지 못하고 오히려 모두를 썩게 만드는 자가 있다면 과감하게 정리해야 한다.

야운(野雲)스님도 「自警文」에서 “삼일 마음 닦음은 천년의 보배요(三日修心 千載寶), 백년 탐한 재물은 하루아침의 티끌이라(百年貪物 一朝塵).” 이르셨고, 성철스님도 시주물에 대한 경계심을 강조하고 스스로의 마음을 다지면서 직접 쓰셨다는 발원문에서 “시주물은 화살인 듯 피하고, 부귀와 영화는 원수 보듯 하여서….” 라고 하셨다. 세속의 관습과 가치로부터 자유롭고자 출가하여 무소유의 청정한 계율을 생명처럼 여기며 살고자 하는 것이 바로 승가일진대, 이 말씀들이 가슴에 와 닿지 않는 승려들이 있다면 스스로 속퇴해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둘째, 종단 집행부는 불거진 현안에 대해 신속하고 엄정하게 정면 돌파해야 한다.

온갖 부정과 부도덕, 불법이 묵인되고서는 ‘불교의 밝은 미래‘를 기대할 수 없음은 자명하다. 일부 승려의 일탈 행위로 불교계 전체의 권위가 실추되고 있는 상황에서 총무원, 교구본사 주지회의, 실천불교전국승가회, 전국비구니회 등 종단 기관들과 기타 출재가 단체들이 자성과 분발의 각오가 담긴 성명서를 발표하는 등 재빠르게 움직여 기대를 준 바 있다. 그러나 이런 문제가 단순히 구호나 선언만으로 해결될 일이 아님은 물론이다.

불자대중들은 그동안의 경험으로 미루어 이번에도 실질적 성과는 없이 위기만 모면하려는 선언적 자성이 아닐까 하는 회의적인 시각이 지배적인 것도 사실이다. 국민과 사부대중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종단 고위 소임자들의 엄중한 책임의식과 결연한 의지가 새삼 요구된다. 몰라서 못하면 능력 부족이요, 알아도 못하면 직무 유기가 아닌가. 이미 터진 사건들에 대해 신속하고 정정당당히 대처하는 것만이 유일한 살 길이다. 모든 진상을 명징하게 규명하고 차분하고 여법하게 수습함으로써 추락한 신뢰를 회복하는 데 온 힘을 기울여 전화위복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셋째, 재정투명성을 위한 구체적인 제도 개혁에 종단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

재정 투명화가 확보되지 않는 한 부정부패는 반복될 수밖에 없다. 종단 내적으로 삼보정재가 사유화되는 경향을 경계하는 의식 개혁 운동과 함께 자질이 의심되는 승려에 대한 관리 시스템을 확고히 세워야 한다. 필요하다면 ‘사회감사제’를 도입하여 제삼의 손으로 삼보정재가 개인 재산화 하는 흐름을 차단하고, ‘제도혁신위원회’나 ‘불사심의위원회’ 등을 통해 불투명하고 낭비적인 대형불사 문화에 제동과 감시가 이루어지도록 함으로써 부정 비리의 온상이 될 수 있는 음습한 부분을 원천적으로 제거해야 한다.

특히 국고 보조금을 받아 불사하는 곳은 기획 단계에서부터 마무리 후 평가까지 철저한 관리 감독이 필요하다. 또한 재정 관련 비리의 근원 중 하나가 사부대중 공동체로 운영되어야 할 종단이 일부 승려들이 독점적으로 운영하는 제도 때문이라는 지적에 대해서도 철저한 반성과 진지한 고민이 있어야 한다. 더불어 조계종단은 승려 개인의 ‘노후보장’으로 불안감을 해소해 주는 것이 부정부패의 소지를 줄이는 효과적인 방법임을 인정하고 이를 위한 제도 및 재원 마련에 적극적이고 구체적으로 나서야 한다.

넷째, 권력의 과도한 집중을 없애고 균형 있는 견제 장치가 작동하도록 해야 한다.

권력 구조에 다수가 배제된 채 소수에 의해 종단 운영이 좌지우지되고 있는 점을 시급히 개선해야 한다. 특히 조계종 종회의 권력 과점의 기현상은 불자 대중들에게 더 이상 설득력도 없을뿐더러 부패의 근원지가 되고 있다. 종회의원 선거가 돈 선거로 비난받고 있는 것은 일반 사회의 기준으로 볼 때도 한심한 수준이기 때문이다. 그 역할에서도 종회 내 계파 간 또는 문중 간 이해관계에 따라 힘겨루기는 있을지 몰라도 상호 생산적인 비판과 건강한 견제가 있는지는 의문이다. 서로의 이권만 지키면 되지 불교계 전체의 발전은 알 바 아니기 때문이다. 교단 내의 사유화 경향의 확산도 권력의 과점화 현상으로 인한 공동체 의식 부재와 무관하지 않다는 견해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한편 재가불자의 종단 운영 참여 방안도 출재가가 머리를 맞대고 함께 연구해야 한다.

출가자는 수행과 전법에 전념하고 전문 재가자가 사찰 운영을 맡는 사부대중 공동체가 바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승가 공동체가 아니던가. 일거에 변할 수 없다면 단계적으로 권한과 책임을 조율하더라도 재가불자의 참여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점에 와 있다. 조계종단이 일부 사안에 대해 재가대표를 특별위원회에 참여시킨다는 전례 없는 발상이 변화에 대한 희망을 주고 있는 점은 다행한 일이다. 이를 계기로 우선 각종 위원회를 통하여 폭넓은 분야에서 재가 전문가의 참여와 활용이 제도화 되도록 해야 한다.

다섯째, 재가불자 특히 불교계 재가지도자 및 오피니언 리더들이 변해야 한다.

불교계가 교단 내외적으로 어려운 시기일수록 불자들이 깨어 있어야 하고 함께 힘을 모아야 하며, 특히 재가지도자들은 주인의식을 가지고 교단의 어떤 일도 자신의 일로 알아야 한다. 무관심과 방관은 ‘해이와 부패’라는 도둑을 불러들이는 지름길이니까. 또한 건강한 단체를 만들고 후원하거나 불교 일을 위해 일생을 바칠 출재가 인재들의 양성과 뒷바라지에 희사하는 데는 인색하면서도 복되는 불사(佛事)한다고 하는 데는 몇 억씩 내는 사람이나, 번거롭고, 힘들고, 표시 안 나는 불교 일에는 무관심하면서도 종단의 후광을 업고 이익을 구하거나 사회 감투를 쓰는 데에만 요령껏 머리를 굴리는 사람이라면 불교발전에 깊은 애정이 있는 진정한 재가지도자라 할 수 없다. 우리는 우리가 지은 대로 받게 된다.

이해관계에서 자유로우면서 불교에 대한 확고한 신념, 그리고 그에 따른 책임감 있는 행동을 보여줄 수 있도록 재가불자 지도자들이나 오피니언 리더들이 먼저 달라져야 한다. 개인의 수행은 물론 보시와 봉사가 체질화되고, 새로운 신행운동과 미래지향적 불교운동을 앞장서 이끌어주는 재가지도자가 절실히 요청된다. ‘다 함께 깨달아 불국토를 만들어 보겠다’고 초발심을 가져 본 재가지도자라면 스스로 얼마나 치열하게 노력하고 단결하느냐에 따라 재가불자 자신들은 물론 불교계의 모습과 그 사회적 위상이 달라지게 된다는 것을 가슴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박광서
서울대 물리학과 졸업. 미국 브라운대학 이학박사. 현재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 88년 교수불자회 창립주도, 91~03년 (사)우리는 선우 이사장, 94년 생명나눔실천본부 창립 주도, 95~96년 고속철도 경주도심통과 백지화 운동 주도, 99~현재 참여불교재가연대 상임대표, 달라이라마 방한추진위 상임집행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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