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랭크 테데스코 University Maryland 강사

1. 글을 시작하면서

나는 지난 20여 년 간 한국과 한국의 불자들과 인연을 맺어왔으며 1998년에는 52살의 나이에 동국대학교에서 불교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 외에도 수년간 영국과 미국대학의 대학원에서 아시아 종교, 인류학, 정신건강 등에 대해 연구하고 공부했다. 한국의 다양한 신앙과 신행은 물론, 상충되는 압력과 강요의 한반도 근세사에 적응하며 생존해온 한국불교의 독특한 방식에 대해서는 아직도 끊임없이 배우고 있다.

유네스코 한국위원회에서 발행되는 전문 학술지의 편집에 수년간 관여하면서 전반적인 한국문화와 한국학에 대한 폭넓은 지식을 일구어왔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이제 전례가 없는 안락한 삶을 누리고 있다. 한국은 이제 선진부국의 대열에 들어섰다.

북한으로 인한 전쟁의 위협이 늘 도사리고는 있지만 한국은 지난 수십년간 상대적으로 평화로이 살아왔다. 그러나 이제 많은 한국 불자들, 승가와 재가를 포함한 사부대중들이 과거 어느 때보다도 더 교활하고 파괴적인 적과 대면하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 적이란 다름 아닌 자신의 내부에 존재하고 있는, 세상으로부터 끊임없이 ‘취(取)하기’만 할 뿐 중생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베풀 줄은 모르는 아귀가 바로 그것이다. 스스로를 되돌아보고 자신이 쌓아온 바를 살펴보아야 한다. 악의든 선의든 행위 또는 행위하지 않음으로 인한 결과는 아무도 피할 수 없다.

지금이야말로 베풀고 또 아낌없이 베풀어야 할 때이다. 그렇지 않고는 이 지구상에서 계속 지옥중생처럼 살게 될 것이다.

2. 새 천년 그리고 한국불교

‘새 천년’은 무엇이고 누구를 위한 것인가? ‘새 천년’이란 단어가 진실로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나는 다만 내가 현재 경험하고 있는 것들과, 나의 의식 속에 생각이라는 영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일시적인 과거 경험의 편린들을 다룰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의 생각과 행동이 미래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겠으나 미래는 항상 현재로서 나타날 뿐이다.

하지만 이 임의적인 ‘천년’이란 명칭은 성찰과 자기 평가에는 도움이 될 것이다. 새 천년이든 아니든 습관적인 경솔하고 탐욕스러운 행위는 언젠가 불행한 결과를 낳는다. 망상과 집착에 사로잡힌 이들이 결국 필사적으로 간직하고자 했던 것을 잃게 된다는 사실은 아주 보편적인 진리이다.

미혹에 빠진 종교 지도자들은 주변의 사람들에게 더 큰 혼돈과 실망을 심어주기도 하는데 이는 많은 무구한 사람들이 정서적 안정을 위해 이들에게 의존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불자들이 당면하고 있는 가장 큰 도전 중의 하나는 조계종 사태로 잃어버린 도덕적 위상을 회복하고 새 세기의 지도자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이다. 외국에서 인정하는 한국불교계의 도덕적 표본은 없다고 할 수 있다.

이런 표본은 국내에서 확립된 체제를 갖춘 승단이나 재가, 또는 아직은 잘 알려지지 않은 운동 등 어디서나 나올 수 있다. 나는 ‘한국의 불자’라거나 ‘불자인 한국인’이라는 말을 쓸 때, 단순히 출생하면서 또는 습관적으로만 불자임을 주장하는 한국인들이 아니라, ‘불자’라는 말에 무게를 두고, 한국이라는 나라에 태어나 살게 된 사려깊은 불자들을 뜻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또한 불교사상과 수행이 한국에 끼친 영향은 스스로 불자임을 자칭하는 소수 한국인들의 영향보다 훨씬 더 크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유학자, 재래종교 신봉자 그리고 무신론자들은 물론 적지 않은 수의 헌신적인 개신교도와 가톨릭교도들이 불교학을 진지하게 공부하였으며, 이들은 합리적이고 보편 타당한 것이라 간주되는 많은 불교사상을 수용해왔다.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한국불교’라는 말의 사용에 신중을 기하고자 한다. 이 말은, 마치 불교가 한국인들이 지배하게 된 어떤 물건이나 소유물이라도 되듯이 사람들의 입에서 쉽게 흘러나오는 말이다. 여러 불교전통과 비교하여 한국불교를 진지하게 살펴본 이는 많지 않다.

한국불교의 역사와 사회조직의 발전 그리고 불교가 한국사회에 끼친 영향에 대한 비판적인 분석 등의 연구는 아직도 미미하다. ‘한국불교’라는 말은 21세기에 불교의 가르침이 지니는 세계적 의미와 거리가 멀 뿐 아니라 불교의 지혜와도 상반되는 문화적 민족주의의 어감을 띠고 있다.

지금 한국의 불자들은 세상에 긍정적인 인상을 심어줄 수 있는 특별한 기회를 눈앞에 두고 있다. 달라이 라마를 제외하고는 세계의 아주 극소수 불자들에게만 주어졌던 관심이――부정적인 것이기는 하나――한국불교를 향하고있다.

특히 미디어는 이상하게 생긴 종교인 무리들이 벌이는 자극적인 볼거리를 좋아한다. 부처님 오신 날 행사도 이처럼 광범위한 세계적 취재거리가 된 적이 없었다. 이 뉴스가 리히터 영적 부패 측정기에 높은 강도를 나타내었음은 실로 유감스럽다!

3. 불행을 새로운 기회로

한국의 불자들은 조계종 폭력사태라는 불명예를 수용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 생에 피할 수 없는 유산의 하나로 쉽게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세계무대에서 일하고 있는 한국불자들에게는 수치가 아닐 수 없다. 나의 생활과 일의 상당부분이 한국 불자들의 생활에 깊이 관여되어 있는 관계로 국제회의 등에서 나 자신도 한국불교를 변호하게 된다.

승려들이 배고픈 돼지들처럼 먹이통을 두고 싸우고 밀치는 더 이상의 갈등은 한국 승려들은 물론 한국의 모든 불자들에 대한 일반 국민과 세계의 아주 냉소적인 견해를 더욱 강화하게 될 것이다. 소수의 조계종 승려들과 이들이 고용한 무리들이 제어하지 못하고 선을 넘는 행동을 함으로써 모든 불자들이 더불어 고충을 겪게 된 것은 정말 불행한 일이다.

이런 이미지들이 국내는 물론 국외에서 부처님 가르침을 홍포하려는 노력을 어렵게 하고 있다. 도덕적 패배를 지혜의 승리로 변환하는 데 필요한 것은 조계종과 기타 한국 불교단체들에 의한 직접적이고도 확고한 자비행 프로그램이다. 불교계 지도자들이 이 도전을 받아들일 것인가?

나는 그러기를 바라고 희망한다. 한국이 불교 사회진보주의의 귀감이 되어 주기를 바란다. 한국의 불자들은 놀라운 힘과 의지와 재원을 투자하여 다가오는 미래에 세계 불교계를 이끌어갈 수 있는 영속적인 조직을 세움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불교자원봉사연합회, 불교환경교육원, 정토회 그리고 다양한 사회복지시설 등은 교계 전반에 걸쳐 폭넓은 격려와 재정적 후원을 필요로 한다. 이들 단체들은 나름대로의 활동정보를 널리 공유하고 동서양 여러 나라의 유사한 불교단체들과의 교환 프로그램에 참여해야 한다.

이들 단체의 지도자들에게는 한국의 불자들과 함께 생활하며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적극 환영할 외국 불자들의 에너지는 물론 새로운 구상과 다양한 방식의 사업추진 경험이 필요하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잘 대변해주는 어린 시절에 배운 간단한 미국의 격언이 있다:“삶이 너에게 레몬을 주거든 레모네이드를 만들라!” 쓴 경험도 노력 여하에 따라 감미롭고 향기로운 것으로 변환할 수 있다! 고통과 자기 연민에 빠져 뒹굴지 말고 불행을 좋은 기회로 활용하라.

종단의 내분과 승려들의 도박, 절도, 사생활 문란 등과 같은 수치스러운 사건들이 한국 사람들에게는 처음 듣는 뉴스가 아니다. 한국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불교종단이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은 누구나 주지하고 있는 바다. 조계종의 내분은 일반 대중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다. 이런 대중적 이미지는 조계사 밖 거리에서 벌어진 장기적 내분을 전세계로 방영한 국내외 미디어에 의해 더욱 악화되었다.

내분이 권력과 돈에 관련된 것이었으며 승려들이 평화로운 협상을 통해 화해를 도출해내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했음은 명백한 사실이다. 폭력사태는 회의주의자들의 냉소에 기름을 부은 셈이 되었고 타종교 신도들의 대중 전도에 도움을 준 꼴이 되었다. 승단의 내분과 이를 지속시키는 탐·진·치의 삼독심은 부정하거나 변명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살펴서 대처해야 할 도전이다.

한 유명한 불교우화에서처럼 활을 쏜 이가 어떤 화살을 썼는지 화살대가 어떤 나무로 만들어졌는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일본, 대처승, 이승만, 또는 한국전쟁 이후 출가한 떠돌이 불량배들을 탓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들 중 일부는 이제 큰스님이 되었는데 이들을 이런 자리에 앉혀 자리를 지키게 한 것은 과연 누구인가? 우리는 사회적 상호의존적 망 속에서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다.

썩은 사과 하나가 모든 사과를 망치게 한다. 일부 재가신도들이 개혁의 실현과 ‘청정교단’ 만들기에 힘을 모으고 있다. 이들은 투명한 사찰재정의 운용과 사부대중이 참여하는 의사결정 체제로 건강한 사회를 만들고자 한다. 이들은 또한 불명예스런 사태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 조계종 교구본사와 지역 사찰들에 대한 모니터 활동을 제도화하려고 한다.

이 운동의 주된 특색은 전통적인 승가의 청정 수행법을 생활문화화 하는 것이다. 이는 좋은 생각이긴 하지만 현실적으로 실현되어 널리 행해지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왠고하니 승가의 뿌리깊은 이권과 저항에 대항해 운동을 지속해 나갈 시간과 재원을 갖춘 재가자들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눈앞의 부패를 척결하는 단기적 계획은 뜻있는 첫걸음은 될 수 있겠으나 사찰 운영, 교육, 승가의 지도력 등과 같은 기본 문제는 해결되지 않을 수도 있다.

보수적인 강원교육이 재가자들의 일상과 유리된 폐쇄된 사회의 기준으로 남아 있다면 어떻게 의미있는 사회개혁이 이루어지겠는가? 사찰은 영적 재충전을 위한 안거(安居)나 종교적 수행의 장소이어야지 승려나 재가의 고액 기부자들의 값비싼 개인 투자자산이 되어서는 안 된다. 몇 년에 걸친 한문경전 공부나 알아듣는 사람도 별반 없는 독경의 일상적인 반복이 부처님의 경지에 들게 해주지는 않는다.

또한 오랫동안의 가부장주의적 신화나 화두 참선 수행의 무조건적인 몰입도 사회에 영향을 끼치지는 못하는 것 같다. 전통적인 선사와 그 제자들이 자화자찬하는 단체는, 이들과 자칭 깨달음을 선망하는 소수의 사람들을 위한 것일 뿐이다. 부처님은 제자들과 함께 45년 간 인도 북부를 걸어다니며 모든 계층의 사람들과 다양한 언어를 사용하는 소수민족들에게 가르침을 폈다.

마을 사람들은 이들과 쉽게 접촉할 수 있었고, 제자들은 마을 사람들보다 더 소박한 생활을 영위했으며, 생계를 전적으로 마을 사람들에게 의존했었다. 경전 공부와 지혜의 탁마는 직접적이고도 개인적인 과정으로 주변의 사람들과 함께 하였다. 이들의 행동과 생활양식은 투명했으며 누구든 이들을 보고 판단할 수 있었다. 승려들은 보름마다 정기적으로 포살의식를 열어 계경을 설하여 듣고 스스로 잘못한 바를 밝히고 참회하였다. 이렇게 하여 승가는 잘못된 행동을 찾아 고치고 선을 함양하였다.

이 전통은 대승불교에서는 사라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본인의 행동에 대한 진지한 숙고와 반성이 지금의 불자들에게 필요하다. 가톨릭의 큰 강점의 하나는 바로 성직자와 신자들을 위한 조직적인 고해성사를 통한 자기정화와 양심의 계발이다. 불자들도 사부대중의 영적 수행을 위한 청정심을 키우는 실질적이고 효율적인 방법을 개발해야 한다.

본인이 사찰에서 보아온 참회의식의 대부분은 지나치게 관례적이고 형식적으로 보였다. 한국불교가 위축되고 있는 것은 많은 교계 지도자들의 마음이 왜소해지고 냉정해졌기 때문이다. 가난하고 병들고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헌신하고 있는 많은 가톨릭 신부와 수녀들의 사랑과는 비교할 수 없다. 한국불교의 수많은 비구와 비구니들의 생활 속 어디에서 부처님의 자비를 찾을 수 있는가?

물론 이중에는 선한 의도를 가진 선량한 이들이 적지 않지만 이들은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젊고 재능있는 이들은 사찰이나 불교단체들로부터 필요한 지속적인 후원을 받지 못하고 있다. 복지기관에서 인력을 제대로 훈련시켜 이들이 능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곳에 효과적으로 배치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후원과 장기적인 계획이 필요하다. 중앙에서 충분한 지원을 해주지 않기 때문에 이들은 늘 재가로부터의 기금 모금에 어려움을 겪는다.

조계종 주요 사찰의 엄청난 부가 한국민의 복지를 위해, 현명한 복지행을 위해 쓰이지 않고 있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 서울역에는 노숙하는 이들이 있고 고통받는 젊은이들이 불법을 등지고 있는데 호화로운 사찰 운영과 박물관 같은 법당, 황금불상과 안락한 생활을 교계 지도자들을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겠는가? 일상에서의 자비행은 남들이 원하는 바를 잘 감지하는 능력을 키우고 이를 행동으로 옮김으로써 그 효과가 증진된다.

중생들의 일상 속에서의 수행을 통하지 않고는 효율적인 지식과 보살핌의 기술을 습득할 수 없다. 오랫동안 경을 읽고 절을 하고 참선을 하면 모든 것을 잊고 몰입할 수 있게 된다. 이런 감미로운 망각은 지금 대다수의 사람들이 경험하지 못한 정서적인 평정과 안락함을 가져다 준다. 그러나 이런 기분좋은 몰입은 아무리 귀하게 여겨지더라도 깨달음은 아니다.

이는 사람들의 고통으로부터 격리되어야만 유지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불교 지도자들은 이 실패를, 히틀러와 게슈타포와 잔혹한 수용소라는 악을 전적으로 인정하고 나찌주의로 인한 비극의 책임을 완전히 짐으로써 2차 세계대전 이후 명예를 회복한 독일을 연상케 하는, 인간 의지와 초월의 승리로 변화시킬 책임이 있다.

한국의 불자들은 오랫동안 사찰의 합리적이고 공정한 운영과 교단의 향방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음으로써 저지르거나 저지르게끔 묵인해 왔던 것들을 시정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 오래 전에 나의 최초의 스승인 티베트 닝마(Nyingma)파 스님에게서 재미있는 일화를 들었다. 이 일화는 티베트의 탄트라 스승들이 삼승의 특징을 어떻게 보느냐에 관한 것이었다

    :전형적인 소승불교의 보수적인 수행자가 길을 가다가 독풀을 발견하였다. 수행자는 손도 대지 않고 멀찌감치 조심스레 돌아가서는 끔찍한 일이라도 생길까 두려워 모든 이들에게 독풀을 피하라 경고한다. 이 수행자는 독풀 주위에 울타리를 치고는 식물학자처럼 호기심으로 이 식물에 대해 알려고 할 것이다. 한편 대승불교의 수행자는 소승불교 수행자의 경고를 고려는 하겠지만 독풀을 피해 가지 않고 뿌리는 그대로 둔 채 줄기를 조심스레 잘라 잎이 시들어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고는 같은 길을 가는 모든 이들을 위해 이를 가르침의 방편으로 활용한다. 독풀은 여전히 ‘바깥’ 세상에 존재하는 물체이며 피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금강승 수행자는 전혀 다른 방식을 취한다.독풀을 발견하면 줄기 아래를 잡고 뿌리째 뽑아서 곧바로 뿌리, 가지, 잎, 잔가지까지 전부 씹는다. 완전히 씹어 전체를 음식으로 취하여 몸과 하나로 만든 뒤 풀의 독기를 자신의 지혜로 변화시켜 두려움과 증오의 대상이 아닌 모든 중생을 이롭게 하는 데 쓴다. 이 수행자야말로 쓸모 없는 금속을 황금으로 변화시키는 영적 연금술사다.

4. 한국의 문제들과 불교

대체로 한국인들은 경쟁하기를 좋아하고 승리를 즐긴다. 모두 최고가 되고 싶어한다.

이런 성향은 어린 시절부터 치열한 대학입학시험을 거쳐 졸업 후 직장을 갖기까지 지속적으로 나타난다. ‘승자가 모든 것을 취한다’는 정서는 당사자의 가족이 아닌 모든 사람을 경쟁자로 취급한다. 국제시장에서 경쟁상대를 이기는 것에서부터 지하철에서 남보다 먼저 자리 차지하기까지 이기기만 하면 된다.

또한 모든 운전자가 제 마음대로 교통규칙을 변용하기 때문에 한국의 도로는 위험하기 짝이 없다. 상대방은 고려하지 않고 목적지에 최대한 빨리 가기, 내 편의대로 주차·정차하기는 기본이다. 교통사고와 사망률 통계가 이를 잘 보여준다. 비합리적이고 위험한 도로 표지판이나 교통 신호에 대해 항의하는 이가 별로 없는 까닭은 이런 것들이 결국은 무시될 터이고 지키지 않아도 되기 때문일 것이다.

수많은 인명을 잃기 전에는 법을 개선하고 사고를 예방하는 시민 활동에 참여하고자 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 운전질서 계도 게시판이나 지하철 에스컬레이터 탑승법을 안내하는 플래카드들은 이른바 유교적 가치관이 얼마나 피상적이 되었나를 잘 보여주고 있다. 유교적 가치관은 권위주의와 철저한 이기주의를 가리는 커버 스토리나 동경의 대상 정도일 뿐이다. 한국인의 기억은 오래가지 않는다.

삼풍 백화점 붕괴사건, 성수대교 붕괴사건, 대구 지하철 폭파사건 등의 인재를 통해 얼마나 많은 인명을 잃었는지 국민은 기억하고 있는가? 그 외에도 잊혀진 비극들이 얼마나 더 있을까? 최근 잦은 대한항공 사고들도 이런 예들 중의 하나이다. 사회비평가들은 현 한국사회 전반에 만연해 있는 ‘배금주의’를 비판해왔다.

이들은 한국의 병폐를, 마치 과거 한국에는 탐욕과 이기주의가 존재하지 않기라고 했던 것처럼, 서구 물질주의와 이른바 개인주의의 도입 탓으로 돌리는 경우가 많다. 자본주의와 소비주의는 탐욕과 갈망의 현대적인 산물일 뿐이다. 한국은 일본과 서구를 따라잡기 위한 급속한 물질 개발에 초점을 두고 있어 과거 소규모 농촌의 인간적이었던 템포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사회가치와 소외현상을 낳았다.

마을은 사라졌고 대가족은 복잡한 도시의 핵가족으로 분산되었다. 이런 급격한 변화는 많은 사람들에게 혼돈을 가져다 주었다. 사회 속에서의 정체성이 거주지와 직장의 이동에 따라 변화하기 때문에 현대 한국인들은 자신의 정체에 대해서는 확신을 갖고 있지 못한 반면 소유물에 대한 확신만큼은 뚜렷하다. 물질을 더 많이 소유하게 될수록 더 안전하고 ‘더 현실적’이라는 환상에 빠진다.

조계종 사태도 이런 무분별한 탐욕의 증상이 아니었던가? 태국의 불교 사회비평가인 술락 시바락샤(Sulak Sivaraksa)에 따르면 “나는 소비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구절이 세계의 소비주의심리를 잘 나타낸다. 결과적으로, 한국인은 정체성을 잃게 되고 이웃과 친구들과 비교하여 열등감에 시달리게 된다. 한국인들은 지나치게 일을 많이 하고, 위험을 감수하며 자신은 물론 자식들에게까지 물질적 획득, 시험지옥, 사회적 지위 획득 등에서 더 큰 업적을 세우도록 몰아부침으로써 이런 상대적 열등감을 과대 보상하려고 한다.

돈을 벌고, 승진하고, 부모와 가족을 만족시키기 위한 이런 끝없는 압력은 보이지 않는 감옥을 만든다. 이런 심리적 속박은 현대 한국인의 고(苦, dukkha)이자 유애(有愛, bhava-tanha)이다. 그러나 정신적인 성공은 물질적이거나 정치적인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이는 보상이나 결과로 사회적 명성이나 이득을 바라지 아니하고 더 많은 것을 베풀 수 있는 능력이다.

타인의 어려움을 관대히 고려할 줄 아는 미덕은 천연자원을 마구 사용하고 더 많은 소비를 조장하는 다국적 한국재벌이나 일본 또는 서구의 대기업들의 정신과는 정반대의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한국의 불자들이 무조건적인 물질 위주의 과도한 흐름에 대해 공개적으로 문제제기를 해야 할 때이다.

부처님은 2600여 년 전에 고(dukkha)에 대한 처방법을 가르쳤다. 그러나 이 처방은 오늘날 회의적인 소비자들의 관심을 끌 수 있도록 포장이 되어야 한다. 불교는 폭력과 난해하고 고루한 언어, 복잡한 의식 그리고 전통이라는 이유만으로 수용해야 하는 불합리한 생각 등을 추가할 것이 아니라 삶의 불확실성과 긴장을 완화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야 한다.

그것은 문제해결을 위해 개인적, 사회적 변화를 가져오고 실질적으로 적용이 가능한 것이어야 한다. 새로운 불자들에게 해결하지 못한 조직의 위기를 짊어지게 해서는 안 된다. 어떻게 이들더러 부처님과 법에 귀의하면서 승가에 대해서는 눈감으라고 할 수 있겠는가? 서구의 불자들은 비록 오랜 전통은 없으나 종교의 껍데기에 연연하는 지혜롭지도 못하고 융통성도 없는 승가에 대한 강요도 없다.

5. 새 천년 한국불교의 과제

1) 열린 불교 교육

내가 보는 한국불교의 비전은 다름 아닌 교육이다. 어느 것도 중요도에 있어서는 교육을 능가하지는 못한다.

대부분의 불자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한다. 이들에게 불교는 단순한 믿음을 통해 복을 구하는 민간 신앙의 일종일 뿐이다. 교리나 수행의 목적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거의 없다. 이는 반드시 변해야 한다. 조계종과 기타 종단은 수입의 상당 부분을 기본 불교의 가르침에 대한 교육과 사회전반에 걸친 적용에 배분하여야 한다.

불교는 보편적 신앙이지 어느 특정 지역이나 나라 또는 부족의 문화유물은 아니다. 불도는 집착에 뿌리를 두고 있는 고통의 원인에 대한 지혜를 닦아 스스로를 깨치는 평생교육의 길이다. 타문화의 장점을 받아들여 적용하는 능력은 문화적 에너지이다.

한국의 불교는 조선시대에 타불교사회와 문화적으로 고립되었던 관계로 고래의 특징을 보존해왔다. 지금은 상대적인 부와 안정을 구가하고 있는 시대로 불교는 외부의 세력에 정체성을 잃지 아니하고도 새로운 사상이나 방법 등에 문호를 개방할 수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한국의 불교계 스승들은 지나칠 정도로 보수적이다. 보수주의는 탄압기에는 미덕이었을 수도 있으나 이제는 결점일 뿐이다.

지혜와 내적 능력은 사회적 책임의 정도에 비례한다. 제자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충실한 신도들로부터 불신이나 문제제기 등의 도전을 받지 않는다면 산 속이나 대학에서 평온하지 않을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미국과 유럽에서 불교의 급격한 성장은 불교의 미래가 서구에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불교에 있어서는 아주 흥미로운 시기이다. 티베트, 중국, 일본의 불경과 주석서들의 영역화 붐이 일고 있다. 이는 문학비평, 심리학, 언어학, 역사 및 사회과학에 이르는 다양한 분야에서 정통한 학자들로부터 광범위한 비평을 받고 있다. 한국의 경전들도 제대로 번역되어야 한다. 불행하게도 한국에서 발간되는 영역된 불교학술서는 적을 뿐만 아니라 대개 질적인 면에서도 떨어진다.

이들은 비판적인 사고와 서구의 현대 불교학, 비교종교학 및 관련 분야에 대한 정통성의 부재를 보여준다. 작업을 대학원생들에게 나눠서 하게 한 뒤 이를 짜 맞추거나 후에 약간의 편집을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인상을 주는 것도 많다. 서구의 도서관에서 이런 한국 자료들을 구입하는 것은 워낙 구할 수 있는 자료가 흔치 않기 때문이다. 장기적인 불교교육 정책의 부재는 선견지명의 부재를 뜻한다.

이런 약점은 한국사회 전반을 특징짓는 즉각적인 만족과 새로운 부의 향유라는 두드러진 사회적 사조로 나타난다. 소박한 인간애, 시민의 책임의식, 민감한 민주정부, 지속적인 사회개혁과 종교간 화합 등의 가치관을 수립하기 위하여 불교적 사고가 한국사회를 이끌어가야 한다.

이런 관심사들은 소수의 한국시민들이 이끌어가고 있으나 불자들의 참여는 아주 미미하다. 한국의 불자들은 세계적 불교활동에 깊이 관여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으나 지금까지 이 일에 헌신하고 투자한 이들은 많지 않다. 한국의 불교단체들은 지도자의 자질을 갖춘 인력을 선발하여 이들이 외국의 진보적인 불교활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후원해주는 장기적 프로그램의 개발을고려해야 한다.

미국 콜로라도 주에 소재한 나이로파 대학(Niropa Institute)의 사회참여불교(Socially Engaged Buddhism) 석사학위, 미국 캘리포니아주 버클리에 본부를 두고 있는 세계 각지 불교평화협회(Buddhist Peace Fellowship)의 각종 프로그램, 태국의 술락 시바락샤의 여러 가지 NGO 활동들, 널리 알려진 스리랑카의 아리야라트네(A. T. Ariyaratne)와 의사인 아들 빈야(Vinya)의 사보다야 슈라마다나 운동 등이 이런 프로그램들이다.

2) 가정에서의 교육과 수행

한국 불교문화의 취약점은 가정에서의 불교교육과 신행생활이 없다는 것이다. 절과 기도와 참선을 중심으로 집안에서 봉행하는 가족 중심의 신행활동은 한국불자의 가정에서는 찾아보기가 어렵다. 불교의 종교활동은 거의가 사찰이나 성지에서만 이루어진다.

개신교나 가톨릭 신도들은 십자가나 기독교의 성상을 집안에 두는 것을 특별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나 불자의 가정에서는 간혹 서예나 달마대사 그림을 제외하고는 불상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그나마 이들은 주로 장식용이지 신앙생활의 중심은 아니다. 한국에서의 불교행사는 언제나 사찰에서만 봉행되지 않는가?

결국 이것이 불교의 지식과 의식의 집전에 대한 전적인 통제를 승가의 손에 쥐어주고 재가불자들의 신행생활의 힘을 약화시키고 있지는 않은가? 다른 불교국의 경우에는 가정과 사무실과 가게 안에 불단이 설치되어 있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달라이 라마가 유대교가 긴 세월 동안의 압제를 딛고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를 배우기 위해 유대교의 랍비와 학자들과 함께 망명 티베트인들의 생존이란 주제하에 장시간 모임을 가진 적이 있었음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모임의 중요한 결론은 유대교 가정에서의 경전공부와 의식의 중요성을 다시 확인해주고 있다. 유대교는 예배를 드릴 성전이나 성직자가 없었을 때에도 교리공부와 의식은 집안에서의 수행을 통해 보존되었다. 이 수행이 탄압의 고난을 겪는 동안 유대인들에게 힘과 결속력을 주었다. 한국의 불자들은 이 점을 유념해야 한다.

3) 세계의 정신을 이끌 불교 연구소

한국불교계는 신선한 아이디어와 새로운 상호작용 방법을 필요로 한다. 프린스턴 고등연구소(Princeton Institute of Advanced Studies)와 같이 각 분야에서 앞서가고 있는 세계적 학자와 수행자들을 끌어들여 지속시킬 수 있는 국제적인 ‘싱크 탱크’나 ‘연구소’를 생각해 본다.

이 연구소의 목적은 자성과 연기의 본질에 관한 부처님의 가르침이란 견지에서 인간성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를 통해 인류의 상호이해와 평화의 진작을 도모하는 데 두어야 할 것이다. 이 두뇌집단은 현대의 제문제에 대한 불교의 상관성을 살피는 데 철학자, 사회학자, 미래학자, 물리학자, 생물학자, 공중보건 전문가, 정보 과학자 그리고 기타 학제간 연구원들을 포함시켜야 할 것이다.

이들은 복잡한 문제들에 대한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해법으로 국제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미래에 대한 비전을 갖춘 이들이어야 한다. 이들은 여러 학문간을 자유로이 자신을 가지고 넘나들 수 있어야 한다. 이들의 성별간 균형도 고려되어야 하며, 다양한 국가와 기관으로부터 선발되어야 하고, 박사학위나 박사학위 후 연구과정을 마친 한국인은 정원의 3/1을 넘어서는 안 된다.

이들의 실질적 언어는 영어가 될 것이며 모든 출판물은 영어와 한국어 또는 영어와 한국어 요약으로 이루어지며 인터넷으로 언제나 접속사용이 가능해야 한다. 보고서들은 국내 언론계에 발표하여 일반 국민이 접할 수 있게 한다. 연구원들은 주어진 연구과제에 따라 3개월에서 3년 동안 연구소에 주재한다. 이런 지침들이 신선한 아이디어와 안목을 한국에 주입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대학원과 박사학위 후 연구과정에 투자하여 미래의 지도자들이 한국불교의 발전을 위해 세계 어디서든 연구에 몰두할 수 있도록 한다. 이 불교 연구소는 연구와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독자적인 자산을 가진 법적으로 독립된 기구여야 한다. 개방된 연구 세미나와 발표회 외에도 연구소는 연구소나 법당, 강당 등에서 중요 문제나 논쟁이 되고 있는 문제들을 다루는 대중 강의, 수업,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 등을 제공하도록 해야 한다.

이들은 불교로부터 영감을 얻은 과학적, 윤리적인 면에 초점을 두되 틀에 박힌 불교의 종교적인 성향은 가능한 최소화한다. 참가자들의 종교적 배경이야 어떠하든 이런 의례들로 인해 이들이 소원함을 느끼거나 불편하게 해서는 안 된다. 자유토론과 참선은 장식, 상징물 등의 종교적 색채를 띠는 장비가 없는 편안한 환경에서 이루어지도록 한다. 전통적인 선수행을 선호하는 이들은 사찰에서 수행할 수 있을 것이고, 이외에 비파사나와 같은 여러 가지 참선법과 참선지도 등은 지정된 장소에서 하면 될 것이다.

목적은 세계가 직면하고 있는 구체적인 문제들에 대한 인도적이고도 실행가능한 해결책을 찾아내기 위해 내적 평화와 열린 마음과 상호 의사소통을 창출해내는 것이다. 위에서 본인이 그려 본 성공적인 세계적 연구소는 틀림없이 한국을 세계불교계의 지도자로 부상시킬 수 있을 것이다.

6.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한 한국불교의 점검 리스트

1) 국제적인 불교 수용

한국의 불자들은 외국의 불자들과 불교단체들을 기꺼이 한국에 받아들인다면 크게 얻는 바가 있을 것이다.

연구와 수행을 위한 장기적 교환 프로그램이 시행되어야 한다. 이 점에 있어서는 불자들은 성공적인 가톨릭 선교 단체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여러 종파간의 ‘혼합된 활력’으로 더욱 활성화되고 풍부해졌다. 이들의 세계적인 특성 또한 가톨릭 교회의 보편성을 잘 드러낸다.

전통적인 한국불교의 사찰규범과 전통적인 강원교육을 모든 사람들에게 따르라고 요구하는 것은 감수성이 부족한 것으로 피해야 한다. 같은 길을 가는 도반과 선우들에게 ‘한국식’만을 강요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상호이해와 지혜와 자비의 공동 성장은 불교 교환 사업의 수단이자 목적이 되어야 한다.

모든 한국인과 한국에 거주하고 있는 외국인들이 언제 어디에서건 전통적인 선수행만이 아니라 비파사나(vipassana), 관법(visualization), 다양한 자세, 춤동작과 음악 등 다양한 방식을 사용하여 참선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노인이나 장애가 있거나 병든 사람들, 바닥에 앉기가 어려운 사람들은 특별한 관심과 배려가 필요하다. 가부좌가 수행의 진전이나 깨달음의 필수조건은 아니다.

2) 달라이 라마의 한국방문

한국의 불자들은 달라이 라마의 한국방문을 꼭 성취해야 한다. 달라이 라마를 초청하여 가르침을 받고자 했던 시도들은 주한 중국대사관과 한국정부의 단호한 반대로 좌절되었다. 한국의 가장 유력한 개신교의 한 인사는 이와 관련하여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한국은 중국의 식민지인가?”라는 질문을 내게 던졌다.

달라이 라마는 종교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그리고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서 한국에 초청해야 한다. 한국의 종교 지도자들과 국민은 이 분과의 만남과 이 분의 가르침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달라이 라마께서 한국에 몇 주 혹은 한달 이상 머물면서 종교 지도자들, 관료들, 그리고 학자들과 함께 교류하는 모습을 그려본다.

이 밖에도 널리 알려진 불교 지도자들이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었으나 큰 관심을 끌지 못했던 것은 한국인들에게는 커다란 손실이자 수치였다. 노벨 평화상 후보로 천거되었던 베트남의 틱낱한(Thich Nhat Hanh) 스님, 캄보디아의 마하 고사난다(Maha Ghosananda) 스님, 태국의 술락 시바락샤, 그리고 스리랑카의 아리야라트네 박사가 이들이다. 이들은 불교계의 범위를 초월하는 메시지와 경험을 가진 분들이다.

3) 한국불교의 세계 홍보

외국의 저널리스트들 중에서 살아 있는 불교문화로서의 한국을 체험해 본 이는 극소수이다. 트라이서클(Tricycle), 샴발라 선(Shambhala Sun)과 터닝 휠(Turning Wheels) 같은 유명한 미국의 불교 잡지의 직원들을 한국에 초청해 심층적인 한국 답사여행을 하면 어떨까?

그 대신 한국의 불자들은 이들 잡지사들의 사무실에서 일하면서 미국불교에 대해 배우는 방식으로 교환하면 되지 않겠는가? ‘순회 세미나’ 프로그램을 통해 활동중인 외국의 불교 지도자와 기자들을 초청해 한국의 불자들처럼 생활하며 한국의 불교생활 전반에 대해 경험할 수 있게 해보면 어떨까?

지금까지 본인이 참석했거나 참가했던 한국에서 개최된 거의 모든 국제 불교행사에서는 초청한 외국 손님이나 학자들을 서구식 호텔에 묵게 했는데 이런 류의 ‘어리석음’을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 외국 참가자들이 한국을 체험할 수 없었다는 불만을 나중에 토로했다면 큰 비용을 부담하면서 국제적인 불교행사의 준비를 비싼 호텔에서 했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다.

특히 불자인 외국 참가자들을 불교수행의 장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호텔 등에 묵게 함으로써 한국인들의 생활상과 불법 수행에 대해 배울 기회를 없앤 것이다. 오히려 이들은 대부분 사찰에서 며칠 묵거나 사찰에서의 생활에 함께 할 수 있는 기회를 환영할 것이다. 이런 경험이 외국 손님들에게는 의미있을 뿐 아니라 앞으로의 상호교류의 기틀로서 친밀감과 따뜻함을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이다.

4) 평화로운 사회를 위한 불자들의 정치의식 및 정치세력화

일부 불교계 단체의 주장에 따르면 2천만에 이르는 불자 인구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불자들이 선거에 미치는 영향은 아주 미미하다고 한다. 앞으로 있을 선거에서 불자들의 존재가 중요한 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불자들의 정치의식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한국 불자들의 반전, 반군부 운동은 과연 존재하는가? 한국의 불자들은 군승의 역할을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가? 군승과 경승은 기독교의 공격적인 개종활동을 상쇄하기 위해 존재하는가 아니면 폭력과 전쟁에 대한 불교의 입장을 대변하기 위해 있는가? 한국 불자들은 다른 불교국가의 평화운동 주창자들과 대화를 한 적이 있는가?

5) 종교 편향

학교, 군부대, 직장 등에서 많은 종교편향 사례가 있었다. 그리고 지난 십여 년간 전국적으로 발생했던 불교와 민속종교 시설에 대한 파괴와 방화 행위들은 상세히조사된 바 있다. 왜 이런 문제들은 일반 언론이 중점적으로 보도하지 않았을까?1)

6) 성별 평등

타종교나 서구의 승가와는 달리 한국의 교단내 성별 불평등은 시정되어야 한다. 한국의 여성불자들 중 지도자급이나 이에 준하는 권한을 지닌 여성은 거의 없다. 그러나 승가의 대부분이 재가의 여성 신도들의 금전적 후원에 의존하고 있다. 세계적으로 여성에게 권한이 부여되는 시대가 온 것 같으나 한국사회에서는 특히 불자들간에 이런 변화의 조짐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7) 환경운동

그린벨트 규제, 문화보존 그리고 환경운동 등은 고 이기영 박사가 크게 활약했던 역사적인 도시 경주를 통과하는 고속철도 문제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가야산의 생태계와 팔만대장경의 보존은 승가의 적극적인 행동을 촉발시킨 중요한 문제였다. 불교환경교육원의 선구자적인 활동은 적극적으로 후원해야 할 것이다. 한반도의 환경퇴보로 인한 심각한 영향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는 불자들을 후원하는데 더 큰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8) 공중보건 교육

인간의 신체는 깨달음의 도구이다. 불교의 금연교육 및 캠페인은 아주 시급한 과제이다. 왜 깨달음의 도구인 우리 몸을 상하게 하는가? 과도한 술 소비는 내적 스트레스와 갈등의 징후로 알콜 중독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과도한 음주라는 사회적 병을 앓고 있는 이들을 참선, 그룹 상담과 지원을 통해 도울 수 있지 않을까?

채식주의의 권장은 정신적 수행과 맥락을 같이한다. 건강에도 유익하지 못한 잔인한 육식을 금할 필요가 있다. 모든 생명체와 오대양과 열대 우림들이 모두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곡식과 콩 위주의 음식이 건강에도 유익하고 생태학적으로도 더 완전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9) 불교의 생명교육:성교육과 생사 교육

한국의 높은 낙태율을 줄이기 위해서는 현실적인 성교육이 반드시 필요하다! 한국의 불자들은 수태와 자궁 내 생명의 인위적인 단절에 대해 불교는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지 아는가? 전 세계에 걸친 불교의 성에 대한 이해와 태도 및 성교육에 대한 연구뿐만 아니라 불교 성교육 정책의 시행이 필요한 때이다.

성병과 에이즈의 확산을 막고, 미성년 매춘을 통제하고, 성학대에 대한 대중의식을 높이고, 고압적인 가부장적 검열에 대한 이의제기를 위해 성문제는 반드시 다루어져야 한다.2) 불교의 죽음에 대한 교육은 학교나 대중매체에 더 널리 보급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불자들은 죽음을 받아들이고 이에 대한 수행을 내면화해야 한다. 승려들의 간호, 카운셀링, 시회복지 행정 등에 대한 교육과 더불어 말기환자 간호, 호스피스 간호 그리고 호스피스 자원봉사자들을 적극적으로 후원해 주어야 한다. 불교자원봉사회는 이 방면에 있어 두드러진 선구단체 역할을 해왔다. 화장과 납골당의 사용은 두말할 나위 없는 불교적인 관습이다.

10) 국내외에서의 응급구조활동

최근 타이완의 지진 사태는 자제(慈濟) 불교회의 승려들과 재가신자들이 펼친 훌륭한 구조노력과 활동을 크게 부각시켰다. 한국정부도 응급 구조대를 보내긴 했으나 불교계는 참여하지 않았다. JTS는 북한 난민을 대상으로 중국에서, 그리고 인도에서 대단한 활약을 하고 있다. 한국의 불교계 주요 종단들이 남들을 돕기 위해 구조대를 조직할 수는 없을까? 골수, 혈액 그리고 장기기증 운동의 범위를 확장하면 어떨까?

11) 교도소 개혁

한국의 불자들은 사형제도에 대해 문제제기를 한 적이 있는가? 전 세계적으로 사형제도는 야만스러운 제도라 하여 반대의 소리가 높다. 한국의 불자들은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나?

12) 동물보호

개인의 건강과 주변 자연환경에 대한 관심은 우리와 상호작용 관계에 있는 다른 생명체에 대한 관심을 일깨워준다. 한국 불교계에 동물 보호운동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집 없는 개와 고양이들을 위한 안전한 보호소는 존재하지 않는다.

채식 운동과 모피와 피혁 산업 뿐 아니라 농장에서의 동물학대 종식을 위한 캠페인 등은 전국적으로 불자들이 이끌어가야 한다. 임상 심리학자들은 가정에서의 애완동물에 대한 보살핌이 환자, 장애인 그리고 노인들의 정서적, 심리적인 치유에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아동들의 타인에 대한 배려와 사랑을 일깨워주는 데 있어 아주 중요한 활동임을 밝혀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산재해 있다.

이 글에서는 그 중의 일부만을 열거했을 뿐이다. 내가 보는 한국불교의 미래상은 정적인 꿈이 아니다. 행동을 요구하는 것이다. 한국불교가 “새 천년”으로 가지고 온 수 많은 도전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행동들이 지속되어야 한다. 지금 내게는 현재가 있을 뿐이다. 현재는 언제나 새롭게 시작하고 있다. <끝>

프랭크 테데스코
미국의 U.C. Berkeley 졸업. 영국의 Lancaster 대학과 동국대에서 각각 석사 및 박사 학위 취득(불교학). 현재 University Maryland Asian Division의 Asian studies 강사. 1998년 개최된 아시아 성학회의 부회장 및 "아시아의 종교 ,문화,그리고 성" 심포지엄 의장을 역임했으며 불교, 생명윤리, 종교간의 대화 등에 관한 많은 글을 써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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