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승무 중앙승가대 교수

1. 화두의 설정

최근 교육방송의 한 프로그램에서 김용옥은 “20세기에는 서양사상이 지배했지만 21세기에는 동양의 정신문명이 도래할 것이라고 하면서 21세기에 인류가 부딪치게 되는 문제를 노자의 사상을 빌려 해결할 수 있다.”고 하여 도가사상이 21세기의 대안사상으로 주목받을 수 있다고 강조한 바 있다. 김용옥씨가 노장사상에 매료된 만큼 불교나 유교에 심취한 학자라면 이에 대해 어떻게 반응할까?

아마 일부 불교학자는 위 인용문의 ‘노자의 사상’ 대신에 ‘불교사상’을, 그리고 일부 유교학자는 ‘공맹의 사상’을 각각 대입하고, 도가사상이 아니라 불교사상이나 유교사상이 21세기의 사회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사상이 될 수 있다고 강조하고 싶어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진술은 통상 주관적 판단이나 감정적 탐욕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가능성이 있을 뿐만 아니라 진술의 객관적 근거를 소홀하게 취급할 가능성도 내재하는 바, 이러한 가능성을 제어하거나 극복하지 못하는 그 어떤 진술도 설득력을 갖기는 어렵다.

그것은, 오늘날 한국사회의 잘못된 것은 모두 유교사상, 불교사상, 그리고 도가사상 때문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가치판단적 진술에 앞서 과연 금세기(21세기)에는 동양사상이 얼마나 주목받을 것인지 그리고 동양사상은 21세기의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어느 정도 대안사상의 역할을 할 수 있는지를 냉철하게 따져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유형의 진술과 관련하여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21세기는 불교사상이 주도한다’ 혹은 ‘주도하지 못한다’라는 식의 이분법적 사고이다. 오늘날 인류 사회는 이미 특정한 어떤 하나의 사상이 인류사회를 온전히 주도하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바람직하지도 않다는 것을 충분히 경험한 바 있으며, 동시에 보편적 가치를 지니고 있고 특정한 지역의 문화적 전통으로 자리잡고 있는 종교사상이 사회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아무도 감히 단정하기 어렵다.

게다가 서양사상이 20세기를 지배함으로써 서양문화권 밖의 20세기 사회는 대체로――일부 긍정적인 측면이 있지만――불행했듯이, 설령――필자는 21세기를 동양사상이 전적으로 주도하리라고는 결코 확신할 수 없다.――21세기를 동양사상이 지배하더라도 동일한 불행이 초래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게다가 불교사상은 원리적으로 타(他)의 불행을 담보로 아(我)의 지배를 결코 정당화하지 않는다.

또 하나, 동양사상의 미래와 관련하여 있음직한 담론 형태는, 금세기에는 인류가 서양적 가치와 동양적 가치의 조화, 물질문화과 정신문화의 조화를 추구할 것이고 따라서 동양사상의 영향력은 지난 세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커질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은, 동양과 서양 사이의 이법분적 구분에 기초한 진술에 비해, 상대적으로 설득력을 지니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동양이 아니라 서양에서도 진보개념의 중심축을 형성하고 있던 진화론적 사고조차 부정하는 해체철학이나 탈현대철학이1) 미래담론의 일부로 유행하고 있고, 동시에 대안사상으로서 동양사상에 점차 더 큰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미래사회가 정보사회로 바뀐다면(이에 관해서는 본론에서 자세하게 논의한다), 시·공간에 관한 기존의 물리적· 사회적 제약을 초월하는 정보의 속성은 동양사상과 서양사상 사이의 대화를 더욱 촉진시킬 수 있는 조건으로 작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양적 가치와 동양적 가치의 조화 혹은 물질문명과 정신문화의 조화 등의 문제는 이 글의 직접적인 주제도 아니지만 필자의 관심영역을 벗어나는 주제이다. 이 글의 관심은 불교사상과 사회의 관계에 놓여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 글의 화두는 이렇다. ‘금세기에 전개되리라 예상되는 미래사회는 어떤 사회이며, 불교사상은 그 미래사회의 주요 가치와 얼마나 친화력을 갖고 있는가?’

이 화두에는, 사회의 핵심적 가치와 종교(사상)의 친화력의 정도는 그 종교의 사회적 영향력의 정도와 비례한다는 종교사회학적 가정이 전제되어 있다. 그리고 이 글에서는 또 하나의 화두를 추가하고자 한다.

즉 ‘금세기에 전개될 미래사회는 어떠한 시대적 과제를 갖게 될 것이며, 그 사회가 갖는 시대적 과제를 해결함에 있어서 불교사상은 어떤 사상적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가?’

이 화두는, 서구에서 만개한 20세기 산업문명이 환경문제, 불평등문제, 그리고 소외문제 등과 같은 사회적 과제를 해결하는 데 실패하였다는 가정과, 만약 불교사상이 대안적 사상의 역할을 할 수 있다면 불교사상의 영향력은 커진다는 가정이 전제되어 있다.

이러한 두 가지 화두의 해답을 찾아 나가는 가운데 우리는 불교사상이 금세기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인가를 보다 냉철하게 평가해 볼 수 있을 것이다.

2. 이론적 시각

방금 우리는, 미래사회에 있어서 불교사상의 영향력을 객관적으로 평가해 보기 위해, 불교사상과 미래사회의 주요 가치 사이의 친화력 그리고 시대적 과제 해결에 있어서 불교사상의 대안 가능성 등을 평가의 척도로 삼겠다는 의도를 분명히 했다. 그 의도는 이 글의 시각과 무관하지 않다. 19세기 이래 지금까지 특정한 종교사상의 사회적 영향력은 주로 그 종교사상(혹은 가치)과 사회의 주요 가치 사이의 친화력을 기준으로 평가되어 왔다.

그것은 베버(Max Weber)의 영향 때문이다. 주지하듯이 베버는 《신교윤리와 자본주의정신》이라는 저서를 통하여 개신교윤리와 자본주의 에토스 사이의 선택적 친화력을 입증하였을 뿐만 아니라 개신교 이외의 다른 종교, 특히 불교와 힌두교, 유교와 도교 등의 동양종교는 자본주의 에토스와 친화력이 없었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최근 ‘아시아적 가치 논쟁’을 통해 일부 학자들은 유교에 관한 베버의 주장을 비판하고 있으며, 벨라(Robert Bellah)는 일본의 사례를 통하여 불교에 관한 베버의 주장을 부분적으로 반증하였다.

제이콥스(Norman Jacobs)와 같은 일부 학자들은 종교사상의 직접적인 영향보다는 정치적 기회구조와 같은 사회구조적 요인을 강조함으로써 종교의 영향력을 간접적으로 평가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비판이나 반증의 이론적 시각은 모두 철저히 베버의 유산이다. 종교적 가치의 영향력을 강조하는 학자들은 베버의 종교사회학적 시각에, 그리고 정치적 기회구조를 강조하는 학자들은 베버의 지배사회학적 시각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2)

그러나 이 글의 시각은 베버의 시각과 조금 다르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이 글의 시각은 종교사상과 사회의 주요 가치 사이의 친화력을 평가의 기준으로 삼는다는 점에서는 베버의 시각을 따르지만, 시대적 과제의 해결 능력과 관련해서는 베버의 시각과 무관하다. 이 글의 시각은 다음과 같다. 먼저, 이 글은 미래사회의 발전 혹은 진보 개념은 단순히 자본축적 혹은 경제발전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환경문제를 비롯한 사회문제의 극소화를 ‘진정한’ 의미의 발전으로 간주하게 될 것이라고 가정한다. 이러한 가정은 불교사상에 기초를 두고 있다.

주지하듯이 불교사상은 고통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삶의 지고의 가치로 설정하고 있다. 이러한 불교사상에 따르면, 고통지수와 행복지수는 반비례한다. 고(苦)를 개인적 차원의 개인고와 사회적 차원의 사회고로 구분하더라도, 사회고가 적으면 적을수록 행복지수는 증가한다. 따라서 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사회고의 현대적 변용인 사회문제의 극소화는 진보의 개념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우리가 진보의 패러다임을 ‘국민총생산’에서 ‘국민 총행복’3)으로 전환한다면, 사회문제 혹은 사회적 위험을 최소화하는 데 불교사상이 얼마나 기여할 수 있는가를 평가하는 것은 불교사상의 사회적 영향력의 정당한 척도가 될 것이다. 다음으로, 이 글은 불교사상의 친화력과 문제 해결 능력은 사회적 상황에 따라 상대적으로 변한다고 가정한다. 왜냐하면 특정한 사회의 핵심가치와 사회문제는 사회와 문화에 따라 다를 뿐만 아니라 한 사회문화 속에서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바뀌기 때문이다.4)

주지하듯이 불교사상은 20세기 산업사회의 핵심 가치와 친화력을 가지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산업문화라는 문화적 조건 속에서는 사회문제의 해결 능력을 발휘하기도 어려웠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만약 21세기 미래사회의 핵심 가치가 산업문명의 반성적 산물로서 20세기의 그것에 대한 대안적 가치로 부상한다면, 불교사상의 친화력은 향상될 것이고 문제 해결 능력의 조건도 상대적으로 양호해질 수도 있다. 물론 그 반대의 가능성도 배제해서는 안 된다.

만약 미래사회의 핵심 가치가 산업문명의 그것을 더욱 강화하는 방향으로 바뀌어 간다면, 불교사상의 친화력과 문제 해결 능력은 더욱 약화될 수도 있다. 결국 이러한 시각은 산업사회의 가치가 이상적인 가치로 더욱 부각될 것인지 혹은 그렇지 않을 것인지에 따라 불교사상의 친화력과 문제 해결 능력도 달라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셋째, 이 글의 범위는 미래사회에 있어서 불교사상의 친화력이나 문제 해결 능력을 검토하는 데 있다. 따라서 이 글은 특정한 사상을 미래사회 속에 구현해 나가는 데 요구되는 요인, 즉 사회구조, 각종 제도적 장치, 그리고 행위 주체의 실천 등과 같은 요인을 변수가 아니라 상수로 전제하고자 한다.

물론 특정한 사상이나 이념이 특정 사회에 구현되는 데 있어서는 세속사회의 제반 요인은 변수로 작용할 것이며, 따라서 그러한 요인들은 결과적으로 그 사상이나 이념의 사회적 영향력을 평가함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래사회의 각종 요인들을 모두 예견하여 고려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그럴 필요도 없다. 이 글의 목적이 불교사상의 사회적 영향력에 관한 경험적 결과를 평가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가능성을 예견하는 데 놓여 있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은 이론적 가정에서 출발하는 이 글의 시각은, 부분적으로는 베버를 비롯한 기존 사회학자들의 시각과 일치하지만 부분적으로는 그것을 크게 벗어나 있다. 특히 미래사회의 성격 규정 자체가 전망의 기초 위에서 가정된 것이기에, 불교사상의 사회적 영향력에 관한 평가도 엄격하게는 일종의 전망일 뿐이다. 물론 전망이 모두 틀린 것도 아니며, 비록 결과적으로 전망이 경험적 사실과 맞지 않게 되더라도 전망의 가치가 훼손되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전망을 가지고 미래를 준비하고 대비하는 것이 그것 없이 미래를 맞이하는 것보다는 낫기 때문이다.5)

3. 미래사회의 성격 규정: ‘지식기반-정보매개 사회’

세기 말과 세기 초에는 미래사회의 전망과 관련된 사회 담론들이 무성하게 제출되게 마련이다. 금세기와 관련해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미 ‘탈현대사회’ ‘탈산업사회’ ‘탈자본주의사회’ ‘정보(화)사회’ ‘지식(기반)사회’ 등과 같은 미래사회 담론들이 제출되었다. 뿐만 아니라 ‘제 3의 길’ ‘세계화’ ‘지방화’ 등과 같이 사회체제를 포함한 사회구조의 변화 경향을 반영하는 개념이나 ‘여성의 세기’ ‘녹색정치의 세기’ ‘노동의 종말’ ‘20대 80의 사회’ ‘NGO의 세기’와 같이 사회적 주목을 받을 것으로 예상되는 사회정치적 이슈를 강조하는 개념, 그리고 ‘문명의 충돌’ ‘동양문화의 세기’와 같이 문명의 변화를 예견하는 개념도 제시된 바 있다.

그 밖에도 사회의 각 분야에서 제시된 크고 작은 미래 예측의 담론들은 일일이 열거하기도 어려울 정도이다. 이렇듯 지난 세기 우리는 금세기와 관련된 다양한 미래 담론을 경험한 바 있으며, 향후에도 몇 가지 미래사회 담론이 제출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런데 사회의 성격규정에 있어서는 언제나 그 기준을 무엇으로 설정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제기된다.

게다가 그 문제에는 반드시 사회의 선차적 규정성과 관련된 철학적 논쟁이 개입되게 마련이다. 세계관이나 시각이 개입됨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철학적 논쟁을 정리하고 특정한 세계관에 따라 개념규정을 시도할 여유가 없거니와 그럴 필요도 크지 않다. 왜냐하면 미래사회의 규정 문제는 이 글의 주제를 벗어나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보편적 개념, 곧 ‘농경사회’ ‘산업사회’ 혹은 ‘봉건사회’ 등의 개념규정 방식, 즉 특정한 사회의 가치생산의 핵심적 기초나 지배적인 사회관계를 개념규정의 기준으로 삼고자 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규정은 사회의 주요 가치를 반영하고 있는 개념으로 인정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미래사회의 가치 생산의 핵심적 기초는 무엇이며 지배적인 사회관계는 어떻게 될 것인가?

이에 답하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주요 미래학자들의 연구결과를 종합해 보고, 거기에서 미래사회의 핵심적 가치와 사회관계의 핵심적 매개변인을 찾아보는 것이다. 미래학을 연구하고 있는 배규한은 자신의 저서 《미래사회학》(사회비평사, 1995)에서, 미래학자들의 연구결과를 종합하여 미래를 다음과 같이 종합한 바 있다.

    21세기는 과거 어느 때보다 이론과 지식이 중시될 것이며, 자원공학, 생명공학 등을 중심으로 하는 과학기술의 시대가 될 것이다. 사회변동의 중요한 추세는 정보화, 지구화, 국제화 등으로 특징지어질 것이며, 국가개념이 퇴색하는 대신 민족개념이 더욱 중요해지고 따라서 민족공동체 형성을 위한 문화적 정체성(identity)의 문제가 제기될 것이다.

    생활양식의 모든 측면에서 사회적 다양성과 복잡성이 더욱 증대될 것이며, 권력분산, 권한위임, 지방화 등 사회 전반의 다원화가 폭넓게 진행될 것이다. 아울러 물질적 보상보다는 정신적 만족과 자아실현의 기회를 중시하게 될 것이므로 문화적 기본권의 확대가 중요한 사회적 쟁점이 될 것이다. 따라서 인종주의, 공생주의, 환경주의 등 새로운 이념이 등장할 것이다.

위의 인용문에서 가치 생산의 원천과 사회관계의 매개변인을 색출해 보면, 미래사회에서는 지식이 가치 생산의 원천이 될 것으로 보이며, 정보가 사회관계를 규정하는 주요 매개요인이 될 것임을 알 수 있다. 지식(위 인용문에서 이론 개념은 지식개념에 포함시킬 수 있다.)이 중시된다는 것은 지식의 가치가 커진다는 것으로서 지식이 가치 생산의 원천으로 부각됨을 의미하며, 정보화(위 인용문에서 지구화나 국제화는 사회단위의 변화를 가리키는 개념이라서 제외할 수 있다.)가 사회변동의 추세가 될 것이란 말은 많은 사람들이 정보에 의존해서 생활함을 의미하며 따라서 사회관계에 있어서 정보가 중요한 매개기능을 할 것임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지금까지 개진된 21세기 담론들 중에서 피터 드러커(Peter F. Drucker)의 ‘지식(기반)사회론’과 다니엘 벨(Daniel Bell)의 ‘정보사회론’은 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점차 경험적 타당성을 인정받고 있다. 앨빈 토플러(Alvin Toffler)는 자신의 최근(1990) 저서 《권력이동》에서 미래사회의 권력의 원천은 물리적 힘이나 부(富)에서 정보와 지식으로 옮겨갈 것으로 전망한 바 있다. 따라서 이 글에서도 우리는 미래사회를 주로 ‘지식(기반)사회’와 ‘정보(화)사회’에 초점을 맞추어 논의할 것이며, 앞의 인용문에 제시된 또 다른 특성들을 필요에 따라 적시적소에 활용하고자 한다.

그러나 ‘정보(화)사회론’이나 ‘지식(기반)사회론’조차도 상대적인 설득력만을 지니고 있다. 주지하듯이, ‘정보(화)사회’는 미래사회의 가치생산의 기초가 ‘산업(특히 제조업)’이 아니라 ‘정보’이며, 인간관계나 커뮤니케이션, 그리고 생활문화까지도 정보 및 정보기술에 의해 규정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6) 반면에 ‘지식(기반)사회’는 가치 생산의 기초를 ‘토지’나 ‘자본’이 아니라 ‘지식’으로 간주하고 있으며, 나아가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정보를 생산하고 평가하고 관리하는 ‘지식’을 가치생산의 원천으로 보고 있다.7)

그런데 ‘정보(화)사회론’은 생산된 정보에 과도한 관심 때문에 정보의 생산, 정보의 분배, 정보의 평가 및 관리 그리고 정보의 감시로 인한 문제점 등의 문제를 소홀히 취급하고 있다. 또한 ‘지식(기반)사회론’은 미래사회의 가치생산, 관리, 평가에 있어서 ‘지식’의 중요성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 있으나, 지식사회의 지배적인 사회관계를 강조하지 않거나 정보화사회의 그것을 전제하고 있다. 게다가 우리가 ‘지식사회론’과 ‘정보사회론’을 이해함에 있어서 가장 난점은, 두 이론이 모두 지식과 정보 중 한 요소만을 과도하게 강조하거나 혹은 두 요소가 대립적인 것처럼 암시하고 있기 때문에 지식과 정보의 관계에 관한 종합적 이해를 방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식사회의 성격과 정보사회의 성격 즉 미래사회의 가치 생산의 선차적 기초(기식기반)와 지배적인 사회관계 및 그 매개(정보매개)를 결합하여 미래사회의 새로운 이론모형을 재구성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왜냐하면, 이론적으로 볼 때, 가치생산의 기초로서 지식의 사회적 역할과, 문화를 포함한 사회관계의 지배적인 매개로서 정보의 사회적 역할이 상호 조응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다음과 같은 경험적 사실은 필자의 확신을 증거하기에 충분하다. 즉 얼마 전(2000년 1월 10일) 미국의 대표적인 미디어업체인 타임워너(TIME WARNER)와 역시 미국의 최대 인터넷 업체인 아메리카 온라인(AOL)이 합병했는데, 언론의 발표에 따르면 전자의 콘텐츠와 후자의 유통망이 결합하면 시너지효과를 가져다 줄 수 있다는 것이 합병의 주된 이유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정보사회의 발달은 튼튼한 지식기반 위에서 꽃피울 수 있으며, 지식사회의 진전은 정보매체의 발달과 정보 가치의 증대와 비례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필자는 금세기에 전개될 사회를 가치 생산의 기반과 지배적인 사회관계에 기초하여 ‘지식기반-정보매개 사회(knowledge based-information mediated society)’라고 조작적으로 규정하려고 한다. 다시 말하면 필자는 미래의 사회가 ‘지식(기반)사회’의 특성과 ‘정보(화)사회’의 특성이 복합된 ‘지식기반-정보매개 사회’로 변할 것으로 전망한다.

4. ‘지식기반-정보매개 사회’의 주요 가치와 불교사상의 친화력

앞에서 우리는 금세기에 전개될 사회는 ‘지식기반-정보매개 사회’로 전망한 바 있다. 그렇다면 그 사회의 주요 가치는 무엇이며 그러한 가치들과 불교사상은 어느 정도 친화력을 가지고 있는가? 우선 ‘지식기반-정보 매개 사회’에서는 무엇보다도 지식의 가치가 커질 것인데, 지식의 원천은 창조성에 놓여 있으며, 인간의 창조성은 정신적이고 영적인 능력의 개발에 의해 가능하다.

물론 이러한 지식 개념은 기존의 지식 개념 즉 인간과의 절대적 분리라는 실증주의 철학의 전제 위에 성립되는 지식 개념이 아니라, 불교의 지혜에 가까운 개념이다.8) 다시 말하면, 지식기반 사회의 창의적인 지식은, 주입식 교육을 통해 습득하는 대상화된 지식이나 삶과 분리된 비실천적 지식이나 누적적인 특성을 갖는 지식이 아니라, 나와 대상의 불이(不二) 관계를 깨닫고 삶과 불가분의 실천적인 특성을 지녀야 할 뿐만 아니라 인간 자신의 수행을 통한 정신적 예지력과 직관력의 개발에 의해 자연스럽게 도출되는 성격의 지식을 의미한다.

결국 불교적 의미의 지혜와 같은 지식이 ‘지식기반-정보매개 사회’의 주요 가치로 등장할 것이다. 그렇다면 불교사상과 ‘지식기반-정보매개 사회’의 주요 가치 사이의 친화력은 매우 클 것이다. 다음으로 ‘정보매개 사회’는 정보를 매개로 한 모든 존재의 관계망 위에서만 가능하다.

만약 누군가가 자신의 정보는 제공하지 않고 타인의 정보를 이용만 하려 한다면 정보망의 형성은 그만큼 어려워지고 정보화사회는 발달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만약 정보가 유익한 정보는 거의 없고 유해한 정보만 가득하다 하더라도 정보화사회는 성립되지 않는다. 인간을 위한 정보가 아니라 인간조차도 정보로 전락하거나 감시의 대상이 된다면 정보화사회는 발전하지 못한다.

결과적으로 ‘정보매개 사회’는 모든 존재의 연기적 관계에 대한 자각과 그 윤리적 기초, 나아가 정보의 주인으로서 인간 자신의 자각 등과 같은 전제 위에서 성립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정보매개 사회’는 시·공간의 제약을 뛰어넘는 속성을 지니고 있는 바, 여기에는 필연적으로 집단·계급·민족간의 갈등이나 대립보다는 협력과 화해의 윤리가 전제되어야 한다.9)

이러한 윤리의 바탕에 불교적인 상생(相生)의 사상이 작용해야 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결국 불교의 연기적 세계관에 입각한 협력과 화해, 그리고 불교의 생명사상인 보편적 일원론(Universal Oneness)에 터한 상생의 윤리가 ‘지식기반-정보매개 사회’의 주요 가치가 될 것이고, 그렇다면 불교사상은 미래사회와 친화력을 가질 것이다. 셋째, ‘지식기반-정보매개 사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자원은 문화적 자원이다.10) 다시 말하면 ‘지식기반-정보매개 사회’에 있어서 가치창출의 원천은 제국주의화된 단일문화가 아니라 각 지역에서 발생한 다양한 고유의 문화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문화든, 유교문화든, 이슬람문화든, 기독교문화든, 혹은 각 민족 고유의 민간신앙과 민속문화든 모든 문화는 그 자체로 매우 중요한 자원이 될 것이다. 다만 여기에도 다문화 사이의 공존이나 다종교 사이의 공존의 윤리가 전제되어야 하는 바, 이러한 윤리는 배타적 신관을 가진 신 중심의 종교사상보다 범아일여를 강조하는 종교사상(특히 불교사상)과 친화력을 가질 것으로 예상된다. 이상으로 우리는 ‘지식기반-정보매개 사회’의 주요 가치와 불교사상 사이의 친화력을 따져 보았다.

그러나 ‘지식기반-정보매개 사회’의 주요 가치가 크게 왜곡되어 20세기 전인류적 과제로 부각되었던 사회문제를 더욱 악화시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당장 우려되는 현상은 ‘지식기반-정보매개 사회’는 탈국가화를 더욱 가속화할 것이란 사실 때문에 발생한다. ‘지식기반-정보매개 사회’의 지식기반의 중요성은 지방화(localization)를, 정보매개의 성격은 세계화(globalization)를 촉진하고, 이 두 경향은 동시에 탈국가화를 촉진시켜 갈 것이다.

이러한 탈국가화는 시장경제의 세계화와 그 횡포를 견제할 장치의 부재를 의미한다.11) 물론 유엔과 같은 국제기구가 존재하기는 하나 그러한 기구는 미국을 비롯한 상임이사국이나 강대국의 이해관계에 좌우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역할을 기대할 수는 없다. 그리하여 시장경제가 세계화되면, 세계화된 시장경제는 그 사회적 토대, 곧 ‘지식기반’과 ‘정보매개’를 오로지 시장경제에 유리한 조건으로 만들어 갈 뿐만 아니라 급기야는 ‘지식’과 ‘정보’마저도 철저히 시장경제의 하나의 품목, 곧 상품으로 둔갑시킬 수 있다.

이렇듯 ‘지식기반-정보매개 사회’가 시장경제로 하여금 살모사(殺母蛇)의 성격을 갖도록 방조하거나 혹은 제어능력을 갖지 못한다면, 금세기의 소수 힘있는 사람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모사의 횡포로 시달릴 수밖에 없고, 지난 세기의 회색빛 하늘은 금세기가 진행되면서 점차 먹구름으로 뒤덮여 갈 것이다. 문제는 민족·계급·집단 사이의 불평등에만 그치지 않는다.

만약 시장경제의 횡포를 제어하지 못한다면, 이것이 과학기술의 발달과 결합하여 인간사회와 자연환경의 모순을 더욱 악화시킬 수도 있으며, 이것이 생명공학이나 유전공학과 결합할 경우 인간의 물신화로 인한 소외는 물론이고 나아가 인간 생명 그 자체조차도 중대한 위기에 놓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러한 가능성을 고려한다면, 시대적인 과제들을 해결함에 있어서 불교사상이 대안적 사상으로 활용될 수 있는지의 여부를 따져보는 일은 그 자체로 유의미하다.

5. ‘지식기반-정보매개 사회’의 과제와 불교사상

몇몇 예외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미래 담론들은 너무 긍정적인 측면만을 강조함으로써, ‘장미빛’ 미래만을 제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유토피아는 이데올로기만큼이나 편견의 산물은 아닐까?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지식기반-정보매개 사회’가 된다고 하더라도 20세기 인류 사회의 과제가 저절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어쩌면 ‘지식기반-정보매개 사회’는 20세기 산업문명의 부산물인 환경문제, 불평등문제, 인간소외문제 등을 더욱 악화시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렇다면 불교사상은 이러한 과제를 해결하는 데 얼마나 공헌할 수 있을까?12) 주지하듯이 불교는 연기적 세계관에 입각하여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불가분의 관계로 파악하고 있다. 나아가 불교는 물질과 정신의 관계도 대립적 관계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작용관계로 이해하며 동시에 인간존재와 그 완성을 위한 원인과 조건, 즉 인(因)과 연(緣)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렇듯 자연환경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불교적 이해는 오늘날 환경문제를 이해함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함의를 지닌다. 자연과 인간, 인식주체와 대상 간의 절대적 분리와 이성의 선험성과 순수성이라는 전제 위에 성립된 현대과학기술문명에서 자연은 영원히 인간에 의한 분석의 대상인 동시에 인간의 삶에 필요한 자원을 얻기 위한 지배 및 정복의 대상일 뿐이다. 그러나 불교는 존재론적 관점에서 자연과 인간의 불가분의 관계를 전제하고 있으며, 따라서 모든 생명체를 보편적인 일원론적 관점에서 파악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는 인간의 삶을 위해서는 그 생명의 일부로 간주되는 자연을 결코 정복이나 파괴의 대상으로 간주할 수 없다. 불교의 관점에서 보면, 오히려 자연은 인간 자신이 복을 지을 수 있는 선업의 대상이다. 이러한 불교적 관점은 자연환경에 대한 현대인의 인식 전환에 기여할 수 있는 적절한 종교적, 사상적 자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불교의 연기적 세계관은 사회와 인간의 관계를 이해함에 있어서도 여전히 적용된다.

이러한 사상에 입각할 때, 인간은 이미 사회적 존재로 파악될 뿐만 아니라 사회는 인간들 사이의 사회적 연대에 기초한 공동사회가 된다. 바로 그러한 점에서 불교에서는 화합중(和合衆)으로 일컬어지는 승가공동체를 이상적이고 사회적으로도 모범적인 사회상으로 간주하고 있다. 이러한 불교적 사회관은 오늘날 개인주의 및 이기주의와 인간소외에서 파생된 각종 사회문제를 극복하는 데 커다란 함의를 지닌다. 사회의 기본단위를 개인으로 간주하고 그 최소단위까지 분화되고 이질화된 사회를 가장 진화된 이상적인 사회로 파악하는 현대 사회과학적 사회관에서는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는 것이 미덕으로 간주되고 개인주의를 제한하는 그 어떤 제도적 장치도 배제하도록 강제한다.

그 결과 유적 존재로서 인간의 사회적 본질을 왜곡시킬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으며, 인간소외의 제도적 기제로 작용하고 있는 ‘시장’이 사회를 지배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불교는 인간과 인간의 화합과 연대를 강조함으로써 한편으로는 사회적 질서를 유지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으로 하여금 업사상에 입각하여 끊임없이 선업을 지향하도록 동기화하기 때문에 사회적이면서도 윤리적인행위를 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따라서 불교는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로부터 파생될 수 있는 현대사회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사상적 자원으로 작용할 수 있다. 게다가 불교의 연기적 세계관은 오온무아(五蘊無我) 및 제행무상(諸行無常)의 개념을 통해 인간이 시·공간적으로 연관되어 있음을 설명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불성론에 입각하여 욕망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운 자각을 강조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불교는 대상화된 자아를 부정하고 불성의 주체적 자각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불교적 인간관은 최소한 행위적 차원에서는 물질만능주의 풍조와 그로 인해 파생되는 각종 사회문제를 억제하는 데 공헌할 수 있다. 욕구를 인간의 본질로, 그 충족을 해결책으로 간주하고 있는 현대문명은 그 충족을 통해 새로운 욕구가 무한히 창조되는 것을 ‘발전’ 및 ‘진보’의 개념과 연결시켜 이해하고 있다.

이는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관심을 욕구 충족의 새로운 대상의 탐색으로 돌림으로써 그리고 그것을 통해 진보된 자신의 사회적 존재를 확인하게 하고, 끝내는 자기 자신마저도 대상화된 존재로 전락시키고 만다. 더욱이 대상화는 그 대상을 단순히 자연에만 한정시키지 않고 인간으로까지 확대함에 따라, 인간의 상품화를 강화하고 있다.

이렇듯 대상화된 자아에 대한 집착은 급기야 ‘과시소비’를 통해 지배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회구조를 탄생시켰으며, 이는 현대과학기술문명을 ‘소비지향주의’ 혹은 ‘물질만능주의’로 전락시키고 있다. 그 결과 현대인의 자기상실감과 소외는 깊어지고 비인간화 현상은 점차 확대되고 있으며, 나아가 이는 환경위기를 재촉하고 있다. 그러나 불교적 인간관은 이러한 대상화된 자아를 부정하고 물질적 욕구를 정신적 수양으로 극복하며 불성의 자각을 진정한 자유로움과 행복으로 간주함으로써, 이러한 물질만능주의를 억제할 수 있는 기능을 할 것이다.

6. 맺는 말

이상으로 우리는 미래사회의 핵심 가치와 불교사상의 친화력 그리고 시대적 과제를 해결함에 있어서 불교사상의 대안 가능성 등을 제시해 보았다.

그러나 이 글에서 제시한 것들은 모두 특정한 가정하에서만 성립한다. 따라서 아래에서는 이러한 가정을 고려하면서 보다 냉철하게 평가해 보기로 하자. 오늘날 대부분의 미래학자들이나 사회과학자들은 미래사회에 있어서 지식과 정보가 가장 중요한 가치로 부상할 것이라는 데 동의하고 있다. 만약 미래사회가 ‘지식기반-정보매개 사회’로 바뀌어 간다면, 불교사상과 그 사회의 주요 가치 사이의 친화력은 매우 클 것이다.

물론 이러한 평가는 어디까지나 사상 혹은 가치의 사회적 영향력을 종교사회학적 시각에서 평가한 결론이다. 또한 만약 미래사회의 주요 가치, 즉 지식과 정보가 산업생산이나 경제발전에만 효율적인 가치로 탈바꿈한다면, 현실적으로 미래사회의 사회문제는 더욱 악화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그러나 20세기 산업사회가 인류에게 던지고 있는 교훈은 더 이상 인류는 경제발전만을 진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며, 따라서 자연과 인간의 공존의 지혜를 찾도록 촉구하고 있다.

만약 미래사회의 진보개념이 ‘경제발전’만이 아니라 ‘삶의 질’의 발전으로 바뀐다고 가정한다면, 불교사상은 이러한 사회문제의 해결과 관련해서도 상당한 사상적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결국 이 글의 가정하에서라면, 불교는 미래사회에서도 여전히 큰 가르침으로 작용할 것이다. 물론 이 글의 가정이 주로 가치관이나 사상 등 정신적 측면에만 초점을 맞춤으로써 다소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일부 미래학자들의 주장대로 미래사회에서 정신적 가치가 더욱 주목을 받는다면, 이 글의 가정도 상당히 타당할 것이며 따라서 불교사상의 영향력도 상대적으로 증가한다고 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지난 세기 인류사회는 자유주의체제와 사회주의체제라는 양극의 체제이데올로기에서 조금씩 중간으로 이동을 하여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와 신좌파 이데올로기의 대립을 경험하였고 급기야는 이른바 ‘제 3의 길’에까지 이르렀다.

이러한 정치경제체제 변화의 역사는 중간길(中道)을 찾아 방황해 온 역사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미래의 ‘지식기반-정보매개 사회’가 자연과 경제발전의 조화, 인간사회의 자유와 정의의 균형, 그리고 지식과 지혜를 겸비한 인간 등을 추구한다면, 중도와 공존의 가르침인 불교사상의 사회적 영향력은 20세기의 그것에 비해 상대적으로 커질 것이다.

이러한 결론은 한국의 경우에도 적용될 것이다. 더욱이 일부 미래학자들의 주장대로 미래사회가 (전통)문화나 문화적 정체성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변화된다면, 한국사회에서도 불교는 전통문화를 버리거나 경시하는데 주력했던 20세기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더 주목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미래는 항상 준비하는 자의 몫이다. 불교가 미래사회의 주요 가치와 친화력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그리고 대안적 사상으로 인정된다 하더라도, 불교가 금세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내면화되어 그 사회 속에 구현되기 위해서는 불교인의 예지와 반성, 그리고 미래사회를 주도할 수 있는 주체적 역량이 담보되어야 한다.

미래사회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저절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순간 순간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떠한 주체적 의지를 가지고 무엇을 실천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전개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실천적 문제와 관련하여, 한국불교계는 ‘미래사회에 대비하기 위하여 지금 여기에서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 것인가?’라는 화두를 하나 더 갖고 있는 셈이다. <끝>

유승무
한양대학교 사회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사회학 박사. 현재 중앙승가대 포교사회학과 교수.저서로 <불교사회학이 성립조건1,2>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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