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자랑 동국대 강사

1. 소소계 논쟁의 배경과 그 문제점

‘과연 율(律, vinaya)1)은 시대의 흐름을 수용하며 변화해야 하는가, 아니면 부처님께서 한번 제정하신 것은 절대로 바꿀 수 없다는 불제불개변(佛制不改變)의 원칙을 고수하며 어떤 변화도 용납해서는 안 되는가?’

쉽게 답을 내릴 수 없는 이 질문은 불교 역사상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켜 왔으며, 현대 승단에서도 중요한 논란거리로 등장하고 있다. 오로지 율은 부처님만이 관장할 수 있는 영역이라 여기며 율에 관한 어떤 변화도 거부한 채 기존의 율을 고수하려는 입장이 있는가 하면, 율이란 실생활에 관련된 규칙인데 현실에 맞지 않는 조목을 그대로 두고 지킬 것만을 강요한다는 것은 무리가 아닌가, 역시 시대의 변화를 수용해야 한다는 입장이 있다. 최근 불교계 일각에서 심심찮게 등장하는 이 논쟁은 이미 초기불교 역사의 많은 사건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가장 대표적인 사건은, 불멸후 100여년 경에 웨살리(Vesl)라는 도시의 한 승원에서 발생했다고 전해지는 ‘십사비법(十事非法)’사건이다.2) 《대사(大史, Mahvasa)》나 《도사(島史, Dpavasa)》와 같은 스리랑카의 초기빨리연대기 및 제 부파의 율장 〈건도부(Khandhaka)〉 등에 상세히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당시 불교계에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던 사건으로 보인다.

웨살리의 한 승원에서 왓지족 출신의 비구들이 기존의 율에 어긋나는 열 가지 행동을 실천하며 살고 있었는데, 우연히 유행 길에 이를 목격하게 된 야사(耶舍, Yasa) 비구가 출가자로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행동이라며 이의를 제기하고, 이를 계기로 불교승단 전체에 큰 파문이 일어난 것이 이 사건의 발단이다. 문헌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승단에 근본분열이 일어났다고 한다.

즉, 기존의 율을 고수하는 비구들은 상좌부(上座部), 십사주장을 통해 기존의 율에 변화를 가져온 왓지족 출신의 비구 및 이들을 지지하는 비구들은 대중부(大衆部)로 분열한 것이다. 이 사건과 근본분열의 직접적인 관계에 관해서는 아직 단언하기 어렵지만, 적어도 여러 부파의 율장에 모두 전해지고 있는 점으로 보아 불멸 후 100여 년경에 율에 관한 논쟁이 발생하고, 그 결과 승단에 잊지 못할 큰 충돌이 있었다는 사실만은 부정할 수 없을 것 같다.

이 사건의 핵심은 정법(淨法, kappa)의 허용 범위에 관한 논란이다. 즉, 시대의 흐름과 함께 승단생활에 발생한 불편함이나 불합리한 면을 해소하기 위해 기존의 율에 약간의 융통성을 부여함으로써 허용 범위를 넓히고자 하는 비구들과, 이에 강력히 맞서며 기존의 율을 지킬 것을 주장하는 보수파 비구들 간의 논쟁으로 볼 수 있다.

보수적인 입장에 있던 장로들은 시대의 흐름과는 상관없이 오로지 기존의 율을 고수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대도시의 승원에서 살며 시대적 흐름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던 비구들은 변화를 요구했던 것이다. 십사비법 사건으로 표출된 이와 같은 갈등은 시대의 변화와 더불어 승단에 끊임없는 논란을 불러일으키며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대의 승단 역시 2,500여 년 전의 승단이 안고 있던 문제와 크게 다르지 않은 고민을 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율을 둘러싸고 왜 이런 논쟁들이 끊임없이 발생하는 것일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필자는 왕사성결집에서 이루어졌던 소소계(小小戒, khuddnukhuddakni sikkhpadni) 논쟁이 가장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한다고 생각한다. 이 소소계 논쟁이야말로 본고의 서두에서 제기한 의문에 합의점을 도출하기 어렵게 만드는 근본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율장 〈건도부〉에 전해지는 소소계 논쟁의 배경은 다음과 같다.3)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불교승단에서는 ‘결집(結集, sagti)’이라 불리는 성전편찬회의가 열리게 된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부처님의 입멸 소식을 들은 한 비구가 이제 우리를 속박하던 사람이 사라졌으니 앞으로는 우리 마음대로 하면서 살자고 다른 비구들을 선동했고, 이를 들은 대가섭(大迦葉, Mahkassapa)은 이대로 방치했다가는 얼마 못 가 부처님의 법과 율이 쇠퇴할 것이라 우려하며 결집 개최를 제의했다고 한다. 비구들은 기꺼이 동의했고, 왕사성의 칠엽굴에서 법과 율에 능통한 500명의 아라한들이 모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한 구절 한 구절씩 함께 확인·암송했다. 불교역사상 첫 번째 성전편찬회의가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런데 결집이 끝났을 무렵, 부처님의 시자이자 결집에 참석하여 중요한 역할을 했던 아난(阿難, nanda)존자가 갑자기 “부처님께서는 열반에 드시기 전에, 승단이 원한다면 소소계는 버려도 좋다고 하셨습니다”라는 놀라운 말을 꺼냈다. 이를 들은 장로들은 당황스러워 하며 “너는 부처님께 소소계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여쭈어 보았느냐?”고 아난에게 물었다. 아난은 미처 확인하지 못했다고 답했다.

그러자 장로들은 소소계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가에 관해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비구의 행동규범을 모아놓은 조문집인 〈바라제목차(波羅提木叉, pimokkha)〉4)가 주요 논의대상이 되었다. 〈바라제목차〉는 죄의 내용이나 경중(輕重)에 따라 바라이(波羅夷, prjika), 승잔(僧殘, saghdisesa), 부정(不定, aniyata), 사타(捨墮, nissaggiya-pcittiya), 바일제(波逸提, pcittiya), 바라제제사니(波羅提提舍尼, pidesanya), 중학(衆學, sekhiya), 멸쟁(滅諍, adhikaraa-samatha)의 8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어떤 장로들은 이 중 바라이죄를 제외한 나머지 율이 소소계라고 말하기도 했고, 또 다른 장로들은 바라이죄와 승잔죄를 제외한 나머지 율이 소소계라고 말하기도 했다.

치열한 논쟁이 이어졌으나, 결국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했다. 이를 지켜보고 있던 대가섭은 소소계의 내용이 분명하지 않은 이상, 부처님이 남겨 주신 지금의 율을 그대로 지키며 절대로 새롭게 추가하거나 폐지하지 말 것을 제안했다. 이 의견이 받아들여짐으로써 ‘불제불개변(佛制不改變)’, 즉 부처님께서 한 번 제정하신 것은 절대로 바꾸지 않는다는 원칙이 정해졌다. “승단이 원한다면 소소계는 버려도 좋다”는 부처님의 말씀은 분명 미래를 내다보고 남기신 의미 있는 것이었겠지만, 구체적인 내용을 알 수 없는 비구들로서는 함부로 소소계의 내용을 정할 수 없었고, 결국 부처님의 법과 율을 고수하자는 데로 의견을 모은 것이었다.

당시의 모임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정리·전승하려는 목적으로 열린 결집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와 같은 결정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최대한 충실하게 지키려 노력한 장로들의 성실한 태도를 엿볼 수 있다. 또 당시에는 이러한 결정이 현실적으로 별 문제를 일으키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원칙은 시대가 바뀌면서 승단에 풀기 어려운 과제를 안겨주게 된다. 위에서 언급한 십사비법 사건의 경우처럼, 불교문헌에서는 승단의 근본분열 시기를 대부분 불멸 100여년 경으로 기록한다. 이 100년이라는 숫자를 그대로 신용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부처님 당시와는 다른 많은 변화가 발생했을 시기이고, 이와 같은 변화가 승단생활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점은 충분히 짐작할 만하다.

게다가 존재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권위를 느끼게 했던 부처님이나 부처님의 직제자들에 관한 기억도 이미 희미해져 가게 된다. 바로 이 시기에 십사비법과 같은 대소동이 승단에 발생했다는 전승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위에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이 사건은 소소계 논쟁 때 대가섭에 의해 제시된 불제불개변의 원칙을 지키려는 보수파 비구들과, 시대의 변화를 수용하여 율도 변화해야 한다는 혁신파 비구들 간의 대립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소소계 논쟁의 결과는 이후 율에 관한 문제에 합의점을 찾지 못하는 근본적인 원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기존의 율을 고수하는 보수파는 대가섭의 불제불개변 원칙을 근거로 내세워 율은 부처님만이 바꿀 수 있는 것이며 그 어느 누구도 함부로 손댈 수 없다는 입장을 굳건하게 지키지만, 한편 다른 입장을 지닌 비구들은 부처님이 소소계의 폐지를 인정하신 점, 그리고 현실적으로 기존의 율 중에는 지키기 어려운 규칙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 등을 들어 율의 변화를 호소한다. 화합을 최상으로 여기는 승단이 큰 충돌을 불사하면서도 서로 양보할 수 없었을 만큼, 이 문제는 출가자들에게 중대하고 심각했음을 엿볼 수 있다.

만약 아난존자가 부처님께 소소계의 내용을 확인했거나, 아니면 왕사성결집에서 대가섭을 비롯한 500명의 아라한들이 소소계의 내용을 결정하고 기준을 제시해 주었다면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아니면 일어났다 해도 승단을 분열시킬 만큼 큰 충돌은 야기하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여하튼 소소계 논쟁을 통해 정해진 불제불개변의 원칙은 후대의 출가자들에게 적지 않은 고민거리를 안겨 주게 된다.

이하, 본고에서는 소소계 논쟁이 후대에 미치게 되는 영향을 《사리불문경》의 근본분열에 관한 전승을 중심으로 살펴보고, 이 전승을 실마리로 삼아 제 부파의 〈바라제목차〉비교를 통해 소소계의 내용에 관해서도 고찰해 보고자 한다.

2. 《사리불문경》에 전해지는 근본분열의 원인

불멸후 100여 년 경에 승단이 상좌부와 대중부로 분열했다는 전승은 이미 잘 알려져 있지만, 그 원인에 관해서는 불교문헌에서도 전하는 바가 각기 달라 학계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분열의 원인은, 위에서 소개한 웨살리의 십사비법(十事非法) 사건, 그리고 대천(大天, Mahdeva)의 오사(五事) 주장 사건 등이다.

이 중 십사비법에 관해서는 이미 설명한 바와 같다. 한편, 대천의 오사는 《대비바사론》이나 《이부종륜론》과 같은 설일체유부 계통의 경전에 주로 전해지는 것이다. 불멸후 100년경에 대천이라는 비구가 아라한의 깨달음에 대해 당시의 상식으로는 경악할 만한 다섯 가지 주장을 함으로써 승단에 논쟁이 발생하고그로 인해 분열하게 되었다는 전승이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전승 외에 또 하나의 흥미로운 근본분열 전승이 있다는 사실은 의외로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그것은 바로 《사리불문경(舍利弗問經)》5)에 전해지는 대중부의 전승이다.6) 십사비법이나 대천의 오사가 각각 빨리상좌부와 설일체유부라는 상좌부 계통의 부파가 전하는 전승이라면, 《사리불문경》의 전승은 상좌부와 대립하는 대중부의 하나밖에 없는 전승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 전승에 따르면, 분열은 기존의 율을 고수하려는 측과 이와는 달리 새롭게 증광(增廣)한 율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측의 대립에 기인했다고 한다. 이것은 분열의 원인을 ‘율의 증광’으로 인한 충돌로 보고 있다는 점에서, 소소계 논쟁 및 십사비법 사건을 떠올리게 하는 전승으로 주목해 볼 만하다.

《사리불문경》은 사리불의 질문에 대하여 부처님이 대답하는 형식으로 구성된 문답 형태의 비교적 짧은 경이다. 전체적인 기술에 일관성이 없고 산만한 점 때문에 내용의 역사성이나 중국 찬술 등 여러 가지 의문이 제기되었지만, 음사어 등의 분석을 통해 인도에서 제작된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고 있다.7)

이 경의 초반에서 부처님께서는 불멸후의 승단 모습을 예언 형태로 말씀하시는데, 이에 따르면 부처님의 가르침은 대가섭(大迦葉)→아난(阿難)→말전지(末田地)→사나바사(舍那婆私)→우파급다(優波多)로 이어질 것이고, 우파급다의 사후에 아쇼까왕이 나타나 경과 율을 널리 알리게 될 것이라고 한다. 아쇼까왕이 죽은 후에는 그의 손자인 불사밀다라(弗沙蜜多羅)가 불교를 파괴하려 하겠지만, 오히려 자신의 몸을 멸망시키게 될 것이며, 그 후 훌륭한 왕이 나타나 경과 율을 다시 널리 알리게 될 것이라고 한다.

이 기술들에 이어 근본분열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고 생각되는 에피소드가 다음과 같이 등장한다.

그 때 한 명의 장로비구가 유명해지고 싶어 쟁론을 일으킬 것이다. 그는 나의 율에 손을 더하여 가섭이 편찬한 ‘대중율(大衆律)’을 증광할 것이다. 외부로부터 잘못된 자료를 받아들여 초심자를 혼란스럽게 하며, 따로 그룹을 만들어 시비를 다툴 것이다. 그 때, 한 비구가 왕에게 판결을 구할 것이다. 왕은 두 그룹을 모아 놓고 흑백의 주(籌)8)를 집게 할 것이다. 모두에게 “이전의 율이 좋다고 생각하는 자는 검은 주를 집어라. 새로운 율이 좋다고 생각하는 자는 하얀 주를 집어라.”고 말할 것이다. 그 때 검은 주를 집은 자의 수는 일만이 넘고, 하얀 주를 집은 자는 약 백 명밖에 없을 것이다. 왕은 양쪽 모두 불설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생각이 다르므로 한군데 살 수는 없다. 이전의 율을 배우는 자는 수가 많은 것으로부터 ‘마하승기’라 하고, 새로운 율을 배우는 자는 수는 적지만 상좌이므로 ‘타비라(他羅)’라고 불릴 것이다.

이 전승에 의하면, 어떤 장로비구가 왕사성결집 때 편찬된 ‘대중율’에 손을 더하여 내용을 증광했고, 이를 둘러싸고 승단 내부에 다툼이 생겼다는 것이다. 왕이 이 다툼을 중재하기 위해 투표를 실행했고, 그 결과 증광된 새로운 율을 선택한 자는 백 명 정도로 수는 적지만 상좌들이 많았으므로 타비라(sthavira)라는 이름을 얻었고, 대가섭에 의해 편찬된 기존의 율을 선택한 자는 일만 명이 넘어 그 수가 월등히 많았으므로 마하승기라 불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전승은 흥미로운 점이 많다. 대중부에 속한 경전이기 때문일까, 상좌부 계통의 문헌에서 일반적으로 접하는 근본분열의 전승과는 너무나도 다르다.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대가섭이 편찬한 율을 ‘대중율’이라 부르며, 이를 배우고자 한 자들을 대중부, 즉 마하승기부라고 전하고 있는 점이다.

십사비법 전승의 영향 등으로 일반적으로 상좌부는 율에 있어 보수적이고 엄격한 부파, 대중부는 진보적이고 관용적인 부파라는 인식이 강하지만, 《사리불문경》의 이 전승을 고려한다면, 이 두 부파의 성향에 관해서는 좀 더 검토할 여지가 있을 듯하다. 이 점에 관해서는 좀 더 광범위한 고찰이 필요하므로, 본고에서는 두 부파의 구체적인 성향은 접어두고 승단의 분열 원인으로 율의 증광이 거론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 보자.

큰 맥락에서 본다면, 이 전승은 십사사건과 마찬가지로 ‘율’을 분열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거론하고 있다. 이 두 사건이 동일한 사건을 전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서로 다른 사건을 전하고 있는 것인지는 단언할 수 없지만, 양쪽 모두 ‘율의 증광’을 근본분열의 원인으로 들고 있는 점으로 보아, 불멸후 율을 둘러싼 논쟁이 승단에 중대한 혼란을 일으키고 있었음은 충분히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왕사성 결집 당시 오백아라한이 결집한 율과, 이와는 달리 시대의 변화를 수용한 새로운 율 사이에서 많은 출가자들이 갈등을 느꼈으며, 결국 이것은 후대에 승단 분열 사건의 주요한 원인으로 전해질 만큼 불교도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들은 율의 어떤 부분을 가지고 다투었던 것일까? 이 부분을 명확히 하는 것이야말로 소소계 논쟁의 핵심이다. 이 부분을 결정하지 못했기 때문에 대가섭은 불제불개변을 선언할 수밖에 없었고, 이를 계기로 그 후에도 많은 논쟁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현재로서 이 부분을 추측해 낼 수 있는 유용한 하나의 방법은, 현존하는 각 부파의 〈바라제목차〉를 비교하고 그 차이에 주목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율의 증광을 원인으로 비구들이 충돌하고 승단 분열에까지 영향을 미쳤다면, 그것은 분명 어떤 형태로든 각 부파의 율에 흔적을 남기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하, 각 부파의 〈바라제목차〉를 중심으로 율 조문의 변화에 관해 살펴보기로 하자.

3. 소소계의 내용 - 중학법과의 관계

현존하는 광율(廣律)은 전부 6종이다. 빨리상좌부의 위나야삐따까(Vinaya-piaka), 법장부의 《사분율》, 화지부의 《오분율》, 설일체유부의 《십송율》, 근본설일체유부의 《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 대중부의 《마하승기율》등이다. 이 가운데 마지막에 든 《마하승기율》만이 대중부의 것이며, 나머지 다섯 율은 모두 상좌부 계통의 부파에 속하는 것들이다. 광율은 율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경분별(經分別, Suttavibhaga)〉과 〈건도부(度部, Khandhaka)〉의 두 부분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경분별은 비구나 비구니가 해서는 안 될 금지조문을 모아 놓은 규범집인 〈바라제목차〉의 주석에 해당하며, 〈건도부〉는 승단생활을 하며 적극적으로 실천해야 할 조문들을 모아 놓은 부분이다. 이미 몇몇 학자들이 이 6종 광율의 내용과 구성을 비교하며, 분열하기 이전의 율의 원형 및 분열 후의 증광된 부분 등을 연구해 왔다. 그 결과에 의하면, 상좌부 계통에 속하는 5종의 율은 〈경분별〉이나 〈건도부〉에 있어 내용이나 전체구성에서 큰 차이를 발견할 수 없지만, 대중부의 경우는 〈건도부〉가 매우 특이한 체계로 이루어져 있다는 결론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바라제목차〉의 조문수도 대중부의 경우, 다른 부파의 율에 비해 현저히 적다는 결론이다.

대중부의〈바라제목차〉조문수가 적다는 지적은, 위에서 언급한 《사리불문경》의 기술에 비추어 본다면 매우 주목할 만한 점이다. 왕사성결집 때 편찬된 기존의 율을 지지한 비구들이 대중부가 되었으며, 후대에 증광된 율을 지지한 비구들은 상좌부가 되었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좌·대중의 두 부파가 보여주는 율에 관한 입장에 관해서는 전승마다 차이가 있어, 구체적으로 어느 부파가 기존의 율을 고수하고, 또 어느 부파가 율의 변화를 주장했는지에 관해서는 아직 단언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며, 앞으로 좀 더 신중한 검토가 필요한 문제이다. 따라서 지금은 각 부파의 〈바라제목차〉에 보이는 조문수의 차이를 통해 부파들이 어떻게 율을 전승해 왔는가 하는 점에 관해서만 살펴보고자 한다.

위에서 각 부파의 〈바라제목차〉 중 대중부의 〈바라제목차〉 조문수가 가장 적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조문수의 차이는 구체적으로 어느 부분에서 발생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바로 중학법(衆學法, Sekhiya-dhamma)이다.9) 중학법은 주로 일상생활 속에서 지켜야 할 위의(威儀)에 관한 법을 모아 놓은 것으로, 삼의(三衣)의 착용법이나 식사예절, 혹은 재가자를 대할 때의 예절 등이 주된 내용이다. 저지른다 해도 한 명의 비구 혹은 혼자서 마음속으로 참회하면 되는 비교적 가벼운 죄들이다. 바로 이 중학법의 조문수가 상좌부 계통의 율들에 비해 대중부의 《마하승기율》이 현저하게 적은 조문수를 갖고 있는 것이다. 제 율에 보이는 중학법의 조문수를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마하승기율 66
빨 리 율 75
사 분 율 100
오 분 율 100
십 송 율 107
근본유부율 99

한 눈에 알 수 있듯이 마하승기율의 조문수가 가장 적으며, 빨리율 이외의 상좌부의 제 율에서는 중학법의 수가 100여조에 이른다. 중학법의 조문수가 일치하지 않는 것에 관해 학자들은 지금까지 여러 가지 해석을 해 왔다. 우선 히라카와 아키라(平川彰)는 〈바라제목차〉에 조문수가 명시되어 있지 않은 점에 큰 이유가 있다고 본다.

예를 들면 바라이법은 4바라이법으로, 승잔법은 13승잔법으로, 중학법을 제외한 다른 7법에는 조문수가 명시되어 있는 한편, 중학법 만은 그 수를 명시하지 않고 중학법, 즉 ‘배워야 할 많은 법’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그 내용이 쉽게 증광 개편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부파분열이전의 계경에 있어 중학법이 어떠한 위치를 가지고 있었는가를 문제로 삼고 있다.10) 한편, 파쵸(Pachow)는 서로 다른 장소에 위치하고 있던 부파들은 구전에 의해 조문을 전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순서에 다소 차이가 생기는 것이 불가피한 점, 그리고 중학법은 조문수가 정해져 있지 않으므로 부파들이 필요에 따라 그 수를 늘려갔을 것이라는 점 등을 들어 제 율에 보이는 차이를 설명하고 있다.11)

분명, 중학법은 조문수가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에 내용에 변화를 일으키기 쉬웠을 것이다. 그러나 중학법 역시 〈바라제목차〉에 하나의 법으로서 명확하게 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이상, 적어도 집단의 인가를 얻지 않고 수를 늘이거나 내용을 바꾸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분명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떠한 사정 하에 각 부파의 중학법 조문수와 내용에 차이가 발생하고, 또한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검토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중학법의 주된 내용은 일상생활에서 출가자가 갖추어야 할 위의에 관한 것인데, 좀 더 주의 깊게 살펴보면, 단순한 일상적인 위의나 예의범절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청식(請食) 등을 받아 재가신자를 만나러 갔을 때 지켜야 할 행동들이 많이 담겨있다고 할 수 있다. 중학법을 내용에 따라 분류해 보면 다음 7항목이 된다. ① 옷 및 열반승(涅槃僧, nivsana)의 착의법에 관한 것 ② 속가에 갈 때의 행동거지에 관한 것 ③ 식사 예절 ④ 설법 예절 ⑤ 대소변에 관한 예절 ⑥ 상과인수계(上過人樹戒)12) ⑦ 불탑에 관한 것 등이다. 그런데 이 중에서 ①부터 ④까지의 조문이 각 부파의 율에서 가장 현저한 조문수의 차이를 보인다. ⑤에 관해서는 모든 율이 3항목을 들고 있으며, ⑥에 관해서도 빨리율과 《마하승기율》을 제외한 대부분의 율이 한 항목만을 든다. 그리고 ⑦은 《사분율》에만 보이는 내용이다.

기본적인 내용의 틀이 일치하는 점으로부터 보아 중학법 역시 〈바라제목차〉의 다른 조문들처럼 일정한 형태로 정리되어 있었던 조문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사분율》에 보이는 불탑에 관한 26개조의 규칙으로부터 알 수 있듯이, 후대의 증광이 매우 현저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던 부분이라는 점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것은 각 부파의 〈바라제목차〉중학법 가운데 내용에 증광이 인정되는 조문, 즉 기본이 되는 조문을 둘러싸고 좀 더 상세하게 기술되고 있는 ①부터 ④의 조문에도 해당된다.

예를 들면, 옷이나 열반승의 착의에 관한 규정의 경우, 『마하승기율』이나 빨리율에서는 “삼의를 올바르게 입거라” 혹은 “열반승을 올바르게 입거라”는 두 개의 조문만이 기술되어 있는 것에 비해, 다른 상좌부의 율에서는 이것에 추가하여 “높게 장식하듯 입어서는 안 된다” 라든가 “코끼리 코처럼 입어서는 안 된다”는 상세한 금지조문을 추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세부에 걸친 차이는 파쵸가 지적하는 바와 같이, 조문수를 늘려 엄격하게 비구의 행동을 단속할 필요가 발생했음을 말해 주는 것이라고 추측해 볼 수 있다.13) 특히 ①부터 ④의 조문을 보면 빨리율이나 《마하승기율》에 비해, 설일체유부나 근본설일체유부의 율 쪽에 심한 증광이 보이는데, 이것은 후자가 이들 조문에 관해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사분율》이 자신들의 어떤 필요에 따라 불탑에 관한 조문을 후대에 삽입한 것처럼, 설일체유부나 근본설일체유부도 나중에 상세한 내용의 조문을 부가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각각의 이유가 있었음을 상상할 수 있다.

이와 같이 각 부파의 율은 중학법에서 독자적인 많은 변화를 겪고 있다. 학자들 중에는 중학법이 주로 경죄(輕罪)를 다루는 부분이라는 점에서 근본분열과의 관련 및 승단분열과의 연관성을 인정하기 힘들다는 의견을 피력하는 경우도 있지만,14) 이것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견해다. 율장을 통해 보면 실제로 승단에 불화를 초래한 대부분의 다툼이 아주 사소한 것으로부터 발생하고 있다. 부처님 재세 당시의 대표적인 승단 불화 사건으로 전해지는 꼬삼비의 사건은 화장실을 사용한 뒤의 뒤처리에 관한 싸움이었다는 것이 주석서의 설명이다.15) 이와 같이 승단의 불화는 일상생활에 관련된 아주 사소한 것으로부터 충분히 발생할 수 있으며, 이러한 사소한 논쟁은 승단 분열의 씨앗이 될 수 있다.

물론 각 부파의 율에 대한 입장은 광율전체에 걸친 검토를 통해 좀 더 정확하게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바라제목차〉는 비구들이 보름마다 한 번씩 거행하는 포살(布薩, uposatha)이라는 중요한 승단 행사에서 항상 암송하고 이를 통해 스스로의 청정은 물론 승단의 청정을 확인한다는 점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바라제목차」에 나타나는 이러한 차이는 곧 각 부파가 지니고 있던 성향을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소소계 논쟁 때 장로들이 소소계의 내용을 〈바라제목차〉를 중심으로 논의했다는 점도 고려할 만하다. 이런 점들을 감안해 볼 때, 각 부파의 「바라제목차」에서 특히 현저한 차이를 보여주는 중학법이야말로 비구들이 출가생활에서 가장 절실하게 변화를 필요로 했던 부분이었다고 추측해 볼 수 있다. 처음에는 상좌나 대중이라는 큰 분류로 율에 대한 성향을 구분할 수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점차 이것은 각 부파의 개별적인 문제가 되었으며, 각 부파가 놓인 상황이나 지역적인 특징 등의 영향을 받음으로써 자체적으로 율에 변화를 주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4. 맺음말 - 율 변화의 방향성

이상 《사리불문경》의 전승과 제 부파의 「바라제목차」에 보이는 차이를 연관시켜 소소계의 내용을 추론해 보았다. 현존하는 각 부파의 〈바라제목차〉를 통해 볼 때, 대가섭이 선언한 ‘불제불개변의 원칙’은 사실상 철저하게 지켜지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각 율이 보여주는 〈바라제목차〉 조문수의 차이로부터 명확하다. 특히 《사분율》의 〈바라제목차〉에 나타나는 불탑에 관한 규정은 분명 불멸후에 추가된 조문이다.

정확한 배경을 알 수는 없지만, 법장부의 경우 불탑에 관한 규정을 〈바라제목차〉에 집어넣을 필요가 발생했던 것이다. 그리고 다른 부파의 경우에도 원래 있던 조문의 내용을 좀 더 철저하게 지키기 위해 필요에 따라 상세한 규정을 추가하는 형태로 율에 변화를 초래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각 부파들이 현실적으로는 율에 변화를 시도함으로써 ‘불제불개변의 원칙’을 지키지 못하고 있다 하더라도, 명목상으로는 한결같이 자신들은 부처님 이래로 전해 내려오는 율을 온전하게 수지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위에서 소개한 십사비법을 전하는 상좌부 계통의 율의 전승, 그리고 대중부의 《사리불문경》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기존의 율을 고수하는 부파가 바로 자신들이며, 자신들과 대립하는 부파야말로 율의 내용을 바꾼 자들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것은 대가섭의 ‘불제불개변 원칙’을 철저하게 지키며 그 가르침을 충실하게 실천하며 사는 부파라는 것을 통해 자신들이야말로 정통부파임을 주장하고 싶은 것이다. 따라서 노골적으로 조문 자체를 바꾸거나 폐지하는 행동은 자제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현실과 맞지 않는 불합리한 조문들을 방관하며 출가자들에게 혼란을 줄 수도 없다. 결국 부파들은 부처님이 율을 제정하신 의도나 기존의 율을 크게 손상시키지 않는 범위에서, 율과 현실을 적절하게 조화시켜 나가는 방법을 적극적으로 사용하게 된다. 바로 부처님 당시부터 활용되고 있던 정법(淨法)이나 수결(隨結)이라는 방법이다.

정법이란 위에서 설명한 바와같이 원래의 조문은 그대로 둔 채 그것에 약간의 융통성을 부여함으로써 허용 범위를 넓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바일제법 ‘괴생종계(壞生種戒)’에 의하면 비구는 식물의 생명을 빼앗을 수 없다. 이 조목은 유행생활을 하던 시대에는 무리없이 지킬 수 있지만, 점차 승원의 규모가 커지고 정착생활을 하다 보면 승원 마당에 풀이 무성하게 자라는 것을 언제까지 그대로 방치할 수만은 없다.

그러나 비구가 직접 풀을 베거나, 말로라도 “이 풀 베 주시오”라고 말하면 율을 어기게 되므로 다른 방법을 사용하여 간접적으로 표현하게 된다. 즉 정인(淨人, kappiya-kraka)이라 하여 승단생활을 도와주는 재가자에게 손가락으로 풀을 가리키며 “당신은 이것을 아시오, 이것을 운반하시오, 이것을 원합니다”등의 표현을 사용하여 자신의 뜻을 전달하면, 정인이 알아서 풀을 베 주는 것이다. 이것이 정법이다.

한편, 수결이란 이미 조문을 제정했는데,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상황이 발생하여 그 조문을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할 필요가 있을 때 내용을 추가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어떤 비구가 어머니의 청을 차마 뿌리치지 못하고 출가전의 아내와 관계를 가져 아이를 낳게 한 사건을 계기로 ‘만약 비구가 부정행을 저지르고 음욕법을 행하면 바라이불공주이다’라는 조문이 제정되었다. 그런데 후에 율을 견디지 못한 비구가 율을 버리고 비구를 그만 두는 일 없이 집에 돌아가 아내와 관계를 갖는 사건이 발생하자, ‘만약 율을 버리지 않고 율이 약해졌음을 고백하지 않고’라는 한 구절이 추가되었다.

즉 율을 버리고 고백한 후에는 환속한 것이 되므로 음욕법을 행하여도 율을 범한 것이 아니다. 이런 경우에는 율을 어긴 것이 아니므로 후에 다시 구족계를 받고 비구가 될 수 있다. 이는 비구인 채로 음욕법을 저질러 비구로서 수행할 수 있는 기회를 영원히 잃게 되는 상황을 막기 위한 추가 규정이다. 이와 같이 수결이란 새로운 상황에 대처하여 이미 있는 조문에 한 구절씩 필요에 따라 추가하는 것이다. 조문에 따라 수결이 열 번 가까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도 있으며, 없는 것도 있다.

즉 정법이든 수결이든 원래의 조문은 그대로 두어 조문의 내용과 제정된 이유 등은 상기시키면서도, 상황에 따라 약간의 변화를 주는 것이다. 명목상으로는 불제불개변의 원칙을 지키면서도, 대부분의 부파들은 현실적으로 지키기 어려워진 기존의 율 조문을 이러한 정법이나 수결이라는 형식을 통해 나름대로 조정해 나간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소소계 논쟁을 생각할 때 중요한 점을 시사한다. 본고의 서두에서 던졌던 “과연 율(律, vinaya)은 시대의 흐름을 수용하며 변화해야 하는가, 아니면 부처님께서 한번 제정하신 것은 절대로 바꿀 수 없다는 불제불개변(佛制不改變)의 원칙을 고수하며 어떤 변화도 용납해서는 안 되는가?”라는 물음에 대하여 하나의 방향을 제시해 줄 수 있다. 율이란 부처님만이 제정할 수 있는 것이므로 율 조문의 단 한 구절도 함부로 바꾸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은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

그러나 문제는 현실이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실 속에서 분명 더 절실하게 강화해야 할 부분과 다소 느긋하게 풀어주어야 할 부분이 생기는데, 이런 변화에 눈감고 기존의 율만을 지키라고 강요한다면, 출가자들 사이에는 율에 대한 거부감만이 팽배해질 것이다. 율이란 지킬 수 없는 것만 지키라고 요구한다는 인식하에 율의 중요성은커녕, 자유를 속박하는 벗어버려야 할 짐 정도로 여기게 되고, 이것은 결국 무관심을 낳게 된다.

시대가 바뀐다고 환경이 바뀐다고 조문을 그 때마다 바꾸어 간다면 나중에는 원형을 잃어버리게 되어 혼란만 가중될 것이라는 보수파의 주장 역시 귀 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더욱 더 율 변화의 기준과 방법에 대한 절실한 고민이 필요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현존하는 각 부파의 율이 분열 이전의 원형으로 추측되는 부분들을 모두 잘 보존하고 있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부파분열 후 각 부파가 자신들의 상황에 맞게 정법 및 수결을 통해 적절하게 율을 조정해 나간 흔적을 남기고 있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율의 조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실질적으로 변화를 필요로 하는 조문은 의외로 적다. 변화가 요구되는 부분은 실생활에 관련된 아주 자잘한 규정들이다. 정말 말 그대로 중학법으로 분류될 만한 소소계가 대부분이며, 간혹 바일제 등에 포함된 일상생활에 관한 일부의 규정들이다. 바라이나 승잔과 같은 중죄는 아주 세부적인 면에서 논쟁을 불러일으킬 수는 있어도 조문 자체가 크게 문제되는 일은 없다. 앞으로 세심한 검토가 필요하겠지만, 바로 이 점에서 소소계의 큰 범위를 정해볼 수 있을 것이다. 중학법이 〈바라제목차〉의 다른 법들과는 달리, 조문수가 정해져 있지 않은 것도 적극적으로 조정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조문들임을 반영하는 하나의 증거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중학법이 일상생활에 관련된 자잘한 규정들이라 하여 마음대로 조문을 바꾸거나 명확히 규정하지 않은 채 적당히 넘어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사실 또한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율은 승단의 규칙이며, 규칙이란 반드시 실천을 필요로 한다. 중학법 역시 율이므로 세심한 규정 속에서 출가자들이 방황하지 않고 잘 지켜나갈 수 있도록 실천의 의미와 방법을 알려주어야 한다. 세세한 규칙이라는 이유로 지킬 것만 지키고 지킬 수 없는 것은 내버려둔다면 그 여파는 반드시 율 조문 전체에 미치게 될 것이며, 결국은 율 그 자체에 대한 소홀함으로 이어질 것이다.

율장에서 왜 사용하고 난 빗자루의 보관 방법까지 세심하게 규정하는지, 왜 길을 걸을 때의 시선 처리 하나 하나까지 모두 규정하는지, 왜 일상생활에 관련된 행동 전반에 걸쳐 수시로 율의 추가규정이 이루어지고 있는지 곰곰이 되새겨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본고에서 거론한 《사리불문경》의 전승 및 십사비법 사건은 초기의 승단에 부파불교라는 새로운 시작을 제공한 계기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결과적으로 승단에 분열을 안겨주었다는 점에서 이 사건들은 부정적인 시각에서 평가되기도 하지만, 이를 열심히 율을 지키며 사는 보수파와 율을 완화하여 편안한 승단생활을 보내려는 안이한 관용파의 대립으로만 간단히 치부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오히려 부처님이 율을 제정하신 의도와 그 실천을 둘러싸고 많은 출가자들이 진지하게 고민한 흔적을 발견할 수 있는 뜻 깊은 역사적 사건들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로 인해 오히려 불교는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나며 생명력을 지니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현실적으로 지킬 수 없는 조문은 그대로 둔 채 지킬 수 있는 것만 지키면 된다고 생각하거나 조문의 문자에 사로잡혀 실천의 의미도 모른 채 무조건 기존의 율을 고수하는 것만이 율을 잘 지키는 최선의 방법인지, 아니면 현실에 맞지 않는 부분을 여법한 방법을 통해 지킬 수 있는 것으로 조정하는 노력을 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는 좀 더 깊이 숙고해 보아야 할 문제이다. 부처님이 아난존자에게 남기신 “승단이 원한다면 소소계는 버려도 좋다”는 말씀 중에서, “승단이 원한다면”이라는 구절이 지니는 의미를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현대를 예로 들어 생각해 보자. 율에서는 출가자가 탈 것을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16) 그러나 현대는 어떠한가? 산속에서만 생활하는 출가자가 아닌 이상, 차를 이용하지 않는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가? 그런데 율에 그렇게 규정되어 있으니 그대로 지켜야 한다고 강요한다고 하자. 강요 속에서 지켜지는 율이 얼마나 갈 것이며, 또 율이 과연 강요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인가?

결국 이 조문은 문자만 존재하는 쓸모없는 것이 되어 버릴 것이다. 혹은 “지킬 수 있는 사람만 지키고, 지킬 수 없는 사람은 관둬라. 나는 지키겠다”라며 자신은 열심히 지킨다고 하자. 이 조문이 제정된 원래의 의미를 생각할 때, 이것이 과연 최선의 행동일까? 중요한 것은 처음에 이 조문이 왜 제정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율에 의하면, 비구들이 탈 것을 이용하는 것을 보고 재가신자들이 비난한 것이 계기였다고 한다.

즉 비구들이 암소가 끌고 남자가 모는 수레를 타기도 하고 수소가 끌고 여인이 모는 수레를 타기도 하며 다녔는데, 이것이 재가자들의 눈에는 마치 축제를 즐기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아마도 비구들이 수레 탄 모습이 애욕을 즐기는 것처럼 보였을 수도 있으며, 또한 부처님 당시에는 마차와 같은 탈 것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비교적 부유한 계층의 자들이었기 때문에 출가자들이 걸어 다니지 않고 탈 것을 이용하는 모습이 재가자들에게 축제를 연상시킬 만큼 사치스럽게 여겨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재가자들의 이런 비난은 곧 승단과 일반사회 사이의 갈등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곧 바로 관련 규정을 마련하신 것이다.17)

바로 이 점이 핵심이다. 과연 지금 출가자들이 차를 이동수단으로 이용한다고 해서 그 자체를 사치라고 비난할 재가자들이 얼마나 되겠는가? 재가자들이 비난하는 모습은 출가자가 차를 이용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지나치게 고가의 자가용을 사용하는 모습일 것이다. 바로 현대사회가 안고 있는 이러한 가치관이 어떤 형태로든 율에 반영되어야 하며, 이런 문제점을 인식하고 제계십리(制戒十利)에 어긋나지 않도록 바꾸어 가는 노력을 함으로써 승단은 바람직한 모습으로 발전·유지될 수 있을 것이다.

율의 변화를 조문 자체의 변화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 소소계 논쟁이 발생할 때마다 항상 많은 이들이 율의 변화를 조문 자체의 폐지 등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은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이미 많은 부파들이 자신들의 율을 통해서 보여주었듯이, 원래 조문은 그대로 둔 채 정법과 수결이라는 형식을 통해 현실에 맞게 조절해 나가는 방법이 있다. 물론 정법의 허용범위나 수결의 내용을 둘러싸고 또 다른 논쟁이 발생할 수도 있겠지만, 이러한 논쟁이야말로 그 시대를 살아가며 진정 율을 실천해 보고자 노력하는 출가자의 아름다운 고민이며 깊은 관심일 것이다.

율은 먼지 쌓인 과거의 유물이 아닌, 바로 현재를 살아가는 모든 출가자들이 깨달음을 향한 동반자로 인식하며 실천할 수 있는 살아 숨 쉬는 생명력을 지닌 것이어야 한다. 부처님께서 왜 율을 제정하셨는가? 그리고 그것이 후대에 어떻게 전승되어 왔는가? 하는 점을 주의 깊게 생각해 봄으로써 소소계 논쟁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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