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사회학자 요한 갈퉁의 사상을 중심으로­

1. 서구지성의 불교비판과 불교사상의 재평가

불교에 대한 서양 지식인들의 인식은 대체적으로 부정적인 것이었다.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 베르그송(Bergson, 1859∼1941)은 불교를 가리켜 현실사회로 분출하는 약동력(躍動力)이 부족하다고 지적하였으며, 앨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도 불교사상의 대부분이 실속 없는 수동적인 명상으로 일관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미국의 외교관이자 국제정치학자인 사무엘 헌팅턴(Samuel P. Huntington)은 《문명의 충돌》에서 불교는 자신이 발생한 땅에서는 살아남지 못했기 때문에, 동아시아 문화의 중요 요소가 되기는 했지만 거대 문명의 바탕은 되지 못했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나 1970년대 들어 마르크스주의 등 서구 개인주의·합리주의가 한계를 노출하고 신과학(New Age Science)이 등장하면서 불교사상에 관한 서구학자들의 관심이 고조되었다.

우리에게 널리 소개된 카프라(Fritjof Capra)의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이나 왈라스(Alan B. Wallace)의 《과학과 불교의 실재인식》 등이 대표적인 것이다. 그리고 불교·유교의 혼합문화권인 한국·대만·홍콩·싱가포르 등 아시아의 네 마리 용(ANIEs)이 세계 경제성장의 중심국가로 등장하면서 불교 등 동양사상에 관한 서구 지식인의 시각이 크게 변하였다.

그럼에도 불교를 긍정적으로 보기 시작한 서구의 지식인들은 대체로 철학자, 사상가들이며, 사회과학자는 그리 많지 않다. 그 이유는 정치학, 경제학, 사회학 등 사회과학이 서양에서도 19세기에 이르러서야 성립하였는데, 불교는 이미 기원전 5세기에 성립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양의 불교사상과 서양에서 출발한 사회과학을 접목시키기가 어려웠고, 특히 서구 사회학자들에게는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불교를 이해하고 긍정적으로 평가한 가장 대표적인 서양의 사회과학자로는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독일 출신의 경제학자 에른스트 슈마허(Ernst F. Schmacher)를 들 수 있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Small Is Beautiful)》로 널리 알려진 그는 서구경제학을 뛰어넘을 대안으로 불교사상에 눈을 돌려 《불교와 경제》를 저술하여 불교경제학을 수립하였다.

불교사상에 대해 높이 평가하고 있는 또 한 사람의 사회과학자로는 노르웨이 출신의 정치사회학자인 요한 갈퉁(Johan Galtung)을 들 수 있다. 요한 갈퉁은 《불교:조화와 평화를 찾아서(Buddhism:A Quest for Unity and Peace)》를 비롯한 여러 저서와 논문에서 무아·비폭력·자비·공생·다양성·중도사상 등 20가지를 불교의 장점으로 들면서 불교를 평화의 적극적 창조에 가장 적합한 신앙체계로 평가하고 있다.

본 글에서는 불교사상을 평화주의로 규정한 정치사회학자 요한 갈퉁의 불교이해를 중심으로, 그의 학문적 경향과 그가 불교에 심취하게 된 배경, 그리고 그의 학문성과와 불교이해가 결합하여 어떠한 형태로 국제평화주의를 설파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끝에 가서는 국제평화주의의 제도와 실천이라는 측면에서 요한 갈퉁의 주장을 살펴본다.

2. 요한 갈퉁의 이론적 경향과 불교사상 접근

요한 갈퉁은 1930년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출생한 정치학자이자, 사회학자이다. 그는 정치사회학자로서 우리에게 널리 알려져 있으며, 그의 이론적 경향은 종속학파에 속하는 것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가령 《평화연구》지에 게재된 〈제국주의의 구조이론(A Structural Theory of Imperialism, 1971)〉과 같은 그의 논문이 이에 해당한다.

그러나 그의 이론적 경향이 종속학파에 가까웠다는 것은 그가 종속이론가라기보다는 평화주의자의 입장에서 근대화론과 같은 주류 정치사회학 이론에 반기를 들었다고 보는 편이 더욱 정확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는 이데올로기에 기울어진 좌파이론가라기보다는 국제무대에서 횡행하는 침략주의, 권위주의와 같은 권력정치(Power Politics)에 반대한 평화주의 이론가라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그의 주요 저작을 보면, 《환경, 발전과 군사행동:대안적 안보독트린을 찾아(Environment, development & military activity:towards alternative security doctrines)》(1982), 《분쟁해결:평화연구의 한 시각(Solving Conflicts:a peace research perspective, University of Hawaii)》(1989), 《평화적 방법에 의한 평화(Peace by Peaceful Means)》(1996) 등이 있다. 이들 저작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연구는 대부분 평화연구에 바쳐져 있다. 처음에 그는 네덜란드 철학자 바루크 스피노자(Baruch Spinoza)의 휴머니즘과 인간에 대한 신뢰에 이끌렸다가, 인도의 성인 마하트마 간디의 평화주의에 감명을 받아 동양사상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가 간디에게서 깊은 인상을 받은 것은 힌두교와 불교가 접목된 아시아적 방법이었다. 그는 서양의 이분법적 사고를 비판하면서 일원적인 아시아적 방법을 옹호하고 있다. 특히 그는 간디가 직접 폭력에 호소하는 좌파, 우파 양쪽을 없애기 위해 전개한 ‘무저항·불복종(Satyagraha)’과 ‘생활향상(Sarvodaya)’이라는 두 가지 이념과 운동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간디는 침략주의·신분제도·인종주의라는 구조적 폭력에 대해 직접폭력을 반대하며 비폭력으로 대항함으로써, 직접폭력을 주장하는 좌파, 우파 어느 쪽의 함정에도 빠지지 않았다. 갈퉁은 간디에 관해 연구하는 과정에서 불교를 만나게 되었고 마침내 불교사상에 심취하게 되었다.

그는 불교사상에서 생명의 일체감과 같은 고상한 이념뿐만 아니라 비폭력이 실행 가능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는 《평화를 위한 선택》(1995) 속에서 이케다 다이사쿠(池田大作)와 행한 좌담에서 “석존의 위업을 전하는 아주 작은 불교서적이라도 사회과학 잡지의 온갖 논문을 읽는 것보다 더 큰 영감을 얻게 된다.”고 밝히고 있다.

특히 요한 갈퉁의 불교사상에 대한 깊은 이해는 국제평화주의에 관한 연구에서 잘 드러난다. 그는 서양의 지적 풍토 속에서 자라왔음에도 불교사상의 정수를 파악하여 평화연구에서 선구적인 역할을 해 오고 있다.

3. 국제평화와 불교사상

1) 평화 그 자체가 평화에 이르는 길

불교에서 평화는 지상과제였지만, 이에 대처할 구체적인 방도를 제시하고 있지 않다. 이 쪽의 평화적 의도를 틈타 다른 나라가 침략해 오거나 폭도들이 폭동을 일으킨다면, 그것을 방어하기 위해 어떠한 수단을 강구할 것인가? 불교는 폭동이나 전쟁 등이 발생했을 때 대처하는 방법을 가르치기보다는 전쟁이나 폭동을 사전에 막는 데 무게를 싣고 있다.

《40화엄》에서는 “왕의 세력이 뛰어나게 용맹하거나 덕이 높아지면 전쟁을 하지 않고도 이웃나라를 굴복시킬 수 있다.”고 하고 있으며, 근본적으로는 외국의 침범을 걱정하지 않도록 나라의 기반을 확립해 놓아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나라의 기반을 확립한다는 것은 나라 안팎에 공포가 없게 만드는 일이다. 그러기 위한 조건으로 조세는 한결같이 공평할 것, 왕족·관리들은 진실되고 직무에 충실할 것, 국민들은 의리와 겸양을 갖출 것 등 다섯 가지를 들고 있다.

요한 갈퉁은 스스로 평화주의자이며 ‘양심적인 참전 거부자’라고 자처하고 있지만, 군복 입은 사람에 대한 차별에는 반대한다. 군대가 다른 나라를 공격하거나 노동자 계급에게 발포하고 또 정통성 있는 정부를 전복하는 경우에는 단호히 저항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군대가 자국 영역 내에 국한하여 순수하게 방어적인 방위와 유엔의 평화유지 활동을 하는 것까지 배제할 필요가 없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국제경찰, 긴급사태의 수습, 재해 때의 구조와 같은 사업은 매우 필요하다고 인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국제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기본조건으로 무엇보다 세계의 모든 인간이 평등하고, 둘째 각 나라가 국내적으로 발전과 생태를 조화시키고, 셋째 인권을 존중할 것을 들고 있다.

 

2) 모든 생명의 평등

요한 갈퉁은 평화를 실현하기 위한 첫 번째 전제조건으로 인간과 우주생명과의 공명(共鳴)을 들고 있다. 현재에 머물지 않고 과거, 현재, 미래에 걸쳐 생생하게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는 모두 연기로 이어져 있다. 그는 인간과 우주생명과의 연기적 고리를, 불교에서 ‘영혼이 실체로 존재한다는 것을 믿지 않으면서도 윤회전생을 인정하고 있다’는 데서 찾으려 한다.

윤회전생은 영혼과 같은 실체를 가진 것이 아니라는 불교의 가르침에 대해 그는 ‘에너지의 흐름’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 에너지의 흐름 속에서 남자, 여자라는 한 인간으로서의 존재가 다양한 다른 존재와 융합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우주만물을 꿰뚫는 생명력에 관한 우리의 책임은 능동적이고 선한 에너지의 흐름에 따라 생명에 내재하는 불성(佛性)을 강화하는 데 두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갈퉁은 이러한 이미지를 통해 경계(境界)가 없는 또 하나의 세계를 떠올린다. 그 세계에는 모든 인간, 그리고 인간과 그 밖의 생명체, 남성과 여성, 모든 세대·인종·계급·민족·국가 등이 다같이 인과관계(因果關係)에 따라 하나로 맺어져 있다. 따라서 이들 사이의 장벽과 경계선을 제거하는 것이 바로 평화를 이룩하기 위한 길로 보고 있다. 국가와 국가 및 기타 조직과의 경계를 축소하고 연대와 단결을 이루었을 때 비로소 국제평화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3) 발전과 생태의 조화

더 나아가 요한 갈퉁은 불교의 연기론적 세계관을 통해 평화를 위한 전제조건으로서 발전이나 건전한 환경을 위한 분투를 제시하고 있다. 발전을 위해서는 고(苦, duh.kha)를 줄이는 데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고’를 줄인다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기본적 필요를 충족시킨다’는 것이다. 이 때 먼저 줄여야 할 ‘고’를 가장 많이 가진 사람부터 시작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것은 오늘날 경제학에서 말하는 경제성장과는 다른 것이다.

그에 따르면, ‘인간으로서의 기본적 필요’라는 개념은 단지 경제수단만으로 만족할 수 있는 필요의 범위를 훨씬 초월한다. 여기에 포함되어야 할 것으로 어느 정도 물질의 복리를 비롯하여, 존재의 이유·정체성·물심양면의 이동과 선택의 자유 등을 들고 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기본적인 필요는 한 인간과 가족, 씨족, 민족, 종(種)으로서 살아갈 필요, 살아남을 필요이다. 또한 자연계에 필요한 것도 생각해야 한다.

불교에서는 인간도 ‘커다란 생명연쇄’의 일부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살아 남는다는 것은 인간과 마찬가지로 동식물에게도――적어도 종(種)으로서――중요한 일이다. 햇빛과 물과 영양소의 할당을 포함하여 최소한의 복리가 이들 생명체에게 필요한 것이다. 어쩌면 인간 이외의 생물도 어떤 행복이나 즐거움, 즉 낙(樂, sukha)를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떻게 부(富)를 만들어 내느냐 하는 부의 산출방식의 문제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나 자연환경을 먹이로 삼아서는 안 된다.

 

‘먹이로 삼는다’는 의미는 최악의 경우 그 대상에게서 너무 많은 것을 빼앗은 결과 그들의 번식이나 재생이 불가능하게 되어 멸종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렇게 해서는 생태가 파괴될 뿐만 아니라 발전도 멈출 수밖에 없게 된다. 이처럼 갈퉁은 불교가 발전과 생태에 관한 문제들을 하나의 우산 속에서 훌륭하게 다루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특히 불교의 오계 가운데 두 번째인 ‘불투도계(不偸盜戒)’는 이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를 제공하고 있다고 본다.

‘불투도계’는 단지 ‘남의 것을 훔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것도 아니고 기꺼이 제공받는 것이 아닌 것은 취하지 말라’는 뜻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요한 갈퉁은 녹색단체의 활동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녹색단체가 환경문제를 가장 중요한 동기로 삼아 결성된 단체들이므로 지구생명의 연쇄(連鎖)와 연대(連帶) 등 불교의 연기설에 가까운 사고방식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평가하면서도, 에토스(ethos)가 결여되어 있다는 한계를 지적하고 있다. 그 이유에 대해 녹색단체는 불교와 달리 몇천 년에 걸친 경험으로 축적된 정신의 지도력이 결여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연기론적인 사고방식이 인식론 차원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4) 인권의 존중

요한 갈퉁은 앞서 살펴본 ‘발전’이란 ‘인간성의 성장’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물질의 생산·분배 등 사회구조의 변혁은 인간을 어떻게 발전 향상시킬 것인가 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즉 인권의 기본 개념은 ‘자기실현의 기회를 빼앗기지 않는 것’이며, 이것이 곧 ‘평화’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갈퉁은 내실 있는 인권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제도의 개혁이나 의식 계몽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보고, 인간성을 깊이 탐구하고 끊임없이 발전시킬 철학, 인권을 뒷받침할 수 있는 철학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갈퉁은 인권을 철학적으로 뒷받침하고 정당화하는 접근방법을 다음 세 가지로 나누고 있다.

첫째, 프랑스혁명의 전통과 미국의 독립전쟁, 그리고 유엔에서 채택된 세계인권선언 등 ‘전통’이라는 권위를 방패삼아 인권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둘째,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유’ ‘평등’ ‘이성’을 구비한 존재라는 사상으로부터 연역적으로 인권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셋째, 인권이란 인간과 인간 이외의 자연이 요구하는 것, 즉 ‘생명’의 법리와 기능적으로 관련된다는 사고방식으로 정당화하려는 것이다.

이상에서 첫 번째 것은 서양인의 전통과 편견을 정당화시키는 오류가 있으며, 두 번째 것은 서양역사의 어느 특정한 시점, 즉 계몽주의 시대에 제한된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것들은 인권을 보편적인 것으로 파악하기에는 부족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세 번째 것이라고 보고 있다. 종합적인 인권철학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불교는 다른 어느 사상보다 그것에 접근해 있다. 불교는 종을 초월하고 성을 초월하고, 계급을 초월하고, 인종을 초월하고, 국가를 초월하는 등 인간사회의 구조에 존재하는 일곱 가지 단층선(斷層線)을 모두 초월하고 있다.

이 때문에 불교사상은 보편적인 인권사상이 될 수 있는 커다란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갈퉁은 불교사상이 비폭력에 대한 강한 주장, 자연계를 이기적으로 이용해서는 안 된다는 태도, 교묘한 궤변을 조금도 포함하지 않은 자비의 정신 등 세계적인 에토스를 낳기 위한 풍부한 소재를 구비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갈퉁은 서양인들이 이러한 인권철학――불교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서양의 지적 전통이라는 함정에서 빠져 나오지 않으면 안 된다고 지적하고 있다.

 

5) 평화운동과 여성의 역할

요한 갈퉁은 불교가 ‘생명의 고리’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데에 주목하여 세대를 초월한 사상으로서 높게 평가하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 여성의 존재에 대해 새롭게 자리매김하고 있다. 여성은 이 ‘고리’ 안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불교에서 여성은 ‘고리’ 그 자체와 마찬가지로 근원적인 존재이라는 것이다.

그가 자비의 정신으로 가득 찬 불교의 사회철학 전체가 이 단층선을 메워 주는 것으로 파악한 것은 이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여성은 1980년대 평화운동에 매우 적극적으로 공헌하였다. 남성사회가 가진 폐쇄성, 권력성을 극복하기 위해 확고한 현실감각에 뿌리를 둔 평화사상, 평화운동이 필요하다. 여성들은 인간성 없는 미세하고 분석적인 남성 중심의 논리를 뛰어넘어, 핵·미사일·무기의 수량 등 인간적이고 전체적인 관점에 입각하여 생각하는 능력을 보여 주었던 것이다.

여성해방운동은 인간의 고뇌나 행복과 같은 문제의 핵심에 직접 파들어 간다. 갈퉁은 여성이 여러 가지 추상적 사고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또한 그와 같은 추상적 사고를 반영하기 쉬운 사회의 계층 조직에 사로잡히지 않고 오히려 불교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여성의 이러한 특징으로 인해 여성해방운동의 보다 이론적인 분야인 여성학은 평화연구에 매우 근접해 있다. 평화연구의 이론처럼 여성학 이론에도 동양적인 사고법이 도입되어 있다. 이러한 사고방식이 평화운동에 임하는 여성의 역할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4. 평화를 실현하기 위한 국제협력

1) 유엔은 국제평화의 제도이자 수단

원시불교사상은 국내적으로는 온화한 정책을 펴 통치하려고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국제관계에서도 결코 다른 나라를 침략하지 않고 평화를 지키는 것을 첫 번째 이상으로 삼았다. 《대승대집지장십륜경》에서는 국왕의 임무에 대해 “모든 국토의 백성들을 어루만져 돌보며, 자국을 수호하고 타국의 영토를 침범하지 않는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국왕은 다른 나라와의 수교에 힘써야 하며, 국왕은 복과 은혜가 차례대로 이르러 만국이 환호하는 상태를 이상으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대승불교에서도 나라와 나라 사이에 전쟁을 일으키고 그 전쟁을 통해 이익을 얻으려는 책동은 계율로 엄격히 금지하고 있다. 《범망경》 제11계 ‘통국사명계(通國使命戒)’에서는 “군사를 일으켜 서로 다투고 한량없는 중생을 살해하지 마라. 더구나 보살은 군대 안에 들어가 왕래조차 하지 마라.”고 가르치고 있다. 이처럼 불교에서는 국제관계에서 침략전쟁을 인정하지 않고 평화를 지키는 것을 최고의 이상으로 삼았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국제사회에서 분쟁과 전쟁은 끊이지 않는다. 이에 대해 불교에서는 이상적인 제왕으로 간주하는 전륜성왕(轉輪聖王)을 통해 분쟁과 전쟁을 막고 평화를 수호할 수 있는 세계정부를 구상하고 있다.

 

요한 갈퉁은 불교사상이 정치적 이상주의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국제평화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현실주의보다는 훨씬 현실적인 처방이 될 수 있다고 평가한다. 오늘날 전륜성왕이 통치하는 세계정부의 모습은 국제연맹이나 국제연합(유엔)에서 그 현실적인 실체를 찾을 수 있다. 유엔의 기원에 관한 이념은 1910년대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세계정부론’를 주창하고 나서부터이지만, 윌슨이 구상한 이상적인 세계정부는 아직 실현되지 않고 있다. 요한 갈퉁 역시 국제평화를 실현하기 위해 세계정부 구상을 지지하고 있는데, 그는 그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 자신의 저서 《국제연합, 국민연합(United Nations, United Peoples)》 속에서 유엔의 조직개혁을 위한 10개 항목 등의 제시를 통해 이상적인 세계정부의 건설에 적극 나서고 있다.

2) 국제평화의 실현을 위한 유엔의 제도개혁

요한 갈퉁은 유엔, 넓은 의미에서 말하면 ‘세계정부’를 평화운동의 가장 중요한 제도로 인정하고 있다. 그리고 그 운영원칙에서 세계정부는 국제사회의 우등국가나 그렇지 못한 국가들에게도 똑같이 열려 있어야 함을 강조한다. 그는 유엔에 대해 이해가 일치하는 정부로 구성된 노동조합과 같은 것으로 파악하여, 유엔은 모든 정부, 모든 지역이 자신의 의견을 표명할 수 있도록 조직을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갈퉁은 장기적인 개혁 프로그램으로서 세계정부 내에서 민주주의의 원칙을 실현하기 위해서 유엔을 상원과 하원의 양원제로 하고, 상원은 현재의 ‘유엔총회’처럼 1국 1표제로 하고, 하원의 ‘유엔 국민총회(UNPA)’는 인구비례로 할 것을 주장하였다.

지구에 55억의 인구가 있으므로, 주민 1백만 명마다 1명의 대표를 임명하여 온 가맹국이 적어도 1명의 대표를 확보토록 하면 약 5천 7백 명의 대의원을 갖는 유엔 국민총회가 만들어진다. 이 유엔 국민총회의 시스템에 대해서는 다음 세 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첫째로 유엔 시스템 중 자문적 입장에 있는 기존의 여러 기구에 요청하여 다음 회기에 대비한 유엔의 의제를 평가하는 일을 한다. 둘째로 유엔 국민총회의 구성원 선정을 위해서는 국제 민간조직에 따른 계통조사를 생각할 수 있다. 셋째로 유엔 국민총회의 구성원은 현재 190여 개 국이나 되는 유엔 가맹국이 직접 선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대의제도는 직접제도로 해야 하며, 이 경우 전(全)인도나 유럽연합의 선거를 기준으로 하면 된다. 이러한 중장기적인 개혁 프로그램과는 별도로 당면한 유엔의 개혁 프로그램으로 안보리 상임이사회의 재편, 유엔본부의 이전, 유엔분담금의 상한선 설정 등 세 가지를 들고 있다.

첫째, 적어도 모든 지역이 자신의 의견을 제대로 나타낼 수 있기 위해서는 상임이사국의 규모와 역할을 개혁해야 한다. 각 지역을 대표하기 위해서는 안전보장이사회의 구성국을 25∼30개국으로 확대해야 한다. 상임이사국의 지위라는 개념은 그대로 사용해도 좋으나 다섯 나라에게만 인정되는 거부권은 당장 폐지해야 한다. 어떤 나라가 됐건 몇몇 나라에게 거의 모든 나라에 대한 결정, 그것도 그 나라들의 사활에 관계되는 중요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커다란 권한을 주어서는 안 된다. 이처럼 몇몇 나라에게 특권을 주는 것은 일종의 봉건주의적 잔재로서, 세계민주주의의 정신에 위반되기 때문이다.

둘째, 똑같은 이유로서 유엔본부를 현재의 뉴욕 맨해탄에서 다른 곳으로 이전해야 한다. 그는 새로운 유엔본부는 인구가 세계에서 가장 조밀하고 많은 언어를 사용하는 곳이 좋다고 한다. 이를 충족하는 곳으로서 영국의 조차지였다가 중국으로 복귀된 홍콩을 가장 바람직한 후보지로 제시하고 있다. 셋째, 유엔분담금의 상한선을 설정해야 한다. 영국 속담에 ‘피리를 부는 사람에게 돈을 주는 사람이 곡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는 말이 있듯이, 현재처럼 몇몇 나라가 유엔분담금을 과다하게 부담하고 있으면 그 나라들이 탈퇴하거나 탈퇴 위협을 할 때 유엔의 다수 국가들은 소수 국가에 의해 휘둘리게 되기 때문이다.

 

3) 국제 폭력의 제약과 비군사적 능력의 강화

요한 갈퉁은 국제평화를 실현하기 위해 유엔이 수행해야 할 역할에 대해 폭력의 제약과 비군사적 능력의 강화 두 가지를 제기하고 있다. 첫째로는 국제적인 폭력을 제약하는 일이다. 비록 안전보장이사회에 따라 합법화가 이루어졌다고 해도 폭력에 대한 제약은 해소되지 않는다. 현재와 같은 법률 지상주의, 제재 지향적인 유엔으로는 현실에 필요한 매우 복잡한 여러 현상에 대한 대응을 기대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각국의 정상회담을 그 한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둘째로는 유엔의 모든 비군사적인 능력을 강화하는 일이다. 갈퉁은 자신의 저서 《평화적 방법에 의한 평화(Peace by Peaceful Means)》(1996)에서 유엔의 모든 비군사적인 능력을 강화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이는 유엔을 ‘개발’과 ‘환경보호’를 위해 더 나은 기관으로 만들자는 것이다. 유엔 사무총장을 중심으로 안전보장이사회와 별도로 적절한 수의 사무차장을 두어, 개발과 환경보호 등의 활동을 강화·발전시켜 시스템 전체의 중요한 각 측면에 책임을 지는 형태를 주장하고 있다. 특히 그는 탈냉전시대를 맞이하여 국제문제에서 조정과 분쟁해결 전반에 걸쳐 잘 훈련된 사람들로 구성되는 비폭력적이고 국제적인 평화부대의 창설을 제안하고 있다.

이 평화부대는 군사력을 통한 개입 위주로 이해되어 왔던 유엔의 ‘개입’ 기능을 개선하여 조정을 위한 개입으로 전환하는 것을 의미한다. 갈퉁에 따르면, 이 국제평화부대는 유엔헌장 제6장 ‘평화유지군’에 관한 사항에 규정된 방어장비에 국한하여 장비하며, 탈군사시대의 역할과 사명을 잘 이해하고 국제분쟁과 교육받고 훈련받은 몇천 명, 몇만 명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요한 갈퉁은 1993년 10월 자라고자(Zaragoza) 시에 있는 에스파냐 왕립 육군사관학교에서의 강연에서 비폭력 개입에 필요한 다섯 가지 요소를 다음과 같이 제창하였다.

△ 폭력을 감소시키기 위해 군사수단과 군사기술에 관한 지식, △ 군중의 해산 등 경찰의 여러 수단에 관한 지식, △ 간디의 비폭력·불복종 운동과 같은 비폭력 접근에 관한 지식, △ 분쟁해결의 방법과 실례에 관한 지식, △ 평화유지군의 반수는 여성으로 구성할 것 등이다. 그는 일반적인 평화주의자들이 첫째 요소인 군사적 수단과 기술에 관한 지식이라는 요소에 대해서만 주목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이 주장한 이 다섯 가지 요소는 간디주의와 불교에서 수동주의와 폭력주의의 그 어느 것에도 기울어지지 않는 ‘중도(中道)’적인 방법에서 많이 배운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5. 한국불교의 평화연구와 평화운동을 위하여

요한 갈퉁의 국제평화를 이해하는 방식에서 중요한 것은 매우 불교적이라는 점이다. 불교사상은 국제평화를 논할 때 “평화에 이르는 길은 평화 그 자체”라는 관점을 취하고 있다. 따라서 불교사상은 국제평화를 이루기 위한 제도나 절차보다는 그 전제조건을 강조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그가 불교사상 안에서 현대 서구사상의 세 가지 중요한 구성요소를 발견한 것은 매우 의미 깊은 것이다. 서구사상의 세 가지 중요 구성요소란 첫째 자유주의자가 강조하는 발전의 자유이며, 둘째로는 마르크스주의자가 강조하는 공평과 정의, 그리고 착취의 배제이며, 셋째는 요즘 환경보호론자들이 강조하기 시작한 생태의 보호이다. 갈퉁은 불교사상이 이들 요소 가운데 어느 하나가 아니라 세 가지 요소의 핵심 전부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불교의 탁월성이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특히 그는 불교가 비폭력에 대한 강한 주장, 자연계를 이기적으로 이용해서는 안 된다는 태도, 교묘한 궤변을 조금도 포함하지 않은 자비정신 등 세계적인 에토스를 낳기 위한 풍부한 소재를 구비하고 있다고 높게 평가하고 있다. 이들 모두는 깊은 혼미에 빠진 오늘날의 세계에 절실히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요한 갈퉁은 불교사상의 가르침 안에서만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제도와 수단을 강조하는 서구 정치사회학자의 한 사람으로서 국제평화를 실현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와 그 작동 메카니즘에 대해서 ‘세계정부’의 관점에서 유엔의 개혁 등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했음은 앞에서 살펴본 대로이다.

요한 갈퉁의 불교 이해방식은 어쩌면 동양적 전통에서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낯선 것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서구 정치사회학의 지적 풍토에서 성장한 그가 불교사상 속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한 것이기에, 논리의 전개방식이나 용어나 개념들이 전통 불교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사상과 국제평화주의를 접목하려는 그의 지적 노력은 다음 세 가지 점에서 그 의의를 높이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 서양에서 시작된 평화연구와 평화운동을 한 단계 끌어올릴 수 있는 이념적 틀을 제공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둘째로는 불교계의 입장에서 볼 때 창고에 쌓아놓은 채 방치되어 있었던 불교사상을 현대적으로 갈고 닦는 데 일정한 기여를 했다는 점이다. 끝으로 한국불교계에서 평화연구와 평화운동을 하는 데 필요한 논리를 일정 부분 제공받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끝>

조성렬
서울대 화학과 및 성균관대 대학원 정치학과 졸업.정치학 박사. 일본 도쿄대학, 게이오대학 객원연구원 역임. 현재 국가 안보정책연구소 선임 연구위원. 저서로 <정치대국 일본 : 일본의 정계개편과 21세기 국가 전략><과학기술의 정치경제학>(공저)등이 있다.
저작권자 © 불교평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