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힘든 한 해를 보냈다. ‘코로나 19’로 잠시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는 상황이 계속되면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세계가 날마다 펼쳐지고 있다. 매일 아침 10시가 되면 지역별 발생 인원수를 검색하고 안전 안내 문자를 확인하는 일이 일상이 되어버렸다. 학교 현장에서는 친구들과 서로 눈을 맞추며 토의 · 토론하고 협력하는 대면수업에서, 줌(Zoom), 구글 클래스룸(Google Classroom) 등을 이용한 온라인 원격수업이라는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고 있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상황이기에 경제활동을 비롯한 사회생활의 혼란과 변화는 예상했던 것보다 크게 다가왔다.

이렇게 힘들 때일수록 서로 배려하고 상생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구급차를 막은 택시 기사’ ‘역주행 음주 차량에 치인 배달 오토바이’ 등의 보도를 접하면서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이 조금만 있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라며, 공동체 생활의 질서가 무너지고 배려하는 마음이 실종되었음을 모두가 안타까워한다.

배려의 사전적 의미는 ‘도와주거나 보살펴주는 것’이다. 택시 기사가 구급차 안에 있는 환자의 입장에서 조금만 생각하고, 당장 잘잘못을 따지기보다는 도와주거나 보살펴주는 마음이 있었으면 어땠을까? 사소한 일에도 화를 내며 참지 못하는 아이들을 타이르면서 본보기가 되지 못한 어른들의 모습은 안타까울 수밖에 없다. 언제부터 남이 할 때는 비난하던 행위를 자신이 할 때는 합리화하는 ‘내로남불’이 만연하는 세상이 되어버렸을까.

그런 중에도 가끔 들려오는 기분 좋은 소식에 마음이 편해지고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혈장 치료제 개발을 위해 기꺼이 혈장을 공여하신 분, 중환자 병상이 부족한 안타까운 상황에서 종합병원을 통째로 ‘코로나 19’ 중환자 전담 거점으로 내놓으신 병원장님, 구두 수선공으로 평생 모은 7억 상당의 땅을 위기에 처한 이웃을 위해 아무런 조건 없이 내놓으신 분, 세 든 분의 안타까운 사연을 듣고 몰래 백만 원을 입금하고 건물 임대료를 할인해 어려움을 함께 나눈 마음이 착한 건물주 등의 소식에 가슴이 뭉클해진다. 나보다 어려운 이웃을 먼저 생각하여 자신이 가진 것을 기꺼이 내어놓고 남을 돕기 위해 스스로 움직이는 사람들, 이 마음이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힘이다.

지난해 3월 ‘코로나 19’가 대구에서 무서운 기세로 번져갈 때, 마스크에 눌린 상처에 반창고를 붙인 의료진의 모습과 약국 앞에서 긴 줄을 서면서도 더 급한 사람들을 위해 불평하지 않던 시민의 모습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울산의 한 아파트에서 일어난 대형 화재 현장, 그 긴박한 상황 속에서 서로를 다독이고 양보하여 단 한 명의 인명 피해도 없이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아직 우리 사회가 건강하기 때문이다.

모두가 힘든 요즘, 조용한 산사를 찾아 아이들이 무탈하기를 기도하고 싶었다. 근교에 있는 사찰 중 집에서 그리 멀지 않는 한적한 곳을 찾았다. 경북 청도군 청도읍 화악산에 자리 잡은 적천사.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의 말사로 664년(문무왕 4) 원효 대사가 수도하기 위해 토굴을 지어 창건하였고, 고승 혜철 대사가 수행한 곳으로도 유명한 절이다. 특히 주차장과 마주한 절 앞마당에는 보조국사가 심었다는 천연기념물 제402호 은행나무가 있는데 800년을 지켜온 그 위용이 보는 이를 압도한다. 아내에게 30분만 시간을 달라고 부탁을 하고는 시작 노트를 꺼내 들었다.

 

적천사 앞마당에 우뚝 선 은행나무/ 보조국사 지눌이 주장(拄杖)을 심었다는/ 수백 년 걸어왔으니 참 오래된 밥이다//

이마 위 법당에는 부처님을 모시고/ 그 말씀 수행하는 공양간이 넉넉하다/ 길벌레 수만 마리가 봄처럼 살아가는//

내 그릇 축내지 않고 어찌 남을 품을까/ 떠돌이 곤충에게 집 한 칸씩 내어주고/ 겨우내 일용할 양식 구린내도 향기롭다

— 졸시 〈거룩한 보시〉 전문

 

여름내 무성하던 잎과 열매를 자연과 인간에게 돌려주고, 겨울이면 떠돌이 곤충에게 따뜻한 집 한 칸씩 마련해주는 은행나무. 부처님의 자비를 온몸으로 실천한 것이리라. 노랗게 바닥을 물들이는 은행나무 앞에서 숨이 멎은 듯 한참을 바라보며 혈장 치료제 개발을 위해 기꺼이 혈장을 공여하신 분들과 평생 모은 땅을 아무런 조건 없이 내놓으신 구두 수선공을 떠올렸다. ‘자비’는 남을 깊이 사랑하고 베푸는 것이다. 그것은 크기와 액수에 상관할 바 아니다. 자신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사랑이다.

얼마 전 수업이 끝나고 아이들이 모두 하교하였는데 현관 계단에 앉아 누군가를 기다리는 학생이 있었다. “집에 가야지 예서 뭐하니?” 하니까, “친구가 화장실에 가서 기다리고 있어요. 가방을 들어줘야 하거든요.”라고 하는 것이었다. 목발을 짚으며 힘들게 화장실을 나오는 친구를 보며 ‘참 잘 자랐구나!’ 하는 생각에 가슴이 찡했다. 아이들은 알고 있다. 친구가 어렵거나 힘들면 당연히 도와야 한다는 것을…….

요즈음 텔레비전을 비롯한 언론 매체를 보면, 눈살을 찌푸릴 때가 너무 많다. 사회 지도층이라는 사람들은 서로 싸우거나 불법을 저지르고도 한없이 당당하다.

그래서인지 해마다 연말이면 대학교수들은 우리 사회를 대표하는 사자성어를 선정하는데, 2020년 한 해를 대표하는 사자성어로 ‘아시타비(我是他非)’를선정했다. ‘나는 옳고 남은 그르다.’라는 뜻으로 이른바 내로남불을 의미하는 말이다. ‘코로나 19’ 위기상황에서도 정치, 사회 전반에 걸쳐 소모적인 논쟁이 끊이지 않는 현실을 꼬집은 것이다.

이럴 때일수록 차분하고 냉정하게 현실을 되돌아보고 서로 존중하고 배려해야 한다. 부디 순수하고 착한 우리 아이들이 부조리한 사회와 일부 몰지각한 어른들로 인해 상처받지 않기를, 부처님의 자비가 온 누리에 가득하기를 빌어본다.

 

전 부산 영남중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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