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한국 불교학의 현재와 미래

1. 들어가는 말

불교를 담 너머로 넘어다본 세월까지 치면 얼추 30년이 넘었다. 하지만 아직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문제가 있다. 신앙과 학술 두 영역에 걸쳐 있는 불교를 어떻게 용케 어느 쪽에도 거슬리지 않게 살펴볼 수 있을까 하는 것은 늘 고민거리다. 이런 고민이 비단 나만의 문제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세상 떠난 내 스승은 34년 전에 여러 동학(同學)들과 더불어 한국에서 철학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고민했다. 그리고 그런 문제의식의 결과물을 《한국에서 철학하는 자세들》(1986)이라는 책으로 엮어냈다.

책을 처음 봤을 때, 그 고민의 내용이나 방향에 대한 궁금증보다는 ‘자세’라는 말귀가 낯설고 어색했다. ‘자세’라는 말귀는 ‘한국’과 ‘철학’에 비해 너무 즉물적이고 왜소해 보였다. ‘철학연구방법론의 한국적 모색’이라는 부제가 ‘자세’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겨우 드러내고 있었다. ‘한국적’이라는 말은 민족주의나 국수주의에서 비롯된 것은 아닌 듯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한국적’이라는 말에는 이식된 것을 내재화해야 하는 이들의 절실함이나 사명감 같은 게 있었다.

서구의 역사와 문화에 바탕을 둔 철학이라는 것을 열심히 배워서 이 땅에 이식하기 바빴던 선배 학자들은 어느 순간, 화살이 정곡(正鵠)에서 벗어나면 자기 자신에서 돌이켜 찾아야 한다는 사무침에 도달했던 것 같다. 어느 시점에 그들은 한국에서 철학을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물음에 공감했고 함께 고민했다. 나는 이제 불교학을 두고 똑같은 물음을 던지게 된다. 한국에서 불교학 하는 자세들은 지금 어떠하고 또 어떠해야 하는 것일까.

 

2. 불교학계의 특징과 불교학의 위상

나는 몇 해 전 불교학의 학문적 위상 변화와 관련하여 연구한 내용을 논문으로 발표한 적이 있다. 학문의 발전은 집단지성을 통해 이루어지는데, 학회(學會)는 바로 그 집단지성을 대표하는 학문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연구 내용은 불교 관련 학회의 구성적 특징을 면밀히 검토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불교 관련 학회는 그 외연이 일반적인 학회의 형태와 비교해 봤을 때 파격에 가까울 만치 넓다. 이는 출가 수행자와 불교계 활동가, 불교를 종교로 신행하는 여러 다양한 학문분야의 학자들까지 포섭해내야 하는 필요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외연 확대가 전문성 훼손으로 이어진 것 또한 불가피한 일이었다.

‘국가과학기술표준체계’에서 나타나는 불교학의 학문적 위상은 이를 반영하는 한 사례이다. 학문분야별 위상 변화는 학문분류체계를 통해 살펴볼 수 있는데, 2012년 9월 13일에 개정 고시된 ‘국가과학기술표준분류체계’를 기준으로 보면 국내에서는 자연, 생명, 인공물, 인간, 사회, 인간과학과 기술 등을 주제로 전체 학문분야를 총 33개로 크게 분류하고 있다. 이 가운데 자연, 생명, 인공물에 해당하는 학문분야가 16개이고 인간, 사회, 인간과학과 기술에 해당하는 학문분야가 17개이다.

여기서 인문학 분야라고 할 수 있는 ‘인간’ 영역에는 철학/종교, 역사/고고학, 언어, 문학, 문화/예술/체육 등 5개 영역이 배치되어 있다. 이른바 문사철(文史哲)로 약칭되어 왔던 전통적인 인문학 분류와 별로 다르지 않다. 불교학은 대분류 항목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불교학이라는 독립된 학문분야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불교는 ‘철학/종교’(HB) 분야의 하위 항목에서 겨우 찾아볼 수 있다. 소분류상의 정확한 명칭은 불교학이 아니다. 한국철학 분야 속에 ‘한국불교철학’, 동양철학 속에 ‘불교철학’, 동양종교학 속에 ‘불교’로 제시되어 있다.

이것이 어떠한 의미인가 하면, 불교학은 독립된 학문분야로 존재할 수 없고 철학이나 종교학 분야의 연구주제가 될 수 있을 뿐이라는 뜻이다. 이 기준에 의하면 불교학이나 불교학자는 존재할 수 없다. 철학자이거나 종교학자인 사람이 불교를 연구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이 학문분류체계에 의하면 불교학과나 이와 유사한 학위과정을 마친 연구자는 철학이나 종교학을 수학하지 않았으므로 학술연구자가 아닌 것이 된다.

불교학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학문분야는 신학(神學)이다. 신학은 종교학보다 전통이 깊은 학문분야임에도 불구하고 이 분류체계에 따르면, 중분류인 ‘서양종교/기타 지역종교’의 소분류 항목 가운데 하나로 포함되어 있다. 엄밀한 의미에서 이제 신학자는 있을 수 없다. 종교학자만 있을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신학 학위과정을 마친 연구자는 이제 학자가 아님을 인정하든지 아니면 자신을 종교학자라고 기망할 수밖에 없다. 이제 학술 세계에서 불교학이나 신학은 없다. 이것이 ‘국가과학기술표준분류체계’를 근거로 본 엄연한 현실이다.

국가과학기술표준분류체계가 행정가들의 탁상공론 결과에 불과하다든가 서양 학문의 시각이 반영된 것이라고 평가할 수도 있다. 불교학이 엄연히 존재하는 한국의 실정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지 못한 것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분류체계가 행정적 필요성에서 비롯되었을 수는 있지만, 학계와 공청회 등을 통해 다양한 의견을 취합한 결과물이라는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이 분류체계는 불교학에 대한 학술연구자들의 견해가 반영되어 있는 것이고, 학술연구자들이 불교학을 독립된 학문분야로 볼 수 없다는 데 대해서 별 이견이 없다는 뜻이다.

국가과학기술표준분류체계로 봤을 때, 불교학계의 정의는 ‘불교를 즐겨 연구주제로 삼는 철학자나 종교학자들의 학술 모임’이 될 수밖에 없다. 이것이 국내 학술연구자들이 생각하고 있는 불교학의 현주소라는 사실을 어렵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이런 학문적 기준을 적용하면 철학, 종교학의 범위 안에서 그러한 연구방법론으로만 불교를 연구하는 것이 허용된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철학이나 종교학과 무관하게 불교학만 별도로 연구하고 교육하는 기관이 엄연히 존재한다. 이뿐만 아니라 철학도 아니고 종교학도 아니고, 심지어 불교학도 아니지만 불교를 주제로 한 학술 행위도 이루어지고 있다. 이런 황당한 상황이 불교학의 정체성을 더욱 혼란스럽게 한다.

그래서 지금 또다시 되묻게 된다. 지금 우리는 불교를 어떻게 학술연구 대상으로 삼아야 하는가. 어떤 방식으로 불교를 연구해야 학술적인 연구가 되는가. 한국에서 불교학 하는 자세는 지금 어떠하고 앞으로 어떠해야 하는가.

 

3. 학술과 신앙의 혼란

나는 앞서 한국 불교학계의 구성적 특징을 세 가지 정도로 파악하였다. 첫째는 일반적인 학계와 비교해서 그 인적 구성 현황이 상당히 다르다는 점, 둘째는 불교를 개인적 관심과 신앙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여러 방면의 학자들이 참여하고 있다는 점, 셋째는 전문 학자가 아닌 불교계 활동가들이 다수 참여하고 있다는 점 등이다. 이러한 특징은 학회의 외연을 넓히고 현장성을 반영하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기는 하지만, 학문과 종교의 경계를 흐리게 함으로써 학술적 전문성을 훼손하는 부정적인 측면 또한 무시할 수 없다.

‘학계’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학문 연구 및 저술에 종사하는 학자들의 활동 분야’로 정의된다. 학계의 영어 표현(academia, acade-mic world, academic circles)을 살펴보면, 학계라는 개념은 아카데미(academy) 즉 정규 연구 및 교육 기관과 관련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학계’를 좀 더 구체적으로 정의하면 ‘학술적인 연구와 교육을 목적으로 마련된 정규 교육기관에서 연구 및 교육에 종사하는 이들의 모임’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현재 국내의 불교 관련 학회는 불교를 전공분야로 하는 전문 학술연구자가 아니더라도 불교에 관심만 있다면 누구라도 학계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구조로 되어 있다. 이는 일반적인 학회 회원의 자격 기준으로 봤을 때 파격에 가깝다. 이러한 특징은 학회의 외연을 확대하여 많은 학자들을 참여토록 해서 포괄적이고 다양한 연구성과를 내기 위한 의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또 불교는 출가 수행자의 수행 경험까지도 학술적으로 포섭해 내야 하고, 불교학의 연구대상에서 현재의 불교계를 배제할 수 없다는 학문적 특수성도 있기 때문인 것 같다.

현재 국내의 불교 관련 학회는 사실상 ‘불교계’와 그 범주가 구별되지 않을 정도로 외연이 넓어져 있다. 불교학계는 그 규모가 확대되는 반면에 ‘학계’의 경계는 점점 희미해지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런 문제점은 간혹 지적된 바 있고 대안도 제시되었지만, 아직 뚜렷한 대책이 정립되지는 못하고 있다. 불교학계와 불교계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음으로써 빚어지는 문제점은 단순하지 않다. 학술적 사안과 비학술적 사안, 학술 활동과 신행 활동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그로 인해 처신이 곤란해지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학술적인 관심에서 발표한 연구결과가 그 의도를 의심받거나, 뜻하지 않게 논쟁의 당사자가 되기도 한다. 특정 인물을 주제로 한 연구주제인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국내 불교학계의 모호한 경계성을 보여주는 한 사례로 사단법인 한국교수불자연합회가 있다. 이 단체는 불교를 신앙으로 하는 교수들의 모임이다. 불교를 학문적으로 천착해온 교수들이 소수 포함되어 있기는 하지만, ‘불자’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단체의 성격은 기본적으로 신앙 모임이고 종교 활동을 하기 위한 모임이다. 학술적으로 불교를 연구하기 위한 조직이 아닌 것이다. 이러한 성격의 단체에서 학술지 《한국교수불자연합학회지》를 발간하고 있다. 이 학술지는 한국연구재단에 등재된 학술지로 공인되어 있기까지 하다. 이는 신행 단체가 학술 활동을 함으로써 학술과 신앙 사이에서 혼란을 일으키는 경우이다.

이와 대비되는 사례도 있다. 특정인을 거명하는 것이 어떨지 모르겠지만, 일면식도 없어 차라리 편하게 얘기할 수 있을 것 같다. 서강대 물리학과 박영재 교수는 누구나 인정하는 재가 수행자다. 그의 전공은 입자물리학인데 〈자기홀극과 큰통일 이론〉이라는 논문으로 1983년에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바로 그 해부터 교수 생활을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근대 선지식인 효봉 선사의 지원으로 1965년 선도회를 결성해 일반 불자들에게 참선을 지도했던 종달 이희익(李喜益, 1905~1990) 노사의 제자로 현재까지 선도회 지도법사로 활동하고 있다.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하는 얘기겠지만 그를 두고 ‘간화선 달인’이라는 수식어도 따라 다닌다. 학자로서 이력이나 수행 경력으로 봤을 때, 그가 불교 특히 선(禪)을 주제로 한 논문을 발표한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하나도 없다. 어쩌면 어떤 선학자의 논문 못지않은 주목과 평가를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박영재 교수는 선을 주제로 칼럼류의 글은 쓸지언정 논문 형식의 글을 발표하거나 학술대회에서 발표 행위를 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그의 학술 행위는 물리학의 범위를 한 치도 벗어난 적이 없다. 이런 행적만 살펴볼 때, 그는 학술과 신앙(수행) 생활을 명확히 구분할 줄 아는 인물인 것 같다. 그의 행적은 자신은 불교학자도 선학자도 아니며, 선 수행자라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나는 이런 행적이 학술의 길과 신앙(수행)의 길을 명확히 구분하여 병행하는 전범(典範)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학자는 하고 싶은 얘기를 하도록 허락받은 사람이 아니다. 믿는 것을 말하도록 허락받은 사람도 아니다. 섬기거나 소망하는 것을 말하도록 허락받은 사람은 더더욱 아니다. 학자는 전공 분야의 전문지식을 바탕으로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기준과 근거를 가지고 말해야 한다. 그게 학자의 역할이고 본분이며, 그럴 때만이 그의 발언은 학술적 가치를 갖는다. 학문분야가 불교와 무관하지만 박사학위가 있고 교수 직함을 가지고 있으면서 불교를 신앙하거나 불교계 현장에서 활동하고 있으니 불교를 주제로 학술적 발언을 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학술과 신앙의 경계는 무너지고 어느 한쪽도 온전치 못하게 될 것이다.

4. 승가교육과 대학교육의 혼재

한국에서 불교학 하는 자세들과 관련해서 또 하나 살펴볼 사안은 교육 시스템이다. 지난 2018년 ‘조계종 승가교육 개선방안’ 종책 세미나에서는 승가대학의 안쓰러운 속내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조계종은 기본교육기관으로 중앙승가대, 사찰승가대학, 기본선원, 동국대를 운영하고 있는데 특히 사찰승가대학의 경우 정원 기준을 충족하는 곳이 극소수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기조발표 내용에 따르면, 전국 14개 사찰승가대학 가운데 학년별 정원 10명 이상의 규정을 충족하고 있는 승가대학은 단 2곳에 불과하다. 중앙승가대도 120명 입학 정원 가운데 조계종 소속 승려는 30명에도 미치지 못한다. 이런 가운데 사찰승가대학에 입학하는 학인 수는 매년 큰 폭으로 줄어들고 있다. 지금의 추세라면 수년 내에 사찰승가대학에 입학하는 학인이 1명도 없는 곳이 속출할 수 있다.

물론 학인의 숫자가 강원과 선원의 흥망성쇠를 보여주는 결정적 지표는 아니다. 규모가 작다고 해서 눈 밝은 선지식이 나오지 말란 법도 없다. 그럼에도 동국대를 조계종 기본교육기관에서 제외하자는 의견이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나오는 이유는, 단순하게 학인 숫자로만 보면 승려교육이 제로섬게임이라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동국대로 학인이 모이면 사찰승가대학이 쇠하고, 사찰승가대학이 흥하려면 동국대로 가는 길을 제한해야 한다는 것을 누구나 다 아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학인들은 동국대를 기본교육기관으로 선호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2010년 학인들의 모임인 석림회에서 발표한 ‘동국대 승려 기본교육기관 제외를 철회하라’라는 제목의 성명서를 보면, 지방승가대학 졸업 후 중앙승가대나 동국대로 진학하는 스님들이 2010년 4월 현재 172명으로 기본교육과정을 무려 8년간 중복 이수하는 심각한 비효율이 발생했다고 한다. 이러한 현상은 지방 승가대학(강원)의 교육을 이수해도 국가법령이 규정한 학위를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급기야 2016년 7월 14일 구례 화엄사 화엄원에서 개최된 조계종 교구본사주지협의회 회의에서는 지방승가대학은 출가자 감소와 기본교육기관의 증설에 따른 학인 수 감소 등으로 운영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서, 지방승가대학을 동국대와 중앙승가대의 분교 형태로 변경해 정규대학으로 인가받는 방안을 검토해 줄 것을 촉구하는 의견이 제시되기까지 했다. 이 정도에 이르면 승가교육이 세속의 대학교육체계에 완전히 종속된 것으로 봐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과연 대학이라는 교육기관이 승가교육에 부합하는 교육 시스템인가 하는 본질적인 고민을 할 수밖에 없다. “1994년 종단개혁 이후 승가교육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함으로써 승가교육 개혁에 관한 논쟁이 일게 되었다. 주된 논점은 ‘강원은 수행도량이며 학인은 수행자’라는 ‘대학교육 무용론’을 주장하는 전통적인 입장과 ‘승가교육은 퇴보했다’는 ‘현대적인 불교교육의 수용’을 주장하는 진보적인 입장의 차이로 정리할 수 있다.” 이러한 문제 제기는 아직도 명확히 합의되지 않고 있는 것 같다.

대학이 승가교육을 주로 담당하게 되면서 나타난 현상 가운데 하나가 학위취득자 양산이다. 교계신문에서는 얼마 전부터 “박사스님 시대의 허와 실”이라는 주제로 연재보도를 하고 있다. 보도내용에 의하면 박사학위를 취득한 출가자의 수는 1990년대부터 폭발적으로 증가한 것으로 나타난다. 2016년 현재까지 박사학위를 수여 받은 출가자는 총 165명이며 이 가운데 국내학위 취득자가 106명, 해외학위 취득자는 59명으로 확인된다. 하지만 이런 이면에 어두운 구석도 보인다.

앞서 출가자의 박사학위 취득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는 보도와 더불어 박사과정에 입학 후 실제 학위를 취득하는 출가자는 저조하다는 사실도 보도되고 있다. ‘70~80%의 스님들이 박사학위 취득을 포기하거나 박사수료에 머무르고 있다’는 자조 섞인 이야기도 나온다. 이런 보도 내용을 미루어 본다면, 실로 엄청나게 많은 출가자들이 학위과정에 진입해 있거나 진입할 의사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박사학위를 취득해도 문제다. 학위를 소임을 맡기 위한 수단처럼 인식하거나 통과의례로 여기는 분위기가 있어 출가자들의 연구 역량과 학문적 수준이 전체적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문제점도 지적되고 있다. 또한 이러한 가운데 학문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출가자들에게 종립대학들이 박사학위를 남발하는 것 또한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

얼마 전 해인사에서 열렸던 전국선원수좌회의 좌담회 내용이 주목을 끌었다. 현재 선원이 안목 교환이나 본래 선원 교육방식과는 동떨어져 있다는 자성이 있었고, 소참과 조사어록 강독 등의 시간을 가져 제대로 된 선원 교육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지금 현재 선원이 제대로 운영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대놓고 말은 못하지만, 누구나 다 아는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수행공동체인 선원이 단지 먹고 자는 것을 해결하는 생활공동체로 변질됐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수좌회 내부에서 나왔으니 다행스러운 일이다.

좌담회에서 오간 말에 공감하면서도 아쉬운 점이 없지 않다. 선원에서 선 교육이 제대로 되지 못하는 구조적인 문제에 대한 지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승가 내부에서 이뤄져야 할 승가교육이 동국대 같은 세속의 대학 교육제도에 의탁한 지 이미 오래되었다. 승가교육이 대학 교육제도에 의탁하고 있으니 강원과 선원이 온전치 못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이다. 이러한 승가교육 방식이 지속되는 한, 강원과 선원의 정상적인 운영은 물론이고 유지 자체도 불가능해지고 말 것이다.

승가교육은 승가 내부에서 완결할 수 있는 교육체계를 시급히 갖추어야 한다. 교수자든 학생이든 간에 출가자들을 모두 승가교육체계 내부로 흡수해야 한다. 그래야 강원도 살고 선원도 살고 대학도 살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교수 되고 싶은 스님, 박사 되고 싶은 스님만 점점 많아지고, 정작 본진인 승가는 속에서부터 허물어지고 말 것이다.

승가라는 출가자 커뮤니티, 선원이라는 수좌들 커뮤니티를 되살려내야 한다. 승가에서 불교와 선(禪) 공부를 대학교육에 의탁하고 있는 현상 자체가 불교 논리상 너무 기이한 현상이다. 이 문제는 수행자 개개인에게 권유하거나 요청해서 되는 게 아니다. 강원과 선원의 구조와 체계를 이러한 목적에 부합하도록 만들면 자연히 해결되는 사안이다.

출가자가 대학에서 학위를 취득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도록 승가를 재정비해야 한다. 석박사 학위라는 게 대학 문을 나서면 사실 별 필요가 없는 자격증이다. 학위과정에 진입한다는 것은 교수가 되고자 하는 것일 텐데, 교수라 해도 세속의 여러 직종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 출가자가 대학에서 교수를 하는 것이 계율에 비추어 타당한지, 계율은 관두고서라도 그것이 한국 승가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다 내려놓고 함께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대학이 승가교육을 담당하게 되면, 대학의 문제가 승가로 전이되거나 공유될 수밖에 없다는 문제점도 있다. 승가의 기본교육 과정을 정규대학의 교육 시스템에 맡기고 있으면서 세속적 교육관이나 교육 방향을 거부하기는 어렵다. 단적으로 현재 대학사회는 학령인구의 급격한 감소에 따른 위기의식 속에서 충원율, 중도탈락률, 취업률과 같은 엄혹한 평가지표를 들이대며 반교육적이고 비교육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일선 대학에 대한 정부의 영향력과 지배력은 점점 더 집요하고 전면적으로 엄습하고 있다. 대학에 대한 정부의 압박 강도가 더욱 높아지면, 정규대학 내의 승가교육 관련 학과들이 언제까지 열외가 될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그리고 이렇게 열외로 취급받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하는지도 다시 생각해볼 문제다. 어쨌거나 현재 승려 기본교육기관으로 지정된 정규대학 및 관련 학과는 정규교육과정에 속해 있으면서도 열외가 되는 애매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세속의 교육체계는 눈 밝은 걸출한 수행자를 길러내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세속의 교육제도는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표준화된 교육방식을 통해 일정한 수준의 인간을 길러내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예를 들면 의과대학은 표준화된 의학체계를 교육하여 일정한 수준의 의료행위를 할 수 있는 다수의 의료인을 양성하는 게 목적이지, 편작이나 화타를 키워내는 곳이 아니다. 이러한 대학 교육체제가 과연 종교인 혹은 수행자를 교육하는 데 적합한 것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세속의 교육 시스템은 체제 순응적이고 값싼 산업 인력의 양산이라는 기조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종립대학들은 설립이념과 특수성을 명분으로 승가교육 관련 학과를 지켜왔지만, 대학 평가를 적용하는 데에서 유보 내지는 열외를 겨우 인정받고 있을 뿐, 평가 기준 자체에 대한 전면적인 문제 제기 내지 부정으로까지 이어지지는 못하고 있다. 이와 같은 대학이라는 기관이 승가교육 기관으로 과연 적합한지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5. 승가교육과 불교학 연구자의 상생 방안

승가교육이 승가 내부에서 완결될 수 있어야 하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세속의 대학 교육체제에 의탁하고 있는 현 상황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얘기일 수도 있다. 하지만 출가자들이 중복 교육의 비효율을 감내하면서 동국대로 향하는 이유가 존재하는 한, 동국대를 승가 기본교육기관에서 무작정 제외하는 것은 별 효과가 없다는 것이 이미 확인되었다. 제도권 대학은 국가법령이 규정한 학위 수여 권한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세속 대학의 학위가 승가 생활에 어떤 이점을 주는지는 자세히 알지 못하지만, 세간의 권능은 세간에서만 유효해야 할 것이다. 세간의 권능이 출세간에까지 뻗쳐 있다면, 그것은 세간이 출세간을 복속시킨 것이든 출세간이 세간에 무릎 꿇은 것이든 둘 중에 하나라고밖에 달리 생각할 길이 없다. 그러니 우리는 여기서 다시 묻게 된다. 지금 세속의 대학교육 시스템이 승가를 점령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승가가 대학교육 시스템에 알아서 무릎을 꿇고 있는 것인가.

불교종립대학에는 불교 관련 학과나 단과대학이 있어야 한다고 당연시할 필요는 없다. 종립대학은 해당 종교 관련 학과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부터가 이미 종교와 학문 그리고 교육을 혼동하고 있다. 종학(宗學)으로서 불교를 연구 교육하는 학과나 단과대학이 정규대학 교육체제 속에 있는 상태가 지속되면, 승가교육의 대학 종속성은 날로 심화할 수밖에 없다.

종교단체에서 설립한 대학이면서도 해당 종교를 연구 교육하는 기구를 두지 않는 경우를 얼마든지 볼 수 있다. 교수초빙 공고에서 모든 분야 공통으로 “본교 건학이념에 부합되는 기독교인”을 명시하고 있고, 담임목사 날인을 포함한 신앙기록확인서까지 제출하도록 요구할 정도로 독실한 기독교 정신을 내세우고 있는 숭실대학교는 학부 과정에서 기독교 관련 학과를 두고 있지 않다. 예수회 전통 위에 설립한 기독교 계열 대학인 서강대학교도 신학과가 없다. 오히려 ‘국가과학기술표준분류체계’상에 학문분야로 정확히 자리매김되어 있는 종교학과를 두고 있다.

불교와 직접 관련된 학과를 설치하지 않더라도, 불교를 학술연구와 교육에 담아낼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불교철학 분야가 강한 철학과, 불교문학에 특성화된 국문과, 불교사 연구자가 많은 사학과, 전통건축 관련 교수가 많은 건축과 형태로 학과를 특성화해 나가는 방법도 그중 하나이다. 그리고 인도 고대어를 비롯해서 불교 고문헌에 특화된 불교문헌학과나 불교서지학과를 두어, 예전 유럽의 가톨릭 신부들이 불교 고문헌을 연구했듯이 평생 한눈팔지 않고 불교 고문서만 들여다보겠다고 마음먹는 인재를 양성하면 될 것이다.

불교종립대학이라도 종학으로서 불교를 연구 교육하는 학과는 학부과정은 물론이고 석박사 과정도 개설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일까. 승가 교육을 오롯이 승가 내부에서 완결할 수 있도록 구조화하면 더 좋지 않을까. 출가자 교수와 학인들이 승가교육 시스템 내에서 자신의 연구와 교육 역량을 온전히 발휘하고, 이것이 승가 내부에서 교육 전통으로 면면히 이어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승가교육이 대학교육 시스템에 종속되지 않을 것이다.

승가교육을 굳이 대학이나 석박사 학위과정 형태로 운영할 필요는 없다. 승가교육총림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선원, 강원, 율원 교육을 통합한 전통 승가교육 체제를 골격으로 하는 새로운 승가교육 기관을 만들면 된다. 여기에 전국의 교수아사리와 학인들이 참여하여 종학으로서 불교 연구와 교육이 가능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교육부의 인가에 목맬 일도 아니다.

이런 상상을 해 본다. 대한불교조계종단의 승가교육을 전담하는 기관으로 ‘승가교육총림’을 설치하고 대전시나 세종시 정도에 둔다. 그곳에 전국의 교수아사리와 학인들을 집중시킨다. 총림 내부에는 교육연구 시설과 후생동까지 갖추고 학생들로 하여금 학비는 물론이고 어떤 비용의 부담도 없이 기본교육과정 6년과 전문교육과정 4년 정도를 이수하도록 한다. 총림의 교수아사리들은 대학교수보다 더 좋은 대우를 받으며 연구와 교육에 전념한다. 전국의 대학에서 학위를 받은 연구자들은 대학보다 승가교육총림에 교수아사리로 초빙되는 것을 영광으로 여긴다. 방학 즈음에는 대강백의 불경 해설을 귀동냥이라도 하려고 대학교수와 대학원생들이 총림에서 개설하는 특강 과정에 몰려든다. 이런 상상이 허무맹랑한 것일까?

가까운 사례가 있다. 흔히 지곡서당이라고 불리던 태동고전연구소는 서당식 한문 교육의 하나로 장안의 우수한 학생들을 끌어들였다. 정규 교육기관도 아니고 당연히 학위도 자격증도 주지 않는 곳이었다. 지곡서당이 학생들에게 줄 수 있는 혜택이라고는 몇 명이 함께 쓸 수 있는 숙소와 한 달 용돈 정도에 불과한 소액의 장학금이 전부였다. 그런데 그곳에 한문 하나 제대로 배워보겠다고 일류대학 학생들이 앞다투어 입학했다. 그들은 3년 동안 함께 기숙하고 스스로 밥해 먹으며 한문을 배웠다. 한학자 한 사람이 제도권 바깥에서 일류대학의 학생들이 학교를 휴학하고 공부하러 오는 교육기관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그는 세상을 떠나면서 “나를 기억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유언했다고 들었다.

승가교육 체계를 구축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론이야 여건과 환경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핵심은 그 체계를 정립해 나가는 방향과 기준일 것이다. 제도권 교육에 의지하지 않고 승가교육은 승가 내부에서 완결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종학으로서 불교교육은 승가 내부에서 완결하고, 불교를 주제로 한 학술연구는 국가과학기술표준분류체계상의 학문분야인 철학, 종교학, 사학, 서지학 등의 분야에서 진행하면 된다. 그것이 출가와 재가가 상생하고, 종교와 학문이 상생하고, 승가와 대학이 상생하는 길일 것이다.

중앙승가대학 같은 기관이 승가교육총림 같은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 이 기관은 1979년 중앙불교승가학원이라는 명칭으로 서울 보현사를 학사로 하여 첫 입학생 60명으로 시작하였다. 그리고 다음 해에 중앙승가대학교로 개칭하였고 이후 영화사, 개운사로 학사를 이전했다. 중앙승가대학 홈페이지에 소개된 약사(略史)를 보면, “설립 이후 10여 년간 비인가 대학으로 존립하던 본교는 1989년 7월 11일 당시 문교부로부터 각종학교인가를 취득함으로써 본격적인 정규교육기관으로서의 위상을 지니게 되었다. 본교의 정규대학 인가는 현대 한국불교사에서 기념비적인 사례로 평가될 만큼 의미 있는 일이었다.”라고 적혀 있다.

중앙승가대학 자체적으로는 물론 자랑스러운 역사겠지만, 승가 내부 사정을 잘 모르는 내 생각으로는 출세간의 승가교육기관이 왜 세간의 인가를 받으려고 애썼는지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중앙승가대학의 사례는 승가교육이 세간의 제도권 교육에 종속되어 온 근대 이후 승가교육의 한 단면처럼 보여서 오히려 안타깝다.

 

6. 나가며

한국에서 불교학 하는 자세들에 대해 말하는 것은 많이 부담스럽다. 불교 언저리에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이들의 개인적 인연 관계가 너무 복잡하고 제각각이어서 그 모든 것을 다 담아낼 수 없고, 어떻게 말하든 누군가의 마음을 불편하게 할 수밖에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분명 이건 아닌 것 같은데 아닌 것 같다고 말하지 못하는 상황도 견디기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한국의 불교계 혹은 불교학계는 학술과 신앙의 경계가 너무 희미하다. 마치 누군가 의도적으로 그렇게 기획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조차 들 지경이다. 학계는 불교계의 현장 동원력과 재력이 아쉽다. 불교계는 학계에 그나마 조금은 남아 있는 공신력과 학술적 권위가 아쉽다. 이 두 가지 아쉬움은 대학이나 단위 사찰의 각종 행사에서 서로 만나게 되고, 그래서 매번 불교(학)계 행사는 학술행사인지 종교행사인지 불분명해진다. 이렇게 지속된다고 해도 당장 별문제는 없겠지만, 이런 상황이 오래되면 승가와 학계가 입는 내상은 깊어질 것이다.

학술과 신앙을 교묘하게 혹은 부지불식간에 뒤섞으면 안 된다. 그렇게 되면 학술과 신앙 양쪽 모두가 상한다. 학술적 발언은 종교적 신심 앞에서 답답해지고, 신심은 학술적 논리 앞에 당황스러워진다. 그래서 서로 간에 반복되는 실망과 답답함만 남게 된다. 불교를 주제로 한 학술기획은 정확하게 학술적 테두리 안에서 학술적 시각에서만 행해져야 한다. 이런저런 이유로 신행 생활에 전념하는 이들이나 수행자 혹은 불교계 현장 활동가 등을 학술대회에 끌어들이지 말아야 한다. 또 불교계 종교행사에서는 불필요하게 학자들을 초청하거나 학술대회를 행사 프로그램의 하나로 억지로 밀어 넣지 말아야 한다.

선원은 물론이고 강원과 율원 등으로 이루어진 승가교육체계에 대해 불교계 전체가 이제 깊이 고민해 봐야 한다. 강원의 연구와 교육 시스템은 대학보다 훨씬 오래된 교육체계이다. 다만 문제는 종단의 연구와 교육역량이 강원이나 선원으로 집중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교육은 백년지대계라는 말을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 현재 승가교육이 제대로 되고 있지 않은데 미래 승가의 모습이 지금보다 나아지기를 바랄 수는 없다. 마음을 다잡고 출가한 이들을 다시 세속으로 돌려보내 대학에서 공부하고 수행하도록 하는 이런 황당한 승가교육 방식으로, 한국불교가 얼마나 더 버텨낼 수 있을지 염려스럽다. ■

 

박재현 upaya2013@gmail.com

서울대학교 대학원 철학과에서 〈한국불교의 간화선 전통과 정통성 형성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주요 저서로 《깨달음의 신화》 《한국 근대불교의 타자들》 《만해, 그날들》 《화두, 나를 부르는 소리》 등이 있다. 현재 동명대학교 선명상치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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