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눈을 뜨면 제일 먼저 세안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몸을 청결히 하고, 새로운 기분과 마음으로 일상을 여는 것이다. 그런데 가만히 하루를 들여다보면 우리는 비단 몸만 치장하는 것이 아니라, 주거 및 활동 공간도 끊임없이 정리정돈하고, 때로는 자신의 취향과 현대적 감각에 맞도록 정성 들여 환경을 장식하기도 한다.

코로나19가 발생한 지 벌써 10여 개월이 다 되어가는 요즘, 제한된 사회활동으로 인하여,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보내고 있다. 원치 않았던 ‘집콕’ 생활로 인하여, 사람들은 어느 때보다 집안 내부 인테리어에 관심이 높다. 그동안 시간적 여유가 없었던 사람들은 이 시기에 내부 공사를 하거나, 또는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아도 소품들을 이용하여 주거공간에 생동감을 주면서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제한된 외부활동에 대한 보상심리의 작용이라고 일축해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조금 더 깊이 생각해보면, 우리가 자신을 포함하여 주변을 치장하거나 장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인간은 근본적으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심성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 아닐까? 
이 소박한 의문에 대하여 불교적 관점으로 들여다보자.

불교에서는 치장이나 장식에 준하는 행위를 ‘장엄’이라고 하는데, 일상에서 장엄하는 이유는 단점을 보완하고, 더 잘 보이기 위해서라고 한다.

산스끄리뜨에는 ‘장엄’을 두 가지 용어로 구분하는데, 뷰하(vyūh)와 아람까라(alaṁkāra)이다. ‘뷰하’는 엄식포열(嚴飾布列)한다는 의미이며, ‘아람까라’는 붓다의 지혜 작용에 의해 불신(佛身)과 불국토가 장엄된 것을 말한다. 

우리가 자신과 외부환경을 치장하는 것은, 단정하게 장식하고 배치하는 ‘뷰하’이다. 그런데 개인이 아닌 관계성에서 ‘뷰하’는 어떻게 작용하는 것일까? 

장아함경에는 남편이 아내를 공경하는 다섯 가지 법이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아내가 때에 따라 몸치장을 할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남성은 경제력을 갖춰야 하고, 여성들의 미(美)에 대한 추구가 약간의 사치라고 여겨질지라도 인정하여 주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남편뿐만이 아니라 아내도 시부모와 남편을 모심에 있어서, 다섯 가지 착한 일을 해야 한다. 《옥야경》에서 말하기를 “아내는 마땅히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며, 머리를 빗질하고 의복을 정돈하고, 얼굴을 깨끗이 씻어서 때가 없게 한다.”라고 하였다. 부지런함과 청결, 그리고 아름답게 가꾸는 것이 아내의 의무인 것이다.

즉, 남편과 아내 사이의 ‘치장’은 상호 간에 베풀고 지켜야 하는 덕목이지만, 진정한 의미는 가정의 화목을 위한 것이며,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의 출발점이다. 

이와 같이, 치장이나 장식이 개인적으로는 단아함이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단순한 행위에 머물 수 있지만, 관계성에서는 의미가 발전하고 심화된다.

한편, 불신장엄과 불국토장엄인 ‘아람까라’는 불교 경전에서 어떻게 설명하고 있을까?
우선, 불신장엄은 장아함경 등에서 “32상 80종호로 그 몸을 장엄하셨는데, 이를 본 중생들은 모두 환희심을 내고 붓다의 발에 머리를 대고 예를 올린다.”라고 하여, 32상 80종호를 가장 대표적인 불신장엄으로 상정한다. 이는 붓다가 3아승기겁 동안 수행한 결과로서의 장엄이다.

그런데 《불설빈바사라왕경》에는 “세존께서는 왕이 오는 것을 보시고 다섯 가지 모양을 나타내셨는데, 이른바 정수리 모양, 일산 모양, 마니(여의주) 모양, 불자(拂子) 모양, 보검 등의 모양으로 붓다의 몸을 장엄하셨다.”고 하여, 붓다가 국왕을 만나실 때는 32상 80종호 이외의 장엄을 하셨다고 한다. 물론, 이 5가지 장엄은 중생들과 같은 몸치장이 아니라, 국왕이 붓다에게 존경과 귀의심을 일으킬 수 있도록 하는 상서로운 장엄이다. 즉, 불신장엄은 32상 80종호와 같이 일체중생을 위하여, 때로는 특정인을 위한 상서로운 장엄으로 나타나고 있다. 

다음, 불국토장엄은 불교의 수많은 교파 가운데, 장엄과 가장 밀접한 정토교에서 특히 강조하고 있다. 정토삼부경 등에 묘사된 극락세계는 유리의 땅, 칠보 나무, 칠보 연못, 팔공덕수, 보배그물 등으로 이루어져 있고, 산들바람과 극락새는 항상 삼보를 찬탄하는 소리를 들려주는 등, 미묘한 청정함과 최상의 아름다움으로 장엄된 불국토이다.

《관정경》에서는 “국토를 청정하게 장엄하는 일은 한량없는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무량한 이익을 얻게 하기 위함이요, 모든 고통을 제거하여 안온을 얻게 하기 위함이다.”고 하여, 불국토 장엄의 목적이 중생들의 이익과 이고득락(離苦得樂)을 위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보살선계경》에서는 “중생이 청정한 장엄을 봄으로 인하여, 중생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발할 수 있다.”고 하여, 궁극적으로 장엄은 중생들이 보리심을 발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간단히 정리하면, 불교의 장엄은 본래 중생이 소유하고 있는 청정심을 회복하기 위한 것이며, 생사윤회에서 해탈하기 위한 발보리심의 방편이라고 할 수 있다. 
 
너무나 당연하고 평범했던 일상을 두 손아귀에 움켜쥐고는, 아직도 우리를 혼란스럽게 뒤흔들고 있는 코로나19……. 대중 매체에서는 연일 포스트코로나 시대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것도 다만 예측일 뿐, 끝을 알 수 없는 현실이 더욱 갑갑하기만 하다. 

장엄이 본성의 회복을 위한 것이듯, 치장 또한 관계성에서는 화합과 화목, 배려, 존경 등의 상위적 의미로 작용하는 것을 확인하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현재의 집콕 생활에서 내부를 치장하는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굴복하지 않고 생존하려는 강인한 생명력이 뿜어내는 에너지이며, 평범한 일상으로 복귀하고자 하는 간절한 염원이고, 절실한 희망의 행위인 것이다.

벌써 나뭇잎들의 가을 치장이 시작되었다. 온 세상을 마치 극락세계처럼 장엄하게 될 올가을은, 코로나를 이겨낸 인류에게 주는 선물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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