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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을 남기지 않는 삶 / 명법
[84호] 2020년 12월 01일 (화) 명법 해인사 국일암 감원

오랜만에 내린 가을비에 관광객으로 붐비던 가야산이 다시 적막해지고 촉촉이 젖은 단풍으로 산색은 투명하게 빛난다. 올여름 내내 비가 내리더니 가을 석 달은 비 소식이 없어 걱정하던 차에 내린 단비다. 이제 텃밭에 심어놓은 배추와 무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다. 

가야산으로 돌아온 후, 조석예불하고 사시불공 올리고 가끔 찾아오는 내방객을 맞이하는 일이 아니어도, 도량 청소하고 잡초 뽑고 공양을 준비하는 일과 같은 생존을 위한 노동만으로 하루가 빠듯하다. 다행스럽게도 몸을 쓰는 일은 특별한 고민 없이 반복하면 되는 일이 대부분이므로 부지런함은 늘고 번뇌는 줄어드는 장점과 함께 건강까지 덤으로 얻을 수 있으니 보약보다 낫다. 

산사에서 매일 마주치는 삶의 요구들은 단순하지만, 그중 자연의 변화에 맞추고 대비하는 일이 가장 크다. 요즘은 다가올 추위를 막기 위해 고건축 얇은 벽에 단열재 덧대어 보강하고 문풍지 바르고 갈라진 벽을 메꾸는 등 겨울 채비로 분주하지만, 여름에는 긴 장마 때문에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잡초를 뽑는 일이 예삿일이 아니었다. 

가을은 김장용 배추와 무를 심으면 별일 없이 지나갈 줄 알았다. 기대와 달리 지금까지 겪은 일과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심각한 문제가 일어났다. 긴 가뭄으로 개울물이 말라버려 식수가 고갈된 것이다. 물이 없으면 단 하루도 살 수 없으니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데, 소식을 듣고 산내 암자 비구니 스님들이 찾아와 함께 걱정해주었다. 알고 보니 대부분의 암자가 식수 확보에 어려움을 겪으며 너나없이 암벽을 뚫고 지하수를 길어 올리고 있었다. 아직 지하수를 파지 않은 우리 절은 형편이 나은 편이었다. 

좋은 공기와 맑은 물 덕분에 산사가 가장 안전할 것이라는 사람들의 기대와 달리 생활의 모든 편의를 스스로 마련해야 하는 산중의 생활은 자연의 변화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다. 폐사가 된 절터에 가보면 수원이 말라버린 예를 종종 볼 수 있다. 물 부족이 폐사의 직접적인 원인이었던 것이다. 치수(治水)가 고대 중국의 황제들이 도모한 사업 중 가장 중요한 사업이었으며 고대문명의 유적 모헨조다로에 상하수도 시설이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물은 산사만의 문제가 아니라 인류 문명이 걸린 문제이다. 

소방차가 와서 생활용수를 급수해 주어 급한 상황은 해결했지만 장기적인 대책이 필요했다. 다들 지하수를 파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모두가 지하수를 끌어 쓰면 그 물은 어디서 온단 말인가. 급기야 병으로 요양하고 있던 사형마저 소식을 듣고 달려왔다. 함께 물탱크를 점검하고 나서 문제의 발단을 바르게 이해한 나는 지하수를 파지 않기로 결정했다. 

재래식 해우소 사용을 불편해하는 신도들을 위해 양변기를 설치한 후 물 사용량이 갑자기 증가한 데다, 갈수기인지 모르고 수곽으로 물을 흘려보낸 나의 무신경까지 겹쳐 사달이 난 것이었다. 다행히 암벽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양은 줄었지만 마르지 않아서 조절을 잘하면 괜찮을 것 같았다. 장기적으로 저장시설을 늘려 개울로 흘려보내던 암반수를 저장하고 생활하수 재활용 시설과 빗물 저장시설을 마련하면, 현재의 자원으로도 넉넉히 사용할 수 있을 듯하다.

인류가 만든 문명은 인간을 자연으로부터 분리시켜 특별한 존재로 만들었다. 손 하나 까닥하면 물이 나오고 수고하지 않아도 냄새나는 하수가 눈앞에서 사라진다. 분리는 성공적으로 보인다. 가장 안전하고 위생적인 환경을 제공해주었으니까. 하지만 어쩌면 편안하게 앉아서 수돗물을 받아먹는 도시 사람들이야말로 삶은 개구리처럼 무엇이 위기인지도 모른 채 서서히 죽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더구나 우리는 코로나19라는 대가를 혹독하게 치르고 있지 않은가.

산사는 자연의 아름다움과 풍요를 누릴 수 있지만, 기후위기가 곧바로 나의 위기로 다가오는 취약한 장소 중 하나이다. 사라져가는 재래식 삶이 흔적을 남기고 있는 곳, 누리는 만큼 지불해야 할 노동을 일깨우는 곳, 봄이 오면 잡초를 뽑고 가을이면 낙엽을 쓸고 바람 불면 기와 떨어질까 걱정하고 비 오면 둑 넘칠까 걱정해야 하는 곳이다. 이곳에서 나는 날마다 일어나는 자연의 변화가 내게 요구하는 노동이 나를 치유하고 회복하게 하는 힘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다. 내가 자연의 한 부분이라는 소중한 가르침과 함께.

국일암 서편에는 부휴선수, 벽암각성, 고한희언의 부도가 나란히 서 있다. 한국불교사에 기록된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지만, 돌에 새겨 넣은 이름조차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쇠락해져 있다. 저 부도의 주인공들을 기억하는 일도 앞으로 내가 해야 할 일이지만, 반대로 재래식 해우소의 배설물처럼 흔적을 남기지 않는 삶을 사는 것도 산사에 사는 내 몫의 일이다. 

오늘날 ‘지속 가능한 발전’이 화두지만 흔적을 남기지 않고 철저히 사라지는 것만 지속 가능하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전면적으로 삶을 바꾸는 환골탈태 없이 어쩌면 코로나와 함께하는 세상이 끝나지 않을 수도 있겠다. 내년에는 은사 스님이 그러셨듯이 퇴비를 만들기 위해 똥지게를 져야 할지도 모르겠다.

 myeongbeop@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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