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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염병 시대와 종교 / 이영석
특집 | 포스트코로나 시대와 불교
[84호] 2020년 12월 01일 (화) 이영석 leeyoung314@naver.com

1. 방역당국과 종교계의 갈등을 보면서

코로나바이러스 창궐로 전 세계가 신음하고 있다. 전파력이 상상을 초월하고 여러 나라가 경제적으로 록다운 조치를 시행하면서 세계경제가 걷잡을 수 없는 나락으로 빠져들기도 했다. 그러나 이 위기는 이미 21세기 들어와 여러 전문가가 경고했던 것이다. 의학사가들에 따르면, 세계적 대유행병(pandemic)의 역사에서 한 획을 그을 만큼 중요한 해는 2003년이다. 이 해에 사스(SARS), 공식적으로는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이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었다. 이후 조류 인플루엔자, 돼지 독감, 에볼라바이러스, 메르스 등 새로운 바이러스 변종에 따른 감염병이 창궐해 두려움을 증폭시켰다. 이들 바이러스 변종은 모두 인수공통감염병(zoonsis)이다. 인간의 면역력이 약하기 때문에 그만큼 치명적이라는 점이 우려감을 불러일으켰다. 세계화에 따른 인구 및 물자 이동의 고속화에 따라 이들 질병이 대유행할 가능성이 커졌다. 더욱이 변이가 좀 더 빨리 그리고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전개되어 백신 개발이 어렵고, 현대 위생학과 방역체계로도 효율적으로 대처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과거의 사례가 지금의 현실을 이해하는 데 별다른 소용이 없을지 모르나, 2003년 사스 창궐과 관련국의 대응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현 코로나바이러스는 중국 우한에서부터 나타나 세계로 퍼졌나갔지만, 사스는 광둥성에서 먼저 급속하게 창궐했다. 그 당시 이 감염병은 주로 중국 경제권의 활발한 교류 열기를 타고 홍콩, 타이완, 싱가포르를 내습했으며, 그 밖에 동남아시아, 북아메리카, 유럽권까지 급속하게 확산되어 그야말로 대유행병이 되었다. 그러나 높은 치사율에도 불구하고 예상과 달리, 그 영향은 파국으로 치닫지 않았다. 창궐 기간이 짧았기 때문이다. 그 후 전문가들이 새로운 바이러스 감염병의 위험성을 경고했지만, 이번 코로나 위기까지 세계 여러 나라는 이 문제에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다.

코로나 위기에 한국은 세계에서 손꼽힐 만큼 확산 억제에 성공한 나라로 알려져 있다. 서구 여러 나라와 달리, 경제적인 록다운 조치를 취하지 않고 감염률이나 치사율을 미미한 수준으로 억제해 왔다는 점이 높이 평가받고 있다. 전 세계가 코로나에 따른 경제위축을 겪고 있는 이 시점에서도 한국 경제는 OECD 국가 가운데 가장 양호한 마이너스 성장을 보여준다. 우리 또한 여러 차례 코로나 확산의 위기를 겪었는데, 다른 나라와 구별되는 특징은 신천지와 같은 유사종교집단, 근래에는 특히 개신교의 예배와 종교행사에서 간헐적인 감염이나 집단감염 사례가 자주 나타났다는 점이다. 정부는 개신교 종교행사의 자제와 함께 경우에 따라 온라인 예배를 권고하지만, 이에 대한 개신교계의 거센 반발이 오히려 국민의 분노를 사고 있다. 개신교가 이 땅에 전래한 이래 가장 심각한 위기에 빠져들고 있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왜 개신교회에서 주로 코로나 감염이 속출하는가. 이는 한국 개신교의 주류가 복음주의 전통을 잇고 표방하는 것과 밀접하게 관련된다. 18세기 대서양 양안에서 거의 비슷한 시기에 전개된 개신교 복음주의 운동은 개인의 회심을 강조하고 이에 관련된 감정의 격정적인 표현과 열성적인 전도를 강조한다. 한국에서는 집단적인 통성기도, 집단 찬양과 교제, 열정적인 감정 토로 등의 특징을 보여준다. 이는 경건성과 엄숙주의를 강조하는 불교나 가톨릭은 물론, 칼뱅파를 비롯한 전통적인 개신교파의 특징과 다른 양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국 개신교는 19세기 말, 바로 대각성운동과 복음주의 영향을 받은 미국 선교사들이 전도하면서 자연스럽게 이 전통이 이어졌다. 더욱이 한국인 특유의 열광적인 기복신앙과 접목해 요란하고 소란스러운 특징을 지니게 된 것이다. 제아무리 검역 지침을 철저하게 지킨다고 하더라도 감염병의 시대에 종교행사와 신앙생활에 나타나는 이러한 특징은 방역에 치명적인 위험을 가져다줄 수 있다. 정부가 개신교계에 비대면 행사를 권유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과거 한 세기 이상 개신교는 근대위생학과 서양의학을 선구적으로 이 땅에 도입해왔다. 서양의학과 근대교육의 개척자로서 개신교는 서구문명의 수입과 함께 근대문명의 상징으로, 또는 근대성의 담지자로 인식되기도 했다. 그러나 과거와 달리, 근래에는 비과학적 맹신과 공공성을 외면하는 이기적 태도 때문에 일반 국민 정서와 어긋나 있다. 이와 달리 불교, 가톨릭, 원불교 등 다른 대표적인 종파는 정부와 별다른 갈등을 불러일으키지 않고 또 감염의 중대한 위험집단으로 지적받지도 않았다. 감염병의 시대에 정부와 불협화음을 빚고 있는 개신교계의 정서와 대조적이다. 

이 글은 전염병과 종교의 관계를 역사적으로 재검토하려는 시도다. 특히 19세기 콜레라 창궐기에 영국에서 근대 의학과 종교가 밀접하게 서로 협력한 사례를 소개하고, 이 전통이 다른 세계에 미친 영향을 개략한다. 방대한 주제이기 때문에 단편적인 사례를 언급하는 선에서 그치려고 한다. 


2. 19세기 콜레라의 경험

전염병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19세기야말로 유럽 사회에 전염병이 여러 차례 창궐했던 시기였다. 일찍이 르 롸 라뒤리(Emmaneul Le Roy Ladurie)는 이를 가리켜 ‘세균의 공동시장(common market of bacilli)’이라는 역설적인 표현을 쓰기도 했다. 특히 이 말은 콜레라의 경우 가장 적절한 표현이라는 느낌이 든다. 콜레라야말로 19세기에 가장 오랫동안 그리고 가장 주기적으로 유럽 사회에서 창궐한 전염병이었기 때문이다. 

전염성 질병을 확산시킨 원인이 철도와 증기선이라는 인식은 당대 사람들에게도 널리 자리 잡았다. 병이 지역과 대륙 사이를 오가는 인간 이동과 화물을 통해 확산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교통혁명의 양상은 어떠했는가. 우선 산업혁명기 국내 수송 문제의 애로점은 철도의 등장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증기기관차는 마차에 비해 훨씬 더 많은 승객과 화물을 나를 수 있었고 운하를 이용하는 것보다 시간이 적게 걸렸다. 1825년 영국의 달링턴과 스톡턴 사이에 처음으로 철도가 개설된 이후, 특히 1830~1840년대에 영국 전역이 철도망으로 연결되었다.

영국에서 철도혁명이 산업화의 종착역이었다고 한다면, 인접한 프랑스와 독일에서는 철도혁명 자체가 그 나라 산업화의 출발역이었다. 장거리 철도 건설은 서유럽 주요 국가뿐만 아니라 그 주변의 러시아, 오스만제국, 아메리카 대륙, 식민지 인도 등에서도 이뤄졌다. 철도혁명이 세계적으로 확산한 것이다.

증기선(steamer)의 이용 또한 19세기 교통혁명의 다른 한 축이었다. 영국에서 증기선을 처음 이용한 해는 1812년이다. 그 후 선복량은 지속적으로 증가했다. 1850년대에 증기선은 범선보다 모든 면에서 우위에 있게 되었다. 증기선 혁명을 주도한 나라는 영국이었다. 1870년 영국에 등록된 증기선은 총 110만 톤이었는데, 경쟁국 프랑스는 15만 톤이었고 그 밖의 나라는 증기선을 거의 보유하지 못했다. 

교통혁명과 더불어 특히 대륙 간 사람들의 이주와 이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19세기 중엽 이후 20세기까지 국제 이주의 역사에서 중요성을 갖는 것은 인도양을 통한 다른 대륙으로의 이주다. 한 연구에 따르면, 1846~1940년간 인도 및 중국 남부로부터 동남아시아와 인도양 항로를 통해 이동한 이주자 수는 대략 4,800만 명에서 5,200만 명으로 추산된다. 이는 같은 시기 유럽에서 북미 지역으로 나간 이민 규모에 버금가는 숫자다. 구체적으로 인도인 2,900만 명, 중국인 1,900만 명이 이들 지역으로 이동했는데, 주로 영제국 해상 수송망을 이용했다. 그들이 향한 곳은 말레이반도, 실론, 미얀마, 필리핀, 오스트레일리아, 아프리카 동부해안, 심지어 카리브해 연안과 아메리카였다. 이주자의 상당수는 현지의 플랜테이션 노동력으로 충원되었다. 19세기 주기적으로 유럽과 아메리카를 휩쓴 콜레라는 바로 이 같은 교통혁명과 노동력 이동의 산물이었다. 교통혁명의 세계화는 동시에 전염병의 세계화와 표리관계를 이루었던 것이다. 
19세기 초까지만 하더라도 콜레라는 유럽 사회에 알려지지 않는 질병이었다. 그것은 인도 벵골 지방의 풍토병이었지만, 인도 항로를 오가는 선박이나 육로를 여행하는 순례자를 따라 유럽으로까지 퍼졌다. 콜레라는 급속한 전파속도와 높은 치사율뿐만 아니라, 감염자가 겪는 끔찍한 병세 때문에 공포심을 불러일으켰다. 사람들은 콜레라가 벵골 지방에서 처음 나타났다는 점을 주목해 그 질병이 주로 불결하고 오염된 지역에서 발생한다고 생각했다. 병의 원인에 관해서는 세균설을 주장하는 의사들도 있었지만, 그에 못지않게 독기설도 널리 받아들여졌다. 썩은 물질에서 나오는 해로운 독기(miasma)가 병을 일으킨다는 담론이었다. 병의 전염성도 독기설로 어느 정도 설명할 수 있었다. 이 독기가 사람 또는 다른 매체를 통해 이동하면서 병이 확산한다는 것이었다. 

19세기에 아시아와 유럽에 콜레라는 적어도 6차례 이상 치명적인 전염병으로 유행했다. 1차 콜레라 전염병은 1817년 벵골 삼각주 지대에서 발병한 이래 무서운 속도로 이 지역을 휩쓴 다음 3년 이내에 인도아대륙 곳곳에서 창궐했다. 이 기간에 인도인은 물론 현지에 주둔하던 영국군 병사 다수가 사망했다. 영어에서 전염병의 발병과 창궐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공격(attack)’ ‘내습(invasion)’ ‘참화(devastation)’ ‘저항(resistance)’ 등의 군사용어를 사용한 것도 인도 주둔 영국군 부대가 전염병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전통으로 추측된다. 1829~1837년의 2차 대유행기에 특히 러시아, 헝가리, 독일 등에서 크게 확산하였다. 1831년 이집트, 1832년 영국과 프랑스를 휩쓸었다. 1833년 북아메리카를 엄습해 원주민 상당수가 피해를 입었다.

846~1860년의 3차 대유행은 가장 커다란 피해를 낳았다. 콜레라는 메카 순례자를 통해 확산하여 러시아를 휩쓸었고 1848년 영국, 1849년 프랑스에서 창궐했다. 1863~1875년 4차 대유행기에 콜레라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벵골 갠지스강 하류 삼각주 지대에서 발생해, 메카로 향하는 무슬림 순례 행렬을 따라 전파되었다. 메카에 운집한 순례자 가운데 3만 이상이 병사했고 러시아, 유럽, 런던 이스트엔드, 아프리카, 아메리카로 확산하였다. 이후에도 콜레라는 1881~1896년 시기와 1899~1923년 시기에 두 차례 더 대유행병으로 전 세계에 창궐했다.


3. 근대의학과 종교의 만남-런던 콜레라

영국에서 콜레라는 19세기 중엽에 특히 런던을 비롯한 대도시에서 많은 인명을 앗아갔다. 런던이 콜레라로 파국적인 참화를 겪은 것은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수인성 콜레라균이 서식하고 전파되기 쉬운 거주환경 때문이었다. 19세기 런던 인구는 지속적으로 증가했다. 1801년 110만 명에서 1880년 420만 명 수준으로 늘었다. 런던의 급팽창은 한편으로는 소비재 생산직종과 서비스업의 활동으로,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세계의 상품창고’이자 ‘세계의 어음교환소’라는 별칭에서 나타나듯이 해외무역 중심지로서 런던의 역할에 힘입은 것이었다. 

도시의 팽창에는 명암이 깃들어 있다. 런던의 번영은 금융가인 구 런던시(The City of London)와 인접한 서쪽 시구의 확장에서 드러난다. 흔히 웨스트엔드라고 불린 지역은 각종 공연이나 전시를 위한 대형건물과 고급주택가가 이어져 있는 반면, ‘시티’ 동쪽은 항만 노동자와 날품 노동자, 그리고 해외 이민이 밀집한 슬럼 지역으로 고착화되었다. 웨스트엔드와 이스트엔드는 바로 런던의 명암, 부와 빈곤을 공간적으로 극명하게 드러냈다.

인구가 급증함에 따라 이스트엔드 빈민가뿐 아니라 도심지에서도 당면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쓰레기와 생활하수 처리였다. 19세기 중엽 런던에서 수적으로 중요한 직업집단 가운데 하나가 청소부였다. 쓰레기와 생활오수를 수거 처리하는 일꾼의 숫자가 10만을 헤아렸다. 당시 일부 쓰레기는 재활용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이를테면 피혁 분야의 경우, 동물의 털을 없애려고 가죽 표면에 바른 석회를 원피에서 제거하는 데 개똥을 이용했으며, 런던 외곽의 농업지대는 사람의 분뇨를 옮겨 거름으로 썼다.

그러나 쓰레기보다 런던 도심의 거주환경을 악화시킨 것은 곳곳에 파헤쳐진 오수 웅덩이(cesspool)였다. 주택과 거주인구가 급증함에 따라 분뇨와 오수를 곧바로 처리할 수 없었기 때문에 도심 군데군데에 오수를 배출하는 웅덩이를 만들었다. 악취를 풍기는 웅덩이의 인분은 주로 야간에 옮겨갔는데, 이 일을 하는 사람은 레이커(raker)라 불렸으며 런던 도시 생활에서 긴요한 존재였다. 그들은 성곽 밖 농민들에게 인분을 되팔았다. 웅덩이 숫자와 규모가 커지면서 외곽으로 인분을 나르는 일은 더욱더 값비싸게 되었다. 

19세기 중엽에 왜 이 같은 오수 웅덩이가 급증했는가. 그것은 도시 위생 개선조치의 일환으로 물을 사용하는 수세식 대변기(water closet, WC)가 보급된 데 따른 변화였다. 1824~1844년 사이에 런던시 수세식 대변기 설치량은 10배 증가했다. 당시만 하더라도 하수관 시설이 보급되기 전이었고 또 하수종말처리장 시설도 없었기 때문에, 임시방편으로 도심 곳곳에 오수 웅덩이를 만들어 이곳으로 배출했다. 제때 오수를 나르지 않으면 웅덩이에서 넘쳐나기 일쑤였고, 특히 우기에는 오수와 빗물이 함께 섞여 인근 도로와 주택가로 스며들었다. 오수 웅덩이야말로 병균을 배양하는 최적의 장소였던 것이다. 

1840~1850년대 특히 콜레라의 피해가 컸던 것은 그릇된 의학이론과 도시환경 개조사업이 잘못 만나 빚어진 참극이기도 했다. 생활오수를 처리해야 한다는 발상은 에드윈 채드윅(Edwin Chadwick)의 공중보건에 관한 조사보고서 제출 이후 본격적으로 이뤄졌다. 당시 전염병에 관한 전통적인 의학담론은 독기(miasma)설이었다. 빈민이 전염병에 자주 걸리는 것은 주거환경, 특히 “부패한 동물과 식물과 배설물에서 생겨난 나쁜 공기”에 노출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그리스 시대 이래 전통 의학담론에 의거한 것이었다. 부패한 질료가 가득한 증기나 안개를 가리킨다. 이런 공기는 콜레라 같은 질병을 유발할 수 있었다. 독기는 냄새로 감지할 수 있는데, 런던의 경우 30만 개 이상의 오수 웅덩이가 독기를 퍼뜨릴 것이다. 여기에서 독기를 물로 씻어 희석시킨다는 아이디어가 나오게 된다. 

채드윅은 당시 정치인 벤저민 디즈레일리(Benjamin Disraeli),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 플로렌스 나이팅게일(Florence Nigh-tingale), 의학잡지 《랜시트(Lancet)》 편집장 등과 함께 런던 하수도망 개선 및 확충 활동을 펼쳤다. 1848년 이를 위해 보건국(General Board of Health)을 신설해 하수도망을 개조하기 시작했다. 그 계획은 웅덩이의 미아스마(독기)를 물로 씻어 템스강으로 흘러들게 하는 것이었다. 수많은 웅덩이와 템스강을 연결하는 하수도관이 설치되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오히려 더 커다란 재앙으로 나타났다. 템스강이 오염수와 섞이면서 런던 식수원 또한 오염된 것이다. 한 연구에 따르면, 1850년대 콜레라의 참화는 바로 이 잘못된 하수도망 개선사업과 밀접하게 관련된다. “1848년 봄과 1849년 여름 사이에 템스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오수의 흐름은 두 배로 늘었다. 채드윅의 ‘개선’은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낳았다.” 1850년대 콜레라 희생자가 급증한 것은 이 때문이다. 

스노우(John Snow)는 근대 역학(疫學)과 위생학 창시자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그는 요크 출신으로 가난한 일용노동자 가정에서 자랐다. 어릴 때 살던 고향집은 요크의 빈민가였다. 거리는 불결했고 시장터의 오수가 흘러들어 간 우즈 강물이 홍수로 가끔 범람해 주택가를 오염시키기도 했다. 1850년대 런던 빈민가의 콜레라 발병 원인을 조사할 때 유년기의 경험이 도움을 주기도 했다. 어린 시절 뉴캐슬에서 의사 도제수업을 받은 그는 후에 런던대학 의학부를 수료하고 1850년 내과의 자격을 얻었다. 스노우는 독기설에 회의적이었으나 아직 세균설이 의학담론으로 자리 잡기 전이었기 때문에 콜레라 전염의 메커니즘과 경로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1854년 런던 소호 지구의 콜레라 원인을 추적한 끝에 브로드윅가(Broadwick Street)의 공중 양수펌프가 원인임을 지적했다. 펌프로 퍼 올린 오염된 강물로 콜레라가 확산하였다는 주장이었다. 그는 끓이지 않은 물을 음료로 마시지 말 것을 당부하고 주민들에 대한 계몽활동을 펼쳤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과학적인 위생담론과 종교의 만남을 목격한다. 스노우가 역학조사를 실시하고 또 계몽활동을 펼 수 있었던 것은 한 영국 국교회 목사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당시 런던 소호의 성누가교회 목사보로 근무하던 헨리 화이트헤드(Henry Whitehead)는 원래 독기설 신봉자였지만 스노우의 역학조사를 도왔다. 스노우의 활동은 화이트헤드의 빈민가 조사 결과에 의존하기도 했다. 1854년 콜레라 창궐기에 화이트헤드의 교구에서만 매주 623명이 사망했다. 스노우의 의학지식과 화이트헤드의 빈민가 실태조사가 결합하여 발병 원인이 양수펌프였음을 밝혀낸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스노우와 함께 양수펌프뿐 아니라 오수 웅덩이를 통한 개별 발병사례를 밝혀냄으로써 후일 근대역학의 탄생에 선구적인 기여를 했다. 화이트헤드의 선구적인 활동 이후 국교회와 비국교회의 목회자들이 19세기 중엽 콜레라 창궐기에 빈민 방역활동에 깊은 관심을 나타냈고 직접 헌신하는 사례도 많았다.

스노우와 화이트헤드가 입증한 것은 오염된 물이 콜레라와 같은 질병 전염의 원인이라는 점이었다. 이는 종래 의학지식으로는 수긍하기 어려운 점이 있었다. 물은 생명의 원천이고 주거지와 농경지에서 가장 긴요한 자원이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물이 모여 하천과 강과 호수를 이룬다. 인류는 그 물을 먹고 생명을 유지하며 농업용수로 사용했다. 오염된 물질 또한 물로 씻고 희석함으로써 주거환경을 개선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산업화 이후 급팽창한 도시에서 오염된 물이 죽음을 불러오는 재앙으로 바뀐 것이다. 


4. 근대위생학과 선교

19세기 후반에도 전염병은 여전히 간헐적으로 전 세계에 퍼져나갔다. 콜레라는 계속해서 유럽을 내습했고,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특히 활열병이 거의 주기적으로 창궐했다. 1890년대와 20세기 초에는 두 차례에 걸쳐 각기 중국 윈난성과 내몽고 지역에서 발병한 페스트가 전 세계를 휩쓸었다. 독기설 대신에 세균설이 정통 의학담론으로 자리 잡으면서, 전염병을 예방하기 위한 여러 조치가 표준화되기 시작했다. 훈증, 모기나 쥐와 같은 중간 숙주 제거, 소독, 검역, 거주환경 개선 등 여러 표준화된 조치들을 포괄하는 근대위생학이 정립되었다.

동아시아 주민들이 근대위생학에 마주친 직접적인 계기는 기독교 선교사들을 통해서였다. 19세기 후반 특히 개신교 중심의 선교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의료선교가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미국,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등지의 프로테스탄트 선교사들이 의료선교를 앞세워 동아시아 지역에 진출했다. 1880년대 미국 의료선교사들이 한국에 진출했을 당시, 주된 전염병은 콜레라, 천연두, 말라리아 등이었다. 이들 대부분이 급성전염병으로 치사율이 높았다. 1908년 조선 통감부는 천연두, 장티푸스, 발진티푸스, 콜레라, 이질, 디프테리아를 급성전염병으로 지정했다. 천연두는 치사율이 높았지만 이보다 더 치명적인 것은 간헐적으로 내습하는 콜레라였다. 1880년대 이후 한 세대 동안 3~5종류의 전염병이 주기적으로 창궐했는데 이는 도시화와 불결한 상하수도망 때문에 더 심각해졌다. 

전통의학의 치료와 미신적인 치유 의례에 의존했던 한국사회에서 근대위생학과 서양의학의 성과는 매우 높았다. 치유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전염병을 근대의학으로 치료할 수 있고, 근대위생학으로 예방할 수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서양의학과 위생학이 한국인의 세계관과 종교적 질병관에 큰 변화를 가져왔던 것은 사실이다. 

물론 한국의 전통사회에서도 전염병은 자주 창궐했다. 역병이나 괴질로 표현되는 질병이 간헐적으로 휩쓸어 수많은 사람이 희생당했다. 전통의학으로 이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다만, 불교의 다양한 치유 의례나 샤머니즘의 치유의식이 일반 민중의 공포를 희석하는 데에는 일조했으리라고 생각된다. 고려시대에는 불교가 역병 창궐기에 적극적으로 치유 의례를 베푸는 사례가 자주 있었다. 《반야경》을 독송하며 쾌유를 기원하는 반야도량(般若道場), 《천수경》에 나오는 관음보살의 예화를 독송하는 의례가 자주 열렸고, 치유의 효험이 있으리라는 믿음에서 관음상을 형상화한 문양, 자기, 그림 등이 널리 전해졌다. 그러나 전통시대와 달리 전염병이 대유행병으로 발생빈도가 높아진 것은 역시 서구와 마찬가지로 19세기 들어서의 일이었다. 이후 자주 창궐한 대유행병에 대해서는 거의 무방비 상태였다. 무수한 희생자가 발생한 이후 전염병이 물러가기를 기다리는 것 이외에 별다른 대책이 없었다. 

1884년 한국에 의료선교사로 파송된 호러스 알렌(Horace N. Allen)은 갑신정변 당시 민영익을 치료한 것을 계기로 근대의학과 위생학을 한국에 본격 소개하기 시작한다. 그는 천연두 치료, 콜레라 방역 등에 기여했으며, 질병에 대한 한국인의 전통적인 인식을 바꾸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그 이후 서양의 의료선교사들은 미신성과 주술에 의거한 치료행위를 배격하고 세균설을 널리 홍보했으며 위생관념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물론 이들의 위생학 보급과 서양의학 치료는 궁극적으로 개신교 전도를 위한 것이었다. 개화기에 한국인들이 접촉한 서구문명은 바로 서양의학과 근대위생학이었고, 이것이 바로 근대성의 표지였다. 한국에서 이러한 지식체계와 치료는 궁극적으로 개신교와 연결되었기 때문에 20세기에 걸쳐 오랫동안 개신교는 서양 근대문명을 소개하는 계몽적 역할을 맡을 수 있었다. 개신교와 서구문명, 그리고 근대성은 서로 표리관계를 이룰 만큼 밀접했다고 할 수 있다.


5. 감염병의 시대, 종교의 새로운 역할은?

20세기는 전염병에 대해 근대의학이 승리를 거둔 세기로 기록된다. 백신과 치료제, 전염병 확산을 막기 위한 각종 소독과 위생적 환경 조성, 그리고 정교한 검역 방법에 의존해 인류를 위협했던 전염병의 확산을 막는 데 성공을 거두었다. 이번 코로나바이러스에 대해 서구 여러 나라가 속수무책으로 피해를 겪었던 것은 역설적으로 이러한 자신감이 지나쳐 대응을 소홀히 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스’ 이후 인수공통감염병은 중간 수단과 매체를 통한 ‘전염’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직접 감염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이전의 전염병보다 훨씬 더 위협적이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21세기 들어 출몰한 인수공통감염병 상당수가 동아시아 또는 동남아시아에서 시작되어 전 세계로 퍼졌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새로운 인종주의가 기승을 부리고 특정 지역에 대한 혐오감이 집단의식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왜 유독 특정 지역에서 인수 공통감염병 바이러스의 변이가 자주 일어나는가. 그 변이와 발병 원인에 관한 과학적 규명은 어려운 일이나, 근래 가속된 이 지역 전체의 사회변동에서 실마리를 찾아야 할 것 같다. 동아시아(및 동남아)는 오늘날 세계경제에서 가장 역동적인 지역이다. 근대화, 산업화, 세계화가 가장 빠르게 전개되고 국민소득 상승 또한 지속되고 있다. 도시화와 함께 도시민의 식생활에 커다란 변화가 나타났다. 특히 육류 소비 증가가 두드러진다. 서양에서는 전통적으로 소비되는 육류의 주류가 반추동물(소나 양)이었다. 반면, 동아시아 지역에서 늘어나는 육류 소비의 대부분은 닭과 같은 가금류나 돼지로 충당한다.

여기에서 가금류와 돼지의 밀집 사육이 일반화되었고, 갈수록 그 규모와 종사자 수가 증가했다. 밀집식 사육장 수는 거의 기하급수적으로 급증했다. 유럽인들은 이것을 공장식 사육(factory farming)이라 부른다. 구체적이고 과학적인 인과관계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돼지나 조류를 숙주로 하는 바이러스의 변이와 발병은 이런 조건과 밀접하게 관련된다고 알려져 있다. 특히 바이러스 변이는 가금류와 돼지를 대상으로 사용하는 항생제와 항균제에 대한 반응의 일환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최근 의학사가들은 이런 변이를 ‘진화의 가속경로(evolutionary fast-track)’라고 부른다.

이런 상황이 바뀌지 않는 한 바이러스는 계속 새로운 변이를 일으킬 것이고 예기치 않은 순간에 바이러스는 발병, 확산 과정을 거쳐 마침내 세계화의 경로를 따라 대유행병으로 창궐할 것이다. 매 순간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새로운 검역과 방역 방식의 표준화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나, 그렇더라도 그 한계는 분명하다. 결국 변이를 일으키는 토양, 밀집식 사육이 바뀌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에서 나오는 결론은 단순하다. 육류 소비를 줄이거나 육류 대체물을 사용하는 것이다. 

이 문제는 한 개인의 결단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수많은 사람이 이런 취지에 공감하고 자신의 삶에서 육류 소비를 적게 하는 생활 패턴을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사회 전체를 보면 사소한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육류의 생산, 공급, 소비를 둘러싼 각종 제도와 조직, 그리고 축산자본주의의 구조조정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그 해결은 불가능하다. 그 생산과 소비 전 과정을 아우르는 제도와 조직을 근본적으로 혁파하고 부작용을 줄이기 위한 정책은 각국의 국민적 합의와 국제적인 공감 없이는 시행될 수 없다. 

현재 코로나바이러스 창궐로 세계가 위기에 빠져 있다. 최첨단의 의료와 위생학이 한꺼번에 무너졌다. 세계화를 기치로 내세운 지구자본주의가 생명의 기본 물질 중의 하나에 의해 잠시 그 작동을 멈추기도 했다. 인수공통감염병의 창궐은 결국 생태환경의 파괴 및 악화와 관련된다. 최근의 기후이변 또한 생태환경의 악화와 관련된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인간의 경제활동이 잠시 멈춘 순간에 이 지구가 어떻게 다시 잃었던 생명력과 활력을 되찾고 있는지 여러 외신 보도가 보여주고 있다. 대기가 깨끗해지고 한때 사라졌던 희귀동물이 찾아오고 대기 중의 탄산가스 농도가 낮아지는 등 놀라운 기적을 연출하고 있다. 

대유행병이 인간에게 보내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종교인들은 이를 어떤 섭리라고 생각할 수 있다. 지금까지 지속해온 인류의 삶의 패턴을 버리라는 전갈이 아닐까? 그 패턴의 핵심은 욕망의 극대화와 그 충족의 극대화다. 이것도 모든 사람의 균형 잡힌 충족이 아니라 소수에게만 집중되는 차별적인 욕구충족의 극대화다. 어쩌면 이것은 지구와 자연이 인류에게 보내는 마지막 절규인지도 모른다. 

한국에서 한 세기에 걸쳐 근대위생학과 근대의학의 정초를 쌓고 근대성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던 개신교가 오히려 방역당국과 마찰을 빚고 있는 현실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종교 이기주의만 내세우고 과학적 의학담론 자체를 무시하는 일부 개신교계 인사들의 언행을 보면서 다수 국민이 우려의 시선을 넘어 분노를 느끼고 있다. 이 위기의 시대에 수많은 사람이 방역지침을 고수하기는 하지만, 그 과정에서 피로감이 가중되고 미래에 대한 회의와 집단적인 우울증이 확산하고 있다. 백신 개발과 엄정한 검역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장기간에 걸친 방역과정에서 허탈감과 피로감에 빠진 다수 시민들의 우울한 정서를 보듬어 안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종교계가 미래의 희망과 기대감을 제시할 수 있는 정서 치유의 활동을 전개해야 한다. 

근대문명이 초래한 지구 생태환경의 악화가 인수공통감염병의 창궐과 기후이변과 그리고 문명의 미래에 대한 묵시록적 비관론을 낳는 악순환이 거듭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인간의 욕구증대와 그 충족에 따른 결과라는 점을 인식한다면, 종교의 역할이 어느 때보다도 더 절실하게 요청되는 것이다. 불교는 물론 개신교에 이르기까지 고등종교가 인간에게 가르친 것은 바로 욕구의 최소화를 지향하는 도덕적 언어가 아니었는가? 코로나바이러스와 최근의 기후이변이 보여주는 것은 더 이상 지구 환경의 악화를 방치하면 문명의 지속이 불가능하다는 위기감이다. 생태환경의 보조는 궁극적으로 인간의 욕구를 낮추고 소비를 줄이며 삶의 패턴을 새롭게 바꾸는 길 외에 대안이 없다. 

이러한 인식의 대전환과 이를 위한 사회운동에 종교계가 선도적인 역할을 해야 할 시점이다. 고등종교의 도덕적 언어와 가르침이 바로 이러한 방향을 제시한다. 불교와 개신교, 이 땅의 다양한 종교계가 모두 나서서 코로나 위기는 물론 지속가능한 문명의 미래를 위해 진력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

 

이영석
광주대 명예교수(서양사).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 케임브리지 대학교 클레어홀과 울프슨 칼리지 초빙교수, 광주대 교수 역임. 근래 펴낸 책으로 《공장의 역사》 《지식인과 사회》 《영국사 깊이 읽기》 《제국의 기억, 제국의 유산》 《잠시 멈춘 세계 앞에서》 등이 있고, 번역서로 《전염병, 역사를 흔들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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