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섭 한국불학연구소 연구실장

1. 종학의 명명에 치우친 불(교)학

불교의 연기 패러다임은 시공 속의 활발발한 중도의 지평 위에서 정립된다.

즉 가운데의 중간과 과불급(여부족)의 중용이 아닌 불교의 중도는 두 극단, 다시 말해서 어떠한 개념 또는 측면의 분립인 이항 대립의 굴레를 넘어서는 지혜의 관점에 의해 설정된다. 경전의 메시지처럼 거문고는 줄이 팽팽하지도(고행주의) 느슨하지도(쾌락주의) 않은 지평 위에서 비로소 중도의 노래는 연주된다. 만일 줄이 팽팽하다면 곧 끊어질 것이요, 그 줄이 느슨하다면 연주를 못할 것이다.

따라서 팽팽하지도 느슨하지도 않은 그 역동적인 필드 속에서 중도는 구현된다. 불(교)학 역시 이론과 실천, 손가락과 달, 순수불(교)학과 응용불(교)학의 역동적인 지평 위에서 정립된 인식의 체계이다. 따라서 중도의 잣대는 불학의 정체성 그 자체이다. 하지만 오늘의 우리 불(교)학은 경제논리에 의해 수요가 요청되는 분야에만 공급이 제공되는 학문의 빈익빈 부익부 현상까지 가속되고 있다.

이는 순수불(교)학과 응용불(교)학의 경우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근본불교가 불고불락(不苦不樂)의 중도 위에서 관계 속의 나(無我)라는 메시지를 제시했다면, 아비담학은 인식의 주체에는 실체가 없으나(人無我) 인식의 대상만은 실재한다(法有)는 메시지를 발화했다. 이에 대해 중관학이 비유비무(非有非無)인 공의 지평을 통해 존재의 연기·무자성한 공성을 드러내 보였다면, 유식학은 유식무경(唯識無境)의 지평을 펼쳐내어 악취공(惡取空)에 빠진 사람들을 구제하려고 했다.

불학의 역사는 이렇게 균형과 조화의 관점 위에서 언제나 중도의 지평을 제시하였다. 따라서 이항 대립의 양극단을 넘어서는 불교사상의 역사는 중도 위에서 펼쳐진 ‘지혜의 역사’요 ‘마음의 역사’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불학에 있어서 ‘순수’니 ‘응용’이니 하는 측면은 사실상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붓다는 실천을 통해 자신의 이론을 정립했듯이 불학 역시 실천의 지평 속에서 형성된 체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불학의 역사조차도 이제는 수요(초빙)가 좀처럼 쉽게 창출되지 않는 현 상황에서 공급(진출)이 없다고만 탓할 수 없을 정도로 그 불균형은 심화되고 있다. 종래 한국의 불학은 대승 8종1) 가운데에서 교학적으로는 중국에서 형성된 사가(四家) 대승2)에, 실천적으로는 정토와 선에 치중하여 왔다.

하지만 결코 1종 1파에 매이지 않고 불학을 했다. 이는 종래 한국 불학자들이 온축해 온 융통적 아량에 의해서 가능했던 것이다. 하지만 금세기에 들어와서 한국 불(교)학은 일본 불(교)학에 깊은 영향을 받으면서 일본불교의 8종3) 또는 일본 불학의 종학적 범주에 깊이 경도되었다. 그 결과 개념의 명료함이라는 미명 아래 ‘중관불교’, ‘유식불교’라는 지극히 부자연스런 일본식 명명법이 유행하기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 전승 불학과의 깊은 단절의 골을 연출하고 있다.

‘무슨 무슨 불교’라는 방식은 금세기 초의 일본 선사였던 스즈키 다이세쓰(鈴木大拙)에게서부터 시작되었다. 1930년대 전후에 일본 선(Zen)을 서양에 소개했던 스즈키는 당시 서양인들이 그의 선이 종래 어느 종교의 어떤 수행법에 속한 것인지를 궁금해 하자 ‘선(Zen)’에다가 ‘불교(Buddhism)’를 붙여 ‘젠부디즘(Zen Buddhism)’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냈다. 뒤이어 이 용어를 그대로 ‘한역’하면서 ‘선불교(禪佛敎)’라는 신조어가 탄생되었던 것이다. 선법은 중국불교의 최종적 형태인 천태·화엄·정토·선의 4종 중에서 가장 오래도록 생명력을 유지한 종파이다.

중국불교의 13종 가운데 하나였던 선종이 송말에 이르면 천태를 아울러 천태선, 화엄을 아울러 화엄선, 정토를 아울러 정토(염불)선으로 감싸안으면서 자신의 위상을 한껏 드높인다. 이른바 13종 중의 하나였던 선법이 이제는 하위개념이 아니라 상위개념이 되어 나머지 1종 내지 12종을 아우르게 된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 위에서 선을 이해하게 되면 ‘선불교’라는 용어는 수용할 수 있는 측면이 없지 않다. 하지만 나머지 12종들은 그렇게 명명할 수가 없다. 그러나 현금 우리 불(교)학계의 일부에서는 모두 ‘무슨 무슨 불교’라는 술어로 명명하고 있다. 즉 중관학, 유식학, 천태학, 화엄학, 정토학까지도 중관불교, 유식불교, 천태불교, 화엄불교, 정토불교로 일컫는 부자연스런(또는 어색함)4) 어법에 대해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그냥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두 가지 측면으로 해명해 볼 수 있다. 첫째, 불학의 하위개념으로서의 종학인 중관학을 중관불교로, 유식학을 유식불교로, 천태학을 천태불교로, 화엄학을 화엄불교로, 정토학을 정토불교로 명명해야만 종래의 중관학, 유식학, 천태학, 화엄학, 정토학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한국불교의 대 사회적 기반이 축소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은 이미 불교가 이 시대의 주요 담론으로서의 자리를 잃어 버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종학 뒤에다 ‘불교’라는 술어를 붙이지 않으면 무슨 학문인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 불교 현실의 서글픈 모습이기도 한 것이다. 우리의 어법에서 볼 때 주자학과 양명학을 주자유교, 양명유교라 하지 않고, 주자학을 주자학으로, 양명학을 양명학으로 인식하는 것처럼 우리 사회가 천태학을 천태학으로, 화엄학을 화엄학으로 인식할 수 있는 ‘무슨 무슨 학’의 의미의 공간을 넓혀야만 불교가 보편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유교의 대 사회적인 기반이 광범위하게 전제되어 있음에 비해 불교는 상대적으로 그렇지 못함에서 이러한 문제가 생겨난 것이다. 때문에 종래부터 사용하여 오던 이러한 자신있는 명명법을 통해 불(교)학을 한국사회의 주요담론으로 진입시키려는 노력과 불(교)학자들의 학문적 자신감이 요청된다.5)

둘째, ‘무슨 무슨 불교’라고 명명하는 것은 불교사에서 흔히 말하는 ‘근본불교’6) ‘원시불교’7) ‘초기불교’ 등의 용어들이 동일한 시기를 지칭하면서도 다양하게 쓰이고 있는 것은 시대구분의 담론이 통일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동일한 시대의 사태나 사건을 놓고 ‘내용(교리) 중심’으로 분류하느냐 아니면 ‘시기 중심’으로 구분하느냐가 통일되지 않은 채 역사가의 편의대로 명명하다 보니 이러한 혼동이 생겨난 것이다.8) 그 결과 ‘초기(근본, 원시)불교’와 ‘부파(아비담)불교’처럼 시기 내지는 교단의 관점에서 ‘무슨 무슨 불교’라고 명명하면서도 중관, 유식, 천태, 화엄, 정토 등은 내용(교리) 중심으로 분류한다는 것이다.

개념의 명료함 때문에 ‘무슨 무슨 불교’라고 부른다고 하지만 역사를 바라볼 때 가장 중요한 점은 사료를 해석하는 관점인 사관이며, 이 사관은 역사가의 시대구분의 담론에 의해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슨 무슨 불교’라는 명명이 스며들어 온 것은 종래 한국 불학의 어법에서 볼 때 매우 부자연스런 표현법이다. 종래 한국 불학에서는 이미 상위개념인 불교의 전제 아래 그 하위개념으로서 중관 교의(교학, 사상), 유식 교의(교학, 사상), 천태 교의(교학, 사상), 화엄 교의(교학, 사상), 정토 교의(교학, 사상) 등의 표현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그것이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었다.9)

그리하여 주자학과 양명학처럼, 중관학, 유식학, 천태학, 화엄학, 정토학 등의 명명으로도 광범위하게 우리 사회에 소통되었었다. 따라서 학문의 주체자들이 불제자 또는 불학자로서의 자신감 속에서 명명할 수 있었고, 이미 보편화되어 있는 불(교)학의 하위개념으로서 천태학, 화엄학 등으로 표현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자연스레 불교의 담론층을 형성했던 것이다. 그런데 현금 한국에서 불(교)학을 연구하는 일부의 학자층이 일종 일파에 매이지 않았던 한국불학의 범주를 1종 1파에 국집했던 일본종학의 범주에 암암리에 꿰맞추는 경향이 생겨나고 있다. 이는 ①불학의 범주 자체가 너무 광범위하여 혼자서 다할 수 없다는 역량의 문제 때문이기도 하고, 또 ②학문의 전문성과 세분화를 요구하는 현대학문의 분과적 경향이기도 하고, 아울러 ③과거처럼 학인 자신의 학문적·종교적 열정과 국가적 지원 아래 불학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 결과 ‘종학에 치우친 불(교)학’이라는 좁은 의미의 불학에 국집하는 경향이 시나브로 생겨나고 있다. 종래 한국불학의 특징은 1종 1파의 이론에 충실하면서도 1종 1파에 매이지 않고 ‘붓다의 중도’를 충실하게 드러내는 것이었다. 거기에서 인간과 세계를 바라보는 연기 패러다임의 시선이 정립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불학의 범주인 경학과 선학의 담론과 신앙 또는 수행의 내적 체험이라는 측면을 간과할 때 ‘중도의 불(교)학’은 정립되기 어려우며 1종의 종학에만 집착할 때 그것은 곧 ‘무슨 무슨 불교’라는 명명법으로 관성화될 수 있음을 우리는 한국 불(교)학의 연구 현실에서 쉽게 경험할 수 있다.

따라서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순수불(교)학과 응용불(교)학을 대립적 관계로 파악할 것이 아니라 순수불(교)학의 전문적이고 종합적인 연구방법의 장점이 오늘 우리 사회의 현실에 대한 해석의 지평인 응용불교학 분야로 전이되어야 한다. 아울러 경제논리를 넘어서는 교단과 학계의 지원과 관심이 동시에 요구된다.

2. 학제간 연구를 위한 협동과정 모색

불(교)학은 중도를 지향하는 학문이다. 중도란 단상(斷常)·거래(去來)·일이(一異)·생멸(生滅) 등의 이항 대립을 넘어선 지평에서 지혜에 의해 설정되는 가장 올바른 길이다.

 

때문에 불학은 불설의 해석틀인 교상판석의 후래거상(後來居上)10)적 인식에 서 있지도 않다. 다시 말해서 불학은 특정 종파의 우월성에 입각하여 정립되는 하위개념으로서의 종학이 아니라 상위개념인 중도의 학문이라는 것이다. 즉 지혜의 관점에 의해 정립되는 인식체계가 바로 중도의 불(교)학인 것이다.

불(교)학이라는 학문은 요즈음의 한 경향인 학과 이기주의와 전공 이기주의에 결코 떨어지지 않는 물음과 배움의 체계인 것이다. 본래 불학 그 자체는 수요와 공급의 논리로부터 자유로운 것이었다. 종래의 불학자들은 학문적·종교적 열정과 구도 의지 그리고 교단과 국가의 지원에 힙입어 장대한 인식체계를 수립하였다. 하지만 근현대 불(교)학의 연구경향은 경제논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재가인들이 불학의 주요 담지자가 되었다.

그 결과 교단과 국가의 지원을 기대할 수 없다 보니 학문의 빈익빈 부익부 현상으로 인한 수요와 공급의 불일치 현상이 가속화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학문분야가 지나치게 세분화되면서 해당분야의 전문인력은 양성되지만 학제간의 경계를 넘어선 포괄적 이해의 영역은 점점 축소되고 있다.

이러한 점은 학과 이기주의와 전공 이기주의에 경도되어 인간과 세계에 대한 유기적 이해를 저해하고 있다. 따라서 전문성과 보편성(대중성)이 동시에 모색되어야 균형 감각을 지닌 학문이 전개될 수 있다는 점에서 요즈음 우리 학계에서 추진되고 있는 학제간 연구는 불(교)학 분야에서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기제인 것이다. 서울대 (일반)대학원에 개설된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11)은 학제간 연대의 새로운 시도라 여겨진다. 1983년에 개설된 이 협동과정은 학부 자연대학을 졸업한 학생들을 대상으로 대학원에 설강한 학제간 연구과정이다.

과학이라는 주제에 집중하면서도 역사학과 철학이라는 친연성 위에서 정립된 이 과정은 오랫동안 인접학문과의 ‘협동의 과정’을 모색해 온 흔적이 역력히 배어 있다. 겸임교수들로 구성된 교수진도 인문대의 철학과(2인)·국사학과(1인)·서양사학과(1인), 자연대의 화학과(1인)·물리학과(1인)·생물학과(1인), 의대 의사학 교실(1인)에 소속된 학자들이 고루 분포되어 있다. 교과과정 역시 이 과정에서 직접 개설한 것만 아니라 타 학과와 협의하여 개설하는 교과목도 동시에 설강되어 있다.12)

이 협동과정의 교과목을 분석해 보면 먼저 학부인 자연대학 내의 물리학과와 생물학과가 두 축이 되어 있다. 또 사회과학과 자연과학과의 만남도 시도되고 있다. 거기에다가 인문대학 내의 역사학과 철학의 행복한 결합이라는 협동의 모델이 잘 드러나 있다. 먼저 과학의 중심축을 이루는 물리학과 생물학이 연대하고 거기에다 다시 사회과학과 자연과학, 인문과학의 주축인 역사학과 철학이 만나 ‘과학사 및 과학철학’으로 증폭됨으로써 완벽한 학제간 연구의 장을 열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도는 사실 인접학문과의 유기적 접목이 절실하다고 인식하는 고민의 주체들이 있을 때만 가능한 결합이다. 학과와 전공 이기주의로는 도저히 이룰 수 없는 그야말로 ‘협동의 과정’인 것이다. 거기에는 아마도 학부인 자연대학 내에 ‘과학사 및 과학철학’의 협동과정이라는 실체가 없기 때문에 가능한 것일 수도 있다.

이런 점은 역시 학부가 없는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의 ‘철학·종교연구실’의 종교와 철학의 학제간 연구라는 개념도 동일하다 할 것이다. 하여튼 이러한 학제간 연구는 불(교)학의 연구에 있어 매우 절실한 것이며 이 협동과정은 불(교)학 연구의 주요한 모델이 될 수 있다. 이 분야는 수요와 공급의 일치라는 경제논리에 연연하지 않고 유지되어야 할 협동의 과정이어야 소기의 성과를 달성할 수 있다.

이러한 인접학문과의 학제간 연구와 관련하여 불(교)학의 연구의 본산인 동국대학교의 대학원 불교학과의 교과과정을 살펴보자. 불교학과의 교과과정은 불교사학과 불교교학 그리고 응용불교학 전공으로 개설되어 있다.13)

이 가운데서 불교사학과 불교교학의 전공과정은 순수불(교)학이라는 점에서 유기적으로 연계되어 있다. 다만 응용불(교)학 분야는 이제 새롭게 관심을 증폭시켜 나가는 단계이므로 개설 과목이 다양하지 못하다. 하지만 이러한 개설과목을 횡적으로만 벌릴 것이 아니라 ‘불교’라는 종적인 중심 고리의 강화 위에서 전개되어야 할 것이다.

‘불교의 무슨 무슨 학’이라고 할 때 그 중심 뼈대는 역시 ‘불교의’ 무엇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러할 때 하위개념으로서의 분과학은 불교라는 상위개념의 지평 강화를 통해서 그 필드를 넓혀 갈 수 있기 때문이다. 불(교)학은 종합학문이다. 불교가 인도에서 비롯되었고 인도 내에서는 《베다》의 권위를 인정하는 상키야―요가, 니야야―바이쉐시카, 미망사―베단타 등의 정통 육파철학과 달리 《베다》의 권위를 부정하는 자이나교와 차르와카와 더불어 비정통으로 분류되지만, 인도불학 역시 인도의 종교와 철학 속에서 형성된 것임을 부정할 수 없다.

‘서양철학사는 플라톤의 각주’라고 갈파했던 화이트 헤드의 일갈처럼 인도의 힌두교(종교)와 힌두사상(철학) 역시 ‘베다의 각주’임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모헨조다로와 하랍파 유적이 보여주듯이 기원전 3천 년 전 인더스 문명을 창출했던 드라비디안들은 고대 인도 문명의 건설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기원전 1천 5백 년을 전후하여 들어온 아리안에 의해 그 자리를 빼앗겨 버렸다.

따라서 오늘 우리가 말하는 인도의 고대 문화의 형태는 아리안의 종교요 철학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들 아리안의 상층 카스트들이 만들어낸 상히타(本集)의 4베다의 주석에 의해 인도의 종교와 철학은 비롯되고 전개되어 온 것이다. 불교 역시 《베다》에 대한 철학적 주석서인 《우파니샤드》의 연장선에서 탄생한 것임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다.

따라서 종학에 치우치지 않는 중도의 불(교)학을 하기 위해서는 불학 내에서의 종파별, 종학별 연구의 경계를 허물고 불학이라는 상위개념에서의 상호 소통의 길을 모색하는 것이 급선무일 것이다. 더욱이 인접학문과의 학제간 연구를 위해 불(교)학과 인도철학과 선학에다 국문학, 역사학, 철학, 종교학, (불교)음악학, (불교)미술학 등을 통섭하는 협동과정의 설치가 요망된다.

이를테면 국문학 텍스트에 보이는 불교적 요소의 투영, 역사학에서의 불교관련 사료, 철학에서의 유학(성리학)과 노장학과 서양철학과의 대비, 종교학에서의 불교적 종교 인식, 예술에서의 불교미학 등이 유기적으로 연계되어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불학이 종합학문이라는 인식 아래 인문학으로서의 측면만이 아니라 사회학과 자연학과도 과감히 연대하는 학제간 ‘협동과정’의 설치를 통한 공동연구의 장이 요청된다.

그렇게 되어야만 문사철과 현대학문에 통효한 이 시대의 ‘삼장법사’의 배출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비록 컴퓨터라는 무소불위의 도반이 있다고는 하지만 학문이 진리에 대한 물음과 배움의 과정이라는 사실에서 볼 때 컴퓨터가 주는 정보의 신속함만으로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순수불(교)학에 상응하는 응용불(교)학의 커리큘럼의 정립과 그에 따른 교수요원의 선발이 요청된다.

불학 자체에서 보면 순수니 응용이니 하는 변별은 크게 의미가 없다. 붓다는 실천을 통해 자신의 이론을 정립했듯이 불학 역시 실천 속에서 형성된 이론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불학은 당대의 현실과 긴밀한 연관 속에서 새롭게 자신의 정체성을 정립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 위에서 자신의 인식틀을 재구축해야만 한다.

그러할 때 불교의 정신은 현실 속에서 되살아나는 것이다. 종래의 종학적 분류도 이제는 ‘순수’와 ‘응용’ 불학의 중도적 지평 위에서 재분류되어야 한다. 특히 응용불교학 분야는 수요와 공급의 경제논리가 깊이 투영될 수 있는 분야이다. 현실적으로는 수요가 창출되지 않고 있다고 해도 장기적인 전망 속에서 바라보면 얼마든지 수요를 재창출해낼 수 있는 분야이다. 따라서 학계로의 진출에 집중되어 있는 순수불(교)학 분야에 비해 응용불(교)학 분야는 장기적으로 볼 때 오히려 상당한 수요가 창출될 수 있는 전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중도의 불(교)학이 지향해야 될 관점 역시 종래의 순수불학 편중이 아니라 응용불학과의 균형과 조화가 요청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순수불(교)학의 전문적이고 지속적인 연구는 불(교)학의 새로운 해석의 측면인 불교정치학, 불교경제학, 불교심리학, 불교윤리학, 불교생태학, 불교여성학, 불교사회학, 비교종교학, 불교사회복지학, 불교출판학, 불교고고학, 불교서지학, 불교아동학, 불교의학 등 응용불(교)학 분야의 전문화로 전이되어야 한다. 그렇게 되어야만 우리 현실 속에 살아 있는 불교 또는 불학의 지평이 제시될 수 있다.

3. 현실사회와 연생하는 불(교)학

응용불(교)학은 순수불(교)학의 성취를 흡수하여 현실 사회와 연생하는 새로운 학문 분야라 할 수 있다.

응용불(교)학은 현실과 괴리된 불(교)학, 개인만의 안위를 위한 학문이 아니라 우리들이 부딪치는 현실 세간을 불교적으로 진단하고 방향을 제시하는 살아 있는 학문의 지평이라 할 수 있다. 문명사회 속에 살면서 부딪치는 갖가지 문제들, 이를테면 정치·경제·사회·문화에서부터 생태·윤리·여성·의학 등 다양한 방향에서의 접목과 해석이 요청되는 분야라 할 수 있다.

불교정치학, 불교경제학, 불교사회학, 불교생태학, 불교윤리학, 불교여성학, 불교의학, 불교사회복지학, 불교출판학, 불교서지학, 불교고고학, 비교종교학 등의 분야는 우리 현실사회의 주요문제와 직결되어 있는 문제를 불교적으로 분석하고 연구하는 학문적 노력이라 할 수 있다.

1) 불교정치학

불교정치학은 불교의 정치적 지향을 객관적으로 다루는 학문적 노력이다. 불교경전 속에 나타난 붓다의 정치관과 이후 불교계의 정치사상은 교단과 국가간의 관계 설정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즉 불교정치학은 출세간의 가치를 지향하는 교단과 세간의 가치를 지향하는 국가 사이의 영향관계를 연구하는 것이다.14) 이 분야의 연구에는 순수불(교)학인 원시불교와 계율학이 이론적 틀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2) 불교경제학

불교경제학은 정신적 추구와 물질적 추구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는 관점에서 형성된 새로운 학문이다. 즉 불교가 추구하는 정신적 건강이 물질적 기반의 부정 위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님을 학문적으로 해명하는 것이다. 불교가 욕망을 버리라고 한다고 해서 현실적 기반 모두를 버리고 출가하라고 하지는 않는다. 불교의 세간과 출세간에 대한 인식은 상보적이요 상응적이다.

따라서 불교에서 바라보는 소비는 인간이 행복을 얻는 하나의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다. 그래서 불교의 이상은 최소한의 소비로 최대한의 행복을 얻는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불교적 인간이 추구하는 ‘간소화’와 ‘비폭력’이 불교 경제학의 기본 축이 된다. 불교경제학은 주어진 목적을 최소한의 수단에 의해 달성할 수 있는 방법을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15) 경제학·역사학·사회학 전공자와 불교학 전공자의 만남은 이 분야를 개척해 나갈 수 있는 계기가 된다.16) 이 분야에는 순수불(교)학인 원시불교와 계율학이 이론적 틀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3) 불교심리학

불교심리학은 붓다의 가르침을 심리학적으로 접근해 가는 학문적 노력이다. 연기법 중 십이연기는 과연 심리학적으로 어떻게 해명될 수 있는가. 행(行)은 무엇이고 명색(名色)은 무엇이며 촉(觸)은 또 무엇인가 등 각 지에 대한 해명과 각 지와 지 사이의 관계에 대해 심리학적으로 분석해 들어가는 것이다. 또 요별경식(제6식)과 말라식(제7식)과 아뢰야식(제8식)과의 관계를 풀어나가는 과정 속에서 업과 윤회의 주체 문제, 종자와 상속의 문제 등을 통해 불교심리학의 이론적 틀을 정립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분야에는 순수불(교)학인 비담학과 유식학 그리고 자은(법상)학이 정치한 이론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17)

4) 불교윤리학

붓다의 가르침은 지극히 윤리적이다. “모든 악한 일들을 짓지 말고, 모든 선한 일들을 받들어 행하라. 그리하여 내 마음을 깨끗이 하면, 이것이 바로 모든 부처님들의 가르침이니라.”라고 설해진 7불 통계게(通誡偈)는 불교의 지향이 어디에 있는지를 잘 보여 주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불교의 핵심은 ‘업의 정화’, 다시 말하면 ‘업종자를 어떻게 맑게 유지하느냐’의 문제로 귀결된다고 할 수 있다.

불교윤리학이 정립되는 이유도 팔정도에서 밝혀진 대로 자신의 업(10업)을 어떻게 하면 바르게 할 수 있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불교의 연기법은 말 그대로 ‘나의 욕망 공간의 확장이 남의 욕망 공간에 대한 장애를 최소화(현실적 인간) 내지 무화(보살적 인간)시키는 인식의 틀’이다. 연기적 존재인 우리들이 어떻게 우리들의 몸과 말과 마음을 쓰느냐에 대한 담론체계가 불교윤리학의 존재이유가 될 것이다. 이 분야에는 순수불(교)학인 원시불교와 계율학 등이 이론적 틀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18)

5) 불교생태학

불교생태학은 우리가 사는 중생세간과 기세간, 정보와 의보 속에서 연기와 자비의 관점 속에서 연구하는 학문이다. 유한한 자연에 대한 무한한 인간의 욕망을 어떻게 ‘자율적’으로 절제할 것인가, 문명과 자연의 ‘상생’을 어떻게 도모할 것인가 등이 주요한 명제가 될 것이다. 즉 생태에 대한 몰이해(沒緣起)와 무자비(無慈悲)의 관점을 연기와 자비의 생태관으로 되돌릴 수 있느냐가 핵심 과제가 될 것이다. 이 분야에는 원시불교와 계율학 그리고 화엄학 등이 이론적 틀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19)

6) 불교여성학

불교여성학은 불교의 여성관에 대해 객관적으로 연구하려는 학문적 노력이다. ‘여성성(feminity)’에 대한 페미니즘의 활발한 논의와 더불어 이 분야는 일찍부터 주목받아 왔다. 이 분야는 여성의 변성성불(變性成佛)사상에서부터 이미 논란의 소지가 있어 왔다. 여성운동이 활성화된 지금 여성학은 종교계와 가장 우선적으로 접목되는 분야라 할 수 있다.20) 이 분야에는 순수불(교)학인 원시불교와 유식학(여래장사상)이 이론적 틀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7) 불교사회학

불교사회학은 불교교리와 사상을 사회학적 관점에서 연구하고 이해하려는 학문적 노력을 말한다. 즉 불교와 관련된 사회적 사실이나 사회 현상을 객관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이다. 다시 말해서 불교사회학은 불교가 인간들의 삶과 사회에 끼친 영향을 종합적으로 분석하고 연구하는 분야이다. 여기에서는 불교의 본질에 대한 연구와 더불어 붓다의 사회관, 나아가서는 불교가 사회에 끼친 영향과 사회가 불교에 끼친 영향을 종합적으로 탐구한다. 이 분야에는 순수불(교)학인 원시불교와 정토학 등이 이론적 틀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21)

8) 비교종교학

불교와 세계 주요 종교 전통들의 사상과 역사를 비교하는 학문이다. 동서양 주요 종교의 사상과 역사를 가치 중립적 입장에서 비교하여 같은 점과 다른 점을 정립해 나간다. 이 분야에는 순수불교인 원시불교와 정토학 등이 이론적 틀로서 원용될 수 있을 것이다.22)

9) 불교사회복지학

불교의 사회복지 이론과 실천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이다. 불교가 제시하는 깨달음의 세계, 극락정토, 연화장세계는 과연 어떠한 세계인가, 그 세계는 오늘 이 땅에서 어떻게 실현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물음이 주요 명제가 될 것이다. 이 분야에는 순수불(교)학인 원시불교, 정토학 등이 이론적 틀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23)

10) 불교아동학

불교아동학은 불교경전에 나타난 아동 교육에 관한 교설을 통해 불교유아교육이론을 정립하려는 노력이다.24) 불교경론에는 생명, 유전, 수태, 태교, 태아 등에 대한 시각이 담겨 있다. 이 분야에는 순수불(교)학인 부파불교, 유식학 등이 이론적 틀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11) 불교의학

불교의학은 불교경전 속에 나타난 의학적 요소를 뽑아 학문적으로 정립하려는 노력이다. 붓다는 직업적인 의사는 아니었지만 불교경론 속에는 오늘날의 예방의학에 해당하는 위생수칙, 내과, 외과, 안과, 산부인과, 소아과, 피부과 등에 관한 설명은 물론 의료정신과 의사의 윤리, 병인론에 이르기까지 상세하다. 의사가 지켜야 할 일, 간호인이 지켜야 할 일, 병자가 지켜야 할 일까지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의학적 측면은 인도의학과 티베트 의학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 분야에는 반야중관학과 티베트불교가 이론적 틀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25)

12) 불교서지학

불교서지학은 불교문헌의 분류와 학술적 분석 및 그 원류를 탐구하는 학문이다. 불교사학의 연장선에서 연구되는 분야이지만 불교서지의 양과 질을 생각할 때 독립된 학적 지평이 요구되는 학문이다. 불교출판학도 이 서지학 분야와 긴밀히 연관된 연구라 할 수 있다. 이 분야에는 순수불(교)학인 불교사학이 이론적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26) 

13) 불교고고학

불교의 유물과 유적 등을 통한 시대의 특징적 불교사상과 문화의 고찰 및 그 변천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이다. 유물과 유적의 발굴을 통한 분류와 정리, 보관과 정리 등의 주요한 주제가 될 것이다. 이 분야에는 순수불(교)학인 불교사학이 이론적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27)

위에서 제시한 이러한 학문들은 우리의 현실사회와 긴밀하게 접목되어 있는 분야이다. 이는 종래의 순수불(교)학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응용불(교)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으로서 제시된 분야라 할 수 있다. 아직 초보적 단계에 있지만 우리 현실과 긴밀하게 연생되는 여러 상황과 문제들을 인간과 세계에 관한 통찰인 불(교)학의 지평 위에서 자생하고 있는 학문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새로운 학문인 응용불(교)학은 순수불(교)학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 현실 사회의 주요 문제들을 분석하고 연구하는 학문적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붓다의 중도가 양극단을 넘어서서 지혜의 관점에 의해 설정되듯이 중도의 불(교)학은 순수와 응용의 균형과 조화의 관점에서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연구하는 학문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 위에서 우리의 근원적 고통인 생(로병)사와 현실적 고통인 사회의 제현상을 진단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살아 있는 학문이 형성될 수 있을 것이다. 사성제가 바로 중도, 즉 팔정도라는 새로운 지혜의 길을 제시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불(교)학은 살아 있는 학문이다. 학자 개인의 만족을 위한 학문이기보다는 많은 사람들과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학문이라 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현실 속에서 문제의식을 예각화하고 그것을 학문적으로 여과시켜 대안을 제시하는 노력이 바로 새로운 학문의 성립 요건인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노력 위에서 정립된 학문을 ‘순수’와 ‘응용’의 극단을 넘어선 ‘중도의 불(교)학’이라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끝>

고영섭 동국대 불교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철학박사. 현재 동국대 강사. 한국불학연구소 연구실장. 저서로 <불교경전의 수사학적 표현><원효><한국불학사>(신라고려시대편)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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