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짝처럼 철제 우리 속에 갇혀 공포에 떨고 있는 개들의 눈빛. 도살에 사용된 화염방사기와 전기 꼬챙이들로 주변이 어지럽다. 방금 전까지 꼬챙이로 입과 귀를 찔러 무자비하게 도축한 흔적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경기도 평택의 어느 개 사육농장의 모습이다. 입에서 피를 흘리며 널브러진 개들이 뒤엉켜 있다.

이탈리아에서는 다리가 묶인 채 산 채로 털을 뜯기는 거위가 있다. 소리 내지 못하게 부리를 꽉 잡고 목에서부터 가슴과 겨드랑이의 보드라운 털을 뜯어낸다. 고가의 구스다운 패딩 점퍼를 만들기 위해서다. 거위는 생후 10주부터 6주 간격으로 일생 동안 열다섯 차례나 털이 뽑힌다. 털을 뽑다가 살점이 뜯겨 피가 나면 그 자리에서 생살을 바늘과 실로 꿰매가며 작업을 계속한다. 잊을 만하면 일정 간격으로 반복되는 고통. 게다가 매끈한 모질(毛質)을 위해 부작용이 있는 호르몬 주사를 수시로 찔러댄다. 극심한 고통과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하고 죽으면 그때야 식용으로 팔려나간다. 살아 있는 자체가 지옥인 끔찍한 현실이다. 털뿐만이 아니다. 토끼, 밍크, 너구리, 친칠라 등은 산 채로 가죽이 벗겨지는 수난을 겪기도 한다.

중국 난징의 한 불법 도축장에선 소의 코에 고무호스를 꽂아 물을 집어넣는다. 12시간 동안 몇 차례에 걸쳐 60kg의 물이 주입된다. 온몸이 퉁퉁 부은 소들은 견디지 못하고 쓰러진다. 카메라에 잡힌 소의 눈에선 주르륵 눈물이 흐른다. 고기로 팔리는 소의 중량을 늘려 판매가를 높이기 위해서다.

아시아 몇몇 나라에서는 출산 직전의 어미 양을 잡아 숯불에 굽는다. 어미의 몸통이 완전히 구워지면 배를 갈라 그 속에서 익혀진 새끼 양을 꺼내 먹는다. 살이 촉촉하고 야들야들해서 찾는 사람이 줄을 선다니 기가 막힌다.

프랑스에선 ‘오르톨랑(멧새의 일종)’이라는 새 요리가 있다. 최근에는 동물 학대 논란과 멸종위기종이라는 비난에 몰려 손쉽게 먹지 못한다지만, 한 마리에 20만 원이 넘게 암암리에 거래된다고 한다. ‘프랑스의 영혼을 구현한 맛’이라고 찬사를 받는 이 요리는 오르톨랑의 눈알을 뽑은 채 어둡고 작은 공간에 21일 동안 움직이지 못하게 가둔다. 그리고 수수와 무화과, 포도 등을 먹여 원래 크기의 세 배가 될 때까지 살을 찌운 후, 고급 사과 브랜디에 담가 익사시킨다. 그리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통째로 구워 뼈까지 오도독 씹어 먹는데, 폐나 위가 터질 때 익사 시 들어간 브랜디가 흘러나오며 느껴지는 달콤함이 가히 천상의 맛이라고 한다. 이 기상천외의 요리를 먹을 때 신이 알면 천벌을 받을까 무서워서 하얀 냅킨을 머리에 뒤집어쓴다니 마지막 양심은 남아 있다는 건지, 어처구니가 없다.

인간은 과연 어디까지 잔인할 수 있을까. 우리를 위해 고통 속에서 하찮게 죽어가는 개나 거위, 소나 양에 대한 인간의 끝없는 욕망과 탐욕에 몸서리가 쳐진다. 

붓다의 전생 이야기를 모은 불교 설화집 《육도집경(六度集經)》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시비(尸毘)’라는 이름의 지혜롭고 자비로운 왕이 있었다. 하루는 사나운 매에게 쫓긴 비둘기 한 마리가 황급히 왕의 품 안으로 숨어들었다. 실은 시비왕의 지혜와 자비를 시험해 보려고 제석천과 비수갈마 천신(天神)이 각각 매와 비둘기로 변신한 거였다.

매가 비둘기를 내놓으라고 하자 왕은 ‘나는 일체중생을 제도코자 서원했기 때문에 비둘기를 돌려줄 수 없다’고 답한다. 그러자 매는 자기 또한 중생이 아니냐며 그걸 먹지 못하면 굶어 죽을 수밖에 없으니 비둘기를 달라고 간청한다.

난감해진 왕은 비둘기 대신 자신의 살을 떼어주겠다고 하자, 매는 저 비둘기와 똑같은 무게의 살을 베어달라고 요구한다. 왕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비둘기 무게만큼의 허벅지 살을 잘라 저울에 올려놓았다. 하지만 저울의 눈금은 비둘기 쪽으로 기울어진 채 꼼짝하지 않았다. 급기야 자신의 양팔과 다리 그리고 엉덩이 살까지 베어 올려놓았건만 여전히 비둘기의 무게가 더 나갔다. 마침내 왕은 저울 위에 올라서며 자신의 몸 전부를 보시하겠다고 말하자 그때야 무게의 균형이 맞았다. 

물론 설화의 마무리는 해피엔딩이다. 제석천이 왕의 희생을 찬탄하자 시비왕의 몸은 이전으로 돌아갔다. 이 사람이 바로 부처님의 전생 인물로, 왕이 중생을 위해 신명(身命)을 아끼지 않았음을 강조한 유명한 이야기다. 

짧지만 이 오롯한 일화 속에서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것은 비둘기와 시비왕의 무게다. 어찌 작은 비둘기와 사람의 중량이 같을 수 있겠는가마는 왕이 스스로를 저울에 올려놓자 눈금이 평형을 이루었다는 것은 사람이든 비둘기든 생명의 무게는 모두 다 같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대목이다. 

결국 평소에 생명을 존중하고 보살행을 실천했던 시비왕마저도 자신과 비둘기를 차별하고 누구에게나 하나밖에 없는 생명의 동등성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그저 자신의 신체 일부를 떼어주는 것으로 비둘기의 생명을 구할 수 있다는 잘못된 소견을 깨닫고 난 뒤에야 비로소 정각을 향해 한 걸음 더 나갈 수 있는 자기희생을 결심할 수 있었다. 모든 생명체의 목숨은 차별 없이 대등하고 소중하다는 시비왕의 알아차림은, 매사 인간을 중심으로 생명의 경중을 따지는 우리에게 따끔한 일침을 가한다. 

“모든 생명은 채찍을 두려워한다. 모든 생명은 살기를 소망한다. 자기 생명에 이것을 견주어 남을 죽이거나 죽게 하지 말라.” 《법구경》의 말씀이다. 생명은 그것을 보듬는 자의 것이어야지 파괴하는 자의 몫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자비의 가르침이다. 붓다의 미간백호(眉間白毫)처럼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밝고 또렷한 빛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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