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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고시조에 나타난 불교적 사유 / 홍성란
-진본(珍本) 《청구영언》을 중심으로
[82호] 2020년 06월 01일 (월) 홍성란 srorchid@daum.net

1. 머리말

조선시대 시조는 유가적 사유를 가진 사대부층과 그들의 후원을 입어 예술적 취향에 동반자적 역할을 한 기녀와 가객이 중심을 이룬다. 표면으로 나타난 사상은 유가적 사유를 벗어나지 못할 수밖에 없는 조건이었다. 하지만 신라 이후 고려가 쇠망할 때까지 불교는 왕실로부터 민간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의 삶과 문화를 지지하고 영도해온 사상적 기반이었다. 때문에 유교를 국시로 삼은 조선시대는 왕실과 사대부들 사이에서는 외유내불(外儒內佛)의 경향이 강하게 나타난다. 예컨대 조선왕조 7대 군주인 세조는 ‘호불군주’로 불렸으며, 부왕 세종은 소헌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석보상절》을 아들 수양에게 짓도록 할 정도였다. 또 세조는 간경도감을 설치하여 불경을 훈민정음으로 번역, 간행하게 하는 등 많은 간경 사업과 중창 불사를 했다. 조선 13대 명종 재위 15년간은 문정왕후가 섭정하며 불교는 중흥했으니 궁중 내명부를 중심으로 숭불의 명맥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시조의 주 담당층인 사대부 역시 이러한 현실적 조건 속에서 시조를 써왔다. 당연히 표면적 의식을 넘어 심층에는 세계인식이나 사유에서 불교적 사상이나 세계에 대한 이해가 기저사유로 작용했을 것이다. 따라서 고시조에도 불교적 사유를 내비친 경우가 상당히 발견되며 특히 관습적으로 사용하는 상투적 어구나 관용적 표현을 담은 시조에서 불교적 사유가 산견된다. ‘이런들~ 저런들~’ ‘오락가락’ ‘온동만동’ ‘네오 긔오 다르랴’와 같은 관용적 표현들은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사유의 근간이 되고 또 그 일반적 사유의 밑바탕에는 불교적 사유가 깔렸다고 본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고시조와 불교적 사유를 연관 지어 본 논의는 눈에 띄지 않는다. 이 글은 고시조와 불교적 사유에 관한 시론(試論)으로서 향후 심도 있는 논의를 견인하는 단초를 제공하기 위한 것이다. 

이 글에서 분석대상으로 삼은 시조는 남파(南坡) 김천택(金天澤, 1680년대~ ? )이 영조 4년(1728)에 엮은 가집 《청구영언(靑丘永言)》이다. 《청구영언》 소재 시조에는 불교적 사유가 스며 있기도 하고, 직접 언표한 경우가 적지 않게 보인다. 그 가운데 불교적 사유를 직접 드러낸 경우, 관용적 상투어구 또는 관습적 어휘 표현으로 드러낸 경우, 그리고 직접 언표는 없으나 의미 내용상으로 볼 때 불교적 사유가 담긴 고시조를 골라서 다시 ① 불이(不二) · 중도(中道) ② 무심(無心) ③ 무상(無常) ④ 초탈(超脫) · 관조(觀照) 이 네 가지로 범주화하여 읽고자 한다. 물론 이러한 분류와 항목화가 반드시 타당한가는 이론이 있을 수 있다. 사구백비(四句百非) 불일불이(不一不異) 같은 불교적 사유는 주제 분류나 작품분석에서도 일도양단식(一刀兩斷式) 접근은 피해야 함을 말해준다. 하지만 작품에 대한 보다 쉬운 이해를 위해 인위적 항목분할은 불가피하다. 

이 글은 이런 한계를 전제로 논의를 진행하되 〈장진주사〉나 〈맹상군가〉를 포함한 음왜지담(淫哇之談)에 속하는 만횡청류 항목은 대상에서 제외한다. 불교적 사유이기보다는 풍류 현장의 놀이와 시류에 관련한 희락적 사설이 주를 이루기 때문이다.

   
청구영언 원본

2. 불이와 중도론적 사유의 관용적 표현 

먼저 불이 사상이 나타난 것으로 볼 수 있는 시조를 읽는다. 불이의 경우, 분석대상 작품 가운데 의미 내용상 피아(彼我)가 다르지 않으며 대립과 차별을 초월한 절대 평등의 진리를 담고 있거나, 특정한 관용적 표현으로 불이 의식을 드러낸 작품이다. 이 글은 모든 대상 작품의 의미 비중이 어디에 놓여 있는가에 초점을 둔다.

 

140 반되 불이 되다 반되지 웨 불일소냐

돌히 별이 되다 돌이지 웨 별일소냐

불인가 별인가 니 그를 몰라 노라

 

상촌(象村) 신흠(申欽, 1566~1628)의 노래다. 반디가 꽁무니에 불빛을 내도 반디지 왜 (반디)불이냐는 것이다. (별)돌이 (별똥)별이 돼도 돌이지 왜 (별똥)별이냐는 것이다. 별이 지구에 떨어지면 운석이라는 말이다. 반디는 불빛을 달아도 반디이고 빛을 내던 별도 지구에 내려오면 운석일 뿐이니 돌이라는 것. 반딧불이다 별똥별이다 하며 가리는 일 자체를 모른다고 하였으니 분별하지 말자는 노래 아닐까. 뭐 이런 이야기를 가지고 헷갈리게 하는지 이 노래는 별 인기가 없었는가 진본과 가람(이병기)본에만 실려 있다. 

 

332 世事ㅣ 삼울이라 허틀고 쳐셰라

거귀여 드리치고 내 몰래라 고라쟈 

아야 덩덕궁 북 쳐라 이야지야 리라 

 

작자 표기 없이 올라온 이 노래는 7개 가집에 실려 있다. 세상일이 벗겨놓은 삼(麻) 껍질같이 헝클어지고 맺혀 있구나. 구기어 밀쳐두고 잊어버리고만 싶다. 아이야, 북이나 쳐라. “이야지야” 어울리자. 세상 모양은 다 헝클어져 뜻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해도 이것이야 저것이야 다 받아들이겠다는 것 아닌가. 분별심 내지 말고 어울려 지내자는 노래로 본다. 종장에서 ‘이야지야’ 하며 흥을 돋우니 누가 지었는가는 몰라도 7개 가집에 실렸으니 풍류 연석에서 불리긴 좀 불렸나 보다. 

 

344 가마귀 검거라 말고 오라비 셸 줄 어이

검거니 셰거니 一便도 져이고 

우리 수리두루미라 검도 셰도 아녜라

 

맨 처음 이 노래를 부른 이는 누구일까? 이 노래도 7개 가집에 작자 표기가 없거나 무명씨로 실려 있다. 까마귀와 해오라기는 흑백을 분별하는 관습적 비교 대상이다. 까마귀와 해오라기를 등장시켜 시비를 가리며 치우쳐 있는 세상을 건드리는 이 노래는 “검도 셰도 아”닌 수리두루미를 “우리”라 한다. 우리는 수리두루미라 검다 할 수도 없고 희다 할 수도 없지 않은가. 편 가르지 말자는 노래로 본다. 

분별을 떠난 의식이 직접 드러나는 경우로서 ‘긔오 네오 다르랴’라는 관용적 표현이 드러난 경우를 본다.

 

146 陶淵明 주근 後에 淵明이 나닷말이

을 네 일흠이 마초와 틀시고

도라와 守拙田園이야 긔오내오 다르랴

 

죽소(竹所) 김광욱(金光煜, 1580~1656)은 광해군 때 등제하여 벼슬이 도승지, 황해도관찰사, 한성판윤에 이르렀다. 무릉도원을 노래한 저 중국의 도연명(陶淵明, 365~427)이 죽은 후에 도연명이 또 나왔다고 했다. 죽소가 은거했다는 율리(栗里)가 산림처사 도연명이 놀던 율리라는 이름과 마침 같다는 데서 동일시하는 모습이다. 도연명이 세상에 드러나지 않으려고 어리석은 듯 전원에 숨어 살던 것을 “수졸전원”이라 했으니 죽소 또한 돌아와 전원에 살며 “긔오내오 다르랴”, 그나 나나 다를 것 없다고 한 것이다. 속뜻이야 어쨌거나 분별하지 말라는 노래 아닌가.

 

446 감쟝새 쟉다고 大鵬아 웃지 마라

九萬里 長天을 너도 고 저도 다

두어라 一般 飛鳥ㅣ니 네오 긔오 다르랴

 

크기로 이름난 상상의 새 대붕이 감장새를 보며 작다고 웃는가. 멀고 높은 하늘을 날기로는 날개 달린 짐승으로 너나 나나 다 할 수 있는 일. “너도 고 저도 다”며 크거나 작거나 날아다니는 새라는 건 일반으로 다를 게 무어냐는 항변이다. 

그런데 이 노래가 32개 가집에 실려 큰 인기를 누렸다니 살펴볼 데가 있다. 《병와가곡집》에는 이택(李澤, 1509~1573)의 노래로 되어 있는데, 가람본 《청구영언》과 《동국가사》에는 이택과 함께 숙종조(肅宗朝) 병사(兵使)로 되어 있다. 일석(이희승)본 《가곡원류》와 《대동풍아》에도 숙종조 병사로 되어 있으니 병사는 병마절도사를 가리킨다. 그런데 일석본 《가곡원류》에는 중종조 영상(領相)으로 되어 있다. 영상은 영의정을 가리킨다. 육당(최남선)본 《청구영언》에는 숙종조의 완산인 무병사(武兵使)로 되어 있고 나머지 가집은 작자 표기가 없다. 이들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의 인물은 중종(1488~1544) 때 영의정을 지낸 인물이다. 그다음은 이택(1509~1573)이고 그다음은 숙종(1661~1720) 때 병마절도사인데 이는 완산인 무병사와 같은 인물로 본다. 이렇게 작자의 생존 시기를 보면 이 노래는 처음 지은 중종 때 영의정의 작품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 작자가 누구이거나 이 노래가 인구에 회자되면서 15세기에서 18세기까지 유행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 그렇게 인기가 있었던 걸까. 화통한 노랫말 덕 아닐까. 굴뚝샌지 까마귄지 겁도 없지. 날개 달린 짐승으로 날아다니는 건 대붕이 너나 나나 다를 게 없으니 깝치지 말란다. 위계와 질서가 명확한 시대에 약자들에게 혹은 을들에게 가끔은 통쾌한 노래였을 것. 노랫말 뜻에 따라 이 노래는 전아한 풍의 이삭대엽(二數大葉)으로부터 분위기가 고조되어가는 삼삭대엽(三數大葉)에서 삼삭대엽낙희병초(三數大葉樂戲幷抄)와 우삭엽(羽數葉) 등으로 변화를 주며 기운차게 불러 풍류 연석의 흥을 돋운 것으로 보인다.

 

477 梨花에 露濕도록 뉘게 잡혀 못 오고

오쟈락 뷔혀 잡고 가지 마소 듸 無端히 치고 오쟈도 어렵더라

져 님아 네 안흘 져버보스라 네오 긔오 다르랴

 

배꽃에 이슬이 맺히는 시각은 심야를 지나 새벽. 그때까지 옷자락 부여잡고 가지 말라는 그에게 잡혀 있다가 결국 떨쳐버리고 온 사람. 그에게 서운하다고 발명하는 님에게 “네오 긔오 다르랴” 하며 역지사지(易地思之)해 보라는 노래다. 역지사지! 참 좋은 말이다.

내용이 이러하니 작자 표기가 되어 있을 리 없다. 그런 만큼 이 작품은 만횡청류 항목에는 들어 있지 않으나 악곡 분류는 만횡청류, 만삭대엽, 만횡, 농가 등으로 되어 있다. 누가 지었는지 적을 수도 없는 이 노래는 19개나 되는 가집에 실려 분위기에 따라 적절한 연행방식을 취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19개 가집에 실렸다는 것도 지금 남아 있는 기록이 그렇다는 의미다. 당대의 실상을 누가 손바닥 내보이듯 보여줄 수 있을까. 

 

다음은 대체로 중도 사상이 담긴 것으로 볼 수 있는 작품이다. 공유불이(空有不二)라는 점에서 불이와 중도를 무 자르듯 나누어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중도론적 사유는 중정(中正)의 도(道)로서 불고불락(不苦不樂), 고행과 쾌락의 양극단을 떠나니 기울거나 치우치지 않는다는 의미로 보면 ‘오락가락’ ‘오명가명’ ‘온동만동’ ‘물동말동’ ‘픨동말동’과 같은 관용적 표현을 들 수 있다. 

 

121 어제밤 눈 온 後에 이 조차 비최엿다

눈 後 빗치 그미 그지 업다

엇더타 天末浮雲은 오락가락 뇨

 

어젯밤 눈이 오고 오늘 밤 달빛은 맑기가 한량없다. 이 좋은 밤. 하늘가 구름은 왜 오락가락하는지. 하늘 가운데 구름도 아니고 하늘 끝자락 구름이니 천말부운은 한데 어울리지 아니하고 따로 먹은 마음이 있는 구름인가. 천말부운의 맞은편에도 구름은 있을지니 양극단을 떠나 치우치지 않는 중정의 도를 상촌은 말없이 말하는 것 아닐까. 

 

305 池塘에 비 리고 楊柳에  인 제

沙工은 어듸 가고 뷘 만 엿고

夕陽에  일흔 며기 오락가락 노매

 

연못에 비가 오고 버드나무에 안개가 끼었는데 사공은 어디 가고 빈 배만 매였는가. 석양에 짝 잃은 갈매기는 오락가락하는구나. 빈 배라 하여 사공을 찾을 일도 없다. 짝을 잃었다고 갈매기가 짝을 찾아 떠날 일도 없다. 없으면 없는 대로 풍경이고, 떠났으면 떠난 대로 오며 가며 하니 있고 없고를 따지지 않는 유유자적이다. 

이 노래가 수록된 28개 가집 가운데 《병와가곡집》에는 조헌(趙憲, 1544~1592)의 노래로 되어 있고 진본에는 무명씨로 되어 있다. 《동국가사》에는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 1467~1555), 그 밖에 선묘시인(宣廟時人), 중봉(重峯)이라는 표기도 보이고 아예 작자 표기가 없는 경우도 있다. 어쨌거나 28개나 되는 가집에 기록이 있다면 상당한 인기를 누린 작품이다. 아마도 짝 잃은 갈매기처럼 슬픔에도 기쁨에도 기울거나 치우치지 않고 오며 가며 또 오는 자적을 “지당에 비 뿌리고 양류에 내 끼인제”와 같이 유려하게 노래한 효과일 것이다.

 

367 梨花雨 흣릴 제 울며 잡고 離別 님

秋風 落葉에 저도 날 각가

千里에 외로온 만 오락가락 노매

 

이화우라! 배 꽃잎 속절없이 흩날리는 날 헤어졌는가. 추풍 낙엽! 가을바람에 낙엽이 구르니 한두 철 전쯤 이별인지. 먼 곳 어디 저도 나를 생각하는지. 이별의 도중에서 꿈길에는 볼 수 있다는 것인지 없다는 것인지. 없어도 있는 듯 있어도 없는 듯 오락가락 마음 다스리는 노래는 아닐까. 이 아련한 노래는 40개나 되는 가집에 수록되어 있으니 《병와가곡집》에는 계랑, 7개 가집에는 부안 명기, 나머지 가집에는 작자 표기가 없다. 

얼마나 많은 인기를 누린 것인가. 그 명성대로 지금 부안에 가면 매창공원이 있다. 부안 명기와 계랑은 매창(梅窓, 1573~1610)을 가리킨다. 매창은 당대의 명사로서 시를 잘 짓는 촌은(村隱) 유희경(劉希慶, 1545~1636)의 정인이었다. 부안에서의 만남을 잊지 못한 서울의 유희경은 계랑에게 주는 7편의 한시를 남겼으니 《촌은집》에 실려 있다. 이 가운데 계랑을 생각한다는 〈회계랑(懷癸娘)〉을 보면 이 시조가 화답시 같기도 하다. 아닌 게 아니라, 몇 개의 가집은 부안 명기는 시를 잘 지었다 했고, 《매창집》은 유희경이 상경한 뒤에 소식을 끊자 계랑은 이 시조를 짓고 수절하였다고 적었다.

 

031 山前에 有臺고 臺下에 有水ㅣ로다

 만흔 며기 오명가명 거든

엇더타 皎皎白駒 멀리 음 고

 

산턱에는 누대가 있고 누대 아래 물이 흐른다. 이 산과 이 물이 흐르는 반공중에 갈매기 떼는 오며 가며 한가로운데 망아지는 어찌 마음 멀리 두고 가려 하는지. 교교백구는 현자가 타는 티 없이 좋은 망아지다. 이 망아지에게 왜 마음을 딴 데 멀리 두고 있는가 묻는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 그러니 온다는 일과 간다는 일, “오명가명”에서 치우치지 말자는 은일(隱逸)의 마음을 읽는다. 이 은은히 아름다운 노래도 12개 가집에 실려 향유되었다. 

 

078 新院 院主ㅣ 되여 되롱 삿갓 메오이고

細雨 斜風에 一竿竹 빗기 드러

紅蓼花 白蘋洲渚에 오명가명 노라 

 

새로 지은 집주인이 되어 도롱이 입고 삿갓 쓰고 가는 비와 비껴 부는 바람을 맞으며 낚시나 하며 사는 일. 유가는 늘 현실정치에 뜻을 두고 있으니, 관로에서 그렇게 사는 것도 좋으나 낚시나 하며 여뀌꽃 흰 마름꽃 번지는 물가를 “오명가명” 지내는 것도 나쁠 것 없다. 궁실의 갈등을 감내하며 관료로서 사는 것도 의미 있겠으나, 자연과 더불어 자적하며 치우치지 않고 사는 것도 좋다는 송강(松江) 정철(鄭澈, 1536~1593)의 마음을 본다. 

256 榮辱이 並行니 富貴도 不關라

第一 江山에 내 혼자 님자 되야

夕陽에 낙싯대 두러 메고 오명가명 리라

 

산이 높으면 골이 깊다 하고 좋은 일이 있으면 나쁜 일이 있다 하듯이 영욕은 병행하는 것 아니냐. 그러니 부귀도 탐하지 않으리. 값없고 주인 없는 강산에 혼자 주인이 되어 낚시나 하며 소요하겠다는 노래. 부귀공명에서 떠난 마음이 오명가명 한다니 그저 떠난 것도 아니다. 정계에서 물러나 이렇게 낚시나 하며 지내는 건 부귀를 탐하지 않는 것이니 좋고 또 오라는 일이나 가라는 일이나 생기는 대로 오명가명 하겠다니 어디 매이거나 치우치지 않겠다는 것. 병와(甁窩) 이형상(李衡祥, 1653~1733)이 엮은 《병와가곡집》에는 작자가 남파 김천택으로 되어 있다. 남파는 당대 제일 가객으로 사라져가는 우리말 노래를 안타까워했다. 

 

무릇 문장과 시율은 세상에 간행되어 영구히 전해지므로 천년을 지나고도 오히려 없어지지 않는 것이 있는데, 노래와 같은 것은 한때 입에서 불리다가 저절로 희미해지고 결국 가서는 아예 없어지니 어찌 아깝지 않겠는가. 고려말로부터 국조에 이르기까지 이름 있는 벼슬아치, 학식 있는 선비, 그리고 민간 규수의 작품들을 일일이 수집하여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편록한 뒤 다듬어서 한 권으로 만들고 《청구영언》이라 이름 짓는다. 무릇 당세의 호사자들이 입으로 외우고 마음으로 즐거워하며, 손으로 펼치고 눈으로 보아 널리 전파시킬 것을 기대한다. 

무신년 여름 5월 16일에 남파노포는 쓰노라

夫文章詩律 刊行于世 傳之永久 歷千載而猶有所未泯者 至若永言則 一時諷詠於口頭 自然沈晦 未免煙沒 于後 豈不慨惜哉 自麗季 至國朝以來名公碩士及閭井閨秀之作 一一蒐輯 正訛繕寫 釐爲一卷 名之曰靑丘永言 使凡當世之好事者 口誦心惟 手披目覽 而啚廣傳焉 

歲戊申夏五月旣望 南坡老圃識 

 

신중에 신중을 거듭했던 그는 권위자의 인가를 받고자 벌열(閥閱) 경화사족으로서 가객들을 후원하던 마악노초 이정섭(李廷燮, 1688~1744)에게 발문을 청하여 정미년(1727) 늦여름에 받아 놓았다. 그리고 원로 시인 흑와(黑臥) 정래교(鄭來僑, 1681~1759)의 서문을 무신년(1728) 늦은 봄 상순에 받고 나서 그해 여름 5월 16일에 580수의 시조를 다 올린 뒤에다 이 같은 마음을 적어 놓았다. 마침내 책이 세상에 나왔다. 알다시피 한자문화권에서 우리말은 언문(諺文)이요 이언(俚言)이었다. 시라면 한시를 가리키는 것이었고 시조는 시여(詩餘)로서 한시로써 다 못한 차탄(嗟歎)을 우리말 노래 시조에 담았던 것이다. 이것이 곡절 많은 시조 역사의 한 대목이다.

 

399 功名도 辱이러라 富貴도 슈괴러라

萬頃 蒼波에 白髮漁翁 되야 이셔

白日이 照滄浪 제 오명가명 리라

 

공명도 욕되고 부귀도 수고스러우니 넓고 넓은 바다에 늙은 어부가 되겠다는 이 노래는 작자 표기 없이 6개 가집에 실려 있다. 그렇게 어옹이 되어서는 구름 없는 밝은 해가 푸른 물결 비출 때 “오명가명” 하겠단다. 어떤 이유였을까? 욕되고 수고스러운 중앙정치에서 물러난 유자. 초야우생처럼 백발어옹으로 살게 되었으나 오명가명 한다니 북천이 맑으면 우장(雨裝) 없이 다시 나설 수도 있겠다. 어쨌거나 집착하지는 않겠다는 노래로 본다. 

128 날을 뭇지 마라 前身이 柱下史ㅣ뢰

靑牛로 나간 後에 몃마 도라 온다

世間이 하 多事니 온동만동 여라

 

내가 누군지 묻지 말라는 상촌의 풍류가 멋스럽다. 나는 전생에 주하사 곧 전주하(殿柱下)에 시립(侍立)하여 천자의 장서를 맡아보는 관리 노자(老子)였으니, 노자가 서유(西遊)할 때 탔다는 청우를 타고 나간 뒤 몇 해 만에 돌아왔노라. 돌아와 보니 세간이 참으로 다사하여 오기는 왔으나 “온동만동”, 온 것인지 만 것인지 아직 노자처럼 청우 타고 유람 중인지 모르겠다는 것. 바깥세상이나 여기나 일 많기는 다르지 않으니 바깥세상 나들이가 좋았다는 것인지 이 세상으로 돌아온 것이 좋다는 것인지 알 둥 말 둥. 그저 치우쳐 살지 말라는 노래로 들린다. 

 

183 首陽山 린 물이 釣魚臺로 가다니

太公이 낙던 고기 나도 낙가 보련마

그 고기 至今히 업스니 물동말동 여라

 

선조대왕의 손자 낭원군(朗原君, 1640~1699)의 시조다. 태공이 낚시하던 수양산에 흐르던 물이 낭원군이 낚시하는 곳으로 흘러온다 하니 그 물에 놀던 물고기를 태공처럼 낚아보고 싶다는 것. 수양산을 흐르던 물은 물이로되 태공도 없고 그 고기도 지금 없음을 안다. 그러나 낭원군은 낚시를 드리우고 “물동말동”, 물 것 같기도 하고 말 것 같기도 하다는 풍류를 없는 물고기와 즐기는 것. 마음의 낚싯대를 드리운 낭원군에게 “태공이 낙던 고기”는 비유비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 아닌가.

290 梅花 녯 등걸에 봄졀이 도라 오니

녯 퓌던 柯枝에 픠염즉도 다마

春雪이 亂紛紛니 픨동말동 여라

 

《가곡원류》 계열 가집에 매화는 평양 기생이며 춘설 또한 기녀라는 기록이 있다(平壤妓梅花春雪亦妓). 봄이 오니 고매의 등걸에도 드문드문 꽃이 필 것 같다. 그런데 이를 시샘하는 봄눈이 어지럽게 날리니 활짝 피어나지는 못한다. “픨동말동”, 필 것 같기도 하고 피지 못 할 것 같기도 하다는 심정에는 춘설이 물러가기를 바라는 마음도 담긴 것. 역시 춘설이라는 젊은 기녀의 미모에 밀려난 늙은 기녀 매화가 설움을 토로한 것으로 보이기도 하니, 젊음도 늙음도 함께 동고동락(同苦同樂)하자는 것 아닌가. 누가 판단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래서 그런지 이 노래도 24개 가집에 실려 인기를 누렸다. 

 

3. 무심 

무심은 일체의 사념을 없앤 마음의 상태를 가리키며 무념무상은 완전히 무아의 경지에 달한 상태로서 무심과 동일하다고 본다. 무심은 망념을 떨어낸 진심이니 성(聖)과 범(凡)을 떠난 것으로, ‘나’라는 구속을 떠나고 ‘내 것’이라는 관념마저 버리니 무집착의 언표다. 

 

019 구버 千尋綠水 도라보니 萬疊靑山 

十丈 紅塵이 언매나 련고

江湖에 月白거든 더옥 無心 애라 

 

《농암집》에 수록된 이 작품을 진본에서는 18번부터 22번까지 5수를 농암의 작품 목록으로 올려놓고 있다. 그런데 이 작품이 실린 13개 가집 중에서 《병와가곡집》과 동양문고본 《가곡원류》는 작자를 김종직(1431~1492)으로 표기했다. “십장 홍진”은 오탁악세와 다름 아니겠지만 이 은거지는 굽어보면 깊은 물, 돌아보면 겹겹이 푸른 산이라. 강호에 달이 환히 떠오르면 세속의 파당과 당쟁에 휩쓸려 산다는 일은 더욱 헛된 일 같다. 무심의 언표를 드러내고 있듯이, 강호한정을 누린다는 것은 세상사를 벗어난 무심과 초탈 아니고는 있을 수 없는 일 아닌가.

 

021 山頭에 閑雲이 起고 水中에 白鷗ㅣ飛라 

無心코 多情니 이 두 거시로다 

一生애 시을 닛고 너 조차 노로리라

 

산마루에 한가한 구름이 일고 물 가운데 흰 갈매기 날고 있다. 한운과 썩 잘 어울리는 백구는 무심하여 한가로이 날아다니는 갈매기로 은일들이 망기사(忘機事)하고 지내는 강호의 표상이다. 그러니 일생의 시름을 잊고 무심한 듯 다정하게 어울리는 백구와 한운처럼 살겠다는 노래. 《농암집》에 수록된 이 작품은 14개 가집에 실려 있다. 《병와가곡집》과 도남(조윤제)본 《동가선》에는 작자가 김일손(1464~1498)으로, 《대동풍아》에는 김시습(1435~1493)으로 되어 있다. 

 

122 냇에 오라바 므스 일 셔 잇다

無心 져 고기를 여어 무슴 려다

아마도  믈에 잇거니 니저신들 엇리

 

상촌의 작품이다. 상촌에게는 이이(李珥)의 측근으로 배척받아 성균관 권지(權知)에 배정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냇가에 해오라기가 서 있다면 그저 먹이활동을 하는 것. 발목이 물에 잠긴 채 목석처럼 서 있는 해오라기는 무심히 노니는 물고기를 한순간에 낚아채려 오랫동안 엿보았을 것이다. 무심한 물고기는 상촌 자신을 가리킬 수도 있고 해오라기는 상촌을 배척한 무리일 수 있다. 그 무리에게 남을 해치려는 마음 작용을 버리고 너희도 무심히 살면 어떻겠냐고 빗대어 노래한 것 아닐까. 

 

308 秋江에 밤이 드니 물결이 노라

낙시 드리치니 고기 아니 무노라

無心 빗만 싯고 뷘  저어 오노라 

 

유려한 노랫말처럼 널리 알려진 이 노래는 33개 가집이 수록하고 있다. 14개 가집은 작자 표기가 없고, 사본을 포함한 《가곡원류》 계열의 19개 가집에서는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노래라 했으나 송나라 때 승려가 지은 한시에서 차용했다는 설도 있다(宋僧 船子和尙詩). 가을밤 강물 위에 배를 띄우고 낚시를 드리운다. 물결은 찬데 고기도 물지 않으니 달빛만 가득 싣고 빈 배를 저어 온다는 풍류. 이 말을 3장 6구 대구(對句) 형식에 담아 이토록 아름답게 노래하고 있다. 본시 고기 낚을 뜻이 없으니 무심히 배를 타고 나가 무심히 낚싯대를 드리운다. 고기가 물든 말든 상관없다. 권좌를 초개같이 여기니 궁실을 버리고 나온 월산대군에 대한 연민이 이 노래를 회자하게 했을까.

 

309 우 거슨 버국이가 프른 거슨 버들숩가

漁村 두세 집이 속에 날락들락 

夕陽에 款乃聲 듯거든 더옥 無心 여라 

 

《고산유고》와 《병와가곡집》을 포함한 25개 가집 중에 《동가선》의 송강(松江) 정철(鄭澈, 1536~1593)을 제외하면 모두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1587~1671)로 작자가 표기되어 있다. 고산의 〈어부사시사〉에서 봄을 노래한 ‘춘사’는 조흥구와 종장을 뺀 초장과 중장이 이 작품과 같다(우거시 벅구기가 프른거시 버들숩가/ 이어라 이어라/ 漁村 두어집이 속의 나락들락/ 지국총 지국총 어와/ 말가 기픈소희 온갇고기 뛰노다). 

어촌 두세 집이 안개 속에 보이는 듯 아니 보이는 듯한데 “더옥 무심”다 하듯 석양에 뱃노래가 들려오거나 아니거나 어떤 것도 마음에 없다. 진본을 교주한 정주동 · 유창근은 “관내성(款乃聲)”은 ‘으셩(欵乃聲)’의 잘못이라고 명시했다. ‘으’는 나무로 만든 노를 말하며 이는 배가 노를 젓는 소리와 비슷하여 뱃사람의 뱃노래를 가리킨다고 본다. 뻐꾸기 울음이어도 좋고 버들 숲이어도 좋을 어촌 풍광이 안갯속에 나타날 듯 사라질 듯 아련한데, 석양에 뱃노래가 들려온다. 그러거니 아니거니 물아일체(物我一體), 은일은 일체 사념이 없다. 

 

4. 무상

모든 것은 조금도 머물러 있지 않는다니 고정된 것은 없으므로 영원한 것은 없다. 모든 것은 변하고 변하여 언젠가는 없어지는 것.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것만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 그러니 모든 것이 헛되고 덧없다. ‘나’마저 내가 아니고 ‘내 것’이라는 것도 없다는데 무엇에 집착할 것인가. 주로 부정적 함의를 갖는 고시조가 이 범주에 든다. 

 

082 나모도 病이 드니 亭子ㅣ라도 쉬리 업다

豪華히 셔신 제 오리 가리 다 쉬더니

닙지고 柯枝 져즌 後ㅣ니 새도 아니 온다

 

송강 정철도 앞서 읽은 상촌 신흠의 122번 작품처럼 세태를 빗대어 노래한 것으로 보인다. 무성하고 싱싱한 정자나무처럼 호화롭던 시절에는 문지방 닳도록 오가며 잘 지내기를 구하던 인사들. 그러나 병들어 잎 지고 가지 젖은 나무 곁에는 새도 아니 오듯, 벼슬길 끊기고 병마 찾아온 이 곁에 인기척 끊겼는가. 찾아와 절하던 이들이 저 살기 바쁘다고 이제는 늙고 병들어 힘 빠진 이에게 전화 한 통 안 하는 인심을 어찌 탓하랴. 서운할 일도 아니다. 이 노래는 연민(이가원)본 《청구영언》에 작자가 백호(白湖) 임제(林悌, 1549~1587)로 되어 있고, 송강의 문집과 이본을 포함한 41개 가집에는 송강으로 나온다. 변하는 인심이란 올챙이가 꼬리 살랑이며 가듯 저 살 곳 찾아가는 모양이라. 이토록 인기를 끈 것을 보면, 예나 지금이나 그러려니 해야 할 일 많은가 보다.

 

084 中書堂 白玉杯 十年만에 고쳐 보니

고 흰 빗츤 녜온 듯 다

엇더타 사의 음은 朝夕變을 다

 

송강이 홍문관 수찬 교리 시절에 임금이 내리신 술잔을 십 년 세월이 흐른 뒤에 다시 본다는 것이다. 백옥으로 만든 술잔의 그 맑고 흰빛은 옛날과 같은데 그 시절에 함께했던 사람들의 마음은 조석으로 변하듯 한다고 했다. 제행무상이라 했으니 무상한 것이 인간사뿐인가. 점잖은 노랫말이지만 이 노래는 문집을 포함한 34개 가집에 실려 다양한 악곡으로 공감 공명하는 좌중의 흥을 돋우었던 것으로 보인다.

 

381 도 나지 계면 山河로 도라지고 

도 보롬 後ㅣ면  보터 이저온다 

世上에 富貴功名이 다 이런가 노라

 

해도 낮이 지나면 산하로 돌아들고 달도 보름이 지나면 가장자리부터 이지러진다. 세상살이 부귀공명이라는 것도 차고 이우는 달과 같다는 영휴(盈虧). 누가 부른지 모르지만 5개 가집에 실린 이 노래도 제행이 무상함을 자연스럽게 드러내고 있다.

 

5. 초탈 · 관조 

초탈은 세속적이고 일반적 한계를 벗어난 사유이니 번뇌 없는 무심과 통한다. 관조는 모든 것을 깨달아 명확히 아는 지혜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라면, 상당수의 고시조가 초탈 관조를 담고 있다고 본다. 

 

027 이런들 엇더며 져런들 엇더료 

草野 愚生이 이러타 엇더료 

믈며 泉石膏肓을 고쳐 므슴료

 

성리학을 체계화하고 후진 양성에 힘을 기울인 퇴계는 ‘동방지종(東方之宗)’으로 불린 대학자이다. 그는 중종, 인종, 명종, 선조 등 조선의 제11대~제14대 임금을 섬기면서 관료들과 유생들의 지극한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평생 현실정치에는 깊이 관여하지 않았다. 어린 임금 선조를 오래 모시지 못하고 건강을 이유로 벼슬에서 물러나 학문에 정진한 것도 그가 19세 되던 해 기묘사화를 겪으며 얻은 지혜가 있기 때문으로 본다. 

그런 그가 삶의 방식을 문제 삼지 말라 한다. 바라보면, 세속에 어울려 저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러나 거기서 벗어나 학문과 후진 양성에 몰입하며 초야에 묻혀 이렇게 사는 것도 고치고 싶지 않은 삶이라 한다. 이런저런 번우한 일에서 훨씬 벗어나 있는 퇴계. 초야 우생은 백성을 가리킨다기보다는 은일로서의 퇴계 자신을 가리키는 것 아닐까.

 

095 어제 오 눈이 沙堤에도 오돗가 

눈이 모래 고 모래도 눈이로다 

아마도 世上 일이야 다 이런가 노라 

 

하의자(荷衣子) 홍적(洪迪, 1549~1591)의 작품이다. 그는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기묘사화(1519)와 을사사화(1545)로 흉흉할 대로 흉흉한 세상에서 살아야 했으니 텔레비전을 끄듯이 초야에 묻혀 살거나, 그러려니 무심 초탈하는 길만이 길이었을지 모를 일. 

어제 오던 눈이 모래언덕에도 내렸는가. 오늘 나와보니 흰 눈이 모래언덕에도 쌓여 있구나. 눈언덕이 모래밭 같기도 하고 모래언덕이 눈밭 같기도 하니 그저 하얗기로 보면 같을 수 있지. 그러면서 세상일도 다 이와 같다고 했다. 눈과 모래가 어찌 같을 수 있을까만 진위를 가리는 일에서 초연하니 현실을 아랑곳하지 않는 초탈 아닌가.

 

101 時節도 져러니 人事도 이러다

이러 거니 어이 져러 아닐소냐

이런쟈 져런쟈 니 한숨 계워 노라

 

청빈하면서도 해학이 넘치는 재상으로 우리가 추앙하는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1556~1618)의 노래다. 그가 성장하던 시기는 불교를 중흥시키고자 했던 문정왕후 쪽 훈구 세력과 성리학적 이념을 구현하려는 사림이 치열하게 부딪히는 와중에 권력 핵심부의 비리 부패가 만연한 시대였다. 

예기치 않은 천재지변 아니라면 시절도 사람이 만드는 것이니 결국 인사가 문제다. “시절도 져러니”라는 말이 부패한 정국의 마땅치 않음을 가리킨다고 보면, 비리를 서슴없이 저지르는 관료들 처세 또한 마땅치 않은 것. 제 눈의 들보는 알아차리지 못하고 남의 눈 티끌만 들추어내는 혼란에 한숨짓는다. 초탈 아니고서 한숨으로 그냥 지나갈 수는 없지 않을까.

 

216 이런들 엇더며 져런들 엇더료

萬壽山 드렁츩이 얼거진들 엇더리

우리도 이 치 얼거져 百年지 누리리라

 

김천택은 《청구영언》을 편찬하며 열성어제(列聖御製) 항목을 만들어 태종의 시조 1수, 효종의 시조 3수, 숙종의 시조 1수를 올려놓았는데 물론 이 노래가 첫 번째로 등장하는 이방원의 작품이다. 우리는 이를 역성혁명(易姓革命)이라는 말로 방원이 조선 건국을 위해 정몽주와 변안렬을 회유하는 노래라 이해해 왔다. 그러나 회유라기보다는 만수산에 흐드러져 얼싸안고 벋어가는 칡넝쿨처럼 한데 어울려 대동하자는 마음이 보인다. 나라도 이 땅이고 사람도 이 땅의 사람들인데 부패하여 더 이상 회생의 기미가 없는 고려의 문을 닫고 기운차게 새 나라를 함께 만들어가자는 대화엄(大華嚴). 방원은 초연히 세사의 번뇌를 잊고 순리대로 함께 살자는 지혜와 초탈의 노래를 부른 것 아닌가. 그러니 이 노래가 근세의 《협률대성》이나 《화원악보》를 포함한 26개 가집에 실려 인기를 끈 것 같다. 

여기서 가집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이 가집의 수록 상황에 대한 소상한 정보는 모산(慕山) 심재완(沈載完, 1918~2011) 선생 덕이다. 모산이 엮은 교본 《역대시조전서》라는 역작. 모산은 손글씨를 일일이 써야 했던 시절에 이 책에 43개 이상의 가집과 송강, 고산, 농암 등의 개인 문집, 판본, 필사본을 망라하여 시조 3,335수를 올려놓았다. 악곡 명칭과 작자 표기는 물론 이본의 노랫말까지 세세히 기록하였으니 오늘 이 앎의 기쁨은 선생의 은덕에서 비롯한다. 

 

331 어리거든 채 어리거나 밋치거든 채 밋치거나

어린 듯 밋친 듯 아 듯 모로 듯

이런가 져런가 니 아므란 줄 몰래라

 

어리석을 양이면 매우 어리석거나 미치려거든 아주 미쳐버리거나 했으면 차라리 좋겠다는 마음. 어리석은 것 같기도 하고 미친 것 같기도 하고 아는 것 같기도 하고 모르는 것 같기도 하니 아무도 모를 거라는 말이다. 헷갈리기 그지없으니 따져본들 무엇하랴. 아무래도 좋다. 이런가 저런가 가리는 데서 떠나 무심히 초연히 산다는 노래 아닌가. 이 노래는 9개 가집에 실려 있는데 가람본 《청구영언》만이 삼주(三洲) 이정보(李鼎輔, 1693~1766)의 노래라 했고 다른 가집에는 작자 표기가 없다.

 

129 是非 업슨 後ㅣ라 榮辱이 다 不關타

琴書를 흐튼 後에 이 몸이 閑暇다

白鷗ㅣ야 機事를 니즘은 너와 낸가 노라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않고 살게 되니 영예도 치욕도 나와는 상관없다. 서책을 읽으며 거문고를 타며 자적하던 풍류마저도 접었으니 담적(淡寂). 시비를 떠난 치자로서 지락마저 버린 학자로서 그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다는 사유. 기사를 잊고 한가로운 마음으로 자연을 바라보니 흰 갈매기가 물가에 날고 있다. 상촌 신흠은 세상사 잊고 초연한 것은 갈매기와 자신이라 노래하고 있다. 

 

147 功名도 니젓노라 富貴도 니젓노라

世上 번우한 일 다 주어 니젓노라

내 몸을 내자 니즈니 이 아니 니즈랴

 

앞서 읽은 146번 작품에서 자신을 도연명과 동일시한 김광욱의 노래다. 천성이 단아하고 곧아서 남과 사귀기를 즐기지 않았다는 그는 고위관직에 있었으나 정치가 어지러울 때는 강촌 누옥에 은거했다. 유자의 세계관으로 볼 때 우환의식이 관직을 버릴 수 없게 하지만 강호에 물러나 있다고 해도 그것은 역군은(亦君恩). 어떤 교유도 없이 중앙정치에서 물러나 고요한 마음으로 북천을 바라보는 이. 강호에 은거하는 자신도 잊고 번우한 일마저 다 잊었다는 이. 세사에 초연한 이의 맑은 지혜가 보이는 노래 아닌가. 

 

6. 맺는말

외유내불. 우리 민족의 사상적 기저에 불교적 사유가 스미어 있음은 마땅한 일이다. 그동안 억불숭유라는 막연한 관념이 고시조의 불교적 사유 탐색을 가로막았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생로병사라는 삶의 형식을 불교적 사유의 근간인 제행무상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왔다. 인간은 무상한 존재이고 무상하기에 무아이고 공이며 공유불이라면 불교적 사유로서 통하지 않는 바가 없을 것이다. 초탈이나 관조 또한 무심하지 않고는 도달할 수 없는 경지이므로 무심도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거나 배척하지 않는 사유라 보면 불이 · 중도와 다르지 않다. 

입을 열면 틀린다는 말씀도 있거니와 이 글의 모든 접근방법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분석대상을 확대하여 고시조에 대한 불교적 해석이 활발하고 심도 있게 전개된다면 더 많은 고시조에서 다양한 불교적 사유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

 

홍성란
시인. 1989년 중앙시조백일장으로 등단. 《춤》 《바람의 머리카락》 한국대표명시선 100 《애인 있어요》 단시조 60선 《소풍》 시조감상 에세이 《백팔번뇌-하늘의 소리 땅의 소리》 등이 있다. 방송대 · 성균관대 강사 등 역임. 유심작품상, 중앙시조대상, 대한민국문화예술상, 한국시조대상, 조운문학상 등 수상. 현재 유심시조아카데미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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