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협 전남대 인류학과 교수

할아버님께서는 우리 가족과는 거의 함께 사시지 않았다. 해방 전부터 6.25이후까지는 증심사입구의 초가에 오방정이라는 현판을 걸어놓고 사셨고, 내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때에는 적십자병원 근처의 작은 집과 나주의 음성나환자 촌을 오가며 지내셨던 것 같다. 말년에는 원효사계곡으로 올라 가셔서 결핵환자들과 지내셨다.

그래서 우리 집에는 할아버님과 함께 찍은 가족사진이 없는 것처럼 나의 할아버님에 대한 기억도 많지 않다. 초등학교 2-3학년 시절 YMCA 옆에 있던 우리 집 골목에 가끔 나타나실 때면 동네 꼬마들에게 사탕을 주시던 일과, 집으로 나환자들을 데리고 오신 일 등이 생각난다.

역시 초등학교 때 적십자병원을 다녀오는 길에 혼자 문득 할아버님을 찾아뵈었을 때 방 아랫목에 단정히 앉아 책을 보고 계시다가 이불 밑에서 삶은 달걀 하나를 꺼내 내 손에 쥐어주셨는데 그 때 그 달걀의 따스한 온기가 왠지 오늘까지 잊혀지지 않는다.

중학교 때 할아버님께서는 몇 달간 우리 집에 와 계셨는데 새벽에 일찍 일어나셔서 방안에서 옷을 벗으시고 한시간여를 요가 비슷한 맨손 체조와 냉수욕을 매일 하실 때 나도 가끔 따라 하면서 할아버님의 진지한 태도 때문에 인도의 수도자를 자꾸 연상하던 일과, 고등학교 때 함석헌선생이 집으로 찾아 오셔서 두 분이 밤이 깊도록 무슨 이야긴가 심각한 표정으로 나누실 적의 할아버님의 꼿꼿한 모습도 기억에 남아있다.

이처럼 나의 할아버님에 대한 기억은 매우 단편적이어서 나는 할아버님에 대하여 뭐라 말 할 자격이 없다. 더구나 변변치 못한 세속적 삶을 살아온 후손으로서 나는 할아버님께서 치열하게 살아오신 생의 자취와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고 있다. 다만 나는 할아버님의 임종을 지켜보면서 할아버님의 생에 대하여 새삼 생각게 되었고 비로소 할아버님의 참 모습을 알게되었다. 아니 알려고 조금씩 노력하고 있다는 표현이 정확 할 것이다.

할아버님은 내가 대학 2학년 때인 1966년에 돌아가셨다. 돌아가실 때의 연세가 만 86세 이셨으니 할아버님께서는 수를 누리신 셈이다. 그러나 평소 매우 규칙적이고 절제된 생활을 해오셨고 모든 면에서 자기관리에 철저하셨던 할아버님의 삶을 생각하면 할아버님께서는 훨씬 더 오래 사실 수 있었으리라 확신하고 있다.

86년이라는 짧지 않은 기간동안 보람은 있으되 결코 안락하고 평범한 생을 살아오지 않으셨던 할아버님께서는 86세가 되시던 해에 아마도 지상에서의 자신의 임무를 마감하고 당신이 그토록 가시기를 원했던 하나님의 곁으로 떠나실 채비를 스스로 시작하신 것 같다.

돌아가시기 전 수년동안 무등산 원효사 계곡의 초가에 기거하시던 할아버님께서는 65년 말경부터 곡기를 서서히 줄이시기 시작하셨으며 66년 2월 광주의 집으로 내려오신 뒤부터는 단식기도에 들어가 곡기를 완전히 끊으심으로서 서서히 임종을 맞이하셨던 것이다. 나는 할아버님께서 광주의 집으로 내려오신 2월경부터 개학이 되어 부득이 상경해야 했던 3월 중순까지 3주일 남짓 할아버님을 옆에서 모셨다. 아니 옆에서 모셨다 기보다는 철이 든 후 짧은 기간이나마 할아버님의 말씀을 듣고 나누며 할아버님과 함께 살았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지 모른다.

곡기를 끊으신 할아버님은 몹시도 야위어 갔으나 얼굴은 헤 맑았고 즐겁고 평안한 마음으로 죽음을 맞이하고 계셨다. 할아버님께서는 나의 손을 잡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매우 충만 된 삶을 살았다. 모든 것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이제 곧 하나님의 곁으로 가게되어 진심으로 기쁘다.” 할아버님은 모든 것에 이미 초연해 계셔서 담담하고 평화로움 그 자체였다. 할아버님의 임종을 눈앞에 두고 학교수업 때문에 상경한다는 것이 몹시도 꺼려졌던 나의 등을 밀어내신 것도 역시 할아버님이셨다.

할아버님께서 관심을 보이신 것은 일상의 형식이 아니라 내 영혼의 구원이었고 그래서 내가 어디에 있던지 곧고 맑은 삶을 살 것을 당부하셨다. 할아버님께서는 죽음이란 인생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시작이며, 따라서 그것은 슬퍼해야 할 일이 아니라 차라리 기뻐해야 할 생의 계기임을 몸소 보여주셨다. 내가 서울로 떠난 뒤 할아버님께서는 두 달 여를 더 이 지상에 머무셨다. 그 동안도 몹시 평안하게 성경을 읽으시거나 또는 옆에 있는 사람이 당신께 읽어 드리도록 하고 후손과 지인들에게 필요한 말씀들을 남기시곤 하시다가 5월 14일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편안히 눈을 감으셨다한다.

대학 2학년이란 이제 막 인생에 대한 진지한 생각과 설계를 시작 할 때이다. 그래서 그 당시 나에게 죽음은 함랫이나 맥베드 등에서 읽은 ‘두려움’이나 ‘허무함’과 같은 관념적인 형태로만 이해되고 있었다. 그런 나에게 할아버님의 <죽음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는 하나의 충격이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삶이란 후회가 없는 삶이며, 그 자체 충만 된 삶을 살았다는 증거일 것이다.

나는 할아버님의 임종과정을 지켜보면서 큰 깨달음을 얻었고 그 때문에 그 후 할아버님께서 치열하게 살아오신 생의 자취와 의미에 관심을 갖게되면서 점차 할아버님과 더욱 가깝게 되었다. 그러한 점에서 할아버님께서는 오늘날에도 나와 함께 계시며 나를 굽어보고 계신다.

나는 살아오면서 할아버님의 모습과 만날 때 깊은 감흥을 느낀다. 7 년 전 성철스님이 해인사 백련암에서 열반 하셨을 때 그가 남긴 유일한 재산이었던 누더기 옷과 몇 점의 물품은 할아버님이 임종시 지니고 계셨던 오래된 성경과 노자의 도덕경, 그리고 작은 십자가와 안경을 떠올리게 했다.

그리고 그에서 무소유의 삶과 무욕의 삶, 그리고 고독한 수행과 치열한 실천의 정신은 종교의 벽을 넘는 보편적 가치임을 느꼈다. 최근에는 미국의 환경 운동가 스콧 니어링(Scott Nearing)의 자서전을 읽으면서 나는 또 할아버님과 만났다.

스콧 니어링은 자본주의의 모순과 무절제한 소비문화가 가져온 불평등과 환경파괴, 그리고 그에 따라 우리의 삶이 의미 없이 바빠지고 갈수록 황폐화되어 가는 것을 실천적으로 일깨워 주기를 원했다. 이를 위해 그는 화려한 경력과 안락한 문명의 생활을 버리고 미대륙 동북부에 위치한 메인주의 산골짝에 들어가 40여 년을 농사를 지으며 자급 자족적인 삶을 산 사람이다.

그는 가난했지만 아무 것도 부러워하지 않았고 개인적 희생을 개의치 않고 원칙을 지키며 산 사람이었다. 극도로 단순하고, 검약하고, 가난한 생활을 시작한지 20년쯤 뒤부터 쓰기 시작한 그의 자서전이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는 이유는 그가 진정으로 의미 있고 충만 된 삶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몸소 보여주고 있기 때문 일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할아버님의 삶을 생각했고 민족과 국경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풍요롭고 의미 있는 삶의 자취를 발견하는 기쁨을 맛보았다. 스콧 니어링은 할아버님보다 3년 늦은 1883년에 태어나 100세가 되던 1983년에 이 승을 떠났으니 할아버님보다 17년을 더 산 셈이다. 그는 놀랍게도 100세가 되던 해 할아버님처럼 스스로 곡기를 끊음으로서 평화로운 죽음을 맞이하였다. 죽음을 두려워 않는 삶이란 여한이 없는 삶이고 후회가 없는 삶일지니 이는 보람되고 충만한 삶을 산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축복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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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님은 자신이 가질 수 있는 모든 것을 남에게 주셨다. 다섯 가지 속된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비운다는 뜻을 함축 한 할아버님의 호 오방(五放)도 자신이 취하지 않고 남에게 베풀기 위한 자세를 염두에 둔 것이리라. 할아버님께서는 만년에 오방의 뜻을 다음과 같이 새롭게 해석하시고자 했다 한다.

즉 가족에 대하여는 거만과 방만함을 버리고, 사회에 대하여는 안일한 자세를 버리고, 경제적으로는 물질에 예속되는 것을 버리고, 정치에서는 무관심과 무책임함을 버리고, 종교에서는 신조 없이 옮겨 다니는 것을 버린다.(家族 에 放慢, 社會에 放逸, 經濟에 放從, 政治에 放棄, 宗敎에 放浪.) 아마도 이 부분은 할아버님의 관심이 생의 흐름에 따라 초기에는 자기 자신이 취해야 할 자세로서 오방의 뜻을 세우셨고 나중에는 그 뜻을 사회가 필요로 하는 생활의 원칙으로 확대시키고자 하신 데서 비롯되었을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 할 듯하다.

여하튼 할아버님께서는 모든 것을 버리심으로서 모든 것을 얻으신 삶을 사셨다. 또한 그는 모든 것을 버림으로서 진정으로 자유로워 지셨다. 할아버님께서는 이 세상을 떠나실 때 물질적으로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었으나 이 곳에 많은 것을 남겨 놓고 가셨다. 금남로에서 학동에 이르는 광주의 중심에는 할아버님이 설립하신 광주 중앙교회가 있고 할아버님께서 전통을 세우신 YMCA, 그리고 할아버님께서 상해까지 가셔서 거금의 설비자금을 가져와 시작된 전남의대가 있다.

이 들은 영혼, 육신, 사회 등 서로 다른 영역에 관여하는 기관들이지만 모두 사회적으로 베푼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으며 그 동안 광주의 뜻 있는 후세들에 의하여 건강한 기관들로 육성되어 시민들의 긍지가 되고 있다. 그래서 오늘도 금남로를 걸으며 나는 할아버님의 체취를 느끼는 것이다. 이 세상에 계셨다면 이제 120세를 맞으신 할아버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계시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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