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붓다의 가르침을 배우고 익히는 것은 개인적으로는 깨우침을 얻기 위함이지만, 더 나아가서 중생을 제도하려는 목적도 있다. 내가 깨달음을 얻고 중생도 모두 제도하면 불국토가 현실화될 것이다. 그런데 붓다는 어떤 중생을 제도의 대상으로 삼으라고 가르쳤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가 많이 지니고 독송하는 《금강경》에서 찾을 수 있다. 여기서 붓다는 “알에서 태어난 것이나, 태에서 태어난 것이나, 습기에서 태어난 것이나, 변화하여 태어난 것이나, 형상이 있는 것이나, 형상이 없는 것이나, 생각이 있는 것이나, 생각이 없는 것이나, 생각이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은 것 등 온갖 중생을 내가 모두 완전한 열반에 들어가게 하는데, 이처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중생을 열반에 들게 하였으나, 실제로는 완전한 열반을 얻은 중생은 아무도 없다.”고 하였다. 《금강경》을 처음 읽는 사람들은 첫머리부터 무슨 말인지 어리둥절하겠지만, 어떻든 붓다는 심지어는 곰팡이나 아메바도 제도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이 중생들을 모두 제도하면 불국토가 완성될 터이다.

어떤 종교에서는 인간을 제외한 모든 생명체는 인간의 음식 용도로 창조되었다고 한다. 그 전통에 따라서 유럽과 유럽의 영향을 받은 여러 나라의 법체계는 모든 동식물을 물건으로 취급하여, 남이 기르는 애완견을 죽이면 생명을 살해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재물 손괴로 취급한다. 이러한 시각은 20세기 말부터 차츰 변하기 시작했다. 자연보호에서 출발하여 생명존중과 환경보호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가치관이 퍼져 나갔다. 유럽에서는 모피 제품을 몸에 걸친 사람을 백안시하는 분위기가 확산되었고 국제적인 동물보호 운동도 활발해졌다. 붓다보다도 2,500년 늦게 제정신을 차린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1991년에 동물보호법을 제정하고 그 이후에 점차 동물보호를 확대하고 규정을 구체화하는 내용으로 개정을 거듭하여 왔다. 현행법을 보면, 동물보호의 기본 원칙을 천명하고, 동물을 보호할 국가와 지방자치단체, 국민의 책무, 적정한 사육과 관리, 학대 금지, 운송방법, 도살 방법, 수술 방법, 유기되었거나 학대받는 동물의 구조와 보호, 동물실험 등에 관하여 상세한 규정을 두고, 마지막으로 이 법을 어겼을 경우에 적용할 형벌과 과태료를 규정하였다. 이 법률을 보면 적어도 척추동물에 대해서는 법으로 인도적인 보호를 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추세를 보면 불국토가 멀지 않아 보일 수도 있겠다. 인간은 물론이고 동물에게도 자비를 베푸는 세상이 올 것 같으니 말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불국토를 이루는 방향을 제대로 잡아 나아가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운동을 벌이는 이들의 움직임에서 이상기류가 감지된다는 점이다. 17년 전에 천성산 터널 공사 중지 가처분 소송에서 도롱뇽까지 원고로 등장했고, 3년 전에는 산양 28마리가 원고로 등장해서 설악산 케이블카 설치허가를 취소해달라는 소송까지 있었다. 그러나 두 사건 모두 동물은 당사자가 될 수 없다는 이유로 소각하 판결을 받았다. 동물이 소송당사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은 이들이 법률상 권리의 주체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법률용어로는 ‘권리능력’이 없다고 한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동물과 환경을 보호하자는 운동이 동물에게 동물권이라는 권리를 인정하자는 운동으로 번져가고 있다. 동물에게 권리주체로서 법적인 지위를 부여하여 두텁게 보호하자는 취지이다.

동물의 두터운 보호는 좋은 일이다. 그런데 동물에게 권리를 인정하여 준다고 동물보호가 잘되는지가 문제이다. 권리의 인정이 의미 있는 것은 권리자가 그 권리를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권리자는 권리를 행사하지 않을 자유도 가진다. 법은 권리 위에서 잠자는 자는 보호하지 않는다. 권리를 행사하는 방법은 상대방에 대한 ‘의사표시’이다. 권리란 그런 것인데 권리행사는커녕 아무런 의사표시도 하지 못하는 동물들에게 권리능력을 인정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행사할 수 없는 권리를 동물에게 주는 것은 이솝우화 ‘여우와 두루미’를 연상시킨다. 이것은 자비도 아니고 보시도 아니다. 설마 늑대가 토끼를 잡아먹는 것을 늑대의 권리행사로 보겠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동물에게 권리능력을 인정하자고 주장하는 이들은 미국에서도 동물에게 권리를 인정한다든가, 사람이 동물을 대리해서 권리를 행사하면 된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은 법적으로 의미가 없다. 미국의 법은 우리같이 정밀한 체계를 갖춘 대륙법과는 근본부터가 다르다. 동물은 물론 심지어는 강과 산, 나무에도 각각 권리를 인정하는 나라도 있는데, 그런 샤머니즘을 연상시키는 권리개념을 우리가 들여올 일은 아니다. 동물권은 듣기에는 그럴싸할지 몰라도, 실제로 동물을 위해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동물권을 인간이 대리해서 행사한다지만 이는 실제로는 동물을 인간처럼 두텁게 보호한다는 말을 에둘러 포장한 것에 불과하다. 동물을 권리의 주체가 아닌 보호의 객체로 삼아 두텁게 보호하는 것이 올곧은 길이다.

자비와 보시로 불국토를 이루는 길은 절대 멋으로 갈 수 없다. 만들어놓은 동물보호법부터 제대로 지키는 것이 급선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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