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토ㆍ지은원소장 『관세음보살32응탱』을 중심으로

* 본 논문은 2005년도 제17회 ‘國華賞’(일본 朝日新聞社와 國華社 주관) 수상논문인 〈조선전기의 관음보살의 양식적 변용과 그 응신묘법의 도상-京都ㆍ知恩院소장 觀世音菩薩三十二應幀의 明朝형식의 변용을 중심으로-〉 (《佛敎藝術》276호, 2004년, 일본 每日新聞社)를 새롭게 요약 구성한 것이다.

무진의보살이 부처님에게 물었다. “세존이시여 관세음보살이 어떻게 이 사바세계에 머무시며 어떻게 중생들을 위해 설법하십니까? 그 방편의 힘, 과연 어떠한 것입니까?” 부처가 무진의보살에게 말했다. “선남자여, 어떤 국토의 중생이 마땅히 부처의 모습으로 제도가 된다면 관세음보살은 곧 부처의 모습으로 나타나 그를 위해 설법하시고, 벽지불의 모습으로 제도가 된다면 벽지불의 모습으로 나타나 그를 위해 설법하시고, 성문의 모습으로 제도가 된다면 성문의 모습으로…부자의 모습으로 제도가 된다면 부자의 모습으로…관리의 모습으로, 부인의 모습으로, 어린 소년 소녀의 모습으로, 천룡의 모습으로, 야차의 모습으로, 아수라의 모습으로, 사람 또 사람이 아닌 모습으로…온갖 형상으로 모든 국토에 머물며 중생을 괴로움으로부터 구제한다.

《묘법연화경》‘관세음보살보문품’

“관세음보살의 보살행이 실제로 어떠한 방편으로 이루어지는가”를 묻는 무진의보살에게, 세존은 중생 각각의 근기, 즉 그 수준에 맞추어 관음보살이 화신하여 각각의 염원에 응한다고 답한다. 법화경 관세음보살보문품에는 부처로부터 시작하여 집금강신에 이르기까지 32응신으로 변신하여 중생을 번뇌와 재난으로부터 구하는 ‘觀音應身의 方便之力’이 설해져있다. 바로 이 화신 구제의 극적인 순간을 可視化한 작품이 바로 「觀世音菩薩三十二應幀」(이하, 본 작품, 도1)이다.

물론 32는, 불상(佛相)의 완전한 위덕을 상징하는 32상80종호에서와 같이 불존(佛尊)의 가시적 형상화(응신)를 말할 때 언급되는 가장 기본이 되는 숫자이다. 선종의 핵심 경전인 《금강경(金剛經)》 역시 불법을 문자라는 형상을 빌어 말할 때, 32장이라는 언어의 방편으로 나누어 대중에게 그 진리를 설파하고 있다.

불가에서 어떤 형태로도 가시화할 수 없는 법신(法身)을 이야기할 때, 즉 중생의 제도를 위해 이를 불가피하게 형상이나 문자로 보일 수 밖에 없을 때는, 이 불상의 32상에 근거한 상징적은 숫자를 즐겨 쓰는 경향이 있다. 물론 여기서 언급한 관세음보살이 ‘32응신’으로 화현한다라는 것은, ‘완전한 위덕으로’또는 ‘무량무변의 모습으로’라고 의역해도 무관할 것이다.

嘉靖29(1550)年銘의 본 작품은 일본 교토의 정토종 본산인 지은원에 훌륭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다. 본 작품은 조선왕조 제12대왕 인종대왕(仁宗大王)의 죽음을 추모하기위해 부인 공의왕대비(恭懿王大妃)가 발원한 왕실작품으로 그 역사적 가치 또한 크다. 작품 크기가 종횡 약 2미터에 달하는 대형의 화폭에는 신비로운 산수를 배경으로, 관음의 화신 고난 구제 장면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며 장엄하게 펼쳐지고 있다.

화면의 공간구성과 유려한 필치에 나타나는 회화적 우수성때문에, 본 작품은 조선전기뿐만아니라 한국불화를 대표하는 걸작으로 손꼽히고 있다. 동아시아의 관음화신 신앙을 표현하는 데 있어, 이렇게 독보적인 회화적 창조성을 보이는 작품은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때문에 본 작품은 한국에서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의 백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산속의 수많은 계곡과 계곡 사이에서 구름이 피어오르고 그 속에 숨겨진 속세의 천차만별의 삼라만상, 즉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부딪치는 온갖 어려움과 위협적인 죽음의 장면 장면들이 하나하나씩 드러나고 이는 어느덧 화면 전체를 파노라마처럼 가득 메우고 있다(도1-1,도1-2,도1-3). 이러한 재난과 고통의 극적인 순간순간을, 작품 가운데 위치한 자비의 화신인 관세음보살(도4)은 하나도 빠짐없이 두루 살피고 있다. 대승불교의 핵심사상인 불신론(佛身論), 즉 삼신(三身)사상 중에서 응신(應身)의 개념이 극대화된 것이 이 관음32응신이고, 그 구원의 영험한 순간을 도해한 것이 본 작품이라 하겠다.

그러나 본 작품은 그 유명세에 비해, 의아스럽게도 작품에 대한 면밀한 실물 기초조사에서부터 해명되지 않은 점이 너무나 많은 듯하다. 쿄토ㆍ지은원의 특별한 허가로 본 작품을 조사하던 중, 다음과 같은 의문이 꼬리를 문다. 첫째, 고려와 완전히 결별된 새로운 독자적 양식의 태동이, ‘숭유억불(崇儒抑佛)’의 시대에 그것도 유교적 모범을 보여야하는 왕실에서, 어떻게 가능했는가? 둘째, 본 작품의 ‘삼십이응신(三十二應)’이라는 숫자는 어디에서 유래하는가?

소의경전인 법화경과 능엄경의 상관관계는 무엇인가. 셋째, 기존에 막연히 운운되었던 중국으로부터 수용론 또는 그 반대로 지나치게 강조되었던 한국의 독자성 등, 단지 인상 판단에 근거한 해석을 넘어, 좀 더 객관적이고 대외적으로 설득력이 있는 논의가 필요한 시점은 아닌가? 이러한 취지 아래, 당시 한ㆍ중ㆍ일 삼국의 작품 양상을 입체적으로 비교 고찰하여, 궁극적으로는 동아시아 문화권이라는 ‘보편성’속에서 본 작품이 갖는 ‘특수성’을 논해, 조선전기 불교예술에 있어서의 주체적인 ‘차별적 수용론’에의 일보(一步)를 시도하는 것을 본 논고의 목표로 한다.

‘水月觀音’에서 ‘普門觀音’으로-고려양식에서 조선양식으로의 전환-

본 작품에서는 고려조를 풍미했던 수월관음(도3)과는 전혀 다른 양식의 관음보살을 볼 수 있다. 고려 특유의 섬려한 장식성과 귀족적 취향은 사라지고, 대신 적극적이고 대담한 유희좌 포즈의 원색 색조대비가 강한 정면상의 관음보살(도4)이 나타난다. 끝까지 긴장감을 놓지 않는 균일한 철선묘(鐵線描)의 고려 수월관음과는 근본적으로 성격이 다른, 경쾌한 속도감이 느껴지는 비수선(肥瘦線)의 묘사로 생동감이 넘치는 표현을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변화는, 마치 절묘한 장인성이 요구된 ‘공예’에서, 표현력 있는 ‘회화’로 전환한 느낌이다. 이렇게 자세와 형식, 묘선과 채색에 있어 성격이 판이하게 다른 양자의 관음을 기존 연구에서는, 고려 수월관음의 연장선상, 또는 유사한 범주의 것으로 취급하곤 했다. 그러나 이들 양자의 차이를 구별하여 규명할 필요성을 느낀다. 바로 이 차이에서야말로 고려와 다른 ‘조선’이라고 할 수 있는 특징이 내재되어있고, 이곳에서 고려와 차별되는 조선적 불교예술이 비로소 시작되기 때문이다.

관음보살은 종파와 시대를 넘어 매우 다양한 형식으로 유행했는데, 특히 고려시대에는 《화엄경》 입법계품에 근거한 선재동자의 편력의 장소인 보타라카산정에 계신 관자재보살, 일명 수월관음이 매우 선호되었다. 반가좌의 기암좌에 걸터앉은 3/4측면관의 수월관음은 먼 발치아래의 작은 선재동자를 굽어보고 있다.

고려 수월관음상은 풍만한 자태, 전신을 감싸는 둥근 달과 같은 원광, 좌대와 이어지는 기암괴석, 몸 전체를 덮는 투명 사라, 귀족적 취향을 더욱 고양시키는 섬려한 장식과 문양 등을 그 특징으로 발전하여, 물론 그 시원적 형태의 도상은 돈황출토 수월관음도(943년, 프랑스 기메동양박물관소장) 등에서 확인되지만, 고려 나름의 독자적 양식을 정립하게 된다. 특히 그 섬려함은 국제적으로 정평이 나서 역으로 중국 본토에서 그 유명세를 달리게 된다. 원대 湯厚의《古今畵鑑》外國畵篇에는 ‘高麗畵觀音像甚工 其源出唐尉遲乙僧 筆意流而至於纖麗’ 라고, 그 필의의 유려함과 지극히 섬려함이 명기되어 있다.

반면, 본도의 관음은 측면이 아닌 정면관을 취한 유희좌를 하고 있는데, 그 표현방식에서 이미 고려의 섬려함을 목표로 하지 않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즉 지향되는 미감에 있어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형식과 양식뿐만 아니라 작품 내용에 있어서도 고려의 경우는, 신비롭고 비현실적인 보타라카산정의 관음의 세계로 선재동자가 편력해 들어가는 것이고, 본도는 고난의 현실세계로 관음이 몸소 왕림하는 것이다.

고려 작품에서 볼 수 있었던 문양의 충만은 소략화되고, 투명사라는 폭이 좁고 긴 대(條帛)로 바뀐다. 고려와 같이 깊은 적멸의 분위기와 귀족적 우아함 또는 예배대상으로서의 종교적 엄숙성을 지향하기 보다는, 본도의 관음상은 (법화경 보문품을 기저로 하는) 고난구제 관음으로서 현실과 밀착하여 보다 강렬하고 활달하며 세속적 정취가 강하게 느껴진다.

고려 작품은 고도의 ‘공교로움’을 특징으로하는 반면, 본 작품은 소기(小技)에 구속되지 않는 보다 자유로운 ‘회화적 대담성’을 그 특징으로 한다(도3-1,도4-1). (고려에서 조선으로 전이해가는 선상의 과도기적 작품 및 유희좌의 관음보살의 유입과 수용에 대한 보다 상세한 내용은, 《佛敎藝術》(276호, 2004년,每日新聞社)게재 본 논문 참조) 정형화되어 반복적으로 그려져 매너리즘화되는 경향마저 보이는 고려 수월관음도는 고려시대 귀족불교의 보수적 성향을 반영하는 듯하다.

이같이 본도에서는 더 이상 고려적 잔재를 찾아볼 수 없는 전혀 다른 회화적 미감의 완성을 볼 수 있다. 조선전기 작품에서 확인되는 이러한 새로운 경향의 탄생에는 내적 및 외적 자극이 모두 작용해야 비로소 성립된다고 생각된다. 물론 이는 모든 신양식(新樣式)의 탄생에 적용되는 논리이기도 하겠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떠한 외적 자극제가 있었을까.

본 작품의 관음과 가장 유사한 풍취의 중국 작품으로, 일본 쿠마모토(熊本) 대자사(大慈寺)의「양류관음도」(도5)를 예로 들 수 있겠다. 이 명대(明代) 작품은, 북경 법해사(法海寺)의 벽화 「수월관음도」과 같은 중국 명조초기 궁정 스타일의 영향의 범주 안에 드는 작품이라 하겠다. 법해사 작품을 본 작품과 비교했을 때, 형식적 유사성은 발견되나 그 섬려한 표현에 있어 양식적으로 오히려 고려의 것에 더 가깝다고 하겠다.

본 작품에 보다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친 작품은 이 대자사본과 같은 작품으로, 이러한 경향의 작품이 유입되어 모본과 같은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 보살의 어깨만을 덮고 아래로 늘어지는 긴 천의·옷자락이 힘있게 휘날리는 점·목걸이 장식 양측에 매듭으로 묶여 흩날리는 붉은 리본·보살의 허리춤에까지 내려오는 구불구불한 머릿결·갸름한 달걀형 두상의 송대 관음과 달리, 평평하게 둥근 얼굴모양·살짝 밑으로 향한 시선의 가는 눈매·콧등의 좌우에 덧붙여 그려진 작은 원형 콧방울 등은 공통되는 특징. 특히, 녹색 천의(天衣)와 붉은 군의(裙衣)가 강한 색조대비를 이루는 점, 매듭 리본 자락ㆍ천의 자락ㆍ흰 허리대의 자락이 신체 아래로 흘러내리며 서로 상승작용을 하며 휘날려 강렬한 역동성을 표현한 점에서, 양 작품의 밀접한 상관성을 엿볼 수 있다.

상기에 언급한 조선전기 왕실작품과 명조초기 궁정양식(특히 홍무ㆍ영락ㆍ홍희ㆍ선덕연간)과의 상관관계는, 본 작품의 구제고난 장면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확인된다. 특히 宣德7(1432)年銘「관세음보문품」사경(대만 국립고궁박물원소장)의 고난구제 장면은, 본 작품의 세부장면과 흡사한 형식적 특징을 보인다(도1-4, 도6). 황실의 보물로 대대로 내려온 이 보문품 사경은 각 장면을 경전내용과 함께 하나씩 도해한 형식이다. 이 사경에서 횡으로 나열되는 장면들이, 본 작품에서는 대형화폭(201×151cm)에 독특한 형식의 산수 계곡을 배경으로 한 화폭에 유기적으로 어우러지게 창조적으로 재현되어, 경전의 단순한 도해 또는 일러스트레이션이 아닌 한 폭의 ‘작품’으로 새롭게 탄생했다.

본 작품과 같이 관세음보문품을 주제로 한 유사한 시기의 한ㆍ중ㆍ일의 작품을 비교해보면, 같은 주제와 유사한 형식을 공유하면서도, 삼국이 그 표현에 있어 어떻게 다른지 고찰할 수 있다. 상기의 중국 명대 선덕7년명 사경에는 감지(紺紙)바탕에 화려한 금선묘로 관음의 응신이 각양각색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장면마다 곱슬머리와 매부리코 등 이국적인 풍모와 특징의 페르시아 또는 중앙아시아인으로 보이는 등장인물들을 자주 볼 수 있다.

또 상단에 그려진 관음의 진신(眞身)에 해당하는 도상 역시, 화려한 장식성과 농후한 밀장(密藏)적 냄새가 물씬 풍기는 완연한 서장식(西藏式, 국내에서는 라마식 또는 티벳식으로도 불린다)인 경우가 많다. 아마도 이 사경을 완성한 궁정화사는 원대의 서장식 스타일에 능통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다음으로 일본 승려화사 명조(明兆)가 그린 것으로 유명한 「33관음도」(1412년, 도7)를 보면, 고난구제 장면 묘사가 비교적 정적이다. 설화(모노카타리) 묘사에 능한 일본의 전통에 걸맞게 매우 정돈된 공간구성에 도식적인 느낌마져 들게하는 경향이 있는데, 초점은 선(禪)적 풍취가 감도는 상단의 백의관음에 맞춰져 있다.

본도 한국 작품의 경우는 역시 활력과 유머가 특징. 여기서 예로 든 한 ㆍ중ㆍ일 삼국 작품에서 공통되는 한 장면 ‘雲雷鼓電降雹澍大雨應時得消散, 먹구름에 천둥일고 번개치면서 우박과 폭우가 퍼부어도 (관세음을 생각하고 크게 부른 그 힘으로) 즉시에 구름이 걷히고 활짝 개이리’을 일례로 비교해보면, 조선전기 본도에서는 중국과 일본의 경우처럼 우산으로 필사적으로 재난을 막아 버티고 있는 행인의 모습을 볼 수 없다.

하늘의 운신ㆍ뇌신ㆍ천둥신의 막강한 공세를 일찌감치 피해 아예 우산까지 접어 어깨에 걸치고 마치 휘파람이로도 불듯 여유있는 모습으로 지나쳐가는 모습이 확인된다(도1-5). 어긋난 공세와 태평스런 행인의 묘사에 감상자로 하여금 순간 실소를 금할 수 없게 한다. 일본의 원칙에 충실한 묘사(도7-1)와 중국의 화려하고 기묘스러움(도6-1)에 비해, 본도는 매우 밝고 생동감 있는 표현력이 느껴진다.

상기 예를 든 일본과 중국 작품은 모두 「관음33응신도」이다. 명대 규각화가 형자정(邢慈靜)의 「觀世音菩薩三十二應身」(16세기후반, 도8)과 같은 작품의 존재로, 중국에는 「33응신도」와 「32응신도」모두 존재했음을 알 수 있는데, 이 邢慈靜의 관세음32응신도는 본 작품과는 완연히 다른 취지 및 화풍의 작품으로, 각 폭마다 32자의 찬(讚)이 한 수 씩 쓰여져있고 서정적 풍취가 가득하여 32응신보살이 문학적 창작 유희의 소재로 응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화기의 고찰을 통해 본 왕실내의 역사적 배경

‘嘉靖二十九年庚戌四月旣晦我 恭懿王大妃殿下伏爲 仁宗榮靖大王仙駕轉生淨域恭募良工綵畵 觀世音菩薩三十二應幀 一面送安于月出山道岬寺之金堂永奉香火禮, 가정29년경술4월초하루 우리 공의왕대비전하는 인종영정대왕의 영혼이 정토에 다시 태어나기를 간절히 바라며, 양공을 모색해 그로 하여금 채색화 관세음보살삼십이응탱 한 폭을 그리게 하여 월출산 도갑사 금당에 봉안케 했다. 이에 삼가 향을 올리고 예를 갖춘다’

본도는 인종대왕의 추모를 위해 공의왕대비가 발원한 작품. 그런데, 역대왕을 위한 이 공양물을 궁정의 내원당 또는 왕실주변 원찰에 모시지않고, 왜 한반도의 가장 남단지역인 이 멀리 떨어진 전라남도 도갑사에 봉안하였는가라는 의문이 생긴다. 조선왕조 제12대왕 인종은 재위기간이 겨우 8개월밖에 되지않았다.

그의 모친인 장경왕후(중종의 제1계비)가 그를 낳은 지 7일만에 세상을 뜨면서 비극은 시작된다. 중종은 제2계비 문정왕후를 맞게 되는데, 이 문정왕후의 등극으로 왕실의 외척은, 이미 승하한 ‘제1계비파(대윤파)’ 대 ‘제2계비파(소윤파)’로 나뉘어, 치열한 파벌쟁투가 시작된다. 인종의 의지처였던 누이 효혜공주도 세상을 뜨고, 인종 자신도 병약하여 병마에 자주 시달렸고, 거기에다 끊이지않는 외척의 대립으로 인한 음해사건에 빈번히 휘말리곤 했다. 이러한 정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그는 효성을 잃지 않았고(그의 능이 효릉(孝陵)이라고 이름지어진 것은 이에 유래한다고 한다), 학문을 지극히 사랑한 섬세한 마음의 소유자로 알려져있다. 인종의 즉위로 대윤파가 일시 득세하지만, 그는 재위 8개월만에 병사하는 비운의 주인공. 그의 죽음으로 문정왕후의 어린 아들 명종이 12살 나이로 즉위, 대세는 역전되어, 소윤파가 대윤파를 대대적으로 숙청ㆍ유배ㆍ처형하는 ‘을사사화’가 발발한다.

이 여파로 인종 주변의 외가 및 처가관련 희생인물은 약 일백명에 달하게 된다. 이러한 인종의 생전에서 사후까지의 모든 고난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볼 수 밖에 없었던 인물이 바로 본 작품을 발원한 그의 부인 인성왕비(공의대왕비). 본도가 제작된 것은 인종이 서거한지 5년째 되는 해로, 여전히 관련 인물들에 대한 징벌이 계속 되던 해이다. 선조10(1577)년에 공의왕비가 승하하셨을 때, 그 제사를 인종릉에서 거행할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인종릉을 개수하여 병풍석을 둘렀다라는 기록에서, 인종의 사후에 국조오례의에 의한 장례가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음으로 미루어 알 수 있다. 이러한 파벌쟁투의 여파로 사후의 그의 혼백마저 편히 쉴 곳을 찾지 못했으리라.

이러한 당시 역사적 정황속으로 들어가보면, 본도에 담겨진 염원은, 단지 인종 한 명만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자연스레 든다. 인종의 사후 5년째에 감행된 이 추모불사에는 인종을 비롯해 조선전기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당시 정쟁에 희생된 수많은 영혼을 위로하려는 공의왕대비의 염원이 담겨있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이 작품이 봉안된 월출산 도갑사는 어떤 곳이었을까. 도갑사는 전라남도 영암군 월출산에 위치하는데, 당시 수도인 한양에서 남향으로 가장 원거리에 위치하는 절 중 하나. 도갑사는 도선국사의 창건주석지로 유명하며, 조선시대에는 이감로문(二甘露門)으로 불린 수미(守眉)와 신미(信眉)가 중창한 절이기도 하다. 세조 때에 불교문화사업의 중추적 역할을 하고 선종판사를 역임한 묘각왕사 수미는 이 절을 근거지로 불교의 폐해를 다잡는 역할을 했다. 유감스럽게도 도갑사와 인종대왕 또는 공의왕대비와 관련된 직접적인 기록은 찾을 수가 없다.

하지만, 도갑사 중건에 세조의 각별한 관심과 원조가 있었던 것(世祖實錄 : 十年甲申條), 명종21(1566)년 사헌부에서 내원당이라 칭하는 사찰에 대한 혁파를 요구했지만, 명종은 공의대비가 유명사찰을 그대로 내원당에 소속시키고 있다는 이유를 들어 그 혁파를 윤허하지 않았다라는 기록(明宗實錄 : 二十一年辛丑條) 등의 간접적인 단서들, 특히 이 명종21년의 기록을 바탕으로 유추한다면, 당시 왕실 내원당에 소속되었던 유명사찰중 하나가 도갑사로, 이 도갑사는 공의왕대비의 개인 원찰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題名「觀世音菩薩三十二應幀」을 둘러싼 의문, ‘33응신’과 ‘32응신’

법화경보문품에 나타나는 관음응신이라면 33응신이어야 하는데, 화기(畵記)에는 어째서「觀世音菩薩三十二應幀」이라고 쓰여있는 것일까.

물론 본 작품의 고난구제 장면마다 기록된 화기를 검토한 결과, 본 작품이 법화경 보문품에 근거하는 것은 자명한 사실. 교토 지은원의 특별한 허락을 받아 상세히 실물조사를 할 기회를 얻어 고찰한 결과, 그려진 장면은 합 47장면. 경전에 언급된 응신 전부를 그린 것은 아니고 27應身의 장면(바라문신은 2회 반복해 그려짐)만이 그려졌고, 그 외에 20장면은 보문품의 칠난삼독(七難三毒)과 게송(偈頌)의 내용이 그려져있어, (47장면에 명기된 화기와 해당 장면 표시는 《佛敎藝術》(前揭論文) 참조) 화가에 의해 어느 정도 생략과 변형이 가해졌음을 알 수 있다.

본 작품의 출전에 대해서는, 법화경 보문품이 아니라 《능엄경》 《원통장》이라는 설, 법화경과 능엄경을 절충한 것이라는 설 등 종래의 의견이 분분했는데, 이러한 혼란는 화기에 명기된 「三十二應」이라는 숫자에 기인하다. 문제가 되는 《능엄경》 원통장의 앞부분을 보면, ‘十方円明獲二殊勝 一者上合十方諸佛本妙覺心 與佛如來同一慈力 二者下合十方一切六道衆生 與諸衆生同一悲仰 世尊由我供養觀音如來 蒙彼如來授我如幻聞薰聞修金剛三昧 與佛如來同慈力故 令我身成三十二應入諸國土’라고 쓰여있다.

특히 ‘첫째 위로는 시방제불의 본래 묘하게 깨어있는 마음과 합하여’와 ‘둘째 아래로는 지상의 일체 육도중생의 마음과 합하여’라는 경구는, 보살의 서원인 ‘上求菩提 下化衆生’과도 상통하는 것으로, 교학적인 측면에서의 보신(報身)의 양면적인 의미를 잘 나타내주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본도의 상단 중심에 그려진 두 체의 진신(眞身)여래와 좌우의 시방여래, 그리고 관음보살을 중간적 존재로 그 밑에 배치된 응신(應身)구제 장면을 고려할 때, 조선시대에 매우 유행한 法ㆍ報ㆍ應의 삼신(三身)사상의 구조가 저변에 적용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원통장에 명기된 32응신은 보문품에 나열되는 응신과 대동소이하지만, 이 응신이 제시된 문맥은 양자가 사뭇 다르다. 원통장에서 언급된 관음보살의 존재는 수행의 요체(修行眞), 즉 원통(圓通, 깨달음)으로 들어가는 요체(入圓眞)로서 관음보살의 ‘이근원통(耳根圓通)’의 법이 제시되고, 이를 입도의 문으로 간주하고 있다. 즉, 법화경 보문품이 재가신도, 일반중생을 위한 타력신앙적 구제방편이라면, 능엄경 원통장은 출가신도를 위한, 보다 정확히는 출가신도의 보살행을 위한 텍스트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본도에 그려진 응신장면에 대한 종래의 분분한 설들은 그 어느 것도 틀리지 않았거나 또는 어느 것이라도 모두 틀렸다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계환(戒環)의 《법화경요해(法華經要解)》에서 찾을 수 있다. 법화경 보문품 도입부에서, 무진의보살이 관음보살이 실제로 어떠한 방편으로 보살행을 행하는지 묻는 경구에, 화엄선(華嚴禪)에 통달했던 송대의 선승 계환은 ‘卽三十二應也 觀音於楞嚴會上 自說我昔供養觀音 如來授我如幻聞熏聞修金剛三昧 與如來同慈力 故令我身成三十二應入諸國土 始自佛身終至人非人等 爲三十二皆以無作妙力自在成就’라는 주해를 달고 있다. 즉, 그 방편의 힘을 「삼십이응」이라고 서술하고 능엄회상에서 행해진 설법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능엄경 원통장의 첫머리 부분의 문구가 그대로 보문품의 해석에 적용된 것을 볼 수 있다. 법화경 보문품의 주석은 능엄경을 그 사상의 축으로 일관되고 있는 것이다.

조선전기에 매우 유행했던 법화경 사경 및 판본 중 압도적인 수치를 점하는 것이, 바로 이 계환이 주석을 단 《법화경요해》. 능엄경은 송대 성리학에 깊게 영향을 끼친 경전으로, 고려후기부터 불교학자는 물론 유학자들을 포함해 당시의 지식인들에게 숙지되었던 경전이었다. 애초 송대 신유학의 태동에 있어서의 선종의 불가피한 영향과 조선전기의 숭유억불이라는 시대적 환경을 고려한다면, 계환해본(戒環解本) 법화경의 유행은 당시 제도적 상황 속에서 아마도 필연적인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능엄경은 선가의 소의경전으로 금강경ㆍ원각경ㆍ 대승기신론과 함께 전문강원의 사교과의 한 과목으로 학습되어, 현재에도 승려의 중요한 수행지침서로서 그 역사적 현재성은 역력히 살아있다.

법화경에 관한 역대의 대표적 주석서로 송대의 수윤(守倫)ㆍ원대의 서행선(徐行善)ㆍ명대의 일여(一如) 등의 법화경해본을 살펴본 결과, 관음응신으로 송의 수윤은 「32응신」과 「33응신」 양자를, 원의 서행선과 명의 일여는 「33응신」의 개념을 적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조선전기에 중국과 일본에서 유행한 것은 명의 ‘일여집주본(一如集註本)’이었다. 물론 이는 한국에도 유입되어 적어도 15세기에는 기존에 유행했던 계환해본에 추가되는 현상을, 간경도감판번각본(刊經都監版飜刻本) 《묘법연화경》(교토대학부속도서관 가와이(河合)문고 소장)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중국 및 일본과는 다르게 국내에서는 계환해본의 압도적인 유행에 밀려 이 일여본은 빛을 보지 못한다. 우리나라에서 주류를 형성하여 조선후기까지 영향을 미친 것은 이 계환해본이었다.

그러면 이러한 역사적 편린을 통해, 당시 관음응신으로 상식적으로 통용되었던 것은 「32응신」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관음응신이라면 마땅히 「33응신」이어야한다는 인식은 어디서 생겨난 것일까. 지금의 선입관으로 조선전기를 재려했기 때문에 이러한 혼란이 초래되었음직 하다. 같은 시기 중국 명대에는 33응신 및 32응신 양자의 개념이 모두 존재했고, 일본에서는 오로지 33응신만이 유행했다.

즉, 암암리에 우리의 무의식속에 자리잡게 된 불교적 상식은 일본학계의 상식인 것이다. 이로서 본 작품이 법화경 보문품에 근거함에도 불구하고, 어째서「觀世音菩薩三十二應幀」이라는 제명이 붙게 되었는지 그 이유가 해명되었다.(본도의 존재를 처음으로 소개한 선구적 논문으로 홍윤식 「불화와 산수화가 만나는 조선명품」(『계간미술』봄25호, 1983년), 계환해본 법화경요해의 존재에 대해 가장 먼저 공간된 논문으로 유경희 「도갑사 관세음보살32응탱의도상연구」(『미술사학연구』2003년12월)가 있다.)

조선전기에 있어서의 원통관음(圓通觀音)

본 작품에 관해 위에서 확인한 사실, 즉 법화경 보문품의 ‘구제관음’이 능엄경 원통장의 ‘원통관음’으로 해석된다는 것, 이는 조선전기 문화의 중요한 일단면을 보게 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다시 말하자면, 대중적인 경전인 법화경의 이면에 보다 근본적으로 능엄경에 사상적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사실, 이러한 조선적 특징은 당시 여타 문화사업 및 조형미술에서도 확인된다.

먼저《예악전장(禮樂典章)》에 실려있는 ‘정악곡보(正樂曲譜)’(15세기)를 예로 들어보자. 영산회상(靈山會上)중에 ‘관음찬(觀音讚)’(자료1)을 보면, ‘원통교주(圓通敎主)’로서의 관음보살의 명호가 가장 먼저 제시되고, 차례로 다양한 관음의 명호가 나열된다. 관음존명 염불 후에 계속되는 언해 찬가에도 「圓通觀世音이 無作自在力과 妙應三十二와 無畏를 대중에게 베푸시니」라고 쓰여있어, 원통사상을 바탕으로 이 찬가가 만들어졌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또 조선전기 문화부흥사업의 핵심인물이었던 김수온(1409~1481년)이 찬술한 《洛山寺新鑄鍾銘》에는, ‘六根皆同六塵發 凡聖昇沈由此決 我佛如來三覺円 建大伽藍 法物 金聲玉振遍法界 法界衆生驚夢識 首楞會上二十五 一一圓通諸菩薩 觀音大士覺所覺 聞思修兮功第一 我願令此大鍾音 如彼無碍慈悲力’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민중교화의 방편으로, 법계사상에 입각한 원통관음 사상이 적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왕실의 고위관료 및 식자층에 능엄사상이 얼마나 일반적으로 침투해 있었는지 엿볼 수 있는 사실이다. 특히 한국사찰의 ‘관음전’에는 ‘원통전’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어, 관음전이 곧 원통전으로 통용된다는 것은 이미 주지의 사실이다. 또 관음의 별칭으로 원통대사(圓通大士), 관음참법(觀音懺法)의 이칭으로 원통참법(圓通懺法)등이 통용되었던 사실도 이같은 경향을 반증하고 있다.

이같은 타력적인 구제신앙으로서의 법화신앙 이면에 보살행을 강조한 능엄사상이 사상적 축을 이루었다는 사실에서, 억불의 시대 속에서도 천년을 이어온 조선불교의 성숙성과 저력을 확인할 수 있다.

禪을 기저로 하는 화엄과 법화의 일치

이상 본 논고에서는 먼저, 본도의 관음의 형식적 특징과 고난구제 변상의 장면 묘사에 있어 고려와 구별되는 새로운 형식적 요소를 제시했다. 그 요소 형성에 있어 외부로부터의 영향관계가 추정되는 작품으로, 일본 熊本ㆍ大慈寺소장「양류관음도」및 宣德7年銘 「觀世音菩薩普門品」사경(대만 국립고궁박물원소장) 등 명대 궁정양식을 대변하는 사례를 들었다. 그러나 이들 도상이 회화적으로 재해석되고 대관적인 실경산수와 어우러져 독특한 조화를 이루며 ‘조선적’으로 재창조되었다는 점에서 본도의 독창성은 부정할 수 없다 하겠다.

그리고 제명 「觀世音菩薩三十二應幀」통해 살펴본 본 작품의 사상적 배경에는, 능엄사상을 축으로 한 계환해본(戒環解本)의 《법화경》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이 판명되었고, 이것이 본 작품에 국한되지 않고 조선전기 관음신앙 및 문화 전반에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 드러났다.

에다도시오(江田俊雄)의 “조선불교는 선교앙종(禪敎兩宗)을 표방했는데, 교(敎)로서는 화엄이 대표되었으므로, 계환의 선과 화엄에 입각한 법화경 해석의 태도는 조선불교도들에게는 매우 환영받았을 것”이라는 의견은 주목할 만하다. 즉, 계환의 「선을 기저로 하는 화엄과 법화 일치설」(板本幸男ㆍ岩本裕譯註《法華經》岩波文庫, 1973年 참조)은, 조선시대를 관통하는 조형예술의 사상적 전거를 말해주고 있다고 하겠다. 바로 이러한 한국적 특징을 규명하는 것으로, 중국으로부터의 막연한 영향론을 넘어, 조선전기에 있어서 주체적인 ‘차별적 수용론’에의 일보를 시도해 보았다.

본도는, 전술했듯이 공의왕대비가 그의 남편 인종의 죽음을 추모하여 발원한 작품이다. 병마에 시달렸던 인종, 후손이 없었던 슬픔, 재위 8개월만에 찾아온 인종의 죽음, 그의 붕어 후에 발발한 을사사화의 파란, 이 모든 것을 지켜보아야만했던 공의왕대비. 이 공의왕비의 현실의 고난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바램과 세상을 떠난 남편에 대한 간절한 추모가, 본 작품에는 담겨져 있다. 반대파에 의한 정권교체의 소용돌이 속에서, 왕실 내에서는 자유스럽지 못했을는지도 모를 공의왕비의 이러한 염원이, 조선전기에는 한국 최남단의 도갑사에, 그리고 조선중기 이후에는 일본 쿄토 지은원에 보존되어, 우리의 눈앞에 생생히 살아 숨쉬고 있다.

강소연
일본 교토대학 문학박사.고려대학을 나와 일본 교토대학에서 동양미술사로 박사학위를 수여했다. 대만 국립중앙연구원 역사어언연구소 장학연구원으로 재직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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