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정녕 고통의 연속이고 괴로움인가? 주어진 인생길 평탄히 걸으며 멋지게 살아가는 것 같아도 누구나 그 내면에는 고통이 따르고 괴로움이 숨어 있는 것 같다. 한 고비 두 고비 피할 수 없는 고통들이 마주하기 때문이다. 느닷없이 사건이 생기고 불의의 사고를 맞닥뜨리게 되면, 감당해야 할밖에 다른 방도가 없다. 밤하늘의 별들이 반짝반짝 빛나지만, 그 찬란한 빛 속에 숨겨진 어둡고 아픈 사연들을 짐작할 수 없듯이, 부귀영화를 누리는 화려한 인생들도 뜨고 지는 별들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불교는 우리의 삶은 본질적으로 괴로움이라고 진단하며, 인생의 괴로움을 여덟 가지로 설명한다. 잘 알다시피 태어나면 늙고 병들고 죽는 생로병사(生老病死)의 네 가지 공통적인 고통이 있다. 게다가 애별리고(愛別離苦), 원증회고(怨憎會苦), 구부득고(求不得苦), 오음성고(五陰盛苦)의 넷이 더해져 팔고(八苦)의 괴로움을 겪으며 살아간다는 것이다. 이 팔고 중 가장 가혹한 고통은 ‘애별리고’가 아닐는지? 이는 부모 형제, 배우자, 애인 등과 생이별을 하든지 또는 사별하는 고통을 말한다. 너무 사랑하는데도 어쩔 수 없이 헤어져 살아가야 하는 아픔과 괴로움을 이른다.

사랑하는 이와 이별하는 괴로움은 그 농도가 다르다 하겠다. 싫어하는 사람과 같이 지내야 하는 괴로움이거나 간절히 얻고자 하여도 얻을 수 없는 고통, 그리고 몸을 가진 인간으로서 집착과 탐욕에서 오는 고통과는 비교할 수 없이, 애별리고는 가장 견디기 어려운 극한적 고통이라 여겨진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뜻하지 않은 고통과 슬픈 일들을 겪게 되지만, 그 충격과 고통과 슬픔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극복하느냐에 따라 삶이 달라지기도 한다.

생로병사의 고통은 모든 생명체에게 어찌할 도리 없이 진행되는 일이니 체념도 하고 순종도 하며 나름 극복할 수도 있다. 또한 미운 사람을 보며 지내야 하는 일이 괴롭다 한들 그리 엄청난 고통은 아니리라. 마음을 바꾸어 노력하면 미움을 걷어내고 새로운 관계를 형성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욕심과 집착도 마음으로부터 벗어나면 그만이다. 하지만 죽음은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져 무(無)로 돌아가는 일이지 않은가. 하여 죽음의 이별은 다시는 볼 수도 만나지도 못하는 이별의 끝이 되고 만다. 더는 만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용서와 자비를 베풀 기회조차 잃어버려 못다 한 정이 천추의 한이 되어 남게 된다. 불교문학 속에는 그런 아픔을 치유해주는 희망의 노래들이 있다.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으로 이별의 고통을 이겨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승에서 열심히 도를 닦아 네가 먼저 가 있는 극락에 가면 반갑게 해후할 수가 있다는 광명을 주는 노래이다. 바로 〈제망매가〉이다.      

〈제망매가〉를 지은 월명사는 신라시대 경덕왕 때의 승려이자 향가 작가로 경주 사천왕사에 머물렀는데, 그가 달 밝은 밤에 피리를 불면 달이 그의 길을 밝혀 주어 이름을 ‘월명사(月明師)’라 불렀다고 전한다. 이 작품은 신라 경덕왕 때 지어진 10구체 향가로 죽은 누이의 명복을 빌며 내세에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기원한다. 누이의 재를 올릴 때 이 향가를 지어 불렀더니, 돌연 바람이 일며 종이돈을 날려 서쪽을 향하여 사라졌다고 한다. 이 노래는 다음과 같다.

 

생사의 길은 여기 있으매 두려워

나는 갑니다 하는 말도 다 못하고 가버렸는가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여기저기 떨어지는 잎처럼

한 가지에 낳아 가지고 가는 곳을 모르는구나

아, 미타찰(彌陁刹)에서 만날 나는 도 닦으며 기다리련다

 

누이의 죽음에 대한 인간적인 안타까움과 슬픔을 나타내며,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났으나 가을바람에 흩어지는 낙엽처럼 누이와 생사의 이별을 겪으면서 사별의 아픔과 인생무상을 절감한다. 그러나 이에 그치지 않고 내세에서 다시 만날 기약으로 불도에의 정진을 다짐한다. 죽음에 직면한 슬픔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회자정리(會者定離)의 불교 정신을 바탕으로 새로운 만남을 기약하는 것이다. 인간적인 슬픔을 종교적 차원으로 승화하여 극복하려는 숭고한 정신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지난해 여름, 친한 친구가 사고로 30대 젊은 아들을 잃었다. 장례식장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다가 겨우 정신이 돌아오면 슬픔에 다시 몸을 가누지 못하는 친구의 애절한 모습은 차마 지켜볼 수가 없었다. 그의 가슴은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지고, 애간장이 녹아내리는 절규로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사랑하는 아들을 먼저 저세상으로 떠나보낸 어머니의 고통을 어떻게 헤아릴 수 있을까. 흐르는 시간에 슬픔을 씻으며 차츰 일어나 다시 본래의 자리로 돌아와 자신의 인생을 다스려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빌며 기다리며, 내가 아는 온갖 이야기를 나름 재밌게 들려줄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세상일의 덧없음에 대하여 이야기가 전개되었다. 그리고 친구에게 내가 애송하는 작품 〈제망매가〉와 〈님의 침묵〉을 적어주었다. 그런데, 지난 연말에 만나보니 친구의 얼굴이 몰라보게 밝아져 있었다. 요즘은 극락에 가서 아들과 재회의 기쁨을 나누려는 희망으로 날마다 간절히 기도한다며 〈제망매가〉를 읊조리더니, 미소를 띠며 그윽이 먼 하늘을 바라본다. 그리고는 나를 살짝 안아주었다. 가슴 뭉클하게.

만인의 애송시 한용운의 〈님의 침묵〉은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라고 노래한다. 만남은 곧 헤어짐이요, 헤어져야 다시 만난다는 불교의 역설적 진리를 바탕으로 이별의 슬픔을 극복하고 다시 만날 새 희망으로 전환시킨다. 불교 경전인 《유교경(遺教經)》에서 전하는 회자정리거자필반(會者定離 去者必返)은 만남이 있으면 이별이 있다는 말로, 생명이 있는 것에는 반드시 죽음이 있다는 뜻의 생자필멸(生者必滅)과 함께 인간관계의 무상함을 나타낸다.

인생은 고통이다. 이 세계는 고통의 바다다. 이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이 해탈이라 한다. 우리가 고통의 바다를 건널 때, 문학은 말없이 다가와 우리의 돛단배가 되어주나니, 아무 두려움 없이 문학과 함께 바다를 건너가리라.   

k9350m@hanmail.net

저작권자 © 불교평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