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어떤 나침반을 갖고 계신가요?

 

저는 지난가을에 《어머니, 윤정란(尹庭蘭)》이라는 책을 냈습니다. 생애 열 번째로 묶은 시집이지요. 스물둘에 시심(詩心)을 잡고 시작(詩作)을 한 지 어느덧 40년이 됐습니다. 돌아보면 늘 돌부리에 걸리는 발걸음이었지만 그래도 저 홀로 대견하여 ‘등단 40주년 헌시’라는 부제를 달아 올렸습니다.

생명을 얻어 세상에 나온 자, 누군들 사모곡이 없겠는가마는 저는 제 어머니를 기억할 때마다 손끝이 시립니다. 종가의 며느리라는 짐을 지고 시부모님 봉양은 물론이고 층층이 버티고 있는 시동생에 시누이까지 뒷바라지할 삶들이 매일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고 합니다. 자식보다 세 살 더 많은 시동생 기저귀를 갈아주고 안고 업어 키우느라 정작 자신의 맏딸에게는 소홀했다지요. 어머니는 이른 아침 울어대는 시동생을 업고 담아내야 할 밥그릇 수를 세어 가며 밥을 푸다가 밥덩이에 데인 적이 있다며 가끔 손을 들여다보시곤 했습니다. 저 어린 시절 시부모님 병수발을 하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지금도 선합니다.

어머니는 파평 윤씨 집안의 고명딸로 태어났으나, 스물 이후에는 전주 이씨 집안의 일꾼으로 사셨습니다. 게다가 성격이 불같고 까다로웠던 남편을 챙기고 자식 4남매를 낳아 먹이고 입히고 가르쳐내느라, 자신을 위해서는 무엇 하나라도 허투루 시간이며 돈을 쓰는 법이 없으셨지요. 사는 형편이 그리 어렵지도 않았는데 말입니다.

어머니의 날들 중에 정월 초사흘은 제게 언제나 맑고 꼿꼿하게 남아 있습니다. 저를 낳으신 후 스무 살이 될 때까지의 그 정성. 어머니는 그날이면 새벽 3시쯤 일어나 몸을 씻으신 뒤 제 생일상을 차려놓고 절에 가셨습니다. 할머니도 어머니의 정월 초사흘 불공을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저는 생일날 눈을 뜨면 어머니가 없는 게 싫어 앞으로는 다른 날 가라고 투덜대기도 했지요.

어머니는 딸 생일에 새해 첫 불공을 드려서 좋고, 그때가 방학이라서 나랑 동생들이 학교에 가지 않아 마음이 놓인다고 하시며 오래도록 거두지 않으셨습니다. 미역국에 감칠맛 나는 임연수어 조림, 부드럽게 잘 부푼 계란찜은 아직까지도 생일이 돌아오면 입맛이 돕니다. 등단했다고 했을 때 아무 말씀도 없으셨던 어머니는 첫 시집을 보여드리자 눈물을 글썽이며 “안쓰럽고 자랑스럽다” 하셨습니다. 제가 시인이 되어 오늘날까지 시를 이어온 것도 어머니의 오래고 오랜 정성이었습니다.

일을 하는 데 있어 두름성 있게, 그 모든 대소사를 너끈히 치러내시는 동안 버겁고 쓸쓸할 때가 왜 없었겠습니까. 그럴 때이셨겠지요. 부엌에서 혼자 부르시던 어머니의 나지막한 〈목포의 눈물〉 노랫소리가 어제인 듯 들립니다.

친정에 찾아가면 직접 콩을 갈아 국수를 말아주셨고, 딸 집에 찾아오면 부은 무릎을 붙들고라도 ‘식초콩’을 담가놓고 가셨던, 어떤 상황에서도 환한 웃음과 명랑했던 목소리의 어머니가 일흔셋 그 봄날 쓰러지면서 덜컥, 말을 잃게 되었습니다. 물론 귀에 익어 다시 듣고 싶은 노래도 끊기고 말았지요. 그 후 어머니의 병실을 찾을 때마다 느껴지던 것은 아, 눈빛이 날로달로 그윽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무궁무진한 눈의 말을 몇 마디밖에 알아채지 못하는 것은 큰 슬픔이었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목욕하는 날을 기다리던 어머니, 아이처럼 주저앉아 비눗물을 손으로 만지며 엷게 웃던 얼굴이 떠오릅니다.

병원 생활은 자꾸만 해를 넘겼습니다.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은 정녕 맞았습니다. 남편은 남편대로 자식들은 자식대로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동안, 합병증을 얻은 어머니는 눈빛이 갈수록 흐려졌습니다. 입과 눈을 닫고 홀로 밀려난 채 오롯이 귀만 조금 열어두었습니다. 가끔씩 텔레비전에서 들리는 노랫소리에 눈 대신 귀로 우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때 가지런히 모은 손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늘 젖어 부풀고 겨울이면 트기도 했던 손이었는데…… ‘아, 저리 고운 손가락이었다니.’

아무 곳에 갖다놓아도

슬쩍 돌려놓아도//

쫑긋, 바늘 끝이

정방(正方)을 가리키던//

아직도 그런 사람이

있는 줄만 알았습니다//

얽매임 없는 구름처럼

부대낌 없는 술처럼//

먼 눈빛에 갈마들어

손길 더워 온다면//

유쾌한 불가능으로

꽃이 져도 좋습니다

— 졸시 〈나침반〉

 

그렇습니다, 어머니는 제게 나침반이었지요. 늘 제가 있는 곳으로 마음의 눈과 귀를 열어놓으셨지요. 지금은 볼 수도 만질 수도 없지만 이렇게 눈 감으면 보이고 생각하면 손길이 더워오니 오늘의 아쉬움이 슬픈 것만은 아닙니다.

제가 살아가는 동안 인내의 원천이고 용기의 지름길이었으며 변심 없는 사랑을 베풀어 주신, 첫사랑이고 마지막 스승이셨던 어머니가 또 한 번 바뀐 이 계절에 잊지 않고 선물로 오셨습니다.

며칠 전 신문에서 〈이어령의 마지막 인터뷰〉를 읽었습니다. 암에 걸렸지만 현재 항암치료는 받고 있지 않다는 노학자는 ‘생의 진실은 무엇인가요?’라는 질문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든 게 선물이었다는 거죠. 마이 라이프는 기프트였어요. 내 집도 내 자녀도 내 책도, 내 지성도…… 분명히 내 것인 줄 알았는데 다 기프트였어.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처음 받았던 가방, 알코올 냄새가 나던 말랑말랑한 지우개처럼, 내가 울면 다가와서 등을 두드려주던 어른들처럼, 내가 벌어서 내 돈으로 산 것이 아니었어요. 우주에서 선물로 받은 이 생명처럼, 내가 내 힘으로 이뤘다고 생각한 게 다 선물이더라고.”

 

당신의 나침반은 지금 어디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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