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이 가을로 접어들기 시작하면서부터 거의 매일 한두 권의 시집이 배달되어 온다. ‘바야흐로 시집 출간의 계절이 시작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하면서 이런 기류는 길게는 연말까지 이어지게 된다. 어떤 날은 열 권에 가까운 시집이 우송되어 오기도 하는데, 일주일에 하루나 이틀 그 가운데 몇 시간은 이들 시집을 읽는 것으로 정해두고 있다.

읽다가 가슴에 무엇이 전해오는 작품 한두 편은 표시를 해둔다. 대개 짧은 단시(短詩) 위주로 골라놓게 마련인데, 그 이유는 시집을 고맙게 잘 받아서 읽었다는 간단한 이메일 편지를 보낼 때 작품을 옮겨 쓰기가 수월하기 때문이다. 어디까지나 내 편리에 의한 선택이지만 사실 긴 시는 잘 읽히지 않기도 하지만 옮겨 적는 일도 수월하지가 않다.

평소 알고 지내는 시인에게는 먼저 안부를 묻고 골라놓은 작품을 옮겨 적고 간단한 내 나름의 감상 단평을 한두 줄 밝힌 뒤에 건강 건필하시라는 당부를 곁들여 보낸다. 잘 알지 못하는 시인께도 먼저 인사를 트면서 작품을 옮겨 읽는 것이나 당부의 끝맺음은 마찬가지 유형의 글을 보낸다. 그런 간단한 답장 인사가 시집을 보내준 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는 나름대로의 생각에서다.

몇 년 전 거처를 서울을 벗어나 이곳 천보산 아래로 옮기면서 아주 조금 넓은 공간을 마련했다. 그것은 순전히 책을 꽂아놓을 자리를 마련해보자는 생각에서였다. 사실 아파트라는 거처 공간은 어디든 그 유형이 비슷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제 일주일에 겨우 하루 정도 시내 나들이를 하는 나로서는 그 복잡한 서울살이를 더 연장할 이유가 없기도 하거니와 또 같은 형편이면 서울에 비할 바 없는 적은 비용으로도 좀 넓은 공간을 차지할 수가 있다는 셈법 때문이었다.

아무튼, 식구들 눈치 보지 않고 나름의 책 공간을 가지는 일이 내게는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젊어서는 먹고사는 일, 아이들 셋 공부시키고 뒷바라지하는 일, 사실 이런 수고는 순전히 집사람 몫이기는 했지만 내 서툰 삶의 걸음걸이로는 여간 어렵고 힘이 드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시집을 받아서 아무 데나 쌓아두는 최소한의 결례는 면하게 된 것만도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하고 위안한다.

그런데, 이제는 그 많지 않은 책들을 어떻게 놓아 보내야 할 것인가 하는 정리 문제가 바로 눈앞으로 다가왔다. 그것은 얼마 전에 한 난감한 현실을 실제로 목격하고 나서부터 마음을 옥죄는 하나의 숙제가 되었다.

하루는 약속이 있어서 시내의 한 길을 걸어가는데 인도 한 모퉁이에 많은 책을 펼쳐놓고 파는 앞을 지나치게 되었다. 흔히 보는 낯설지 않은 광경이어서 무심히 지나치려다가 언뜻 눈길을 사로잡는 것이 있어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랬다. 그 펼쳐놓은 책 몇 권 가운데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눈에 익은 시집 몇 권이었다. 한참 전에 펴낸 몇 분 선배들 시집에 동료 후배 시인 것도 섞여 있었다. 이 시집들이 왜 여기 난전에 나와 있을까 하는 생각에 가던 걸음을 멈추고 한 권을 들고 펼쳤다. 아, 순간 나는 무엇에 크게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 선생님께

○○○ 드림

 

이렇게 쓰인 속표지 서명이 내 눈길을 잡아맸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 시집을 받았던 시인은 내가 잘 아는 선배로 바로 그 전해에 타계하였고, 다른 몇 권의 시집도 그 선배의 소장품들이었다.

어떤 일과 경로로 해서 그 몇 권의 시집이 그 난전에 나와야만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주인 손의 갈무리를 벗어나면 꽂혀 있어야 할 자리를 잃고 길거리에 나올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에 가슴이 몹시 저렸다.

그날의 일은 내게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는 아픈 기억으로 각인되었고, 근래에는 자연스럽게 지금 내 거처에 꽂혀 있는 시집 등 책의 정리 문제로 이어지게 되었다. 아직은 결정된 것이 없지만, 내 손때가 묻은 책들이 어떤 형태로든 길거리 난전에  나앉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것은 소중한 시집을 내게까지 보내주었던 여러 시인들에 대한 예의에도 맞는 일이라 믿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가 보낸 시집도 그 받은 분들에게 읽히고 또 꽂혀 있을 자리에 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시의 계절인 오늘 하루도 여러 문우가 보내주신 시집을 새겨 읽는 내 나름 한때의 즐거움에 갇혀서 산다. 가난한 거처, 시집이 꽂혀 있는 자리 옆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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