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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이 꽂혀 있는 자리
[80호] 2019년 12월 01일 (일) 박시교 시인

계절이 가을로 접어들기 시작하면서부터 거의 매일 한두 권의 시집이 배달되어 온다. ‘바야흐로 시집 출간의 계절이 시작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하면서 이런 기류는 길게는 연말까지 이어지게 된다. 어떤 날은 열 권에 가까운 시집이 우송되어 오기도 하는데, 일주일에 하루나 이틀 그 가운데 몇 시간은 이들 시집을 읽는 것으로 정해두고 있다.

읽다가 가슴에 무엇이 전해오는 작품 한두 편은 표시를 해둔다. 대개 짧은 단시(短詩) 위주로 골라놓게 마련인데, 그 이유는 시집을 고맙게 잘 받아서 읽었다는 간단한 이메일 편지를 보낼 때 작품을 옮겨 쓰기가 수월하기 때문이다. 어디까지나 내 편리에 의한 선택이지만 사실 긴 시는 잘 읽히지 않기도 하지만 옮겨 적는 일도 수월하지가 않다.

평소 알고 지내는 시인에게는 먼저 안부를 묻고 골라놓은 작품을 옮겨 적고 간단한 내 나름의 감상 단평을 한두 줄 밝힌 뒤에 건강 건필하시라는 당부를 곁들여 보낸다. 잘 알지 못하는 시인께도 먼저 인사를 트면서 작품을 옮겨 읽는 것이나 당부의 끝맺음은 마찬가지 유형의 글을 보낸다. 그런 간단한 답장 인사가 시집을 보내준 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는 나름대로의 생각에서다.

몇 년 전 거처를 서울을 벗어나 이곳 천보산 아래로 옮기면서 아주 조금 넓은 공간을 마련했다. 그것은 순전히 책을 꽂아놓을 자리를 마련해보자는 생각에서였다. 사실 아파트라는 거처 공간은 어디든 그 유형이 비슷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제 일주일에 겨우 하루 정도 시내 나들이를 하는 나로서는 그 복잡한 서울살이를 더 연장할 이유가 없기도 하거니와 또 같은 형편이면 서울에 비할 바 없는 적은 비용으로도 좀 넓은 공간을 차지할 수가 있다는 셈법 때문이었다.

아무튼, 식구들 눈치 보지 않고 나름의 책 공간을 가지는 일이 내게는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젊어서는 먹고사는 일, 아이들 셋 공부시키고 뒷바라지하는 일, 사실 이런 수고는 순전히 집사람 몫이기는 했지만 내 서툰 삶의 걸음걸이로는 여간 어렵고 힘이 드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시집을 받아서 아무 데나 쌓아두는 최소한의 결례는 면하게 된 것만도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하고 위안한다.

그런데, 이제는 그 많지 않은 책들을 어떻게 놓아 보내야 할 것인가 하는 정리 문제가 바로 눈앞으로 다가왔다. 그것은 얼마 전에 한 난감한 현실을 실제로 목격하고 나서부터 마음을 옥죄는 하나의 숙제가 되었다.

하루는 약속이 있어서 시내의 한 길을 걸어가는데 인도 한 모퉁이에 많은 책을 펼쳐놓고 파는 앞을 지나치게 되었다. 흔히 보는 낯설지 않은 광경이어서 무심히 지나치려다가 언뜻 눈길을 사로잡는 것이 있어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랬다. 그 펼쳐놓은 책 몇 권 가운데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눈에 익은 시집 몇 권이었다. 한참 전에 펴낸 몇 분 선배들 시집에 동료 후배 시인 것도 섞여 있었다. 이 시집들이 왜 여기 난전에 나와 있을까 하는 생각에 가던 걸음을 멈추고 한 권을 들고 펼쳤다. 아, 순간 나는 무엇에 크게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 선생님께

○○○ 드림

 

이렇게 쓰인 속표지 서명이 내 눈길을 잡아맸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 시집을 받았던 시인은 내가 잘 아는 선배로 바로 그 전해에 타계하였고, 다른 몇 권의 시집도 그 선배의 소장품들이었다.

어떤 일과 경로로 해서 그 몇 권의 시집이 그 난전에 나와야만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주인 손의 갈무리를 벗어나면 꽂혀 있어야 할 자리를 잃고 길거리에 나올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에 가슴이 몹시 저렸다.

그날의 일은 내게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는 아픈 기억으로 각인되었고, 근래에는 자연스럽게 지금 내 거처에 꽂혀 있는 시집 등 책의 정리 문제로 이어지게 되었다. 아직은 결정된 것이 없지만, 내 손때가 묻은 책들이 어떤 형태로든 길거리 난전에  나앉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것은 소중한 시집을 내게까지 보내주었던 여러 시인들에 대한 예의에도 맞는 일이라 믿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가 보낸 시집도 그 받은 분들에게 읽히고 또 꽂혀 있을 자리에 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시의 계절인 오늘 하루도 여러 문우가 보내주신 시집을 새겨 읽는 내 나름 한때의 즐거움에 갇혀서 산다. 가난한 거처, 시집이 꽂혀 있는 자리 옆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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