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20주년 기념특집 | 불교, 이상사회를 꿈꾸다

1. 불교에서의 인간과 세계-어떻게 살 것인가?

인간은 의식적 · 무의식적으로 늘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는 존재이다. 인간이면 누구나 화두처럼 챙기는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문제는 이성을 지닌 인간이라면 결코 회피할 수 없는 물음으로 이는 바로 윤리학의 핵심 내용이다. 자유의지를 지닌 인간은 각 개인의 가치와 판단에 따라 삶의 태도와 양식이 달라지는 것으로, 윤리학은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삶, 즉 행복한 삶을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춘다.

불교의 기본 시각은 인간과 이 세계를 고통으로 파악한다. 그리고 이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최대의 과제로 삼고 있다. 그것이 바로 열반이다. 불교가 꿈꾸는 윤리적 삶은 바로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열반을 성취하는 데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인간존재와 이 세계의 실상을 여실하게 파악할 필요가 있다. 불교가 보는 인간과 이 세계의 실상은 무엇일까?

1) 자유의지와 인간의 비극성

인간은 다른 동물과는 달리 항상 고민하면서 살아간다. 이른바 인간은 본능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어떤 행위를 할 때, 그 행위에 대한 필요성과 의미 등을 따지는 생각하는 존재이다.

‘생각하는 존재’로서 인간은 사소한 일이라도 일의 경중과 가치를 따지며 그 일에 대해 판단하고 선택하는 ‘자율적 존재’이다. 이때의 자율은 오로지 자기 자신의 의지 즉,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여 행동하는 ‘자유의지’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판단하여 선택한 일에 대한 결과에 대해서는 자기 스스로가 짊어져야 한다. 자업자득이다. 한순간의 판단과 선택으로 천당과 지옥이 결정되는 것이다.

인간은 매 순간 이러한 판단과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운명적 존재이기 때문에 비극적이다. 인간이 아무리 발버둥 쳐도 자유의지로부터 결코 벗어날 수 없다. 그러한 의미에서 ‘자유의지에 따라 어떻게 행위할 것인가’에 대해 묻고 답하는 윤리학은 형벌의 학문이다. 법적인 형벌과는 달리 영혼을 심판하는 형벌인 것이다. 따라서 윤리학의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의 자율성(자유의지)과 행위의 의미(가치)를 전제로 하여 보다 가치 있고 선한 의미 있는 삶을 추구하는 데 있다.

자유의지를 지닌 인간은 어떤 상황에서든 양심에 따라 판단하고 선택하는 주체성을 갖는다. 그런데 자율성을 지닌 주체적 인간이라 하여 어떤 행위라도 자유롭게 행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무고한 사람에 대한 폭력과 살인은 어떠한 이유에서든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왜냐하면 비록 가해자가 그러한 폭력과 살인을 통해 자신의 삶에서 의미와 행복을 찾을 수 있다고 할지라도 상대방에게는 고통과 불행을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모든 인간은 자율성을 지닌 주체적 존재이며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간다. 그런데 타인으로부터 그러한 자율성과 행복이 침해당한다면 누구도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각 개인의 자율성은 자신의 행위와 관계하는 모든 대상과의 관계하에서 생각하고 침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행동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고려해야 할 윤리적 대상의 범주를 어디까지로 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오늘날 현대윤리학에서는 이 문제가 가장 쟁점이 되고 있다. 윤리적 대상의 범주를 어떻게 정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가치판단과 행위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2) 육도윤회와 불교의 시공간

윤리학은 인간 행위와 관련된 도덕규범을 규명하는 학문이다. 그러므로 어디까지나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인간학이다. 이처럼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윤리학이기 때문에 인간을 어떻게 규정하는가에 따라 윤리학의 성격도 달라진다.

불교는 다른 사상이나 종교와는 달리 불교만의 독자적인 인간과 세계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불교의 가르침을 펼쳐왔다. 그 핵심이 육도윤회(六道輪廻)이다. 이 세계는 현생만이 아닌 전생과 내생이 있으며, 육도로 나누어져 있고 또 인간은 이러한 세계를 윤회하는 연기적 존재이다. 따라서 불교윤리학은 다른 윤리학과 공통되는 점도 있지만 독자적인 성격이 더 강하다. 흔히 종교는 현상적 · 세속적 측면을 초월한다. 불교 역시 종교적 초월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현실계를 지반으로 하는 서양 윤리와는 달리 초월적 성격이 강하다. 그런 의미에서 불교윤리는 윤리를 초월하는 윤리라고 할 수 있다.

서양 윤리학이 자율적 · 이성적 주체로서의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반면, 불교윤리학은 인간만이 아니라 무정물인 풀과 나무, 심지어 흙까지도 대상으로 한다. 왜냐하면 육도를 윤회하는 모든 유정물(인간, 축생 등)은 무정물(풀, 나무, 흙, 물 등)에 의존하여 존재하는 것으로 만물은 서로 유기체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른바 불교의 핵심 교리가 되는 연기설이다. 연기설은 이 세계의 생성과 성장, 그리고 쇠퇴와 소멸의 법칙이다. 그러므로 모든 존재는 연기론적 존재로서 부처 자신뿐만 아니라 신들을 비롯한 그 누구도 연기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연기설의 기본이 되는 “만일 이것이 있으면 곧 저것이 있고, 만일 이것이 생하면 저것이 생한다. 만일 이것이 없으면 곧 저것이 없고, 만일 이것이 멸하면 곧 저것이 멸한다.”에 나타나 있듯이, 일체의 현상은 모두 의존 관계에 의해 성립하며, 이러한 의존 관계를 떠나 어떠한 존재도 성립할 수 없다. 예를 들어 호박꽃 한 송이를 피우기 위해서라도 먼저 호박씨(因: 직접적인 원인)가 있어야 하며, 씨를 심을 땅(흙)과 씨를 발아시키기 위한 물과 공기, 그리고 햇살 등(緣: 간접적인 원인) 무수한 요소가 필요하다. 또한 비록 이러한 요소가 다 갖추어졌더라도 이들 서로 간의 조화가 적절하지 못하면 온전한 한 송이 호박꽃을 얻을 수 없다. 물이 너무 많아도 안 되고(썩어버림) 적어도 안 된다(말라버림). 모든 요소가 서로 적절하게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한 송이의 호박꽃을 얻을 수 있다. 소위 한 송이의 호박꽃을 피우기 위해 우주 전체가 온 힘을 기울인 것이다. 이처럼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는 서로 간의 의존적인 인연에 의해 생성되었다는 게 연기설의 핵심이다.

3) ‘깨달음의 학’으로서 불교윤리

불교에서 인간의 가치는 선한 행위를 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부처가 될 수 있는 깨달음의 종자, 즉 불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도덕적으로 선한 행위도 중요하지만, 선한 행위가 곧 깨달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불교는 어디까지나 깨달음을 1차적 과제로 하는 깨달음의 가르침이다. 그러한 면에서 불교는 윤리라기보다는 종교인 것이다. 종교로서의 불교는 학문으로서 윤리와 분명 간극을 갖는다. 특히 인륜적 질서를 중시하는 윤리학과 이러한 세속적 가치를 지양하고자 하는 불교가 서로 충돌하거나 대립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할 수 있다. 깨달음을 목표로 하는 불교와 올바른 행위 규범을 정립하고자 하는 윤리학이 서로 어떻게 융합되고 교차될 수 있을까. 다시 말해 초월적 세계를 지향하는 불교가 현상적 세계에 매여 있는 윤리학으로 어떻게 구현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답변은 다양하겠지만 크게 나누면, 불교와 윤리학은 학문적 성격 차이로 서로 융합될 수 없다는 주장과 이와는 반대로 불교는 윤리적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윤리학으로서 인정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이처럼 불교를 학문적으로 분류할 때 겪는 어려움은 불교에 내포된 학문의 중첩성이다. 불교를 종교라고 하지만, 불교에 내재된 철학, 윤리학, 심리학 등의 특성 또한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철학과 윤리학, 그리고 심리학으로서 불교에 대한 학문적 접근이 얼마든지 가능하고 서로 교차될 수 있다. 이 글에서 다루고 있는 ‘불교윤리’도 ‘깨달음의 학’으로서 가능한 것이다.

 

2. 인간학이 아닌 공생학(共生學)으로서 불교윤리

1) 인간중심주의와 연기설

윤리학이라는 학문을 정초한 서양 윤리학[서양철학]은 기본적으로 인간중심주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러한 인간중심주의 세계관의 배경에는 유대교에서 창조신앙을 받아들인 그리스도교의 영향이 크다. L. 화이트(Lynn White, Jr., 1907~1987)는 서양의 그리스도교가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인간 중심적인 종교”라고 기술하면서, 오늘날 환경위기의 요소 중 하나로 인간중심적 사고에서 찾고 있다.

서양의 철학과 과학은 이러한 인간중심적 사고의 바탕 위에서 발전하였으며, 윤리학 역시 마찬가지이다. 예컨대 서양철학과 윤리학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물론이고, 근대 과학의 토대를 마련한 베이컨과 데카르트 역시 자연은 신이 만든 완전한 작품으로 인간의 탐구와 지배의 대상일 뿐이었다. 그들은 인간과 인간적 특성들에만 내재된 가치를 인정하여 인간 이외의 자연물은 인간의 목적 실현을 위한 수단으로 활용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그들에게 인간을 제외한 존재는 도덕적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만약 인간이 아닌 존재에게 가치를 부여한다면, 그들이 인간의 이익에 이바지하는 한에서만 도구적 가치를 지닐 뿐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근현대로까지 이어져 환경윤리학자로 널리 알려진 J. 패스모어(John Passmore, 1914~2004)의 주장에서도 단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동물 · 식물 · 경관에도 각각 ‘생존권’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쓸데없는 혼란을 초래한다. ‘권리’라는 관념은 단적으로 말해서 인간이 아닌 존재에게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 동물을 학대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것과 동물에게도 권리가 있다고 하는 것은 실은 전혀 다른 것이다.”5)   

인간중심주의 윤리학자들은 이처럼 인간과 자연물의 가치를 확실하게 차별적으로 구분한다. 예를 들어 동물보호와 관련해서 필요 이상의 잔혹한 방법으로 동물 학대를 금지하는 것은 그러한 잔인한 태도가 인간의 본성을 해치고 자칫 타인에게까지 잔인하게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지, 동물의 생명 자체를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즉 인간의 도덕 감정을 위해 동물의 생명을 보호하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과 자연 세계를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로 보는 입장은 인간 스스로를 우월한 위치에 올려놓음으로써 이 세계와의 관계를 지배와 정복의 관계로 인식하게 만든다.

지배와 피지배로 이분하여 도덕적 지위를 나누는 인간중심주의적 사고방식은 자연에 존재하는 많은 것들을 마치 제 소유인 양 필요에 따라 임의대로 이용하고 처분해왔다. 인간중심적 윤리학은 휴머니즘(Humanism)이라는 고상한 인간학을 주창하였지만, 사실 그 이면에서는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인간 이외의 존재들을 희생시키는 데 결코 주저함이 없이 동원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불교는 인간과 세계를 어떻게 파악할까?

불교에서 바라보는 이 세계의 모든 존재는 실체를 갖지 않는 연기에 의해 구성된 화합물에 불과하다. 이른바 ‘나’라는 존재는 색 · 수 · 상 · 행 · 식이라는 오온의 구성물로 표현되거나 지 · 수 · 화 · 풍 사대의 화합물 등으로 설명된다. 세계도 마찬가지이다. 세계 자체는 물론이고 세계에 거주하는 모든 존재는 역시 오온 내지 사대의 혼합물에 불과하다. 그렇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차별이 없으며 따라서 평등한 존재이다. 자신이 지은 인연에 따라 언제든지 모든 존재는 서로의 모습이 뒤바뀔 수 있는 임시적 모습으로서만 존재할 뿐이다. 즉 인간은 자신이 지은 업력에 따라 윤회하는 존재이다.

불교의 윤회관은 3세(世) · 3계(界) · 4생(生) · 6도(道)를 터전으로 하여 이루어진다. 3세는 전생 · 현생 · 내생을 말하며 3계는 욕계 · 색계 · 무색계를 말한다. 그리고 4생은 난생 · 습생 · 태생 · 화생을 말하며 6도란 천상 · 인간 · 아수라 · 축생 · 아귀 · 지옥의 여섯 계층을 말한다. 3세는 시간적인 터전인 반면, 3계는 공간적인 터전이다. 그리고 4생은 출생과 생존의 방식, 6도는 과보에 따른 거주지이다. 이들 각각은 서로 열린 세계로서 개방적인 구조를 갖는다. 예컨대, 과거와 미래가 교차할 수 있으며 3세와 6도가 교차할 수도 있다. 상호 침투할 수 있는 전일적인 관계망을 형성하는 것이다. 따라서 원시시대에는 공룡(축생)이었는데 선업으로 인하여 오늘날 인간으로 태어날 수도 있고, 반대로 원시시대에는 인간이었지만 악업으로 인해 바퀴벌레로 태어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인간 이외의 존재를 차별하거나 해쳐서는 안 된다. 왜냐면 자신과 타자를 구별하지 않는 불교의 불이론적 세계관에서의 윤리적 대상은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대상이며, 그러한 대상은 서로를 이롭게 하는 자리이타의 자비심에 의해 유지될 수 있다. 따라서 독생자를 다루는 어머니처럼 모든 존재를 보호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이 불교윤리이다.

2) 공생학(共生學)으로서 불교윤리

불교윤리의 윤리적 적용 대상이 되는 존재는 생명체는 물론이고 무생물체까지도 포괄하는 우주 전체이다. 심지어 아직 이 세상에 출현하지 않은 존재까지도 윤리적 대상이 된다. 유형 · 무형의 모든 대상이 윤리적 적용 대상이 되는 것이다.

어떠한 생명체이든지-약한 것 혹은 강한 것, 큰 것, 땅딸막한 것 혹은 중간 것, 짧은 것, 작은 것, 혹은 큰 것이든지- 예외 없이 (모두) 눈에 보이는 것 혹은 보이지 않는 것, 멀리서 사는 것 혹은 가까이 사는 것, (이미) 태어난 것 혹은 앞으로 태어날 것, 모든 존재는 부디 행복할지어다. 어디에서 누구에게든지 다른 이가 다른 이를 속이게 하지 말고 무시하게 하지도 말라. 성냄과 혐오로부터 서로서로 고통을 바라게 하지도 말라. 마치 어머니가 자신의 외동아들을 생명을 다하여 보호하듯이, 그와 같이 모든 존재들에 대하여 한량없는 자애의 마음을 전 세계에 대하여 길러라. 위로, 아래로, 옆으로, 장애도 없이, 미움도 없이, 적의도 없이. 서 있든지, 걷고 있든지, 앉아 있든지, 누워 있든지, 깨어 있는 한 염/마음챙김(sati)을 닦아라. 그들은 이를 여기에서 고귀한 머무름(brahma vihāra)이라고 한다.

위의 내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자비의 대상에는 현상적인 존재만이 아니라 영적인 대상, 그리고 현존하는 것뿐만 아니라 앞으로 태어날 미래의 존재에까지 자비의 대상에 포함된다. 따라서 불교윤리학은 지금 현존하는 생명체도 중요시하지만 태어날 잠재성을 갖고 있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존재까지도 존중하는 공생의 윤리학이다. 공생의 윤리학은 풀과 나무 등의 생명체뿐만 아니라 기와, 흙, 물 등과 같은 무생물[無情物]조차 윤리적 대상으로 여긴다. 그것이 초목불성론(草木成佛論)과 무정성불(無情成佛)이다. 길장(吉藏)은 ‘마음 밖에 따로 다른 존재가 없다[心外無別法]’는 유식사상에 근거하여 인식과 대상은 둘이 아닌 것으로, 삼라만상과 모든 존재[一切諸法]는 그 자체가 무량삼매이고, 보리이며, 진실한 도이고, 안락성을 갖추고 있다고 밝혔다. 그래서 무정물(無情物)인 나무와 풀도 불성을 갖추고 있다고 한다. 또 담연(湛然)은 《기신론》의 진여연기(眞如緣起)에 근거하여 흙과 기와 같은 무정물조차도 불성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만법이 진여이니 변화하지 않기[不變] 때문이다. 진여가 만법이니 인연을 따르기[隨緣] 때문이다. 그대가 무정(無情)이 불성이 없다고 믿고 있다면 어찌 만법에 진여가 없다고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만법이라 부르는 것에 어찌 가는 티끌만큼의 차이가 있겠는가. 진여의 체가 어떻게 오직 그대와 나에게만 있겠는가.

만법이 바로 진여 즉 불성이고, 진여가 곧 만법이라는 논리를 수연(隨緣)과 불연(不緣)의 구조로서 설명한 것이다. 만법 그 자체를 진여의 불변 성품을 근거로 보고, 진여의 수연을 만법으로 보고 있다. 불성을 갖춘 존재라면 당연히 불교윤리학의 적용 대상이 되는 것으로, 불교는 이 세상의 모든 존재를 윤리의 대상으로 보았던 것이다. 이는 인간과 비인간으로 나누어 윤리적 적용 대상을 구분하고자 하였던 서양 윤리학과는 분명 다른 것이다. 세상의 모든 존재를 자신과 동일한 대상으로 간주하여 자비롭게 대하고자 하는 불교윤리학은 자타불이의 윤리학이다. 물론 오늘날 서양 윤리학에서도 피터 싱어와 같은 학자들은 불교윤리학과 비슷한 시각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서양 윤리학의 주류라 할 수 없는 것으로 기존의 전통 윤리학에 대한 반성과 불교의 윤리관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

 

3. 반윤리 · 초윤리로서 공의 윤리

불교 연기설에 따르면, 이 세계의 모든 존재는 서로 의존해 있다. 의존적 존재라는 것은 곧 자립적 존재[실체]가 아니라는 것이며 이것을 불교에서는 자성(自性)이 결여된 공으로 표현한다. 그렇다면 연기적으로 존재하는 모든 존재는 실체가 없는 공한 존재이기 때문에 이러한 공한 존재를 윤리적 대상으로 하는 불교윤리학은 ‘공의 윤리학’이라 할 수 있다.

공의 윤리학은 실체 하지 않는 공한 존재를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행위의 주체[인간]를 전제로 하여 성립하는 서양 윤리학과는 전혀 성격이 다르다. 서양 윤리학과는 달리 불교윤리학은 주체[실체]를 부정한다는 의미에서 반(反)윤리이며, 주체를 뛰어넘은 윤리를 추구한다는 입장에서 초(超)윤리이다.

 

1) 비실체적 자아와 공존의 윤리

연기적 존재론에 근거한 상호의존과 공존의 윤리에서는 자기와 타자의 구별이 사라지기 때문에 자기이익과 타인의 이익, 개인의 이익과 전체의 이익이 서로 맞물려 분리할 수가 없다. 배제된 개체가 없기 때문에 남을 해치는 것이 곧 자기를 해치는 것이며, 타인의 이익이 자기의 이익으로 나타난다. 연기적 구조에서는 공생의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 대해 달라이 라마(Dalai Lama: 1935~  )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만약 자아가 고유의 정체성을 가졌다면 타인의 이익과 별도의 자기이익을 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자기와 타인은 관계 속에서만 이해될 수 있기 때문에 자기이익과 타인의 이익은 밀접하게 상호 연결되어 있다. 실로 이러한 연기적 실재관에서는 타인의 이익과 전혀 무관한 자기이익이란 존재하지 않음을 우리는 안다. 실재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근본적인 상호연결성으로 인해, 너의 이익은 또한 나의 이익이 된다. 이로부터 나의 이익과 너의 이익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이 분명하다. 깊은 의미에서 둘은 합치하는 것이다.

자타로 구분될 수 없는 연기적 세계관에서는 모든 존재가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에 이익과 손실을 동일하게 볼 수밖에 없다. 예컨대 공동체 일원 중의 누가 선을 행하면 공동체 전체가 이익을 받게 되고, 악을 행하게 되면 공동체 전체가 손해를 받게 된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우리는 악을 멈추고 선을 행해야 하는 윤리적 당위성을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선을 행할 때 그 동기가 이기적 욕망에 의한 것이라면 그 행위는 욕망의 변화에 따라 언제든지 바뀔 수 있고 공동체의 발전을 저해할 것이다. 예컨대 타인보다 더 많은 이익을 받기 위해 남을 해치거나 속임수를 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러지 못하다. 이기적 욕망에 의한 속임수로 더 많은 이익을 산출하는 것은 연기적 윤리관에서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더 많은 이익을 얻기 위해 남들에게 피해를 주게 되면 결국 그 공동체는 무너지게 될 것이며 그 결과 본인도 피해를 받게 된다.

그렇다면 왜 그러한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그것은 인간의 무지 때문이다. 즉 이기적 행위가 가능하다고 믿는 어리석음으로 인해 남들에게도 피해를 주고 그 자신도 피해를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어리석음은 자기라는 독립된 실체가 존재한다는 믿음에 근거한다. 모든 존재는 연기적 존재로 그 실상이 공이라는 걸 깨닫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불교윤리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인간존재의 실상에 대한 파악이다.

불교에서는 인간을 비롯한 모든 존재에 대해 어떤 고정된 실체성이 있다고 보지 않는다. 즉, 불교는 무실체(무자성)의 존재로서 인간을 규정함으로써 인간이라고 할 만한 어떠한 실체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인간이란 단지 여러 요소의 인연화합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한다. 인간을 비롯한 일체의 존재를 지 · 수 · 화 · 풍이라는 사대(四大)의 인연화합으로 보거나, 색 · 수 · 상 · 행 · 식의 오온(五蘊)의 인연화합으로 보는 경우가 그 대표적 일례이다. 이처럼 불교는 인간을 실체가 아닌 관계의 한 양상인 연기적 존재로 파악한다.

실체론적인 생명관은 인간을 인간이게끔 하는 어떤 실체, 자아를 갖고 있다는 입장인 반면, 관계론적인 생명관은 그러한 실체, 자아를 부정하는 것으로, 인간은 여러 요소의 구성물에 불과한 연기적 소산으로 파악한다. 생명은 관계에 따라 역동하는 과정 내지 흐름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실체론적인 생명관은 “자아의 실체가 불변하며, 다른 어느 것에 영향받지 않고 불변적이며, 타자와 서로 나눌 수 없는 최소한의 어떤 고유한 성질을 스스로 내포하는 그런 모습이다.”

반면 관계론적 생명관은 “불변의 실체론적 자아를 거부하며 환경과의 섭동을 통해서 자아의 변화 가능성을 함의하는 생태론적 모습을 지닌다. 그렇다고 해서 자아의 정체성이 없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정체성의 의미가 실체적이지 않다는 뜻을 담는다.”

그러므로 관계론적인 생명관에 토대하는 불교의 입장은 실체론적인 생명관과는 성격을 달리한다. 생명이란 현상적 실체로서 파악할 수 없는 것이다. 즉, 불교에서 말하는 인간의 생명이란 단지 현생에 국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과거생 · 현생 · 내생을 포함한 3세 윤회 전체를 뜻하는 것으로 결국 특정한 어느 시점과 실체를 정하지 않은 순환적 관계의 연속적 과정이다. 불교에서는 그러한 생명의 연속적 과정을 무아(비실체)의 윤회설로 설명한다.

비실체론적 관점에서 윤회는 반드시 자아 간의 동일성(identity)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윤회는 자아들 간 연속성(continuity)만 전제되어도 가능하다. 동일성에 의한 윤회는 실체주의적 자아관을 대변하고, 연속성에 의한 윤회는 비실체주의적 자아관을 대변한다.

불교의 12지연기는 한 생명체의 성장 과정뿐만 아니라 전생 · 현생 · 내생의 삼세윤회의 과정까지도 보여주는 생명 자체의 전개과정에 대한 도식표이다. 즉 무명과 행은 생사윤회의 근본 원인으로서 전생에 지은 번뇌와 행위를 의미한다. 현재의 생명은 과거에 지은 무명과 행의 결과로서 나타난 것인데, 여기에 해당하는 것이 식, 명색, 육입, 촉, 수, 애, 취, 유이다. 식에서 유까지의 8단계는 수태와 출산, 그리고 아이에서 어른이 되어 죽을 때까지의 갖가지 업을 짓는 단계로서 임신하여 태어나 죽을 때까지의 모든 행위가 이에 해당한다. 그 결과 미래 자신이 태어날 곳이 정해지는데 그것이 생이다. 미래의 생으로 인해 늙고 병들어 죽는 것이 노사이다.

이와 같이 생명의 실상을 여법하게 이해하게 되면 자아의 이익에 이끌려 타인을 해치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 자타 모두 연기적 존재로서 서로에게 의존하는 동일한 몸체인 것이다. 따라서 불교윤리는 동체대비(同體大悲)의 자비심으로 “모든 악을 짓지 말고 모든 선을 받들어 행하며 스스로 그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이다(諸惡莫作 衆善奉行 自淨其意)[七佛通誡偈].”

2) 연기론적 존재와 공의 윤리

연기론적인 존재인 모든 사물은 실체[자성]를 결여한 의존적[의타적] 존재들로서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임시적 존재[假有]이다. 그러므로 ‘나라는 실체[자아, Ātman]’는 인간은 물론이고 인간 외의 사물이나 현상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존재는 상호의존하는 가운데 생멸을 거듭할 뿐이며, 여기에는 어떤 궁극적 원인이나 제일원인 같은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화엄사상에서는 이와 같은 세계를 사사무애(事事無碍), 즉 사물과 사물 사이에 막힘이 없다는 진리로 표현한다. 화엄의 세계에서는 사물들이 막힘없이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된 거대한 그물망과도 같다. 그러한 모습을 비유하여 마치 인드라(Indra) 신에 의해 하늘에 펼쳐진 방대한 구슬망과도 같은데, 이 망의 무수한 구슬들은 각각 다른 모든 구슬을 반영하도록 교묘하게 펼쳐져 있다고 한다. 이를 화엄사상에서는 ‘일즉다(一卽多) 다즉일(多卽一)’ ‘일중다(一中多) 다중일(多中一)’로 표현한다. 서양의 불교학자인 프랜시스 쿡은 이러한 화엄의 세계관을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화엄의 세계는 본질적으로 [사물들의] 동일성과 상호인과성의 세계이다. 우주의 방대한 물품목록 가운데서 하나가 영향을 받으면 그 안에 있는 다른 모든 것들이 영향을 받는다. …… 서양의 존재론은 엄격한 위계질서를 가지고 있어서, 전통적으로 창조주 하나님이 존재의 사다리의 맨 꼭대기를 차지하고 있으며 인간은 중간, 그리고 다른 동물이나 식물들, 바위 등은 밑바닥을 차지한다. 서양에서 종교적 관심이 꾸준히 퇴조하여 많은 사람에게 사다리의 꼭대기가 비어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인간이 만물의 척도요 세계는 그의 세계이며 방대한 우주의 계산할 수 없는 시간의 역사가 어떻든 인간의 역사라는 암묵적인 가정에 있다. 반면에 화엄에서 보는 세계는 위계질서가 없다. 중심이 없으며, 혹은 있다 해도 중심은 어디에나 있다. 인간은 확실히 중심이 아니며, 무슨 신이 있는 것도 아니다.16)

 

공에 입각한 이와 같은 유기체적인 상호의존의 세계관은 주체[실체]를 중시하는 서양 윤리학[서양철학]의 인간중심적 세계관에 대한 비판이라고 할 수 있다. 서양 윤리학은 인간을 세계의 중심에 두고서 인간 행위의 규범과 가치, 정당성[선]과 부당성[악], 자유와 책임 문제 등을 밝힌다. 그런데 공의 윤리는 상호의존성을 기반으로 하는 공생의 윤리학이다. 인간세계에서 개인과 개인, 집단[사회]과 집단 사이에서의 관계뿐만 아니라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 그리고 자연 세계 내에서의 생물과 무생물, 사물과 사물들 간의 관계에서도 공생의 윤리가 작용한다.

공생의 윤리는 무엇보다 인간중심적 세계관을 지양한다. 인간중심적 세계관은 존재의 본래 모습에 반하는 것으로 인간은 물론이고 인간 이외의 존재도 파괴하기 때문이다. 각 개인 또한 자기중심적 사고와 행위를 하게 됨으로써 자신은 물론이고 타자를 해치게 된다. 그런데 서로 의존하는 공의 윤리에서는 자타의 엄밀한 구별이 사라지므로 자기이익과 타인의 이익, 개인의 이익과 전체의 이익이 같이 갈 수밖에 없다. 고립된 개체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남을 해치는 것은 곧 자기를 해치는 것이 되고, 타인의 이익이 자기의 이익이 되는 것이 연기적 세계의 이치이기 때문이다.

자기이익과 타자이익의 관계는 자기보호(attarakkhita)와 타자보호(pararakkhita)의 관계를 설명하는 붓다의 가르침 속에 잘 나타나 있다. 붓다는 자기보호와 타자보호가 둘이 아니기에 자기보호에 의해서 타자보호를 하며, 타자보호를 통해 자기보호를 할 수 있음을 곡예사의 비유를 통해 들려준다. 스승과 제자가 한 팀으로 구성된 두 곡예사의 목표는 제자가 대나무 장대를 타고 올라가 스승의 어깨 위에서 서는 기예를 성공시키는 것이다. 이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스승은 “너는 나를 보호해라. 나는 너를 보호할 것이다. 그래서 서로서로 수호하고 서로서로 보호함으로부터, 우리는 우리의 기예를 보여줄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제자 메다카타리카(Medakathālikā)는 “스승님,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스승님, 스승님은 스승님을 보호하고 저는 저를 보호합니다. 그래서 각자가 자기를 수호하고 자기를 보호하여 우리의 기예를 보여줄 것입니다.”라고 스승과는 다른 방도를 말했다. 즉 스승은 제자인 상대/타자를 보호함으로써 서로를 보호한다고 하고, 제자는 각자가 자신을 보호함으로써 서로를 보호한다고 한다. 그런데 이에 대해 붓다는 과연 어떤 입장을 취할까?

붓다는 자기보호에 의해서 타자보호를 하며, 타자보호를 통해 자기보호를 한다고 말한다. 즉 자기보호이든 타자보호이든 결국 서로를 보호한다는 것이다.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제자 메다카타리카가 스승에게 말한 것처럼, (그와 같이) 비구들이여, ‘나는 나를 보호하겠다’라고 염처(satipaṭṭhānn)를 수행해야 한다. 비구들이여, 자신을 보호하면서 타인들을 보호하고, 타인들을 보호하면서 자신을 보호한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어떻게 자신을 보호하면서 타인을 보호하는가? 추구함에 의해서, 수행에 의해서, 반복하여 닦음에 의해서이다. 비구들이여, 이같이 자신을 보호하면서 타인들을 보호한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어떻게 타인을 보호하면서 자신을 보호하는가? 인내에 의해서, 불상해에 의해서, 자애에 의해서, 동정에 의해서이다. 비구들이여, 이같이 타인들을 보호하면서 자신을 보호한다. 비구들이여, ‘나는 나를 보호할 것이다’라는 생각으로 염처를 닦아야 한다. ‘나는 타인들을 보호할 것이다’라고 염처를 닦아야 한다. 비구들이여, 자기를 보호하면서 타인들을 보호하고, 타인들을 보호하면서 자기를 보호한다.

실체[주체]를 인정하지 않는 공의 윤리에서 ‘자기’만의 이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타인과 분리된 자립적 실체로서 ‘자기’는 결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타인과의 공생적인 자기이익은 타인에게도 이익이 되는 반면에, 타인의 이익을 도외시한 자신만의 이익 추구는 오히려 그 반대의 결과를 초래한다. 따라서 공의 윤리학에서는 덕(virtue)과 행복이 함께 작용하는 것으로 이것은 선한 행위에 의해 선한 결과가 도출되는 불교연기설의 필연적 결과이다

 

4. 현대사회의 삶과 불교 윤리

불교는 우주를 집으로 생각하고 여기에 거주하는 모든 존재를 한 가족으로 여긴다. 이러한 존재론적 구조가 바로 불교 연기설이다. 그러므로 동식물은 물론이고 기와와 흙, 그리고 물과 같은 무정물도 한 가족으로 생각한다. 이와 같은 연기적 세계관은 불교윤리의 근간이 되는 것으로 모든 존재는 서로 의존하는 공생의 관계를 맺고 있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공생의 관계를 조화롭게 유지해나가는 것을 불교가 꿈꾸는 윤리적 삶의 전형으로 제시하고자 하였다.

불자의 행동 규범으로서 정립된 수많은 계율도 이러한 연기적 공생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서 제정되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그러므로 불교에서의 깨달음이란 이 세계가 연기적 존재임을 이해하여 모든 존재를 윤리적 대상으로 삼아 동체대비의 자비심으로 “모든 악을 짓지 말고 모든 선을 받들어 행하며 스스로 그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불교윤리의 핵심이다.

이 글에서는 이른바 불교윤리의 잣대가 되는 계율에 관해서는 구체적으로 다루지 않았다. 불교가 꿈꾸는 윤리는 그러한 규범화된 행위 규범을 뛰어넘는 윤리로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개념이 공이며, 이 글에서는 행위와 행위 주체, 그리고 그 대상을 포함한 모든 실체론적 경계를 허무는 개념으로 사용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존재론적 토대에 근거하여 ‘공의 윤리’를 제시하였다. 공의 윤리에 따르면 물질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아니면 현상적인 것이든 본체적인 것이든, 윤회든 열반이든 그 어떤 것이든 단절되고 자립적인 존재는 존재할 수 없다.

우리는 21세기를 맞이하여 새로운 시험대에 섰다. 급속히 발전하고 있는 AI 시대가 도래하여 앞으로 인류의 주인공으로 대두할지도 모른다. 이러한 고도로 발전한 과학기술 시대에 불교가 어떠한 관점에서 인류의 미래를 헤쳐 나가야 할지를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이 글에서는 그러한 고민의 한 답안으로 연기적 존재로서 인간과 세계의 문제를 윤리적 관점에서 접근한 것이다. “비록 백 년을 살지라도 최상의 진리(Dhamma)를 보지 못한다면, 최상의 진리를 보고 사는 하루가 더욱 뛰어나다.”(Dhp. 115) 그 최상의 진리가 바로 연기적 존재로서 이 세계를 인식하고 자비롭게 살아가는 것이며, 그것이 곧 불교가 꿈꾸는 최상의 윤리적 삶이다. ■

 

윤종갑
동아대 철학생명의료윤리학과 교수. 부산대 철학과, 동 대학원 불교철학 전공(철학박사). 동경대학교 박사후과정 수료. 주요 논문으로 〈용수의 연기설에 대한 연구-《중론》을 중심으로〉(박사논문) 등이 있고, 저서로 《공과 실재, 그리고 깨달음》 《한국불교사상의 특질》 등이 있다. 불교평론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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