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현대한국의 불교학자

1. 탄허의 생애와 모습

    : 유생(儒生)에서 불승(佛僧)으로

탄허(呑虛, 1913~1983)는 근현대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고승이다. 스님은 1913년 2월 20일(음력 1월 15일) 전북 김제 만경에서 독립운동가 율재(栗齋) 김홍규(金洪奎)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서 1983년 6월 5일 71세를 일기로 오대산 월정사에서 입적했다. 속명은 김금택(金金鐸), 자(字)는 간산(艮山), 법명은 택성(宅成, 鐸聲), 법호는 탄허(呑虛)이다. 

스님은 6세부터 16세까지 조부와 부친, 그리고 향리의 선생들로부터 사서삼경을 배웠고, 결혼(17세) 후에는 처가가 있는 충남 보령으로 옮겨 기호학파 면암 최익현 계통의 이극종(李克宗) 선생으로부터 다시 《시경(詩經)》 《서경(書經)》 《주역(周易)》 《예기(禮記)》 《춘추좌전(春秋左傳)》 등 5경을 비롯한 유가의 여러 경서를 수학했다. 

이 무렵(20세 전후) 그는 노장(老莊)사상에 심취하였고, 특히 ‘도(道)’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때 마침 오대산 상원사(上院寺)에 주석하고 있던 한암 선사(1876~1951)의 명성을 듣고, 입산할 때까지 약 3년 동안 30여 통의 서신을 보내, 도(道)와 불교에 대하여 가르침을 받기도 하였다. 

1934년 22세 때 탄허 스님은 드디어 한암 선사가 주석하고 있던 오대산 상원사로 출가했다. 상원사는 선원이므로 하루 7~8시간 좌선이 일상이었다. 1936년 6월 그는 선교겸수(禪敎兼修)를 목표로 상원사에 설치한 강원도 삼본사(월정사, 유점사, 건봉사) 승려연합수련소에서 스승 한암의 증명하에 중강(中講, 조교)으로서 《금강경》 《화엄경》 등을 해석 · 풀이했다. 1951년 3월 스승 한암 선사가 입적했다. 

1956년(43세) 4월, 탄허는 월정사 조실로 추대되었고, 승속을 아우르는 지도자급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오대산 월정사에 ‘대한불교조계종 오대산 수도원’을 개설하였다. 1975년 8월에는 그의 대표적 역서(譯書)인 《신화엄경합론(新華嚴經合論)》(47권)을 현토 · 번역하여 간행하였고, 이어 1976년부터 1983년까지 우리나라 전통강원의 텍스트인 사교(四敎), 사집(四集), 사미과 교재를 모두 현토 · 번역하여 간행하였다. 그리고 1983년 6월 5일(음력 4월 25일), 탄허는 오대산 월정사 방산굴(方山窟)에서 세수(世壽) 71세, 법랍(法臘) 49세로 입적하였다. 

필자는 약 7~8년 동안 탄허 스님을 시봉하였다. 공부를 하자면, 가까이에서 모시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때로는 시봉하는 일이 힘들어서 몇 번 노사(老師, 탄허) 곁을 떠나기도 했으나, 떠나면 곧 후회가 되었다. 탄허 스님에게는 한문학이나 강원교학 등의 학문뿐만 아니라, 그의 삶을 통해서 훌륭한 인격까지 배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탄허 스님은 유학자 출신이라서 예의에 벗어난 언행은 일절 하지 않았다. 신도들이나 손님이 와서 절을 하면 고개를 숙여서 같이 합장 배례(拜禮)했고, 1배(拜) 이상은 절대 하지 못하게 했다. 또 《화엄경》을 간행하기 위해서는 자금이 절대적으로 필요했지만, 인격이나 학문을 팔지는 않았다. 이렇게 옛 스승들은 학문적 역량과 훌륭한 인격을 동시에 아우르고 있었다. 

2. 탄허의 교육이념과 철학

     : 교육은 인간 형성, 인격 형성의 길이다

탄허 스님은 20세기 한국불교 지성사를 대표하는 고승이다. 그는 ‘화엄학의 3대서’라 불리는 《화엄경》 《화엄론》 《화엄경소초》를 현토 · 역해하였고, 한국불교 전통강원 교학의 교재를 완역, 집성했으다. 승속을 초월하여 인재양성에 매진하였고, 유불도(儒佛道) 삼교의 철학을 일이관지(一以貫之) 시켰던 이다. 또 불승(佛僧)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미래사회에 대한 통찰력도 갖고 있었던 특이한 인물이다. 

탄허는 1934년 가을(음력 9월 5일), 한암 선사를 찾아 오대산 상원사 선원으로 입산 출가했다. 17세에 결혼했으므로 이미 그때 처자식이 있었다. 그들을 남겨둔 채 입산 출가하여 불승이 된 동기는 무엇이었는가? 현실을 초월한 어떤 이상이 있었던 것일까? 

《탄허연보》(교림, 2012년)에는 스님이 17세 때 부친과 나눈 의미심장한 이야기의 일단(一段)이 실려 있다. 

저의 선고(先考)께서는 17세부터 독립운동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늘 정치 문제를 가지고 저를 가르치셨습니다. 제가 17, 18세쯤 되었을 무렵, 선고께 “소강절은 소인입니까? 군자입니까?” 하고 여쭈었더니, “송조(宋朝, 송나라) 6군자(六君子) 중의 한 분이시다.” (……) 제가 또 말씀드리기를 “그러면 그의 학설이 거짓말이 아니겠지요?” 하고는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의 오종(五種) 사업(事業)의 종별(種別)을 들어 “‘영위계구(寧爲鷄口)이언정 무위우후(無爲牛後)[차라리 작아도 닭의 입이 될지언정 소 궁둥이가 되지 말라]’라는 말이 있듯이 가다가 못 갈지언정 공자(孔子)의 불세지사업(不世之事業)을 따르겠습니다.”라고 하니, 선고(先考)께서도 막지 못하셨습니다.

‘불세지사업(不世之事業)’ 혹은 ‘불세사업(不世事業)’이란 인류에게 끼친 공로가 매우 커서 ‘한 시대를 통해서도 보기 드문 일’ ‘시간을 초월한 영원한 사업(永代의 事業)’을 뜻한다.

송 대의 학자 소강절(邵康節, 1011~1077)은 공자가 만년에 주유천하(周遊天下)를 그만두고 고국 노나라로 돌아와 제자를 육성하는 일에 전념했던 것을 가리켜 ‘불세지사업(不世之事業)’이라고 정의했다. 

탄허의 부친은 그에게 독립운동 등 정치에 투신해 볼 것을 권유했으나, 탄허는 그보다는 교육에 더 관심이 많았다. 정치는 한 시대의 역할이고, 인재양성은 시대를 초월한 불세사업이었기 때문이다. 인재를 길러야만 미래를 기대할 수 있다고 본 것인데, 그의 나이 17세 때의 생각으로는 매우 현명했다고 할 수 있다. 

탄허는 제자 교육에 헌신했던 공자의 삶을 매우 흠모했다. “만일 공자가 주유천하를 그만두고 노나라로 돌아와 제자들을 훈육 · 양성하지 않았다면, 오늘날 공자는 아마 없었을 것이다.”라고 하여, 공자의 교육 정신을 높이 평했다. 이는 곧 자신도 이런 길을 걷겠다는 간접적인 표현이기도 하다. 

교육은 인간 형성, 인격 형성의 길[道]이다. 아무리 착한 성품을 지녔어도, 교육을 받지 않고는 선(善)과 악(惡), 의(義)와 불의(不義), 공(公)과 사(私)를 구분하기 쉽지 않아 훌륭한 전인적 인격을 이룰 수가 없다. 그러므로 교육은 불멸(不滅)의 공익으로서, 개인적 학문이나 사상 · 철학보다 우선해야 한다. 

동양에서 ‘교육(敎育)’이란 말은 본래 맹자가 처음 한 말이다. 《맹자》 〈진심장(盡心章) 상(上)〉에는 군자의 세 가지 낙(樂)이 나오는데, 그 두 번째가 ‘천하의 영재를 얻어서 그들을 훈육하는 것(得天下英才而敎育之)’이다. 이어 “천하에 군주 노릇 하는 것은 그 속에 들어가지 않는다.”라고 정치에 대해서는 못을 박았는데, 탄허 스님은 이 말을 매우 자주 되풀이하여 말하곤 했다. 

3. 도의적 · 도덕적인 인재 교육

     : 불세사업(不世事業)의 종을 울리다

탄허 스님은 만 43세 때인 1956년 4월 1일, 오대산 월정사에 ‘대한불교조계종 오대산 수도원’을 개설했다. 당시 월정사는 6 · 25 전란으로 팔각구층석탑을 제외한 모든 당우가 전소되고, 겨우 두 채를 신축하여 대중을 수용하고 있었다. 또 당시 월정사 역시 정화(대처 측과 비구 측의 분쟁)로 매우 불안한 상태였고, 경제 사정도 좋지 못해서 아침에는 죽을 먹을 정도였다. 최악의 환경과 여건이었음에도 탄허 스님이 수도원을 개설한 것은 교육과 인재양성이라는 대명제 때문이었다. 이 대명제와 사명감이 그에게 ‘발분망식(發憤忘食)’의 동력을 제공했다고 할 수 있다. 

오대산 수도원은 ‘강원’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았다. 여기에는 승속을 가리지 않고 한국사회에 불교를 이끌어갈 수 있는 지도자급 인재를 양성해 보겠다는 의도가 담겨 있다. 특히 탄허 스님은 유불도 삼교의 가르침과 고전(古典, 《화엄경》 《노장》 《주역》 등)을 바탕으로 한 동양적 가치관과 도덕성을 갖춘 인재를 양성하고자 했다. 

수도원생 모집은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의 신문광고를 통하여 공모했다. 수도원 과정은 5년이었고, 승속 불문, 남녀 불문이었다. 수강료는 무료, 기숙도 무료로 제공되는 강숙(講熟) 성격이었다. 입학 자격은 일반인은 대학 졸업자, 승려는 대교(大敎, 화엄경)를 마친 자, 유생은 《논어》 등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마친 자로 한정했다. 강의 시간은 하루 평균 8시간 정도 됐는데, 전 강의를 탄허가 전담하였다. 강의 내용은 불교경전뿐만 아니라 유불도 등 동양철학 전반, 구류(九流)철학 전반을 다루었다. 간혹 백철(白鐵) 같은 문인들이 자원(自願)하여 특강을 하기도 했다.

오대산 수도원은 승려 중심이 아니었다. 승려와 일반인 모두를 아우르는 성격이었다. 오대산 수도원생들의 분포도를 보면 총 20여 명 가운데 대학졸업자가 50% 이상을 차지했는데, 그 가운데는 문인, 교원(敎員), 문관(文官) 관료, 군인, 법대 학생 등으로 다양했다. 예컨대 김종후는 서라벌예대(중앙대 문과대) 출신으로서 이미 등단한 문인이었다. 또 수도원생 가운데에는 여성도 두 명 있었다. 전체 수도원생 중 일반인이 50% 이상을 차지했다는 것은 오대산 수도원의 성격이 어떠했는가를 시사한다. 

당시 오대산 수도원생으로서 문학평론가로 등단한 사람이 동국대 교수를 지낸 김운학이다. 그는 1958년 《현대문학》 평론 부분에 〈공자의 문학관〉과 〈삼매론(三昧論)〉이 추천되어 문학평론가로 문단에 데뷔했는데, 그의 문학평론가 추천은 오대산 수도원의 학문적 위상과 역할에 적지 않은 의미가 부여되었다고 할 수 있다. 

수도원의 주(主) 강의 교재는 《영가집》 《대승기신론》 《능엄경》 《화엄경》 《육조단경》 《보조법어》 등이었고, 특강 과목으로 《노자(老子)》 《장자(莊子)》 《주역(周易)》 등이 강의 되었다. 수도원생 모집 광고에서 볼 수 있듯이 수도원에서 불교철학과 중국철학 전반에 대한 강의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수도원에서 불교경전과 동양의 대표적인 고전을 두루 강의한 이유는, 앞에서 누차 언급한 바와 같이, 유불도 삼교의 철학을 바탕으로 한 도의적인 인재, 지도자급 인재를 양성하려는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불교 사찰에서 설립한 교육기관의 성격을 뛰어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오대산 수도원은 2년 반 만에 문을 닫고 말았다. 월정사 역시 전국적으로 불어닥친 정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탓이다. 대처 측과 비구 측은 소송을 거듭했다. 대처 측의 승소(월정사의 경우 1심 재판)와 극심한 재정난 · 식량난 등 복합적인 문제로 끝내 수도원은 문을 닫고 말았지만, 탄허는 10여 명의 제자를 이끌고 월정사 말사인 삼척 영은사로 옮겨서 약 3년간 오대산 수도원을 계속했다. 

열악한 상황이었음에도, 탄허 스님에게 이 시기는 생에서 가장 보람 있고 의미 있는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비록 2년 반이라는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교육을 통한 인재양성이라는 자신의 이상을 의욕적으로 실천한 아름다운 추억의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라는 말이 있다. 장자는 인생을 “마치 문틈 사이로 백마가 지나가는 것과 같다(白駒過隙)”고 하여 짧은 한순간에 지나지 않는 인생을 허탄조로 이야기했지만, 탄허 스님에게 오대산 수도원은 시간의 단장(短長)을 떠나서 가장 열정적이고 의미 있는 일이었다. 

탄허 스님은 《신화엄경합론(新華嚴經合論)》 출판 후에 다시 오대산 수도원 같은 교육기관을 설립하고자 했으나, 《화엄경》 간행으로 인한 건강 악화로 실행하지 못했다. 하지만 한국사회와 불교를 이끌어갈 수 있는 지도자급 인재양성에 대한 염원과 발원은 변함이 없었다. 

광복 이후 한국불교 교육사에서 승속을 초월한 지도자급 인재양성을 목표로 했던 교육불사는 오대산 수도원이 최초일 것이다. 

 

4. 《화엄경》 현토 · 번역 · 간행 

     : 생애를 건 불후의 업적

탄허의 업적 가운데서도 특필해야 할 불후의 업적은 1975년에 간행된 《신화엄경합론(新華嚴經合論)》이다(《화엄경》으로 약칭). 이 책을 간행하기 위해 그가 손으로 쓴 200자 원고지만 해도 약 62,500매에 달한다. 탄허는 이 방대한 원고를 오대산 수도원을 개설하던 1956년 말부터 시작하여 1966년 말에 탈고했다. 현토 · 역해(번역)하는 데만 꼬박 9년 반가량이 걸린 생애를 건 작업이었다. 하루 14시간씩 집필에 매달렸다는 그의 회고를 상기해 본다면, 그는 10년 가까이 거의 온종일 《화엄경》 현토 · 역해에만 매달렸던 것이다. 탄허는 《화엄경》 탈고 후 오른팔에 마비증세가 와서 심하게 고생했다. 그리고 《화엄경》이 간행된 지 8년 만에 입적하였다.

《신화엄경합론(화엄경)》은 그의 나이 63세 때인 1975년 8월에 완간(화엄학연구소)되었는데, 번역에서 간행까지 약 17~18년이 걸렸다. 《화엄경》의 전체 권수는 47권(초판 한장본 기준)이고, 총 페이지는 약 12,400여 쪽에 달한다. 

《신화엄경합론》은 《화엄경》과 관련된 중요한 문헌들을 총망라한 것으로, 출간 당시부터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이유는 무엇보다도 80권본 《화엄경》만 해도 방대한데, 그 해설서인 이통현의 《화엄론》 40권까지 현토 · 완역했기 때문이다. 또 《화엄경》의 주석서로 유명한 청량징관의 《화엄경소초(청량소초)》를 번역하여 사이사이에 수록함으로써(양적으로 70% 번역 수록), 이른바 ‘화엄철학의 3대서’라고 하는 《화엄경》과 《화엄론》 《화엄경소초》를 혼자서 집대성했기 때문이다. 

그 밖에 청량징관의 《화엄경소초》의 해제에 해당하는 《화엄현담》 8권을 현토하여 첨부하였고, 《화엄경》의 서론에 해당하는 송 대 계환의 《화엄요해》와 고려 보조국사 지눌이 《화엄론》 40권의 요지를 강술한 《원돈성불론》도 모두 번역하여 수록했다. 이렇게 방대한 양(量)을 한 사람이 현토 · 번역하여 간행까지 했다는 것은 한국불교사에서 보기 드문 일일 뿐만 아니라, 전 불교사를 통틀어도 흔치 않은 일이다. 

현토역해 《신화엄경합론》 간행은 탄허의 대표적 업적이며, ‘탄허’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를 각인시켜 준 책이다. 특히 《신화엄경합론》 간행으로 인하여 ‘화엄철학’ 《화엄경》 ‘화엄교학’에 대한 연구가 보다 진일보할 수 있게 되었고, 본격적으로 심층적인 연구를 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또한 전국 강원을 비롯해 학자들과 재가불자들도 보다 용이하게 《화엄경》의 세계로 접근할 수 있게 되었고, 원전 중심의 강원 교학이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한국 화엄교학사에서도 특필할 만한 일인 것이다.

탄허의 《신화엄경합론》 현토 · 역해 및 간행은 양적(兩的) · 문헌적으로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작업이 아니었다. 한 종단이 추진해도 쉽지 않은 작업을 탄허 스님은 시종일관 단신(單身)으로 했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이는 그가 ‘한학의 대가’였기에 가능했고, 화엄철학과 관련한 주요서를 완역, 간행하고자 하는 그의 의지와 발원의 소산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탄허 스님은 이 책 간행으로 1975년 10월 동아일보사 주최 인촌문화상을 수상했다. 당시 승려로서 학술상 수상은 보기 드문 일이었다. 1983년 6월 5일(음력 4월 25일) 71세의 일기로 탄허 스님이 입적하자, 정부에서는 교육과 《신화엄경합론》을 현토 · 역해 · 간행한 공로를 높이 평가하여 은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6월 22일). 

 

5. 전통강원 텍스트 현토 · 역해

     : 전통 승가교육의 질적 향상, 교육정신 

탄허는 《신화엄경합론》 외에도 4교, 4집 등 전통강원의 텍스트 전체를 현토 · 번역하여 간행했다. 

전통강원의 텍스트는 대교과과목인 《화엄경》, 사교과 과목인 《원각경》 《금강경》 《대승기신론》 《능엄경》, 사집과 과목인 《서장(書狀)》 《도서》 《절요》 《선요》, 그리고 사미과 과목인 《치문》 《초발심자경문》 등인데, 주석서까지 포함하면 그 양(量)이 적지 않다. 

탄허는 사집과(四集科) 교재인 《서장》(1권) 《도서》(1권) 《절요》(1권) 《선요》(1권)는 1976년에 현토 · 역해하여 간행하였고, 사교과(四敎科) 교재인 《능엄경》(5권) 《대승기신론》(3권) 《금강경》(3권) 《원각경》(3권)은 1981년 12월에 현토 · 역해하여 간행하였다. 사미과 교과서인 《치문》(3권)과 《초발심자경문》(1권)은 1982년에 간행함으로써, 한국불교 승가교육에서 중시하는 교학적 · 사상적 경전들을 거의 다 완역, 간행하였다. 

또 탄허는 한국 선불교에서 매우 중시하는 육조혜능의 《육조단경》과 보조지눌의 《보조법어》, 영가현각의 《영가집》을 현토역해하여 간행했고, 유불도 삼교를 일이관지(一以貫之)해 보고자 하는 관점에서, 또 도의적인 인재를 양성해 보고자 하는 교육적인 관점에서 《주역선해》(3권) 《노자도덕경》(2권) 《장자남화경》(1권), 그리고 《발심삼론(發心三論)》(1권)까지 현토역해하여 간행했는데, 《신화엄경합론》을 포함하여 간행된 책의 종수와 권수는 총 18종 78권이 된다. 200자 원고지로는 총 10만 매에 달하는 양이다. 

탄허가 《신화엄경합론》 등 전통강원의 교과서와 선어록 등 한국불교에 중시하는 소의경전들을 번역, 간행하게 된 동기와 목적은 인재양성, 한문학에 의한 ‘전통 승가교육의 질적 향상’이라는 목적이 내재해 있었다. 또 당시에는 전통강원에서 사용하거나 참고할 만한 체계적인 현토서나 번역서가 없었다는 점도 작용했다. 《화엄경》을 비롯한 전통강원의 텍스트 전체를 현토 · 번역하여 간행함으로써, 탄허에 의하여 비로소 강원교학의 텍스트가 체계화되고, 집대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6. 탄허 현토 · 번역 문체와 관점

     : 전통강원 학인 등 불교 연구자들을 위한 번역

1) 번역의 문체

탄허의 번역 문체는 축자역이다. 탄허는 자신의 축자역이 대중용으로는 부적합하고, 의미 전달에 한계가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육조단경》 서문 참조). 그럼에도 그는 의도적으로 의역(意譯)을 배제하고 축자역을 택하였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는 그가 번역한 경전들의 서문이나 일러두기 등에 잘 나타나 있다.

탄허가 축자역을 택한 첫 번째 이유는, 그의 번역이 대중용이 아닌 불교학자와 전통강원의 학인 등 전문 불교 연구자들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이유는, 의역을 할 경우 번역자의 견해가 들어가게 되고, 그럴 경우 원전의 뜻을 훼손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서도 첫 번째 이유가 그의 핵심 의도였다. 

먼저 탄허가 현토 · 번역한 전적 가운데서도 최초의 번역이라고 할 수 있는 《육조단경》(1960) 서문과 《보조법어》(1963) 소언(小言, 일러두기), 《신화엄경합론》 서문 등에 나타난 번역 기준과 문체를 통해 그의 관점을 알아보자. 

 

《육조단경》 서문

이 번역은 지난겨울에 二三者(2~3명)가 찾아와 묻는 자를 위하여 원문 연구의 교재로 한 것이요, 일반 대중을 위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문법을 좇아 하다 보니 우리말 표현이 건조 무미한 점이 많다. 그러나 오직 經으로서 經을 번역하였고 나의 私意가 개재된 것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보조법어》 小言

이 譯解는 專攻家의 硏究材料로 쓰기 위하여 될 수 있는 한 原著者의 本懷(본뜻)를 상실치 않도록 노력했으며 다만 文法이 난삽해 알기 어려운 곳에는 약간의 註釋을 붙였다.

 

《신화엄경합론》 서문

이 譯解는 文法紹介를 主로 하여 經은 經대로 論은 論대로 했을 뿐이요, 秋毫도 私意가 介在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經論校正에 있어서는 高麗藏經을 主로 하여 文法上 편의를 좇아 改正하였고 依據 없는 곳은 一字一句도 망령되이 加損치 않았다.

 

위와 같이 탄허가 여러 경전들을 현토 · 번역하는 과정에서 염두에 둔 가장 중요한 기준은 대상 독자였다. 그는 책의 대상 독자를 불교학자, 강원 학인 등 전문적인 불교인으로 정하고, 그들을 교육하기 위한 전문적인 교재로서 사용할 목적으로 축자역을 택하였다. 

《신화엄경합론》 서문에서 “이 독해는 문법소개를 주로 하여”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문법소개’란 오늘날과 같은 품사 개념의 문법이 아니고, ‘한문 해석법의 순서에 따라 축자역을 했다’는 뜻이다. 

또 그는 의역을 하게 되면 역자의 사적인 생각이 개입될 수 있고, 원저(原著)의 뜻을 훼손시킬 수 있다는 뜻을 전하고 있다. 이를 통해 그가 축자역을 택하는 입장을 거듭 확인할 수 있는데, 이로 본다면 탄허는 원전보호주의(原典保護主義)를 지향했다고 할 수 있다. 

2) 탄허의 경전관‐선(禪)의 관점에 서다

탄허의 경전관, 즉 경전을 보는 관점은 선(禪)의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화엄경》을 비롯하여 전통강원의 사교 과목의 텍스트인 《금강경》 《능엄경》 《원각경》 《대승기신론》 등은 모두 선사상의 토대가 되는 경전으로서, 전통적인 한국불교, 우리나라 선종에서 중시하는 소의경전(所依經典)이며, 그 주석서도 모두 선의 관점에서 주석한 것이다. 전통강원의 사집 과목에 속해 있는 《서장》 《도서》 《선요》 《절요》도 모두 선 입문서, 선 개론서이다. 따라서 선의 관점에서 보지 않으면 안 되는 사상적인 특성을 갖고 있다. 그가 전통강원의 텍스트를 교학적 관점보다는 선(禪)의 관점에서 번역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여기에는 그가 상원사 선원 출신이라는 점도 크게 작용했다고 본다. 

특히 그의 대표적인 번역이라고 할 수 있는 《화엄경》과 《화엄론》은 돈오(頓悟) · 유심(唯心) 사상의 경론으로서 선의 사상적 뿌리가 되고 있고, ‘일즉다 다즉일’ ‘이사무애’ ‘사사무애’의 화엄의 법계관도 선 사상의 이론적 바탕이 되는 논리 체계의 하나이다.

그의 이런 관점은 《신화엄경합론》 현토역해본에도 잘 나타나 있는데, 이통현의 《화엄론》은 매우 중시하여 원문까지 모두 현토 · 번역하여 수록한 반면, 교학적 장점이 강한 청량징관의 《화엄경소초(화엄경 수소연의초)》는 필요한 경우 번역문만 삽입하고 있다. 또 계환의 《화엄요해(華嚴要解)》와 보조지눌의 《원돈성불론(圓頓成佛論)》을 수록했는데, 이 두 문헌은 모두 이통현의 《화엄론》을 바탕으로 저술된 것들이다. 

한편 화엄사상사적 측면에서 탄허 화엄사상의 계통을 고찰해 본다면, 현수법장-청량징관-규봉종밀로 이어지는 전통적인 화엄교학의 계통이 아니라, 이통현(화엄론)-보조지눌(화엄론절요, 원돈성불론)로 이어지는 선종(禪宗) 계열, 화엄선 계통이라고 할 수 있다.

 

7. 맺는말-탄허 현토 · 역해서의 가치와 의의

     : 정신이 죽은 자는 슬프다

탄허는 1956년 《신화엄경합론》 현토 · 번역을 시작으로, 1983년 6월(음력 4월 25일)에 입적하기까지 약 27년 동안 전통강원의 교과서이자 한국불교에서 중시하는 소의경전들을 현토 · 번역하고, 간행까지 하였다. 이는 그의 전 생애에 걸친 혼신의 힘을 다한 길고도 고된 작업이었다. 

탄허가 현토 · 번역한 불교경전은 《신화엄경합론》 《능엄경》 《대승기신론》 《금강경》 《원각경》 《서장》 《도서》 《선요》 《절요》 《치문》 《초발심자경문》 《육조단경》 《보조법어》 《영가집》 《발심삼론》 등 총 15종이다. 이 가운데 전통강원의 교재는 《신화엄경합론》 《능엄경》 등 11종이고, 선어록은 《육조단경》 《보조법어》 《영가집》 등 3종이며, 기타가 1종이다. 그 밖에 불교경전은 아니지만 《주역선해(周易禪解)》(3권)와 《노자도덕경》(3권) 《장자남화경》(1권)까지 합하면, 탄허 스님이 현토 · 번역한 책은 총 18종 78권이나 된다. 

이 책들은 출간 직후부터 불교계 및 전통강원에서 매우 중시했다. 이것은 당시까지 강원에서 활용할 만한 권위 있는 번역본들이 없었던 탓도 있지만, 그보다는 탄허의 현토 · 역해본들이 지닌 특성, 즉 정확한 현토와 한문 문법에 의한 번역, 즉 축자역 덕분이다. 이는 지금까지 불교 전문 학자들과 강원 학인들이 탄허의 현토 · 역해본들을 많이 보고 있는 이유라 할 수 있다. 

탄허는 번역 문체에서 직역, 축자역을 고수했다. 비록 대중용은 아니었지만, 그의 역할로 인하여 강원 학인 등 학자들의 원전 독해력이 진일보하게 되었고, 그의 축자역을 밑바탕으로 보다 대중들이 읽기 쉬운 의역이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그가 27년 동안 실천한 역경(譯經) 정신과 교육 정신은 근현대 한국불교사에 적지 않은 울림과 여운을 남겼다.

이와 같이 탄허가 중요한 경론들을 현토 · 번역하여 간행한 목적과 배경은 인재양성을 위한 교육용이었다. 그는 승속을 아울러 불교와 동양고전을 바탕으로 한 인문학적인 인재, 도의적 · 도덕적인 지도자급 인재양성에 목표를 두고, 자신의 교육이념에 맞는 텍스트를 개발하는 데 전심전력했다. 

탄허는 공자가 만년에 고국 노나라로 돌아와 교육과 제자 양성에 전심했던 ‘불세지사업(不世之事業)’을 매우 흠모했는데, 그가 걸었던 발자취는 공자의 불세사업과 맥락을 같이한다고 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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