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사피엔스로서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이다. 생각은 다른 동식물과 달리 인간이 가진 특징 가운데 가장 결정적인 것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인간은 사유의 능력으로써 문명을 일궈왔고 앞으로도 발전시켜 나갈 것이다. 하지만 보통 인간의 사유 능력의 앞뒷면을 보면 아이러니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들은 작게는 개인의 내면에서부터 가정, 직장, 사회, 국제관계에서까지 사유의 내용인 세계관 내지 가치관 등을 둘러싸고 내 편 네 편 나뉘어 수많은 갈등을 해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인간은 서로 다르기 때문에 새롭고 아름답게 느끼고 사랑도 하게 된다. 오히려 똑같을 때는 지루하거나 답답함을 느낀다. 외국 문물에 환호하는 것은 국내에서는 보기 힘든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는 생각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갈등할 수도 있지만 사랑할 수도 있으니 다름의 분별은 양면의 칼인 셈이다. 세상은 다양성으로 이뤄져 있건만 그러한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거나 한 가지 측면으로 바라보려는 욕구 내지는 무지가 고통을 야기하는 원인이 아닐까 싶다. ‘다름’을 ‘틀림’으로 인식하면서 말이다. 

주목할 점은 ‘다름’의 인식에는 ‘같음’의 인식이 전제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저쪽이 이쪽과 다르다고 인식할 때, 이쪽은 뭔가 같음을 공유하고 있다는 말이다. 다른 학교와 구분되는 같은 학교 출신끼리는 공유하는 무엇이 있다. 이처럼 저쪽을 배제함은 저쪽으로부터 이쪽을 분리함이며, 이쪽의 단결을 도모함이다. 어떤 주의 주장도 그것은 한 가지 인식의 함정에 매몰돼 있음이어서 자기편 주의 주장을 강하게 할수록 다른 편을 더 강하게 배제하는 일이 된다. 그런 과정을 통하여 그룹 내 단결과 그룹간 차별 및 배제는 더욱 공고화된다.

 

생각 가운데 보통 익숙한 것이 이분법적 분별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인식하는 자신과 인식되는 대상의 분별, 한마디로 말해 나와 세계의 분별이다. 인간은 태어나서부터 이러한 자타 분별의 토대 위에 자아의식을 키우고 개체의식을 발현시킨다. 자아의식 내지 개체의식의 토대 위에 모든 것들이 인식되고 그에 기초한 행동이 벌어진다. 너와 나, 남과 여,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 창조주와 피조물 등의 구분들이 그렇다. 

이처럼 분별은 편리하기도 하지만 실상을 왜곡하기도 한다. 예컨대 인간을 성별 특성을 중심으로 구분한 남자와 여자는 임시적이고 한정적인 구분이다. 사실 남녀 사이에는 인간으로서 훨씬 많은 공통점이 있다. 이 구분을 고정시켜 버리면 인간으로서의 많은 차이점을 간과하게 된다. 또한 한 사람 한 사람이 우주에 하나밖에 없는 존재들인데, 그저 인간이라거나 남자 혹은 여자라는 잣대를 고집할 때 각자의 개성은 무시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런 분별은 자기 자신에 대한 생각에도 그대로 작동한다. 예컨대 우월감과 열등감은 다른 것 같지만 내면의 심리에서 보면 뿌리가 같다. 누군가에 대해 열등감을 느낀다면 단순히 열등한 상황에 대한 인식만이 아니라 누군가보다 우월하고 싶은 의욕이 강하게 자리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열등감에만 주목하고 우월하고 싶은 마음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으면 한없이 못난 사람이라고 자책하거나 우울증에 걸릴 수도 있다. 

 

이러한 분별의 모순을 철저히 자각할 때 우리는 분별의 함정에 머물지 않을 수 있다. 불교에서는 모순을 가질 수밖에 없는 분별에 대해 원천적으로 부정적인 태도를 보인다. 전통사찰에 들어설 때 일주문에 이르게 되면 ‘입차문래 막존지해(入此門來 莫存知解)’라고 해서 한마디로 절에 들어오면 알음알이를 내지 말라는 경고문이 쓰여 있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반야(般若) 지혜가 아닌 세속의 분별은 철저한 경계의 대상이 된다. 

그럼에도 불교는 팔만사천이나 되는 많은 분별의 언어를 가지고 있는데 이는 어떻게 된 일일까. 경전의 언어는 어디까지나 꿈을 깨도록 하는 방편이라고 한다. 꿈속에서 꿈을 깨도록 하는 어떤 공능을 가진 것이라면 다 불교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런 논리를 따르면 경전의 언어는 분별을 넘어서게 하는 특별한 분별이다. 분별하지 않는 목석이 되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특정한 분별에 집착해 걸려 넘어지지 않게끔 분별을 잘 활용하라는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여기서는 어떤 분별도 긍정하면서 동시에 부정한다. 즉 긍정이나 부정 어디에도 걸리지 않고 상황에 맞게 긍정해야 할 때는 긍정을, 부정해야 할 때는 부정을 하는 것이다.  

우리는 정말 많은 것들을 가지고 살고 있다. 가진 것이 없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단지 그런 사실에 주목하지 않을 뿐이다. 우리는 몸을 이루는 것 중에 하나만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바로 탈이 나며, 몸을 지탱하는 데 물과 공기 등 모든 것을 거의 전적으로 외부에 의존하고 있다. 그것들에 주목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의 갈림길이 여기에 있다. 가진 것은 당연시하고 갖지 않은 것을 자꾸 억지로 가지려 하면 갖지 못한 자로 살게 되고, 가진 것에 만족하며 살면 충분히 가진 자로서 살 수 있게 된다. 가진 것과 갖지 못한 것 사이에서 균형 감각을 찾으면 좋을 텐데, 한쪽에 치우친 한 가지 분별에 머물러 균형을 놓친다. 

생각은 조건 속에서 형성되고 사라지기에 우리는 생각의 바다 속에서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이런저런 생각에 한눈 팔리다가도 ‘이 뭣고’ 하는 화두로써 ‘지금 이 자리’로 돌아올 수 있는 회복탄력성이 있다면 어떤 생각에도 매몰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이왕이면 자기에게도 남에게도 도움이 되는 생각들로 살아가려 노력하다 보면 무아(無我)의 향상일로(向上一路), 그야말로 새로운 분별의 방정식인 무소득(無所得)의 중도(中道)를 걸어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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