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켜보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인연이라고도 하지만, 나에게 불교 공부는 그럴 수밖에 없는 인연이었던 것만은 아니다. 누구에게나 그렇듯이, 옆에 보이는 다른 길이 늘 더 쉬워 보이고, 그 길을 택하면 더 잘나 보일 것은 같은 그런 갈림길들이 있었다. 그 갈림길에서 엇갈림마다 선택해야 했던 쉽지만은 않은 길이, 나에게는 불교 공부였다. 그런 길에 흔들리지 않는 이정표를 세워주셨던 분, 그래서 지금의 이 길에 여전히 나를 서 있게 해주신 분. 나는 큰스님을 그렇게 기억한다. 

스님을 처음 뵙게 된 것은 지금은 세상에 있지 않은 고광영 선배를 통해서였다. 지방에서 농사지으면서 박사과정 학비를 충당하느라 공부에 전념하지 못하는 후배가 안쓰러웠던 까닭이었을 것이다. 그 안쓰러움이 스님과 인연을 잇게 해주었고, 그 인연은 《불교평론》 그리고 의상만해연구원으로 이어졌다. 《불교평론》과 《유심》을 비롯해, 불교시대사에서 출간하는 책들의 교정을 보는 것이 내게 주어진 일이었다. 

출판사 편집장을 맡고 있던 고광영 선배는 처음에는 단순 교정부터 시작해서 점차 내용 교정까지 요구했었는데, 단행본은 물론이고 계간지였던 《불교평론》과 《유심》의 경우에도 책이 출간될 때까지 7~8회의 교정을 거쳤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것도 3명이 함께 7~8회의 교정을 거치는 작업이다 보니, 꼼꼼함을 지나쳐 깐깐함이었다고 할 것이다.

 

스님을 뵙게 되는 것은 언제나 그런 교정 과정을 거친 책이 인쇄된 직후였다. 막 새롭게 나온 책을 스님 처소로 가져갔는데, 광영 선배와 함께 가기도 했고 혼자서 가기도 했다. 그리고 당시의 나로서는 이때가 제일 힘든 때이기도 했다. 스님의 책 사랑을 한껏 확인할 수 있는 때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날만큼은 스님께서 바쁜 일이 많으셨으면 하고 기대하는 날이기도 했다. 

스님은 책을 대강 보시는 일이 한 번도 없으셨다. 책표지 제목부터 마지막 뒷장의 표지광고에 이르기까지, 한 줄도 한 문장도 놓치지 않고 꼼꼼히 읽는 분이셨다. 바쁘시더라도 대강 한 번 읽으시는 것으로는 성에 차지 않으셨던 것 같다. 다음날 새벽이면, 거의 틀림없이 책에 있는 오자며 탈자, 잘못 교정된 문장들을 찾아놓고 계셨다. 이처럼 소소한 잘못은 그때그때 지적하셨지만, 크게 잘못된 부분에 대해서는 바로 말씀하시는 법이 없으셨다. 잘못된 부분에 유감 있다 하시는 것은, 바로 그때보다는 한참 지난 때에나 말씀하시곤 했다. 

종종 다른 일로 처소에 찾아뵙게 되면, 짧으면 서너 시간 길면 거의 하루를 스님과 함께할 때가 종종 있었다. 찾아드는 손님들이 있으면 손님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짬짬이 일하고 공부하는 것에 대해 물어보곤 하셨다. 소소한 잘못이라도 있을 때는 잘못했다고 야단치시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 날에 하시는 말씀은 늘 하나였다. 

“주인처럼 일해라, 머슴처럼은 말고. 머슴은 자기 일도 남 일도 제대로 못 한다. 주인이 되어서야, 남 일도 자기 일도 제대로 하는 거다.”

그런데 그런 날이면 그 말이 온종일 귓가를 떠나지 않고 울려댔다. 그리고 그런 날이면, 찾아오는 손님들에게도 인사시켜 놓고는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다. 

“쟤가 일은 서툰 데가 있어도 착하기는 해요. 약삭빠르지도 않고.”

스님의 그런 말을 옆에서 들을 때면 고민스러웠다. 아, 또 어디에서 일머리를 제대로 잡지 못했구나 하는 생각들로.

 

스님으로부터 처음 칭찬받은 때가 《만악가타집》을 만들었을 때였다고 기억한다. 멀쩡한 출판사를 두고 기획사에서 가제본해서 만들었던 책이다. 스님께서 발표하셨던 원고들을 먼저 모으시고, 처음 발표하셨던 지면의 원고와 다른 곳에 재차 실었던 원고까지 찾아서 비교해서 보여드리면, 다시 스님께서 직접 꼼꼼히 교정하셨다. 그리 두껍지 않은 책이었는데도 거의 6개월 가까이 다시 보고 수정하시고, 한참 묵혔다가 다시 수정하기를 거듭하셨다. 

한글 프로그램으로 편집하고, 동국대학교 앞의 기획사에서 제본해서 가져다드렸다. 지금 생각하면 엉성하기 그지없는 가제본이었는데, 스님은 유독 그 책을 좋아하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처음에 2백 권, 나중에 백 권 정도 해서 3백 권 정도 만들어 놓으시고는, 찾아오는 문인들과 평론가 그리고 마음이 가는 손님들에게 한 권씩 건네곤 하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시다 옆에 내가 있는 날이면 한마디 붙이셨다. “저놈이 만들었다, 이거.”

당시에도 그리고 지금도, 어느 출판사에 들고 가도 번듯한 책으로 내길 마다하지 않았을 텐데 왜 그러셨을까 하는 생각이 가끔 들곤 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저 당신 손으로 직접 당신의 작품집을 만드신다는 것이 흡족해하셨을지도 그리고 번듯하지 않은 투박함이 마음에 드셨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때 챙긴 《만악가타집》 한 권이 아직도 내 책장 한편을 차지하고 있는 애독서이기도 하다. 스님 입적하시고 난 뒤로는 《만악가타집》을 꺼내어 읽는 횟수가 좀 늘었는데, 그럴 때마다 처소를 찾았던 광영 선배와 나에게 만 원짜리 두 장을 꺼내주시면서 하시던 말씀이 귓가를 울린다.

“너희는 젊으니까 나가서 제대로 된 밥 사 먹어라. 나는 5천 원짜리 시켜주고. 나는 5천 원짜리 이상 먹으면 안 된다.”

찾아온 손님들에게는 비싼 밥 먹이고 풍족하게 용채를 건네곤 하셨는데, 당신 자신에게는 5천 원짜리 밥으로도 넘친다 하셨던 꼬장꼬장한 스님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를 벗어나지 않는다. 용대리 마을 주민장으로 다비를 치르라 하셨던 유언도 그 마음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었으리라.

 

대학에 자리를 잡고 난 뒤로는 먹고사는 일에 바빠 스님 찾아뵙는 일도, 꾸중 듣는 일도 매우 드물어졌다. 찾아뵙지를 못하니 전화 드리는 것조차도 마음처럼 되지는 않았다. 그러다 입적하시기 전해 9월에, 갑작스레 통화했던 일이 유독 기억에 남는다. 아이들이 갑작스레 생각나 장학금을 지급하신다 하셔서, 자주 찾아뵙지 못하는 죄스러움을 말씀드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도 스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렇게라도 통화하면 됐고 고맙지. 잘 살면 그만 됐다. 바쁘다, 그만 끊어라.”

 

겨울날 남향을 면하고 선 양지 녘 담벼락 아래는, 햇살로 유독 따스하다. 그 따스함 덕분에 사람들은 담벼락 밑 양지 녘에 옹기종기 모여들어서 담소도 하고 삶의 이야기도 더듬다가, 때가 되면 흩어지기를 반복한다. 볕이 있을 때면 찾아들고, 추워지면 떠올렸던 무던하기만 했던 품! 나에게 스님은 그런 분이셨다. 스님의 품에 거두지 않음이 없으셨는데 또한 묶어두는 일도 없으셨으니, 나에게 스님은 그런 분이셨다. 

이제 뵙지는 못하지만, 내게는 여전히 스님께서 평소 입버릇처럼 들려주셨던 한마디가 남아 있다. 

“어디로 가든, 무엇을 하든, 그저 주인으로만, 주인공으로만 살면 된다.”

huaye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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