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재가불교운동을 이끈 사람들

불광(佛光)을 온 누리에 비춘 대원 장경호 거사

‘이 땅의 유마(維摩)’라 불린 ‘대원(大圓) 장경호(張敬浩, 1899~ 1975)’ 거사는, 1975년 4월 열반이 가까워짐을 알고 삶의 마무리를 시작한다. 제일 먼저, 스웨덴 대사로 근무 중인 어느 누구보다 불심이 깊은 둘째 아들 상문(相文)을 찾아 간곡히 일렀다.

아버지가 가고 없거들랑, 내가 하지 못한 일을 네가 맡아주기 바란다.

그리고 20여 년간 한국철강업계를 이끌어 온 동국제강의 주식을 자손들에게 고루 분배한 후, ‘내 개인 명의의 재산은 부처님 은혜를 갚는 데 사용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두 달이 지난 1975년 7월 10일, 대원 거사는 모든 재산을 정리한 후 박정희 대통령에게 장문의 글을 올리며 무려 30억6,300만 원에 달하는 사재를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자비희사의 보살심을 밝혔다. 

불교가 바로 설 때, 국민정신이 올바로 설 것이며, 불광(佛光)이 온 누리에 비칠 때, 이 땅, 이 민족이 국태민안 속에 번영 · 발전하고, 나아가 전 세계는 자유와 평화가 이룩될 것으로 믿습니다. 오직 불교 중흥이라는 일념만으로 저의 조그만 사재를 내놓습니다.

한국불교의 중흥을 염원하는 장경호 거사의 보살도를 접한 박정희 대통령은, 불교진흥을 위한 재단법인을 설립하여 한국불교의 발전에 노력할 것을 지시했으며, 재단법인 설립준비위원회는 두 차례에 걸쳐 재단법인의 정관과 설립취지문을 작성 심의했다. 

1975년 8월 16일, 마침내 한국불교의 가장 큰 기둥이며 법의 수레바퀴 역할을 하게 될 ‘재단법인 대한불교진흥원’의 설립 허가가 이루어졌다. 초대 이사장에 구태회 제2 무임소장관이 취임하고, 이사에 조계종 이서옹 종정 · 이원경 문공부장관 · 육인수 국회 문공위원장 · 이선근 동국대 총장이 선임됐으며, 감사에 홍승희 동양통신 사장 그리고 장상준 동국제강 사장이 각각 위촉됐다.

그리고 다음 달인 9월 9일, 대원 거사는 열반에 들었다.

그 소식은 신문과 방송을 타고 전국에 퍼졌다. 일반 회사 직원의 급여가 몇만 원이었던 그 시절, 30억 원은 오늘날과 비교하면 백배 천배의 가치를 지녔기에, 또 누구도 일찍이 실행하지 못한 전 삶을 바친 보살행이었기에, 온 국민과 불자들은 가슴을 적시며 두 손을 모았다.

 

대중불교의 개척도량 남산 대원정사

1961년 3남 장상태 사장이 동국제강 경영에 참여하면서 대원 거사는 경영일선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부인 추적선화 보살과 사찰을 순례하며, 군법당 설립 등 각종 불사에 적극 동참했다. 불교의 현대화 · 대중화 · 생활화에 대한 포부가 컸던 그는 불교방송 · 불교대학 · 출판사 설립 · 군포교 등을 목표로 하나씩 실현해나갔다. 우선 1967년 조계사 입구에 불서보급사를 세워 불교서적을 출판하고, 경전을 우리말로 번역해 보급했다.

1970년, ‘불교는 도시 한가운데에서 전법활동을 해야 한다.’는 대원 거사의 집념은 남산의 중턱 용산구 후암동에 대원정사(大圓精舍)를 설립하며 본격화되기 시작하였다. 1972년 대원회를 설립하고, ‘자아를 발견하여 지상에 낙원을 이룩한다’는 불교 수행의 생활화를 위한 정기법회를 매주 1회 이상 열었다.

마침내 1973년, 3년에 걸친 불사 끝에 1천여 평의 대지 위에 우뚝 선 건평 1,200여 평의 대원정사는 이후 이 땅에 각종 현대적 불교문화를 발족시키고 불교의 대중화를 현현시키는 현대적 재가불자의 수행도량 역할을 담당했다. 대원 거사는 “라디오에서 목탁 소리가 늘 나오고, 스님들의 법문을 언제 어디에서나 들을 수 있는 방송국을 세워야 한다.”는 말을 자주 했으며, 남산에 대원정사를 세울 때 건물 설계를 ‘방송국으로도 쓸 수 있도록’ 주문하였다.

5월 13일, 창건법회에서 대원거사는 다음과 같이 기념사를 했다.

대원정사는 통불교 이념으로 각자의 근기에 따라 누구든지 참여할 수 있습니다. 참선 · 염불 · 독경 · 예불 · 정근 등 선교병수(禪敎竝修)의 문을 활짝 열어놓고 있습니다. 이곳은 승속의 구별을 떠나 명실상부한 사부대중의 화합을 지향하여, 눈부시게 변화하고 발전하는 시대사조에 발맞추어, 조화의 내용과 방법을 현실화함으로써 불교의 생활화에 힘쓰고자 합니다.

그리하여 불교를 대중화하자는 뜨거운 열기는 남산으로부터 전국 각지로 뻗어나갔다. 대원회는 불교계 최초로 누구나 입학할 수 있는 야간 불교교양대학인 대원불교대학을 설립 개강하고, 강사로는 성수 · 영암 · 운허 · 탄허 스님과 김동화 · 조명기 · 목정배 박사 등을 초빙했다. 대원 거사는 불교대학에 대한 애정이 남달라, 강의가 있을 때마다 스스로 청강을 했는데, 이 대학은 이후 30여 년간 3천 명의 졸업생과 연구과 출신인 600명의 법사를 배출하는 공적을 쌓으며 도시 곳곳에 불교교양대학을 설립하는 원천을 이루었다.

그리고 매주 토요일마다 대원정사에서는 ‘한국불교가 나아가야 할 방안’을 토론하는 정기 좌담회가 열렸다. 이 토요모임에서는 다음과 같은 절실한 시대적 요구가 쏟아져 나왔다. 

-불교의 각종 의식을 현대화하자.

-대중을 위한 불교교육제도를 만들자.

-현대적 불교문화를 새로이 펼치자.

-시민들을 위한 수행 선방을 만들자.

-집마다 부처님을 모시자.

이 자리에는 불교학계, 언론계, 예술인 등이 주류를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당대의 고승대덕인 대은 · 영암 · 탄허 · 성수 · 무진장 스님 등이 차례로 초대되어 말씀을 나누기도 하였다. 즉, 승속이 함께하는 대중토론의 새로운 도량이었다. 대원 거사가 늘 지니고 다니던 작은 노트에는 그 토요모임에서 나눈 이야기가 잘 정리되어 지금까지 남아 있다. 

첫째, 불교의식의 현대화와 간소화, 관혼상제의 불교식 거행.

둘째, 불교 주변의 미신적 요소 배제와 정통불교의 정착.

셋째, 불교 수행도량 건설 · 신앙 수련대회를 정기적으로 개최하여 고정 관념을 타파하고 약동하는 불교로 정착.

넷째, 종합적 교화사업을 통해 선의 생활화, 알기 쉬운 불교 전파.

다섯째, 대단위 언론 기관인 신문사 · 방송국 · 잡지사를 설립 운영해서 현대화된 시청각 교육으로 국민적인 포교 전개.

여섯째, 사회복지사업으로 병원 설치 운영, 유치원 경영, 고아원 · 양로원 등 복지시설 마련.

일곱째, 학교 · 통신강좌 등 교육기관 설립.

10년여에 걸친 대원 거사의 이러한 집념은, 1981년 둘째 아들 중원 거사가 공직에서 물러나 재단법인 대원정사 이사장으로 취임하고, 사단법인 대원회 회장으로 활동하기 시작하면서 획기적인 전환기를 맞이하고, 불교 대중화의 새시대를 열었다.

중원 거사, 대중불교의 사천왕이 되다

중원(中圓) 장상문(張相文) 거사의 청장년 시절 대부분은, 1958년도에 초창기 외무부에 몸을 담은 이후 1980년도까지 22년간을 일관되게 정부 외교부의 중책을 맡아 나라의 세계화에 헌신한 공무원이었다.

1922년 부산에서 대원 장경호 거사의 6남 5녀 중 차남으로 태어난 중원 거사는, 1951년 부산대학교를 졸업하고, 53년도부터 동경에 있던 유엔군사령부의 ‘대북방송팀장’으로 해외 외교 및 방송업무를 시작하였다. 

일본 강점기에 중학교에서 반일학생으로 체포되어 부산 · 대구 · 영주의 유치장을 전전하며 수감생활을 하던 중원 거사는, 옥중에서 영어공부에 전념하였던 덕분에 뛰어난 영어 실력을 지닐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해외 임무에 충실할 수 있었기에 무려 8년간 방송 임무를 수행하였고, 이때의 경력으로 중원 거사는 후일 불교방송국 창설의 큰 불사를 성공리에 완수할 수 있는 인연을 쌓았다. 

대북방송의 중요 임무를 수행하면서도 중원 거사는 와세다대학교를 이수하고 석사과정을 수료했으며, 1958년에 마침내 국내에 들어와 외무부에 입부하였다. 그리고 1961년에 외무부 방교국(邦交局)의 방교과장이란 중책을 맡은 이후, 외무부의 정보국 국장과 홍콩 총영사를 거쳐, 1968년에는 대통령 국방외교 비서관 · 외무부 차관보로 임명되어 외무부의 고위직을 8년간 수행하였다. 1974년부터는 해외로 나아가 5년간 스웨덴 대사 · 멕시코 대사 · 유엔대표부 대사 등 해외 외교 요직을 두루 맡았다. 

그리하여 1980년, 23년 만에 마침내 외무부 공직을 사직한 중원 거사는 아버지의 유훈에 따라 1981년 7월에 재단법인 대원정사 이사장직을 맡았다. 이때 중원 거사는 선언했다.

나는 동국제강을 경영하는 데 참여하지 않고, 아버지의 유업이 깃든 대원정사와 대원회를 발전시키는 일에 힘쓰겠다.

그리하여 중원거사는 아버지가 물려준 동국제강 주식을 처분하여 대원정사 재단에 기부하고, 적극적으로 대중불교 발전에 혼신의 힘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아버지 대원 거사가 만든 ‘불교를 대중화하자!’라는 ‘대중불교’의 목탁을 이어받아, 마치 사천왕처럼 이 땅에 새로운 불교를 향한 크나큰 기둥을 세웠다. 대원정사 이사장으로 불가로 귀환하였을 때, 대원회 신도와 직원들은 모두 중원 거사를 ‘장 대사님’이라 호칭하였으며, 얼마 후 ‘장 대사님’의 성품과 열정을 알게 되었다. 일체의 사치와 낭비를 거부했으며, 위아래를 가리지 않고 늘 따뜻했다. 꼼꼼했다. 그리고 모든 열정을 ‘불교의 대중화’에 바쳤다.

중원 거사는 기존의 대원정사 옆에 300평 규모의 새로운 법당과 강당, 수행 선방이 자리한 대원불교회관을 지어 신행단체인 대원회와 2년 과정인 대원불교대학을 활성화시켰다. 1985년에는 지방 불자들에게 불교교육의 장을 마련하여 주자는 취지에서 지방 도시의 불교대학 개설을 기획하고 광주, 전주, 제주 등을 기점으로 전국 주요 도시에서 1주일 코스의 단기 불교대학을 개설했다. 1만 원의 참가비에도 불구하고 도시별로 500명 이상이 동참한 이 획기적 시도는 당시 체계적인 불교교육이 전무하던 각 지방 도시의 불자들에게는 참으로 신선한 충격이었다. 20개가 넘는 도시에서 열린 이 교양대학은 추후 ‘군산불교교양대학’ ‘화엄불교대학’ 등의 이름으로 기복에 치우쳤던 이 땅의 불자들에게, 진리의 눈을 뜨게 하는 대중불교 교육의 새시대를 펼쳐가는 주역이 되었다.

또한 1985년 6월에는 기존의 〈대원회보〉를 월간 《대원》으로 전환했다. 이 잡지는 후에 월간 《대중불교》로 제호를 바꿔 1998년 폐간될 때까지, 불교 잡지로는 최대의 기록인 정기구독자 3만 명과 서점판매 5,000부를 발행할 정도로, 한국불교의 흐름을 바꾸는 길목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전국적으로 수십 명의 기자가 활동하면서 취재와 홍보를 담당하고, 지역의 불교 행사를 주도하는 역할도 겸하면서 《대중불교》는 이름 그대로 불교대중화의 팻말이 되었다. 

1987년에는 어린이 포교를 위해 꼭 해야 한다는 집념으로, 중원 거사는 어린이 월간 잡지를 간행하자고 기자들을 독려하였다. 그리하여 불교계 초유의 어린이 포교문화를 위한 잡지로 태어난 《굴렁쇠 어린이》가 전국 주요서점에 진열되는 진풍경이 벌어졌고, 사찰마다 어린이 법회를 활성화하는 매체가 되었다.

1978년 등록되어 불교서적을 전문으로 하는 출판사인 도서출판 대원정사는 1980년대 들어 본격적인 출판 활동을 시작했다. 베스트셀러로 《100문 100답-불교입문편》(1986)을 비롯해 《100문 100답-불교강좌편》 《100문 100답-불보살신중편》이 있다. 또 《청소년 불교입문》(1990), 정휴 스님의 《역대 종정 법어집-달을 가리키면 달을 봐야지 손가락 끝은 왜 보고 있나》(1990), 홍윤식 동국대 교수의 《한국의 불교미술》(1994), 용타 스님의 명상록 《마음 알기 다루기 나누기》(1997) 등도 대표적인 서적이다. 

그중 명저로 꼽히는 《100문 100답》은 중원 거사가 직접 편집부 직원들과 십여 차례의 토론 끝에 100개의 불교 상식문제를 선정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작가에게 집필케 하였지만, 자신도 손수 3~4개 꼭지를 직접 쓰는 열정을 보여, 출판된 이후 무려 20만 부 이상을 판매하는 기록을 세웠다. 대원정사에서 만든 책 가운데 또 하나 주목되는 것은 《불교관계 도서논문 목록: 1912년부터 1985년까지》(1986)이다. 민족불교연구소가 2년여에 걸쳐 자료를 수집하고 편집까지 마쳤지만 사정이 여의치 못해 출판을 못 하고 있을 때, 대원정사가 인수해 책을 펴낸 것이다.

한편 중원 거사는 1988년 3월, 별도로 일반 사회문화 서적도 함께 출판하는 대원사를 설립하여 본격적인 문서포교에 진입하였다. 대원정사가 불교전문서적 출판을 전담했다면, 대원사는 불교대중서적과 교양서적, 어린이 책 등을 두루 출간하는 종합출판사로서 이후 50여 종의 불교 서적과 500여 종의 일반도서를 출판하는 대형출판사로 발전하였다. 

그리하여 탄생한 대원사의 시리즈물 《빛깔 있는 책들》은 우리 문화를 세계에 알리고, 한국의 아름다움과 민속, 자연, 조상들의 삶의 흔적을 더 훼손되기 전에 기록으로 남기자는 취지에서 기획 출판되어 오늘날까지 280종을 넘는 전통문화계 최대의 전집이 되었다. 이 시리즈는 1990년 불교신문사 제1회 불교출판문화상 디자인 부문, 13회 한국출판학회상 기획편집 부문, 1991년 한국일보 제31회 한국출판문학상 출판 부문, 1993년 환경부에서 주관하는 우수환경도서상을 받았다. 또 1996년에는 제15회 세종문화상 대통령상을 받았으며, 2000년에는 한국백상출판문화상 문고 부문에 선정되기도 했다.

이 외에도 대원사는 한국의 순수 창작 동화를 담은 ‘권하는 책들 시리즈’, 인문학과 고고학을 주요 주제로 하는 ‘동서문화총서’ 시리즈 등 지금까지 30년이 넘도록 꾸준히 불교문화, 민속, 고미술 등 다양한 분야의 책을 펴내고 있다. 

중원 거사의 대중을 위한 포교는 여기에서 머물지 않았다. 전국 재가 단체들과 연대하여 본격적인 ‘대중불교 결사대회’를 열어, 생활현장의 불교화라는 개혁운동에 돌입했다. 1989년 제1차로 봉선사에 모여 결사를 행한 제1차 대회에는 전국 150여 개 시군 대표와 신행단체장 230여 명이 모여 ‘무엇이 불교의 대중화인가?’를 함께 주창하였다.

첫째 집마다 부처님을 모시자. 둘째 직장마다 법회를 봉행하자. 셋째 마을마다 불교회관을 마련하자.

이러한 대중불교 결사대회는 이후 전국을 순회하며 법주사 · 직지사 · 금산사 · 동화사로 이어지며 14차례에 걸쳐 매년 지속되었다. 그리고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새로운 불교백서 간행’ ‘새 생명을 살려내는 장기기증본부 발족’ ‘전국순회법회 개최’ ‘불교방송 지방망 확장 100만 서명’ 등을 결의해 대중불교운동의 조직 강화를 실천으로 옮겼다. 여기에 참가하여 운동을 이끈 법사로는 이기영 박사, 무진장 스님, 강건기 교수, 목정배 교수, 권기종 교수, 홍윤식 교수, 정병조 교수 등이 맡아 헌신하였다. 

대한불교진흥원, 획기적인 길을 열다

대한불교진흥원은 설립된 다음 해에, 신규 건축된 남산 대원정사에 재단의 사무실을 개설하고 구태회 초대 이사장을 필두로 업무를 개시하였다. 진흥원의 주요 임무는 대원 거사의 보시로 적립된 재단의 예산으로 불교계의 새로운 불교문화를 펼치는 데 지원하고 이끄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첫해 연도부터 조계종 총무원 예산지원과, 군포교의 활성화를 위한 제3사관학교 및 제2훈련소 군법당 건립 지원, 부처님오신날 봉축행사 지원 등을 집행하였다. 아울러 ‘불교의 현대화, 대중화, 생활화’에 초점을 맞춰 동국역경원, 한국불교연구원, 한국불교학회,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 대한불교조계종 전국신도회 등을 적극적으로 지원함으로써, 각 분야에서 포교와 연구의 활성화를 이루게 한 것도 초기의 중요한 업적이었다. 

1981년부터 재단법인 대원정사에서 활동하고 있던 중원 거사는 1983년 6월, 대한불교진흥원 이사에 취임하였고, 1989년에는 구태회 · 황산덕 이사장에 이어 제3대 이사장의 직위를 맡았다. 진흥원의 이사진들은 초반기부터 교계 전반에 걸친 지원과 육성이 진흥원이 행하여야 할 본연의 임무이지만, 그중에서도 첫째로 중요하고 시급한 것이 군포교임을 강조하였다. 

그것은 1960년대 중반에 처음으로 군법사제도가 시행된 지 10여 년이 지났지만, 기독교, 천주교의 군포교에 비하여 열악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흥원은 설립 초기인 1976년부터 군법당 건립을 위한 자금 지원을 시작하였는데, 첫 번째로 육군 제2훈련소와 육군 제3사관학교에 법당 설립을 위해 총 5천만 원을 지원하였다. 

이후 진흥원은 매년 1~2개의 법당 창건비를 군부대에 지원함으로써, 18년간 7억 원 상당의 예산을 투입하였고, 그 결과 무려 50개의 군법당이 창건되었다. 그리고 16만 부의 《불교성전》을 군법당에 기증하여 군포교에 필요한 제반여건 마련에 박차를 가하였고, 1988년에는 《통일법요집》을 출판하여 10만여 부를 군법당에 보급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10년 만에 군포교에 혁신적 변화를 불러일으켜, 군법당과 군법사의 수요가 10배 이상 늘어났고, 군인 불자들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에 이르렀다. 

이 외에도 진흥원은 불서 보급에 적극적으로 나서서 《설법자료집》 《통일불교성전》 《청소년불교성전》 《한국불교총람》 등 20만여 부를 출판하여 군법당과 불교단체 및 사찰 등에 공급하여, 문서포교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또한 중원 거사는 불교학계에도 각종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사직을 맡은 1983년부터 열반할 때까지 10년간 지원한 학술대회만도 ‘원효학 국제학술회의’ 등 무려 18회에 이른다. 지원 금액도 행사마다 수백만 원에서 수천만 원까지 규모에 따라 대회가 원만히 성사될 수 있도록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진흥원 자체적으로는 1991년부터 매월 한 차례씩 ‘다보문화 강좌’를 개설하여, 일반 불자들에게 불교문화의 역사와 가치를 지속적으로 설파함으로써, 뜨거운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1989년에는 정기간행물인 계간 《다보(多寶)》를 창간하여 교계의 다양한 문화를 전달하는 시론 · 강좌 · 평론 · 보도자료 · 논문색인 등의 총합적인 정보지로서 역할을 담당케 하였다. 중원 거사는 잡지 창간사에서 “불교는 본질적으로 인간학입니다. 고통받는 현실을 직시하고, 그 불행을 극복하려는 희망의 가르침입니다. 이제 불교는 긴 잠에서 깨어나 이와 같은 현실적인 문제들에 대하여 적절하게 응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우리 불교가 가야 할 길을 제시하면서 《다보》가 그 역할을 다해줄 것을 기대하였다. 이후 《다보》는 이름을 《불교와 문화》로 바꾸어 현재까지 발행되면서 국내외 각종 불교정보와 문화계 소식을 비중 있게 다루고 있다. 

중원 거사는 평소 ‘대중불교 운동은 생활불교, 특히 관혼상제의 개혁에서부터 이루어져야 한다.’는 소신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하여 1980년대 후반부터 불교의 장례의식인 화장문화를 이루어 내자는 취지 아래 각 방면으로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중원 거사는 몸소 일본의 화장장과 납골당, 탑묘원 등을 방문하여 견문을 넓히는 한편, ‘매장 및 묘지 등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마련, 당국에 제출하기도 하였다. 본인 스스로도 탑묘원 부지를 확보하여 착공에까지 이르렀으나, 민원의 발생으로 생전에 그 뜻을 펴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거사의 열반 이후에도 유지는 그대로 이어져, 진흥원이 그 운동의 주체가 되어 매장법의 개선을 추진하였다. 마침내 2001년, 그렇게 불가능하게만 비치던 예의 악법이 개정되어, 화장과 납골의 모든 매장 절차의 임의로움이 거사의 뜻과 같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실로 삶의 마지막 길에서 뿌린 씨앗이, 10년 만에 결실을 거둔 것이다.

 

‘불교방송’ 개국, 불교 포교의 새 장을 열다 

1989년 3월 2일, 문화공보부는 불교방송 재단법인 설립을 인가하였다. 그리고 무선국 추천 허가서를 발급하였다. 한국불교의 커다란 변혁이 시작된 것이다. 이러한 기적적인 결과는 10여 년에 걸친 아버지 대원 거사와 아들 중원 거사의 집념이 거둔 결실이었다.

1970년대 초, 이미 대원 장경호 거사는 불교방송의 설립인가를 얻기 위하여 대통령에게 불교방송 설립인가를 청원한 적이 있었다. 이때 방송의 규모, 기자재 선정 등에 대한 참모역이 바로 중원 거사였다. 애석하게도 그때의 방송국 허가 시도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지만, 거사는 선친의 그 비원(悲願)을 가슴 깊이 간직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1983년 6월, 대한불교진흥원 이사에 취임한 이후 중원 거사는 불교방송 설립을 위한 제반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1987년 거사는 일본 출장에서 입수한 방송국 설립자료인 방송국 설계도와 방송 기자재의 견적서 등을 이사장실에 펼쳐놓았다. 그리고 ‘장소는 대원정사 건물이면 가능하고 기자재 구입과 기초 운영비 충당은 진흥원이 담당할 수 있다’는 의견을 피력하였다. 이후 방송국 설립의 종합플랜은 진흥원 이사회에 정식 의제로 상정되어 긍정적인 합의가 이루어졌다. 마침내 1988년 4월 진흥원은 마포에 대지 700여 평, 연건평 7,000평인 17층의 대형 건물 매입에 성공하게 되었다. 후일 ‘다보빌딩’으로 불리게 된 이 건물 매입을 전담한 중원 거사는 여기에 불교방송의 설립여건이 충족되는지를 함께 검토하였다. 기자재의 설치 여건, 운영예산, 인허가문제 등을 전문가와 함께 의논 끝에 매입을 결정하고 이사회에 제의하여 통과되었다. 

그리고 1988년 11월, 조계종, 태고종, 천태종, 진각종과 진흥원이 함께 불교회관 현판식을 거행하고 불교방송국설립추진위원회를 구성, 중원 거사가 추진위원장이 되었다. 이어서 불교방송 설립 발기 임원회의를 개최하고, 불교방송 정관을 확정했다. 1989년 2월 새로 구입한 다보빌딩 16, 17층을 방송국에 대여하고, 운영비로 9억 원의 출연금을 낸 진흥원은 대원정사에 있던 사무국도 다보빌딩으로 옮겼다. 

그리고 불교방송 초대 사장에 추대된 중원 거사는 젊은 시절 8년 동안 동경 유엔사령부 방송국에서 근무하면서 익힌 산 경험을 바탕으로 세계 최초의 불교방송 개국을 진두지휘하여, 프로그램과 출연진 선정, 시간 배정 등에 세밀한 노력을 기울였다. 

같은 해 10월, 제2대 진흥원 이사장으로 불교회관 매입, 불교방송 개국 등 두루 노고를 바치던 황산덕 옹이 별세하고, 제3대 이사장에 중원 거사가 취임하였다. 이어서 11월에는 체신부로부터 무선국 허가서를 발급받았고, 이듬해인 1990년 3월 2일 시험방송으로 개국의 열쇠를 꽂았다. 

그리고 오랜 시간 기다려 온 수많은 불자가 라디오를 틀어놓고 귀를 기울이던 5월 1일 오전 10시, 범종 소리가 10차례 울리며 ‘깨침의 소리 나누는 기쁨’ BBS 불교방송이 마침내 2천만 불자의 염원을 안고 개국을 알렸다. 그리고 다음 날, 입체낭독 드라마인 〈고승열전〉의 첫 방송이 초단파 101.9㎒를 타고 하늘과 땅으로 퍼져나갔다.

향후 시사, 역사문화, 불교교리, 문화예술, 음악 등 제반 분야에서 대중불교운동의 선구자 역할을 할 불교방송국의 설립자금은 15억7천만 원, 이 중에서 9억3천만 원이 진흥원의 지원금이었다. 여기에 조계종을 비롯한 각 종단과 2천만 불자의 염원이 어우러져 불교방송에 대한 염원이 상승의 힘을 실었던 것이지만, 대원 거사에서 중원 거사로 이어진 집념의 원력이 이날의 불교방송을 있게 한 원동력이었음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중원 거사의 열반은 미소였다

중원 거사는 방송국 개국 불사를 성공리에 끝낸 이후, 방송 편성의 시대화를 위해 각계 전문가들과 끊임없이 논의를 거듭했다. 점차 방송의 수준이 향상 진전되면서 그 방송의 한계가 수도권에 그친다는 것은 너무나 아까운 일이었다. 개국 이전부터 꾸준하게 불교방송 전파가 전국적으로 울려 퍼지려면 주요 도시에 지방방송국이 필요하다고 역설해 온 중원 거사는, 1991년 스스로 불교방송 지방망 확장 추진위원회의 집행위원장이 되어 위원회의 모든 일을 챙겼다.

거사의 지론은 분명하고 당당하였다. ‘역사적으로나 교세 면에서 열세에 있는 타 종교의 지방국은 십수 개가 되는데, 왜 불교계는 정부로부터 불이익을 받아야 하느냐?’ 하는 지극히 당연한 주장이었다. 그리하여 중원 거사는 직접 지방도시를 방문하고 담당자를 만나면서 부산, 광주, 대구, 청주의 방송국을 개국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후 춘천 · 울산 · 제주 방송국과 수십 개의 중소도시에 방송 중계소를 설립하는 등 지역방송 설립이 원활하게 된 것은 바로 이러한 중원 거사의 노력이 기초가 되었다. 그러나 생전에 그 불사들을 마무리하지 못하고 1992년 11월 열반에 든 것은 무척 아쉬운 대목이다.

중원 거사의 재단 운영 방침은 뚜렷했다. 이제 진흥원은 지원 사업 일원에서 자체적인 포교와 교육, 그리고 복지문화 사업을 추진하자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거사는 재가불자를 위한 전문수련원 건립이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한다는 평소 소신에 따라 충북 괴산에 임야 54만 평을 매입, 다보수련원 건립을 도모하였다. 오늘날 많은 불자의 사랑을 받고 있는 다보수련원은 크게 3동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큰 법당, 300평의 강의실, 숙소 및 식당이 있는 본관으로 이루어져, 수련활동은 물론 세미나와 워크숍, 레크리에이션, 회의 등 다양한 행사를 할 수 있는 시설을 구비하였다. 

그러나 1992년 11월 2일, 수련원 건립공사 착공식이 진행된 20일 후인 22일 오전 10시, 중원 거사는 적멸에 들었다. 

1990년, 편찬계획에 들어간 《한국불교총람》은 우리 불교계의 흩어져있던 자료들을 총정리하자는 전무후무한 출판 계획이었다. 미진한 과거와 현재를 반성하여 21세기를 현명하게 하자는 중원 거사의 발의에 따라 편찬을 시작한 이 총람에는 종단을 비롯한 불교단체, 사찰과 문화재, 논문이나 단행본, 인명 등 각종 명칭과 해설이 종합적으로 수록되었다. 그러나 이 총람은 3년이라는 출판 기간이 소요되어 1993년 10월 제작을 마무리하고 간행하였다. 따라서 이미 11개월 전 내세로 떠난 중원 거사에게 당신의 유지가 이루어졌음을 고하기 위해서는 많은 이들이 눈물을 자아내며 거사의 영전을 찾아 책을 헌정할 수밖에 없었다.

중원 거사가 간질환을 앓고 있었던 것은 주위의 신도들이나 직원들 누구도 몰랐다. 이미 외무부를 떠나 불교계로 귀의할 때부터 시작하여 10년이 넘도록 지병에 시달린 거사였지만, 전혀 내색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열반에 들기 3개월 전, 지병 악화로 몸져눕게 되었을 때, 비로소 목정배 교수, 권오현 법사, 필자를 불러, “3년만 더 살면 벌여놓은 일들을 매듭지을 수 있을 텐데……”라고 담담히 술회했다. 

1992년 3월 《다보》 창간호에, 생애 마지막으로 기고한 글의 끝부분은 다음과 같다.

 

우리의 자그마한 서원이 발판을 이루어, 보다 건설적인 불교문화가 창달되도록 우리 모두 열과 성을 모을 것을 다짐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사모하는 모든 이들에게 《다보》가 자등(自燈) · 법등(法燈)의 등불이 되기를 바랍니다. ■

 

김형균
불교출판인. 동국대 불교학과를 졸업하고 1972년부터 불교신문사 기자로 활동했다. 이후 《법륜》 《금강》 《대중불교》 《굴렁쇠어린이》의 편집장을 역임했다. 출판사 ‘불지사’ ‘동쪽나라’를 설립 운영했다. 

저작권자 © 불교평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