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불교평론과 경희대 비폭력연구소가 주관한 열린논단(2018년 6월)에서 발제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1. 머리말

4차 산업혁명에 대한 논란이 뜨겁다. 2011년 1월에 독일이 공식적으로 ‘인더스트리 4.0’을 공표하고, 2016년 1월에 세계경제포럼(WEF)이 다보스에서 ‘4차 산업혁명의 이해(Mastering the Fourth Industrial Revolution)’를 주요 의제로 설정한 이후 세계적인 관심사를 갖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2016년 3월에 벌어진 이세돌과 알파고의 바둑대결 충격 이후 대중, 언론, 학계의 관심사가 되었다. 인공지능, 로봇공학, 가상현실(VR)과 증강현실(AR), 양자암호 및 전달체계, 빅데이터와 클라우드 컴퓨팅, 3D와 4D프린팅에 의한 맞춤 생산(customization), 무인운송, 사물인터넷(IOT)을 통한 초연결사회(hyper-connected society), 스마트공장(smart factories), 생명공학 등, 3차 정보화 혁명을 계승하면서도 이와 판이하게 다른 과학기술과 이에 의한 혁명적 사회변화상들이 제시되고 있다.

4차 산업혁명에 대한 한국 학계의 논의는 아직 벌어지지 않은 현상에 대해 미리 예단하거나 너무 호들갑을 떤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무엇보다도 추론과 예측 위주이거나 겉핥기에 그치고 있다. 이 때문에 수많은 논문과 책이 발표되었지만,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불교계에서도 학술대회를 열어 여러 편의 논문들이 발표되었지만, 대다수가 구체적 논거를 통한 치밀한 논증, 특히 쟁점에 대한 논의가 없이 추론으로 일관하고 있고, 국제 학회에서 최근에 이루어진 괄목할 만한 성과들도 참고하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이것이 불러올 영향이 단순히 일자리가 대폭 사라지는 문제에 그치지 않고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인간의 본성과 정체성을 뒤흔들고 기업과 국가는 물론, 인류 문명 자체의 대전환을 야기할 것이기에 관심을 갖거나 분석하고 대비할 수밖에 없다. 이에 최근의 서양의 인지과학(cognitive science), 신경과학(neuro-science), 생명공학(bio-engineering) 등의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둔 논문을 참고하되, 이에 대한 쟁점을 인간의 지능 초월 여부, 자유의지 여부, 감정의 프로그램화 문제, 인간의 본성에 대한 융합적 성찰로 나누어 고찰하고 불교적 해석과 대안을 모색한다.

2. 인공지능의 인간 초월 여부에 대한 논증

4차 산업혁명의 기술 가운데 우리에게 가장 두려움을 안겨주는 것은 인공지능 분야다. 인공지능과 관련한 핵심 논쟁 가운데 하나는 이것이 인간의 지능을 넘어설 것인가 아니냐이다. 알파고는 알파고 제로로 진화하였지만, 양자 모두 약(弱)인공지능을 응용한 것이다. 약인공지능 로봇의 경우 복잡한 계산처럼 인간에게 어려운 것은 잘하지만 얼굴 식별처럼 인간이 잘하는 것은 못하는 모라벡의 역설(Moravec’s Paradox)이 통한다. 하지만, 인공지능은 결점과 한계를 빠른 속도로 극복하고 있다. 인공지능이 인간을 넘어설 것인가, 아니면 그렇지 못할 것인가.

기계가 인간처럼 생각할 수 있는가, 인간의 생각을 온전히 기계화하는 것이 가능한가. 앨런 튜링이 “수학적 직관을 포함한 인간의 모든 마음의 과정을 기계화, 형식화할 수 있다”라고 주장하며 튜링 테스트를 제안한 이후 괴델, 드레이퍼스, 서얼 등이 이에 대해 비판하며 불가능함을 주장하였다. 

괴델은 그 이전의 수학자들이 제기했던 보편적 진리 기계(unive-rsal truth machine)가 존재할 수 없음을, 즉 수학적 진리에 대한 완전한 공리집합이 있을 수 없음을 증명하였다. 괴델의 불완전정리(incomplete theorem)에 의하면, “무모순적 공리계는 참인 일부 명제, 특히 스스로의 무모순성을 증명할 수 없다.” 이를 통해 “어떠한 형식체계일지라도 그 체계 내에서 증명될 수 없는 공식 또는 명제가 존재한다”가 가능하다. 둘째, 첫째 정리의 따름정리에 의하면 한 형식체계의 일관성은 그 체계 내에서 증명될 수 없다. 괴델은 튜링의 주장이 ① 물질과 분리된 마음은 없다. ② 두뇌의 기능은 디지털 컴퓨터처럼 작용한다는 두 전제하에서만 가능한데 ②는 그럴지 몰라도 ①은 현대의 편견이며 과학에 의하여 반증될 수 있으리라 본다. 

드레이퍼스는 생각이란 것이 기호적인 연산으로 어느 정도 가능하지만, 인간의 지능과 감성이 기본적으로 의식적인 상징의 조작보다 무의식적 본능에 의존하기에 이런 무의식적 기술들은 공식으로 포착할 수 없다고 본다. 디지털 컴퓨터는 인간처럼 암묵적인 배경지식을 가지지 않기에 한계가 있다고 본다. 

서얼은 “지향성(intentionalty)은 인간의 정신과정과 뇌가 실제로 인과적으로 상호작용한 경험적 사실인데, 기계는 이런 지향성을 충분히 프로그램할 수 있는 인과적 힘(casual power)을 갖지 못한다.”라고 주장한다. 형식적 속성이 그 자체로 지향성을 구성하지 못하기에 순수한 형식 모형을 바탕으로 한 디지털 컴퓨터는 뇌의 지향성을 프로그램할 수 없다. 서얼이 볼 때, 튜링 테스트는 중국어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 ‘중국어 방’에 앉아서 그 방에 있는 중국어 관련 문법과 사전을 참고하여 중국어 질문에 중국어로 답하면 사람들이 그가 중국어를 할 줄 아는 것처럼 착각하는 것과 유사하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레이 커즈와일은 인공지능이 형식론적이고 구문론적인 단계를 넘어서며 “연산도 사람의 뇌처럼 카오스적이고, 예측 불가능하고, 복잡하고, 명상적이고, 창발적일 수 있다”라고 주장한다. 커즈와일의 주장처럼, 애플사의 시리(Siri)는 서얼의 ‘중국어 방 이론’에 의해 프로그램이 되어 있음에도 ‘중국어 방’의 한계를 넘어서는 지능을 보인다. 특히 인지과학자들과 생명과학자들은 인간이 유전자에 따라 사고하고 행동하며 마음 또한 뇌신경세포의 단백질, 전기신호와 화학물질들로 구성되는 유기체적 알고리즘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다. 인간의 뇌를 디지털로 복제하는 연구도 상당 부분 진행되고 있다. “러시아의 억만장자 드미트리 이츠코프는 2045년까지 자신의 뇌 속에 담긴 생각과 감정, 인격을 컴퓨터로 옮겨서 영생을 하는 연구를 지원하고 있다.” 더불어 빅데이터가 검색한 용어를 종합하여 그 사람의 마음을 본인보다 더 정확히 읽어내는 것에서 잘 알 수 있듯, 데이터가 양을 질로 전환하면서 인간의 무의식과 마음을 어느 정도 대체할 것이다. 인공지능으로 만든 예쁜 꼬마 선충이 알고리즘 이상의 생명 활동을 한 것처럼 알고리즘 이상의 사고와 행위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한계는 뚜렷하다. 뒷장에서 더 논하겠지만 인간의 마음과 무의식은 단순히 뇌의 신경세포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몸 전체가 연기적으로 관련을 맺기에 알고리즘화할 수 없는 영역이 분명히 있다. 인간의 뇌는 컴퓨터와 달리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함께 연기적이고 생성적으로 변화할 수 있지만 컴퓨터는 그렇지 못하다. 컴퓨터의 인공지능이 이를 가능하게 하고 뇌신경세포를 모두 스캐닝하여 디지털화하려면 넘어야 할 과학적이고 기술적인 장애가 많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종합하면, 인공지능이 인간의 지능을 초월하는 것이 가능하고 인간이 유기체적 알고리즘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지구상의 생명체가 38억 년에 걸쳐 자연과 상호작용하며 진화한 과정을 인공지능이 모두 복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복잡한 계산처럼 인간에게 어려운 것은 잘하지만 얼굴 식별처럼 인간이 잘하는 것은 못하는 모라벡의 역설(Moravec’s Paradox)이 통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인공지능이 수학을 바탕으로 하고 계량화와 코스모스화를 지향한 문명사 1만 년은 잘 프로그램화할 수 있지만, 그 이전 38억 년의 진화 작용은 수학과 무관하였고 카오스적이었기에 프로그램화하는 것은 불가능하거나 아주 어렵기 때문이다. 물론, AI 연구자들은 후자의 정복도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것이 가능하려면 극복해야 할 기술적, 과학적 장애가 너무도 많다. 결론적으로, 강(强)인공지능이 대략 앞으로 30여 년 안에 인간의 지능을 스스로 학습하면서 기술적 특이점(technological singularity)을 돌파하여 지능폭발을 하고 초지능(super-intelligence)을 습득할 것이지만, 인간의 마음과 무의식, 이에 영향을 주는 인간 몸의 유기적인 시스템을 완벽히 복제하지는 못할 것이다.

 

3. 자유의지 여부에 대한 논증

1) 최근 서양 자연과학계의 자유의지 허구론

자유의지는 외부의 제약이나 구속, 강요 없이 한 개인이 자유롭게 세계를 인식하고 목적을 설정하고 이를 자율적으로 실천하는 내적인 힘을 뜻한다. 근대의 학문과 사회, 제도는 환경의 영향을 인정하면서도 이에 맞서서 인간이 자유의지를 통하여 환경을 변화시키고 세계를 창조하고 자기 삶을 구성할 수 있는 독립된 주체라는 전제를 바탕으로 한다. 근대인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타인을 사랑하거나 증오하고 불의를 보고 저항하거나 침묵하고 죽어가는 이를 보고 구원에 나서거나 지나친다. 그렇기에 근대인은 사유와 행위에서 자유로운 주체, 그 행위의 원인으로서 정립되었고 이를 전제로 근대 사회가 형성되고 제도와 시스템이 만들어졌다. 또한 자신의 선택과 결정에 대해 도덕적이고 법적인 책임을 졌다. 하지만, 그것이 한 인간 전체가 아니라 유전자나 뇌신경세포의 특정 물질 과다에 따른 결과물이라고 해도 도덕적이고 법적인 책임을 부여해야 하는가. 생명과학 분야와 인지과학자들은 너무도 당연하지만, 유발 하라리처럼 학문적 · 대중적으로 상당한 위상에 있고 불교를 수용한 인문학자들마저 자유의지는 없으며 인간과 생명은 알고리즘으로 이루어진 유기체라고 단정한다.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다면 이를 전제로 한 근대의 학문과 제도, 법, 윤리와 도덕, 더 나아가 종교는 신기루로 둔갑한다. 

더니든 스터디(The Dunedin Study)에서 처음 제안하였고 이후 많은 연구에서 확인된 것처럼, 두뇌의 모노아민산화효소(mono-amine oxidase Alpha, MAOA)의 낮은 발현 변이를 보이는 이들이 시냅스에서 신경 전달 물질을 분해하는 효소인 MAOA를 적게 생산하는 바람에 편도체는 활성화하고 전두엽은 활성화하지 못하여 공격성을 증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누가 살인을 저지르고서 “MAOA 효소가 살인한 것이지 나의 자유의지는 없었다.”라고 항변한다면, 그에게 법적 책임을 부여하는 것이 얼마나 타당성이 있는가. 우리가 정신병자가 살인하였을 경우 정상을 참작하는 것처럼, 교육이나 치료 등을 통하여 MAOA 효소를 늘리지 않은 국가와 사회에도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닌가. 

벤저민 리벳은 자유의지에 관한 유명한 실험을 통하여 피실험자들이 결정을 내리기 1,000분의 350초 전에 뇌에 이미 신호가 떴음을 밝혀 자유의지가 뇌의 도구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였다. 이후 무의식적인 뇌신경 활동이 자유의사 결정에 선행하고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논문이 연이어서 발표되었다. 존 딜런 하인즈 등은 “숫자를 더하거나 빼는 자유로운 결정의 결과가 참가자가 의식적으로 선택을 한다고 보고하기 전에 내측 전두엽 및 두정 피질에서 신경 활동으로부터 이미 해독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면서 좀 더 복잡한 자유의사 결정의 결과가 이전의 뇌 신호로부터 예측됨을 밝혔다. 

자유의지에 관한 연구에서 가장 극적인 것은 로봇쥐 실험이다. 산지브 탈와르 교수는 쥐의 뇌에서 감각영역과 보상영역을 찾아 전극을 이식하여 리모컨 조작만으로 쥐를 마음대로 움직이게 하였다. 쥐는 우로, 좌로 움직이고 사다리도 오르내렸다. 이처럼 “뇌의 감각 활동을 원격으로 수신하고 이를 정확히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은 이 조종된 쥐를 이동 로봇과 생물학적 센서로서 기능할 수 있게 한다.” 

캘리포니아주립대학의 연구팀은 지속적인 뇌신경 행위가 주어진 순간에 의사를 선택할 부분에 자발적인 결정을 편향시킴을 입증하여, “자발적인 신경요동이 의사결정을 예측하게 하며, 그동안 잡음으로 간주되던 뇌신경 신호의 지속적인 가변성이 뇌의 본질적인 특성임을 밝혔다. 우리가 독립적인 선택을 내린다고 생각한 것이 뇌의 배경소음에 지나지 않는다. 자유의지란 것은 없으며 자유의지라고 생각한 것이 있을 뿐이다.” 라고 결론을 내린다.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연구는 언어적, 분석적, 논리적 인지에 관여하는 좌뇌와 비언어적, 종합적, 창조적, 공간적, 예술적, 직관적 인지에 관여하는 우뇌를 분리한 연구[split-brain research]에서 더욱 잘 입증되었다. 가자니가 등은 좌뇌와 우뇌를 연결하는 뇌량에 이상이 있는 환자를 대상으로 언어인지에 관여하는 좌뇌에 닭의 갈고리발톱을 휙 보여주는 동시에 우뇌에 눈 내린 풍경을 휙 보여주었다. 환자에게 무엇을 보았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닭의 갈고리발톱’이라고 대답하였다. 일련의 그림카드를 주고 방금 본 것과 일치하는 사진을 가리키라고 하자 환자는 오른손으로 닭 그림을 가리켰지만 동시에 왼손을 내밀어 눈삽을 가리켰다. 그에게 눈삽을 가리킨 이유를 묻자 그는 “아, 닭의 발톱과 가장 일치하는 그림이 닭이고, 닭 우리를 치우려면 삽이 필요하잖아요.”라고 답하였다.  

그렇다면 욕망과 자유의지라는 것도 실은 뇌신경세포에서 전기 및 화학신호의 반응, 38억 년의 진화에 걸쳐 이루어진 뇌의 신경세포가 구성하는 허구에 지나지 않으며, 인간은 생체학적 알고리즘에 지나지 않는가. 생명과학자와 인지과학자들의 주장처럼 인간 또한 생체학적 알고리즘의 집합체에 지나지 않는다면 인공지능이 이를 전자 알고리즘으로 수학적으로 디지털화/프로그램화하는 것이 언제인가 가능할 것이다. 

2) 자유의지 허구론에 대한 연기론적 비판

생명과학과 인지과학, 신경과학자의 주장대로 유전자의 특정 물질이나 뇌신경세포의 단백질, 전기신호, 화학물질 등이 의식의 바탕을 형성하는 것은 맞다. 하지만, 이들은 한마디로 유전자 결정론에 매몰되어 있으며, 근본적으로 실체론과 이분법으로 생명과 인간을 분석하고 있다. 부분에 대해서만 참인 것을 전체에 일반화하는 ‘결합의 오류’도 범하고 있다. 게슈탈트 이론가들이 통찰하고 양자역학, 카오스이론에서 확인된 것처럼, 전체는 부분의 합 이상이다.

화엄에서 말한 대로 하나가 곧 전체이고 전체가 곧 하나다[一卽多 多卽一]. 하나와 전체는 서로 깊은 연관과 조건, 인과 관계를 맺고서 서로를 생성한다. 유전자와 뇌신경세포가 전체의 마음을 구성하는 동시에 전체의 마음이 유전자와 뇌신경세포에 조건과 인과로 작용하며, 부분의 합이 전체가 아니며, 양자는 찰나의 순간에도 서로 영향을 미치면서 작동하고 생성한다. 

인간의 마음이란 계량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고 중층적이고, 이성과 감성, 의식과 무의식이 외부 세계와 상호작용하여 발생하는 것이다. 또한 38억 년에 걸쳐서 자연 및 다른 생명과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공진화가 형성되고, 인류가 600만 년 동안 자연과 세계, 타자에 대해 대응한 산물이기에 이를 단순하게 프로그램화할 수 없다. 생명과학자와 인지과학자들의 실험들은 짧은 시간에 특정한 상황에서 행해진 것이다. “행동할 좋은 기회가 왔을 때 단순히 사고하는 것보다는 예상되는 상황을 목표 지향적 행위에 연결시키면 성공하려는 의도가 더욱더 행동을 촉진한다.” 언제까지 체중을 어느 정도로 줄이겠다고 구체적인 목표를 설정한 사람이 그냥 막연히 체중을 줄이려는 사람보다 다이어트 성공 확률이 높다. 이는 장기적인 자유의지가 개인의 자기통제에 영향을 미침을 나타낸다. 작년에 일본의 연구팀은 자유의지에 대한 믿음이 교감 활동을 통한 의사결정의 전략적 전환에 기여한다는 사실을 밝혔다. 그들이 자유의지와 자기통제, 교감신경과 상관관계에 대해 분석한 결과, “자유의지에 대한 믿음이 교감신경의 행위와 자기통제에 간접적으로 기여하였다.”고 했다. 이는 인간의 마음이 뇌신경세포와 몸의 유전자에 영향을 미침을 뜻한다.

과학적이고 객관적 실재라고 해서 100% 옳은 것은 아니다. 토머스 쿤의 지적대로 과학과 객관적 실재 또한 패러다임과 해석의 지배를 받는다. 필자는 에커드 헤스의 실험을 다르게 해석한다. 헤스는 “눈동자 크기만 다르고 다른 부분은 똑같은 여성의 사진 두 벌 4장을 휙 보여주고 실험했다. ‘누가 더 매력적인가, 누구에게 더 친근감을 느끼는가’ 등 긍정적인 질문을 할 경우 남자들은 동공이 확대된 여성을 더욱 많이 선택하였고, ‘누가 더 이기적으로 보이는가’ 등 부정적인 질문을 할 경우 동공이 작은 여성을 선택하는 경향이 강하였다.” “동공확대의 이유는 컴컴한 곳에 들어갈 때, 복잡한 생각을 할 때 등 여러 가지가 있지만, 상대방에 대해 관심을 가질 때와 성적 충동이 일 때도 확대된다.”고 주장했다. 짧은 시간에 사진을 휙 보고 인간의 눈이나 뇌는 동공의 크기가 다른 것을 인지하지 못한다. 이는 여성과 남성이 서로 성적 매력에 이끌리는 기억들이 600만 년 동안 자연선택과 성선택을 하며 진화한 것이 몸에 각인된 결과다. 이 실험 결과는 뇌가 인식하기 전에 뇌를 제외한 몸이 먼저 인지함을, 우리의 의식을 지배하는 것은 뇌 이전에 몸임을, 마음이란 뇌 속의 감각신경세포, 운동신경세포, 연합신경세포, 거울신경체계의 시냅스들이 주고받는 전기신호와 화학물질에 따라 반응하는 것만이 아니라 전체로서 몸이 느낌을 뜻한다. 마음은 우리 몸에 축적된 기억과 정보 사이의 네트워킹에 의하여 연기적으로 발생하는 정보와 기억들의 연합 작용이다.

유전자가 100% 완벽히 일치하는 일란성쌍둥이들을 분석하면, 똑같아야 하는데 반대로 성격에서 능력, 질병에 이르기까지 많은 차이를 보인다. 특히 같은 질병에 걸리는 이들이 오히려 드물다. 일란성쌍둥이의 후성유전적 요인에 착안하여 많은 연구를 수행한 팀 스펙터 교수는 “다른 질병을 앓고 있는 일란성쌍둥이에서 유전성 DNA 메틸화 효과와 차별적 메틸화가 확인되었다.”고 했다. 예를 들어, 일란성쌍둥이 가운데 한 사람이 먼저 결혼하면 다른 사람은 질병에 걸리는 경우가 많았다. 상대적 박탈감이나 상실감이란 요인이 유전자의 발현을 조절하는 메틸기라는 스위치를 켜기도 하고 끄기도 하면서 후성유전적으로 질병 유전자를 발현하게 한 것이다. 유전자가 마음을 구성하기도 하지만, 마음이 유전자의 발현에 작용한다. 스펙터는 일란성쌍둥이에 관련된 수많은 관찰을 통하여 유전자 결정론의 한계를 지적한다. 유전자의 정보가 기계적으로 발현되는 것이 아니라 환경 등 여러 요인과 상호작용하면서 다양하게 발현된다. 그러니, 인공지능이나 디지털로 복제된 뇌는 몸에 새겨진 38억 년의 기억과 이들 사이의 연기적 총체를 모두 재현할 수는 없다. 또, 지능과 같은 특정 형질이나 질병을 발병하는 특정 유전자는 극히 드물며 수십, 수백 개의 유전자가 연기적으로 상호 작용하며, 인간 주변의 환경, 음식, 마음, 타자 등의 요인이 메틸기를 조절하여 유전자를 발현시키기도 하고 억제하기도 한다. 

이 시점에서 ‘편견의 역설’에 주의를 기울여보자. 인공지능 의료 진단 시스템인 왓슨이 의사보다 압도적으로 진단 정확도가 높은 것은 빅데이터를 활용하는 것과 함께 편견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냥에 나선 인간이 위험한 동물을 만났을 때 수많은 데이터를 놓고 고민하면 죽기 십상이기에 편견은 생존하기 위하여 진화적으로 판단을 단순화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편견은 인간 생존의 진화적 선택인 것이다. 편견이 있는 것이 인간의 특성이며, 편견이 없는 왓슨이 오히려 인간보다 진단 정확도가 높더라도 인간이 될 수 없는 한계일 수 있다. 실수하고 오류를 빚고 좌절하고 절망하면서 성찰하고 지혜를 터득하는 것이 인간의 중요한 본성이기도 하다. 인간은 죽기 때문에 유한성을 인식하고 실존을 모색하고, 모든 것이 무상함을 알기 때문에 영원함을 추구하며, 주변에서 떠돌고 있음을 알기에 중심과 근원으로 다가가고, 비속하기에 거룩함을 지향한다. 이것이 자유의지이기도 하다. 결론적으로, 유전자와 뇌신경세포에 인간의 성격과 마음, 행동 등을 결정하는 요소들이 이미 잠재되어 있지만, 그런 마음과 지향성, 실천을 이끌어내는 것에는 유전자와 뇌신경세포만이 아니라 온몸이 관여한다. 또 그 유전자와 뇌신경세포는 바깥의 환경, 타자 등과 연기적 관계에 따라 후성유전적으로 발현되기도 하고 발현되지 않을 수도 있다.

 

4. 감정의 발생과 소통/해석 및 프로그래밍 문제

감정이란 어떤 현상이나 사건을 접했을 때 마음에서 일어나는 느낌이나 기분을 말한다. 이의 발생 원인에 대한 고전적 해석은 감정을 신체 변화의 느낌이라 정의한 제임스 랑게설로 대표되는 신체적/생리적 요인(몸을 때리면 고통, 성기를 자극하면 쾌감, 간질이면 웃음이 나오듯 감정은 몸의 자극에 대한 반응), 심리적 요인(욕구나 욕망이 달성되면 쾌감, 도달하지 못하면 불쾌감), 사회적 요인(타인과 관계에서 욕구와 욕망의 달성 여부, 열등감, 우월감 등이 형성됨), 문화적 요인(도덕적 정조(情操)로서 정의감, 미적 정조로서 심미감, 종교적 정조로서 경외심, 무상감 등)으로 본다. 한마디로 감정을 외부의 자극이나 요인에 따른 마음과 신체의 즉각적 반응이나 느낌으로 본다.

하지만, “감정은 세계에 대한 인간의 반응이 아니라 이 세계에 대한 경험을 능동적으로 구성한 것이다.” “뒤섞인 감정은 과거의 경험이 현재의 감정의 범주를 구성하는 것과 연결된 결과다.” 감정은 대상/타자와 어우러져 일어나는 현상과 사건에 대해 감각신경세포가 반응하여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감정은 내 몸과 대상/타자, 과거의 경험과 현재의 감각 정보, 지각과 세계, 뉴런과 몸이 상호작용/소통을 하여 이루어지는 복합적 의미구성의 결과다. 예를 들어, 돌과 소리에 대한 개념이 없다면 돌이 떨어져도 공기의 진동만 느낄 뿐이며, 빛깔에 대한 개념이 없으면 빨간 사과를 보고도 반사된 빛만 느낄 뿐이다. 지각하는 존재가 없다면 소리도, 빛깔도 없으며 물리적 실재만 존재한다.

예1) 바위의 떨어짐(공기의 진동일 뿐)→청각신경의 전달(진동이 귀를 통해 내이의 유체를 자극하고 이 안의 섬모가 압력변화를 전기신호로 변환함)→세계의 구성과 범주화(뇌 속의 뉴런들이 돌과 소리에 대한 과거의 경험과 정보를 종합함)+예측(prediction)+시뮬레이션→가설 설정→데이터에 따라 예측의 수정과 검증→반증

예2) 거리에서 어떤 사람을 발견함→영상 이미지가 망막에 맺힘→시각뉴런에 의해 전기신호로 변함→과거의 경험에 비추어 해석함→세계의 구성과 범주화+예측→가설 설정과 시뮬레이션→데이터에 따라 예측의 수정과 검증, 시뮬레이션→오래전에 헤어진 친구로 판단→달려가서 끌어안으며 행복한 감정 방출→반증→실망감  

“뇌의 예측과 감각 입력이 일치할 경우 이것은 그 순간에 세계에 대한 모형이 된다. (……) 뇌에는 세계가 바로 다음 순간에 어떻게 전개될지에 대한 정신적 모형이 있다. 이 모형은 과거 경험을 바탕으로 구성된 것이자 세계와 신체를 바탕으로 개념을 사용하여 이루어지는 의미구성 현상이다. 당신이 깨어 있는 매 순간 뇌는 개념으로 조직된 과거 경험을 사용해 당신의 행동을 인도하고 당신의 감각에 의미를 부여한다.” 

“공포와 분노는 신체, 얼굴 등의 특정 변화가 감정으로서 의미 있다고 동의하는 사람들에게 실재한다. 다시 말해 감정 개념은 사회적 실재(social reality)다.” 이를 통해 수정하면, 이 세계에는 객관적 실재, 주관적 실재, 상호주관적 실재가 있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 실재와 이에 상호작용하는 상호주관적 실재가 있으며 감정 또한 상호주관적 실재다. 

“감정은 집단지향성을 통해 실재가 된다.” “우리는 소리, 빛깔, 돈의 경우 똑같은 방식으로, 즉 뇌의 배선 안에 구현된 개념 체계를 사용하여 감정의 사례를 구성한다. 감정은 사회적 실재의 전제 조건인 두 인간의 능력을 통해 우리에게 실재가 된다. 우선 ‘꽃’ ‘돈’ ‘행복’ 같은 개념이 존재한다고 동의하는 일군의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 이렇게 여러 사람이 공유하는 지식이 집단지향성(collective intentionality)이다. 이것들이 실재한다고 우리가 동의하기 때문에 실재한다. 그러나 이것들은, 그리고 감정은 오직 지각하는 인간이 있을 때만 존재한다.” “문화 전체가 당신이 형성하는 개념과 당신이 하는 예측에 집단으로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미국의 재판정에서 양심의 가책 여부를 판단하고 양형을 결정하지만, 이에 대한 표정과 해석은 문화권마다 다양하다.

예측은 환경의 실시간 샘플링과 관련된 매우 전문화한 지각 수준부터 세계의 핵심 내부 모델을 기반으로 한 보다 추상적인 안정된 수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간 척도와 특이성 수준에서 발생한다. 

신경 과학의 최근 연구들은 뇌가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입력된 감각적 데이터를 지속적으로 미리 예상하면서 예측적으로 기능한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예측 신호는 경험을 안내하고 제한하면서 지각에 영향을 미친다. 일련의 여섯 가지 행동 실험 결과 얼굴 표정에 대한 예측이 사회적 지각을 끌어내는 동력이 되고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 심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으로 드러났다. 개인은 표정이 예상될 때, 심지어 의식적인 변화가 없을지라도 더 바람직하고 신뢰할 만한 것으로 판단한다. 더욱이 사회적 판단에 대한 예측의 효과는 그러한 판단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보다 기본적인 지각적 과정(즉, 촉진된 기대되는 표정의 시각적 과정)뿐만 아니라 그러한 판단이 특히 중요한 실제 세계(즉, 다가오는 선거에 대한 대통령 후보자 평가)까지 확대된다.

이처럼 감정은 대상과 사건에 대하여 우리의 감각이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과 우리 안의 경험과 기억 등을 바탕으로 예측한 것과 감각한 것을 종합하여 세계를 구성하면서 형성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예측은 우리가 세상을 경험하는 방식에 대한 지각, 안내 및 제한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며, 예측은 연기적, 특히 상호생성적(inter-becoming)인 관계에 있다. 내가 말하거나 행동할 때마다 다른 사람의 예측에 영향을 미치고 그 사람은 또 다른 사람의 예측에 영향을 미친다. 이 관계에 미시적인 권력과 거시적인 권력, 이데올로기, 담론, 정보와 지식 등을 비롯하여 문화와 맥락 전체가 작용한다. 그러므로 AI가 폴 에크먼이 했던 것처럼 기쁨, 슬픔, 놀라움, 두려움 등 범주화할 수 있는 보편적인 감정, 더 나아가 ‘웃픈’,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 등 복합적인 감정까지 가질 수는 있겠지만, 문화적 요인에 따른 감정까지 프로그램화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대승기신론을 응용하여 마음과 유전자의 관계를 새롭게 해석할 수 있다.

만약 상주(常住)를 논한다면 다른 것을 따라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체(體)라 하고, 무상(無常)을 논한다면 다른 것을 따라서 생멸하는 것을 상(相)이라 하니 체는 상(常)이요 상(相)은 無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일심이 무명(無明)의 연을 따라 변하여 많은 중생심을 일으키지만 그 일심은 항상 스스로 둘이 없는 것이다. (……) 비록 심체가 생멸하나 늘 심체는 상주하여 이는 심체가 하나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른바 이는 심체가 둘도 아니고 하나도 아닌 성질이며 움직임과 머묾이 같지도 않으면서 다른 것도 없는 성질인 것이다.

이를 응용하면, 생멸문에서는 이문(二門)의 차원에서 정신과 육체, 유전자와 마음/의지의 관계를 바라본다. 인간이 마음[참, 體 1]은 알 수 없고 다다를 수도 없지만, 이는 유전자와 두뇌의 신경세포 작용[用]으로 드러난다. 이는 얼굴 표정, 말, 행위 등의 텍스트[相]를 만든다. 이 텍스트가 인간의 마음을 품고 있기에 타인은 얼굴 표정과 말, 행위의 텍스트를 해석하면서 그에 담긴 마음[몸, 體 2], 곧 ‘몸의 마음’을 읽는다. ‘몸의 마음’이 일상의 차원에서 감지하는 타인의 마음이라 할 것이다. 물론 실재 마음인 ‘참의 마음[體 1]’과 텍스트를 통해 재구성한 몸의 마음[體 2]은 동일하지 않다. 인간이 외부 환경 및 타인과 상호작용한 것이 두뇌의 신경세포에 저장되어 몸과 마음에 작용하여 참의 마음[體 1]을 구성하며, 이는 다시 자연, 외부 환경, 타인과 상호작용을 하며 뇌신경세포와 유전자의 작용[用]을 통하여 ‘몸의 마음[體 2]’를 드러내고 이는 얼굴 표정, 말, 행위 등의 텍스트[相]를 형성하며, 이에 따른 상대방의 반응과 외부 환경이 마음을 형성한다. 이렇게 순환하고 모든 것들이 연기적이기에 인간은 마음의 본체인 ‘참의 마음’에 영원히 다다를 수 없다. 하지만 ‘몸의 마음’에서 연기와 일심(一心)을 발견하고 그로 돌아가려는 순간 우리는 참의 마음의 한 자락을 엿볼 수는 있다. 

 

5. 인간의 본성에 대한 융합적 성찰과 대안 

불교에서 보면, 인간은 오온(五蘊)의 구성체로 아(我)가 존재한다는 생각 자체가 망상이다. 모든 것은 연기(緣起)하고 연멸(緣滅)하기에, 찰나의 순간에도 변하기에 공(空)하다. 하지만, 개체로서 인간은 공하지만 보편적이고 개념적인 존재로서 인간의 본성은 선한가, 악한가. 진화생물학과 인지과학들은 맹자의 성선설이나 순자의 성악설과 같은 주장이 과학적 근거가 없는 성인들의 은유에 불과한 것임을 여실하게 보여주었다. 리처드 도킨스는 38억 년 동안의 생물 진화를 일반화하여 인간이 이기적 유전자를 가진 생존 기계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유전자는 박테리아에서 코끼리에 이르기까지 기본적으로 모두 동일한 종류의 분자다. 우리 모두는 같은 종류의 자기 복제자, 즉 DNA라고 불리는 분자를 위한 생존 기계다.” “이기적 유전자의 목적은 유전자 풀 속에 그 수를 늘리는 것이다. 유전자는 기본적으로 그것이 생존하고 번식하는 장소인 몸에 프로그램 짜 넣는 것을 도와줌으로써 이 목적을 달성한다.” 그의 지적대로, 98.8%의 유전자가 침팬지와 일치하는 생물학적 존재로서 인간은 600만 년 동안 자신의 유전자를 늘리기 위하여 유전적으로 우월한 여러 이성과 섹스를 하고픈 욕망을 품으며, 타자의 것을 약탈해 이를 자식이나 자신과 유전자가 유사한 집단에 주어 왔다. 이는 지금도 행해지고 있다. 하지만, 리처드 도킨스는 생물학적 존재로서 인간만 분석한 한계를 지닌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다. 인간은 사회를 형성하며 협력을 하였다. 간단히 말해, 한 원시인이 홀로 사냥하여 한 달에 사슴 3마리를 잡았는데, 10명이 짝을 지어 사냥하여 40마리를 잡았다면, 후자가 자신의 유전자를 확대하는 데 더 유리하다. 인간은 사회와 문명을 수용하는 대가로 이기적 본능과 욕구를 유보하고 이타적 협력을 했다. 인간은 이타적 협력을 바탕으로 사회를 형성하면서 “혈연 이타성(kin altruism), 호혜적 이타성(reciprocal altruism), 집단 이타성(group altruism)을 추구하기 시작하였고,” “고도의 이성을 바탕으로 맹목적 진화에 도전하여 공평무사한 관점을 증진시키며 윤리적 이타성 또한 추구하였다.” 협력을 잘하는 자가 진화에도 유리한 탓에 몸도 변해, 인간의 두뇌신경세포에 타인을 모방하거나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거울신경체계(mirror neuron system)가 형성되는 것으로 진화하였다. “거울신경체계는 언어 학습과 소통에 관여하고 도움을 주면서 인간이 다른 동물과 현격하게 다르게 사회적 상호작용을 하는 데 관여한다.” 2013년에 페라리 등은 거울신경체계가 타인에게 자신의 표현을 더 쉽고 안정적으로 전달하려는 것을 선호하는 데서 기인한 자연선택의 결과라고 밝혔다. 결론적으로 인간은 선과 악, 이기와 이타가 공존하는 유전적 키메라(genetic chimera)다. 

이런 인간의 본성론도 AI의 등장 이전에나 해당하는 사항이다. AI가 활성화한 이후 인공지능은 인간의 본성과 정체성, 생명성에 근본적인 혼란과 파국을 가져올 것이다. 영국 드라마 〈휴먼스(Humans)〉를 보면, 한 가정에 가정부로 들어온 인공지능 로봇 아니타는 요리에서 가사에 이르기까지 못하는 것이 없는 좋은 엄마와 아내 역할을 하며, 존재감의 상실을 느끼는 아내에게 “나는 당신보다 아이를 더 잘 돌보고 화를 내지 않고 기억을 잊지도 않고 술이나 마약을 하지도 않는다”라고 말한다. 아니타처럼 인공지능 로봇은 인간의 일자리를 대체하고 인간적인 사고와 감정, 그 표현과 행위를 하면서 인간을 위협할 것이다. 인간과 기계 사이의 경계를 해체하고 인간성, 인간 존엄성의 근간을 무너트리고 인간을 기계화할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과 인공지능 인간인 안드로이드, 기계인간인 사이보그가 병존하는 세상에서 이들과 차이를 갖는 인간의 본성이란 무엇인가.

“세상이 더욱 디지털화되고 첨단 기술화될수록, 우리는 친밀한 관계 및 사회적 연계에서 비롯되는 인간적 감성을 더욱 갈구하게 된다.” 강한 힘을 갖는 수컷이 모든 암컷을 차지하는 동물과 달리 가장 강한 권력을 가졌던 고대와 중세 시대의 샤먼, 승려, 성직자들이 왜 독신으로 살았는가. 인간은 의미를 해석하고 지향성에 따라 의미를 실천하면서 자신의 본성을 구현하는 실존적 존재이자 궁극적이고 거룩한 것을 추구하는 영적 존재이다. 

인공지능 시대에서 인간은 안드로이드가 성취할 수 없는 생명성과 인간성, 영성을 구현해야 한다. 그 생명성이란 ‘더불어 살려는 의지를 가지고 환경과 상호작용하며 공진화하는 것’이다. 안드로이드와 차이를 갖는 인간성은 ‘진정한 자기실현으로서 노동, 허구의 창조, 실존, 윤리 추구, 욕망, 성찰, 타자에 대한 공감과 연대’이다. 안드로이드가 따라올 수 없는 영성이란 ‘초월적 실재에 대한 인식과 체험의 지향, 근원적이고 궁극적인 진리에 대한 깨달음, 완전한 자유와 해탈, 더 거룩하고 더 아름다운 것을 향하여 끊임없이 자기규정과 한계를 포월(匍越)하는 거듭남’이다. 인간이 이런 생명성과 인간성, 영성을 구현하면서 차이를 생성하는 삶을 지향해야 할 것이다. 

단 몇 분밖에 살지 못하는 미물이라 할지라도 결단하여 먹이를 잡고 도망가고 짝을 선택하여 알을 낳고 죽으며, 그 과정 속에서 무수한 생명과 상호작용하면서 무진장의 생명을 생성시키면서 시공간에 주름을 빚고 허다한 의미를 남기고 달라진 미래를 구성한다. 그렇듯, 우리는 상호생성자로서 생명이 다른 생명과 연기적 관계 속에서 생성하면서 빚어내는 다양한 차이, 그 차이들이 빚어내는 여러 층위의 시간과 공간의 주름들, 그 주름을 풀어내면서 해석되는 다채로운 존재의 의미, 가능성 · 잠재성 · 현실성, 몸에 담긴 기억들의 편린과 그 기억들이 지향하는 내재적 초월성과 미래까지 바라보아야 한다. 그러면서 자기를 낮추고 대대적(待對的)으로 상대방을 내 안에 들여 섬길 때 비로소 우리는 존재의 생명성에 다가가는 것이다. 

나와 밀접한 연관 관계를 맺고 있는 타자를 위하여 욕망을 자발적으로 절제하고, 타자의 고통을 내 것처럼 아파하고 연대의 손길을 내밀 때 우리는 좀 더 나은 인간성을 획득한다. 아무리 즐겁고 풍요로운 상태에 있다 하더라도 근원적인 실재와 궁극적인 진리, 완전한 자유와 해탈, 더 거룩하고 더 아름다운 것을 향하여 끊임없이 자기규정과 한계를 포월(匍越)할 때 우리는 거룩한 존재로 거듭난다. 

 

6. 맺음말

최근의 서양의 자연과학 분야에서 좋은 성과를 거둔 논문을 참고하되, 인공지능에 대한 쟁점을 인간의 지능 초월 여부, 자유의지 여부, 감정의 프로그램화 문제, 인간의 본성에 대한 융합적 성찰로 나누어 고찰하고 불교적 해석과 대안을 모색했다.  

인공지능이 대략 앞으로 30여 년 안에 기술적 특이점을 돌파하여 지능폭발을 하고 초지능을 습득하겠지만 마음과 무의식, 이에 영향을 주는 인간 몸의 유기적인 시스템을 완벽히 복제하지는 못할 것이다.

유전자와 뇌신경세포에 인간의 성격과 마음, 행동 등을 결정하는 요소들이 이미 잠재되어 있지만, 그런 마음과 지향성, 실천을 이끌어내는 자유의지에는 유전자와 뇌신경세포와 온몸이 관여하며, 그 유전자와 뇌신경세포는 바깥의 환경, 타자 등과 연기적 관계에 따라 후성유전적으로 발현되기도 하고 발현되지 않을 수도 있다.  

감정은 대상과 사건에 대하여 우리의 감각이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과 우리 안의 경험과 기억 등을 바탕으로 예측한 것과 감각한 것을 종합하여 세계를 구성하면서 형성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AI가 복합적인 감정까지 가질 수는 있겠지만, 문화적 요인에 따른 감정까지 프로그램화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대승기신론을 응용하면, 인간이 외부 환경 및 타인과 상호작용한 것이 두뇌의 신경세포에 저장되어 이것이 작용하여 참의 마음[體 1]을 구성하며, 이는 다시 외부 환경과 상호작용을 하며 뇌 신경세포와 유전자의 작용[用]을 통하여 ‘몸의 마음’[體 2]을 드러내고 이는 얼굴 표정, 말, 행위 등의 텍스트[相]를 형성하며, 이에 따른 상대방의 반응과 외부 환경이 마음을 형성한다. 이렇게 순환하고 모든 것들이 연기적이기에, 인간은 마음의 본체인 ‘참의 마음’에 영원히 다다를 수 없다. 

인공지능 시대에서 인간은 안드로이드가 성취할 수 없는 생명성과 인간성, 영성을 구현해야 한다. 그 생명성이란 ‘더불어 살려는 의지를 가지고 환경과 상호작용하며 공진화하는 것’이다. 안드로이드와 차이를 갖는 인간성은 ‘진정한 자기실현으로서 노동, 허구의 창조, 실존, 윤리 추구, 욕망, 성찰, 타자에 대한 공감과 연대’이다. 안드로이드가 따라올 수 없는 영성이란 ‘초월적 실재에 대한 인식과 체험의 지향, 근원적이고 궁극적인 진리에 대한 깨달음, 완전한 자유와 해탈, 더 거룩하고 더 아름다운 것을 향하여 끊임없이 자기규정과 한계를 포월(匍越)하는 거듭남’이다. 인간이 이런 생명성과 인간성, 영성을 구현할 때만 인공지능과 차이를 형성하는 삶과 세계를 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 ■

 

이도흠
한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한양대 국문학과, 동 대학원 졸업. 한국학연구소 소장, 민교협 상임의장 등 역임. 저서로 《화쟁기호학, 이론과 실제》 《신라인의 마음으로 삼국유사를 읽는다》 《인류의 위기에 대한 원효와 마르크스의 대화》 등이 있음. 현재 한국기호학회 회장, 정의평화불교연대 상임대표, 지순협 대안대학 이사장.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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