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의 문화는 헬레니즘과 히브리즘을 바탕으로 한다. 둘 다 기원전 2,000년쯤에 시작되어 로마제국에서 만났다. 그리고 히브리즘이 성하던 중세를 지나 르네상스기에 다시 헬레니즘이 일어나고 이후 서로 조화를 이루며 서양문화를 형성해왔다. 헬레니즘은 그 기저에 인간의 호기심이 있다. 날개를 만들어 달고 크레타섬을 빠져나가는 이카로스나, 부하들의 귀를 밀랍으로 막고 자신의 귀는 연 채 사이렌의 목소리를 들었던 오디세우스의 예를 생각해 보면 된다. 여기에 반하여 히브리즘은 호기심의 억제이다. 선악과에 대한 호기심을 유발해 놓고 따먹지 못하게 한다거나, 충실한 종 아브라함과 모세도 신의 명령에 의문을 달면 반드시 벌을 받는 것 등이 대표적 예이다. 말하자면 절대적인 질서에 대한 순종이다. 

히브리즘만 성했던 중세기 유럽은 활력이 없었다. 헬레니즘이 되살아난 르네상스기에는 엄청난 문화의 상승이 있었으나 그 자유가 지나쳐 방종으로 귀결되었다. 그러나 이후 서양의 역사 문화는 이 두 사상이 절묘하게 맞물리며 성장했다. 자유와 질서의 추구가 서로 상생하면서 르네상스 이후 서양을 발전시켜 19세기 동양은 서양의 식민지로 전락했고 지금도 서양의 힘과 사상이 지구를 덮고 있다. 그러나 그 두 문화는 그들의 역사에서 큰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 이탈리아반도에서 르네상스가 일어났던 반면 알프스 이북에서는 종교개혁이 일어났고, 17세기에 처참한 종교전쟁으로 이어졌다. 신교와 구교로 나뉘어 벌인 이 전쟁은 천만 명 넘게 사망자를 내며 한 세기 동안 지속되었다. 또한 16세기 이후 200년간 황금시대를 구가했던 스페인은 가톨릭의 옹호자를 자처하면서 잉카와 마야에서 잔인한 살육을 자행했다. 인권과 민주주의의 아메리카 미국도 그 비옥한 땅에 살던 원주민들을 몰살시킨 죄악을 원죄처럼 안고 있다.

헬레니즘은 그 질서에 대한 반항과 호기심이다. 그것은 자연과학에서 큰 발전을 낳기도 했지만 19세기 말 퇴폐와 방종으로 귀결되기도 했다. 퇴폐와 동성애로 대표되는 상징파 시인들의 일탈은 그 근원을 캐면 헬레니즘의 디오니소스에 있는 것이다. 서양의 두 사상은 좋은 면도 있지만 극단에 치닫는 경우가 많다. 

여기에 비하여 동양의 사상은 중도를 중시한다. 도교가 그러하고 불교의 끝없는 자비와 용서는 답답할 정도로 관대하다. 석가모니 생전에 모국 카필라는 망했다. 사위국의 정복군 앞에 풍전등화와 같던 카필라를 구하기 위해 노구를 이끌고 몇 번 길목을 지키며 노력했지만, 신통력을 써서 대군을 궤멸시키지는 않았고 결국 카필라의 인연을 인정하며 그 멸망을 지켜보았다. 나중에 왕사성이 사위성을 병합하여 대제국 마우리아를 이루고 마침내 정복자 아쇼카 왕이 불교 전파에 엄청난 공헌을 했으니 부처님은 그것을 미리 보셨는지 모르겠다.

이러한 불타의 행보는 기독교와 대조적이다. 기독교의 신은 정말 독선적이어서 자신 외에는 다른 어느 누구도 용납하지 않는다. 시나이의 광야를 헤매는 유대민족은 이 절대적 신의 변덕에 복종해야 했다. 그것이 그대로 그쳤다면 기독교는 세계종교가 될 수 없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위대한 수행자를 만남으로써 기독교는 세계를 품는 사랑의 사상을 갖게 된 것이다. 그 예수가 자신의 사상을 정립하는 과정에서 불교의 영향을 받았음은 여러 가지 정황으로 알 수 있다. 불교의 영향이 없었다면 “너의 왼뺨을 맞거든 오른뺨을 내밀어라”는 산상수훈의 가르침은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석가모니 사후 500년에 그리스도가 탄생했다. 예수가 활동하던 시기에 인도의 북쪽 쿠샨 왕국을 중심으로 대승불교가 일어나고 있었다. 자신의 개인적 성불보다 중생제도에 역점을 두는 대승불교와 로마의 압제하에 고통받는 유대인들에게 구원을 약속하며 평등을 역설한 가르침은 유사하지 않은가. 

19세기 이후 서양의 지식인들은 불교에 몰입하였다. 그것은 원래부터 그들에게 비단, 보석과 향료의 보고였던 중국과 인도에 대한 호기심에서 비롯된 것이었지만, 곧 자기네들의 종교사상과 너무나 다른 불교에 빠져버렸다. 쇼펜하우어를 비롯한 철학자들은 서양철학의 한계를 불교에서 찾아냈다. 또한 독일의 헤르만 헤세도 그 문학적 영감을 불교에서 찾았다. 그들은 불교의 무한과 자비의 세계관에 매료당했다. 

미국의 월리스 스티븐스의 시는 난해하기로 유명하다. 그러나 그의 시를 불교의 시각으로 보면 아주 쉽게 풀린다. 많은 서양 지식인들은 불교에서 신선한 충격을 받았고 그것을 자기네의 것으로 소화해냈다. 나는 에밀리 디킨슨이나 월리스 스티븐스의 시에 나타난 반기독교적 정서를 읽으며 신기하게 생각했다. 그들도 기독교의 편협하고 답답한 세계관에 한계를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1950년대 샌프란시스코에서는 비트 제너레이션의 문명거부 운동이 일어났는데 그 중심에는 티베트불교와 히피문화가 있었다. 나는 그중 한 멤버이며 실제 불교의 수행자인 게리 스나이더를 읽으며 탄복했고, 2015년부터 ‘한국동서비교문학회’라는 학회의 회장을 역임하면서 동서양 비교의 문학관에 더 탐닉하고 있다. 이 땅의 영문학자들도 이젠 우리식의 영문학으로 시선을 돌릴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것이 ‘거 봐라, 동양이 훨씬 우월하지 않으냐’는 식의 생각으로 이어져서는 곤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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