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 시대, 다시 자유를 성찰한다

자유의 전성시대

최근 들어 부쩍 자유를 언급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이에 관한 논쟁도 치열해졌다. 거기에는 촛불을 든 사람도, 태극기를 든 사람도 있고, 도로를 점용한 사람도, 이로 인해 불편을 호소하는 사람들도 있다. 새로 정권을 잡아 의기양양한 사람들도 있고, 억울하게 정권을 잃었다고 분개하는 사람들도 있다. 일자리의 자유를 외치는 사람도, 기업의 자유를 외치는 사람도 있다. 에스컬레이터가 나를 더 자유롭게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고, 그래도 계단을 이용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성의 자유, 결혼의 자유, 반려동물의 자유, 패션의 자유 등등…… 이른바 자유의 전성시대다. 마치 ‘제발 좀 나의 자유를 건드리지 말라(I forbid you forbidding me).’고 외치는 듯. 그래서 자칫 여기에 어설프게 딴죽을 걸었다가는 자유의 적으로 몰리거나 서로 치열하게 부딪히기 십상이다.

어쨌든 그토록 원했던 자유였고, 우리는 이를 쟁취했다. 이제 한국인들은 그 누구의 노예도 아니고, 어떤 왕이나 독재자의 백성 또는 인민도 아니다. 천성이 부지런한 데다 열심히 일해 번 것을 누구에게 함부로 뺏길 일도 없으니 먹고살 만도 하다. 세계 어디든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비자 없이 바로 비행기표를 구입하여 떠날 수 있고,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몇십 킬로 정도 자동차로 찾아가는 것은 그저 흔한 일이 되었다. 대통령을 두고 이○끼 저○끼 욕해도 뭐 크게 문제 될 일은 없으며, 윗사람이라고 아랫사람을 함부로 대했다가는 온 주위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 받을지도 모른다. 자유분방한 며느리에게 시어머니가 잔소리 한마디 했다가는 아들이 이혼당하기 십상이고, 선생님이 학생을 함부로 대했다가는 교단에서 쫓겨날 판이다.

시골 마을 방방곡곡 어디에나 마을회관과 경로당이 산뜻하게 지어져 여름에는 에어컨이 빵빵하게 돌아가고 겨울에는 겉옷을 벗고 지내야 할 정도로 방들이 뜨끈하다. 보건소에서는 건강진료를 받으라고 재촉이 심하고, 마을부녀회에서는 계속 먹을 것을 날라 와 넘쳐난다. 음식도 먹을 만큼 내놓는 것이 아니라 아예 버릴 만큼 내놓는다. 기업들은 자유경제의 이름으로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이면 비닐이든 페트병이든 플라스틱 티슈든 무엇이든 얼마든지 만들어 내고, 소비자들은 이를 아낌없이 쓰며 자유를 만끽한다. 불과 몇 십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를 쟁취하기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할 만큼 절실한 것이었고, 아직도 이 지구상에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한국인들이 누리는 이런 자유와는 한참 거리가 먼 삶을 이어가고 있지만, 이 모두가 이제 우리 한국인들에게는 먼 과거의 일이고 우리와는 상관없는 먼 곳의 얘기이다.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의 말처럼 인간은 결국 자유로울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그리고 삶은 존재 그 자체만으로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워야만 한다는 것을 증명한 셈일까? 근세 자유주의 사상가들이 그 초석을 놓은 약육강식의 야만적 폭력과 전제권력으로부터의 자유를, 공산주의 혁명가들이 꿈꾸던 모두가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삶을 누릴 수 있는 자유를 어쨌든 우리 한국인들은 성취했다고 말해도 좋을 것 같다.

어쩌면 한국인들은 지금 지구 다른 어느 곳 사람들보다 더 풍족하고 자유로운 삶을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약육강식의 정글 법칙이 횡행하던 때에는 오직 살아남기 위해 노예의 삶을 감내해야만 했고, 전제군주나 독재의 치하에서는 신민으로서의 신분을 거역할 수 없었지만, 이제 이러한 노예나 신민으로서의 삶은 많은 지구인들에게, 최소한 우리 한국인들에게는 이미 지난날의 이야기다. 그래서 소련 해체와 베를린 장벽의 붕괴 직후인 1992년 프랜시스 후쿠야마(Francis Fukuyama)는 그의 주목할 만한 저서 《역사의 종언(The End of History and the Last Man)》에서 자유를 향한 인류의 투쟁은 자유민주주의의 승리로 귀결되었다고 선언했던 것일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에 관한 논쟁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그리고 최근 들어 이것이 더욱 치열해지면서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 1806~1873)의 《자유론(On Liberty)》이 다시 소환되었다. 과연 자유의 역사가 그 진화를 완성한 것일까? 그리고 지금 한국인들이 누리기 시작한 삶이 밀(Mill)이 생각했던 자유로운 삶 혹은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자유로운 삶일까? 어쩌면 위의 사진 한 장이 이런 질문들에 대해 어느 정도 답을 시사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와 그 한계

아마 자유라는 말만큼 그 의미가 다양하고 풍부한 단어도 흔치 않을 것이다. 물론 외부의 구속이나 강제로부터의 자유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자유의 의미이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자유는 그보다 훨씬 더 심오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어쩌면 현재 우리가 벌이고 있는 자유에 관한 논쟁들도 자유의 이러한 다양한 측면들에 관한 성찰이 부족한 데서 비롯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밀이 그의 《자유론》 서문에서 명백히 전제했듯이 그가 다룬 자유는 소위 자유의지라고 말할 때의 자유 즉 내면적 측면의 자유가 아니라 시민적, 사회적 측면의 자유, 말하자면 사회가 그 구성원들에게 합법적으로 행사하는 권력의 성격과 제한에 관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사상, 종교, 표현, 언론, 참정권, 직업 선택, 거주 이전 등 온갖 종류의 시민적, 사회적 자유가 근대국가의 형성기인 영국 빅토리아왕조 시대에는, 밀의 표현을 빌리자면, 비록 곧 다가올 미래에는 핵심적 문제로 인식될 것이었기는 하나 당시로서는 여전히 거의 공개적으로 표명되지도 다루어지지도 않았다. 그러면서도 실제적으로는 그 시대의 모든 중요한 논쟁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잠재적 문제로서 이를 해결하는 것이 최우선의 과제였다. 말하자면 밀이 다루고자 했던 자유는 비록 책임성, 타인에 대한 고려, 공리(公利) 등 그것이 내포하는 한계 혹은 방향성을 도외시한 것은 아니지만 주된 관심은 어디까지나 어떻게 하면 사회나 국가의 통제 혹은 다수의 폭력으로부터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의 자유에 대한 생각을 요약하면 대개 아래와 같다.

 

― 인간은 각자에게 최대한의 자유가 주어졌을 때 스스로가 가진 잠재적 역량이 최대한 발현되어서 자신뿐만 아니라 최대 다수를 위한 최대 행복의 실현이라는 결과를 가져 올 수 있다. 그래서 각자가 원하는 방식대로 자신의 삶을 꾸려갈 수 있어야 한다.

― 사상, 표현의 자유, 토론을 통해 올바른 견해는 살아남고 잘못된 견해는 도태된다. 그래서 비록 잘못된 견해라도 이를 원천적으로 봉쇄하기보다는 허용함으로써 적극적인 토론을 통해 걸러내는 것이 바람직하다.

― 사회나 국가는 공동선을 지향하는 속성이 있다(이는 헤겔의 절대정신을 연상케 한다). 하지만 그것이 아무리 숭고한 것처럼 보이더라도 거기에는 독선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참여와 토론을 통해 방향이 점검되고 생각이 걸러져야 한다.

― 보다 온전한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구성원들의 지적 역량이 어느 정도 성숙되어야 한다. 그렇다고 미성숙함을 이유로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독재가 합리화되는 것은 아니다. 교육과 토론이라는 민주적 과정을 통해 사회는 성숙되어 간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더 이상 그 진실성이 다투어지거나 의심의 대상이 되지 않는 원칙들이 쌓여 가면 인류의 복리는 그만큼 증대한다.

― 그래서 전 인류 가운데 단 한 사람이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에게 침묵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 타인에게 직접적인 폐해를 가져오지 않는 한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거나 처벌해서는 안 된다. 개인 혹은 공동체가 타인의 자유를 제한할 수는 유일한 경우는 자기방어를 위해 불가피할 때 만이다. 하지만 자유는 그 자체로서 존중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공리(인류 전체의 항구적 이익)를 위해 존중되어야 한다.

 

이상이 밀이 자유에 대해 가졌던 생각의 대강이며,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다양한 정치적, 사회적 자유의 토대를 이루고 있다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문제는, 당시야 자유의 시대적 요청이 정치권력으로부터의 자유였기 때문에 그랬겠지만, 지금도 여전히 자유에 관한 논의가 그것이 내포하는 내면적, 정신적, 인격적 측면을 포괄하는 단계로 나아가지 못하고 ‘자유론’의 단계에 머물러 있다는 점이다. 이것이 바로 자유에 대한 새로운 성찰이 필요한 이유이다.

 

자유의 다양한 의미

흔히 자유를 사전적 의미로만 이해하여 ‘외부로부터의 강제나 구속이 없는 상태’ 혹은 ‘각자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상태’라는 식으로 정의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이러한 자유는 사회 이전 자연 상태에 머물던 인간이 누렸을 것으로 가정할 수 있는 자유의 개념일 뿐, 현실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자유다. 왜냐하면 이러한 원초적 의미의 자유는 결국 따지고 보면 그저 약육강식의 정글 법칙을 의미하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어차피 자유는 사회를 전제로 한 것일 수밖에 없으며, 일정한 조건을 전제로 한 것일 수밖에 없다. 그것이 노예제 사회든, 전제군주제 사회든, 전체주의 사회든, 민주주의 사회든. 그래서 사르트르식으로 이해한다면 노예 상태도 생존이라는 최소한의 자유를 누리기 위한 하나의 실존적 선택일 수밖에 없을지 모른다. 결국 자유의 개념은 ‘어떤 조건’ 하에서 누리는 ‘어떤 내용’의 자유인가로 귀결될 수밖에 없으며, ‘외부로부터의 강제나 구속이 없는 상태’ 혹은 ‘각자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상태’라는 식의 개념은 이를 향한 인간의 원초적 갈망을 표현한 것에 불과할 것이다.

따지고 보면 자유는 구속의 부재와 같은 외부적 조건에만 의존하는 소극적인 것이 아니라 각자의 내면적, 정신적 상태 혹은 성숙도에 의존하는 적극적인 성격의 것이기도 하다. 정치체제로서의 자유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정착된 오늘날에 있어서 자유의 개념은 오히려 이러한 외부적 조건을 쟁취하기 위한 항의적, 투쟁적 정치이념으로서의 소극적 자유라기보다는 철학적, 윤리적, 종교적으로 좀 더 고양된 정신적 상태, 혹은 진선미(眞善美)와 같은 다른 가치를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우리가 추구하는 최고의 가치로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자유를 이렇게 우리가 궁극적으로 완성해야 할 가치 혹은 도달해야 할 정신적 상태로 이해한다면 자유의 역사는 자유민주주의의 체제로 완성된 것이 아니라 이제부터가 시작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 한국사회가 가지고 있는 많은 정치적 갈등이나 사회적 문제도 이러한 의미의 자유로 한 걸음 더 나아가지 못한 데서 비롯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자유의 주요 구성요소들

국가, 민주, 법치 : 약육강식의 내부적 무질서와 외부의 침략으로부터 구성원들을 보호할 수 있는 힘을 가진 국가의 존재는 자유의 첫 번째 조건이다. 국가를 떠나서 자유는 존재할 수 없다(플라톤, 루소, 헤겔). 그래서 설사 민주주의 체제가 아닌 노예제나 전제군주정이라 하더라도 백성을 지켜줄 힘이 있다면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자연 상태나 외침에 무방비로 노출된 허약한 국가보다는 나을 것이다.

임진왜란을 소환해 보자. 히데요시의 10만 왜군이 부산 앞바다에 도착한 것은 1592년 음 4월 13일, 그로부터 정확히 20일 후인 음 5월 3일에 그들은 한양에 도착했다. 400km가 넘는 거리를 단지 도보로만. 왕과 고을 수령들은 모두 도망가고 백성들은 사무라이 군대의 조총과 칼날 앞에 무방비로 내팽개쳐졌다. 9백만 인구 중 수십만이 죽거나 코를 베였고, 젊은 남녀 수만 명이 포로로 끌려가 포르투갈 상인들에 의해 전 세계에 노예로 팔려 갔다. 이게 도대체 제대로 된 나라였던가? 결국 백성들이 스스로 일어날 수밖에 없었고 거기에는 신분이나 정치적 견해의 차이 따위가 문제 될 여지가 없었다. 임진왜란과 구한말에는 이들을 의병이라 불렀고, 일제하에서는 독립군이라 불렀다. 소위 빨치산(Partisans)이다. 서인(西人)과 동인(東人)이 함께했고, 양반과 상놈이 함께 싸웠다. 왕정을 옹호하는 이들도 있었고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이들도 있었을 것이다. 자유경제를 신봉하는 이들도 있었고 공산주의의 이상을 추구하는 이들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 모두의 공통된 목표는 오직 나라를 구하거나 되찾는 일이었다. 자유의 최후 보루가 나라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어쨌든, 비록 반쪽으로 쪼개진 나라지만 우리는 나라를 되찾았고, 지금은 100년 전 혹은 400년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강한 국력으로 이를 지켜갈 수 있게 되었다.

문제는 어떤 형태의 체제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자유?)을 위해 가장 좋을 것인가이다. 이런 문제의식이 고대에도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이에 대한 본격적 관심이 일어난 것은 근대 시민혁명기에 이르러서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수많은 정치사상가나 철학자들(로크, 흄, 몽테스키외, 루소, 밀, 헤겔, 마르크스)의 화두는 결국 자유였으며, 그들의 관심은 어떤 정치체제가 구성원들의 자유를 보장하는 데 최선일까 하는 것이었다. 비록 일부 나라에 아직 전제 왕정이나 독재권력이 남아 있지만 이제 지구상 대부분의 나라에서 민주주의와 법치주의가 형식적으로나마 완성되었다. 그래서, 만약 근세의 자유주의 사상가들이 오늘날의 세계를 본다면 아마도 프란시스 후쿠야마가 말한 ‘역사의 종언’이라는 선언에 동의할지도 모른다. 물론 지난 200년간의 역사적 경험을 통해 자유에 관한 자신들의 당초 생각을 다소 수정했을 수는 있겠지만.

 

책임의식, 사명감, 시민정신 등 : 비록 국가, 민주, 법치라는 자유를 위한 기본적 틀이 갖추어졌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또 원만히 운용되기 위해서는 그 구성원들이 갖추어야 할 도덕적 자질이랄까 덕성이 또한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아무리 민주적 절차에 의해 합리적 법이 만들어져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법과 제도를 악용하고 회피하며 자신의 이익과 편의를 추구하고 타인의 자유를 훼손하는 무리가 끊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일반 시민들에게만 해당되는 얘기가 아니라 지도자들에게도 여전히 해당되는 얘기이다.

앞서 임진왜란을 잠시 되돌아보았지만, 최근에 우리 사회에서 일어난 일련의 주요 사건들(삼풍백화점 붕괴, 성수대교 붕괴, 세월호 침몰, 이태원 참사, 세계잼버리대회 파행 등)의 원인과 처리 과정을 보면 공직자들의 책임 의식과 사명감이 우리의 안전과 자유를 위해 얼마나 중요한가를 잘 알 수 있다. 어쩌면 이 문제는 한국사회가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된 자유로 나아가기 위해 반드시 극복해야 할 과제일 것이다. 일반 시민들도 마찬가지이다. 휴가철이 끝나면 해변이나 계곡에는 피서객들이 버린 쓰레기들이 넘쳐나고, 시골 방방곡곡 산천과 길가에는 주민들이 몰래 갖다 버린 쓰레기들이 즐비하다. 자동차 뒷유리창에 ‘초보운전’ 또는 ‘아이가 타고 있어요’를 붙인 채 고속도로의 1차선을 정속으로 주행하는 차량들(정말 초보운전인지 아이가 타고 있는지 모르지만), 네거리 모퉁이나 좁은 도로의 갓길 주차로 수많은 사람에게 불편을 끼치는 사람들 등 ‘이 편한 세상’에 내 편한 대로 나의 이익을 위해 살면 되지 달리 뭐 중요한 게 있느냐는 식이다. “네 의지의 격률이 보편적인 입법원칙에 합당하도록 행동하라!”는 철학자(Kant)의 가르침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그저 꼰대 철학자의 공허한 외침에 불과하다. 그래서 철학자는 한마디 덧붙인다. “책임을 지지 않으면 자유도 없는 거야(He who is not responsible is not free).” 라고.

 

배려, 관용, 희생, 참여, 용기 등 : 그렇다고 자유는 법으로 금지되지 아니한 행위는 얼마든지 허용되고 법으로 금지된 행위는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는 식의 차가운 법치주의나 사명감, 책임감, 시민정신 등 딱딱한 의무에로만 환원될 문제는 아니다. 밀(Mill)의 표현대로 한 사회가 보다 높은 단계의 지적, 도덕적 수준에 도달하여 그 진실성이 더 이상 다투어지거나 의심되지 않는 보편적 원칙을 많이 쌓을 수 있으려면 구성원들의 끝없는 참여와 토론 등 노력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서는 배려, 관용, 희생과 같은 일정 수준의 인격적 덕목이 필수적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밀이 생각하는 것만큼 그리 착하거나 진지하지도 않으며 그들의 생각이나 행동의 기준은 여전히 자신의 이익이나 편의에 두어져 있을 뿐 공익을 위한 참여에는 냉소적인 것이 현실이다. 어쩌면 이러한 경향은 밀의 기대와는 달리 물질적으로 풍요한 사회로 가면 갈수록 더 심해지면 심해졌지, 그 반대가 아닐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자유의 또 다른 관건은 어떻게 하면 그 구성원들로 하여금 한 단계 더 높은 자유로 나아가기 위한 인격적 덕목을 갖추도록 유도할 수 있을 것인가이다. 이와 관련하여 밀의 삶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주지하다시피 존 스튜어트 밀은 경제학자 제임스 밀(James Mill)의 아들이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에 의해 천재교육을 강요(?)받았던 존 스튜어트 밀은 20세 무렵에 이르러 과연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것이 가능할까를 자문하면서, 이것이 불가능할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고는 자살을 고려할 정도로 심한 우울증에 빠졌다. 그는 스스로 고백하기를 여기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은 윌리엄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의 시를 통해 (사물의) 아름다움이 타인에 대한 자비심과 삶의 즐거움을 가져다줄 수 있음을 깨달으면서라고 말했다. 밀은 이때가 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으로서 아버지와는 다른 그의 많은 생각들은 이런 확장된 즐거움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말했다.

밀의 자유에 대한 생각이 배려, 관용, 희생 등의 덕목을 바탕으로 하고 있을 것이라는 점은 그의 아내인 해리엇 테일러(Harriet Taylor)와의 관계를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그가 40대 중반의 나이에 결혼한 해리엇(Harriet)은 본래 존 테일러(John Taylor)라는 사람의 부인이었는데, 밀은 20대 시절부터 이들 부부와 가까이 지내면서 해리엇과는 그녀 남편의 동의하에 서로 친구로서 둘만의 여행을 할 정도로 특별한 사이였던바, 우리는 이들의 관계를 빅토리아 시대의 차가운 윤리적 관점에서 바라보기보다는 배려, 관용, 희생이라는 자유의 확장된 덕목으로 이해할 수 있다. 《자유론》 헌정에서 밀은 자신의 자유에 관한 생각의 많은 부분이 오랜 시간 친구로서 지내다 남편의 사후 자신의 아내가 되었던 해리엇의 영향을 받았음을 고백하고 있다.

 

성찰, 알아차림, 통찰 : 밀의 자유에 관한 생각의 출발점이 어떻게 하면 권력 혹은 다수의 폭력으로부터 개인의 자유를 지킬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면, 그 귀결은 어떻게 하면 개인의 자유가 공동선으로 연결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이와 관련해서 아마 가장 많이 소환되는 철학적 가르침은 칸트의 “네 의지의 격률이 보편적 입법원칙에 합치되도록 행동하라”라는 것이리라. 하지만, 스피노자(Spinoza)가 적절히 간파했듯이, 인간은 이성적 판단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존재인 동시에 온갖 종류의 탐욕, 편견, 무지 등 문제적 정서(emotions)에 사로잡힌 노예와 같은 존재이기도 하다. 개인들에게 정치적 자유를 부여한들 그들이 이러한 정서의 노예가 되어 있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어쩌면 전제군주보다도 이러한 부정적 정서가 더 심한 폭군으로 군림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래서 민주주의가 제대로 기능하려면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되 어떻게 하면 그 구성원들이 이러한 부정적 정서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만 한다. 아마 이는 지금 우리 한국의 정치 상황이나 사회현실에 대한 매우 적절한 지적일 것이다. 지역 정서, 학벌 정서, 외모 정서, 성차별 정서, 장유(長幼) 정서, 동물학대 정서, 식민지 정서, 빨갱이 정서, 좌우대립 정서, 강남강북 정서, 어쨌든 잘살자 정서, 어쨌든 성공 정서 등 온갖 편견과 궤도를 조금씩 이탈한 생각이 난무하는 것이 한국사회의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의 생각과 주장은 전적으로 정당하며 이와 반대되는 상대방의 생각과 주장은 잘못된 것으로 반드시 배척되어야 한다며 치열하게 싸우고 있다.

이제 우리의 자유를 위협하는 적은 더 이상 전제군주나 독재자 등 외부의 권력이 아니다. 어쩌면 우리의 자유를 위협하는 가장 큰 적은 우리 자신의 근시안과 무지와 말초적 탐욕일 것이다. 그것이 때로는 다수의 폭력으로 나타날 수도, 때로는 소수의 어깃장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끝없이 타인의 잘못을 찾아내어 이를 비난하면서 실은 공동체의 이익보다는 사익이나 파당의 이익을 추구하고 있지만 정작 스스로는 이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 다수결이나 자유경쟁의 이름으로 이를 합리화하면서.

그래서 선각자는 말한다. ‘네가 잊고 있는 것을 내게 말해주면 나는 네가 어떤 인간인지, 어떤 오류에 빠져 있는지를 말해주겠다’라고. 진정한 자유를 위해 이제 우리는 우리가 정작 잊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성찰하는 노력을 기울일 때가 되었다. 내 생각과 내 주장의 원천을, 언제 닥칠지도 모를 죽음에 대한 대비를, 어쩌면 인류를 파멸시킬지도 모를 핵전쟁의 위험을, 지금과 같은 삶의 지속이 초래할 환경 위험을.

 

자유 : 보살(菩薩)의 길

밀이 적절히 지적했듯이 개인의 자유는 그 자체로서 존중되어야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공리에 부합하는 것이어야 한다. 공리를 벗어난 자유는 진정한 자유가 아니다. 불교적으로 말한다면 중생의 자유가 아니라 보살의 자유여야 한다.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重重無盡緣起) 이 우주 법계에서 개인의 자유를 우주와 분리하여 생각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약육강식의 자연 상태에서 벗어나 노예와 신민으로서의 삶을 거쳐 지금은 모든 사람이 자유를 구가하는 시대에 와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주장하는 자유는 어느 정도의 알음알이에 의해 제어되는 끝없는 욕망의 자유에 불과하다. 좀 더 나은 자유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책임 의식, 사명감, 시민정신도 요구되고 참여, 용기, 희생, 배려, 관용의 정신도 필요하다. 하지만 자유에 수반되어야 할 이러한 덕목들이 단지 윤리적, 종교적으로 강요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진정한 자유의지가 되려면 거기에는 끝없는 성찰, 알아차림, 통찰이 함께해야만 한다. 수처작주(隨處作主) 입처개진(立處皆眞)이랄까.

 

지금 우리가 누리는 자유는 어디쯤 와 있을까? 어쩌면 자유에 관한 논의는 지금부터가 본격적인 시작일지도 모르겠다. ■

 

이규화
동국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한국토지공사 등에서 직장생활을 하다 30대 후반의 나이에 프랑스로 유학하여 엑스마르세이유(Aix-Marseille)대학에서 범죄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동국대학교 강사, 대한불교진흥원 사무국장 등을 역임하고, 지금은 고향 영천에서 선친이 남긴 사찰을 지키며 지역 정체성을 찾는 일과 환경보존 활동 등으로 불교를 실천하는 노력을 이어가고 있다.  

저작권자 © 불교평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