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경계 앞에서

정신은 그것이 무엇이든 마음이든 관념이든 필름에 찍히지 않는다. 영화는 물질의 세계를 기록한다. 불교영화는 마음의 영역일까, 물질의 영역일까?

 

2. 탈속과 세속의 경계: 〈마음의 고향〉 〈동승〉

1949년에 개봉한 〈마음의 고향〉은 최초의 불교영화로 불리는 작품이다. 영화를 연출한 윤용규 감독은 6 · 25 전쟁 이후 북한으로 넘어갔고, 오랫동안 잊혔던 이 영화는 제작자인 이강수가 보관하고 있던 16mm 필름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영화는 1950년 한불 영화 교류로 프랑스로 출고되어 한국에는 필름이 남아 있지 않았다. 1993년 4월 이강수가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던 16mm 필름을 영상자료원에 기증했고, 2005년 일본 국립필름센터에서 35mm 네거티브 필름이 발견되었다. 이 영화는 1993년 프랑스 퐁피두 센터에서 열린 한국영화 특별전에서 상영되었다. 영화의 각본은 함세덕의 희곡 〈동승〉을 곽일병이란 이름으로 이강수가 각색했고, 촬영은 〈자유부인〉(1956)으로 잘 알려진 한형모 촬영감독이 맡았다.

 

영화는 산사의 풍경으로 시작한다. 카메라가 왼쪽으로 패닝 하면 사찰을 배경으로 솟아 있는 산들이 보이고, 다시 오른쪽으로 패닝 하면 사찰의 전각들이 보인다. 흑백 필름에 담긴 사찰의 전경은 소복 입은 여인처럼 깊고 다소곳하다. 젊은 스님이 목탁을 두드리며 도량을 돌면 어린 스님이 범종을 쳐 새벽을 깨운다. 영화는 새벽 예불과 함께 시작한다. 예불을 드리는 주지 스님 한편에 어린 스님 ‘도성’이 깜빡 졸고 있다. 새벽 예불이 끝나면 도성의 바쁜 하루가 시작된다. 도성은 자그마한 몸으로 마당을 쓸고 물을 긷고 석등의 호롱을 닦는다. 원작인 희곡 〈동승〉에서 어린 스님의 법명은 ‘도념’이고 나이는 14세이다. 14세면 중학생 나이이니 지금으로 치면 사춘기에 접어들 시기이나, 영화에서는 대략 10세 안팎으로 나온다. 그러니 조금 더 애틋해 보인다. 반면 원작의 굴곡인 성에 대한 호기심은 희석되었다. 가령 희곡에서 어린 도념이 서울 아씨를 훔쳐보는 장면의 의미는 탈색되는 것이다. 서울 아씨를 선회하는 여성에 대한 호기심이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으로 환유한다. 이와 동시에 사춘기 소년이 떠맡는 노동의 성격과 질량도 나이가 내려가면서 변하게 된다. 노동과 성은 뒤로 퇴각하고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전경을 차지한다. 또 하나, 희곡에는 등장하지 않은 엄마가 영화에는 나온다는 점도 ‘여성’에서 ‘모성’으로 영화가 시선을 옮겼다는 점을 확인해 준다.

어린 도성은 엄마의 얼굴을 모른다. 세 살에 절에 버려져 주지 스님이 키웠다. 도성의 엄마는 일찍이 부모를 잃고 절에 맡겨져 스님으로 살다가 사냥꾼과 눈이 맞아 도성을 낳았다. 이후 다시 남자를 만나 도성을 절에 남겨두고 서울로 떠났다. 그러니 도성은 얼굴도 기억하지 못하는 엄마를 그리워하는 것이다. 얼굴도 모르는 엄마를 그리워한다는 것은 애초에 잃은 기억이 없는 대상을 그리워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상실의 기억이 없으니 상실도 없는 것이다. 영화는 잃어버린 적이 없는 대상을 찾는 이야기이다. 도성이 있는 절에 아이의 제사를 지내러 온 서울 아씨가 나타난다. 아씨는 고급 털 부채를 쥐고 있다. 털 부채를 보고 마음이 뺏긴 도성은 엄마에게 털 부채를 만들어주기 위해 산비둘기를 잡는다. 희곡에선 서울 아씨가 하얀 토끼털을 두른 것으로 묘사되었기에 토끼를 잡는 것으로 설정되었다. 이 설정은 자연스럽게 도성의 생부가 사냥꾼이라는 사실을 환기한다. 서울 아씨는 도성에게 생모의 환상과 생부의 상징을 모두 지닌 인물로 비치는 것이다.

영화에는 세 명의 아버지와 두 명의 어머니가 나온다. 사냥꾼인 생부와 대리 아버지 격인 주지 스님과 절에 나무를 길어 나르는 초부가 아버지의 위치에 있다면, 생모와 서울 아씨는 어머니의 위치에 있다. 공간으로는 세 명의 아버지는 속세와 떨어진 산에 있다면, 두 명의 어머니는 속세의 중심인 서울에 있다. 그러나 도성에게는 이 산속의 삶이 일상이고 산 너머의 삶은 가상이기에, 아버지의 장소는 일상이고 어머니의 장소는 가상이다. 어머니의 장소가 가상인 이유는 애초 도성에게는 ‘마음의 고향’이 없기 때문이다.

도성에게 그리움은 고향을 떠나온 자의 향수가 아니라 고향이 없는 자의 향수이다. 부재의 장소에 대한 향수이다. 서울이라는 장소는 미지의 공간이며 어머니가 있는 장소이다. 어머니라는 미지의 인물이 있는 미지의 장소이나 도성에게는 또한 떠나온 장소이며 돌아가야 할 장소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미래의 옷을 입은 과거의 공간인 셈이다. 서울 아씨 역시 마찬가지로 미래의 약속이면서 과거의 안식이다. 결국 소복을 입고 털 부채를 손에 쥔 서울 아씨는 남성의 상징을 쥔 여성이며, 서울이라는 미래를 약속하는 과거의 어머니이다. 결국 이 인물은 부재하는 존재이며 이 인물이 약속하는 장소도 부재하는 공간이다. 도성은 어머니의 땅으로 발을 내디딘다고 여겼지만 결국 그 장소는 허공일 뿐이다. 어쩐지 이후에 펼쳐질 드라마는 〈조신의 꿈〉과 같다.

영화의 마지막은 예상하듯 절을 떠나는 동승의 모습이다. 산등성이 너머 미지의 땅이 보이고 동승은 미소를 지으며 산길을 내려간다. 익스트림 롱숏으로 잡은 화면 속에 굽이치는 길을 따라 걸어가는 도성이 저 멀리 보인다. 그러나 에필로그보다 인상적인 장면은 이전에 보이는 장면들이다. 영화의 첫 장면에 나왔던 장소들이 도성이 부재한 광경으로 다시 등장한다. 도성이 없는 절의 풍경은 쓸쓸하고 고적하다. 미지의 세계를 향하는 도성의 얼굴에 미소가 비치지만 아침 공기는 맑아서 더 시리다. 욕망이 있기에 금지가 따르는 것이 아니라 금지가 있기에 욕망이 생기는 것이다. 애초에 금지가 없다면 욕망도 생기지 않는다. 동승에게는 엄마가 금지되었기에 엄마에 대한 욕망은 그만큼 커지는 것이다. 주지 스님은 금지의 작인이고 엄마는 욕망의 대상이다. 엄마에 대한 욕망은 미지의 대상으로, 그리고 여성에 대한 욕망으로 자연스레 전치된다. 따라서 도성에게 ‘엄마’라는 기표는 미지라는 기의와 미래라는 기의와 과거라는 기의를 모두 포섭하는 것이다. 도성은 아버지의 땅에서 어머니의 땅으로, 혹은 남성들의 땅에서 여성들의 땅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아이가 어머니의 품에서 아버지의 법으로 자리를 옮기는 것이 오이디푸스의 궤적이라면, 이 이야기는 아버지의 법에서 어머니의 품으로 자리를 옮기는 역오이디푸스의 궤적인 셈이다. 그러나 이것 역시 전도된 형태이기는 하나 성장의 과정이다.

주경중 감독은 이 이야기를 2002년에 〈동승〉으로 다시 만들었다. 〈동승〉의 어린 스님은 함세덕의 원작처럼 ‘도념’이고 나이는 〈마음의 고향〉의 도성과 비슷한 또래이다.

〈동승〉은 〈마음의 고향〉에 비해 젊은 스님과 초부의 비중이 커졌다. 〈동승〉에서 젊은 스님은 코믹한 이미지의 김민교가 연기하고 초부는 〈만다라〉에서 지산 스님을 맡았던 전무송이 연기한다. 주지 스님은 김기덕의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에 노스님으로 나왔고 〈오징어 게임〉으로 알려진 오영수가 연기한다. 영화에서 주지 스님은 〈마음의 고향〉의 근엄한 이미지가 아니다. 때론 유쾌하고 자애롭다. 영화는 이들 공동체를 유사 가족처럼 다루고 있다. 젊은 스님인 정심 스님은 큰형 같고 초부는 아버지 같다. 도념에게는 두 명의 아버지와 형이 있는 셈이다. 영화에서 엄마는 등장하지 않는다. 동시에 서울 아씨의 비중도 줄었다. 모성의 축은 동성 가족의 축으로 이동했다. 더불어 모성의 모티프는 후경으로 물러나고 성의 모티프가 전경에 부상했다. 이를 입증하듯 포스터에 쓰인 문구도 “그들은 모두 총각이었다!”이다. 이 문안 배경에 세 명의 스님이 나무 목욕통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웃고 있다. 영화에는 함세덕의 원작에도 윤용규의 〈마음의 고향〉에도 없는 수연이라는 또래 여자아이가 등장한다. 이 소녀는 모성의 기표인 동시에 여성의 기표이다. 영화에서 서울 보살과 수연은 모성을 품은 여성이다. 서울 보살이 소복으로 갈아입는 장면을 도념이 훔쳐보는 장면에서 여자의 벗은 다리가 보인다. 산길을 걷는 수연의 다리를 도념이 쳐다본다. 카메라는 서울 보살과 수연의 다리를 바라보는 도념의 시선을 강조하기 위해 이 인물들의 상반신을 자르고 하반신에 앵글을 고정한다. 도념에게 여성이 있는 장소는 미지의 공간이다. 서울 보살이 잠시 머무르는 산방도 여성이 머물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에겐 미지의 공간이 된다. 미지의 공간은 매혹과 위협의 장소가 된다.

수연의 집에 갔을 때 도념은 낯선 사물들과 마주한다. 그녀의 방에는 건반과 오르골이 있고, 여기저기 인형들이 놓여 있다. 도념은 건반을 쳐보고 오르골을 켜본다. 낯선 장소의 사물들이 시각과 청각을 자극한다. 도념은 거울 앞에서 자신의 깎은 머리를 쓰다듬는다. 벽에는 마리아상이 걸려 있다. 수연은 도념에게 닭고기를 권한다. 미지의 공간에서 도념은 유혹과 금기를 경험한다. 수연은 도념에게 서울로 이사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얘기한다. 미지의 공간에서 마주하는 낯선 사물과 금기의 음식, 게다가 예정된 이별까지, 어린 실존은 흔들린다. 박찬욱의 〈아가씨〉에 나오는 히데코의 화면 밖에서 들리는 소리를 역으로 인용하자면, 수연은 나를 구원하러 온 파괴자이다. 파괴는 구원은 조건이다. 성(聖)과 속(俗)의 경계 혹은 성(聖)과 성(性)의 경계는 무너진다. 이 장면이 수연이 속(俗)의 세계로 도념을 불러들인 장치라면, 정심이 계곡에서 빨래하는 장면은 성(性)이 침입하는 장치이다. 정심과 도념은 계곡에 있고 계곡 아래 젊은 여자들이 다가온다. 정심은 입산 금지라고 말하고 여자들은 못 알아듣는다. 정심은 계곡물에 빠지고 여자들은 수영 금지 아니냐며 웃는다. 자연히 산은 성(聖)의 세계를 유비하고 계곡은 성(性)의 세계를 유비한다. 공간의 경계가 무너지며 인식의 경계도 위협받는다. 두 에피소드는 정심과 도념의 도시 구경으로 연결되고 결국 두 인물이 절을 떠나는 것으로 서사는 마무리된다. 파괴는 구원의 조건이다. 충분조건이 아닐 뿐이다.

 

3. 순응과 저항의 경계: 〈만다라〉 〈아제아제 바라아제〉

저 멀리 버스가 다가와 검문소 앞에 멈춘다. 군인이 버스에 올라 승객들의 신분증을 검사한다. 버스 안에 법운과 지산이 타고 있고, 신분증이 없는 지산을 군인들이 연행한다. 지산은 좋은 중이 못 돼서 승려증이 없고, 시민이 못 돼서 주민증이 없다고 얘기한다. 법운이 신원을 보증하고 둘은 검문소를 나온다. 그들 앞에는 황량한 잿빛 겨울 길이 길게 뻗어 있다. 1981년에 상영된 〈만다라〉는 1980년의 광주가 차가운 겨울 풍경 위로 유령처럼 배회한다. 법운은 안성기가 연기했고 지산은 전무송이 연기했다. 영화는 법운과 지산의 만행 기록이다. 임권택은 김성동의 소설 〈만다라〉를 영화로 옮기면서 시대의 아픔을 풍경 속에 새겨넣었다. 그들이 걷는 길은 구도의 길이면서 시대의 길이다.

만행길에 우연히 만난 법운과 지산은 길을 따라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한다. 시대의 상처를 안은 풍경을 배경으로 두 인물의 로드무비가 펼쳐진다. 둘의 과거는 플래시백으로 전달된다. 법운은 어릴 적 어머니가 자신을 버리고 떠난 아픈 유년의 기억이 있다. 대학생이 된 법운은 사귀던 여자를 남겨두고 출가한다. 출가한 지 6년이 지났건만 세상은 여전히 어두울 뿐이다. 지산은 수행 중 절에 온 젊은 여자를 만나 그녀와 몸을 섞는다. 그녀와 술집과 여관을 전전하던 지산은 주색으로 정신과 육체를 소진한다. 갈 곳이 없는 그녀는 사창가의 창녀가 되고 지산은 그녀를 영혼의 동반자로 삼는다. 영화는 두 수행승의 대비를 통해 각성과 연민의 드라마를 펼친다. 법운이 버리고 떠나는 길을 택한다면 지산은 껴안고 같이 가는 길을 택한다. 결국 둘의 문제는 고통을 대하는 태도와 방식이다.

영화는 견성과 성불을 외피로 두르고 있지만, 그 안에는 타인의 고통이라는 문제가 자리를 틀고 있다. ‘병 속의 새를 꺼낼 수 있는가’라는 화두를 안은 법운의 길이 개인의 각성이라면, 일그러진 부처상을 조각하는 지산의 길은 타인의 연민이다. 견성이 완성이 아니라면 영화는 두 인물의 좌절과 실패의 기록만은 아니다. 견성은 미래의 약속이 아니라 과정의 실현이기 때문이다. 니체가 비판했듯 인간의 비극적 위대함은 완성이 아니라 과정에 있고, 비약이 아니라 추락에 있기 때문이다.

지산은 숭고한 추락을 택한다. 술집에서 밤새 술을 마신 지산을 법운이 찾아 나선다. 지산은 석탑 앞에 가부좌를 튼 채 얼어붙은 시체로 발견된다. 지산을 지게에 지고 법운은 산 깊은 암자로 향한다. 법운은 지산을 선방에 앉히고 암자에 불을 지른다. 눈 덮인 산에서 지산의 다비가 행해진다. 법운은 지산이 남긴 일그러진 부처상을 사창가의 그녀에게 전한다. 그리고 지산은 그답게 갔다는 말을 남긴다. 법운은 서울에 와서 자신을 버린 어머니를 만난다. 세상을 부정했던 법운은 이제야 세상을 긍정할 수 있게 되었다. 지산은 병 속의 새를 꺼내기 위해 병을 깨뜨렸고, 법운은 새를 죽였다. ‘통곡 같던 염불’을 외던 지산은 그렇게 세상을 떠나고 법운은 바랑을 지고 길게 뻗은 황톳길을 걷는다.

〈아제아제 바라아제〉와 〈만다라〉의 개봉 시기는 8년의 차이가 난다. 〈만다라〉는 광주학살 1년 후에 개봉한 영화이고, 1989년 작품인 〈아제아제 바라아제〉는 시민 저항 2년 후에 개봉한 영화이다. 임권택 감독이 비록 코리안 뉴웨이브 감독군으로 분류되진 않지만 1980년대 한국 영화를 이끌었던 시대의 흐름을 그도 비켜나진 않았다. 〈만다라〉에서 시대의 비극을 음영에 새겨넣었던 임권택은 이 영화에서 역사와 시대를 정면으로 응시한다. 영화의 소설 원작인 〈아제아제 바라아제〉를 쓴 한승원이 각본도 맡았다. 〈만다라〉가 대비되는 두 비구를 통해 시대의 아픔을 그렸다면, 〈아제아제 바라아제〉는 대비되는 두 비구니를 통해 역사의 아픔을 증언한다. 영화에는 대비되는 두 인물로 순녀와 진성 스님이 나온다. 순녀는 강수연이 연기했고 진성 스님은 진영미가 연기했다. 〈만다라〉에서 지산에게 중량이 실렸던 것처럼 여기서도 당연히 감독의 시각을 반영하듯 순녀에게 무게가 실려 있다. 〈만다라〉와 구도의 차이는 〈아제 아제 바라아제〉에서는 두 인물이 교차하지 않고 순녀와 진성의 서사가 평행으로 진행된다는 점이다.

영화에는 진성의 전사는 나오지 않는다. 극의 공백을 통해 짐작하자면 진성은 아마도 중산층 가정에서 자란 예민한 아이가 아니었을까? 반면에 순녀는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당돌하고 자존심 센 인물이다. 순녀는 출가 전에 두 남자를 만나고 절을 떠나 세 남자를 만난다. 한 남자는 순녀의 생부로 이제는 병들어 지친 중년의 스님이고, 다른 남자는 순녀의 고등학교 시절 국어 교사인 시인 현종이다. 순녀의 생부는 월남전 장교로 파병되었다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다. 이 인물은 〈만다라〉에서 지산 역을 맡았던 전무송이 연기했다. 〈만다라〉의 지산, 〈동승〉의 초부, 〈아제아제 바라아제〉의 생부, 전무송이 연기한 이 인물들은 모두 쓸쓸한 뒷모습으로 기억된다. 순녀의 첫 번째 남자가 생부라면 시인 현종은 순녀의 두 번째 남자이다. 현종은 광주에서 죽은 아내를 가슴에 넣고 사는 시인이다. 법명이 청화인 순녀는 자살하러 암자에 숨어든 빨치산 자식을 구한 일로 억울하게 절에서 쫓겨난다. 그녀는 그와 결혼해 아이를 갖지만 남자는 탄광에서 죽고 아이마저 사산한다. 이후에 만난 남자도 죽고, 마지막에 병원에서 만난 남자마저 죽는다. 한반도 비극의 현대사가 나열된다. 영화는 비약과 추락의 이중주를 연출한다. 정신의 비약과 육체의 추락을 비틀어, 마침내 진성의 정신적 비약은 추락하고 순녀의 육체적 추락은 비약한다. 두 인물의 지주인 노스님이 죽고 다비 의례가 끝난 후 순녀는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스님의 뼈를 수습한다. 진성은 그 허망한 짓을 왜 하느냐고 비판하고 순녀는 떠돌다 머무는 곳에 이 뼈들을 묻고 그곳에 탑을 세우겠다고 말한다. 진성이 ‘슬픈 미망’이라 대꾸하자 순녀는 어떻게 미망을 뒤집어쓰지 않고 중생의 고통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겠느냐고 응대한다. 떠나는 순녀를 보고 진성은 공허한 문장만을 혼잣말로 되새긴다. 미소 띤 얼굴로 시장통 속을 걸어가는 순녀로 영화는 끝난다. 오염의 장소에서 피는 연꽃처럼 순녀는 무리 속으로 사라진다.

 

4. 가상과 현실의 경계: 〈꿈〉 〈화엄경〉

배창호 감독의 1990년 영화 〈꿈〉은 《삼국유사》에 실린 조신의 설화를 바탕으로 이광수가 쓴 소설 〈꿈〉이 원작이다. 이광수의 소설은 신상옥 감독에 의해 1955년과 1967년에 두 번 영화로 만들어졌다. 김지운 감독의 2005년 영화 〈달콤한 인생〉 역시 이 모티프를 후경에 깔고 있다. 영화에서 선우(이병헌)는 희수(신민아)를 만나 끝 모를 나락으로 떨어진다. 영화의 마지막, 바닥에 쓰러져 피 흘리는 선우 위로 레스토랑 천장에 장식된 나무에서 잎들이 떨어진다. 이 인공의 공간에서 선우는 그에게 닥친 부조리한 비극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쓸쓸한 미소를 남기고 죽는다. 현실의 비극은 처참하지만, 꿈속의 비극은 달콤하다. 영화를 보는 일은 달콤한 비극 속으로 걸어가는 것이다. 영화의 장치는 꿈의 논리를 빌려온다.

조신의 설화가 세 번이나 영화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설화의 형식이 영화의 장치와 유사하기 때문이다. 조신의 설화는 액자 구성으로 되어 있다. 현실의 서사 안에 꿈의 서사가 자리하고 있다. 영화 역시 마찬가지이다. 조신은 두 번의 인생을 살게 된다. 설화와 영화는 허구의 세계이기에 허구에 허구를 겹쳐 놓은 이 이야기는 마치 꿈속에서 꿈을 꾸는 경험과도 같다. 결국 우리는 이중의 꿈에서 깨어나야 현실로 돌아올 수 있다. 조신이 꾸는 꿈에서 깨어나 조신으로 돌아온 후 관객이 꾸는 꿈에서 깨어나 현실로 돌아온다. 그러나 이 현실도 꿈이라면 우리는 심연으로 빠지게 되는 것이다. 〈매트릭스〉와 〈인셉션〉은 심연의 깊은 어둠으로 우리를 이끌고 있다.

병들어 늙고 지친 몸으로 조신(안성기)이 절에 들어선다. 법당에 엎드린 조신은 회한의 눈물을 흘린다. 쓰러져 잠든 조신이 눈을 뜨니 눈 내리던 차가운 겨울은 활짝 핀 봄이 되었다. 절은 태수 일행을 반기느라 분주하다. 태수의 딸인 달례(황신혜)는 신라 제일의 미녀이다. 조신의 도반인 평목의 말을 빌리면, “그 모습이 마치 두견새가 하얀 비단 폭에 피를 토하듯” 아름답다는 것이다. 평목의 이 표현은 비극을 암시한다. 피는 정욕과 죽음의 기표이다. 피는 금기의 신호이다. 금지는 욕망을 자극한다. 경내에는 철쭉이 만발하고 때는 봄이다. 신라의 화랑인 모례(정보석)와 혼인을 앞둔 태수의 딸 달례를 환영하는 자리에서 절의 주지는 말없이 철쭉을 내민다. 화창한 봄날, 붉은 철쭉이 불길하다. 그날 보름달이 뜬 밤 조신은 목욕하고 있는 달례를 범한다. 둘은 달아나고 모례가 둘을 쫓는다. 모례에게 쫓기는 조신과 달례는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여기저기를 떠돈다.

생활은 점점 궁핍해지고 조신의 영혼은 황폐해진다. 우연히 만난 평목을 살해하고 아들마저 죽는다. 이들의 삶은 바닥까지 내려가 달례는 매춘을 하고 조신은 아편에 취한다. 급기야 달례가 나병에 걸려 조신을 떠나고 조신은 그녀를 찾아 사방을 헤맨다. 마침내 찾은 나환자촌에서 달례는 죽고 딸이 시신을 거둬갔다는 말을 듣는다. 조신은 고개를 묻고 오열한다. 겨울날 움집에서 달례를 목각에 새기던 조신에게 모례가 찾아온다. 조신은 모례에게 용서를 빌며 목을 맡긴다. 눈 덮인 바닷가, 한 남자는 무릎을 꿇고 있고 한 남자는 칼을 들고 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모례는 칼을 거두고 돌아선다. 병들어 늙고 지친 몸으로 조신이 절에 들어선다. 법당 앞에 쓰러져 잠든 조신이 눈을 뜨니 눈 내리던 겨울은 어느새 봄이 되었다. 경내에는 붉은 철쭉과 하얀 목련이 만개했다.

영화에서 현실의 세계는 화창한 봄날이고 꿈속의 세계는 차가운 겨울이다. 꿈속의 세계는 눈 덮인 차가운 땅이거나 황량한 논밭이거나 비 오는 우울한 저녁이다. 혹은 그늘진 숲이다. 죽은 아들을 묻으러 간 계곡엔 사람 뼈가 즐비하다. 짚으로 덮인 움막은 성욕을 배설하는 이들의 비릿한 욕망으로 음습하다. 꿈속은 어둡고 눅눅하고 현실은 밝고 화창하다. 영화에는 꿈속의 꿈이 나온다. 달례는 꿈속에서 모례를 만나고 조신은 꿈속에서 죽은 평목을 만난다. 영화는 현실과 꿈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현실에서 꿈을 꾸고 꿈속에서 다시 꿈을 꾼다. 영화는 현실에서 꿈을 꾸고 다시 현실로 돌아오는 구조를 취하고 있지만, 현실이 너무 꿈같아서 차라리 꿈이 현실이길 바란다.

영화를 다 보고 돌아선 우리는 영화에서 꿈과 현실의 위상이 바뀐 것은 아닌지 의심한다. 꿈속의 조신이 현실의 조신이고 꿈을 깬 조신이 꿈꾸는 조신이라면 서사의 어느 지점에 검은 침묵이 도사리는 셈이다. ‘검은 침묵’은 또 다른 꿈의 세계이거나 아편에 취한 망상의 세계일 것이다.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꿈일까? 꿈과 망상이 뒤섞인 세계는 우리를 심연으로 안내한다. 그러나 심연으로 빠지는 일은 세계를 견디는 전략이기도 하다. 조신의 설화를 입으로 전하던 신라인은 이렇게 현실을 견뎌낸 것은 아니었을까? 그리고 이 이야기를 소설로 읽었던 당대의 이광수 독자들도, 이 이야기를 영화로 본 당대의 신상옥과 배창호의 관객들도, 오늘날의 우리처럼 이렇게 현실을 견뎌낸 것은 아니었을까? 비극은 우리의 현실이 비극이 되는 것을 넘어 우리의 꿈마저도 비극이 되는 것이다.

장선우의 1993년 영화 〈화엄경〉은 고은이 쓴 소설 《화엄경》이 원작이다. 영화는 선재(오태경)의 로드무비이다. 아빠의 유골을 강에 뿌리고 선재는 엄마(원미경)를 찾아 나선다. 길에서 선재는 여러 인물을 만난다. 선재가 처음 만나는 인물은 법운이다. 법운은 선재에게 피리를 주며 동해에 가서 해운을 만나라고 말한다. 해운은 동해시에 거주하는 의사이다. 해운은 바다를 바라보며, “모든 것은 낮아서 바다가 되고 하늘은 거기에 내려와” 있다고 말한다. 해운은 선재에게 감옥에 수감된 혜경을 만나라고 이른다. 가는 길에 선재는 다리 밑 개울에서 애절한 노래를 부르는 눈먼 여인을 만난다. 그녀는 선재에게 가장 미운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고 말한다. 감옥에 가야 혜경을 만날 수 있기에 선재는 소를 훔친다. 훔친 소는 선재를 태우고 신비한 여인에게 향한다. 그녀는 선재와 하룻밤을 자고 난 후 바다에 몸을 던진다. 선재는 해운에게서 자비를, 눈먼 여인에게서 사랑을, 신비한 여인에게서 욕망을 배운다. 감옥에 있는 혜경은 선재에게 허무를 말하고, 길을 떠난 선재는 어릴 적 알던 이련(김혜선)을 만난다.

영화는 9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장마다 선재가 만나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에게 얻은 배움이 기록된다. 예를 들어, 눈먼 여인은 선재에게 ‘흐르는 것을 따르라’고 말한다. 이련을 만나 아이가 생기고 다시 아이를 잃는 장에선 ‘애욕을 비웃지 마라’는 경구가 새겨진다. 영화는 로드무비 형식을 빌린 선재의 성장 서사이다. 영화에서 선재는 성장이 멈춘 아이로 설정된다. 같은 또래의 이련은 성숙한 여자로 변했지만, 선재는 여전히 어린 소년이다. 영화는 외모만 어린아이일 뿐 청년에서 장년으로 이어지는 선재의 성장을 보여준다. 우리는 선재의 방황, 절망, 각성, 체념, 성숙의 과정을 지켜본다. 영화는 선재가 삶을 긍정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걸인 소년과 동행하는 마지막 장에 적힌 문구는 “세상은 자신을 잃어가면서 세상이 된다”는 경구이다. 선재는 “하늘은 비를 잃어 허공이 되고, 강은 강을 잃어 바다가 되고, 꽃은 꽃을 잃어 열매가 되고, 나 또한 마음을 잃어 허공이 되었다”고 말한다. 선재가 독백을 남기는 장소는 쓰레기 더미로 더러워진 개울이다. 그곳에서 선재는 오물 섞인 음식을 주워 먹는다. 마지막에 걸인 소년을 만나서는 빈 병을 주워 밥을 얻는다.

영화는 관념에서 현실로 이동한다. 하늘에서 지상으로 내려온다. 선재는 세상에 절망해 바다에 몸을 던진다. 그를 구해준 등대지기에게 선재는 ‘돈이 없어서 슬프다’고 말한다. 그리고 걸인 소년과 함께 빈 병을 줍는 것으로 영화는 마무리한다. 선재는 거지의 행색을 하고 있다. 그가 가는 곳도 누추하고 남루한 장소들이다. 선재가 만나는 인물들 역시 비루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영화는 지혜를 찾아 떠나는 구도의 서사처럼 보이지만, 영화의 인물들과 장소들을 따라가다 보면 이 서사가 자본주의 비판을 음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가 가는 장소들에는 쓰레기가 가득하다. 쓰레기 더미 한편에는 공사 중인 건물들, 고성처럼 솟은 화약 공장들이 보인다. 항구에는 생선들이 배를 뒤집고 있고, 도살장에선 소들이 흘린 피가 바닥을 적신다. 오물이 가득한 세상에서 사람들도 쓰레기가 된다.

영화 속 인물들은 사회의 잉여들이다. 영화의 시작, 쓰레기 야적장에서 일하는 일꾼들은 선재의 아빠인 그들 동료의 시체를 길에 내다 버린다. 그래야 국가가 걷어가기 때문이다. 수행자 법운은 후미진 골목 천막 식당에서 끼니를 때우고 있고, 의사인 해운을 찾아오는 환자들 역시 빈민들이다. 눈먼 여자는 다리 위에서 조화를 팔고 있고, 사회주의자 혜경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감옥에 갇혀 있다. 마치 선재가 길에서 만난 청년의 트럭에 실린 잡동사니 같은 존재들이다. 쓸모없어 버려진 존재들이다.

영화에서 가상과 현실의 관계는 천상과 지상의 관계와 같다. 선재가 만나는 인물 중에 숭고한 존재처럼 비치는 신비한 여자나 연꽃을 든 여인은 현실감이 희박하다. 마치 환영처럼 나타났다 사라진다. 반면에 길에서 만나는 비루한 인물들은 존재감이 뚜렷하다. 영화에서 관념의 외피를 벗기면 상처 입은 속살이 드러난다. 선재는 마치 〈만다라〉의 지산처럼, 〈아제아제 바라아제〉의 순녀처럼, 오욕의 땅으로 발을 디딘다. 가상의 법에서 현실의 땅으로 내려온다. “나 또한 마음을 잃어 허공이 되었다”는 선재의 독백을 살짝 비틀면, ‘나 또한 마음을 비워 쓰레기가 되었다’는 수행 고백이 된다. 마치 우리 시대 수행의 언어는 ‘나는 쓰레기다’라고 선언하는 것처럼 들린다.

 

5. 존재와 소유의 경계:
〈달마야 놀자〉 〈소와 함께 여행하는 법〉

〈달마야 놀자〉는 2001년에 개봉한 박철관 감독의 영화이다. 서울 관객 125만 명이 본 영화로 당시로는 꽤 흥행이 잘된 영화이다. 이때는 아직 통합전산망이 갖춰지지 않은 시절이라 서울 관객 수를 기준으로 전국 관객 수를 추정했다. 흔히 〈달마야 놀자〉는 〈조폭마누라〉와 〈두사부일체〉 계열의 조폭 코미디로 분류된다. 조폭 코미디는 한국의 독특한 혼성 장르이다. 2000년대 초 갑자기 등장한 이 장르는 2000년대 중반까지 한국 영화의 흥행을 이끌며 〈가문의 영광〉 시리즈로 이어졌다. 이 장르의 매력은 조폭과 코미디라는 어울리지 않을 듯 보이는 아이러니한 조합에 있다. 〈소와 함께 여행하는 법〉은 임순례 감독의 2010년 영화이다. 전국 관객 1만 6천 명에 그쳤으니 흥행 성적은 저조하다. 영화가 조용히 묻힌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이 영화는 한국 저예산 영화의 모범적인 사례로 기록되어야 한다. 두 영화는 불교의 소재와 주제를 드러낸 작품으로 알려졌다. 이 영화들을 불교영화로 분류할 수 있을까?

불교영화를 정의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합의점을 찾기는 어려우나, 대체로 불교의 소재와 주제라는 측면에서 정의가 이루어지는 듯하다. 불교적 소재나 주제는 무엇인가? 불교적 소재는 인물로는 승려, 장소로는 사찰이 대표적일 것이다. 수긍할 수 있는 기준이다. 그렇다면 불교적 주제란 무엇인가? 불교적 주제는 불가의 사유와 계율을 이르는 것일까? 불교의 소재와 주제를 불교영화의 척도로 삼는 기준은 모호하다. 게다가 영화에서 소재는 무엇이고 주제는 무엇인가? 영화는 주제를 드러내는 매체인가? 결국 이런 논의는 동어반복에 그치거나 내용 없는 토론으로 이어지기 쉽다.

먼저 물어야 할 질문은 불교영화는 장르인가 아닌가, 장르라면 불교영화의 장르적 성격은 무엇인가일 것이다. 장르 이론의 세 연구자를 소환해 이 질문에 다가가 보자. 장르는 ‘반복과 변이’라는 함수를 통해 관객과 소통하는 전략이다. 반복이 장르의 관습이라면 변이는 장르의 진화이다. 장르는 고정된 체계가 아니라 유동하는 실체이다. 토머스 샤츠는 장르의 진화를 네 단계로 기술했다. 첫 번째 시기는 실험기로 장르가 형식을 갖추어가는 단계이고, 두 번째 시기는 고전기로 장르의 형식이 관객에게 익숙해지는 단계이고, 세 번째 시기는 세련기로 장르의 양식이 두드러지는 단계이고, 마지막은 자기 반영적 시기로 장르의 자기 성찰 단계이다. 마치 씨앗에서 꽃이 피고 열매가 맺듯이 장르에도 생애가 있다고 샤츠는 주장한다. 자넷 스테이거는 장르의 역사를 기술하면서 순수한 장르는 없었다고 역설한다. 어느 시기건 장르 영화는 혼합 장르였다고 언급한다. 순수한 장르를 기대하는 건 단지 ‘순수의 신화’일 뿐이라고 지적한다. 그렇다면 장르를 우리는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릭 알트먼이 유용한 출구를 제시했다. 알트먼은 장르의 도상과 구문을 통해 장르를 정의한다. 도상은 장르 영화에 등장하는 시각적 기표들이고, 구문은 장르의 서사적 규칙이다. 예를 들어 웨스턴에는 말, 카우보이, 라이플, 황야, 객잔 같은 익숙한 도상들이 전시된다. 또한 서부 사나이가 마을에 들어가 갈등을 해결하고 석양으로 떠나는 익숙한 서사들이 펼쳐진다. 이를 알트먼은 장르의 의미론과 통사론이라 기술했다.

그렇다면 불교영화의 의미론과 통사론은 무엇인가? 말을 바꿔, 한국 불교영화의 시각적 도상과 서사적 규칙은 무엇인가? 한국 불교영화의 의미론과 통사론은 각기 한국 불교영화 장르의 필요조건이 될 것이고, 의미론과 통사론이 합쳐져 한국 불교영화 장르의 충분조건이 될 것이다. 결국 우리는 개별 불교영화를 통해, 불교영화 장르의 의미론과 통사론을 규명하고, 이를 바탕으로 불교영화 장르의 진화를 추적하고, 마지막으로 불교영화 장르의 혼종적 성격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이를 통해 한국 불교영화의 장르를 정의하고, 〈달마야 놀자〉와 〈소와 함께 여행하는 법〉이 불교영화인지 아닌지 판단해야 할 것이다.

한국 불교영화의 의미론과 통사론은 무엇인가? 한국 불교영화는 진화의 어느 단계에 있는가? 아직 만들어진 영화가 많지 않기 때문에 섣부른 진단은 쉽지 않다. 먼저 승려와 사찰이 나오는 영화가 한국 불교영화일 것이다. 이는 의미론적 측면이다. 그렇다면 통사론적 측면은 무엇인가? 다시 말해 한국 불교영화의 서사적 언어는 무엇인가? 우리는 두 가지 서사를 추정한다. 하나는 지계과 파계의 서사이다. 두 승려를 대비해 지계과 파계의 대위적 구성을 보여주는 영화이다. 다른 하나는 로드무비의 서사를 빌려온 ‘길 위의 영화’이다. 혹은 이 두 서사가 중첩된 영화이다. 이 계열에 해당하는 영화로는 〈마음의 노래〉 〈동승〉 〈만다라〉 〈아제아제 바라아제〉 〈꿈〉 〈화엄경〉 등이 있다. 이는 어느 정도 임권택 감독의 성과에 빚지고 있다. 임권택 감독은 한국 불교영화의 한 계열을 구축했다. 그러나 아직 미답의 영토가 있다. 〈달마야 놀자〉와 〈소와 함께 여행하는 법〉을 언급하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한국 불교영화는 장르의 진화론적 측면에서 어느 단계에 있는가? 일부는 실험적 단계에 있고, 일부는 고전적 단계에 있을 것이다. 혹은 그사이 어딘가 있을 것이다. 한국 불교영화의 역사는 길지만, 장르 언어의 측면에서는 아직 젊다. 〈달마야 놀자〉와 〈소와 함께 여행하는 법〉에 주목하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달마야 놀자〉의 주 무대는 사찰이다. 촬영은 김해 은하사에서 했다. 재규(박신양) 일당은 조직 간 폭력으로 경찰에 쫓기는 신세가 되어 깊은 산속 사찰로 숨어든다. 절에는 큰스님, 청명, 현각, 대봉, 청명, 동승이 머물고 있다. 재규는 동생들에게 하나씩 스님들을 맡으라고 지시한다. 이렇게 재규(박신양)-청명(정진영), 날치(강성진)-현각(이원종), 불곰(박상면)-대봉(이문식), 구라(김수로)-명천(류승수), 막내(홍경인)-동승(권오민)이 서로 짝이 된다. 큰스님을 중심으로 한쪽에 승려들이 있고 다른 쪽에 조폭들이 있는 셈이다. 그리고 이 두 집단은 서로 짝이 된다. 영화는 마치 로맨틱 코미디 같다. 서로 으르렁대던 두 집단은 마지막에 친구가 된다. 티격태격하던 두 남녀가 마지막에 연인이 되는 로맨틱 코미디 장르의 규칙과 같다. 일주일만 머물도록 허락받은 재규 일당은 사정이 여의치 않자 일주일 더 눌러 있으려 한다. 승려들은 궁여지책으로 게임을 제안한다. 재규 일당이 이기면 일주일 더 머물고 지면 떠나라는 것이다. 이렇게 두 집단의 게임이 시작된다. 삼천 배로 시작한 대결은 족구, 계곡 입수, 고스톱, 삼육구 게임을 거쳐 큰스님이 제안한 시합으로까지 이어진다. 큰스님이 제안한 게임은 ‘깨진 독에 물 붓기’이다. 깨진 독을 연못에 던짐으로써 재규 일당이 승리한다. 재규 일당은 큰스님의 배려로 절에 더 머물게 된다. 하루는 재규가 왜 이렇게 우리를 감싸주는 거냐며 큰스님에게 묻는다. 그러자 큰스님은 너희가 깨진 독을 연못에 던졌듯이, 나도 ‘밑 빠진 너희를 내 마음에 던졌다’라고 대답한다. 청명이 서운함을 표시하자 큰스님은 ‘중이 자기 수행만 열심히 한다고 성불하는 게 아니’라고 말한다. ‘깨진 독에 물 붓기’ 일화는 소유와 존재의 심급을 드러낸다. 이 일화는 소유의 미망과 존재의 각성을 시사한다. ‘갖는 것’의 경계와 ‘되는 것’의 경계를 지시한다. 무소유는 마음을 비우는 것이 아니라 존재를 긍정하는 것이다.

서사를 이끄는 동력은 아이러니와 역설이다. 영화에서 조폭과 승려들의 관계는 역전된다. 언뜻 기세가 세 보이는 조폭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승려들의 기세에 눌리고 마지막에 이들은 연대한다. 위치의 역전을 보이는 대사들이 서사를 끌고 간다. 가령, 날치의 “이러다 아주 중 될 것 같다”는 대사나, 청명의 “짐승이 되겠다”는 대사, 그리고 재규의 “우리가 중이냐, 절에 살게” 혹은 “스님들이 이래도 되는 겁니까” 하는 대사와 청명의 “내가 건달이냐, 맨날 싸움질만 하게” 등이 그렇다. 실제로 청명은 주먹으로 조폭들을 누르고, 날치는 마지막에 스님이 된다. 성격의 역전도 보인다. 묵언 수행 중이던 명천은 나중에 구라보다 더 수다스러운 인물이 되고, 왜소한 체격의 대봉은 건장한 불곰의 해병대 선임임이 밝혀진다. 상황, 관계, 위치, 성격이 도치되고 역전된다. 어느덧 이들이 절에 머문 지 한 달이 되어가고 떠날 때가 가까워진다. 큰스님은 이들에게 아침을 주기 위해 음식을 준비한다. 다음 날 큰스님은 좌선 입적하고 조폭들과 승려들은 큰스님의 다비를 봉행한다. 영화의 종영 자막이 끝나면서 큰스님의 “밥은 먹었냐?”라는 짤막한 대사가 나온다. 재규가 처음 그를 만났을 때, 큰스님이 던진 말이다. 밥 한 끼가 삼천 배보다 무겁다는 큰스님의 가르침으로 들린다. ‘달마야 놀자’라는 제목은 영리하다. 엄하게 꾸짖는 달마가 아니라 웃으면서 노는 달마이다. 웃는 얼굴은 화내는 얼굴보다 무겁다.

〈소와 함께 여행하는 법〉은 소와 함께 떠나는 로드무비이다. 서사를 이끄는 인물인 선호는 시인이다. 영화의 주요 인물은 선호(김영필), 현수(공효진), 한수(먹보)이다. 현수는 선호의 옛 애인이고, 한수는 선호가 키우는 소이다. 어느 새벽 선호가 한수를 트럭에 태우고 길을 떠난다. 우시장에 소를 팔려는 것이다. 이 사실을 안 선호의 아버지가 그를 소도둑으로 신고한다. 우시장에 소를 넘기고 돌아서려는 데 소가 간절한 표정으로 쳐다본다. 결국 소를 팔지 못한 선호는 소와 함께 여행하는 신세가 된다. 소를 태우고 돌아다니는 선호에게 현수에게서 전화가 온다. 현수는 선호의 옛 여자친구이다. 현수는 선호의 친구와 결혼했고, 사고로 남편이 죽자 선호에게 부고를 전하는 것이다. 이들은 대학 친구 사이로 서로를 피터, 폴, 매리라 불렀다. 영화에는 피터 폴 앤드 메리의 〈500마일스(Five Hundred Miles)〉가 흐른다. 남편의 장례식장에서 현수는 내 엉덩이에 있는 점 세 개를 기억하느냐고 농담을 한다. 이 상황에 농담이 나오냐는 선호의 핀잔에 같이 살던 남편이 죽은 것보다 더 큰 농담이 어디 있겠느냐며 현수는 웃는다. 영화는 슬픔을 웃음으로 치환한다. 서사는 소와 함께 여행하는 여정에 옛 여자친구가 동행하는 구조이다. 이 동행에 ‘맙소사’ 스님이 끼어든다. 맙소사 주지는 절의 이름처럼 엉뚱하다. 영화에서 맙소사로 나오는 절은 의성의 수정사이다. 영화는 과거의 기억을 밀어내려는 남자가 다시 과거와 만나는 이야기이다. 과거를 촉발하고 매개하는 존재는 소와 여자이다.

영화는 불가의 〈십우도〉 우화를 겹쳐 놓는다. 소에게 물을 먹이려 맙소사에 들른 선호에게 전각의 처마에 그려진 〈십우도〉 삽화가 보인다. 주지가 내준 술을 마시는 동안 선호의 소가 사라진다. 소를 찾아 헤매지만, 소는 보이지 않는다. 눈을 들어 전각을 보니 삽화 속의 소가 움직이고, 선호는 눈을 비빈다. 일주문을 나와 보니 선호의 소가 한가로이 벚꽃을 먹고 있다. 소는 언제나 이 자리에 있었다는 듯 여유롭다. 소는 버리려도 버릴 수 없고, 떠났다가도 돌아온다. 현수도 마찬가지이다. 사라졌다가는 나타나고, 떠났다고 생각하면 옆에 와 있다.

〈매그놀리아〉(1999)의 대사처럼, 우리가 과거를 잊더라도 과거는 우리를 잊지 않는다. 선호는 요사채에서 잠든 주지의 방문을 잠그고 사찰에 불을 지른다. 멀리 불타는 사찰을 바라보고 있는 선호의 발밑에 환영처럼 연꽃이 핀다. 꿈의 형식을 빌린 이 의식에서 선호는 과거의 허물을 태워버린다. 영화는 현실과 환영을 겹쳐 놓은 유쾌한 양상으로 진행된다. 또한 〈달마야 놀자〉처럼 로맨틱 코미디의 형식을 빌린다. 로맨틱 코미디의 커플처럼 과거와 티격태격하던 선호는 마침내 과거와 화해한다. 잠에서 깬 선호와 현수 앞에 불타고 있는 맙소사가 티비 화면에 보인다. 선호와 현수는 놀란 눈을 하고 서로 ‘맙소사’ 하는 표정을 짓는다. 영화의 마지막은 부모와 함께 산기슭 비탈진 밭을 갈고 있는 선호와 현수의 모습이다. 듬직하고 영특한 한수가 쟁기를 끌고 있다. ■

 

강봉래
연세대학교 철학과, 동 대학원에서 영상커뮤니케이션 전공으로 석사, 미디어문화연구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석사논문은 〈1960년대 후반 한국영화 속에 드러난 모더니티의 표상들〉이고, 박사논문은 〈한국 누아르 영화의 위상과 표상〉이다. 영화 〈눈물〉(2001)과 〈외출〉(2005) 프로듀서를 했고, 〈행복〉(2007)을 제작했다. 현재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 객원교수, 매체와예술연구소 전문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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