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여는 글

통계청은 인구주택총조사를 통해 10년 주기로 종교 관련 자료를 수집하고 발표하고 있다. 1985년부터 시작된 이 조사의 최신 결과인 2015년 발표는 대한민국의 종교인구 구성의 급격한 변화를 보여주었다. 조사 실시 후 최초로 무종교인의 수가 믿는 종교가 있는 국민 수를 넘어서며, 우리 사회가 본격적인 탈종교화의 단계에 들어섰다는 것을 알렸다. 한편, 2021년에 실시된 한국갤럽의 ‘종교 현황과 종교에 대한 인식’ 조사에 따르면 대한민국 인구의 60%가 믿는 종교가 없다고 응답한 결과가 나왔으며, 이는 세속화가 계속 진행 중임을 시사한다.

우리 사회의 종교인구 급감 현상은 종교 단체에 원인 분석과 해결 방안 마련이라는 중요한 과제를 제시하고 있다. 종교의 신도 수는 개별 종교 단체의 성장과 연관된 것뿐만 아니라 그 사회의 종교적 심성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종교들은 이러한 세속화 추세를 대처하기 위한 한 방법으로 종립학교를 통한 교육을 강화하여 미래 신자를 양성하거나 종교에 대한 호감과 신뢰를 높이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특히, 불교계의 경우 오랜 시간 종교인구 1위를 유지하다가 2015년 종교인구조사에서는 신도 수가 급감하였고, 이웃종교 기관에서 발표한 종교인식 조사에서도 낮은 신뢰도가 드러나는 등 한국사회의 주요 종교로서 위치가 흔들리고 있다. 이 때문인지 대한불교조계종은 한국불교 중흥을 위한 포교를 강화하고자 종립학교를 중심으로 청소년과 대학생을 대상으로 한 전법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우리나라의 교육부는 종교 단체에서 설립하거나 운영하는 종립학교를 별도로 구분하여 관리하지 않기 때문에, 종립학교의 규모와 현황은 주로 문화체육관광부의 보고서 《한국의 종교현황》을 참고할 수 있다. 가장 최근의 발표인 2018년 자료 중 한국의 주요 종교로 인정받는 불교, 개신교, 천주교의 종립학교 현황은 다음과 같다. 고등교육법에 의거한 일반대학 등 고등교육기관은 불교 10개교, 개신교 631개교, 천주교 81개교이다.

종립학교 운영 현황을 통해 불교의 종교인구에 비해 불교종립학교는 상대적으로 너무나도 작은 규모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을 근본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일제강점기부터 현재까지의 불교종립학교 역사를 살펴보고자 한다. 지난 과거에 대한 면밀한 성찰을 통해 현재 상황을 분석하고, 더 나아가 미래 성장을 위한 좌표를 마련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2. 근대 교육기관의 태동과 종교계의 대응

우리나라에서 구한말은 커다란 변화와 도전을 겪었던 시기였다. 이 시기 동안 조선왕조는 오랫동안 지속해 온 쇄국정책으로 인해 다양한 어려움을 겪었다. 병인양요, 신미양요, 운요호사건 등과 같은 문제들은 조선 사회에 큰 혼란을 초래했다. 외세의 야망과 침략으로부터 국가를 방어하기 위한 노력이 계속되었다. 특히 청나라, 일본에 이어 러시아 등 많은 국가의 압력과 침략에 직면했으며, 국제 정치적 압박이 이어졌다.

이러한 변화와 압력은 근대 서구 문물이 한반도에 소개되면서 한층 강화되었다. 서양의 과학기술, 문화, 정치, 경제 체제와 사상 등이 조선에 흘러들어오면서 국가 제도와 사회구조에 큰 변화를 일으켰다. 이때를 개화기의 시작으로 여길 만큼, 이러한 변화는 국가의 제도, 철학, 사상, 그리고 이념 등 모든 측면에서 급격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교육 분야에서도 큰 변화가 있었는데, 서양식 교육과 근대적 교육 체계가 도입된 것이 가장 큰 계기가 되었다.

1883년에 설립된 원산학사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학교로서, 민족의 자금과 노력을 바탕으로 탄생하였다. 개항지 중 한 곳이었던 원산은 외국 문화와의 접촉이 많았으며, 이러한 환경에서 외세에 대항하기 위해 새로운 교육이 필요하다는 판단에서 학교 설립이 추진되었다. 서당과 같은 기존의 교육 형태를 발전시키는 것을 시작으로 나중에 원산학사라고 불리는 신식 학교를 설립하였다.

이러한 원산학사의 설립은 우리 민족의 근대 교육에 대한 욕구를 반영한 사례로, 근대 교육기관의 조직과 운영이 민간에서 시작되었음을 보여준다. 1886년에는 영어 교육을 목적으로 관립 육영학교도 개교되었는데, 이는 국제 교류와 교육의 필요성을 반영한 사례이자 국가 주도의 근대식 교육이 도입되고 있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러나 서양식 근대 교육기관의 설립에서 민관보다는 종교계의 대응이 더 기민하였으며, 좀 더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특히 그리스도교는 선교 활동과 함께 교육과 의료 분야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이를 바탕으로 다수의 근대적 형태의 사립학교를 설립하였다. 그 최초는 천주교의 요셉신학교로 1855년에 설립되었는데, 이를 우리나라 근대 교육의 시작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1882년 ‘조미조약’을 계기로 갑신정변 다음 해부터 개신교의 미국 북감리교회 선교사 아펜젤러가 설립한 배재학당(1885), 북장로교 언더우드가 설립한 구세학당(1885), 해외여성선교회 스크랜튼이 설립한 이화학당(1886), 그리고 북장로교 엘레스가 설립한 정신여학교(1887) 등 다수의 그리스도교 계열 근대 사립학교가 연이어 설립되었다. 육영공원 외국어 교사였던 선교사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가 쓴 《대한제국 멸망사(The passing of Korea)》를 보면, “선교단체 소속인 많은 외국인이 조선교육회를 구성하여 모든 학문 명칭을 체계 있게 명명하는 기초 작업을 수행하였다”고 할 정도였다. 서구 종교계의 자금과 인력을 동원하여 근대 교육을 확립한 이러한 학교들은 근대 교육의 발전과 확산에 상당한 역할을 하였으며, 이는 우리나라 근대사와 교육사에서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

갑오경장을 계기로 대한제국 정부는 근대식 교육의 필요성을 시급히 인식하였다. 1895년에는 〈교육입국조서〉를 발표하면서, 각급 학교의 관제와 규범들을 제정하여 새로운 학제의 도입에 대한 법적 근거를 마련하였다. 이로써 전통적인 학문체계를 개선하고 근대식 교육을 도입하는 과정이 가속화되었다. 전통적으로 교육열이 강했던 민중들도 교육에 대한 열정과 국가 발전을 향한 열망을 가지고 경향 각지에서 근대식 학교 설립을 통한 교육 구국운동을 벌였다. 이러한 교육운동은 근대식 교육의 발전과 국력 강화를 위한 우리 민족의 중요한 노력 중 하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조선총독부 설치 직전인 1910년(융희 4년) 5월 기준으로 인가된 사립학교 수는 총 2,250개교로 기록되어 있다. 그중 종교계 학교는 823개교로 상당한 비율을 차지했다. 좀 더 상세히 살펴보면 장로교회 501개교, 감리교회 158개교, 영국 성공회 4개교, 감리교회 2개교, 각파 합동 1개교, 천주교 46개교, 종파 미상 기독교 84개교 등 다양한 그리스도교파 학교의 번창을 알 수 있다. 그 당시 조선에서의 그리스도교 선교 방침이 교육을 중점적으로 강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하여 불교계에서 설립하여 인가까지 받은 학교는 5개교에 불과했다. 이를 통해 당시 외래 종교였던 그리스도교와 전통 종교로서 불교의 교육 역할과 사회적 위상의 차이를 가늠할 수 있다.

민간과 정부를 가릴 것 없이 신식 교육에 대한 열망이 불타오르던 사회 분위기 속에서 근대식 교육기관의 설립 운동과 운영은 지속되었다. 특히 서구 외래 종교 계열의 근대식 학교 설립이 활발하게 진행되었지만, 불교계의 학교 설립 운동은 상대적으로 늦게 시작되었다. 1906년에야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명진학교(明進學校)가 불교계의 근대식 교육기관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다. 정부의 허가를 얻어 신교육을 위한 중앙교육기관으로써 원흥사(元興寺)에 명진학교를 개교한 것을 계기로, 전국의 사찰에서 자체적으로 예비학교 형태의 보통학교 설립이 이어졌다. 근대 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한 불교계가 교육활동을 통해 사회적 기반을 확장하려는 노력의 결과였다. 명진학교와 같은 근대식 교육기관은 조선불교의 교육적 역할을 강화하고 불교를 위시한 전통문화를 보존하면서도 발전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불교계의 학교 설립은 근대 교육의 다양성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었으며, 불교의 교육 역량과 사회적 역할이 근대화되는 중요한 과정 중 하나였다.

 

3. 불교종립학교의 교육 내용과 역할

외래 종교인 그리스도교에 비해 불교계 종립학교는 그 규모 면에서 열세를 보였다. 외세의 자본을 바탕으로 서구식 근대 교육의 시스템을 이식하려는 그리스도교에 비하여, 숭유억불로 오랫동안 힘든 시간을 보내왔던 불교계로서는 새로운 형태의 근대식 교육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기에는 그 힘이 너무 미약했던 탓이다. 이러한 차이는 앞서 언급한 종교별 종립학교의 숫자에서 극명히 드러난다.

그러나 그 규모만으로 불교계 종립학교의 의의를 판단해서는 안 된다. 당시 국가와 사회적인 배경, 종교계의 지형 등 다양한 관점과 맥락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선교의 일환으로 교육을 활용했던 그리스도교의 학교 교육 목적은 전근대적 조선인을 근대적 그리스도인으로 전환하는 것이 그 중심이었다. 반면, 불교종립학교들은 민족과 불교의 운명을 개척할 자주적 인재 육성에 우선 목표를 두었기 때문이다.

특히 일제강점기에 해당하는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방 조약부터 1945년 8월 15일 대한민국의 독립 사이에 있었던 불교계 교육기관의 양상과 교육 현상은 21세기 한국불교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시기의 불교종립학교의 교육 내용과 역할을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승가교육의 근대화, 근대 불교 지식인의 배출, 독립운동의 산실이 그것이다.

불교계 학교는 승가교육의 근대화를 통해 불교 전통을 현대로 계승하는 중요한 징검다리 역할을 하였다. 또한, 교육을 통해 근대 불교 지식인을 배출하면서 불교의 학문과 문화를 발전시켰다. 더불어  우리 민족의 자주적인 독립운동의 중요한 근거지와 배후가 되었다. 이와 같이 불교종립학교의 시작은 근대 교육을 통해 전통종교로서 불교의 위상을 재정립하고, 기존의 문화와 정신을 유지하면서도 발전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1) 승가교육의 자주적인 근대화

일제강점기 전후 조선의 불교계 상황은 그 어느 때보다 어려웠다. 억불정책을 지속해 온 조선시대는 물론 일제강점기에도 총독부의 불교에 대한 간섭이 계속되었다. 이로 인해 불교의 사회적 지위는 현저히 저하되었으며, 개항 이후 서구 문명과 함께 새로운 종교들이 도입되면서 그리스도교와 같은 종교가 확산되었다. 불교는 다른 종교로부터 구태 종교로 간주되어 오해와 비난을 받았으며, 각지의 사찰 재산도 피해를 입었다. 불교계는 이러한 문제의 원인으로 승려의 자질 부족과 신문명에 대한 이해가 모자라기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불교계는 이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불교의 근대화를 대대적으로 추진하였고, 그중에서도 근대식 학교 설립이라는 교육사업에 집중하였다. 1902년에 정부가 〈국내 사찰 현행세칙〉을 제정하고 공포하였는데, 이 세칙 29조에 사찰의 학교 설립과 승려의 교육에 대해 언급이 있다. 이를 근거로 근대식 불교 교육기관 설립이 가능해졌으며, 1906년에 불교연구회가 조직되어 대법산(大法山)인 원흥사에 사립학교 설립을 인가받았다.

명진학교를 통해 한국불교 최초의 종립학교 교육이 시작된 것이다. 이 학교의 초대 교장은 홍월초(洪月初) 스님이었고, 박한영(朴漢永) 스님이 내전교사(內典敎師)로 있었다. 지역 사찰의 기초학교에서 교육받은 후 명진학교로 진학하거나, 당시 승려 교육의 최상위 단계였던 대교과 과정을 마친 인재들이 입학을 신청했다. 내전 교육을 중심으로 한 기존의 강원교육 제도와 내용에 인문학, 자연과학, 예술, 기술 등을 접목한 근대식 교육이 제공되었다. 교육 과목은 크게 불교학과 신학문으로 나뉘었다. 불교학 과목에는 불교 경전, 선어록, 포교법, 참선과 근행 등이 포함되었으며, 신학문 과목은 종교학, 종교사, 산술, 역사 및 지리, 주산, 농업 초보, 일어, 철학 및 철학사, 경제대요, 법제대요 등으로 구성되었다.

또한, 명진학교는 각 지방의 수사찰(首寺刹)에 기초학교를 개교하도록 통문을 발송하여 전국 사찰에 20여 개의 근대식 학교가 정식으로 인가를 받았다. 용주사 명화학교, 해인사 명립학교, 건봉사 봉명학교, 석왕사 석왕학교, 범어사 명정학교, 직지사 직명학교, 남장사 남명학교, 송광사 보명학교 등이었다. 즉, 불교계 근대식 교육기관은 전통적인 사찰에서의 교육을 확대하고, 보다 더 전문적인 근대식 승려 교육을 제공하기 위해 시작된 것이다. 이러한 노력은 불교의 근대화를 촉진하는 한편 교육기관을 통해 사찰의 재산을 보호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명진학교를 시작으로 설립된 불교계 근대식 학교들은 일제강점기 무렵부터 운영의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명진학교는 학교 운영 주체와 방식에 대한 의견 대립으로 1910년 4월에는 불교사범학교로 전환되기도 했다. 그러나 불교종립학교를 통한 교육 운동은 일제강점기 내내 조선불교의 등불이 되었다.

이러한 차원에서 본다면, 불교종립학교는 이웃종교의 학교와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외국인 선교사가 설립자와 운영의 주체가 되어 전근대 국가의 국민을 개화하려는 이웃종교의 교육과는 확연히 달랐기 때문이다. 학교의 설립과 운영은 불교계가 책임을 졌으며, 교육 대상도 내국인 불교인을 중심으로 하였다. 이웃종교의 종립학교가 서구의 근대식 교육의 단순 이식이었다면, 불교종립학교는 전통종교인 불교 승려 교육의 독립적인 근대화 여정이자 성과로 볼 수 있다. 이 시기 종교계의 근대식 학교 교육이 동시대에 진행되었다 하더라도, 호혜가 아닌 자주라는 측면에서 불교계 종립학교들의 투철한 민족불교의 지향과 역사적 소명의 의의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2) 근대 불교 지식인의 요람

대학의 도는 덕을 밝히는 데 있다는 뜻의 명(明)과 불교 가르침 중 올바른 도를 향해 수양한다는 정진에서 진(進)을 빌려 지어진 교명과 함께 시작한 명진학교의 1회 졸업생이 만해 한용운 스님이다. 또한 종합대학 승격 후 초대 동국대학교 총장이었던 퇴경 권상로 스님도 명진학교 1회 졸업생이었다. 이 외에도 안진호, 이종욱, 강대련 등 이후 근현대 한국불교에 큰 영향을 미치는 인물들이 배출되었다. 개교 당시 50명 내외였던 학생 수는 2년째인 1907년이 되자 100명 이상으로 증가했다. 이들은 근대 불교 지식인이 되어 일제강점기 조선불교를 이끌어 가는 중심이 되었으며, 근대 한국불교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들로 기록된다.

즉, 일제강점기 불교종립학교는 근대 불교 지식인을 양성하는 요람이었다. 비록 명진학교가 일제강점기에는 불교사범학교, 불교중앙학림, 불교전수학교, 중앙불교전문학교, 혜화전문학교 등으로 그 이름을 달리하며 변모하였지만, 처음의 건학 정신을 유지하고자 노력하였다

명진학교 출신 만해 한용운 스님과 퇴경 권상로 스님은 각각 불교개혁론을 집필하며, 근대적 종교로서 불교의 향상을 꾀하고자 노력했다. 한용운은 중앙학림 강사로 후학을 지도하면서도 3 · 1운동의 불교계 대표로 활동하였다. 권상로는 건봉사 봉명학교, 김룡사 경흥학교 교사를 역임하고, 《원종》 편집부장과 《조선불교월보》의 사장으로서 불교계 최일선에서 활동했다. 이러한 활동들은 개인적인 차원의 평가로 그쳐서는 안 된다. 불교종립학교 졸업생들이 근대 지식인으로 성장하여 일제강점기 동안 조선불교의 흐름을 주도하고 근대불교의 지식과 사상을 대중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사례이기 때문이다.

명진학교 출신 졸업생들이 교육자로 성장해서 모교의 후신 교육기관에서 후학들을 지도한 것은 당시 불교계의 근대식 학교 교육의 선순환을 증명한다. 또한, 불교종립학교 출신들은 불교청년 담론을 이끌어가며, 새로운 세대의 탄생과 활약을 보여주었다. 당시 불교청년의 대표적 인물들은 대부분 중앙학림 또는 지방학림 출신이었다. 이들은 불교 잡지의 주요 집필자로서 불교의 대중성을 사회로 확장하고 불교인으로서 문화적 실천을 확립해 나갔다. 또한 독립운동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불교계의 근대식 교육 개혁이 결실을 맺어 일제강점기 불교계의 선도 세력인 불교청년들로 등장한 것이다. 이들은 경성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도 출신 지역의 본사와 연결되어 불교계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통합하였다. 이는 종립학교 졸업생들이 교육의 성과를 개인적인 차원에만 머무르게 하지 않고, 사회에 대한 관심으로 지평을 확대했다고 평가할 수 있는 요소이다. 즉 당시 불교계의 사회에 대한 의식과 실천의 전개, 후속 세대 양성 등은 학교 교육을 통한 불교계 근대 교육의 확장이 바탕이 된 것이다.

한편, 조선불교청년동맹의 발의와 불교계의 후원으로 여성 교육을 위한 명성학원이 설립되기도 했다. 명성여학교는 근대불교 최초의 여성학교로 제도권 여성 교육의 장을 열었으며 근대의 불교 여성 의식을 형성하였다는 점에서 주목받았다. 이는 현재에도 유일한 불교계 여자 중등학교인 동국대학교 사범대학 부속여자중 · 고등학교로 계승되고 있다.

또한, 해방 후에도 불교종립학교 출신들은 사회 곳곳에서 활약하며 보살행의 구체적인 실천을 보여주었다. 김법린은 문교부 장관, 백성욱은 내무부 장관을 역임하는 등 사회 요직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는 불교계 인재들이 불교 내부뿐 아니라 대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인물로 성장하는 데 불교종립학교가 일정한 역할을 했음을 의미한다.

 

3) 민족 독립운동의 산실

한일합방 이후 일본은 종전의 통감부를 총독부로 개편하여 승격하고, 무자비한 통치를 시작하였다. 일제의 식민지 정책은 본국의 부강을 위해 식민지를 이용하는 것을 넘어, 식민지 원주민의 민족정신을 말살하고 본국과 하나의 국가로 통합하는 데 가장 큰 목표를 두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특히 교육을 중점적으로 활용하였다.

조선총독부는 1911년 〈조선교육령〉을 공포하여 식민지 교육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이 교육령은 일본 군국주의를 중심으로 한 ‘교육에 대한 칙어’를 바탕으로 제정되었기 때문에, 일본을 위한 신민을 양성하는 것이 본질이었다. 조선인과 일본인을 별도로 교육하는 차별적인 학제는 기본이었으며, 고등교육을 담당해야 할 조선의 전문학교들은 기술이나 단순한 차원의 지식만을 교육하도록 하는 등 전형적인 식민지 교육정책을 펼쳤다.

이 당시 대체로 관 · 공립학교를 중심으로 본국인과 식민주민의 차별적인 교육이 행해졌기 때문에, 민족교육의 대부분이 사립학교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 때문에 일제는 ‘국민 교육은 국가적 사무로 사인(私人)에게 위임하는 것이 변칙’이라고 공식적으로 발표한 이후부터는 사립학교를 제재하는 방향으로 교육정책의 기조를 잡았다. 한일합방 이전인 1908년부터 이미 〈사립학교령〉 〈사립학교 보조규정〉 〈사립학교 반포에 관한 훈령〉 〈공립 · 사립학교 인정에 관한 규정〉 등을 제정하여 사학들에 대한 제재의 바탕이 마련되어 있었다. 이에 대한 연장선으로 총독부는 1911년 10월 〈사립학교규칙〉을 공포하면서 새로운 사립학교 인가를 제한하였다.

이에 그치지 않고 기존의 인가 학교들도 새로운 규칙에 따라 재인가를 받도록 하였다. 1910년에 비해 한일합방 직후인 1911년에는 종교계 사립학교의 수가 123개나 줄어드는 등 수많은 사립학교의 인가가 취소되었으며, 자연스럽게 사립학교 재학생 수도 많이 감소했다. 매월 발행되던 조선총독부 관보의 조선인교육사립학교수조(朝鮮人敎育私立學校數調) 항목을 보면, 일제강점기 동안 종교계 사립학교의 수는 꾸준히 줄어들었음을 볼 수 있다.

이미 1899년부터 자국 관 · 공립학교에서 종교 교육과 종교의식을 금지한 것을 근거로 총독부는 식민지 학교에서도 교육과 종교가 분리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런 입장은 1915년 3월에 개정된 〈사립학교규칙〉에 구체화되어 종립학교들의 존폐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국민 교육과 종교는 무관하다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였지만, 사립학교의 종교인들에 의해 독립운동이 확산되는 것을 단속하려는 속내였다. 사립학교를 운영하면서 일제의 제국주의를 비판하던 종립학교들은 큰 어려움을 겪었다. 가장 많은 수의 학교를 운영하던 개신교 내부에서도 종파에 따라 총독부의 정책을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등 대응 입장이 제각각일 정도로 혼란을 겪은 시기였다.

식민지화 과정의 일환으로 조선의 불교를 일본의 불교에 예속시키는 작업을 추진하는 총독부의 정책에 따라 조선 불교계의 입장은 더욱 어려운 사정에 처했다. 불교종립학교들도 위기를 맞을 수밖에 없었다. 불교와 교육을 향한 일제의 탄압이 점점 더 심해졌기 때문이다. 〈조선교육령〉의 개정이 반복되는 과정에서 기존의 불교종립학교들은 인가에 탈락하거나 학교와 강원으로 분리되는 등 그 체계와 외형에 제한을 받게 되었다. 당시 총독부와 불교계와의 관계를 〈사찰령〉에 근거한 31본산제도로 총독부와의 관계가 어느 정도 소강상태였다고 보는 시각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독립 활동과 민족교육을 이유로 불교종립학교들이 폐교당하는 등 갈등은 계속되었다.

1914년 불교고등의숙의 승려 학생들이 조선불교의 자주권을 주장하며 조선불교회를 조직한 일로 종단의 기득권 세력이 자진 폐교를 하였다. 1922년에는 3 · 1 독립운동 때 중앙학림 학생과 교수들이 독립운동에 앞장섰다는 이유로 일제에 의해 2년간 강제 폐교를 당했다. 1919년 사립 보통명정학교와 범어사 지방학림이 재학생 기미독립운동 참가와 동래 장날 만세 사건을 이유로 폐교되었다. 1940년대에는 민족교육과 독립운동으로 인해 폐교당하는 불교계 학교들이 연이어 생겨났다. 1943년에는 범어사 금정불교전문강원이 조선어학회사건으로 폐원되었다. 이듬해 1944년에는 통도사에서 운영하던 전수학교의 교사 수성(김말복)과 용명(조병구)이 항일민족교육을 했다는 이유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고 폐교 조치를 당했다. 같은 해 혜화전문학교가 일제에 항거하는 불온사상을 가진 학생들이 많다는 이유로 일제에 의해 폐교되었다. 폐교 조치에까지 이르지 않은 불교종립학교들에서도, 세세하게 예를 들기 어려울 정도로 그 구성원들은 일제강점기 내내 경향과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불교종립학교는 우리 민족의 자발적 독립운동의 산실 역할을 한 것이다.

 

4. 맺음말

지금까지 일제강점기의 불교 교육운동을 종립학교들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이 시기는 불교계 전반에 걸쳐 교육의 역할을 강조하며 민족의식과 국권수호의 결의를 다졌다고 할 수 있다. 기존의 승단 위주의 전통 강원교육과는 다른 근대식 신교육기관을 설립하고 운영하며 본격적인 근대화의 발판을 마련한 시기이기도 했다. 이 학교들이 중심이 되어 문맹퇴치, 사회계몽, 반봉건, 자주독립, 계급타파, 균등한 교육 기회 제공, 여성 해방, 민주주의 사상 고취 등에 불교계가 많은 역할을 해낼 수 있었다. 불교계의 교육운동은 포교 확장뿐 아니라 전통문화 창달과 신지식인 배출, 독립운동 등 애국, 애족 운동에도 일정한 사회적 책임을 완수했다.

그 전개와 성과를 다시 한번 요약하자면, 승가교육의 근대화, 근대 불교 지식인의 배출, 독립운동의 산실 역할이라 할 수 있겠다. 물론 같은 시기의 이웃종교와 비교해보았을 때, 교육의 규모나 시스템, 혹은 불교 내부의 실천 동력이나 원천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종립학교들이 아니었다면 전통 종교로서의 불교가 계승되기 어려웠을 것이며 그 사회적 위상도 지켜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불교종립학교들은 우리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을까. 현재의 불교종립학교들은 대부분 해방 이후에 새롭게 개교한 곳들이다. 독립과 더불어 민족정기를 되살리고 호국불교의 기상으로 국가의 미래를 책임질 인재 양성을 위해 도량을 세워야 한다는 인식에서 각지에서 불교종립학교가 설립되었고, 체제를 정비해가며 오늘에 이르렀다.

개화기, 일제강점기, 국가 재건과 같은 급격한 사회변동의 압력이 없는 지금, 선조들이 물려준 전통문화 유산을 보유한 한국의 주요 종교로서 교육을 통한 그 책무를 다하고 있는지 우리 스스로 돌아봐야 할 때다. 한국 불교계 전체가 학교를 통한 교육 사업에 대한 합의나 공통된 의지가 있는지 반성할 필요가 있다. 현재의 한국사회는 과거와는 다른 변화와 도전을 경험하고 있으며, 불교종립학교는 이를 이해하고 대응하는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그저 역사가 오래되었다는 것만으로 불교종립학교들의 전통이 존경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 설립목적에 부합하는 인재를 양성하고, 불교종립학교가 배출한 인재들이 불교를 비롯해 우리나라의 사회 전반에 공헌할 때야 비로소 종립학교 운영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구한말 개화기 그리스도교 학교가 교세 성장에 큰 밑거름이 되었고, 여전히 개신교와 가톨릭계 학교는 불교종립학교에 비해 규모 면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내세워 초중등 및 고등교육을 통해 다음 세대들에게 다가가고 있다. 특히 학교는 공식적으로 국가의 지원을 받으면서도 미래 인재를 양성할 수 있는 공적 공간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종립학교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전통문화로서 불교를 가르치는 것 역시 교육의 중요한 측면이라고 볼 때, 불교종립학교의 설립과 운영은 여전히 한국불교의 중요한 과제일 것이다. 민족정신을 바탕으로 올바른 불교인을 양성하자는 불교계 근대 학교 설립 초기의 정신은 시대를 뛰어넘어 현재에도 유효해야 한다. 바른 종교인은 깨어 있는 시민이 되어 평화로운 사회를 유지하는 데도 이바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최근 종립학교의 중요성을 새롭게 인식하고, 청소년과 청년 대상의 명상, 교양교육 등에 관심이 높아지면서, 구체적인 연구와 실천의 담론이 커져가고 있다. 그러나 불교교육은 세속화 사회의 불자 양성만이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 신자 양성을 위한 교육이 아닌 보편적인 종교성의 기반이 불교에 있음을 염두에 두고, 새로운 교육의 장을 펼쳐야 할 것이다.

불교종립학교의 교육을 통해 미래 세대를 책임지는 것이 현재 한국불교의 책무라는 공동체 의식을 가져야 한다. 일제강점기의 불교계가 기존의 전통 교육을 벗어나 신학문 교육을 통해 자주적 근대를 맞이했듯이, 지금의 불교종립학교들도 관성에 머물지 않고 새로운 미래를 향하는 등불이 되어야 할 것이다. 시대의 변화와 도전 앞에서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펼쳐나가는 새로운 교육이 불교종립학교를 통해 펼쳐지기를 기대한다. 이를 통해 국가의 미래와 세계의 발전에 공헌할 수 있는 인재를 배출하고, 우리 시대의 불교가 더욱 필요한 종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        

 

김은영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동 대학원에서 종교교육을 전공하며 〈불교 종립 중등학교의 종교교육에 대한 비판적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근현대 불교계 종립학교의 교육활동에 대한 기록과 개발에 관한 연구에 집중하고 있다. 교육부 교육과정심의회 교양선택 교과 위원회에서 2022 개정교육과정 ‘삶과 종교’ 교과 심의를 담당하였다. 현재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K학술확산연구소 연구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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