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으로서 불교를 신앙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불교를 학문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노력 여하에 따라 신앙의 길만큼 어려운 일만은 아니다. 오히려 학문으로서의 불교는 흥미진진하다. 2천5백여 년에 걸쳐 발전한 불교의 사상을 하루아침에 이해한다는 것은 물론 어불성설이다. 세월을 두고 조금씩 불교 사상을 알아간다는 것은 인생을 살면서 조금씩 인생을 이해해 가는 것만큼이나 흥미로운 일이다. 적어도 나에겐 그랬다.

필자가 불교를 깊이 이해하기 시작한 것은 1987~1988년 감리교 신학대학원 시절 은사이신 변선환 교수님이 ‘인도 기독론’이라는 수업 시간에 “자네들이 기독교를 제대로 알려면 반드시 불교를 공부해야 하네.”라고 말씀하셨다. 그분은 스위스 바젤대학교에서 불교를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받으신 분으로서 그리스도교와 불교의 대화를 무척 강조하신 분이었다. 

수업 시간에 소개했던 교재는 《기독교 유일신의 신화(The Myth of Christian Uniqueness)》를 썼던 폴 니터라는 학자의 책이었다. 폴 니터는 《오직, 예수 이름으로?(No other Name)》라는 책을 써서 예수라는 이름으로만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 하는 의문을 제기한 분으로, 변선환 교수가 이 책을 번역하여 한국 교계에 파문을 일으켰던 바가 있다. 

나는 폴 니터의 책 속에서 한 구절을 읽고 깊이 감동하게 된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요단강에서만 세례를 받을 것이 아니라 갠지스강에서도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충격적인 구절이었다. 이후 나는 변선환 교수의 조언대로 불교를 더욱 깊이 연구하기 위해 동국대 대학원 인도철학과를 진학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당대 한국 원효 연구의 최고 대가였던 고(故) 이기영 교수에게서 《우빠니샤드》와 《바가바드기타》 원전 강의를 듣게 되었다. 그리고 이기영 교수가 인도하던 대치동 소재 한국불교연구원에서 매일 새벽에 강론하는 ‘화엄경 강해’에 참가하게 되었다. 여기서 나는 또 한 번의 충격을 받았다. 

대방광불(大方廣佛)의 장엄한 부처의 광명이 온 천하에 두루 미치는 것과 그 구원의 빛이 그리스도교의 하느님 은총과 구원의 빛에 비교하여 볼 때, 내용은 달라도 양상은 너무나 흡사한 것이었다. 비로자나불의 광명한 ‘구원’의 빛이 하느님의 ‘은총’의 빛과 깊이 대조를 이루며 가슴 깊이 와 닿았던 것이다. 

이러한 경험이 있고 난 뒤에 나는 인도철학과의 석사과정 지도교수였던 고(故) 이지수 교수와 1993년에 인도 여행을 같이 가게 되었다. 불교와 힌두의 나라 인도를 처음 찾으면서 간 곳은 먼저 바라나시 갠지스강이었다. 갠지스강은 인도에서 신성시되는 강으로서 죽음이라는 육체의 강을 건너 해탈에 이르고자 하는 마음으로 수많은 인도인과 세계인이 찾아오는 곳이다. 

강물은 고요히 흐르고 있었지만 강변에는 시체를 태우는 장작불에서 연기가 자욱이 사방으로 번져갔고, 곧이어 타고 남은 시체는 강물에 던져질 참이었다. 그 물에서도 사람들은 강물에 들어가 몸을 정화하는 의례를 하는 사람들, 혹은 빨래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강물에 걸려 있는 빈 배를 바라보면서 문득 나는 ‘인도 기독론’ 시간에 읽었던 폴 니터의 말이 생각났다.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은 사람은 갠지스강에서도 세례를 받아야 한다.”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팬티만 입은 채 나는 거뭇거뭇한 강물에 풍덩풍덩 뛰어 들어갔다. 스스로 그 강물에 세례를 받기 위함이었다. 세 번에 걸쳐서 강물 깊이 잠수하고 다시 솟아올랐다. 세례(洗禮)가 아닌 침례(浸禮)였다. 이는 그리스도교와 힌두교와의 합류이기도 하지만 엄격히 나는 그리스도교와 불교와의 합류 경험을 한 것이다. 

 

이후 나는 석가모니가 붓다가 되는 깨달음의 자리 보드가야와 현장 법사와 혜초 스님도 다녀온 날란다대학, 초전법륜지 녹야원과 죽림정사, 영취산 그리고 산티 스투파와 엘로라, 아잔타 불교 석굴 유적지를 순례하면서 불교 신앙의 장엄하고 경건한 유적지에서 붓다의 가르침을 다시금 깊이 되새기게 되었다. 그 후에도 붓다의 탄생지 룸비니와 아소까대왕의 유적지와 남방불교의 출발지이기도 한 스리랑카를 방문하고, 태국과 미얀마를 순회하면서 남방불교의 신심(信心)을 접하게 되었고, 대승불교의 기점이 되는 티베트의 라싸까지 불교 유적의 순례를 계속하였다. 

불교를 학문적으로 깊이 연구하게 된 계기는 동국대 인도철학과 석사과정 시절, 이지수 교수의 지도 아래 개설된 〈유식삼십송(唯識三十頌)〉 산스끄리뜨어 원어 강좌였다. 유식(唯識) 삼성론(三性論) 강좌를 들으면서 불성(佛性)과 ‘식전변(識轉變)’의 불교인식론을 대하게 되었다. 불교를 또다시 깊이 공부하게 된 계기는 서강대 종교학과 박사과정 시절 고 길희성 교수의 수업 시간에 읽었던 《팔종강요(八宗綱要)》였다. 불교 종파의 핵심 사상들의 숲을 헤치며 불교 지식을 넓혀 가던 체험은 ‘불교 여행’의 최고의 순간들이었다. 물론 ‘일심(一心)’의 깊이를 다룬 《대승기신론》 원전 읽기도 한몫했다.

비교종교학을 전공한 사람으로서 그리스도교와 불교는 물론 유교와 도가(道家)의 인문 정신을 대하면서, 각 종교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졌고, 그만큼 불교에 대한 이해는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관동대학교에서 ‘종교 간의 대화’ 과목을 개설하여 강의하던 시절에 나는 《반야심경》과 ‘복음서’의 내용을 비교한 《예수, 석가를 만나다》(2006년)라는 책을 출간하였는데, 그 책이 〈동아일보〉에서 인터뷰 기사로 소개되는 바람에 책의 내용과는 관계없이, 기독교계 대학이었던 관동대의 총장은 나를 면직시켰다. 이 때문에 나는 한국에서의 강단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중국의 대학교로 진출하는 계기를 얻게 되었다. 

2007년부터 2014년까지 중국 길림사범대학에서 교환교수(동 대학 동아연구소 소장 겸직)로 재직하는 동안에 틈틈이 불교 유적지를 탐방했다. 달마대사가 있던 중국의 숭산(崇山) 달마 동굴을 비롯하여 장안(長安)의 자은사(慈恩寺), 돈황(燉煌) 막고굴, 용문(龍門)석굴, 운강(雲崗)석굴 등을 찾아 나선 불교 유적 기행은 나의 불교에 대한 깊은 관심의 결과였는데, 그만큼 내 인생의 큰 축복의 경험적 유산이 되고 있다.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한 이후 줄곧 나는 그리스도교도로서 길을 걸어왔지만, 불교의 사상과 석가모니의 정신은 나의 가슴 깊이 자리하게 되었고, 예수의 예언자적 정신과 노자의 무위자연의 삶의 방식, 이 3가지의 인물과 사상이 조금도 배타적인 감정 없이 조화를 이루며 늘 내 정신생활의 기반이 되고 있다. 

이들 셋이 나의 가슴에서 늘 만나는 자리는 ‘공(空)-무(無)-허(虛)’라는 ‘비움의 정신’이다. 이러한 ‘비움의 영성’은 삶의 현장에서 ‘자리이타(自利利他)’의 ‘보살행’으로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이제 그 실천적 과제만이 지금 여기에 남아 있을 뿐이다. 

 

이명권 / 목사 · 비교종교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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