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과 성찰

기독교 교육은 ‘서로가 서로에게 배우는 교육’이라고 배웠습니다. 따라서 삶에서 만나는 모든 존재는 나의 스승이며, 마주하는 모든 일은 배움의 연속이고, 수련의 대상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수시로 잊는 것이 ‘서로가 서로에게 배운다’라는 사실입니다. 

저는 감사하게도 좋은 선생님들을 만나 신학생 시절부터 이웃종교 간 대화 모임에 참석하거나 그와 연관된 교육에 참여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또한 신학대학원 운동장은 화계사와 수유1동 성당 그리고 송암교회가 매년 이웃사랑 바자회를 여는 ‘나눔의 공간’이면서, 때때로 화계사 스님들과 원우들 간의 족구로 우애를 다지는 ‘친목의 공간’이기도 하고, 석가탄신일에는 신대원과 교회에서, 성탄절에는 화계사로부터 축하의 메시지를 서로 주고받을 정도이기에 우리가 함께 공존(共存)하고 있다는 것을 늘 느끼곤 했습니다. 외향적으로 다른 모양새이지만, 속으로는 모두 거룩하고 성스러운 본래의 신성함을 품고 있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절에 가도, 교당에 가도, 성당에 가도, 마치 아비 집에 온 듯 편하고 익숙한 것은 진흙탕 속에 있어도 맑아지고자 끊임없이 수련하는 기도의 집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20대 시절에는 새해가 되면 곧잘 오대산에 오르곤 했습니다. 문수보살님의 기운으로 맑기 그지없는 청정 도량이어서인지, 자꾸만 발길이 그곳으로 향했습니다. 새벽 3시경이 되면 도량을 울리는 사미승의 목탁 소리와 독경 소리에 저절로 눈이 떠집니다. 며칠째였을까요, 새벽 예불이 시작되기도 전인 이른 새벽, 저절로 발길이 닿아 문수보살 옆 벽을 마주하여 가부좌를 틀고 앉았습니다. 

‘이 뭣고?’만 집중하던 찰나, 갑자기 찬란한 빛 가운데 문수보살님이 제 앞에 현현하셨습니다. 눈을 감고 있었지만 너무나도 찬란한 광명에 눈이 멀 것같이 눈이 부셨습니다. 찰나 같지만 영원 같은 그 순간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날 기도 보살님께서는 저에게 ‘부처님의 가피를 받았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출가 제의를 참 여러 번 받았습니다.

 

‘평화운동’에 푹 빠져 홀로 순례를 하고 있을 적에, 불교에서는 평화운동을 어떻게 펼치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틱낫한 스님(Thich Nhat Hanh, 釋一行, 1926~2022)을 뵙고 싶기도 하여, 자두마을(plum village)에 가서 기거한 적이 있었습니다. 신기하게도 그곳에 도착한 날, 한국에서 비구니 스님 두 분도 같은 날 도착했습니다. 예상치 못하게 스님의 시자(侍者)가 되어 통역을 맡게 되었습니다. 

덕분에 어렵거나 불편한 일들은 피할 수 있었고, 틱낫한 스님을 바로 코앞에서 뵙고 법문을 들을 기회도 생겼습니다. 그런데 스님께 의도치 않은 목표(?)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교회 언니가 출가하면 정말 좋다.’ ‘머리 깎으면 더 이쁘겠다.’ ‘이곳에 온 이유와 목표가 머리 깎게 하는 것이었나 보다.’ ‘다른 곳 가지 말고 틱낫한 스님과 함께 크리스마스 보내고 함께 절로 가자.’ 등의 러브콜(?)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순례 중으로 이별 인사를 드리자, 홍삼정과 빳빳한 천 원짜리 넉 장과 1달러짜리 석 장을 주시며 ‘인연’을 걸었다고 가는 길을 축복해주었습니다. 

마치 긴 꿈을 꾼 듯 아득한 일들이 연결 연결되어, 동국대에서 인도철학을 공부하게 되었고, 최근에 수료를 했습니다. 이미 대가인 것 같은데, 아직도 대부분의 시간을 연구실에서 고군분투하시며 후학들의 길을 열어주시는 정승석 교수님과 진리의 등을 반짝이며 언제나 따뜻하게 바른길로 공부에 정진하도록 이끌어주시는 김호성 교수님을 지도교수님으로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산스끄리뜨어 경전을 놓고 공부할 때면, ‘아, 내가 신학생 시절에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이렇게 공부했으면 지금 성경을 통달했겠다.’라는 생각이 절로 나올 정도로 정통으로 학문을 하도록 이끌어주셨고, 두 사상이 교차하면서 흘러나오는 개똥철학도 경청해주셨습니다. 

저는 배움과 수련의 여정에 있습니다. 배움을 삶으로 살아낸다는 것을 두 교수님을 통해서 배웁니다. 겉의 모양새로 불완전한 나를 드러내기보다는 꾸준한 매일의 공부로 ‘나’라고 규정지어지는 불완전성을 정제하여, 부처님을 닮은 이들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리고 신성함을 품고 있는 모든 존재가 서로 도와 함께 존재하고 있다[共存]는 것을 매 순간 알아차리는 것이 저의 숙제입니다. 

이 모든 배움의 여정이 부처님의 가피 덕분일까요, 하나님의 은혜 덕분일까요? 

 

 이현아 / 한국기독교장로회 숨 부여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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