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과 성찰

내 나이 이미 70, 고희의 노인이 되었다. 그러나 47년 전 젊고 패기 있었던 청년 대학생 시절부터 지금까지 좋은 인연으로 이어진 한 사람이 있다. 나는 당시 ROTC(학군단 장교 후보생) 2년 차 후보생의 신분으로 대학교 4학년이었는데, 광주에 있는 모 사단에서 한 달 동안 땀을 흘리며 군사훈련을 마친 때였다. 부모님께서 살고 계시는 경상남도 하동읍에 가려고 순천에서 시외버스를 갈아타야 했다. 지리를 잘 몰라서 한 젊은 여성에게 시외버스터미널로 가는 길을 물었다. 그녀는 송광사로 가는 길이었는데 마침 시간이 남아 차표를 산 뒤 찻집에서 차를 같이 마시게 되었다. 첫인상에 나름 예쁘고 고운 목소리를 가진 매력적인 여성이었다.

그녀는 송광사에 가서 3천 배를 하려는 목적으로 간다고 했다. 불교적 신앙심이 대단히 깊은 분으로 느껴졌다. 훗날 이야기를 들어 보니 당시 송광사에서 법정 스님을 만났고 그 스님과의 대화를 통해 많은 것을 깨달을 수가 있었다고 하였다. 그런데 나와 불교는 전혀 인연이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개신교회의 전통적인 목사 가정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녔고, 불교를 접한 것은 간간이 학창 시절 소풍이나 수학여행을 갔을 때 유명 사찰을 구경하는 정도였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우리는 대화를 나누고 헤어지면서 연락처를 주고받게 되었고, 멀지 않은 날, 서울에서 두어 번 만나기도 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나는 졸업을 하게 되었고 육군 보병 소위로 임관하고 군대에 입대하였다. 4개월간의 고된 보병학교 훈련을 마치고 나는 동부전선 최전방 부대인 모 사단 보병대대의 중대 화기 소대장으로 보직을 받아서 초급장교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때 우리는 편지를 몇 번 주고받기도 했다. 어려웠던 군대 시절도 다행히 큰 사고 없이 전역을 하였고, 제대 후 잠시 한 번 만나 안부를 전하며 차 한 잔 나눈 후 인연은 그것으로 끝나는 것 같았다. 그녀는 불교학을 계속 공부하는 것으로 기억되었고 나는 전역한 그해 가을부터 곧바로 신학대학원에 입학하기 위하여 공부에 전념했기 때문이다. 1980년에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에 입학한 나는 목사가 되기 위한 신학 공부에 열중하였다. 1학년 때인 1980년에는 5 · 18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나 많은 아픔이 있었고, 교회의 교육전도사로 중학생들을 지도하는 교역자 생활도 하게 되었다.

같은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해 오던 후배 여대생과 교제한 끝에 대학원 2학년 때인 1981년에 결혼을 하여 가정을 이루게 되었고, 그다음 해에는 첫아들도 얻게 되었다. 잠실에서 신혼생활을 하던 중 어느 날이었다. 잠실의 어느 재래시장에 볼일이 있어 잠시 들렀는데 시장길에서 우연히 순천에서 인연이 있었던 그녀를 만나게 되었다. 긴 이야기도 나누지 못하고 결혼을 하였다는 소식 정도를 듣고는 아무런 연락처도 주고받지 못한 채 헤어졌다. 왜냐하면 서로가 결혼한 상태이고 우연한 만남으로 반갑게 만나기는 했으나, 인연을 이어가야 할 어떤 의미나 필요성이 서로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수년의 세월이 지난 어느 날 집안 큰형님의 아들인 조카의 결혼식 날이었다. 대학교 철학과 교수였던 형님의 아들이 한강 강변에 있는 한 갤러리에서 결혼식을 하게 되었는데 여기서 그녀를 또 만나게 되었다. 나의 형님과 개인적으로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는 것이다. 놀라운 인연이 아닌가? 그때도 반갑다는 잠시의 인사 외에는 더 이상의 긴 이야기를 나누지 못하고 헤어졌던 것 같다.

나는 목사로 교회의 목회를 하던 중 오래전부터 준비해 온 독일 유학의 길을 떠나게 되었다. 원래는 조직신학 분야에서 종교개혁자인 마틴 루터와 존 칼뱅의 교회론을 전공하여 한국 개신교회의 갱신과 개혁적 차원의 신실한 목회자로 남은 생애를 살아보고자 했었다. 그런데 처음 공부를 시작했던 괴팅엔(Göttingen) 대학에서 독일어 어학 과정과 고전어를 하고 나서 본격적인 공부를 하기 시작했을 때였다. 첫 학기에 청강을 했던 한 교수의 강의에서 그만 생각이 바뀌게 되었다. 종교개혁자들의 사상을 공부하여서는 한국교회가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었고, 독일교회에 유명한 기독교사회봉사신학(디아코니아)이 한국교회에는 매우 부족하고 가장 절실하다는 깨달음과 함께 전공 분야를 실천신학의 디아코니아로 바꾸기로 한 것이다. 그래서 학교를 하이델베르크대학으로 옮겼다. 

독일 유학 10년 만에 공부를 마치고 귀국하였다. 초창기에는 어렵사리 얻게 된 대학교의 시간강사 생활을 거쳐 겸임교수 생활과 모 교회의 부목사 생활을 겸하게 되었고, 조금씩 전공 분야에 대한 자부심과 책임감도 커져 갔다. 강남의 모 교회의 담임목사로 청빙을 받아서 담임목회도 했고, 이어서 총회의 사회봉사부 총무로 한 교단의 사회봉사 및 사회복지 최고책임자로서 실무를 맡아볼 수 있었다. 이 자리는 비단 사회봉사와 복지 분야뿐만 아니라 사회문제 대책사업으로 사회정의, 인권운동, 사회평화, 환경운동, 국내외 재해구호와 대북 구호사업까지 총망라하는 무겁고 귀한 직책이었다. 독일에서 기독교 사회복지신학을 전공한 나는 단순한 사회복지가 아니라 사회선교적 차원에서 각종 사회문제에 대한 공교회의 책임 즉 공공성 차원의 최고 실무책임자였기 때문에 책임이 막중했다. 

그 사이 그 여성은 불교계의 사회복지 전문가로서 사회복지학 박사로, 실무적 차원과 이론적 차원의 대가가 되어 있었고, 자연스럽게 인연이 이어져 비슷한 전공 분야에서의 교류도 이어지게 되었다. 내가 박사학위 논문을 쓰던 때 불교의 사회복지에 대한 이해를 위해 구입하여 읽었던 책이 알고 보니 바로 그녀가 저술한 책이었음을 뒤늦게 발견하여 묘한 인연의 의미를 혼자 느끼기도 하였다. 수년 전 《불교평론》 특집에, 섬겼던 교단의 해외재해구호에 관한 글을 써서 한 번 소개되었던 적이 있었다. 

이제 70 고희의 나이에 그녀와의 인연은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 이참에 짧은 인생이지만 참 좋은 인연의 만남을 되새겨보게 되었다. 남은 생애가 얼마나 될는지 몰라도 이러한 인연이 또 어떠한 인연으로 이어지게 될지 기대해본다.

 

이승열 / 목사 · 한국기독교사회봉사연구소 소장 

저작권자 © 불교평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