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과 성찰

지난해 늦가을 아침이었습니다. 그날따라 돌풍이 심하게 불었습니다. 대문이 덜커덩거리고, 집 앞의 큰 은행나무 잎들이 거센 바람결에 사방 흩날렸습니다. 우수수 우수수 쏟아지는 노란 은행잎들에 섞여 부고(訃告)도 한 닢 툭, 떨어졌습니다.

전혀 예기치 못한 일이었습니다. 춘천에 사는 후배로부터 마근 스님의 입적 소식을 듣게 된 것이었죠. 느닷없는 일이라 갑자기 심장이 벌렁벌렁. 종교가 다르지만 수십 년을 지친처럼 지내오던 스님, 마근 스님이 딴 세상 분이 되시다니!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요즘 들어 친한 동무들의 부고를 심심찮게 받긴 합니다. 텃밭의 김장 무가 쑥쑥 뽑혀 나가듯이. 이제 칠십 줄에 접어들었으니 사실 오늘 죽어도 이상한 일은 아니죠. 천방지축 떠돌아다니는 백세 시대라는 화두가 낯설지는 않지만, 더 오래 살겠다는 건 덧없는 욕심이지요.

나는 꽤 오래전 스님과 여행을 한 적도 있습니다. 중광 스님이 돌아가셨을 때 전화를 주셨는데, 통도사에서 열리는 다비식에 가실 거라고 해서 나도 함께 가고 싶다고 했더니, 원주 공항에서 만나 함께 가자고 하셔서 동행하게 된 것이죠. 비승비속의 삶을 살던 분이지만, 중광 스님 다비식에는 많은 이들이 모여 스님의 열반을 기렸습니다.

사실 마근 스님은 백담사 주지로 일하실 때 몸이 아픈 중광 스님을 극진히 모셨던 적이 있었지요. 그 무렵에 나는 마근 스님을 처음 만났는데, 당시 백담사에서는 대중들이 볼 수 있는 작은 소책자를 발행하고 있었지요. 소책자의 이름이 《설악》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 책자엔 시를 싣는 지면도 있어 나도 청탁을 받고 〈연꽃과 십자가〉라는 시를 실을 수 있었지요.

그것이 계기가 되어 마근 스님을 처음 대면하게 되었지요. 그런데 스님은 나에게 오시면서, 종교 간에 경계가 없는 목사가 있다며 중광 스님에게 묵화를 그려달라고 하셔서 그 유명한 달마도를 들고 오셨댔지요. 나는 지금도 그 달마도를 보물처럼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습니다.

하여간 마근 스님과는 잊히지 않는 추억이 많은데, 지금도 또렷이 기억나는 건 신흥사 주지를 그만두셨을 무렵에 만났을 때 들려주신 유쾌한 이야기. 나는 그 이야기가 아주 재미있고 깊은 의미도 있어 시로 옮겨 적었었지요.        

 

충청도 당진이 고향인 내 친구 마근(馬根) 스님이 어느 불자들 모임에 참석했는데, 갑자기 한 말씀 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난감하여 머리만 긁적이다가 퍼뜩 ‘마근’이라는 자기 이름이 생각나 이죽이죽 말머리를 열었다. 나 봐유! 여기덜 보시유! 뒈졌다가 살아나는 게 뭔지 아슈? 스님의 느닷없는 질문에 좌중은 쥐 죽은 듯 조용하기만 했다. 아 것도 모르슈? 좆 아녀유? 좆! 사람들이 다 죽는다고 배꼽을 잡고 웃어젖혔다. 스님은 한술 더 떠…… 내가 바루 부처님 좆 아니겄어유? 허허, 나는 날마다 죽구 날마두 살지유!

― 졸시 〈마근 스님〉 전문

 

이런 얘기도 스님은 나에겐 천진한 아이처럼 격의 없이 하셨습니다. 스님과 만나면서 어떨 때는 곡차도 어울려 마셨지만, 스님은 일구월심 가난하고 병들고 세상에서 소외된 이들을 부처처럼 소중하게 떠받들며 사는 모습을 보여주셨는데, 그야말로 스님은 보살행의 삶을 으뜸으로 여기며 살았습니다.

스님이 끌고 다니는 차엔 항상 짐을 실을 수 있는 수레가 달려 있었지요. 그래서 내가 왜 짐받이 수레를 달고 다니느냐고 물었더니, 그날은 대관령을 다녀오는 길이라며 말씀했지요. 대관령엔 산신제를 드리는 곳이 있는데, 그곳에서 산신제를 드릴 때 신에게 바치는 소머리나 돼지머리를 얻어 양로원이나 고아원에 전해주기 위해서 짐 싣는 수레를 이용한다고. 또 시골에 땔나무가 필요한 노인들을 위해 산에서 벌목을 한 뒤 버려진 나무들을 짐 싣는 수레로 실어다 준다고 했습니다.

몇 년도인지 기억이 가물거리지만, 어느 해 여름 스님이 내가 사는 원주로 오셔서 전화를 하셨습니다. 변두리의 한 식당에서 뵙기로 하고 나갔더니 스님이 먼저 와 계셨습니다. 내가 식당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자 스님도 일어나셔서 승복을 벗었습니다. 그 순간 헐렁한 승복 주머니 속에 있던 뭔가가 툭 떨어졌습니다. 오, 은장도! 칼집이 있는 작은 은장도였습니다.

“아니, 스님이 웬 칼을 품고 다니십니까?”

놀란 눈초리로 바라보는 내게 스님이 빙그레 웃으셨습니다.

“하하, 놀라셨수?”

그러면서 스님은 은장도로 당신 몸을 찌르는 시늉을 했습니다.

“이건 계도(戒刀)인데요. 내가 부처님 뜻에 어긋나는 짓을 했을 때 나를 찌르려구요.”

그러면서 스님은 박장대소를 터뜨렸습니다. 그날 식사를 다 마치고 나오기 전 내가 말했지요.

“계도는 청정한 산속에 사는 스님이 아니라 이 부박한 세파에 부대끼고 사는 나 같은 어설픈 수행자에게 필요한 물건이니, 그거 나한테 주시오.”

스님은 주머니에서 계도를 꺼내더니 말없이 건네주셨습니다. 나는 한동안 계도를 가방에 넣고 다니다가 잊어버리고 말았지만, 계도를 차고 다니면서 자기를 경계한다던 그 서늘한 말씀을 지금도 잊지 않고 있지요.

 

고진하 / 목사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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