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과 성찰

아주 오래전 이야기입니다. 크리스챤아카데미 창립기념식에 많은 손님이 초대되었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날이 부처님오신날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조계종 총무원장님이 축사를 하러 오셨습니다. 원장이셨던 강원용 목사님과의 개인적 연분도 있어 사양하지 못했다면서 말씀하셨습니다. “하필이면 왜 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에 오게 했습니까. 우리는 일 년에 하루 벌어 먹고사는데…… 그런데 목사님들 보면 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떻게 매주 벌어 먹고사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냥 불교 쪽으로 넘어오시지요……” 장내는 웃음바다가 되었지요.

여해 강원용 목사님은 어쩌면 한국에서 종교인의 대화를 가장 먼저 시작하셨고, 한국종교인평화회의(KCRP)를 출범시켜 종교 지도자들의 사귐과 평화를 위한 종교의 사회적 책임과 활동을 제도화하신 분입니다. 청년 시절부터 곁에서 강원용 목사님의 이웃종교에 대한 열린 태도와 솔직한 대화를 지켜보았기 때문에, 저도 나름대로 이웃종교에서 배우려고 노력해왔습니다. 만남과 대화를 통해 배운 것은 무엇보다 인간적 사귐이 중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교리의 비교 같은 이론적 접근보다, 공동의 사회적 과제를 가지고 상호 협력하면서 배우고 사귀는 것이 더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귐 위에서 형성된 관계와 대화가 더 오래가고 솔직한 것이지요. 저는 그렇게 맺어진 이웃종교인들과의 인연이 지금도 지속되는 것을 기쁘고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러 이웃종교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지만, 오늘의 주제는 특별히 불교에 대한 것이기에 불교에 관련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오래전 한국종교인평화회의 종교간대화위원회가 해남 대흥사에서 대화 모임을 가졌습니다. 새벽 예불부터 이틀 동안 탬플스테이를 하면서 대화를 한 것이지요. 두 가지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첫째는 독송인데, 경전을 함께 낭송하는 전통이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개신교회에는 예배 시간에 짧게 읽는 이른바 ‘성경 봉독’의 전통만 남아 있습니다. 공동체가 함께, 한목소리로 경전을 낭송하는 전통이 사라진 것이지요. 제가 아는 한 세계 종교의 모든 경전은 눈으로 읽는 책이 아니라, 귀로 읽는 책입니다. 더 이상 귀가 아니라 눈이 인식의 중요한 수단이 된 후부터, 기독교가 청각이 아니라 시각 중심의 종교가 된 것이 문제입니다. 청각은 포용적인 데 반해 시각은 경계를 만듭니다. 시각 중심의 인식은 오직 보이는 것만 현실이고 실체라는 편견을 강화시켰습니다. 그래서 보이는 것, 타인에게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보다 더 중요해졌습니다. 허영과 사치가 넘치는 것도 그 때문이지요. 자기다운 삶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눈치에 맞춰 사는 대리 인생을 살면서도 깨닫지 못하는 것이지요. 독송의 전통은 청각 중심의 인식을 회복하는 데 중요한 기능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개신교가 배워야 할 전통입니다.

둘째는 수도원 전통의 회복입니다. 불교는 출발부터 수도원 공동체로서의 전통을 지켜왔습니다만 16세기 유럽의 종교개혁 결과, 개신교는 수도원 전통을 버렸습니다. 수도와 수행은 개인적인 선택으로 맡겨졌고, 공동체적으로 실천되지 않았습니다. 신앙이 개인화, 내면화되는 길을 연 것이지요. 물론 개인의 내면적 확신과 영성 체험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공동체적 지도 없는 종교 체험은 자칫 종교 자체의 사유화, 사이비 종교로 전락했다는 것이 우리의 역사적 경험입니다. 공동체적 영성은 공간적 의미만을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공동체적 영성은 함께하는 형제자매들과의 관계, 공동체가 있는 세상에 대한 책임적 참여 속에서 형성되는 것입니다.

공동체적 영성은 훈련된 영성입니다. 머리와 입만 살아 있는 영성이 아니라, 온몸으로 체득하고 실천하는 것이지요. 아무리 아는 것이 많아도 자기 혼자만 알고 있고, 아무리 놀라운 종교적 체험을 많이 해도 세상은커녕 자기 자신도 변화시키지 못하는 영성은 진정한 영성이라고 할 수 없겠지요.

많은 사람이 제도적 종교의 위기를 말합니다. 최고의 고령화, 최저의 출생률, 코비드-팬데믹, 세속화 때문이 아닙니다. 종교의 위기는 언제나 종교 자체, 종교 안에서부터 왔습니다. 세상을 구원한다는 종교가 오히려 세상의 걱정거리, 조롱거리가 된 것이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종교가 세상의 희망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자기 종교의 가르침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도 구원하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도 구원하지 못하는 종교로 전락하겠지요. 종교들의 대화, 종교인들의 대화는 덕담이나 ‘주례사 비평’이 아니라, 자기 종교에 대한 철저한 신념과 헌신 위에서 진정성과 미래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채수일 / 목사 · 크리스챤아카데미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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