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과 성찰

하나.

그리스도인으로 불교를 공부하면서 얻은 많은 기쁨과 감사한 마음이 있다. 그중 제일 보배로운 일은 무엇일까 생각해 보니, 경청하는 마음이다. 다른 이들의 삶과 생각들을 마주하면서 진지하게 듣는 일은 진중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듣는 일은 생각보다도 많은 관심과 관계를 가지지 않으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처음 사찰에 가서 경전을 공부하고 가르침을 많은 신도들 사이에 앉아서 들은 것은, 1980년 초 대각사에서 열린 광덕 스님의 《반야심경》 강의였다. 사찰 마당까지 많은 사람이 모여서 스님의 강의를 들은 것은 불교 대중 강의의 첫 경험이었다.

듣는 일이 마음의 문을 열고 그저 진솔하게 집중하게 하고, 그 말들의 뜻과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일은, 내가 오래 불교를 공부하면서 깊이 고맙게 여기는 내면적인 변화 중의 하나이다. 종교 간의 대화에 임하면서 실제 청종의 기회는 내 영의 깊은 자리까지 어둠을 밀쳐내고 새로운 우정과 관계를 갖게 해준 소중한 경험이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주체적인 생각은 때로 상대를 향하여 고정된 관념을 갖게 되니 듣는 일에는 낙제생이 되곤 했다. 바로 그런 굳은 마음에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어 준 스님의 강의는 잊을 수 없는 체험이었다.

나중에 교수가 되어서 청도 운문사를 학생들과 함께 방문하여 당시 강원의 책임을 맡은 스님에게 말씀을 청한 적이 있었다. 그 스님은 이미 사찰과 산이 우리에게 법문을 전해준 마당이니 자신이 더 할 말이 없다고 하셨다. 한사코 그저 길벗이 학생들을 데리고 방문한 것을 고맙고 반가이 여기며, 극진한 환대로 우리 일행을 맞아준 그 기억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감동이었다. 그날 나는 수천의 법문을 들은 것 같은 풍요로운 마음을 안고 산사를 내려오게 되었다.

듣는 일과 청종하여 마음에 감동을 겪은 일은 내게 불교를 공부할 계기를 마련해준 하느님의 선물이라고 여긴다. 성경 가운데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로마서》 10)” 한 것처럼 듣는 일은 서로 실천할 최고의 덕목이다.

 

둘.

불교의 가르침 가운데 가장 소중한 것은 인연에 관한 것이다. 모두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평등의 관계와, 어느 누구 하나 업신여겨서는 안 된다는 소자 섬김의 도리를 그리스도교의 가르침 가운데서도 제일 소중한 것으로 여기고 산다. 폭력이 난무하고, 서로가 서로를 불신하는 세계 속에서, 오랜 전통인 불교 속에 감추어진 보배는 인연의 가르침이다. 어머니의 품 안에 안긴 갓난아이처럼 내게 신비한 깨달음을 준 것은 바로 인연의 다양한 가르침이다.

어린 시절부터 집안에서 내려온 어떤 분위기는 바로 만물은 인연으로 지어지고 서로 망처럼 얽혀 있다는 문화적 전승이다. 뒷산 자락 적석사에서 스님이 다녀가시면 우리 집 사랑방에는 아주 정겨운 덕담이 오간 기억이 남아 있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스님의 아주 가까운 동무이셨다. 어린 시절 쌀 짐을 어깨에 걸머지고 할머니 손 잡고 산길을 올라, 처음으로 절에 가서 자고 온 것도 잊을 수 없는 경험이었다.

내가 예수를 믿게 되는 바람에 용감한 십 대는 오랜 양명학가의 가풍을 흔들어 놓았다. 예수쟁이가 된 손자를 두고 집안이 갑론을박하던 때, 어른들께서는 여전히 사랑의 은혜를 베풀어주셨는데, 지금 생각하면 겸연쩍을 정도로 부끄러운 마음이다.

당시만 해도 예수 믿고 사는 것을 택한 내 생각만 옳고, 그리스도교는 절대 아무에게도 수그릴 수 없는 자기 정당화의 가르침이었다. 확신에 찬 내게 여전히 자비한 마음으로 배려하신 어른들의 마음은 인연설로 가득하셨던 것 같다. 어른들은 변화는 오고 있고, 그 변화는 어찌하였든지 인연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큰 생각 속에서 포용하고자 했을 것이다.

신학교를 졸업한 후 대학원 불교학과에서 용수(Nagarjuna)의 《중론》을 공부하면서 존재의 근원에 관심을 가졌고, 불교의 인식론을 공부하면서 연기의 중심을 이룬 인연의 깊은 세계를 탐닉하게 되었다. 어려운 공부였지만, 중관학도의 길을 오래도록 걷게 한 인연이었다. 물론 철학자 칼 야스퍼스의 학문적인 편력이 용수의 가르침을 읽게 하였지만, 그것도 넘치는 복 중의 복이었다. 모든 존재들 속에 편재하는 관계의 신비를 자기 비움과 보살의 실천으로 연결하는 중관학의 고리는 불교를 공부하게 한 내 영적 여정의 커다란 줄기 중의 하나이다.

당시 변혁의 시대 속에서 날 선 갈등도 교정에서 마주하였다. 이기영 선생님의 연구실에 학생들이 어용교수라고 낙서를 하고 못질을 하던 모습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런 이유로 교정 밖에서 자주 선생님을 뵙고 불교학 공부를 꿈꾸게 된 것도 큰 인연이다. 신학교 시절부터 은사이신 변선환 선생님과의 인연이 이런 많은 인연을 통째로 이어받게 하였으니 남산 자락은 행복한 곳이었다.

그 시절 함께한 인연들이 지금까지 연인처럼 존경과 그리움으로 내 잔을 넘치게 한다. 미국 교회의 주교로 일하면서 지금 만나는 사람들은 참으로 다양한 관계로 맺어졌다. 다문화 다인종의 복합적인 세상에서 큰 인연의 가르침을 응용하고, 소중한 사랑의 연을 맺고 살고자 하니 불교의 전통이 내 존재의 기반을 만들어 준 토대가 되었다.

한 사람 한 사람 사랑하고 살라고 하신 하느님의 가르침과 부처님의 인연설은 서로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으니, 다른 신앙의 전통 속에 살아가더라도 서로 연대하고 큰 정의를 위해서 일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인연의 관계론은 불교를 공부하고 또 생각하면서 일상 속에서 늘 가치로 적용하고 살 수 있도록 한 가르침이다. 세상에 인연 아닌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자연 세계와 관계를 선하게 연장하고,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이 서로 의지하고 공생하는 아름다운 창조의 세계를 나는 신비로운 인생으로 여기고, 지속적으로 그 인연을 헤아리고 살아가고자 한다.

 

셋.

불교를 공부하면서 내게 깊이 영향을 준 것은 관상적인 인생이다. 명상적인 삶을 하나의 리듬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기도 생활에서 일상에 적용한다. 한창 학문적인 욕심에서 정신없이 공부하던 버클리 시절, 대학원 선배가 편지를 보내오셨다. 기회가 없어서 자주 오가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한 번 만남은 영구한 인연이라 생각할 수 있을까. 부부가 함께 삼천 배를 하고 왔다는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은 삼천 배를 거의 마무리할 즈음 부처님의 얼굴에서 광채가 나더라는 이야기를 적으셨다.

아직도 나는 그런 체험과는 먼 거리에 있다. 그러나 바로 거기서 관상적 인생의 근거를 진귀하게 맛보게 된다. 가끔 그리스도인으로 금식도 하면서 기도하는 피정의 시간을 갖기도 한다. 그것은 성찰을 통하여 내면을 바라보게 하는 중요한 채널이 된다고 말할 수 있고, 또 삶의 많은 도전을 기도 생활로 소화하는 맛을 제법 체험하고 산다고 고백하고 싶다. 그런데 관상적인 인생은 침묵과 기도, 좌선과 수행의 정원을 통과하기도 하지만, 살아가는 스타일이 관상적일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을 말한다. 그 관상적인 삶에서 신앙의 본질에 진지하게 다가가곤 한다.

불교를 공부하고 불교 수행인들과 함께 살아가면서 나는 그 맑은 거울 앞에 서서 내 신앙을 돌이켜보곤 한다. 불교를 공부하고, 종교 간의 만남과 대화에 참여하면서 나는 나 자신의 그리스도교 신앙을 재건축하는 계기로 삼기도 했다. 거울 앞에 서니 내 얼굴이 보인다. 그 거울 앞에 서니 믿음의 언어가 서로 양식이 다르고 취향이 다르나 여전히 깊은 사색 속에서 마주치게 된다. 관상적인 인생은 내면의 세계를 바라보고, 외향적인 도전과 바람에 격의 없이 흔들리지 않고 중심이 있는 삶을 사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요사이는 관상적인 인생은 멈추어 설 수 있는 인생이라고 생각한다. 과중한 일들이 압박하여 오는 일상 가운데 멈춰 서서 내가 서 있는 장을 집중하다 보면, 두려움도 밀쳐내고 걱정과 근심도 제할 수 있는 순간이 다가온다.

불교의 가르침은 이렇게 일상에서 힘을 주어서 인생의 소명을 다하고 살 수 있게 도움을 주었다. 그리스도인의 소명은 바로 함께 어우러져서 모두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가치 있는 세계를 하느님의 나라로 믿고 현실에서 구사하고자 하는 것이다.

관상적인 인생은 생각하는 인생이다. 종교가 세상에 갈등과 대결을 가져오고, 상처들을 더하는 가해자가 되기도 하는 때에, 관상적인 인생의 가치를 구하면서 서로 깊이 생각하는 구도자들이 되는 것은 시급한 사회적인 요청이라 할 수 있다.

틱낫한 스님이 한번은 수유리 크리스챤아카데미에 오셔서 관상을 가르치신 적이 있다. 벌써 오래전의 일인데 그 수련회에 참가하고 스님과 사귀면서 그의 많은 글을 좋아하게 되었다. 관상적인 삶은 철저한 자비의 실천이고, 모든 중생을 아끼는 생명 존중의 길이라고 가르친 그의 손짓을 지금도 나는 감사하게 기억한다.

관상은 실천이고 사회변혁과 정의를 일구는 하나의 문이기도 하다. 관상적인 깨달음 가운데 불교와 그리스도교가 좋은 친구가 되고 피차의 길을 밝히는 이웃종교가 되기를 소망한다. 함께 어두운 세상, 상처 깊은 세계를 밝히는 등불이 되면 좋겠다.

 

정희수 / 연합감리교회 위스콘신연회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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