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원 지역 사례를 중심으로

1. 적산의 향방, 종교지형을 바꾸다

적산(敵産)은 귀속재산(歸屬財産)이라고 하며, 미군정 법령에 의 해 미군정에 귀속된, 국 · 공유재산 및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에 의해 축적된 재산을 말한다. 일본인들의 회사와 토지를 말하고 패망하면 서 가져가지 못한 일본인 자산을 적산이라 한다.

귀속재산으로 분류된 일본 종교단체의 재산은 일본불교 종파의 사원과 포교소 이외에도 신사와 교파 신도(神道), 일본기독교회 등 의 교당과 각종 교육기관 등 막대한 것이었다. 이에 최소한으로 파 악해도 교파 신도(천리교, 신리교, 금광교, 부상교)의 포교당 250여 개, 일본 종파(진종 대곡파, 일련종, 조동종, 정토종 등) 불교사원 120여 개, 일본기독교회 54개, 그리고 규모 있는 신사(神社) 60여 개, 소규모 신사(神祠) 939개 및 일본 불교계 학교 8개, 유치원 44 개, 강습소 13개, 의료기관 4개, 사회사업기관 12개 및 일본 기독교계 학교 1개와 유치원 3개 등이었다.

일본 종교 관련 귀속재산 처리 방침은 1946년 2월 군정청 문교부 교화국장 최승만과 미국인 국장 크네제비치 대위 이름으로 군정청 재산관리관에게 보낸 문서에서 “일본 종교 재산은 조선의 동등한 종교기관에 이양된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일본기독교회는 남 한의 기독교회가 접수하고, 일본불교 재산은 남한의 불교계가 접수 한다는 원칙이었다. 그리고 신사와 교파 신도는 이들과 무관하여 적용받지 않고 국가에 귀속되는 것이었다.

당시 최승만은 “해방 후 맨 처음 착수한 것은 각 기관에 조선인을 배치하는 일이었고,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일본인 소유 재산 및 사 찰(寺刹) 접수 문제였다. 이것은 원칙적으로 일본인 기독교 측 소 유 재산은 우리 사람 기독교 측에, 불교 측 소유 재산은 우리 사람 불교 측에 접수 관리토록 방침을 세웠었다. 약 50건을 처리하다가 너무 일이 많아서 이 사무를 각도 적산관리과에 이양하였다.”고 한다. 적산 처리 업무에서 일본인 소유 재산 및 ‘사찰’ 접수를 가장큰 업무로 지목하고 있다.

따라서 귀속재산을 누가 어떻게 처리하는가는 새로운 지배 세력 의 형성과 그 물적 토대를 갖는다는 것을 뜻한다. 국가 건설의 측면 에서 노동자와 농민을 중심으로 하는 진보세력과 기존 지배 세력 사이 정치 투쟁의 중요 문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미군정은 귀속재 산이 남한을 자본사회로 재편하고 미국식 민주주의를 만드는 물적 토대라는 것을 파악하고 있었다. 이에 미군정은 1945년 12월 6일 법령 제33호로 한국 내 일본 정부는 물론 일본 국민의 재산을 일본 이 사실상 항복을 결정한 8월 9일로 소급해 몰수하는 것을 선언했다. 이로써 민중 세력은 물적 기반을 파괴당한 반면, 미군정은 국가기구를 유지할 안정적인 물적 토대를 마련할 수 있었다.

미군정에 의한 적산불하는 1947년에 시작되었으나 미군정은 전 체 적산 기업 중 15% 정도만을 불하하고 나머지를 1948년 정부 수 립과 함께 대한민국 정부에 인계하였다고 한다. 1948년 9월 11일 재산 및 재정에 관한 한미행정협정이 체결되면서 귀속재산은 한국 정부로 이관되었다. 그리고 1949년 12월 ‘귀속재산처리법’이 제정 이 되면서 본격화되었다.

일본 불교계 적산이 미군정기를 통해 상당수 개신교계에 불하되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당시 서울 경기지역 40개적산 사원 가운데 10개도 안 되는 곳만 사찰이 유지될 정도였다.

특히 해방 후 전국적으로 91개 교회가 적산을 기반으로 설립된 것 으로 조사되었다. 이 가운데 일본불교 적산을 기반으로 설립된 교회는 14개였다. 일본불교 적산을 불하받은 교회는 다음 페이지의〈표 1〉과 같다.

이를 살펴보면 장로회 계열은 수원교회, 완도제일교회, 이리제일 교회 등 3건, 감리회 계열은 부천제일교회 1건, 성결교 계열은 공 주 · 군산중앙 · 부산 모리아 · 수원 · 원주 · 전주 · 조치원 · 천안 · 춘천중 앙 · 홍성교회 등 10건에 이른다. 성결교회 계통이 10건으로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만하다.

지역적으로 수원의 경우 수원장로교회와 수원성결교회가 있어 다른 지역보다 풍부한 사례를 제공하고 있다. 즉 대각사를 불하받 은 수원성결교회와 법륭사를 불하받은 수원장로교회의 사례를 통 해 불교 적산이 어떠한 과정을 통해 개신교 측에 불하되었는지를 구체적으로 파악해 볼 수 있는 셈이다. 따라서 수원 지역의 일본 종 파불교의 현황과 해방 이후 적산불하와 불하가 완료되어 법적으로 소유권이 이전되는 1960년대까지 상황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는 불교계 적산이 해방공간의 미군정기의 문제만이 아니라 이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적산불하와 6 · 25전쟁 이후까지 지속된 일련 의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2. 일본불교 종파의 진출과 현황

1876년 일본과 불평등조약(강화도조약)이 체결되면서 일제의 침 탈이 시작되었다. 이후 일본불교의 각 종파도 일제의 식민정책과 호응하며 개항장 등에 포교소(布敎所)와 별원(別院)을 설치하면서 제국주의적 침략의 첨병 역할을 수행했다. 이는 선교사→상인→군 대의 순서로 침략해 들어오는 제국주의적 침략 방식이기도 했다. 최초로 들어온 일본불교 종파는 진종 대곡파(眞宗大谷派)로 1877 년 부산에 별원(別院)을 설치하였고, 1881년 이후 일련종(日蓮宗), 정토종(淨土宗) 등이 뒤를 이었다.

1911년 1월 말 일본 종파불교의 조선 포교 현황은 사원(寺院)과 포교소는 진종 대곡파(眞宗大谷派) 23개, 진종 본파(眞宗本派) 22 개, 정토종(淨土宗) 25개, 진언종(眞言宗) 11개, 조동종(曹洞宗) 7 개, 일련종(日蓮宗) 등 6개 종파가 97개소 불교기관을 운영하였다. 이는 일본인들의 한반도 진출의 추세와 궤를 함께하는 것으로 식민지 경영의 강화에 따라 일본불교 종파의 활동도 강화되었다. 결국 일제의 패망을 앞둔 1942년 일본인 사원은 138개, 포교소 719 개로 그 규모가 엄청나게 확대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수원 지역도 마찬가지였다. 1910년대 수원에 진출한 일본불교 종파는 6개에 이른다. 정토종, 정토진종 대곡파, 정토 진종 본원사파, 진언종 고야산파(각파 연합), 일련종 등이다. 또한 일본불교 종파 이외에 일본 각파 신도(神道) 계통의 천리교 수원선 교소(天理敎水原宣敎所)가 1912년 8월 설치되었다. 또한 수원신사 (水原神社)가 1915년 설립 허가를 받고 1917년 10월 팔달산 수원향 교 위에 자리 잡았다. 1920년대가 되면서 일본 종파불교는 포교소 에서 점차 정토종의 수원사(水原寺)처럼 진언종 법륭사(法隆寺)와 일련종의 묘법사(妙法寺) 등 사찰의 형식을 갖추며 발전된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이후 정토진종 서본원사(西本願寺)와 1928년 조동종 대각사(大覺寺)가 추가되었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는 일본인 불교기관은 ‘사원( 寺 院 )’, 조선 인 불교기관은 ‘사찰(寺刹)’로 구분하여 용어를 달리해 사용했다. 동시에 조선인 사찰(寺刹)의 책임자는 ‘주지(住持)’라 한 것에 비해 일본인 사원(寺院)은 ‘주직(住職)’이란 용어를 사용하였다.

1930년대 6개 종파의 각 사원은 해방이 될 때까지 지속되었는데, 각 종파의 교세는 진종 본원사파 서법사가 가장 큰 세력을 갖추고 있었다. 뒤를 이어 조동종 대각사와 고의진언종 고야산 법륭사가 비슷한 규모를 보이고 있다. 

나머지 진종 대곡파 동본원사와 일련 종 묘법사, 정토종 수원사 등의 순서였다. 수원에 가장 먼저 들어온 정토종(수원사)이 가장 규모가 작은 종파였다. 이에 실증적 사례로 수원 지역의 적산인 일본불교 사원의 행방을 통해 해방 이후 종교 지형의 변화와 불교계의 현실을 살펴볼 수 있다.

 

3. 일본불교 적산의 내용과 불하 과정

1) 조동종 대각사와 수원성결교회

일제는 태평양전쟁이 불리하게 전개되자 선교사들을 모두 스파 이로 몰아 감금 추방하였고, 동양선교회 선교사들도 1940년까지 모 두 추방하였다. 일제는 신사참배의 강요와 함께 한국의 기독교 세 력을 단일화함으로써 통제를 쉽게 하고자 했다. 이는 일제에 순응 하는 기독교단을 만들고자 한 것으로 1940년 9월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구세군 등을 묶는 연합교단을 추진했다. 동시에 구미 의존 에서 벗어나 주체적인 기독교를 표방하며 외국인 선교사의 후퇴, 즉 선교사의 추방을 감행했다. 이에 1940년 12월까지 천주교와 구 세군, 성공회, 감리교 등은 교회의 순화갱정과 혁신 작업을 도모함 과 동시에 재림사상이 강한 성결교회와 안식교 등은 혁신이 아니라 해산을 종용했다. 결국 1943년 5월 24일 전국의 성결교회 지도자들 이 구속되고, 1943년 12월 29일 성결교회 교단이 해산되었다.

한편 수원성결교회는 1928년 3월 이성봉(李聖鳳) 전도사가 파송되어 성안 신풍리에 16평 규모의 셋집을 얻어 전도를 시작했다. 이후 10개월 만인 1929년 2월에 신자가 60명에 이르는 발전을 이루 면서 성결교 본부의 원조금과 교회 신자들의 헌금으로 성안 신풍리 410번지(대, 365평)를 구입했다. 이곳에 건평 43평의 시멘트 콘크 리트 건물을 준공하여 1929년 크리스마스를 맞춰 신축 예배당 봉헌 식을 거행했다. 그러나 1943년 성결교단이 해체되면서 수원성결교 회는 일본 헌병대가 점령하고 정신대 간판을 붙였다고 하는데, 이 유를 알 수 없는 불이 나서 교회가 소진되고 말았다.

해방 뒤 1945년 10월 수원교회 재건을 결의하고 조주찬 목사가 수원으로 파송되었다. 당시 수원성결교회는 화재로 소실되어 그 터 에 최성대 집사가 소경인 딸과 함께 움막을 짓고 기거하였다. 그래 서 화성행궁 앞 적산가옥(신풍리 435번지) 2층을 빌려서 예배를 시 작했으나 장소도 비좁고 재산권 문제도 복잡하였다.

이때 수원에서 가장 큰 붉은 벽돌 건물 가운데 하나였던 일본불 교의 절인 대각사를 접수하였다.

일본인 승려들은 해방과 더불어 다 도망하고 그곳에서는 어떤 사람 이 고아원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고아 20여 명을 돌보는 일을 유지할 수 없어 조주찬 목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 조 목사는 계속해서 헌신적으로 고아들을 돌보면서 대각사 절터에 수원성결교회의 간판 을 걸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아치형으로 걸린 수원교회의 간판이 감쪽같이 없어지는 일이 발생했다. 알고 보니 장로교회의 이 주원 목사가 배후에서 지휘한 일이었다. 그러나 오히려 그 일로 인 하여 더 좋은 결과를 얻게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이미 조주찬 목사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황옥주 검사를 비롯하여 경찰서장, 군수, 적산관리처장 등의 도움으로 간판을 다시 찾았을 뿐 아니라 합 법적으로 대각사 전 건물과 대지가 수원교회 소유로 되는 기회가 되었다. 당시 수원경찰서 서장이 적산관리처 수원 책임자에게 말하기를 수 원성결교회가 적산가옥 2층을 빌려서 사용하고 있는데 이번 기회에 수원교회에 드리는 것이 좋겠다고 하니 모두가 동의하였다. 제반 절 차를 밟아서 법적으로 아무 문제 없이 수원교회는 일본인들이 물러감과 함께 쫓겨간 우상의 터전에 교회를 재건하게 되었던 것이다. 

송기식 《수원성결교회 70년사》 1999, 137쪽.

인용 내용이 장황하지만, 해방 이후 적산과 처리 과정을 잘 보여 주는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조동종 대각사를 접수하여 성결교회를 세우게 된 사실은 검사와 수원경찰서장, 적산관리처 수원 책임자 등 권력의 실세들의 힘을 빌려 적산이 처리되는 상황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일제강점기 수원 지역 조동종은 1923년 이전 ‘조동종 포교소’를 설치 운영하였으나 세력은 미약했던 것 같다. 이후 1928년 4월 27 일 ‘조동종 대각사(曹洞宗大覺寺)’라는 이름으로 설립 인가되었다. 대각사가 위치한 수원면 산루리 410번지(전, 672평)는 국유지였다. 조동종 포교소가 성장하면서 국유지를 불하받아 조동종 대각사를 건립한 것이다. 대각사는 교동 영국성공회 교회의 왼편 아래쪽으로 맞닿아 있는 곳으로 오른쪽으로는 수원향교가 바라보이는 팔달산 중턱에 자리하였다.

일본이 패망하면서 일본인들이 버리고 간 불교계 적산 건물인 조 동종 대각사를 이용하여 고아원을 운영하며 선점한 사람이 있었다. 고아원 운영이 어렵게 되자 성결교회에 도움을 요청하였고, 성결교 회는 고아원을 운영하면서 이곳을 교회로 만들었다. 같은 개신교인장로교회에서도 이곳을 차지하려고 경쟁적으로 움직였다는 사실 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6 · 25전쟁으로 성결교회가 확보한 일본 절 대각사 교회당은 터키 군부대가 점령하고 간판을 걸었다. 1952년 봄 터키 부대가 철 수한 후 다시 교회당을 찾게 되었는데, 이때 불교계에서 이의를 제 기하였다. 사용하고 있는 교회당이 적산이라 하여도 그것이 본래 일본불교 사찰이었다면 마땅히 그 재산은 한국불교로 넘어와야 한 다는 것이었다. 천안에 살고 있는 불교 신자 김청이란 사람이 당시 김법린 문교부 장관을 배경으로 압박해온 것이었다. 이에 성결교회 의 이우호 전도사는 천안교회 최창도 목사가 함께 천안에 사는 김 청에게 가서 강력히 항의했고, 조주찬 목사 때부터 재산 문제를 관 여했던 김윤석이라는 영어 교수가 적산관리처에 근무 중이어서 불 교계의 이의를 잠재우고 재산권을 확보했다고 한다.

불교계의 대응이라고 보기에는 민망한 상황이 연출된 셈이다. 김법린(金法麟, 1899~1964)이 제3대 문교부 장관으로 재직했던 시기 (1952.10.30~1954.4.20)에 천안에 사는 김청이라는 불교 신자가 문 제를 제기했다는 것인데, 이는 종단이나 본사 용주사 차원이 아니 라 수원 거주자도 아닌 천안에 사는 일개인의 불교 신자가 이의를 제기한 것이다. 이는 개인의 사적 재산취득으로 비쳤고, 결국 그러 한 양상으로 마무리된 셈이다. 불교계의 조직적이고 집단적 대응이 전무한 상태였음을 알 수 있다.

사사지(社寺地)였던 교동 14번지 일대는 원래 ‘조동종 교학재단 (曹洞宗敎學財團)’ 소유였다. 이후 1965년 6월 8일 대한민국으로 권리 귀속되었다가 바로 같은 날 ‘재단법인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유 지재단’(서울시 무교동 12)으로 소유권이 이전되었다. 결국 조동종 대각사라는 적산이 최종적으로 1965년에 성결교회 측으로 불하가 완료된 셈이다.

2) 정토종 수원사와 수원중앙침례교회

수원은 일본불교 종파 정토종에서 1905년 12월 수원군 남부면 교동에 수원사(水原寺)를 건립하였다. 이로써 수원 지역에 일본불 교 종파의 전초기지가 처음 마련된 셈이다. 이미 정토종은 서울에 진서파개교원(鎭西派開敎院, 1898.12)과 인천에 인천사(仁川寺, 1901.6)를 설치 운영하고 있었다. 따라서 정토종의 수원사 건립은 경기 남부에 대한 포교를 염두에 둔 것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변경으로 정토종 수원사가 있는 교동은 산루리453번지(社寺地, 558평)로 바뀌었다가 현재 다시 교동 144번지가 되었다. 정토종의 수원사는 미도리유치원을 설치 운영했는데, 이 는 수원 최초의 유치원이었다. 1916년부터 1927년까지 약 11년을 살았던 수원을 고향으로 생각한 소설가 유아사 가쓰에(湯淺克衛, 1910~1982)의 단편소설 〈솔잎과 모란(松葉牧丹)〉은 정토종 수원사 를 모델로 한 법정사가 등장한다. 〈솔잎과 모란〉은 원래 1939년 2 월에 쓴 〈하야야 모모코(葉山桃子)〉의 제목을 고친 것이다. 1939년 시점에 이미 미도리유치원은 폐쇄가 된 듯하다.

현재 정토종 수원사 터에는 수원을 넘어 세계적 대형교회로 평가 받는 수원중앙침례교회가 자리하고 있다. 수원중앙침례교회 홈페 이지에는 1951년 1월 15일 ‘이순호 장로 개척(교동 144번지)’으로 기록되어 있다. 정토종 수원사를 이순호 장로가 6 · 25전쟁 와중에 개척한 것이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원래 침례교회는 팔달로 1가 56번지에서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 다. 1951년 1월 정토종 수원사를 침례교회가 접수하게 되면서 원 래 있었던 침례교회에 1952년 11월 6일 예정으로 중앙아동재생원(中央兒童再生院)을 설치하기로 했다는 기사가 있다. 이는 미 공군 제8 항공폭격대에서 경기도 전재아동과 고아들 가운데 신체허약한 아이들의 건강 회복을 위해 개설한 것이다. 따라서 침례교회는 미 공군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교동 144-1번지(504평)는 사사지(社寺地)로 정토종 ‘수원사(水原寺 )’ 소유에서 1954년 6월 5일 ‘재단법인 대한기독교침례회’(부산시 남포동 2가 22) 이름으로 소유권 이전 등기가 되었다.

같은 사사지였던 교동 144-2번지(485평)도 교동 144번지에서 분 할되어 재단법인 대한기독교침례회 이름으로 소유권 이전 등기가 되었다. 그리고 옆의 교동 145번지(전, 308평)는 일본 도쿄의 ‘정 토종포교재단(淨土宗布敎財團)’ 소유였다. 이 역시 1954년 6월 5 일 재단법인 대한기독교침례회 이름으로 소유권 이전 등기되었고, 1961년 8월 15일 지목이 밭에서 대지(垈地)로 바뀌었다.

한편 수원중앙침례교회는 1960년 최성업 목사와 김장환 목사가 공동 목회를 거쳐 1965년 11월부터 김장환 목사가 담임하면서 대 형교회로 급성장하였다. 미국 유학에서 돌아온 수원 토박이 출신 인 김장환 목사는 미국의 교회와 유대를 강화해 수원기독병원과 수 원기독회관을 건립 운영하며 지역에서 탄탄한 기반을 다졌다. 더욱 이 1973년 5월 30일부터 6월 3일까지 여의도광장에서 열린 빌리 그 레이엄 전도집회에서 통역을 맡으면서 일약 스타로 떠오르며 개신 교의 기린아가 되었다. 분열과 경쟁으로 반목하던 개신교단 전체를 아우르는 100만 명이 넘는 여의도 집회는 TV를 통해 보도되면서 기독교의 성장과 세력을 대외적으로 과시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이 는 이후 남한 사회의 종교지형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온 일대 사건 으로 읽히고 있다.

특히 김장환 목사는 이후 민주당의 미국 대통령 카터와는 같은 침례교인으로 유대관계를 맺었고, 공화당의 부시 부자 대통령들과 는 빌리 그레이엄 목사를 통해 소통했다. 이에 박정희, 전두환, 노 태우, 김영삼 대통령 등을 미국 행정부와 연결하는 역할을 하며 정 치적 영향력을 강화해갔다. 이후 세계침례교연맹(BWA) 총회장으 로 선출되어 국제적 영향력을 떨쳤고, 현재도 극동방송 이사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러한 김장환 목사의 정치적 영향력 때문인지 수 원중앙침례교회의 신자들 가운데 현 국회의장 김진표 등을 포함한 정치인들이 많다는 점도 주목할 대목이다.

수원중앙침례교회는 1970년 5월 교회당(2층, 건평 300평)을 신축 한 이래 1984년, 1994년, 2023년 현재까지 10년 또는 20년 안에 교 회를 보다 크게 신축하는 모습을 통해 개신교회의 성장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3) 진언종 법륭사와 수원장로교회

기독교장로회 수원교회는 현재 교동에 자리하고 있는데, 사람들 은 ‘돌교회’ 또는 ‘돌집교회’로 부른다. 교회의 외부가 화강암으로 마 감된 독특한 질감 때문이다. 미군들이 제공한 건축자재로 지은 교 회로 유명하다. 그러나 자재를 벽돌 대신 화강암으로 바꾸어 제공 했던 것이다.

그 당시 몇몇 교회들은 해방 후 일본 사람들이 자신들의 나라로 돌 아가자 그들이 점령했던 귀속 건물이나 가옥, 다시 말해 적산 건물이 나 적산가옥을 불하받거나 인수하여 교회당으로 삼고 있었다. 김갑 희 씨 남편 곽수림 경찰서장이 이런 적산 건물이나 가옥 중 하나를 예 배당으로 쓸 수 있게 주선하였고, 그 결과 적산 건물인 일본 불교사찰 을 예배당으로 빌릴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곧 우상이 섰던 곳을 하나님의 성전으로 탈바꿈시키는 거룩한 역사가 일어나는 시점이기도 했다. 김갑희 씨 집에서 예배를 드린 한 달 후인 1946년 크리스마스 무렵 에는 예배 처소를 수원 남창동, 일본인이 쓰던 불교사찰 건물로 옮기 게 되었고, 또 이때부터 예배 처소에서 정식으로 예배드리게 됨에 따라 교회 이름도 수원장로교회로 정하게 되었다. 

《수원교회60년사》 수원기독교장로회 수원교회, 2008, 48쪽.

1945년 해방이 되자 이북에서 월남한 장로교 신자들은 수원 토박 이들이 만든 감리교 종로교회에 나가지 않고 별도의 모임을 통해 독자적인 장로교회를 갖고자 했다. 이에 1946년 11월 27일 이북 출 신인 수원경찰서장 부인인 김갑희 집에서 첫 회합을 가졌다. 장로 교 신도 12명으로 서울농대 현신규, 이태현 교수와 수원교도소에 근무하던 임춘성 목사 등이었다. 농대 현신규(玄信圭, 1911~1986) 교수는 수원장로교회 첫 번째 장로가 되었는데, ‘은수원사시나무’를 만든 육종학자로 수원장로교회의 명망과 교세를 확장하는 데 큰 역 할을 한 인물이다.

한 달 뒤인 1946년 12월 크리스마스 무렵에 예배처를 수원 남창 동의 일본인 불교사찰로 옮기게 되었고, 이때부터 교회 이름도 비 로소 ‘수원장로교회’로 정하게 되었다. 남창동 일본인 절은 진언종 고야산 법륭사(法隆寺)였다.

법륭사는 1909년 3월 성안 남창리 226번지(社寺地, 94평)에서 고 야산대사교회 수원지부(高野山大師敎會 水原支部), 진언종 고야산 포교소라는 이름으로 시작되었다. 이후 남창리 118번지(대, 76평) 를 구입하였고, 다시 1922년 1월 19일 진언종 고야파 법륭사(眞言宗高野派 法隆寺)라는 이름으로 남창리 232번지에 건립되었다. 대 개 ‘고야산 법륭사’로 통칭되었는데, 조선인 포교를 위해 1930년대 중반 중영(中營) 자리에 무산아동 교육기관인 국민학당(國民學堂) 을 운영하기도 했다.

한편 해방 직후 월남해서 수원에 토착적 기반이 약했던 장로교 신자 몇 명이 일본 적산사찰인 법륭사를 접수할 수 있었던 힘은 신 앙심 깊은 김갑희 집사의 남편이 수원경찰서장 곽수림이었기 때문 이다. 장로교회에서 차지한 법륭사 건물은 ‘불교사원 안의 20평 남 짓한 예배실과 사무실, 그리고 다다미 다섯 쪽이 깔린 것이 전부인 목사 사택’이 전부인 규모였다.

경찰서장의 힘으로 일본인 적산사찰인 남창동 법륭사를 접수한 수원장로교회는 1947년 7월 안성교회에서 활동하던 함경도 출신의 이주원 목사를 초빙하였다. 이로써 안정적인 목회 활동을 통해 월 남한 서북인들을 중심으로 신도들을 안정적으로 확보해갔다.

더욱이 민족적 고난인 6 · 25전쟁으로 수원에 몰린 피난민들을 대 거 수용하면서 장로교회는 나날이 확장되어 갔다. 전도를 따로 하 지 않았는데도 물밀듯이 새 신자들이 교회를 찾아왔다. 새로 찾아 온 신자들은 대부분 전쟁 피난민들이었다. 전 세계 교인들을 중심 으로 모은 구호물품들은 세계교회협의회(WCC)를 통해 우리나라 에 전달되었고, 수원 지역 교회들 역시 WCC 구호물품을 배당받게 되었다. 이러한 구호물품을 받기 위해서는 교회를 찾아와야 했던 것이다. 특히 이북 월남민들이 만든 장로교회는 피난민들의 만남의 장소가 되었고, 교회로 와야 같은 처지의 피난민들을 만나고, 서로 정보를 교환할 수 있었기에 교회를 찾아오는 피난민들의 숫자는 점 점 늘어만 갔다. 이는 6 · 25전쟁 이후 기독교 신자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할 수 있었던 객관적 요인이기도 했다.

한편 이주원 목사는 모교 한국신학대학을 방문해서 미군이 군수 물자 중 건축자재 일체를 기독교 사업에 무료로 제공해준다는 소식 을 듣게 되었다. 이에 수원비행장 미군 목사 로건을 찾아가 부탁하 자, 건축비는 지원할 수 없으나 건축 자재만은 협조해 줄 수 있다고 했다. 미군들이 직접 시멘트, 목재, 함석, 철근, 페인트, 못, 파이프 등 자재들을 교회로 운반해줌으로써 교회는 새로 신축할 부지를 물 색했다. 이때 매산로 3가에 있는 옛날 일본불교 사원 자리가 물망 에 올랐다. 아마 일련종 묘법사였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교인들 은 다시 불교 사원 자리에 교회를 세우는 것을 마땅치 않게 여겼다. 당시 목회자들은 불교 사찰을 교회로 만드는 일을 ‘사교에 대한 승 리’로 인식하고자 한 반면, 일반 신도들은 껄끄러워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좀 더 좋은 교회 부지를 알아본 결과 수원 교동 2번지 수원 법원장 사택이 물망에 올랐다. 마침 법원장이 춘천으로 전근을 가 게 되면서 이곳을 교회 부지로 선택하고 1954년 1월 미 제5공군으 로부터 연건평 230평 2층 건물 신축에 필요한 물자를 지원받게 되 었다. 동시에 일본인 사원(법륭사)을 불하받았다.

이처럼 일본 사찰을 접수하여 교회당으로 삼는 것과 법원장 사택을 교회로 만드는 일, 교회 건축자재를 미군으로부터 제공받는 것 과 같은 일련의 과정은 상당한 특혜적 시혜가 아닐 수 없다. 특히 장로교 목사 출신인 함태영(咸台永) 부통령이 수원에 와서 1954년 2월 28일 12시 수원장로교회의 예배를 보고 서울로 올라갈 정도였 다. 이러한 상황은 수원장로교회가 괄목할 만한 성장을 가져오게 만든 요인들이었다.

수원장로교회는 1956년 11월 교동 2-7번지의 현 예배당(돌교회) 을 준공하였다. 준공 바로 직전인 1956년 8월 남창동 옛 예배당 건 물과 터(법륭사)는 교육청을 통해 남창국민학교에 매도하였다. 그리고 1967년 11월 현 교회의 대지(법원장 관사 터)를 불하받아 등 기를 완료하였다. 현재 법륭사 자리는 남창국민학교가 되었다.

4) 진종 본원사파 서법사와 용주 자혜원 분원

1918년 3월 18일, 진종 본원사파는 ‘본파 본원사 수원포교소(本派本願寺水原布敎所)’라는 이름으로 수원면 산루리 425번지에 설 립 인가를 받았다. 그리고 바로 5월 8일 산루리 421번지로 이전하 였다. 교동의 영국성공회 교회와 바로 붙어 있는 곳이었다. 사람들 은 남창동의 동본원사에 대응하여 ‘서본원사’로 불렀다. 그러다가 1931년 8월 1일, 수원읍 매산리 57-5번지에 이전하여 진종 본원사 파 ‘서법사(西法寺)’라는 이름으로 설립 허가를 받았다. 몇 해 뒤인 1935년 바로 옆 매산리 57-7번지(대, 203평)를 구입하여 사역을 넓 혔다. 이곳은 일본인 소학교 바로 앞으로 1935년 6월 19일 ‘서법사’ 의 이름으로 소유권이 등기되어 있었다.

해방 뒤 서법사는 용주사의 윤호순이 접수한 것으로 추정된다.

윤호순(尹豪淳)은 대본산 용주사 주지 강대련(姜大蓮, 1875~1942) 의 상좌로 1929년 10월 12일 개운사 불교전문강원 대교과를 제2회 로 졸업하였다. 1929년 12월 수원 성안 남수리 수원포교당(현 수원 사) 포교사를 시작으로 1942년 용주사 감무, 해방 후 용주사 총무를 맡았다. 손계조(孫啓照)의 뒤를 이어 1949년부터 용주사 주지가 되 었고, 1953년 주지로 재선한 대처승이었다.

당시 용주사의 대처승들은 사하촌인 송산리, 안녕리 일대에 살았 다. 윤호순을 비롯하여 김복기, 박승룡, 조재두, 유계득 등은 송산 리에 살았고, 강대련의 아들 강석희는 안녕리에 살았다.

용주사의 대처승들은 송산리 및 안녕리에 거주하면서 우익의 입 장에 서 있었다. 손계조는 한독당 화성군당 위원장을 역임하였고,윤호순은 화성군 교육위원회 부위원장, 안룡성인학교 계획위원 등 으로 지역 유지로 역할을 하였다. 윤호순의 상좌였던 박승룡(朴承龍 , 1916~1996)은 태안농협장,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과 태고종 총무원장을 역임하였다.

한편 용주사 주지 윤호순은 1949년 6월 10일 고아 50명을 수용 하는 고아원 인가를 받아 용주사에 용주자혜원(龍珠慈惠院)이라는 고아원을 운영하였다. 이듬해 6 · 25전쟁으로 수원 인근 고아원의 고아들이 용주사에 수용되었다. 용주자혜원을 비롯하여 천일고아 원, 한일고아원, 원불교 보화원 등 8개 고아원이 연합 수용되었다. 당시 고아들은 대웅보전의 큰 법당을 제외하고 방마다 고아들이 가 득 차서 용주사 전체가 고아원이 되다시피 했다. 수용 아동 수는 600~700명 수준이었다. 8개 연합고아원 총책임자는 삼일학교 교장 을 역임하였던 김병호(金炳浩)였다. 고아원의 운영은 정부에서 내 려주는 구호미(救護米)와 분유(粉乳), 그리고 수원비행장 51비행단 의 지원으로 유지되었다. 이러한 연합고아원의 운영은 근 1년 정도 유지되었다.

이후 용주자혜원 소속 고아들은 만수리실과 나유타료의 큰방에 남녀로 분리 수용되었다. 오른쪽 나유타료 큰방이 남자, 왼쪽 만수 리실 큰방이 여자들로 나뉘었는데, 유아부, 유년부, 소년부 등으로 구성되었고 인원은 약 300명 정도였다.

용주자혜원 원장은 당시 주지였던 윤호순이었으나 대처분규가 일어나면서 용주자혜원은 용주사 밖 오른쪽에 새 건물을 지어 이전 했다. 이때 고아원장은 윤호순의 둘째 딸인 윤영환(尹暎桓)이 맡았 다. 1953년 용주자혜원에서는 직조기 10대를 구입, 원아들에게 직 조 기술을 교습하여 자립할 기회를 주었다. 용주자혜원은 직조공장 을 운영하면서 320여 명의 원아들에게 직조 기술을 가르쳤다. 1955년 이후 용주자혜원은 용주사를 떠나 오산 가수리로 옮겼다가 평택 서정리에 자리 잡았다. 서정리 고아원은 24동의 고아원과 기타 관 리동까지 27개 동으로 이루어진 대단위 고아원으로 성장했다. 한 동의 건물이 대략 25평 정도였다.

1949년 용주사 주지직을 윤호순에게 물려준 손계조는 수원 남수 리에 있는 수원포교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나 대처분규에 따 라 수원포교당에 있기도 어려워지자 수원 시내 수원소방소 아래쪽 에 땅을 사서 대련사(大蓮寺)라는 절을 만들어 독립하였다. 대련사 는 강대련 스님의 법명을 딴 절인 셈이다. 손계조 뒤를 이어 용주사 주지가 되었던 윤호순도 대처분규로 용주사와 인연을 접어야 했다. 그는 용주자혜원 운영으로 활로를 개척하였다. 1955년 비구-대처 분쟁 당시 용주사 주지였던 윤호순을 대신해 노전(爐殿)을 맡았던 비구승 한월해(韓月海)가 주지를 잠시 맡았다가 이후 대처승이었 지만 법적으로 이혼을 한 안성포교당의 조만해(趙萬海)가 비구 측과 손을 잡고 용주사 주지가 되었다.

한편 수원 팔달산 아래 매산국민학교 앞쪽에 있던 일본인 사원인 서법사(西法寺)를 6 · 25전쟁 직후 윤호순의 상좌 박승룡이 접수해 서 사용하다가 윤호순이 용주자혜원 분원을 설치 운영하였다. 해 방 후 서법사가 위치했던 곳인 매산로 3가 45번지 일대 1,200평이 넘는 사사지(社寺地)와 매산로 3가 48번지 60여 평의 대지 등은 윤 호순을 비롯한 개인들에게 1960년대 중후반 불하되었다. 본사 용 주사가 아닌 윤호순이 불하받음으로써 개인 재산이 되었고, 지금은 유명한 부대찌개 음식점(두꺼비집)과 연립주택이 들어서 있다.

5) 동본원사와 묘법사의 개인 불하

정토진종 대곡파 동본원사(東本願寺)는 1909년 5월 성안 남창동 에 ‘진종 대곡파 수원포교소’(주임자 前田鐵心)로 시작되었다. 처음 남창리 180번지(社寺地, 64평)에서 1918년 12월 25일 ‘대곡파 본원 사 수원포교소(大谷派本願寺水原布敎所)’로 명칭을 변경하면서 위 치를 남창리 217번지(대, 72평)로 옮겼다. 1920년 5월 30일 포교소 (포교사 木戶等觀)를 폐지했다가 며칠 뒤 다시 개설하는 등 운영에 문제가 있었던 적도 있었지만, 바로 옆 남창리 218번지(대, 68평)도 구입해 사찰 규모를 넓혀 사세를 확장해 갔다. 남창동 대곡파 동본 원사의 소유자는 오타니 고쵸(大谷光暢, 京都市 下京區 鳥丸通7條上常盤町 5)의 이름으로 등기되었다. 오타니 고쵸는 교토 동본원사 교주였다.

남창리 217번지와 218번지는 남창정(南昌町)을 거쳐 해방 후 남창동 116번지와 117번지가 되었다. 해방 후 대곡파 동본원사는 적 산으로 일반인들이 들어와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동본원사의 남창 동 116-1번지(대, 72평)와 남창동 117-1번지(대, 68평)는 6 · 25전쟁 이 끝난 뒤인 1955년 10월 14일 대한민국으로 권리 귀속과 동시에 당일 개인에게 불하되어 소유권 이전이 되었다.

일련종은 1917년 8월 14일 ‘일련종 수원포교소(日蓮宗水原布敎所 )’(산루리 412)로 설립 인가되었다. 일련종 수원포교소는 1923년 7월 1일 산루리에서 매산리 57번지로 포교소 위치를 변경했다. 일 본인 소학교(현 매산초등학교) 앞의 서법사에서 서쪽으로 접해 있 다. 일련종 묘법사로 불렸지만, 공식적인 사원 명칭으로 인가 등록 된 것은 아닌 듯하다. 왜냐하면 1916년 경남 창원군 진해에 일련종 묘법사라는 같은 이름의 사찰이 이미 운영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매산리 57번지(임야, 3,978평)는 4,000평에 이르는 넓은 땅이 필지 분할되어 각각 서법사와 묘법사가 자리 잡은 곳이었다. 묘법사가 자리한 곳은 매산로 3가 43-1번지(360평)로 1957년 12월 대지로 지목이 변경되면서 회복등기 의거 천야실(淺野實, 매산 로3가 43번지)의 소유가 되었다. 다시 1964년 7월 13일 대한민국으 로 권리 귀속됨과 동시에 서법사를 불하받았던 윤호순(尹豪淳, 매 산로3가 45)에게 소유권이 이전되었다가 같은 날 최복성(崔福成, 매향동 67번지)에게 이전되었다. 1968년 7월 1일 다시 수원시로 소 유권이 이전된 뒤 1968년 11월 1일 수원소방서 건축 기공식이 거행 되었다. 현재 이곳은 수원소방서 매산119안전센터로 사용 중이다.

 

맺음말

수원 시내의 일본불교 적산 6개 사원 가운데 3개 사원(법륭사, 수 원사, 대각사)은 개신교 측에 불하되어 현재 수원을 대표하는 대형 교회로 성장하는 토대를 제공하였다. 적산 1개 사원(서법사)은 용 주사 주지였지만 비구-대처 분규로 용주사를 나간 개인 윤호순에게 불하되었다. 이는 본사 용주사와 관련 없는 자산이 되었다. 그리고 적산 2개 사원(동본원사, 묘법사)은 적산가옥으로 개인에게 불하되 었다. 이러한 수원의 사례는 전국적인 상황과 유사한 양상을 보였 던 셈이다. 이를 통해 적산 문제를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미군정기 적산 사찰의 불하는 한국 불교계에 인계한다는 원칙이었지만 이를 제대로 불하받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는 엄청난 규모의 일본불교 적산을 하나의 불교종단에 넘겨주는 것을 미군정 이 극도로 꺼렸기 때문이다. 이는 개신교계가 감리회와 장로회 및 성결교회 등 다양한 교단이 존재함으로써 적산을 분산적으로 불하받는 것과 다른 현실이었다는 점이다. 물론 한국 불교계에서 단일 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내부적으로 분열되어 있었던 점도 적산불 하를 효율적으로 수행하지 못한 측면이 있다.

둘째, 해방 직후 불교계는 기존의 불교 자산과 인적 자산의 안정 적 활용에 관심이 컸고, 적산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적었다는 점이다. 이는 기존에 있었던 불교 자산을 효율적으로 활용만 해도 크게 어려움이 없는 가진 자의 입장이었다. 이에 비해 북한의 정권 을 피해 월남한 반공적인 입장의 개신교인들의 절박함은 근거지로 서 새로운 교회의 개척과 설립에 사활을 걸 수밖에 없었던 것과 대 비되는 것이다.

셋째, 상당한 적산이 개신교계에 불하되어 이후 기독교 성장의 교두보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미군정기 적산불하가 첫 바늘을 잘 못 꿰맸지만 이후 한국 정부 수립 이후 펼쳐진 적산불하가 더욱 결 정적이었다는 점이다. 미군정기와 정부 수립 이후 이승만 정권기에 적산이 개신교계에 상당수가 불하되었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적산 사찰은 아니지만 국가 귀속 대상이었던 천리교 재산이 장로회 에 넘겨져 한국 장로교단의 확실한 물적 토대가 되었다는 사실과도 연결된다.

넷째, 개신교계의 적산불하에 대한 적극성과 종교적 신념의 확장 이다. 해방 후 성결교회 등 1943년 해산을 강요당했던 교단을 통해 강렬한 교회 재건의 필요와 욕구에 더하여 일제에 의해 종교 탄압 을 받았다는 역사적 사실을 부각하며 공세적이고 선명한 태도를 취 할 수 있었다. 따라서 교회 복원 또는 신축에 따르는 물적 토대로서 적산에 대한 선취는 우선적 목표가 될 수 있었다. 큰 틀에서 미군정 기와 1948년 수립된 정부와 6 ·25전쟁은 한국의 종교지형을 바꾸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정치 사회적 변화에 발 빠르게 대응한 개신교 측은 세력을 확장하며 한국을 대표하는 종교가 되었다.

다섯째, 한국불교는 해방 이후 분단으로 인한 정치적, 종교적 지 형의 변화에 발 빠르게 대응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특히 미군정이 지향했던 남한의 정치체제는 자본주의적 기반에 반공주의 노선에 선 기독교적 친미 국가의 수립이었다. 따라서 천주교와 개신교는 이들 미군정의 노선에 온전히 부합하는 입장이었던 반면, 불교계는 교단적 차원에서 대응할 수 없는 측면이 있었다.

여섯째, 분단으로 인한 이북 기독교인들의 월남에 따른 개신교의 성장을 들 수 있다. 서북청년단 등 반공적 정치세력의 기승과 더불 어 월남 기독교인들의 독자적 교회 확보를 위한 치열한 투쟁은 생 존권적 욕구에 버금가는 것이었다. 이들의 전투적이고 사활적 태도 는 반공을 묵시적으로 표방한 미군정 실력자들의 이해와 부합하는 것이었다. 즉 미군정의 기독교적 편향성은 이와 부합되었고, 적산에 대한 처리 문제가 확정되지 않았던 미군정 초기에 일본 신도 계통의 천리교단 재산을 장로계 목사들이 빠르게 접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현재 한신대학교의 토대를 만들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일곱째, 6 · 25전쟁에 따른 개신교의 성장에 대응하지 못한 점이 다. 전쟁 난민들은 전도를 하지 않았음에도 교회를 찾아왔다. 각종 구호물품이 세계교회협의회(WCC)를 통해 수집되어 한국에 전달 되었고, 이 구호물품은 각 지역 교회들을 통해 배당받게 되었기 때 문이다. 이처럼 구호물품을 받기 위해서 교회를 찾고 피난민 정보 를 서로 알기 위해 찾아왔던 교회의 역할은 향후 기독교 성장의 역 사적 계기로 작용하게 되었다.

여덟째, 적산불하는 해방공간의 미군정기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 라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1950~1960년대까지 지속된 일련의 과 정이었다. 미군정기 적산사찰은 정치집단과 학교와 고아원 등 사회단체를 포함한 개인들이 임대형식으로 불하받았다. 그러나 내 용적으로 소유권이 이전되어 법적 소유권이 확정되는 것은 대부분 1950~1960년대의 일이었다. 따라서 1950년대 불교계의 내분이 없 었다면 적산사찰에 대한 소유권의 향방은 지금과는 상당한 차이를 보였을 것이다.

결국 외부적 변화에 민활하게 대응하지 못한 불교계는 내부 문제 에 얽매여 30년간을 종권 투쟁으로 얼룩진 모습으로 비추어졌다. 이러한 불교계에 대한 왜곡된 이미지는 대중적으로 불교에 호의적 이지 않은 언론과 여론을 만들어냈던 셈이다. 이는 일제강점기 사 찰령 체제 아래 조선총독부 권력에 기생했던 본사 주지들의 전횡과 본산제도의 분산적 틀에 얽매여 교단적 차원의 발전을 고민하지 못 했던 병폐에서 기인한다.

마지막으로 현재 단위 교회들조차 40년사, 50년사, 60년사, 70년 사, 100년사를 편찬하고 있다. 이는 더욱 오래된 역사를 지닌 불교 계 교구본사들조차 자체 역사서를 편찬하지 못하는 현실과 비교된 다. 이러한 역사의식의 차이는 사회와 미래에 대한 비전을 고민하 는 지점의 차이를 가져오게 된다. 이는 지난 적산불하 과정에만 해 당되는 현실이 아니다. 앞으로도 여전히 대사회적 영향력의 확대와 환경의 변화에 따른 효과적 대응에 끊임없이 답해야 한다. ■

 

 

한동민 kaha21@daum.net

중앙대 사학과, 동 대학원 졸업(석사 · 박사). 주요 논문으로 〈일제강점기 화엄사 의 본산승격 운동〉 〈대한제국기 일본 정토종의 침투와 불교계의 대응〉 〈일제강점 기 사지(寺誌) 편찬과 그 의의〉 〈나혜석과 불교〉 등과 저서로 《사찰령 체제하 본 산제도 연구》 《수원을 걷는다-근대수원 읽기》 《불교계 독립운동의 지도자-백 용성》 등이 있다. 현재 수원화성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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