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지난 6월 22일 ‘종교와 문학’을 주제로 개최된 〈불교평론 열린논단〉(경희 대 비폭력연구소 공동주최)에서 발표한 내용을 필자가 정리 보완한 것이다.

 

1.

저는 일찍이 저의 경우 시(詩)란 신(神)이 없는 종교라고 말한 적 이 있습니다(졸저 〈나의 시 나의 삶〉 《시의 길, 시인의 길》 2002). 그것은 시와 일반 종교가 한편으로는 서로 공통되면서도 다른 한편 으로는 상반하는 측면이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양자의 공통성이란 시와 종교 모두 이성(과학)으로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한다는 점이며, 이 양자의 상반성 이란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는 이를 전적으로 신이라는 어떤 절대 적 존재에 의지해서 이루려 하지만 시의 경우는 어디까지나 인간의 자유의지를 존중하는 차원에서 이루려 한다는 점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몇 가지 전제되는 주장들이 있습니다. 첫째, 유신 론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 인간은 신의 창조물이어서 인간의 자유 의지 역시 궁극적으로는 신의 산물이며 그런 까닭에 신이 부재하 는 문학 혹은 신을 부정하는 문학이란 근본적으로 있을 수 없다(신 을 부정하는 행위조차도 신의 뜻에 속하는 영역이므로)는 주장입니 다. 둘째, 인간이 향유할 수 있는 ‘자유의지’ 가운데는 신의 실재를 믿을 수 있는 ‘자유’가 있는 것과 똑같이 신을 부정할 수 있는 ‘자유’ 도 있는 까닭에 시가 지향하는 곳이 전적으로 신이 주관하는 세계 만은 아니라는 주장이입니다. 즉 신을 부정하는 문학도 존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는 각 개인의 인생관에 따라 시가 신 즉 종교에 종속되는 사람도 있을 것이며 종교를 초월하는 사람도 있을 것 입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제가 ‘제게 시는 신이 없는 종교’라고 말했 을 때 이는 공인된 문학의 어떤 보편적 명제를 이야기한 것이라기 보다 분명 저 자신의 시론을 공표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논의를 보다 확장하자면 꼭 그렇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최소한 저를 포함해서 모든 무신론적 세계관을 지닌 사람들, 비록 유신론적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종교와 문학을 구분해 서 생각하는 사람들, 19세기에 들어 신의 죽음이 선언된 이후 오늘 의 문명사적 의미를 받아들인 모든 사람에겐 누구나 통용될 수 있 는 문학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이 명제가 참다운 문학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참다운 문학이란 무엇인가. 이는 이 한정된 지면에서 간단히 해명될 수도, 이 글의 목적에 부합되지도 않는 명제임으로 여기서는 논외로 하겠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어떤 문학도 본질 적으로 인간을 인간답게 혹은 가치 있게 함양하는 데 기여하지 않는다면 참다운 문학이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참다운 문학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그 무엇보다 기존의 이념이나 지배 가 치를 포함하여 모든 과거적인 것으로부터 해방된, 시인의 자유로운 사고와 상상력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란 유한한 존재, 불완전한 존재인 까닭에 이 세상에서 인간이 만든 어떤 것도 근본적으로는 완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과거 인류가 ―오늘의 마르크시즘이나 여러 가지 유 형의 종교적 신념을 포함해서― 창안한 이념이나 사상치고 완전한 것은 없었습니다. 예를 들어 그것을 믿는 사람들의 편에 서서 어떤 특정한 종교적 성전(聖典)을 신의 말씀으로 받아들인다고 하더라 도 그 성전의 해석은 전적으로 인간의 몫이었습니다. 따라서 바람 직한 인간 발전을 위해서라면 우리는 항상 그것을 비판, 감시하고 또 극복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고 이 역할을 맡은 자가 시인입니다. 우리가 문학 행위를 창작이라 하고 문학의 본질이 자 유에 있다고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다 아는 바와 같이 오 늘의 서구어로 시의 어원인 그리스어 ‘poesis’는 원래 ‘만든다’ 혹은 ‘제작한다’는 뜻이지만, 여기에는 잠재적으로 ‘자유’라는 의미가 내 포되어 있습니다. 진정한 의미의 제작은 자유 없이 이루어질 수 없 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문학의 본질이란 근본적으로 ‘자유’에 있습니다. 앞서도 지적했듯 자유 없이는 그 어떤 것도 진정한 창작이 불가능하고 진 정한 창작 없이는 과거의 어떤 미숙성도 극복할 수 없기 때문입니 다. 그런데 진정한 자유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문자 그대로 ―물론 필히 어느 수준의 윤리적 책임은 따라야 하겠으나― 어디에도 구속 되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시가 이념이나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스 러워야 하는 이유, 나아가 어떤 절대적 신념이나 신과 같은 존재로부터 자유스러워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2.

그러나 비록 시에서 신의 존재를 추방한다고 하더라도 시는 결 코 과학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는(산문보다도 특히 시는) 본질적 으로 종교적인 세계를 지향해야 합니다. 그것은 과학이 부분적 진 리(partial truth)를 추구하는 가치임에 비해서 시는 총체적 진리 (whole truth)를 추구하는 가치인데, 이는 본질적으로 종교의 영역 에 속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부분적 진리란 한 마디로 논리적인 진리를 뜻합니다. 그것은 어 디까지나 하나는 하나이며 둘은 둘이라는 진실입니다. 하나 보태 기 하나는 둘이며 둘 보태기 둘은 넷일 뿐입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죽음은 죽음이고 삶은 삶이며, 가는 것은 가는 것이며 오는 것은 오 는 것, 비극은 비극이며 희극은 희극입니다. 이는 이 세계를 이성에 바탕을 두고 이해하는 데서 비롯하는 진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모든 과학적 진실은 이성에 바탕을 둔 부분적 진실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만일 하나 보태기 하나가 둘이 아니라 하나가 된다 면 그것을 어찌 과학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과학-수학의 관점에 서 그것은 ‘거짓’일 따름이지요. 따라서 이 같은 부분적 진실의 추구 는 결코 시가 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시가 될 수 있는 진실은 어떤 진실입니까? 그것은 물론 과학으로서만 해결할 수 없는 인간 삶의 진실 즉 과학의 한계성이 나 불완전성을 극복할 뿐만 아니라 과학이 저지르는 오류를 바로잡 는 어떤 본질적인 진실이어야 합니다. 따라서 그것은 당연히 과학의 논리성을 초월한 모순의 진실 즉 총체적인 진실일 수밖에 없습 니다. 그것은 감성이나 최소한 이성과 감성이 하나로 통합된 어떤 진실을 뜻합니다. 즉 일상적 관점에선 대립되고 적대적인 가치들이 그 궁극에서 하나로 조화 통일된 진실입니다. 그것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인간의 삶 자체가 그렇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 고 죽는 것, 누굴 사랑하고 미워하는 것, 아니 삶 자체가 어디 논리 와 이성대로 되는 것입니까?

이렇듯 우리의 삶은 본질적으로 부분적 진실 즉 과학적 진실을 뛰어넘어 그 자체가 모순이 되는 어떤 총체적 진실의 영역에도 주 거하고 있습니다. 아니 부분적 진실보다는 오히려 이 총체적 진실 의 지배를 받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습니다. 하나 보태 기 하나는 둘이 되는 진실이 아니라 하나 보태기 하나가 하나가 될 수도 있는 진실입니다. 예컨대 내게 만년필이 하나 있는데 누군가 로부터 만년필 하나를 더 선물 받았다면 그것은 당연히 두 개가 되 겠지요. 이와 같은 진실을 우리는 부분적 진리라고 합니다.

그러나 관점을 바꾸어 한 처녀가 한 청년을 사랑해서 결혼하게 된 사건을 두고 이야기하자면, 이에 내재한 진실은 분명 하나 보태기 하나는 둘이면서 동시에 하나가 되는 모순을 지니고 있습니다. 부부일심동 체(夫婦一心同體)라는 말이 있듯 진정한 부부란 한 마음 한 몸체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모순의 진실 즉 총체적 진실이 지배 하는 영역에 속하는 문제입니다.

이와 같은 총체적 진실의 관점에선 비극은 그 자체가 희극일 수 있으며, 죽음은 곧 삶이 될 수 있으며, 가는 행위는 곧바로 오는 행 위가 될 수도 있습니다. 예컨대 소위 ‘새옹지마(塞翁之馬)’로 일컬 어지는 고사나, 누구든 죽는 자는 살게 되며 나중 된 자가 처음 된 다는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같은 것들이 그것을 웅변해줍니다. 불교 에서도 소위 팔불중도(八不中道)라 하여 죽음과 삶은 한가지이며, 찰나와 영원은 한가지이며, 가는 것과 오는 것은 한가지이며, 하나 (一)와 여럿(多)은 한가지라 합니다. 이렇듯 인간의 삶을 지배하는 진리에는 부분적인 것도 있으며 총체적인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양자 중에서 보다 본질적인 것을 들라 한다면 말할 것도 없이 총 체적 진리이겠지요. 부분적 진리는 삶의 편의성에 국한되지만, 총 체적 진리는 삶의 본질 그 자체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과학적 진리의 결과로 안락한 주거시설에 사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곧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 닙니다. 인간은 왜 태어나고 죽는 것인가, 살되 어떻게 살면 가치 있게 사는가 등 보다 근원적인 문제들이 해결되어야 행복합니다. 고대광실 화려한 저택에서 사는 사람보다도 쓰러져 가는 오막살이 에서 사는 사람이, 고도의 문명을 누리는 현대인보다도 원시의 자 연 속에 사는 중세인이 더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여러 가지 사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 세계에는 이렇듯 두 가지 종류의 진실이 존재하 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이 세계를 바라보는 두 가지 유형의 패러다 임에 의해서 비롯한 것입니다. 하나는 이 세계를 하나의 전체성으 로 바라보는 패러다임이며 다른 하나는 이 세계를, 그 구성하고 있 는 각 부분적인 측면으로 바라보는 패러다임입니다. 그런 까닭에 전자의 경우 그 파악된 진실은 모순에, 후자는 논리에 토대할 수밖 에 없게 되지요. 전체를 구성하는 각개 부분은 논리적이지만 그것 이 이루어놓은 전체는 모순의 조화 속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원래 이 세계란 모순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가령 삶과 죽음은 한 존재를 구성하는 두 요소이며 사랑과 증오 역시 마찬가지입니 다. 삶이 있음으로써 죽음이 있는 것이며 누구를 사랑하고 있는 까 닭에 그 결과로 또 미워하는 일이 생기게 됩니다. 물리적 실재(實在)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위가 있으면 아래가 있고 앞이 있 으면 뒤가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세계를 구성하는 각 부분의 관점에서 바라볼 때 진실은 논리적입니다. 앞은 항상 앞이 며 뒤는 항상 뒤이고 죽음은 항상 죽음이며 삶은 항상 삶입니다. 그 러나 이 각 부분이 구성하는 전체를 놓고 볼 경우, 이 세계는 모순 으로 존재합니다. 죽음과 삶이 한가지이며 앞과 뒤가 한가지인 것 입니다. 서울에서 뉴욕으로 가는 비행기는 그저 간다고 말할 수 있 으나 서울에서 뜬 비행기가 어떤 목적지 없이 계속 동쪽으로 항진 한다면 그것은 가는 것이자 오는 행위입니다. 동쪽으로 계속 가다 보면 결국 다시 서울로 돌아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지요.

시와 종교는 이렇듯 과학으로 해결할 수 없는 삶의 어떤 총체적진실을 탐구하는 인간 정신의 노력입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그들 은 적어도 과학에 대응해서는 같은 세계를 지향하는 가치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와 종교는 분명 다릅니다. 앞장에서 제가 언급했듯 시는 신의 존재에 구속되지 않지만 종교는 본질적으로 신 을 통해 그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시를 신에 귀속시키고자 하는 문학이 있다면 그것은 바 로 문학의 독자성을 포기한 문학 곧 종교 그 자체가 되어버립니다. 이제 여러분은 이 글의 서두에서 왜 제가 ‘제게 시는 신이 없는 종교 라’고 말했던가 그 의도를 이해하실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3.

시가 총체적 진실을 추구하는 인간 정신의 노력이라면, 말할 것 없이 시란 그 본질이 모순의 원리에 존재할 것입니다. 실제로 아리 스토텔레스의 《시학》 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시론가 는 시의 본질을 모순의 조화라는 개념에서 찾아왔습니다. 구조나 상상력 혹은 언어적인 차원 등에서 시를 설명하는 가령 ‘아이러니’ ‘역설’ ‘텐션(tension)’ ‘통합(unity)’ ‘이원적 대립(binary opposition)’ ‘전도(conversion)’ ‘공간적 형식(spatial form)’ ‘등가성의 반복(rep- etition of equivalence)’과 같은 개념이 모두 그러합니다. 각개 시론 의 독특한 개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원칙적으로 이렇듯 시 란 서로 이질적인 것 혹은 모순되는 것들이 하나로 조화되는 질서 에 있다는 사실만큼은 모두 공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와 같은 시의 본질이 그 시를 향유하는 인간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 칠 수 있을까요. 이는 물론 넓은 의미에서 시가 인간의 삶에 끼치는 만일 실재로서의 신(Dieu)을 전제한지 않을 경우 최소한 신성성(Divinité)만큼은 전제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효용성 즉 시의 기능이라는 문제와 관련이 됩니다.

이질적이거나 적대적인 요소 혹은 가치들의 조화라는 시의 본질 은 그 수용자 혹은 향유자들이라 할 인간의 삶을 갈등과 대립의 관 계로부터 화해와 사랑의 원리로 통합시키는 기능을 갖습니다. 그것 은 시의 이 같은 원리가 그 수용자인 인간의 정신을 깨우쳐 지금까 지 부분적 삶의 진실 속에 함몰되어 이기적이고도 도구적인 삶 ― 하이데거의 용어를 빌리자면 일상인(Das Man)으로 사는 삶―에 도 취된 인간을 보다 총체적이고도 실존적인 삶의 경지로 향상시킬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즉 지금까지 삶의 총체적 진실에 대해 무지 혹 은 무관심했던 일상인들에게 크든 작든 혹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 든 하나의 깨우침 혹은 충격을 줌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부분적 진 리가 지배하는 세계로부터 총체적 진리가 지배하는 세계로 초극하 게 만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그와 같은 정신 현상을 ‘감동’이라 부르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부분적 진리는 논리적입니다. 그것은 대립된 가치들을 하나로 조화 혹은 통합시킬 수 없습니다. 앞은 항상 앞이 며 뒤는 항상 뒤입니다. 미움은 항상 미움이며 사랑은 항상 사랑입 니다. 원수는 항상 원수, 친구는 항상 친구입니다. 그러므로 부분적 진리가 지배하는 세계는 삶의 갈등과 대립과 분열을 근본적으로 치 유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총체적 진실이 지배하는 세계는 다릅니 다. 본질이 그러하듯 거기에서는 대립되고 적대적인 모든 것들이 하나로 조화 통일되기 때문입니다. 사랑과 미움이, 적과 친구가, 분 노와 용서가 하나로 일원화됩니다. 그러므로 이 같은 총체적 진실 을 본질로 한 시가 인간의 분열되고 대립된 삶을 화해와 용서와 사 랑의 삶으로 승화시킬 수 있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것은 한 편의 시를 이루어내는 본질적 요소들 즉 사유, 상상,언어, 정서 등이 자연스럽게 그 향유자의 삶에 스며들어 이를 사 회적, 존재론적으로 변혁시키는 데서 가능합니다. 말리노프스키 (Malinowski)는 이를 문학의 원형이라 할 신화에서 해명하였으며, 리처즈(Richards)나 하르트만(Hartmann) 같은 20세기의 주요한 비 평가들은 그것을 이미 시의 효용성으로 설명한 바 있습니다. 구체 적으로 전쟁과 관련된 경우를 예로 든다면 ―특별한 목적시나 어용 시가 아닌 한― 시란 어떤 것도 반전시(反戰詩)나 휴머니즘의 노선 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도 그러한 예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시는 그 안에 반영된 혹은 언급된 이념이나 메시지의 차원을 논하기 전에 이미 그 존재 자체가 인간의 삶을 분열과 대립 과 적대의 관계로부터 화해와 사랑과 평화의 삶으로 나아가게 만드 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하고 있습니다. 시적인 사고, 시적인 상상력, 시적인 정서, 그리고 시적인 언어가 지닌 효용성의 하나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4.

현대 물질문명의 위기와 더불어 심심치 않게 거론되는 것이 시의 존재성에 대한 회의입니다. 심지어 어떤 이는 ‘시’라는 문학의 장르 가 머지않아 소멸할지도 모른다는 전망조차 내놓고 있습니다. 실제 로 오늘날 시의 독자는 물질문명이 야기한 도구적 가치관이나 디지 털 영상매체의 괄목할 만한 발전으로 인해 그 수가 절대적으로 감 소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저는 시가 결코 그 같은 비극 적 운명을 맞게 되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비록 다른 모습, 다 른 형태의 변화를 지향하기는 하겠지만 시는 우리의 미래 삶에도 여전히 큰 영향을 끼칠 것입니다. 그것은 ―니체나 마르크스, 다윈 과 같은 현대의 선구자들이 선언한 바와 같이― 이미 신을 잃어버 림으로써 종교 그 자체가 무의미해진 현대사회에서 신이 해왔던 역 할 즉 인간 삶의 총체적 통합은 ‘신이 없는 종교’라 할 시 이외에 다 른 대안이 아직 특별하게 나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좁은 의 미의 시이든 넓은 의미의 시든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대목에서 시의 이념을 이야기할 필요를 느낍니다.

오늘날 크리스처니즘에 토대해서 발전해온 서구의 물질문명이 위기에 봉착해 있다는 것은 세계 대부분의 지성이 동의하고 있는 사실입니다. 특히 르네상스 이후 서구 문명사를 지배해온 소위 ‘이 성중심적 세계관(logo-centrism)’과 이로부터 타락한 ‘도구적 이성 (instrumental reason)’이 문제가 되는 것도 다 아는 바와 같습니다. 그리하여 서구의 지성들은 새로운 문명사의 건설을 위한 새로운 이 념의 탐구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 같은 이념 탐구의 한 대안 으로서 불교적인 세계관을 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신의 존재가 이미 무의미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종 교적 역할의 요구가 증대되고 있는 오늘의 시대에서는 신이 없는 종교 즉 불교가 시대적 이념에 기여할 수 있으리라는 것과, 다른 하 나는 각 개체의 존재성을 존중하면서도 전체적으로 우주적 통합을 이루어낼 수 있는 불교 존재론이 또한 이성 중심적 세계관에서 비 롯된 현대의 도구적 삶을 극복하는 데 큰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예컨대 오늘날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 쟁 가운데서도 가장 참혹한 것은―팔레스타인 분쟁이나 이라크 전 쟁에서 볼 수 있듯― 종교와 종교 혹은 문명과 문명의 충돌에서 기 인하고 있는데, 역사적으로 불교는 이 같은 충돌을 일으킨 사실이 없습니다. 기독교의 십계명에서 가르친바 ‘내 앞에서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와 같은 신이 불교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관점을 바꾸어 시와 그것이 반영하고자 하는 이념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오늘의 우리 시 역시 불교적인 세계관에서 그 도움을 크게 받을 수 있으리라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그것은 오늘의 물 질문명을 대신해 새로운 문명사의 이념을 주도하는 것 가운데 하나 가 바로 문학이라는 사실과 더불어 앞서도 밝힌 바처럼 시와 불교 는 양자 모두 ‘신이 없는 종교’라는 점에서 서로 공유하는 영역이 크 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 글의 주제라 할 평화 즉 ‘여러 이질적인 것 과 적대적인 것의 조화를 통한 삶의 완성’이라는 관점에서 불교가 현대시에 공헌할 수 있는 측면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인간을 포함해 모든 생명, 나아가 이 우주의 사물 전체를 동 등하게 존중하고 함께 더불어 살라는 가르침입니다. 불교나 힌두교에서 말하는 소위 아힘사(ahimsa) 의 정신이 그것입니다. 기독교에서도 살생은 금하고 있지만 그것은 인간에 국한된 금기이지 이 비폭력, 비살생.

우주 만물까지도 포함해서 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러나 불교에 서는 이 세상 우주 만물 모든 것을 부처처럼 여기라고 합니다. 《화 엄경(華嚴經)》의 가르침과 같이 우주 만물의 모든 것에는 그 자체 부처가 될 수 있는 본성을 지녔다[森羅萬象 悉有佛性]고 보기 때문 입니다. 그러므로 불교의 수행자들은 길을 걷다가 행여 자신도 의 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길가의 미물을 밟아 죽이지 않을까 염려하여 신도 바닥의 올이 성긴 짚신을 신고 다닙니다. 이와 같은 불교의 만 물 평등 정신, 생명 존중 정신은 분명 오늘의 물화된 인간의 삶뿐만 아니라 ―요즘 크게 문제 되고 있는바― 물질문명에서 야기된 생태 위기를 극복하는 데에도 하나의 해답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 불교의 소위 삼법인(三法印)의 하나인 제법무아(諸法無我)의 존재관입니다. 불교에서는 개체로서의 아(我, Ātman)를 버 린 무아(無我, Anātman)로서의 ‘나’를 강조합니다. 그런데 불교의 이 ‘아’의 개념은 원래 고대 인도의 우빠니샤드 철학에서 발전한 것 으로 이 철학에 의하면 ‘아’에는 두 가지가 있어 우주의 근본원리가 되는 ‘대아(大我, Brahmatman)’와 현상계의 각 개체인 ‘소아(小我, Jivatman)’를 구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같은 ‘대아’의 개념과 조응된다고 할 수 있는 불교의 ‘무아’는 개체로서의 ‘아’가 아닌 전체 로서의 ‘아’, 내가 곧 너인 ‘아’, 우주 만물이 바로 나인 평등상(平等相)으로서의 ‘아’, 그러니까 달리 말해 일상적인 의미에서 ‘나’라고 부를 수 없는 ‘나’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불교에서는 존재가 바로 이 ‘무아’의 경지에 도달할 때 비로소 깨달음의 세계에 도달한다고 합 니다. 불교의 수행자들이 끊임없이 일상적, 이기적인 ‘나’ 즉 아상 (我相)을 버리고 무의 경지에 들려고 노력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 니다. 이렇듯 자신을 지워버리고 우주와 한 몸이 되고자 하는 불교 위 존재관 역시 오늘의 문명사가 배태한 분열과 대립과 이기적인 삶을 극복해 줄 수 있는 하나의 예지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셋째, 삼법인의 다른 하나인 제행무상(諸行無常)의 세계관에서 도 우리는 같은 가르침을 배울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우리의 일 상적 삶 즉 현상계는 한낱 허망하고 덧없는 세계라고 봅니다. 그것 은 흡사 풀잎에 맺혀 있는 아침 이슬이나 바위에 부딪혀 속절없이 쓰러지는 물거품과도 같습니다. 모든 것은 마음의 소산일 뿐입니다 [三界唯心所作]. 따라서 불교적 인생관에서 중생이 물질에 집착하 고 그것을 소유코자 하는 행위는 무의미합니다. 불교가 항상 무소 유를 가르치고 남을 위해 베푸는 삶을 최상의 윤리로 가르치는 것 도 이 때문입니다. 보살행(菩薩行)은 불교의 수행 중 으뜸가는 덕 목인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을 버리고 남을 위해서 모든 것을 베푸 는 삶, 물질적 ―나아가서는 정신적인 것까지―인 것에 대한 집착 즉 소유욕을 끊고 무소유로 사는 삶의 양식이 또한 도구적 이성의 지배에서 비롯한 오늘의 문명사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하나의 방안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듯 동양적 세계관 특히 불교적 세계관은 오늘날 생태 환경문제를 포함하여 서구 물질문명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하나의 이 념적 대안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우리는 현실적 종교로서 신이 없 는 불교가, 또는 ‘신이 없는 종교’로서의 시가 오늘날 맡아야 할 문 명사적 소명에 부응할 수 있는 이유를 여기서 찾을 수 있습니다. ■

 

오세영 poetoh@naver.com

서울대 문리과대학 졸업, 동 대학 문학박사. 박목월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을 통 해 등단했다. 충남대 · 서울대 교수, 한국시인협회 회장 등 역임. 저서로는 학술서 《한국 낭만주의 시 연구》 《20세기 한국 시 연구》 《문학이란 무엇인가》 등 23권, 시 집 《무명연시》 《밤하늘의 바둑판》 《북양항로》 등 27권, 기타 산문집들 다수. 소월 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만해대상, 김삿갓문학상, 공초문학상, 녹원문학상, 편운 문학상, 현대불교문학상 등 수상. 현재 서울대 명예교수,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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