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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1운동 이후 불교의 사회참여 활동과 전망
특집 | 불교, 조선독립의 횃불을 들다
[77호] 2019년 03월 01일 (금) 김종인 kacademy@hotmail.com

1. 서론

전 민족적 항일운동으로서 역사상 최대 규모의 민족운동인 3 · 1운동은 다양한 방면에서 의미를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의미 가운데 하나는 종교사적 의미이다. 비록 여러 면에서 한계를 보여주기도 했지만 3 · 1운동은 민족지도자 33인에 의해서 출발되었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인데, 이들 33인은 모두 종교지도자들이다. 그래서 3 · 1운동은 종교의 사회적 참여라는 관점에서도 매우 역사적 의미가 큰 사건이다.

33인의 종교별 구성을 보면 천도교 15명, 기독교 16명, 불교 2명이다. 천도교가 15인인 것은 3 · 1운동이 처음부터 천도교 측에서 동학농민운동의 연장선으로 오랜 기간 전 국민적 독립운동을 준비해 온 데서 출발한 때문이다. 3 · 1운동은 천도교 측에서 독자적으로 독립운동을 준비하다 기독교와 연합하게 되었고, 여기에 한용운과 백용성이 불교를 대표하여 참가하게 되면서 범종교적 운동이 되었다. 3 · 1운동에 대대적으로 참가한 천도교와 기독교가 그 결과로 사회적으로 어떠한 모습을 형성해 갔는가는 한국 종교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일일 것이다. 두 종교에 비해서는 규모 면에서는 참여의 비중이 매우 작지만, 불교의 3 · 1운동 참여 역시 한국 근현대 불교사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민족지도자로는 두 사람만이 참여했고, 대중적으로도 불교인들의 참여는 매우 적은 수에 불과했다. 하지만, 한용운은 33인 가운데서 가장 두드러진 존재로 부각되었으며, 불교인의 참여는 불교가 수백 년 동안의 은둔에서 깨어나 역사적 현장에 나설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3 · 1운동을 시작으로 해서 불교가 한국사회의 사회적 문제들에 어떻게 대응해 갔는가를 살펴보면서, 불교의 사회적 참여의 특징과 한계를 논한 다음, 앞으로 불교는 한국사회의 문제들에 대해 어떤 식으로 대응해 가야 할지 생각해 보려 한다.

 

2. 20세기 초: 3 · 1운동, 한용운, 그리고 일제하 불교계의 민족주의 운동

서론에서 간략히 언급한 것처럼 3 · 1운동에서 불교계의 활동은 미미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적지 않은 사찰에서 승려들이 만세운동에 참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밝혀진 불교계의 3 · 1운동 참가 연인원은 기백 명에 불과하다. 한 달 이상 지속된 3 · 1운동에 참여한 시위 인원은 약 200여만 명이며, 7,509명이 사망, 15,961명이 부상, 46,948명이 투옥되었으며 민가 715호, 교회 47개소, 학교 2개소가 헐리고 불탔다는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의 기록에 비추어 보면 외관상으로는 매우 미미한 숫자임을 알 수 있다. 일제도 불교계가 3 · 1운동에 소극적이었다는 평가를 하고 있다. 3 · 1운동에서 천도교가 가장 위험한 세력이었으며, 기독교도에서 많은 지도자와 학생들이 3 · 1운동에 참가한 반면, 불교 측은 한용운과 백용성 그리고 이들과 친교가 있는 중앙학림의 생도 일부와 소수 승려들만 참가하였다는 것이 일본 헌병대의 인식이었다. 

그러나 김법린이 1946년 잡지 《신생》에 기고한 회고에 따르면 불교는 중앙학림 학생들을 지방사찰에 파견해 지방 만세운동을 주동하게 하였으며 그 성과는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는 것이었다. 예컨대 부산 범어사가 중심이 된 동래만세운동, 대구 동화사가 중심이 된 달성만세운동, 해인사 학승들의 주도에 의한 경남 일대의 만세운동, 통도사가 중심이 된 신평 장날 만세운동은 사찰 안에서가 아니라 바깥에서 일으킨 큰 봉기사건이다. 이 밖에도 표충사, 김룡사 쌍계사, 호남에서는 대흥사, 화엄사, 경기도의 봉선사, 북쪽의 안변 석왕사 등이 중심이 되어 지역사회의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그럼에도 불교계가 다른 종교에 비해 소극적이었다는 인상을 준다면 이는 다음과 같은 것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3 · 1운동이 전 국민적 운동이었으나 기본적으로 자연발생적이고 비조직적인 운동이었던 데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3 · 1운동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된 국내외 민족 지도층 인사들의 연쇄적인 시국선언에 전 국민이 자발적으로 동참하면서 자연스럽게 거대한 독립운동으로 전개된 것이었다. 3 · 1운동이라고 하지만 첫 선언은 1919년 2월 1일 대종교가 중심이 되어 만주의 민족 지도층 인사들이 행한 대한독립선언이다. 이어서 동경의 한인 유학생들이 행한 2 · 8 독립선언, 그리고 서울의 3 · 1 독립선언과 경향 각지에서 다발적으로 만세운동이 이어졌다. 물론 소위 33인을 중심으로 한 서울의 독립선언은 천도교 인사들이 나름 천도교 전체 차원에서 모의하였고, 또 기독교와 연대도 계획적으로 한 것이지만 어디까지나 서울에서 일회성 선언서 낭독식을 거행하는 것이었지 전국적 규모의 지속적인 운동을 계획한 것은 아니었다. 

평소 독립운동에 대한 열의로 가득 차 있던 한용운은 거사를 불과 한 달가량 남겨 놓은 시점에서 최린을 통해 천도교 측의 3 · 1독립선언 계획을 알고서 불교계 공동으로 참가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당시의 교통과 통신 여건상 불과 한 달 만에 산중의 불교를 전체적으로 동참시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결국 평소 친분이 있던 백용성만 동참시킬 수 있었다. 

둘째는 3 · 1운동이 근대적 시민운동의 형태였다는 점이다. 여태까지 한국에서 저항운동은 농촌을 배경으로 한 무장한 농민들의 농민반란 형태였으나, 3 · 1운동은 일부에서 무력적 형태를 보이기도 했으나 기본적으로 도시적 공간에서 일어난 평화적 시위였다. 바로 이러한 성격 때문에 불교인들의 참여가 쉽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만약에 3 · 1운동이 농민반란 형태였거나 무장 게릴라 투쟁으로 변화했다면, 불교가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불교는 임진왜란 당시에 수많은 승려가 의병대를 조직해 왜구와 맞서 싸운 전통이 있다. 불교가 선종이라는 교리적 특성 때문에 사회문제에 무관심했고 이것이 3 · 1운동에 불교의 참가가 저조했다는 분석이 있는데 임진왜란에서 승려들의 역할을 보면 이는 올바른 분석이라고 보기 어렵다. 3 · 1운동이 도시적 공간에 제한된 자연발생적 운동이었기에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산중의 불교가 적극적으로 참가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셋째는 불교의 조직적 특성이다. 천도교와 기독교가 33인 지도자 구성뿐 아니라 대중적인 참여도 많이 했는데, 이들 종교는 종교지도자와 대중이 생활 속에서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에게서 종교 생활은 종교지도자를 중심으로 한 공동체적 삶이다. 그러나 불교는 전혀 다른 형태를 하고 있다. 불교 대중들의 종교 생활과 일상생활은 승려들과 무관하게 이루어진다. ‘부처님 보고 절에 가지 스님 보러 절에 가나?’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불교 신도들은 불교 조직이나 지도자를 매개로 조직화되어 있지 않다. 설령 불교 승려들이 대거 3 · 1운동에 동참하기로 결의를 했더라도 이를 일반 신도들에게 널리 알릴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물론 많은 불교 신도들도 3 · 1운동에 참가했겠지만, 불교인으로서 참가한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조선인으로서 참가한 것이다. 

넷째는 불교 지도층의 친일화이다. 식민지 기간 내내 많은 승려가 친일적이었다. 조선조의 억불정책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승려들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구성하여 왜구와 싸워 많은 전과를 세웠으나, 전쟁 후 승려들의 사회적 지위는 개선되지 않았다. 승려들은 여전히 천민 취급을 받으면서 억압을 당하고 사찰은 수탈을 당했다. 이런 상황에서 한일강제합병을 통한 조선 왕조의 몰락은 불교인들에게는 억압의 소멸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고종 사망에 관한 일제의 민정 보고서에 따르면 묘각사 주지 홍순오 등은 본사인 월정사에서 고종을 위한 기도를 하자는 통보를 받자 불교를 억압한 고종의 죽음은 기뻐해야 할 일이기에 기도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그뿐만 아니라 도성 출입이 금지되었던 승려들이 조선 왕조가 완전히 몰락하기 전인 1895년에 도성 출입을 하게 된 데에 일본 승려의 도움이 있었다는 것은 조선의 승려들과 일본불교와의 관계, 그리고 일본 제국과의 관계의 방향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또 사찰령을 통해 불교를 일제의 통제하에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본산 주지를 비롯한 많은 승려는 이것을 도리어 불교에 대한 보호책으로 인식하였으며, 식민지 시대 내내 일본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이런 연유로 온 국민이 3 · 1운동에 나설 때도 본산 주지들은 도리어 ‘우리 불교인들은 이번 정치문제에 간여하지 말고, 또 경거망동하는 무리를 도와 종교인의 본분을 상실하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계의 3 · 1운동 참여는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다. 특히 3 · 1 만세운동 이후 한용운이 33인의 한 사람으로 행한 역할은 실로 대단한 것이다. 한용운은 3 · 1운동으로 체포된 33인 가운데서 가장 치열하게 감옥 내 투쟁을 하였으며, 죽을 때까지 항일운동을 멈추지 않았다. 

한용운의 역할에서 더 돋보이는 것은 옥중에서 발표한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의 개요〉이다. 원고지 50매가량의 이 글을 통하여 한용운은 조선이 독립해야 하는 이유를 근대 민주주의 사상에 기초하여 기술하고 있다. 이 글을 보면 왜 그가 최남선 대신 자신이 ‘독립선언서’를 기초하려 했는지 알 수 있다. 기미독립선언서에는 근대적 민주주의적 가치보다는 유교적 도의와 명분의 가치가 주조를 이루고 있다. 이처럼 한용운은 실천적으로뿐 아니라 사상적으로도 여타의 33인들과 차원을 달리하고 있었다. 

한용운을 매개로 해서 3 · 1운동에 참가한 중앙학림 학인들의 활동 또한 간과할 수 없다. 이들은 한용운의 지시에 따라 독립선언 당일 독립선언서를 배포했을 뿐 아니라, 자신들의 연고사찰에서 만세운동을 하게 하였다. 그 결과 많은 수는 아니지만 지방의 각 사찰 승려들이 만세운동에 참가할 수 있었다. 또 이들 학인 중 일부는 민족운동의 지속을 위하여 만주로 가서 무장투쟁의 대열에 동참하기도 했다. 청년 승려들 외에도 불교계에서는 임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는 등 민족운동을 도왔다. 

이처럼 3 · 1운동을 계기로 불교는 적극적으로 사회에 참여하게 되었다. 양적으로 큰 규모는 아니나, 조선시대의 억불정책에 의한 반작용으로 많은 일본에 우호적이던 불교인들이 이를 계기로 민족적 자각을 하게 된 것이다. 

 

3. 1945~1960년대: 정화운동과 사회적 은둔

일제로부터 해방이 되자 불교계는 만해의 지도하에 3 · 1운동 때부터 불교청년운동을 해 오던 김법린, 최범술 등을 중심으로 1945년 8월 18일에 ‘조선불교혁신준비위원회’를 결성했다. 8월 21일에는 조선불교조계종 총무원 종무원장 이종욱을 방문하여 종단운영권을 인수하고, 전국승려대회 준비위원회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9월 22~23일 양일간에 걸쳐 전국승려대회를 개최하여 사찰령을 비롯한 일제하의 각종 법안을 철폐하고 친일활동을 한 이종욱에게 3년간 승권을 정치하는 등 일제 잔재를 청산해 나갔다.

1945~50년 기간 동안 한국사회는 좌우익의 대결 속에 극심한 분열 속에 있었는데, 각종 불교 단체들은 정치적 활동에 관여하면서도 이념적으로 극한 대립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 기간 불교는 김법린, 최범술 등이 한용운의 영향을 받은 인사들이 주도적으로 활동하는 등 전체적으로 개혁적인 방향으로 움직였다. 

그런데 1947년 2월 15일 송만암이 불교혁신을 위하여 정법승(비구)과 호법승(대처)으로 이원화를 제안하면서부터 서서히 비구 대처의 갈등 문제가 공론화되기 시작하면서 사태가 달라졌다. 1954년 5월 20일 이승만이 ‘대처승은 사찰에서 물러가라’는 불교정화 유시를 발표하면서 불교계는 비구승과 대처승의 대립 투쟁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되고, 1969년에 10월 대법원에서 최종적으로 비구승 측에 손을 들어줄 때까지 아무런 사회적 활동을 하지 못했다. 그사이 사회에서는 4 · 19혁명이 일어나 이승만 정권이 퇴진하는 격변이 있었고, 1961년에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켜 군사독재를 수립하여 민주주의를 압살하는 일이 벌어졌지만, 불교계는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다. 불교계는 오로지 정화운동이라고 불리는 비구승과 대처승 사이의 투쟁에만 골몰하였다. 

정화운동은 출가자를 중심으로 한 승단불교의 전통을 지키게 하였다. 이는 대처승들이 장악하여 불교 재산을 사유화하거나 가족 사업화할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하여 불교가 한국사회에서 길이 존속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한국불교사에서 큰 의의를 지닌다. 또 정화운동의 주체인 출가승들이 선불교를 사상적 토대로 삼으면서 조계종의 참선수행 전통을 새롭게 구축하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불교는 이승만 독재 정권과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에 협력하게 되는 역사적 과오 또한 범하게 된다. 박정희가 1969년에 3선개헌을 선언하여 전국이 3선개헌 반대 투쟁을 하는 와중에 대한불교 장로원장 이청담은 3선개헌 지지성명을 발표했다. 

 

4. 1970~80년대: 전위적 개인에서 진보적 승단으로

비구승과 대처승 사이의 사활을 건 투쟁으로 긴 암흑기를 거친 불교는 1970년대 중반에 들어서 사회참여 면에서도 조금씩 소생의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1970년대는 엄혹한 군사독재 시절이었으며, 양심적 지식인, 종교인, 그리고 대학생들이 군사독재에 맞서 치열한 싸움을 벌이던 시기였지만, 불교계는 너무도 보수적이어서 승단은 군사정권을 옹호했으며, 신도들은 무관심했다. 이런 불교가 1980년 광주항쟁을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등장한 신군부에게 처참하게 유린당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였다. 비인간적 폭력으로 정권을 잡은 신군부는 도덕적 기반을 억지로 만들기 위해 사회정화운동을 벌였고, 불교계를 정화한다는 명분으로 10 · 27법난을 자행했다. 신군부는 군인과 경찰 3만2천여 명을 투입하여 조계종 승려 등 불교계 인사 153명을 강제로 연행하고, 전국의 사찰과 암자 5,731곳을 수색했으며, 승려 1,776명을 연행해 가서 무차별 폭력과 고문을 자행하고 일부는 삼청교육대로 끌고 갔다. 1,700년 불교 역사에 유례가 없는 충격적인 이 법난은 무디고 무딘 불교인들을 정치적으로 각성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 초유의 법난을 겪으면서 불교는 산중의 참선만으로는 불교를 지킬 수 없음을 집단적으로 깨닫게 되었다. 그러한 깨달음이 구체적인 새로운 방향성을 찾고 실천으로 나아가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지만, 1980년 법난은 80년대 후반 불교의 대대적인 대사회적 참여의 커다란 동인으로 작용했다. 

1970년대 불교계의 사회참여는 법정 스님의 개인적 활동에서 시작되었다. 산중의 정서를 글로 표현하면서 사회대중에게 널리 알려지게 된 법정 스님은 1970년대 비판적 교양지인 《씨알의 소리》를 통해 함석헌 등의 재야인사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1971년 4월 19일에 당시 재야 명망가들인 함석헌을 비롯해 이병린, 김재준, 천관우 등이 주축이 되어 ‘민주수호국민협의회’가 결성되었을 때 이들의 요청으로 불교계를 대표해 운영위원에 참가하면서 민주화운동에 나서게 되었다. 이후 1970년대 민주화운동의 전형적인 실천 형태인 각종 강연회, 좌담회, 성명서 발표 등에 두루 참가하면서 그는 불교계를 대표하는 민주화운동의 상징적 존재가 되었다. 1970년대 한국사회의 민주화운동은 대학생들의 시위와 함께 문화계와 종교계의 유명 인사들이 이끌고 갔었는데, 법정 스님은 이들과 함께한 유일한 불교계의 양심이었다. 70년대 초반 불교계의 사회참여는 법정 스님 개인의 활동이 전부라 할 수 있는데, 법정 스님마저 1975년 10월 2차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아 송광사 불일암에 은거하면서 맥이 끊겼다.

1970년대 초반의 불교계 민주화운동은 법정 스님의 활동 중단과 함께 끝이 났지만,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된 동국대 학생운동 출신 여익구가 이듬해 형 집행정지로 출소하여 민주화운동 인사들 가운데 불교인인 시인 고은, 소설가 황석영 등과 함께 민중불교를 공부하는 모임을 가지면서 새로운 준비를 하게 되었다. 이후 이들과 함께 공부하던 전국대학생불교연합회 회장인 전재성이 1976년의 수련대회에서 ‘민중불교론’을 제기하면서 불교계(실질적으로는 대학생 불자들)에 진보적 이념이 도입되었다. 

여익구 등을 중심으로 한 민중불교운동은 그 자체로는 불교계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보기 어렵다. 여전히 학생운동의 범주 안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시작된 민중불교운동이 동국대와 중앙승가대학의 학인 승려들에게 영향을 주면서 불교계와 사회 일반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1981년부터 두 대학의 불자 학생들과 학인 승려들은 여래사 운동이라고도 일컬어지는 사원화 운동을 통해서 각 도시 도심 포교당을 거점으로 진보적 불교청년운동을 벌였다. 1982년에는 이들의 활동을 위험스럽게 본 경찰이 100여 명을 연행하고 일부 승려와 학생들을 구속시킬 정도로 성장했다. 1983년 7월 17일 전국청년불교도연합회(약칭 청불련) 결성대회에는 전국의 선원, 강원, 동대 석림회, 승가대학, 대불련, 대불청 기타 청년회 등 승가와 재가의 연합으로 약 1,700여 명이 참석할 정도였다. 이렇게 점차 저변이 확대된 민중불교운동은 1985년 5월 4일에 여익구를 의장으로 하는 민중불교운동연합을 창립시켜 불교계의 이름으로 사회의 제 민주세력과 함께 전두환정권과의 투쟁에 당당히 동참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여익구를 중심으로 대학생과 학인승려 연합으로 진행되던 사회참여 활동은 1986년 5 · 3 인천사태 참여로 민중불교운동연합의 지도부가 수배와 구속 등으로 붕괴하면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불교계 학생운동 세력과 상관없이 승려들이 독자적으로 사회운동 단체들을 만들어 위력을 발휘하면서 불교의 사회참여 운동의 중심이 출가 승려들로 순식간에 이동하게 되었다. 1986년 5월 15일에는 조계종 승려 152명이 민중 생존권확보, 모든 양심수 석방을 요구하는 시국성명서를 발표했는데, 이는 분단 이후 최초로 전국 선승들이 동참한 시국선언으로서 불교계 사회참여의 전국적, 전 종단적 기반이 형성된 것을 의미했다. 같은 해 6월 5일에는 지선 스님, 청화 스님, 진관 스님, 목우 스님, 성연 스님 등이 불교정토구현전국승가회를 창립하였다. 정토구현승가회는 창립선언문을 통해 과거 한국불교가 ‘반역사적, 반민중적 보수성’으로 온존해 온 것을 반성하고 “이제 불자들은 새롭게 다듬어진 불법과 보살정신과 역사의식으로 무장하여…… 우리는 새로이 정토구현승가회를 창립한다”고 천명하여 불교자주화와 사회민주화에 대한 사명을 표명하였다. 

   
 

이러한 기반 위에서 1986년 9월 7일 해인사에서 전국 2,000여 명의 승려들이 해인사에서 승려대회를 열어 불교계 악법철폐, 10 · 27법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5 · 3 인천사건으로 구속 수배 중인 불자들의 석방을 요구하고 불교탄압을 항의하였다. 이 대회에는 진보적인 젊은 승려뿐만 아니라 혜암, 월주, 종하, 법전 등 조계종의 총무원장직을 수행했거나 후에 원로회의 의장, 종정 등을 수행하는 고위층 승려들까지 함께하였다. 조계종 전체가 반정부투쟁에 나선 것이다. 해인사 승려대회는 한국사회에서 가장 보수적인 집단이라 할 수 있는 불교계의 중심인 조계종의 승단 전체가 반정부투쟁에 나선 천지개벽과 같은 사건으로서 엄청난 역사적 전환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일이 있게 된 원인은 두말할 것도 없이 1980년 신군부 세력이 자행한 10 · 27법난이었다. 이후 승려들이 앞장선 반정부투쟁은 학생운동만큼이나 치열한 모습을 보였다. 1987년 4월 16일에는 조계종 소장 승려 500여 명이 서울 개운사에서 4 · 13 호헌조치와 불교재산관리법 및 언론기본법 철폐를 요구하며 거리시위에 나섰다. 같은 해 5월 27일에는 광주 원각사에서 열린 5 · 18 광주시민혁명 기간에 도청에서 숨진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 전남지부장 김동수의 추모제에 경찰이 최루탄을 쏘며 난입한 것에 항의하기 위해 원각사 앞에서 총무원장을 비롯한 5백여 승려와 5천여 신도가 참여하여 규탄대회를 열어 다음날 치안본부장의 사과를 받았다. 

이렇게 1970년대 초 법정 스님으로부터 시작된 불교의 사회참여는 20년 사이에 괄목할 만한 성장을 했다. 20년간의 성장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1980년대 후반에 급속히 성장한 것이다. 이 급속한 성장에는 두 가지 요인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하나는 1980년대에 들어 많은 학인스님들이 동국대학교와 중앙승가대학에 입학하면서, 이들이 자연스럽게 당시 매우 활발했던 학생운동의 흐름에 동참하게 되어 사회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 학생운동과 학인스님들을 매개해 낸 것이 여익구 등의 동국대 출신 운동권 학생들이다. 다른 하나는 10 · 27법난이다. 1980년대의 시대적 상황 속에서 학인 스님들이 학생운동의 영향을 받는 것은 당연하지만, 10 · 27법난이 없었다면 극도로 보수적인 불교계에서 진보적 승려 단체들이 그처럼 빨리 성장할 수 없었을 것이며, 해인사에서 종단의 지도부가 함께하는 대규모 반정부 승려대회가 열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 두 요인이 결합하면서 불교계의 사회참여는 다른 종교와는 다른 형태로 발전하였다. 1970년대와 80년대에 기독교와 천주교의 경우는 교계 내에서 상징적 영향력이 있는 소수의 양심적 성직자들이 이들을 지지하고 보호하는 교회와 성당, 신도들을 보호막 삼아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영향력 행사 방식 또한 이들이 사회의 다른 양심적 저명인사들과 함께 대학생들이 모인 행사나, 정당원들이 동원된 행사에서 시국선언서를 낭독하거나, 교회와 성당에서 기도회와 미사를 통하여 입장을 발표하는 형태였다. 종교인들이 집단적으로 시위를 하는 경우는 없었다. 1974년 지학순 주교 구속을 계기로 태동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집단적 서명을 하기도 했지만, 단체로 대규모 시위에 나서는 경우는 없었다. 이런 점에서 승려들이 직접 집단적 행동에 나선 불교의 사회참여는 매우 독특한 것인데, 그것은 1980년대 승려들의 종교적 양심의 발로인 동시에 자신들이 정치권력의 피해자였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사회에서 가장 보수적인 부류에 속하는 조계종의 지도층까지 반정부 선언에 동참할 수밖에 없었던 것 역시 10 · 27법난이 일부 승려들이 피해를 당한 정도가 아니라 종단 전체가 능욕을 당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불교의 사회참여는 1980년대 말에 눈부시게 성장했다 할 수 있다. 그러나 한계 역시 있었다. 그것은 사회참여에 나선 재가자는 물론이거니와 승려들 역시 일반 신도 대중들과 결합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는 1990년대 이후 한국사회의 진보세력들이 다양한 시민운동 분야로 발전해 나갈 때 불교계는 시민운동 형태로 뿌리내리지 못하는 원인이 되었다. 

 

5. 1990~2000년대: 승단 주도 사회운동 

1990년대 한국사회는 새로운 사회적 분위기를 맞는다. 1987년 6월 항쟁과 이에 타협하기 위한 노태우의 6 · 29선언은 한국사회에서 군사독재의 종식을 의미했다. 노태우는 이 타협과 김영삼 · 김대중의 분열로 1987년에 대통령이 되었으나, 1988년 4 · 26 총선으로 여소야대가 되면서 정권은 힘을 잃었다. 노태우는 이를 돌파하는 과정에서 3당 합당을 하면서 야당의 절대적인 한 축인 김영삼을 끌어들였다. 3당 합당은 지역주의의 심화이긴 하지만, 김영삼의 민주당이 가세한 후반기 노태우 정권은 군사독재라고 할 수는 없었다. 이제 한국사회의 중심적 이슈는 정치화의 민주화일 수 없었다. 

1990년대의 불교의 사회참여는 1987년 개운사에서 인권, 노동, 공해, 통일 문제 실천 선언을 하면서 창립한 대승불교승가회에서부터 이야기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대승불교승가회의 실천 선언은 한국사회의 사회참여는 이제 군사독재정권과 싸움을 통해서가 아니라 사회가 부닥치는 여러 문제에 대한 접근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함을 인식한 데서 나온 것이다. 

이런 인식의 전환을 잘 보여주는 것이 법륜 스님이 중심이 되어 1988년에 설립한 한국불교사회교육원의 1991년 한국불교환경교육원으로 개명이다. 이 기관은 2005년에 다시 (사)에코붓다로 개명하는데, 1990년대 초반부터 한국사회에 환경문제를 제기하면서, 생명존중사상을 중심으로 한 불교의 근본 가르침을 토대로 새로운 환경윤리를 정립하고 사회화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다. 각계각층의 시민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생태학교, 생명운동 아카데미, 생태기행 등의 교육과 체험 프로그램을 성공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활동하는 가장 성공적인 불교환경 단체라고 할 수 있다. 이보다 이전인 1988년 3월 25일에 개운사에서 대승불교승가회가 창립하면서 인권, 노동, 공해, 통일 문제 등의 해결과 실천을 선언했다는 데서 이미 인식의 전환이 있었다. 

1992년 2월 29일에는 월주 스님을 중심으로 청정국토 만들기 국민운동본부의 전신인 ‘공해추방불교인모임’이 출범하였다. 1995년 3월 17일에는 박광수 교수 등이 ‘경불련의 환경모임을’ 창립하여 경주고속철도 도시관통반대 운동을 벌여 성공을 거두었다. 2001년에는 수경 스님이 중심이 된 불교환경연대가 발족했다. 조계종에서도 환경의 중요성을 인식하며 2000년 총무원장 직속으로 환경위원회를 만들었다. 

수경 스님은 새만금을 지키기 위해 문규현 신부와 함께 2003년 3월 28일부터 65일간 새만금에서 서울까지 800리(320km)를 3보1배로 올라와 환경운동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2004년 2월 5일 지율 스님은 천성산 도롱뇽을 살리고자 241일 동안 초인적 단식을 하여 생명에 대한 종교적 정신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었다. 2010년 4월 17일에는 불교시민단체와 사찰 50여 곳이 동참한 ‘4대강 생명살림 수륙대재’가 서울 조계사에서 열렸다. 승려와 불교신자 등 모두 1만여 명이 참여한 이 날 행사에서는 정부의 4대강 살리기 공사 중단을 촉구하였다. 2010년 5월 31일 문수 스님의 소신공양은 생사를 초월하는 종교인의 정신세계를 보여주었다. 문수 스님은 이명박 정권의 4대강 사업의 즉각 중지를 서원하며 자신의 육신을 산화시켰다. 

이처럼 1990년대 이후 불교환경운동은 급속한 발전을 이루어 불교계의 사회참여 운동 가운데서 가장 두드러진 분야가 되었다. 1980년대에 급속한 성장을 한 정치 분야에서도 활동은 지속되었다. 다양한 사회적 문제들에 대한 실천 선언을 하며 출범한 대승불교승가회는 1993년에 불교정토구현전국승가회와 통합하여 실천불교승가회를 결성하고, 사회참여 불교를 대표하는 승가 단체로서 인권문제, 노동문제, 외국인 노동자 문제, 평화문제 등의 영역에서 지속적으로 실천해 나갔다. 

또 1980년대 민주화운동에 참가했던 실천불교승가회를 중심으로 한 승려들은 1990년대에는 조계종의 중진들이 되면서 총무원에도 진출하였다. 그 결과 조계종 총무원은 다른 어떤 종교 기구보다 사회적 참여에 관심이 깊은 조직이 되었다. 1993년 문민정부가 들어선 이후 기독교와 천주교는 인권과 노동 문제에 대한 관심을 줄인 반면, 조계종은 종단 차원에서 관심을 기울였다. 그 결과 과거에 명동성당을 피난처로 찾던 사회적 약자들이 조계사를 피난처로 삼게 되었다. 

1990년대 한국사회의 환경, 노동, 인권 문제에 관한 불교의 사회적 참여는 다른 어떤 사회 집단보다도 두드러졌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흐름은 2010년대 초반까지 이어졌는데, 가히 불교계 사회적 참여의 황금기라 할 수 있다. 

통일운동 분야는 환경 분야와 더불어 불교계가 선도적 역할을 해온 사회참여 분야이다. 냉전 기간 동안 불가능했던 남북교류가 1988년의 7 · 7선언과 1989년 남북교류협력에 관한 법률 제정 등으로 민간 차원 교류까지 가능해지자 불교계는 어느 민간 부분보다도 통일문제에 적극적 관심을 보였다. 1988년 5월에 재야불교단체를 중심으로 민족화합 공동올림픽 추진 불교본부를 결성하여 6월, 북한 측에 남북불자 공동기원법회를 제안하는 공개서한을 채택했다. 

공동기원법회는 성사되지 않았지만 7월에 황장엽 북한사회과학원장이 하와이 기대원 스님을 북한으로 초청하여 박태호 조선불교도위원장과 함께 평양 구룡사에서 남북통일 기원법회를 함께 봉행하였다. 1988년 11월에는 한국불교종단협의회에 소속된 전체 불교 교단이 남북불교도 교류추진위원회를 결성하여 북측에 각종 공동행사를 제안하였으며, 1991년 LA 관음사에서 남북대표 공동으로 ‘조국통일 기원 불교도 합동법회’를 개최하였다. 

이렇게 남북 간의 불교 교류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자 조계종은 2000년 6월 8일 총무원장을 총재로 하는 상설기구인 민족공동체추진본부를 설치하여 북한동포 돕기 사업, 남북 공동행사 및 연대사업 참가 등을 추진하고 있다. 이 본부는 2001년 11월 신계사지 지표조사를 시작으로 신계사 복원사업을 시작하여 2006년 11월 낙성식을 봉행하였다. 2002년 12월에는 조계종과 조선불교련맹 공동으로 ‘한반도 평화와 통일 선언문’을 채택하고, 2005년 6월 광복 60돌, 6 · 15선언 5돌 기념 민족대축전 남북공동행사(평양)를 개최하는 등의 성과를 냈다. 그뿐만 아니라 북한에 생필품, 쌀 지원 등을 수시로 하고 있으며, 통일 관련 연구, 교육 사업도 정기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다른 종단에서도 한국불교중단협의회를 중심으로 지속적인 남북불교 교류 사업을 하고 있으며, 천태종은 2003년 북한의 조선불교련맹과 함께 북한에 있는 영통사 복원불사를 시작해 2005년 완공하였다.

이처럼 1990년대와 2000년대 초기에 불교는 승단과 종단을 중심으로 환경운동과 통일운동 분야에서 많은 활동을 하였으며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루었다. 이 두 분야에서는 한국사회의 어떠한 민간 부분 활동보다도 뛰어난 활동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이 배경에는 앞서도 간략하게 언급했듯이 1980년대 후반부터 젊은 학인스님들이 집단적인 민주화투쟁 과정에서 이룩한 사회적 의식의 성장과 실천 경험의 축적이 있다. 정치권력에 대한 비판적 의식이 사회의 정치적 문제와 더불어 사회의 일반적 문제에까지 확대되고, 또 긍정적 참여의식으로 바뀐 것이다. 또 이들이 성장하여 조계종의 중추 세력으로 자리 잡으면서 조계종의 거대한 역량 일부를 사회참여로 돌릴 수 있었던 것도 성장의 큰 원인이다. 

또한 불교의 가치관과 한국불교의 역사가 환경과 통일 분야에서 불교가 앞서도록 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인간에 대한 자연의 지배와 활용을 정당시하는 근대적 세계관과 기독교적 세계관과 달리 불교적 세계관은 인간과 자연을 분리하지 않는다. 불살생의 교리는 생명 일반에 대한 존중사상이다. 또 여전히 산중생활을 중시하는 한국불교는 승려들로 하여금 자연에 대한 감수성을 잃지 않게 하였다. 이러한 불교의 가치관과 한국불교의 생활환경이 일찍부터 환경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게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불교가 통일 분야에 대한 관심이 높은 것은 민족의 오랜 전통 종교로서 그 역사와 유산을 북한과 공유하기 때문이다. 남한의 불교인들은 정치체제와 이념에 상관없이 북한의 불교 유산을 지켜야 한다는 의식을 공유하고 있다. 이 때문에 남한 불교인들은 불교계 내부의 이념적 지형에 상관없이 남북불교 교류를 지지한다. 북한은 사회주의 체제로서 종교를 부정하지만, 유신론이 아닌 불교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관대하다. 이런 상황 때문에 북한 또한 남한 불교인들의 도움을 받아 북한의 문화유산인 사찰을 유지 보수하기를 원한다. 이러한 남한 불교인들의 정서와 북한의 입장이 결합되어 불교인의 통일운동 사업이 활기를 띠게 된 것이다. 

2000년대 들어 불교계는 국제적 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2003년 조계종 총무원장을 지낸 송월주 스님이 창립한 국제개발협력 NGO 지구촌공생회의 활동이 대표적이다. 지구촌공생회는 세계 각지 저개발국가들의 교육 및 생활환경 개선 사업을 지원하고 있다. 2017년 예산이 35억 원을 상회할 정도의 규모이다. 2004년 설립된 로터스월드 역시 지구촌공생회와 비슷한 형태의 사업을 비슷한 규모의 재정 규모로 하고 있다. 2008년 설립된 더프라미스도 규모는 작으나 비슷한 형태의 국제개발구호 단체이다. 

 

6. 2010년대~현재: 관습적 사회 참여

2008년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이래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당한 2018년 3월까지 보수정권 기간 동안, 한국사회는 여러 면에서 퇴행을 겪었다. 과거 군사독재정권 기간과 같은 인권 탄압과 폭압 정치가 행해지지는 않았으나 환경, 사회적 공정성, 통일 문제 등에서 퇴행이 일어났다. 특히 이명박 정부의 4대강 사업은 환경적 재앙을 초래했으며, 2008년 7월 이명박 정부 때의 금강산 사업 중단과 2016년 2월 10일 박근혜 정부의 개성공단 폐쇄는 김대중 정부 이후 꾸준히 진척시켜 온 남북관계를 황폐화시켰다. 

이런 퇴행에도 불구하고 박근혜 정부가 촛불혁명에 의해 붕괴하기 직전까지 이에 대한 조직적 비판은 미약하였다.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를 거치면서 사회적 문제들이 제도권 내에서 소화되는 체제로 변한 까닭에 재야에서 문제 제기를 할 세력 자체가 매우 약화되었기 때문이다. 과거 민주화투쟁을 하던 지식인과 시민운동 실천가들은 정치권으로 진출하였고, 양심적 종교인의 경우에도 기독교와 천주교는 이미 매우 보수화되었다. 승려들이 사회적 참여의 주축이 된 불교계는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 시기의 퇴행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할 수 있는 가장 큰 세력으로 남아 있었으며, 또 환경문제와 통일문제는 불교계가 선도적으로 해결 방향을 제시해 온 영역이었다. 하지만 불교계 역시 이 시기에 그다지 적극적인 대응을 하지 못했다. 여기에 대해서는 여러 분석이 가능할 것이며 구체적인 연구가 필요한 바이지만 두 가지 요인을 추측해 볼 수 있다. 

첫째는 그간 조계종단이 주체가 되어 통일문제에 대응해 왔다는 사실이다. 1990년대 이후 종단의 통일문제에 대한 대응은 80년대 재야 운동권 세력의 통일에 반대되는 세력에 대한 투쟁의 형태가 아니라 정부와 보조를 맞춘 북한과의 교류 사업이었다. 그런 만큼 정부 정책과 함께할 수밖에 없었다. 둘째는 1990년대 이후의 불교계 환경운동이 상당한 사회적 영향력을 지녔지만, 냉정히 따져보면 그 영향력은 수경과 지율 두 스님의 개인적인 종교적 결단에 의한 극한적 실천에 의한 것이었을 뿐, 단체를 통해 체계적으로 조직화된 힘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두 스님이 자의와 타의에 의해 고립하게 되면서 환경문제에 대한 불교계의 대응력은 급격히 쇠퇴하게 되었다. 

 

7. 총평

1,700년 전통의 한국불교는 엄청난 사회적 잠재력이 있으며, 그러한 잠재력은 순수한 종교 행위뿐 아니라 사회적 참여를 통해서도 한국사회에 많은 기여를 할 수가 있다. 그러나 해방 이후 1980년대 중반까지 한국불교는 자기 자신의 문제에 골몰해 있었으며 주체적으로 사회문제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했다. 천주교와 기독교의 활발한 사회적 참여를 보면서 많은 불교인은 그 원인이 산중불교라고 일컬어지는 선불교의 폐해에서 비롯된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승려들을 중심으로 한 한국불교의 활발한 사회참여는, 그간 한국불교의 은둔이 교리적 문제가 아니었음을 증명해 보였다. 사회문제에 무관심할 때나 적극적으로 참여할 때나 한국불교의 중심인 조계종은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 전법도생(傳法度生)을 종지로 하는 선종이었다. 

해방 후 1980년대 중반까지 한국불교가 사회 문제에 적극적인 참여를 하지 못한 것은 교리적 문제 때문이 아니라, 600년에 걸친 조선시대의 억불정책이 빚어낸 질곡으로 인한 것이었다. 그러한 질곡에도 불구하고 한국불교는 3 · 1운동 과정에서 한용운이라는 인물의 영웅적 실천을 통해서 민족불교의 자존심을 지키고 사회참여의 씨를 뿌리기는 했으나, 척박한 환경과 주체적 역량의 부족으로 인하여 뿌리 내리지는 못했다. 또한 해방 후 비구승과 대처승 간 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국불교는 자신의 종교적 정체성 확립이 시급한 과제로 되면서 사회참여의 여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1980년대 중반부터 90년대 후반에 이르는 시기에 한국불교는 자신의 역량을 사회참여에도 적극 발휘했다. 정화운동 이후의 정체성 확립 노력이 결실을 거두어 한편으로는 과도한 물질문명으로 황폐해져 가는 한국사회의 정신적 지주로서 사회적 인정을 받았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다수의 승려가 현대적 교육을 받으면서 사회의 진보적 사상을 흡수하여 사회참여 세력의 한 주체가 되었다. 더 나아가 1990년대 이후 환경과 통일이 한국사회의 주요한 사회적 의제로 등장하면서 한국불교는 자연친화적인 사상적 토대와 남북이 공유하는 민족문화의 정체성을 형성해 온 역사적 토대를 통해 사회참여를 선도하는 세력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하지만 1980년대 후반부터 급속히 성장한 한국불교의 사회적 참여 역량은 현재 그 성장이 정체되어 있다. 정치적 비판에서 통일문제, 환경문제, 국제활동(저개발국에서의 주민 교육과 생활환경 개선)으로의 방향 전환은 시대적 환경과 불교의 가치관 및 역사적 전통과도 잘 조응하는 것이었지만,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조직적이고 전문화된 실천 역량에서는 아직 미약한 상태에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어떤 측면에서는 종단 중심의 활동이 가지는 실천적 경직성의 문제를 내포하고 있고, 또 어떤 측면에서는 소수 승려 중심의 상징적 실천에서 벗어나서 실질적이고 보편적인 실천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경직성과 상징성을 넘어서서 유연한 실천성을 갖춘 사회적 실천을 위해서는 다수 승려의 참여는 물론이고, 신도 일반이 체계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조직과 프로그램들이 만들어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불교의 포교방식, 신도교육, 신행활동, 신도조직의 형태 등 근원적인 토대에서부터 변화들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

 

김종인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서울대학교 철학과 석사, 스토니부룩대학교 비교문학과 박사. 저서로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 만해 한용운 ‘님의 침묵’ 평설》 《한국의 대학과 지식인은 왜 몰락하는가》 Philosophical Contexts for Wonhyo’s Interpretation of Buddhism 등이 있다. 현재 국제재가불교포럼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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