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눈이 녹아 흘러내린 물 을 먹고 풀들이 자란다. 풀을 먹 고 소들이 자라고 소의 젖을 먹 고 사람의 아이들이 자란다. 지 리산 자락 산청은 소를 먹이며 어린 시절을 보낸 내가 태어나 고 자란 곳이다. 맨 처음 어머니 에게 글자를 배우고, 서울에서 공부하던 삼촌 서랍에서 소월의 〈초혼〉을 뭔지 모르고 읽고 외 운 곳이다.

첫 경험이란 그렇듯 외우려 하 지 않아도 머릿속에 각인되어 버 린다. 중국에 사신으로 갔던 문 익점이 붓두껍 속에 무명씨 세 알을 숨겨와서 처음 이 땅에 심 었던 밭이 거기 있다. 그 자리에 시비 제막식을 하던 날, 나보다 더 어린 동생과 함께 산을 넘고 경호강을 건너 제막식에 갔었다. 우리가 넘어간 산의 끝자락쯤에 단아한 초가 한 채가 대숲의 바 람을 주저앉히고 있는 것을 보았 는데, 지금까지도 흑백사진처럼 뇌리에 박혀 있다.

나중에 알게 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말씀으로 널리 알려진 성철 스님의 생가다. 울 며 따라오는 어머니에게 돌을 던 지고 면벽수행한 고승의 어린 시 절이 그곳에 있었다.

인과응보! 내가 이 넉 자의 성 어를 만났을 때는 열여덟 살 무 렵이었지 싶다. 불교적 사유와의 첫 만남이었고 인생관의 주춧돌 이 놓이는 하나의 사건이었다. 누구나 다 아는 말이었지만, 그 분명하고 믿음직한 원리는 나에게 인생이라는 건축물을 설계하 는 든든한 벽돌 한 장이 되어 주 었다. 전생이나 후생, 그렇게 멀 리 갈 것도 없이 ‘오늘은 어제의 결과이면서 내일의 원인이다’ ‘그 렇다면?’이라고 하는 작은 깨달 음이 혼란스러운 십 대 소녀를 철들게 했다. 나는 이 벽돌이 단 번에 미더웠다.

긍정으로든 부정 으로든 인생관이 정립되는 과도 기에 있던 나는 오늘이 어제의 결과라는 쪽보다 내일의 원인이 라는 쪽에 더 매력을 느꼈던 것 같다.

지금이라는  자리에서 어제는 손댈 수 없는 영역이지만 오늘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내일이 달 라지는 것이었으니. 그리고 열여 덟 살에게는 어제보다 내일이 훨 씬 더 많이 남아 있었다. 그런 원 리라면 한번 해볼 만하다는 생 각이 들었다.

상황은 열악했으나 이 한 장의 벽돌은 삶에 대한 긍 정의 기초가 되기에 충분한 것이 었다. 그리고 모든 성공과 실패, 원인과 결과의 설계자이며 시공 자로서 나를 지목하게끔 되었다. 내가 만난 불교는 ‘악한 일을 하면 나쁜 과보를 받는다’보다는 ‘선한 일을 하면 선한 과보를 받 는다’에 집중하는 행복학이었다. 지금이 불행하다면 반드시 불행 의 원인을 참구함으로써 해결의 실마리를 찾게 한다.

여러 경전 이 이미 선한 인격을 완성한 자 의 깨달음과 그들이 걸어간 길 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착한 일을 하더라도 어떤 마음 가짐으로 어떻게 해야 완전한 행 복에 도달하는지를 낱낱이 예를 들어가며 설명하는 이야기들이 다. 또한 과거에 그러한 완성된 인격에 도달한 선인들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고, 그 착한 일로 인한 이득이 또한 말도 생 각도 할 수 없는 만큼이라는 이야기다.

그러나 어린 날 개울의 투망질 처럼 종일 허탕만 치고 해가 저 무는 것이었다. 선인들께서 알아 듣지 못할까 봐 그토록 친절하게 짚어주고 또 짚어놓으셨는데도 불구하고, 내 그물에 잡히는 고 기가 없었다. 꼭 어느 대목에서 흘리고 온 것 같아 지나온 사막 을 다시 되짚어 밟아가 보고, 다 시 되짚어 밟아가 볼 뿐, 얻기보 다는 잃는 이득이 커졌다.

나는 조금씩 잃어갔다. 아주 더디게라도 집착이 느슨해지고 원망이나 한탄이나 슬픔이 빠져 나갔다. 그것들이 빠져나간 구멍 으로 천지 만물이 들어왔다.

커다란 괴물같이 보였던 세상 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빈 틈없이 준비된 도움의 메커니즘 이다. 씨앗을 땅에 묻고 온 날 밤에는 봄비가 와서 땅을 적셨 다. 벽돌을 만들려고 하면 모래 가 와서 도왔고, 못을 잡으면 망 치가 와서 도왔다. 배우려고 하 면 여러 스승께서 도왔다.

하루 종일 투망질을 해도 고기 를 한 마리도 못 잡고 돌아온 날 밤하늘에는 얼마나 많은 별이

찾아와 문전성시를 이루던가? 경전의 바다에서 바닥에 발이 닿지 않아 허우적대다가 빈손으 로 돌아오는 나는 그러나 그 허 탕질이 나의 천지 만물과의 연애 (시 쓰기)를 지극히 추동하는 것 이며, 시의 우물을 더 깊이 맑혀 주고 있음을 믿는다. 나는 바다 를 한 스푼도 담아 올릴 수 없지 만 바다는 빈틈없이 나를 둘러 싸고 있다.

지금도 세상이나 인간관계에 서 마음이 불편해질 때면, 다시 벽돌 한 장으로 돌아간다. 지금 의 사태가 있기까지에는 반드시 원인이 된 내가 있었다는 점을 인정하기 위해서다. 그러면 마음 이 안정되고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가 분명해지고 그것을 이루어낼 방법을 찾아낼 수 있 게 된다.

나는 세상을 돌고 돌아서 나그네가 되어 다시 산청에 왔다. 다 시 너무 깊은 물을 무서워하는 아이가 되어.

시인. 제5회 유심작품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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