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에 절밥을 축낸 죄업이 있었던지, 젊은 날 유서 깊은 백담 사와 낙산사의 대규모 중창 불사 에 발을 담근 적이 있다. 설악무산 스님과 연을 맺은 이후, 스님 의 표현대로 하면 ‘만해 장사’의 심부름꾼으로 백담사 중창에 동 참했고, 낙산사가 산불로 전소되 다시피 했을 때는 박사 논문을 멈추고 낙산사 중창의 심부름꾼 으로 종사했다. 공식적인 직책은 중창 불사를 널리 알리는 소식지의 주간이었지만, 비공식적으로 는 불사를 진두지휘하는 스님의 비서실장쯤 되었다.

첫 인연이 맺어졌을 때만 해 도 속명이자 필명인 ‘오현’을 법명 으로 쓰셨던 고(故) 무산 스님께 서는 일반인에게는 무명에 가까 운 분이셨다.

많은 사람은 당시 에도 무산 스님이 지금처럼 유명 한 스님이었을 것이라 여기고 백 담사의 중창 불사가 쉽게 이루어 졌으리라 짐작하지만, 실상은 그 렇지 않다. ‘만해 장사’라는 표현 속에는, 온갖 어려움을 감내하면 서 불사를 밀고 나갔던 무산 스 님의 자조와 탄식이 배어 있다.

스님은 이따금 깊은 밤중에 나 를 불러 앉혀놓고는 탄식하셨다. “니는 천하의 대찰인 건봉사를 누가 지었는지 아나? 모르제? 그 런기다. 백날 집 지어 봐라. 훗날 사람들은 집 지은 사람을 아무 도 기억하지 못한다. 옛날 큰스 님 중에는 해우소 하나 짓지 않 은 분들이 많다. 중은 그리 살아야 되는데 나는 어쩌다 설악산 에 와서 쫄딱 망한기라.”

만해기념관, 만해교육관, 만해마을, 무금선원 등 백년 불사에 버금가 는 대규모 중창 불사는 이러한 스님의 자조와 탄식을 머금고 이 루어졌다.

나는 스님을 처음 뵈었을 때 기초적인 예법조차 잘 몰랐던 청맹과니였다. 하지만 김시습, 보 우대사, 만해의 발자취가 이어진 내설악 골짜기의 숨결이 마냥 좋 았다. 무산 스님의 자조와 탄식 도 해가 지날수록 내설악 골짜기 의 숨결이 되어갔다.

낙산사는 중창이라기보다는 재건 불사에 가까웠다. 그야말로 ‘눈물의 불사’였다. 나는 당시 재 건을 지휘한 주지 스님을 모시면 서 눈물을 머금은 호소문을 많 이도 썼다. 무산 스님께서 낙산 사에 머무실 때 지은 보타전과 보타락, 그리고 홍련암을 빼고는 온전하게 남은 건물이 없었기 때 문이다. 종마저 녹아내렸으니 화마의 기세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백담사에서 무산 스님의 심부름을 하던 시절 낙산사에도 내가 머무르던 작은 방 이 하나 있었는데, 이 방이 있던 건물마저 타버렸다. 이 화마 속 에서도 보타전과 보타락이 온전 하게 살아남은 것은 신기한 일이 었다. 무산 스님은 훗날 “내가 기 운이 세서 화마도 비껴간기라.”라 고 말씀하셨다. 물론 눈물의 불 사가 원만히 이루어진 뒤 다시는 화마가 없기를 바라면서 하신 말씀이었다.

무산 스님께서는 백담사와 낙산사의 중창 불사를 이끌면서 자주 자조와 탄식을 내뱉으셨지 만, 이 대작 불사들이 집안 어른 으로서 자신의 책임이자 운명이 라는 것을 깊이 인식하고 계셨 다. 스님은 비록 자신은 자조와 탄식 속에 불사들을 이어가지만, 자신이 이끈 중창 불사들이 빛 이 나려면 이 도량들 속에 사는 스님들이 빛이 나야 한다고 말씀 하셨다.

아무리 초라한 집도 거기에 사는 사람이 빛이 나면 위 대한 집이 되고, 훗날 사람들도 자연스럽게 찾아든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스님이 안고 가셨던 설악문중이 살아나려면 절에 머 무는 스님들의 눈이 밝고 빛나 야 한다고 누누이 강조하셨다. 스님이 개원하신 백담사 무금선 원과 기본선원, 그리고 신흥사 향성선원에는 이러한 스님의 간 절한 발원이 배어 있다.

무산 스님은 자신의 몸이 쇠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셨을 때, 손수 지은 무금선원으로 들어가 수행자로서의 옷매무시를 가다 듬으셨다. 스님이 무금선원으로 들어가 폐문 정진하신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예전에 들은 한 할머니의 일화가 떠올랐다. 연로하셨던 그 할머니는 몸이 아 파 올 때면 곡기를 끊고 이불 속 으로 들어가 오래도록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자식들이 돌아가 셨나 하고 이불을 들춰볼 때쯤 되면 다시 원기를 회복하고는 언 제 아팠냐는 듯이 다시 활동을 시작한다는 얘기였다. 스님의 폐 문 정진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스님께서 그 할머니처럼 스스로 를 치유하면서, 수행자로서 마지 막 자문자답의 법거량에 드셨다 는 느낌을 받았다. 스님께서 입적 하신 뒤, 나는 당시 나의 느낌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

사실, 무금선원에서 가장 먼저 잠을 자본 사람은 나였다. 무산 스님께서는 무금선원 공사가 거 의 마무리에 접어들던 어느 날, 나를 선원으로 부르시더니 말씀 을 툭 던지셨다. “오늘은 여기서 하룻밤 자 봐라. 니는 중이 아니 니까 선원에서 언제 자보겠노.” 그러고는 백담사 도량으로 휙 내려가셨다. 맑은 햇빛이 쏟아지던 마루에 누워 저녁을 기다리던 시간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이런 기억들을 떠올리면, 눈밝은 스님들이 나오기를 발원하 며 자신의 책임과 운명을 다하 신 무산 스님이 다시금 그리워 진다.

 

시인. 제10회 유심작품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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