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쪽으로 창이 하나 있다. 거 실 옆에 싱크대가 자리 잡고 그 싱크대 바로 위에 크지도 작지도 않은 창 하나가 있다. 나는 그 창을 내려다보며 그릇을 씻고 채 소를 다듬고 도마질을 한다. 시 선은 늘 창밖으로 향해 있다. 시 선이 창밖으로 나가 있어 손으로 하는 일이 가끔 실패를 볼 때도 있다. 그러나 상관없다.

그래도 나는 창을 본다. 설거 지를 끝내고도 나는 창 앞에 서 있다. 커피를 한 잔 들고 천천히 마시면서 나무들과 인사도 하고 아 봄이구나 계절의 변화도 여기 서 만난다. 핸드폰을 받는 곳도 여기다. 친구들의 전화 끝에 나 는 하늘빛이며 나무들의 빛깔이 며 꽃이 피어 가는 과정을 말한 다. 내 작은 집에서 바라보는 저 크고 넓은 자연의 변화를 바라보 는 일만도 나는 마음이 설렌다.

음악도 이곳에서 서서 듣는 다. 다리가 아프지만 의자를 갖 다 놓고 앉으면 밖이 잘 안 보여 다리 아픈 것을 선택한다. 거실 을 왔다 갔다 하면서 혼자 어느 날은 춤도 추고 연극하는 것처럼 혼자 대사도 외워보고 시도 낭 송해 보고, 정 다리 아프면 식탁 에라도 앉았다 일어서면 되는 일 이다. 나만이 누리는 공연이다. 배우도 관객도 하나다.

외출에서 돌아오면 마치 밥이 라도 주어야 하는 강아지를 보 는 것같이 그 창 앞에 서 밖을 보고 그리고 옷을 갈아입는다. 내 발의 감각은 이미 그것을 잘 알고 있다. 늘 생각 없이 창 앞 에 서 있는 나를 본다. 꽃이 피 리라. 아마도 나는 다시 오래 이 창 앞에 흰 궁궐을 오래 보아 왔 거니 그러고 그 꽃이 무너지며 떨어지는 아픔을 고스란히 지켜 봐야 하는 호통을 치러 내었지 만, 나는 지금 도톰했던 꽃 몽우 리가 터질 듯 피었다 떨어지는 장미를 초경의 설레임으로 바라 보고 있다.

지금은 하얀 신부 드레스처럼 우아한 수국의 나라다. 작은 나 무에 헬 수 없이 솟아 흰색의 극 치를 보여주는 수국을 늘 연애 하는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다

나는 너무 상념에 빠질 듯하면 저 창밖의 나무, 구름, 꽃, 바람, 자동차, 지나가는 사람, 하늘 들 에게 내 나름의 이름을 불러 본 다. 나와 함께 있는 것들은 자꾸 변한다. 나는 자주 이름을 지어 야 하고 잊어버리는 자연들도 생 긴다.

그러나 나는 이 작은 창을 통 해 무궁무진하게 큰 세계를 볼 수 있다. 어김없이 계절은 내게 알린다. 봄에서 여름, 여름에서 가을 그리고 겨울. 한 나무가 계 절마다 얼마나 엄청난 의무와 책 임을 치러 내는지 바라보면 경건 해진다. 이 세상에 하나의 이름 을 가지고 존재한다는 것은 모두 힘겨운 견딤을 치러 내야 한다.

지나가는 바람에게서 흐르는 구름에게서, 가만히 있는 것 같지 만 무한정으로 바쁘게 자기 일에 매진하는 하늘이며 그 중간을 나 는 새 떼들을 보면서, 아 나는 무 상으로 너무나 큰 선물을 받으며 살고 있음에 눈을 감는다.

이만하면 아름답다. 그런데 힘 들어! 죽고 싶어! 나는 못 살아!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하 고 외치는 순간순간만 있었다 면 나는 한쪽 눈을 감은 것이리 라. 뒤를 돌아보면 그것이 기쁨 이건 슬픔이건 간에 더불어 왔 다는 생각을 한다. 기쁨이 그 뒤 로 슬픔이 ……슬픔이 그 뒤로 기쁨이…… 그렇게 균형 있게 너 울처럼 왔다고 생각한다. 뿌리에 서 나무, 나무에서 가지 잎새와 꽃, 그 위에 열매, 그 위에 앉는 새들, 그 위에 햇살 그 모든 것 은 우리가 짐작할 수 없는 기쁨 을 가져왔다. 몸무게는 55 키도 55인 여자가 있다 하자. 몸 하나 는 그런 무게밖에 안 되지만 그 몸이 일구어내는 무한 상상력은 또 하나의 제국을 이루어 낼 만 큼 힘이 센 것이다.

무의식은 상상의 나라다. 그 넓이는 신도 잴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을 내 명의로 하고 싶은 사 람은 자신의 정신 상상력을 키 워라. 그러면 그 큰 땅 큰 세계 가 자기 명의로 빛날 수 있을 것 이다. 아니다. 그 밖의 모든 것도 그대의 것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가장 큰 자산은 상상력의 기둥 이다. 무한 창조력의 원동력 그 것이 상상력이니까. 상상력은 어 려운 일이 아니다. 삶을 탐구하 고 자연을 바라보며 내 것으로 만들어 보면, 그만큼 생은 넓어 지는 것이다.

날아라. 나는 법으 로 순전히 자신을 찾아야 한다.

자신을 찾으면 내가 보인다. 날 아라, 결코 이 세상에는 못 오를 나무는 없을 것이니. 30평, 40평 이라고 부르는 규격의 방이 아니 라, 저 하늘에 펼쳐진 개척의 땅 을 개간하여 나의 것으로 활용 하는 이상, 꿈, 사랑, 그것이 바로 상상력의 출발일지 모른다.

그래도 공허한가? 그렇다면 나 는 나에게 말한다. 창을 닫고 외 부 세계를 단절하고 눈을 감는 다. 그리고 한 걸음 한 걸음 내려가라. 낮은 곳으로 더 낮은 곳으 로…… 저기 저 창밖의 무한 세 계보다 더 광활한 무한 세계가 저 바닥 아래 펼쳐지는 것을 보 아라. 거기 어쩌면 제대로 바라 보진 못한 나 자신이 희미하게 보일지 모른다.

이제 조금은 알겠다. 일생은 순간으로 지나간다. 그러나 지금 이 한 순간은 우주적이라는 것을.

시인. 제12회 유심작품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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