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를 타고 제민천 길을 따 라가고 있었다. 내가 사는 금학 동 아파트에서 시내 쪽으로 가려 면 이 길밖에는 다른 길이 없다. 이른바 외통수 길인데 이 길은 금강으로 흘러가는 제민천을 따 라서 나 있어 비스듬히 아래로 기울은 길이다. 그래서 자전거를 타고 시내 쪽으로 가려면 가볍게 페달을 밟기만 해도 자전거가 굴 러간다. 저절로 기분이 가벼워지 고 상쾌해진다.

그런데 요즘 며칠 나는 심히 앓았다. 아니 혼돈된 삶을 살았다.

내내 잘하던 문학 강연을 잘 하지 못하고 있었다. 다리가 풀 려 제대로 서 있을 수 없고 입속 에서 말이 잘 나오지 않는다. 무 슨 말인가를 하기는 해야 하는데 다음 말이 잘 떠올라주지 않 는다. 이것은 전에 없던 일. 당황 스럽다. 머릿속이 하얘진다는 말 을 들은 일이 있는데 바로 그 증 상이 나에게 일어난 것이다.

무엇보다도 자신감 상실이 문 제다. 청중을 바라보기조차 버 겁다. 내가 왜 이러나 싶어 자신 을 추스르려면 더욱 자신이 없 어지고 그만 자리를 피하고 싶어 진다.

몇 차례의 강연 실패 끝에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정신신 경과 의사를 찾아갔더니 가벼운 우울증에다가 번 아웃 증상이라 는 진단이다. 당분간 약을 먹기 로 했다. 하강한 바이오리듬이 상승하지 않아서 그렇다고 하면 서 시간이 필요하단다. 충분한 휴식이 필요하단다. 어찌하면 좋을까?

이미 강연 일정은 12월까지 꽉 찬 상태. 그걸 모두 취소해야 하 나? 그동안은 1년에 200회 넘게 하던 강연이다. 어디든 오라면 마다하지 않고 찾아가던 강연이 다. 특히 중등학교 학생들을 만 나는 일이 좋았다. 아이들을 만 나면 이쪽에서 먼저 마음이 맑 아지고, 하고 싶은 말들이 술술 떠올라 주지 않았던가. 그러면 아이들은 또 얼마나 생기발랄 하게 나의 말을 받아주었던가. 그것은 마치 두 개의 바다가 마 주 파도치면서 일렁이는 것과 같았다.

그런데 이제는 아니다. 아이들과 하는 강연도 부담스럽고 겁이 난다. 내가 과연 저 아이들에 게 무슨 말을 들려줄 것인가? 나 의 말이 무슨 유익이 된단 말인가? 스스로 자괴감마저 없지 않 다. 하기는 내가 그동안 너무 많은 말을 한 것이 잘못이다. 같은 내용의 말을 이곳저곳 다니면서 반복적으로 지껄였다. 그래서 마음속 곳간이 텅텅 빈 것이다. 무슨 일이든 과하면 부족함만 못하다는 말은 공자님 말씀인데 아무래도 내가 그동안 말하기를 과하게 했지 싶다.

용불용설(用不用說)이란 게 있 는데 아무래도 그 말은 믿을 말 이 아니다. 무엇이든 총량이란 것이 있어서 총량에서 바닥이 나 면 문제가 생기게 마련이다. 옛 어른들 말씀에 사람이 너무 많 이 울면 눈물샘이 말라 더 이상 눈물이 안 나온다는 말도 있는 데, 그 말 또한 생명의 총량과 관 계가 있어 보인다. 여하튼 나는 그동안 너무 많은 말을 했다. 줄 여야 산다. 줄이는 길만이 유일 한 해결책이다. 생각을 가다듬으 며 계속해서 자전거 페달을 밟는 데 어둡고 답답하던 가슴이 조 금씩 밝아지는 것 같다.

제민천 물소리가 조금씩 귀에 들려온다. 더러 큰비가 내리면 왁살스럽게 소리를 내면서 흐르기도 하지만 평소 때는 조곤조 곤 이야기하듯 흐르는 제민천 물 소리다. 나의 자전거가 제민천 길을 따라 굴러가고 제민천 물소 리를 따라 굴러간다 싶었는데, 오히려 제민천 물소리가 나를 따 라 흘러가는 게 아닌가 싶다. 마 음이 더욱 가라앉는다. 편안하 다. 모든 것을 완전히 내려놓지 는 못하겠지만 조금씩 내려놓고 서둘러 빠르게만 가던 길을 천천 히 가리라. 그렇다. 멀리, 오래 가려면 천천히 가야 한다.

말로는 그렇게 하면서 내가 그 말을 실천하지 못한 것이 잘못이다. 어제, 그러 니까 일요일, 경북 문경의 점촌 도서관에서 강연을 할 때 내가 하도 긴장하고 허덕대고 그러니 까 청중 가운데 한 사람, 내 또래 의 한 남자가 질의응답 시간에 손을 들고 일어나 말하지 않았 던가. 시인 자신은 ‘너무 잘하려 고 애쓰지 말라’고 시를 썼으면 서 강연하는 걸 보니 너무 잘하 려고 애쓰는 것 같은데, 그러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하긴 그날은 내가 너무나 자신 이 없어 전날 강연 원고를 작성 하여 가지고 가서 그것을 읽었기 에 그런 충고가 나오는 것도 당 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멈추어야 산다. 줄여야 산다. 글이든 말이 든 줄이고 줄여야 하는데 그게 잘 안되니 걱정이다. 하지만 여 기서 노력은 해보아야 한다. 생 각이 그쯤에 이르자 마음이 더 욱 가벼워지고 밝아진다.

지금은 장마철이지만 모처럼 맑고 푸른 하늘이 머리 위에 있 다. 밝은 햇빛이 나를 감싼다. 좋 다. 오늘은 내가 이 밝은 햇빛의 강물 속으로 들어가 보는 거다. 그럴 때 나의 자전거는 한 척의 배가 되기도 하고 비행기가 되기 도 하리라. 오늘은 2023년 7월 10일.

 

시인. 제15회 유심작품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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